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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모압에 대한 저주 140115우리교회에스겔

모압에 대한 저주 140115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모압에 대한 저주(에스겔 25:8-11)

이근호

14-01-15 21:12

모압에 대한 저주

2014년 1월 15일 본문 말씀: 에스겔 25:8-11

(25:8)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모압과 세일이 이르기를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일반이라 하도다

(25:9) 그러므로 내가 모압의 한편 곧 그 나라 변경에 있는 영화로운 성읍들 벧여시못과 바알므온과 기랴다임을 열고

(25:10) 암몬 족속 일반으로 동방 사람에게 붙여 기업을 삼게 할 것이라 암몬 족속으로 다시는 이방 가운데서 기억되지 아니하게 하려니와

(25:11) 내가 모압에 벌을 내리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다른 이방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에서, 그들의 벌 받음으로 좋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기준에 준해서 그들에게 벌을 내리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들을 벌주는 내용을 만약에 우리가 모른다면 우리들도 똑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의 대상자가 됩니다.

남들이 벌 받는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모압이 어떤 의식을 내놓았기에 하나님으로부터 벌받게 됩니까? 8절에 보면,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일반이라 하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 보기에 이스라엘이나 유다나 특별날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일반들이 말하는 특별남이란 그들의 기대하는 바에 더욱 근접한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겁니다. 즉 흔히 말하는 축복받음에 대해서 유다나라라고 해서 유별되지 않아 보인다는 겁니다. 교회 다닌다고 해서 그 집안이 만사가 형통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다른 종교인들이 평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다나라에 대한 이러한 모압의 평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서서 벌을 주신다는 것은 그들 모압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잘못 보고 있다는 겁니다. 이는 유다나라가 자신들이 섬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 조차도 유별난 조치라는 겁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참 하나님의 특별난 품성의 발현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특별나는 겁니까? 뉴스를 통해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요근래 퍽 특이한 사건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부모가 자기 아들을 죽이기 위해 아들 자는 방에다 번개탄을 피운 사건입니다. 그러고서는 자신들은 연락 끊고 딴데로 사라져 버린 사건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의도적으로 죽이려는 그 부모의 심정은 참으로 공분을 자아낼만 합니다.

그런데 바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이 이런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너무 사랑하시기에 그 아들을 죽이려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참 하나님을 나타내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상은 곧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라면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야 마땅함을 이해하는 자라는 겁니다.

이 얼마나 난해하고 믿기 힘든 실제적 일입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자기 손으로 죽이려 합니까? 이렇게 되면 그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길 마음이 싹 가실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서 모압을 비롯해서 주변 이방민족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방민족 뿐만 아니라 본 이스라엘 자손들도 자기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이런 식으로 다루시는 겁니까? 민수기 23:21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더불어 동행하시는 그 취지가 나옵니다.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의 동행 관계가 그들은 허물과 패역에 주목하시는 것에서 시작하십니다. 즉 백성들의 허물과 패역을 찾아내시고 그 허물과 패역을 용서하시고 자비로 덮어주시는 식으로 동행하시는 겁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막 탈출한 이후에, 모세가 받아온 하나님의 언약을 그들이 지킬 능력이 없음이 밝혀진 사항을 고려하신 겁니다.

출애굽기 33:12-16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고 되어 있습니다.

즉 모세는 하나님께 요구합니다. 은혜주시는 그 은혜와 긍휼히 여기시는 그 긍휼의 반복이 없이는 결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을 수 없으니 나 모세에게 맡기지 마시고 친히 자비의 하나님께서 동행해 달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동행의 원칙은 곧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자기 백성의 허물과 죄를 들추어내시는 작업이 연속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죄 지을만한 여건은 어떤 식으로 조성되는 겁니까? 이방민족들의 성향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안정된 정착을 목표로 민족과 국가를 형성했습니다. 자기 소유의 땅과 지역을 이 지상에서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운명을 허락받지 못합니다. 정착이 아니라 도리어 이 땅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디로 향하게 되는지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인간들은 조금이라도 친숙해지면 그만 그 친숙성에 주저않고 머물고 싶어합니다. 안정적인 기초에서 번영과 번성을 꾀하려 합니다. 이스라엘도 그러고 싶어 주변 나라들의 번영이 부러워 여호와는 판이한 그들의 신을 섬기게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24장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 사이에 끼어 한 동안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제자는 그분이 자신들이 과거 기억에 남겨진 그 인상의 예수님이 아니라서 알아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알아보는 순간, 예수님은 홀연히 그들이 헤어집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자기 제자들과 동행하시는 겁니까? 그들은 인간들이 기대하는 소망의 나라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이 소망하는 것에 합치되면 그들은 이 세상의 인상에서 떠나는 것이 그들이 예상한 천국에 가는 바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는 이 세상의 연장된 나라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점을 지적하시고자 합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를 제자들이 미리 알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들은 자기 백성과의 동행은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늘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면 자기 부인을 유발하시면서 동행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끊임없이 주님과 움직여서 이 세상의 즐거움에 탐익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4-01-17 18:37

74강-에스겔25장8-11(모압에 대한 저주)140115- 이 근호목사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짧은 인생을 전부 걸고 전부 맡기고 전부 책임질 수 있는 옷걸이 같은 그 세계관과 진리관과 하나님관을 저희들에게 허락해 주옵소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사오니 진리 되시고 생명 되신 주님, 이 시간도 저희들에게 그 길을 알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 에스겔 25장8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89페이지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모압과 세일이 이르기를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일반이라 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모압의 한편 곧 그 나라 변경에 있는 영화로운 성읍들 벧여시못과 바알므온과 기랴다임을 열고 암몬 족속 일반으로 동방 사람에게 붙여 기업을 삼게 할 것이라 암몬 족속으로 다시는 이방 가운데서 기억되지 아니하게 하려니와 내가 모압에 벌을 내리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성경과 다른 종교의 경전과 비교해보면 어떤 점이 차이 나느냐 하면, 다른 성경은 그냥 교훈집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성경을 지킬 수 있으니까 지키면 여러분들이 행복해 질것입니다. 하는 그러한 속담이나 그런 교훈들을 이렇게 수집했지만, 우리가 이 성경 보고 있는 에스겔부터해서 모든 성경은 이론이 아니고 실전입니다.

인생 자체가 이론이 아니에요. 실전인데, 그 실전 속에 우리가 이미 일부로 포함이 됐다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지금 무심코 움직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뜻과 주님의 활동과 관련성이 있다는 겁니다. 수족관에 갇혀있는 상어를 볼 때에 그 수족관에 있는 상어를 보고 있는, 관람하고 있는, 우리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

그 두꺼운 유리 때문에 우리는 그냥 구경만 하면 되는 거지요.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의 일을 구경하려 해요. 관람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관람하고 구경하는 우리의 일 수족 일 투족이 이미 우리는 수족관에 있는 상어처럼 하나님과 더불어서 함께 움직이면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하나님의 뜻을 발현하고 있고 드러내고 있는 실전, 실제, 현실 전부다 우리는 그 자체가 계시 속에 파묻혀서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습니다.

참새가 날개 짓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참새가 시장에서 몇 푼 받고 팔리는 것이 우리보기에는 그냥 인간이 참새 구입하는 것 같은데 성경 마태복음 10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 하면 참새가 두 데나리온에 팔리지 않는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이겠습니까? 참새도 그런데. 성경 말씀은 교훈집이 아니에요. 한 수 배워 봐! 어떻게 더 깨달아 봐! 이게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성경 보고자 펼치는 행위도 이미 계시 안에서 시작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본문을 보면서 무슨 교훈을 얻을까, 생각을 하지 마시고 옛날 그 모압과 이스라엘을 다루었던 그 하나님께서 요 원리 원칙에 의해서 똑같이 우리도 그 수족관에서 모압나라가 있고 이스라엘나라를 집어넣어서 다루시던 그 수족관에 지금도 우리가 풍덩 거기에 같이 똑같은 원리로 다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다루어 주세요! 가 아닙니다. 다루어 주시면 다루이고, 이게 아니고 이미 우리가 입 떼기 전부터 이미 주님께서는 이 모압과 이스라엘을 다루는 원칙 하에서 우리는 이미 인생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성경이라 하는 것은 내가 이렇게 살아왔구나! 확인하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지키고 싶던 지키고 싶지 않던 관계없이 말려들었어요. 이건 발을 뺄 수가 없습니다. 이 실전에서 뺄 수가 없어요. “아이고 목사님, 저는 절에 가고 싶습니다.” 라고 우기고 싶어도 절에 간 사람도 마지막 죽고 나면,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옵니다. 자기가 절에 가고 싶다. 하는 그 발언마저 예수님께서 의도하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을 죽고 난 뒤에 주의 음성들을 때 그 때 비로소 아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확보해서 구원받고자 하지 마시고 그런 생각 이전부터 이미 주님의 손에 벌써 다루어지고 움직이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이원리가 뭐냐, 하나님께서 어떤 원리로 다루시느냐, 수족관에 집어넣고 우리를 다들 집어넣고 어떤 원리로 하느냐, 그것은 오늘 본문에 보면 이렇습니다.

8절에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모압과 세일이 이르기를.” 모압과 세일? 이상한 나라지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지옥 갈 나라지요. 하나님의 저주 받아야 될 나라이고, 하나님의 언약이 없고, 심판 받기로 작정된 나라고, 우리가 거기에 부럽지 않은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하나님의 저주 받기로 심판 받기로 작정된 나라에서 입을 벌리고 무슨 한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에 구원받지 못할 자의 입에서 뭔가 한 소리 나왔다는 것은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도대체 죄가 무엇인가를 그들의 소리를 들으면서 죄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겁니다. ‘아! 저게 죄었구나.’ 저런 발언을 하고 저런 사고방식으로 말을 내뱉는 그 내용이 바로 맛이 간 저주받아 마땅한 저런 내용이구나. 다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 모압과 세일은 같은 나라로서 같은 수도니까. 이 모압이라는 나라가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는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할 때에 또 하나 우리가 주의할 게 있어요. ‘아, 그들이 이런 죄를 지었구나.’ 이것만 알면 안돼요.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벌을 내리시는가? 이렇게 해서 그들의 지은 죄와 거기에 부합되는 벌과 만남으로서 진작 우리가 알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냐를 규명하는데 어떤 것에 벌을 내리는가를 통해서 ‘아, 하나님은 그런 것에 대해서 저주하고 벌을 내리시는구나. 그런 하나님이구나!’ 하고 하나님의 그 속에 들어있는 진실을 우리가 파악할 수가 있는 겁니다.

“저기 누구 벌 받았데. 돌아서자.” 이게 아니라 어떤 말을 했기에 그게 벌이 되고 죄가 되고. 그 벌에 대해서 굳이 심판하시겠다는 그 하나님의 속성은 그 벌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우리가 발견되는 겁니다. 그러니 어느 것 하나 버릴 게 없어요.

욥이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고요? 맞습니다. 하지만, 욥의 친구도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는 것을 빼먹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구원받았다고요? 맞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을 핍박했던 그 당시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의 그들의 발언을 놓치면 안돼요. 왜, 양쪽 다 주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알기 때문에 나는 몰라도 돼.” 가 아니라 그런 것들이 모여야 우리가 진짜 섬기는 하나님의 진실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 정리가 되거든요. 자, 그렇다면 모압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께 벌을 받느냐, 8절에 보니까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모압과 세일이 이르기를 유다 족속은 모든 이방과 일반이라, “유다족속? 이스라엘? 아이고 저들이나 우리나 똑같아.” 라고 벌 받을 모압이 그런 사고방식으로 이스라엘 옆에서 버티고 있었던 겁니다.

이게 벌 받을 죄입니까? 이게 저주받을 일이에요? “그들이나 우리가 똑같아.” 그게 저주받을 일 같으면 이게 심각한 지옥 갈 죄라면 그걸 미쳐 죄라고 보지 못한 우리의 심정이 더 심각한 문제가 돼요. 문제지요. “이스라엘과 모압 자기나라와 똑같아. 그 특이성이 없어. 특이함이 없단 말이야. 여호와가 인도한다 해서 별난 거 없어.“ 라고 언급할 때 이건 누구에 대한 모독인가 하면, 바로 우리의 신이나 그들의 신이나 여호와나 동일한 신이고 고만 고만한 신이고 여러 신중에 하나일 뿐이야. 라고 하는 것과 동일한 겁니다.

마치 예수는 4대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그거와 똑같은 거예요. 우리는 흔히 듣던 거잖아요. 기독교나 불교나 똑같아. 그거와 같은 이야기가 된다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이 하나님 앞에 엄청나게 벌 받을 짓이라면 그들에게 무엇이 잘못이고 그들에게 벌준다는 하나님의 진정성을 우리가 파악하지 못했다면 우리도 무심코 하나님에 대해서 모른다는 점에서는 모압이나 똑같이 돼버리거든요.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아! 이스라엘과 모압 이방나라와 똑같지 않다는 그 이유를 우리가 쥐고 있어야 돼요. 파악하고 있어야 돼요. 그러면 다른 점이 뭡니까?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뉴스를 보는데 하나님과 다른 종교의 신과의 차이점을 뉴스시간에 힌트를 얻었어요. 그 뉴스가 뭐냐 하면, 아빠 엄마가 아들 방에다가 번개탄을 피워놓고 부모는 도망가고 말았어요. 마침 뒤늦게 온 그의 누나가 냄새가 나서 보니까 아들 방에 번개탄 가스 때문에 다 죽어가는 것을 급하게 병원에 가서 겨우 소생이 되었어요. 아버지 엄마는 연락이 안 됩니다. 나흘 만에 아버지 엄마를 찾아서 왜 번개탄을 피워서 아들을 죽이려했는가 경찰에서 추궁이 들어갔어요.

그걸 보면서 저거다! 저게 복음이고 저게 기독교의 진수다! 했어요. 뭐냐 하면, 아버지가 번개탄 피워놓고 아들을 죽이려고 한 거예요. 세상에.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거에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떻게 번개탄을 피워서 저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그 이야기거든요. 그 때는 번개탄이 없었으니까.

이삭이 아브라함보고 “아버지여!” “왜?” “불소시게는 있는데 제사드릴 제물은 없네요.” 아들이 아버지보고 그런 이야기를 해요. “아버지!” “왜?” “제사 드리러 가면서 제물은 왜 안 가지고 갑니까?” 그 때 아버지가 하는 말이 “너야, 너!”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셨느니라.” 그러니까 아버지가 거짓말한 거예요. “나도 몰라.” 모르긴 뭘 몰라요. 옆에 있는 아들 잡아 죽이려고 가는데. 물론 불소시게를 번개탄으로 잠시 바꿔봅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식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잘 믿는 자식, 다른 말로 하면, 정말 하나님 아버지한테 유일하게 사랑받는 자식을 아버지가 굳이 죽이려는 그 종교, 그게 바로 기독교고 복음입니다. 이런 해괴망측한 교리가 다 있습니까? 믿으려고, 믿으려고 사정하는데 그 잘 믿는 사람을 아버지가 나서서 아버지를 섬기겠다는 그 아들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뜻, 도대체 얼마나 생각이 깊어야 그 뜻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11장에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그 누구도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다. 너무나 기묘하다 했어요. 너무나 기묘해. 그냥 다른 종교는 납득이 되어야 돼요. 납득이. 착하게 살면 복 받고, 나쁜 짓하면 벌 받는다. 납득이 된다고요. 정성을 다하면 복 받고 소홀히 하면 못 받고 납득이 되는데, 복음은 그게 아니에요.

너무나 이것은 이스라엘은 찾아왔기에 동행하는 줄 알았지, 그들마저도 찾아가라 하면 절대로 그런 하나님을 찾지를 않습니다. 자기 쪽에서 찾아간다면 절대로 그런 하나님을 찾을 리가 없어요. 아니 자기를 가면 갈수록 가까이하면서 점점 죽이는 하나님, 점점 멀리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무슨 보람을 가지고 찾아 나서겠습니까? 안 되지요.

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여러분들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평소에 우리는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입니까? 제가 묻고 싶어요. 제가 안방에 자는데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가지고 번개탄 피워서 우리를 죽일 때 그래도 아멘. 할렐루야! 이렇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용납할 수 있습니까? 그걸 용납한다면 진짜 복음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걸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내가 십자가에 이미 죽었다, 했습니다. 번개탄을 피우던 차에 실려서 절벽에 던지던 내가 죽는 것이 아버지 뜻이기에 그냥 뜻대로 하시옵소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원하시는 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자기를 제물로 맡길 수 있는 이러한 지경까지 성령께서는 우리를 이끄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냥 맨 탕 말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내가 어떻게, 어떻게 살겠습니다. 그런 거 하지 말고 자기를 부인하고 따라 오너라.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잃어버린 자는 살 것이고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얻고자하는 자는 차라리 다른 종교 물론 요새 기독교도 가짜지만, 자기 살고자 하는 자들 모이는 종교가 있어요. 하나님 믿고 잘 되는 그 동네 가라고 하세요. 그 동네 가서 넓은 길로 가서 지옥으로 풍덩 풍덩 다 삼천궁녀처럼 다 빠져 죽으라 하세요.

뭐 똑같다고요? 똑같이 보이지요. 이스라엘도 화들짝! 이스라엘 본인도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놀랍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세운 나라를 하나님이 뭉개 버립니까? 번개탄으로. 수 십 만개 피워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그 하나님이 세워주신 성전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휘발유 뿌려서 중국산 라이터로 어떻게 홀라당 날립니까? 하나님이 친히 주신 언약궤 달랑 날려 버리지요. 놋 뱀 날려버리지요. 그 성전이 다 불타 버리지요.

이것은 하나님이 스스로 모독 받겠다는 겁니다. 경배 받는 하나님이 도리어 모독을 받는 하나님으로만 지상에 접촉이 된다는 우리하고 접선이 된다는 이 사실을 누가 사전에 알아챘겠습니까?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아무도 알아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는 뭐냐, 2장에서는 하나님이 스스로 죽는 이 십자가는 인간의 능력과 인간의 똑똑함으로 도저히 간파가 불가하다는 겁니다.

너무나 불가능하기에 그들은 이 복음을 전하면 어리석다고 이야기하는데, 어리석다고 하는 너희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희들이 어리석다는 거예요. 어디 감히.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알았다고 합니까. 성령이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어디 자기의 지혜와 능력으로 알려고 합니까.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이야기에요.

어디 죄지어 놓고 천국을 와요. 이스라엘 본인도 몰랐던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통해서 무지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제는 그 틈 사이에서 우리에게 진리를 줍니다. 그러면 그렇게 낯선 하나님께서 그러면 그 낯선 하나님을 이스라엘도 알아먹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하나님이 어떻게 동행하는가, 이 동행문제에 있어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요청한 게 아닙니다. 동행 문제에 대해서 신약의 동행에 대해서 잘 나와 있는 데가 누가복음 24장입니다. 길기 때문에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가 있었어요. 있었는데 거기에 어떤 아저씨가 두 사람이 가는데 가운데 끼었습니다. 이러쿵 저러쿵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합니다. 두 제자는 그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를 못했어요. 그러니 이 대목을 보면서 우리가 답답한 게 두 제자가 평소에 예수님의 얼굴을 봤을 거다 말이죠. 이미 예수님의 얼굴이 이미 머리속에 기억이 될 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온다면 그들이 익히 알고 있는 그 인상, 그 인상을 그대로 부활하시고도 나타나시면 “아이고 예수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먼저 제자들이 알아보는 게 왜 이게 안 되느냐 이겁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이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요. 아는데 예수님에 대한 기억이 있는데 제3의 인물로 등장하고 끼어들었던 예수님의 얼굴은 그 얼굴이 아닌 거예요. 왜 그렇게 하셨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동행이라는 것은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서 그들의 그리움에 의해서 그들의 기대와 소문에 의해서 동행이 성사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민수기23장에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는데 모압을 지나는데 그 23장 21절에 하나님이 이렇게 하십니다. 내가 이스라엘 중에 여호와와 함께 있다. 그러면 함께 있다는 것은 그냥 주루룩 갔다 주루룩 오면 그만 이냐 그게 아니고요. 뭐냐 하면,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으로 함께 계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 말은 조금만 머리 써서 보세요. 이렇게 결론 납니다. 하나님이 동행하는 이유는 야곱의 허물을 찾아낸다고 보시면 맞아요. 야곱의 허물을 찾아내고 이스라엘의 패역을 찾아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훌륭한 사람들이다? 아니다? 아니다 이 말이죠. 절대로 이스라엘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이유는 너희들이 이토록 못난 존재고 이토록 그냥 죄만 짓는 존재다. 단지 다른 민족과 동행 안하고 너희에게 찾아 온 것은 이렇게 너희들의 허물을 끄집어내고 그 끄집어 낸 죄를 반복적으로 용서함으로서 용서하시고 은혜주시고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하나님으로 더러운 너희들과 동행한다. 라는 결론에 도달될 수 있습니다.

지금 성령께서 우리 성도와 함께 동행 한다. 뭔가 청와대 유력한 인사와 함께 동행해서 큰소리 칠만 하겠지요. 하지만 이스라엘 식으로 진짜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는 식으로 한다면 남들이 지적 못한 심지어 내가 미쳐 나를 지적 못한 그 지적질을 주께서 성령을 통해 하니까 ‘나는 몰랐습니다. 그것도 죄가 있는 줄을. 주여, 너무 감사합니다.’ 지적질을 받으면서 도리어 감사가 튀어나오는 방식, 동행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알아보지 못해도 동행해주시는 이 고마움, 엠마오 두 제자는 전혀 낯선 아저씨였는데 나중에 떡을 뗄 때 보니까 비로소 자기가 기억했던 그 얼굴로 예수님이 변형돼 있을 때 “아이고, 주님 아니십니까? 아이고 그동안 주님이 동행하셨어요? 그러면 같이 일하게 했던 그 주님, 떡 먹던 주님이 동일한 주님인데 얼굴은 다르고 아, 지금은 우리가 아는 주님의 얼굴이네요. 아이고, 반갑습니다.” 하는 순간 주님은 사라졌어요. 왜? 그들의 기억 속에 머물면 그들은 예수님 동행을 지 자랑으로 간주하게 되고 그러면 또다시 그들의 패역과 허물을 찾아내는 주님과는 다른 주님이 돼버려요.

나, 하나님과 동행했으니까 나 잘났다. 잘났다를 계속해서 반복해야 될 근거로서의 주님은 아니시거든요. 5년 전에 은혜 받았다고 그래서 잘났다고 그걸 자랑하는 것을 허락하시는 주님은 아니시다 말이지요. 오히려 그것이 새로운 죄로 밝혀내는 주님으로 동행하십니다. 이것은 내가 주님을 소유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나를 다루신다는 이야기에요.

그 다루시는 그 원리를 출애굽기 34장14절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모세가 삐졌습니다. 왜 삐졌는가, 백성들이 죄를 지었으니까. 그래서 모세한테 백성들이 인도하라 하니까 모세가 삐져가지고 “저, 못합니다. 이렇게 하나님 언약을 어긴 사람들과 백성들과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갈게.” 비로소 모세는 안심합니다. “주여, 저희 백성들과 함께 동행 하여 주옵소서.” 결국 이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숫자가 몇 명이 아니라 두 세 사람이라도 주와 함께 있어서 그들의 잘못을 끄집어낼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주님의 성령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숫자가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보름달이 떴다 할 때에 달이 숫자 세어서 내 얼굴 보고 있는 사람이 4명이라면 “아이~ 삐졌어. 나는 안 떠.“ 이런 달이 아닙니다. 두 명이 보던지 천명이 보던지 간에 달은 헐하게 웃으면서 뜨던지 울면서 뜨던지 훤하게 뜨잖아요.

주님의 원리, 나의 동행하는 원리는 숫자와 상관없이 두 세 사람이라도 계속 우리의 잘못을 지적질해 내신다면 그 지적질 당하는 동행은 수천 명이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거예요. 내편이 몇 천 명이 있느냐가 아니라 한 명이라도 주님이 나와 동행한다는 이 점에서 외롭지 않습니다. 이게 외롭지 않아요.

자,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진짜 중요합니다. 자, 주님이 동행했습니다. 동행한다면 길을 떠나면 목적지가 있어야 되잖아요. 지금 모압나라하고 암몬 이런 이방나라들의 큰 잘못은 뭐냐 하면, “야, 여기 터 좋네. 목축지 좋네. 땅 좋네. 이건 내가 앞으로 대대자손 머물 땅으로 해야지.”라고 그걸 고정화 시킨 게 문제였습니다.

“야, 이거 살기 좋다. 여기 단비내리고 계절 뚜렷하고 농사지으면 큰 수확 얻겠다.” 라고 좋아들 하면서 그 땅을 그 땅에서 살기를 사수하는 게 문제였습니다. 왜냐 하면, 이스라엘은 이 땅에 고정하라고 나타난 민족이 아니고 스쳐 지나갈 민족입니다. 이것이 나그네에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은 연착륙 중 하늘을 다시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통과하고, 통과한다는 것은 나그네고 머물지 않는다는 뜻인데 가기는 어디로 갑니까? 그것은 동행하신 그 분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겁니다. 제가 이 이야기하면, 참 좋겠네. 좋지요. 좋은데 문제는 그 나라에 대해서 어떤 인간도 미리 짐작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그런 질문을 했어요. 옛날에 이 장림이가 1992년 10월 18일 재림한다고 이렇게 예언했는데, “예언 좀 하면 안 됩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이 재림한다는데 언제쯤 옵니까? 날짜는 몰라도 대충 때려잡아서 몇 년도에 온다고 알려주면 우리가 신앙생활 정신 차려 하겠습니다. 그거 대충 알려주면 안 됩니까?” 라고 궁금해 하는데 그렇게 궁금해 하는 그것이 왜 나쁩니까? 라는 질문을 해오고 있어요. 또 옛날에 한 적이 있어요.

그럴 때 제가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뭐냐 하면, 인간은 예언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이 예언하기 위해서 수집된 모든 자료가 이미 과거에 있던 거예요. 과거에 있던 것을 미래로 해보면 과거 그 시절로 정착이 돼버립니다. 떠남이 안돼요. 떠남.

떠난다는 것은 날마다 생전 낯설고 경험하지 못한 코스로 가거든요. 그런데 미리 짐작을 해버리면 지 딴에는 예언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예언을 피해서 가버린다니까요. 만약에 그 예언이 맞아버리면 그 예언한 그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지적질을 못해요. “아이고, 똑똑하구나. 내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알았지. 아이고, 똑똑하네. 니가 알아서 구원받아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한 5년 동행하다가 6년째는 니가 너무 똑똑하니까 니가 알아서 해라. 동행이 안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 죄에 대해서 지적질이 안돼요. 그러면 그 사람은 엉뚱한 곳을 천국이라고 착각해가지고 가게 돼요.

제가 지금 모압이나 암몬이나 우상숭배 나라의 특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한국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송구영신예배하면서 목사들이 신년예배하면서 목표를 줘요. 올해는 이러한 목표로 교회에 갑시다. 일종의 예언이거든요. 일종의 예언이고 마태복음 산상설교에 의하면 일종의 맹세하지 말라, 하는데 맹세한 셈이 돼요.

맹세라는 게 뭡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목표가 되도록 제가 애쓰고 힘쓰겠습니다. 하는 이야기다 말이죠. 그런데 그 모든 맹세와 그 목표가 특징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떠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유명세타고 부러움을 받고 박수 받고 좋겠네. 성공해서! 라는 어떤 사람들의 기대치들이 모여 집결된 그것을 지금 내가 사모하고 있는 중이에요. 우리가 알다시피 주님의 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천국이 우선이 아니고 십자가에 가야 거기에 천국이 있어요. 우리에게 천국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는 십자가가 보여야 그게 천국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는 치워버리고 십자가 없는 천국을 바라고 있으니까 그게 바로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우리가 평소에 이 세상에서 뭔가 기대치하고 있는 그 상태에 정착이 되는 거예요. 어렵게 생각할 게 없어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교회에서 전도를 너무 잘해요. 또 그런 재주가 있는 사람이 있어요. 사람 꾀는 걸로 해서 어떤 사람이 교회에 1년에 100명을 전도했다. 나는 전도가 제일 쉬워요. 전도가 재미있어요. 이런 사람이 있다 말이죠.

어떤 분이 작년에 전도를 100명을 했다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기도하겠어요? 저 사람은 어떻게 기도했기에 우리는 한 명도 못하는데 100명을 했느냐, 그 다음에 2014년도 되면 목사나 모든 교인들이 은근히 그 사람에게 기대하는 게 있어요. “박 집사! 올해는 100명을 했으니까 내년에는 150명 하자.” 이렇게 나올 거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제 죽어버렸어요. 예를 든 겁니다. 예를.

번개탄해서 죽었다 칩시다. 정말 그 사람이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우리가 축하를 해줘야 되는데, 큰 교회로의 정착, 큰 교회 됐다는 것이 아까워서 쉽게 천국가기를 거절하는 이 큰 교회 안에서의 정착을 생각한다면 ‘아이고, 아깝다. 올해는 200명 할 건데. 계산해 보자. 작년 100명, 올해 200명, 그 사람 때문에 300명 불어날 텐데.‘ 적어도 교회에서 100명 200명 같으면 다른 교회에서 스카우트 당합니다.

바로 그것이 얼마나 모압적이고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을 속성들입니까? 바로 그것에 대해서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모압은 말합니다. 이 세상 자기 자리에서 성공하는 거나 교회가 이 자리에서 크게 부흥하는 거나 따지고 보면 똑같다는 거예요. 맞아요. 그 말 맞습니다.

그런데 진짜 이스라엘은 진짜 하나님이 동행하는 교회는 그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기대했다하면 미꾸라지처럼 빠져버려요. “주여, 이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하면 그 기도 응답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응답되지 않을 정도로 주님과 사귄다면 그 사람은 진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기도 쪽 쪽 응답이 안 될 때,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왜냐 하면, 기도한 것에 대해서 소급해서 지적질 당해야 되니까. 주님이 하시는 것은 은혜인데, 은혜라 하는 것은 죄 없는 상태에서는 은혜가 없어요. 용서와 은혜의 자비라 하는 것은 그 만큼 우리 힘으로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까발려주고 그걸 반복해서 되새겨주는 거거든요.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고 감사한지. 이거다 싶으면 그거 아니거든. 하고 지적해줄 때 그 고마움. 손 떼치 해주고 떼치 해주는 그 고마움. 그러면 이것입니까? 그것도 아니야. 떼치 해주고. 그렇다면 우리가 이것입니까? 저것입니까? 하다가 우리는 어느새 통과하는 중이에요. 아! 이 땅에서는 머물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사람은 뭔가 하루 지나면 하루 계획이 머리에 상상되면서 내가 그것이 되면 얼마나 좋겠나, 이 땅에 정착할 때 예쁘게 정착하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게 있어요. 그런데 막상 그 지점에 가게 되면 정말 성령이 있는 사람은 거기서 또 다른 코스로 데려갑니다. 이동하고 통과하는 거예요. 머물 곳이 없어요. 꼭 이스라엘 같아요. 유목민족 같이 이스라엘같이 그렇게 이끄십니다.

“주여, 어디로 데려가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갔던 그 길, 십자가로 가서 주님 지금 어린양으로 있는 보좌에 우리를 그런 식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동행하는 사람과 안 하는 사람과의 차이점은 세상 성공여부로 실패여부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 앞에,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지적 받을 때, 도리어 그것이 감사로 나올 때, 주께서 떠나지 않고 우리를 장악해서 주님으로서 같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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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1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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