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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3. 12. 27) 2강자유게시판에스겔

광주 강의(2013. 12. 27) 2강

이름 : 서경수(IP:121.146.32.172)

광주 강의(2013. 12. 27) 49-2

교재(교회를 넘어서) 254페이지 세 번째 줄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어요. “제사장들이 분주하게 제사를 드리고 레위인들이 범죄해서 망해버린 성전을(겔44:10) 왕이 대표해서 다시 재건하는 것도 모두 온전히 죽어 없어져야 될 속된 목숨들을 처리하는 시설들이다.”

왕이 대표해서 재건하기 때문에, 여기 그 당시 제사장은 백성들의 대표입니다. 제사장의 제사가 소용없다는 말은 모든 백성들이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왕이 친히 성전을 만들고, 왕이 친히 동쪽 문으로 들어오고, 왕이 친히 제사장이 못했던 제사직을 다 하는데, 그렇게 될 때 관심사는 그 왕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재림’이란 말은, 반드시 오시는 분, 인간들이 아무리 말려도 오시는 분, 죽어도 다시 오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인간이 죽였다는 것을 전제로 재림하시는 겁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또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을 불심판하기 위해 오시는데, 그렇게 해도 우리들은 불평할 수 없는 그런 식으로 오십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모든 기준과 가치는 예수님께만 쏠리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모든 기준과 가치는 전혀 소용없는 것입니다.

254페이지 밑에서 넷째 줄에, “동쪽 문이 하나님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어 언제나 닫혀 있는 문이라면, 다른 문들은 언제나 열려 있는 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문들을 이용한다. 단 새 언약 관계에 있지 않는 이방인들은 성소에 들어올 수 없다.” 이게 에스겔 44장 9절에 있습니다.

그런데 255페이지 위에서 네 번째 줄에 보면 “오직 새로운 다윗 왕에 의해 언약이 맺어진 돌아온 백성들은 이 문들만을 사용해야 한다.” 여기서 ‘이 문’은 북쪽 문과 남쪽 문을 말합니다. 동쪽 문은 평소에 닫혀 있는데, 그 문으로 들어오시는 분이 왕입니다. 왜냐? 늘 닫혀 있으니까.

왕이 와서 무엇을 바라보는가? 문이 없는 서쪽에 있는 제사장들의 일을 완수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255페이지에 중간에 보면, “왔던 방향의 문으로 도로 나갈 수는 없다. 곧바로 직진해야 한다.”고 되어 있지요. 북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북문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인데,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이것 때문에 새 성전에는 문이 세 방향으로 설치된 것이다. 그런데 왜 반대편의 문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가? 그것은 유일하게 동쪽 문 앞에서 제사 드릴 자격이 있는 왕이 행사하는 제사에 의미를 실어주기 위함이다.”

제가 쓴 글인데, 참 불친절하게 문장을 구성했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제 친절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이 방향은 ‘주의 이름’이 아니고 ‘인간 이름’만 통행이 용납되도록 문을 뚫어 놓았어요. 새 성전은 없어요. 없는데 왕 때문에 새 성전을 만들어요.

성전 만들 때 문을 만들었는데 이 문 하나하나가 인간들 통행에 편리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고, 왕의 나라가 이렇게 세워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문이 있어요. 그러면 이 문으로 들어올 때부터 어떤 취지가 있어야 해요. ‘주의 이름은 우리 인간의 이름과 달리 어떤 식으로 움직이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관람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직접 나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선 방향과 직각 방향으로 움직이는 분이 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움직여야 됩니까, 가만히 있어야 됩니까? 움직여야 되는 거예요. 제가 ‘막 살아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는 더 심하게 말했어요. ‘성도는 죄를 지어야 한다.’고 했지요. 이걸 달리 표현하면 ‘막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 안 짓고, 막 살지 않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한다든지 성경공부 해면서 조용히 살려고 해요. 마치 새색시가 시집와서 모든 행동을 조심하는 것처럼.

그러면 안 돼요. 예전보다 더 설쳐야 해요. 왜냐?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채용된 직원인데, 설쳐서 이 사실이 확인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막 살아도 되고, 죄 지어도 되는 이유가 이미 구원 받았기에 우리가 할 일은 나의 본성이 어떤 속성을 품고 있었던가를 발현해야 합니다.

야곱이 선한 일을 해서 구원 받았습니까? 에서는 나쁜 짓을 해서 저주 받았습니까? 창세기만 보면, 야곱이 복을 따내서 구원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9장에 보면 이들의 구원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되었어요. 그러니까 이들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이지요.

이 말은, 악을 행해야만 지옥가고 선을 행해야만 천국 간다는 이런 생각이 나기도 전에, 창세전에 야곱은 사랑받기로 되어 있고, 에서는 미움 받기로 작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랑받기로 작정되었다는 말씀은 수용할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미움 받기로 작정되었다는 것은 잘 용납할 수가 없어요. 우리 이성의 범주를 넘어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왜 이런 말을 했는가? ‘안 믿어지면 믿지 마라.’ 이런 의미입니다. 보통 배짱이 아니지요. 이것은 납득을 시키거나 이해시킬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구원 받자고 해도 안 됩니까?” 이것에 대한 성경적 답변은 “미움 받기로 작정된 자는 아무리 선을 행해도 구원 안 시켜 줍니다.”

이런 답변을 듣고 사람들은 존경받은 한경직 목사나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을 찾아가서 또 질문을 합니다. “로마서 이 대목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할 겁니다. “성경에서 구원 받기로 작정되었다는 말은 적극적으로 사용되지만 저주 받기로 작정되었다는 말은 소극적으로 사용됩니다.” 이 말의 뉘앙스는 적극적인 말씀은 믿고 소극적인 말씀은 안 믿어도 상관없다는 식이지요. 그러면 지옥가기로 작정되었다는 말씀이 적극적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 책임은 누가 지는데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왔던 방향의 문으로 도로 나갈 수는 없다. 곧바로 직전해야 한다. 맞은 편 문으로만 나갈 수 있다. 이것 때문에 새 성전에는 문이 세 방향으로 설치된 것이다(동쪽 문과 대립시킬 수 있는 서쪽 문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하면 사람들이 알레고리라고 욕을 하는데, 방향을 보세요. 왕이 서쪽으로 가는 이 방향에 대해서 우리가 합류할 수 있습니까? 합류할 수 없어요. 따라서 12제자가 자기 구원을 위해 한 일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것 보여주기 위해 12제자를 세운 거예요. ‘아버지가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제대로 이해했다면 다 삐쳐야 됩니다. 재산 다 바치고 청춘 다 바쳤는데 이게 뭐냔 말이지요.

‘아버지가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은, 내가 이런 소리를 하는데도 왜 내게 붙어있느냐는 뜻이거든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얼마나 퉁명스러워요. 그런데 베드로의 반응은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온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나이까?”라고 건사한 멘트를 날렸는데, 이런 멘트도 자기 구원에 전혀 보탬이 안 되고, 그 다음 말이 중요해요.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했어요. 이게 정답이에요.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다.” 이 말은, 너희들이 백날 내개 충성해도 마귀에서 붙잡힌 한 명의 행동을 말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도 아니지만 선하다고 여기는 11명이 악한 사람 1명을 못 이기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구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막 살아야 돼요. 어쩔 수 없어요.

제가 길에서 담배피우는 사람한테 간섭하고, 꽁초 버리는 사람에게 잔소리하고, 식당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한테 주의를 주고 하는데, 저의 이런 행동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라고 하는데, 제자들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다가 자신들이 바위인줄 몰랐던 거예요. 자신들이 깨져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자기 자신을 저주의 자리로 데려가는 것이 구원의 자리라는 것을 제자들도 몰랐어요.

그저 저주를 피하면 구원 되는 줄 알았어요. 우리의 저주 자리는 내 이름이 사라지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고, 십자가를 반복해요.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 그래서 이미 우리 자리는 십자가를 양산시키는 자리인데, 미천한 우리를 통해서 주님은 지금도 십자가의 자리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선택은 항상 제한적이에요. 중국집에 가면 늘 고민하는 것이 ‘짬뽕을 먹을까, 자장면을 먹을까?’ 이처럼 우리의 선택은 제한적인데, 주님은 우리의 선택이 제한적인 것을 알려줘요. 우리가 아무리 선택을 해도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의 자리는 이미 십자가 자리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고정 자리가 마련되었기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막 살아야 되죠. 지금 동에서 서로 가는 자리가 확정되었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절대로 주의 자리와 섞이면 안 돼요. 따라서 뒤따라가면 안 되고 우리는 내 갈 길로 가야 합니다. 막장으로 가게 되면, 막장으로 가는 나의 모습과 이런 우리를 대신 살리기 위해서 죽는 주님의 자리가 비로소 보이는 겁니다.

256페이지 중간에 보면 “옛날 모세를 통해서 전달된 성막과 솔로몬 왕 때의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의 새 성전 사이에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성전을 지으라는 그 자체는 이미 백성을 죽은 자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은 자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하고 또 보여줌으로써 자신들의 죽음을 확인시키겠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차이점이 뭐냐? 256페이지 일곱 번째 줄에 있어요. “동쪽 문에서의 제사 행위는 하나님의 문으로서 동쪽 문이 지닌 언약적 특이성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차이점은, 새 성전은 왕이 제사장이 되는 것이고, 옛 성전에서는 육신을 가진 제사장이 제사장 직을 한다는 것입니다. 공통점은 둘 다 죽는다는 점이고, 죽음으로써 주님의 죽으심에 참여해서 영생을 얻는 백성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야곱이 외쳤던 ‘하나님의 전’은 특정한 건축물이 아니었고” 특정한 건축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2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유대인들은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했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아무리 예배당 짓고, 성전을 크게 지어도 그곳에서 하나님 만날 수 있습니까? 못 만나요. 왜냐? 예수님이 규정하는 성전은 ‘내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님의 자기 이름이 있는 집이란 말이지요.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내 아버지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 하나님이 곧 내 아버지가 된다.’고 했어요. 결국 예수님 오신 것은 인간들이 각자 죽어서 좋은 나라에 가겠다는 그런 상상을 다 찢어버리고 우리를 아버지 집에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아예 예수님이 내 몸을 주님의 몸으로 바꾸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 이름으로 살게 만들어서 예수님의 아버지에 함께 합세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오신 목적입니다.

우리 몸을 ‘성전’이라고 하지요. 이제는 달리 표현합시다. ‘예수님 아버지의 집’이라고. 예수님의 아버지는 곧 우리 아버지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종교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큰 방해가 되었습니다.

256페이지 밑에서 네 번째 줄에, “블레셋 나라에 탈취 당했던 언약궤가 그 나라의 신전 안에서 그 나라의 신인 다곤 신상의 머리와 두 손을 부러뜨린다.” 이것은 원인이 뭡니까? 1) 전자파가 흘렀다. 2) 지진이 일어났다. 3) 인간은 알 수 없다. 몇 번이 답입니까? 3번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사람이 육체가 되면 하나님의 신이 함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상태에서는 인간이 아무리 머리를 쓰도 물리학, 생물학만 나오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전혀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만큼 하늘나라는 폐쇄적인 영역입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문제는 결과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역사 속에 사건화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데카르트의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참 말하기 편하지요? “맞아,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어. 인간은 유한하고 하나님은 무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없어.” 이렇게 말하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어떤 사건이 벌어져요. 십자가라는 사건, 그리고 다곤 신상이 실제로 언약궤 앞에 넘어진 거예요.

다윗과 골리앗이 붙어서 누가 이겼습니까? 다윗이 이겼지요. 그런데 모든 것이 삼세판입니다. 한 번 더 붙으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만약 다윗이 한 번 더 해보자고 나온다면 그것은 다윗의 능력으로 이긴 것이 돼요. 그러나 그 자리에 다윗은 없었습니다. 삼층천에 누가 올라갔습니까? 사도 바울이 올라갔지요. 그런데 바울은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다’고 한 것은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들이죠. 그래서 손을 씻고 먹었잖아요. 예수님은 이것을 전제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더럽지 않다.’고 하신 거예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지 않은지 현미경으로 살펴볼까요? 더럽잖아요.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하는 이야기를 배경에 깔아놓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왔다 갔다 해야 왕이 동쪽으로 와서 죽는 그 자리가 의미가 살듯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지 않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는 이 말이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틀렸어요. 왜냐? 십자가를 놓고 보면, 우리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도 더럽고, 입에서 나오는 것도 더럽습니다. 따라서 늘 정답은 ‘십자가’입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한다고 해서 정답이 아니에요.

왜 그런가 하면, 주께서 인간을 버린 것이 아니고 인간을 활용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죄로 규정함으로써 ‘너는 십자가로 이미 구원 받았다.’는 이야기만 자꾸 해주고 싶은 겁니다. 예배에 참석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뭘 생각하는가 하면, ‘예배에 참석할까, 말까?’를 고민해요. 그러면 선택이 두 가지 밖에 없어요. 예배 참석하지 않는 나와, 예배에 참석하는 나.

그런데 예배에 참석해서 복음을 듣고 난 후에 생각하는 것은, 내가 예배에 참석할까, 말까 고민한 자체가 죄였다는 것입니다. 참석해도 죄고, 참석 안 해도 죄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참석해야만 하는 사실입니다. 항상 우리는 주님께 이용당할 뿐이에요. 그러니까 막 사시기 바랍니다.

죄 지으세요. 죄 지어야할 이유가 우리 능력으로 죄를 지을 수 없기에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 능력으로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반드시 선을 의식하고 선 아닌 쪽을 선택하거든요.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선 아닌 쪽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육신은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평소에 냉장고를 여는 것이 악이 아니라고 여겼는데 아내가 하는 말이 “왜 쓸데없이 냉장고를 열어서 냉기를 허비하는가?” 라고 할 때, 냉장고 여는 것이 죄가 되었어요. 범위를 넓히니까 이렇게 됩니다.

나는 그냥 냉장고에 무엇이 있나 싶어서 열었는데, 아내는 “반찬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차려주는 대로 먹지 왜 냉장고를 뒤지느냐?” 아내의 범주에서 냉장고를 여는 나의 행위가 죄가 되더란 말이지요. 이것을 확대해 봅시다. 주님 보시기에 우리가 죄 아닌 것이 있을까요? 다 죄입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내가 미처 볼 수 없는 죄를 깨닫게 해주니까. 아내의 잔소리 없이는 사람이 안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기를 ‘모든 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했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마운 것이 뭔가 하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질문을 합니다. 언약궤와 함께 있던 다곤 신이 박살이 났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람이 불어서 신상이 넘어졌습니까? 지진이 일어났습니까? 대답 못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은 뭡니까? 원인을 못 찾은 게 잘못이 아니고,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이에요. 철학을 공부하는 이해인(부산대 철학과 석사과정) 양도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새로운 논문을 하나 썼으면 좋겠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자기 주체에서 나와서 내가 쏟아낸 나의 체계를 다시 회수하는 여정에 불과한 거예요.

모든 것은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결과로만 나타나요. 이 세상 자체가 그림자입니다. 실체는 주님 오실 때까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비밀’이라고 하지요. 이 ‘비밀’이 오게 되면 어떤 인간도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에서 관람객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어요. 인간이나 천사나 악마 모두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에 동원되어 각각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그동안 해내고 있었던 겁니다. 누구도 여기에서 배재된 사람은 없습니다. 죽고 난 뒤에는 이 사실을 다 알게 돼요.

원인을 찾겠다는 자체가 어리석은 짓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원인을 무엇으로 봤습니까? 언약궤를 화나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여기고 이스라엘이 드려야 할 제사를 블레셋 사람들이 드렸어요. 그리고는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냅니다. 돌려보내는데 누구한테 옵니까? 언약궤라는 상자가 어떤 인물에게 옵니다. 그게 뭐냐? 다윗 언약이 기다립니다.

다윗과 다윗 언약은 달라요. 아까 골리앗 앞에 선 다윗 본인이 ‘나는 이 자리에 없다’고 했지요. 다윗이 없었기에 골리앗이 넘어진 겁니다. 없다고 여기는 그 순간을 주께서 가로채서 사용하신 거예요. [별에서 온 그대] 드라마를 보면 전지현이 술에 취해서 흔들리는 배에서 뛰어내려 죽으려는 순간 모든 상황은 정지되고 오직 수현만 움직여서 안고 선실로 옮겨오지요. 순간 포착입니다.

모든 주의 일에는 반드시 내가 했다는 것이 일체 섞이지 않도록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천국에서 살 우리의 삶을 미리 이 땅에서 경험케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상대를 사랑한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사랑은 아닙니다. 억지 사랑을 하는 겁니다. 언제 사랑이 되는가? ‘내 자체가 남들 보기에 욕먹을 자세인가? 남들이 날 놀리겠지?’ 이런 생각이 순간적으로 사라질 때가 와요. 그냥 상대만 크게 보이고 나의 존재는 전혀 의식되지 않을 때가 사랑하는 순간입니다.

오 목사님, 이런 사랑 언제 했습니까? 너무 오래 전 이야기입니까? 몸이 그 사랑을 기억해요. 자기 자신을 잊고 주님의 이름만 높일 때 이게 사랑입니다. 기도 끝날 때 내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을 붙이지요. 이것은 주께서 기도하게 했지 내가 기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통해서 당신의 기도를 한 거지요. 그러니까 내 이름을 붙이면 사칭이고 문서 위조가 됩니다.

주의 이름이 붙은 기도는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지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이루어질 리가 없어요. 왜? 우리 이름은 주님께 안 통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내 마음대로 하고 응답은 주님 마음대로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는 일이 벌어지게 하십니다.

성경은 주님이 자기 일하라고 미리 쓴 일기장인데 건방지게 우리는 이 책을 자기 것이라고 가져가서 지킨다고 애를 쓰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런 짓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 책을 내 책으로 여기고 복이나 따내려 하고 내 위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합니다. 매를 맞고 혼이 나도 우리는 내 위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나는 이렇게 하겠다.’가 아니라 ‘나를 이렇게 살도록 하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관계가 바로 선물로 준 믿음입니다.

교재 260페이지 위에서 여섯 번째 줄에 “즉 ‘선물’이라는 취지에서 땅을 공여 받게 되는데 이는 왕적 권위를 근거로 해서 주어진다.”고 했는데, 그러면 천국에 들어가는 자체가 남의 땅에 들어가는 것인데 이것이 선물이라는 겁니다. 진짜 예수님이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인데, 문제는 기다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와 사전에 조율이 없었다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우리를 집어넣고 우리 자체가 선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예쁜 신부가 있다니” 라고 하시는 겁니다. 나만 위해 살고, 내 영광만 생각하는 죄인을 천국에 불러 기뻐하신단 말이지요. 하나님 취향도 참 이상해요. 죄인 중의 괴수를 구원해 놓고 ‘그러니까 더욱 더 예쁘지 않니?’라고 하시는 거예요.

탕자를 영접하는 아버지의 취향을 보세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같이 있던 맏아들은 홀대하고 집나갔다 돌아온 아들은 환대하는 것이 상대적 불평등 아닙니까? 방탕한 아들을 위해 소 잡고, 반지를 끼워주고 동네잔치를 한단 말이지요. 내 아들 돌아왔다고.

만약 큰 아들이 동생과 같이 집나가서 허랑방탕하다가 돌아오면 아버지로부터 환대를 받을까요?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큰 아들이 집에 있었던 그 기획은 탕자를 반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냥 조연 역할로 있는데, 조연이 주인공 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맏아들은 날 때부터 미움 받기로 되어 있고, 그런데 그 미움은 미움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돋보이기 위해서 미움 받을 맏아들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듣는 자가 이상한 사람입니다.

261페이지에 보면 땅을 분배합니다. 이 땅은 누구 땅입니까? 왕의 땅이죠. 왕의 땅인데 거기에 백성이 있다는 말은 백성들이 선물을 받은 것이지요. 그러면 이야기가 47장으로 갈 필요가 없잖아요. 이것으로 끝나야 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에스겔을 끝내야 되는데, 그 다음 이야기가 왜 필요하죠?

왕이 일방적으로 깨끗하고 거룩한 땅을 만들어서 자기 백성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러면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 261페이지에 보면, 12지파에게 땅을 주되 중첩되지 않고 구분됩니다. 263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에 “문 방향을 소개하면서도 일상적인 동쪽 문부터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민수기 2장에서는 ‘동→남→서→북’ 형태가 되는데 이러한 방향 순서는 바로 정실 측부터 먼저 거론하고(북과 동), 그 다음에 여종 측(남과 서)을 제시하므로써 여전히 정실과 여종의 대립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복잡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땅을 선물로 주시려면 그냥 주시면 되는데 뭐가 이렇게 복잡합니까? 그러면 천국에 1구역, 2구역, 3구역 나눠져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이 왜 있는가? 아브라함 언약으로 되돌아가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에서 야곱의 12아들에게 어떤 식으로 땅을 분배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공부에서 강의를 들으면 정답을 확보했다고 느끼는데 그 정답은 오늘, 12월 27일 알았던 정답입니다. 28일 되면 새로운 정답의 체험에 나서야 합니다. 29일 되면 또 새로운 정답을 체험해야 하고. 정답은 이미 바구니 안에 들어 있어요. 그런데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북에서 남으로 계속 가야 돼요.

내일이 되어 내일 분량의 하루를 살게 되면, 오늘 몰랐던 정답을 새롭게 알려 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어제 알았던 정답은 새로운 정답을 보여주는 바탕으로 활용하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내 몸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당신의 몸이라고 살려주셨기에 이제 주님의 십자가란 정답에 앞으로 남은 일을 통해서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에 더욱 더 잠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 1. 23. 15:3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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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1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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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67 자유게시판 62강-YouTube강의(속이지 않기)1401027-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14-02-01
13,266 우리교회 [일반] 우리 안에 내가 없다-박윤진성도님의 글l 히브리서 최고관리자 14-01-31
13,265 묻고답하기 우리 안에는 내가 없다.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14-01-30
13,264 자유게시판 76강-에스겔 26장 1-6(두로에 대한 저주)140129-이 근호목사 에스겔 최고관리자 14-01-29
13,263 우리교회 두로에 대한 저주 140129 에스겔 최고관리자 14-01-29
13,262 자유게시판 23강-슥9장11-13(언약의 피)140126-이 근호 목사 스가랴 최고관리자 14-01-29
13,261 강의 포함과 종속 140127 다니엘 최고관리자 14-01-28
13,260 강의 유튜브(62강, 63강) 속이지 않기, 인간의 조건 140127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14-01-28
13,259 자유게시판 69강-롬 11장 25-27(온 이스라엘)140119-이 근호 목사 로마서 최고관리자 14-01-27
13,258 자유게시판 가락-70이레 논문(선악겹치기)140102-33강a-이 근호 목사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14-01-27
13,257 우리교회 언약의 피 140126 스가랴 최고관리자 14-01-26
13,256 묻고답하기 순종치 않음 로마서 최고관리자 14-01-26
13,255 설교 온 이스라엘(로마서 11:25-27) 로마서 최고관리자 14-01-26
13,254 우리교회 온 이스라엘 140126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14-01-26
13,253 자유게시판 대전20131226b-마15장1절(율법 해석)47강-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4-01-25
13,252 자유게시판 혼인예식 안내입니다~~~ 안내 최고관리자 14-01-25
13,251 강의 성전의 물 140124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4-01-25
13,250 강의 사도행전57강 ( 예루살렘의 율법), 마태복음 48강 (마음속) 140123 에레미야 최고관리자 14-01-23
13,249 자유게시판 75강-에스겔 25장 12-14(에돔에 대한 저주)140122-이 근호목사 에스겔 최고관리자 14-01-23
열람 ➜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3. 12. 27) 2강 에스겔 최고관리자 14-01-23
13,247 묻고답하기 별에서 온 신부-이상규집사님 글 - 최고관리자 14-01-23
13,246 자유게시판 22강-슥9장9-10(겸손하신 예수님)140119-이 근호 목사 스가랴 최고관리자 14-01-23
13,245 우리교회 에돔에 대한 저주 140122 에스겔 최고관리자 14-01-22
13,244 우리교회 [일반] 감사-정석훈 목사님의 글 [일반] 최고관리자 14-01-21
13,243 묻고답하기 감사-정석훈 목사님의 글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14-01-21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