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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4 겨울수련회 : 창세기 세척하기성경창세기

2014 겨울수련회 : 창세기 세척하기

이름 : 관리자(IP:203.90.42.222)

2014 겨울수련회 : 창세기 세척하기

관리자(IP:203.♡.42.222)

14-01-14 23:10

** 겨울 수련회 교재 **

창세기 세척하기 (2014 겨울수련회 교재)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Ⅰ 서론

입자물리학에서 각 입자의 질량은 정지 상태의 질량 더하기 운동의 가속화에 의해 제공되는 여분의 것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정지 상태의 전자의 질량은 0으로, 그것의 질량은 오직 가속화에 의해 발생하는 나머지 것으로만 보태진다(힉스 매커니즘). 이는 곧 자신이 자신의 초과를 만들어냄으로써만 어떤 기만적인 실체를 유발하는 무(無)적인 현상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현실이란 이처럼 입자의 경우처럼 실체를 기본으로 하여 ‘있음’이라는 의미 부여를 기본으로 하여 시작된다. 결국 ‘있음’이란 우리 인간의 눈에 뭔가 들어오는 것에 국한된다. 광활한 우주 탐색은 망원경 렌즈 속으로 뭔가 눈에 띄게 들어오기 때문에 해석과 설명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과학적인 탐색을 해도 창조를 설명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창조 이전의 개념을 이미 창조 된 상황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되었음’은 ‘지금도 계속 창조되고 있음’으로 변형시켜 설명해야 한다. 그래야만 무엇을 핵심으로 하여 계속 창조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창조의 매개’가 중요하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시간을 매개로 창조가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 중심성을 보여준다, 창조란 곧 ‘하나님의 표현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세상의 모든 ‘있음’에 ‘예수 그리스도’가 관여해서 창조되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과학이란 곧 ‘인간의 자기표현, 자기 창조작업’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표현방식은 반대가 되는데 이는 ‘하나님 형상’ 자체가 품고 있는 비밀 때문이다. ‘있음’은 ‘없음’에서 나왔다는 점과 그 경유를 증명하려면 ‘있음’에서 왜 ‘없음’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 이유가 밝혀져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있음’을 스스로 부정하고 싶지 않은 인간들은 이런 요구에 할 말이 없다. 즉 왜 나는 없어지고 사라져야 마땅한지, 그리고 이 점이 왜 외면될 수 없는 실제상황인지를 모른다. 하나님의 파괴 의지가 창조 속에 이미 담겨 있었다. 이점을 인간들은 끄집어내고 싶지가 않다. 그 어떤 과학자도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 파괴하고자 하는 무기와 기술 개발에 몰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과 그 창조비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는 말이다.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히 1:10-11)”

‘무(無)로부터의 창조’란 유(有)의 입장을 정당화해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유가 도로 무가 되어야만 그 창조행위를 정당화해주는데 그 이유는 유를 위한 창조가 아니라 무 자체를 증거하기 위해 유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창조이기 때문이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 13:12).” 있음이 없음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통해서 숨겨진 ‘있음의 근거’가 새로운 ‘있음’의 등장으로 밝혀진다는 말이다.

이런 식의 하나님의 대자연 다루심에 대해서 인간들은 강하게 부정하게 되는데 이는 인간들이 이미 악마의 앞잡이로서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있음’ 위주로 해석하면서 기만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하나님과 악마는 창조 때부터 전쟁상태에 돌입되어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지만 이 형상은 곧 누군가와 ‘투쟁하시는 형상’이다.

Ⅱ. 본론

1. 투쟁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투쟁의 이유는 이미 예정된 내용대로며 그 예정된 내용이 창조 행위 속에 담기게 되고 피조물들은 여기에 대한 흔적과 자국들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취지는 물질적 토대 없이 보여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담이 ‘흙’이라는 물질로 환원되는 것도(창 3:19) 그 과정에서 예정된 창조 취지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아담이 일시에 흙으로 변모된 것이 아니라 뭔가를 상대로 처절한 투쟁을 거치면서 결국 패배를 만끽하고 흙이 되어 갔다. 아담은 무엇을 무서워했으며 무엇과 싸웠으며 오늘날 우리는 무엇과 싸우는가? 그것은 바로 시간을 통해서 빼앗겼다고 여긴 그 무엇이다. 곧 빛이요 생명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

모든 사람은 이 잃어버린 빛과 생명을 시간을 통해서 되찾고자 하는데 바로 그 방식이 신의 계시에 대한 해석과 거기에 맞춘 행위다. 현재의 과거마저 새롭게 창조한다. 자신을 선도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과거를 수정하는 행위는 곧 미래의 설계로 이어진다. 아담은 아들을 낳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다’는 뜻으로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창 4:1).”

전에는 불가능했던 일이 물리적인 실체(육신)의 등장을 계기로 새롭게 미래를 꾸려나갈 선도자로 자신의 현재 입지가 마련되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드디어 죽음에서 생명을 끄집어 낼 희망이 보인다고 자부하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인간들의 투쟁의식은 하나님과의 투쟁으로 전환된다.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하나님은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가인에게 복수하신다. 바로 이러한 투쟁의 현장에서 하나님은 ‘투쟁하시는 형상’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2. 예정된 자유

인간이 자연 결정론 안에 ‘갇혀 있다’는 개념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현실의 일부라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마음껏, 원 없이, 심지어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당부한 그 선악과조차 주저 없이 따먹은 이 무한한 자유성은 그로 인하여 자꾸만 새로운 자연 결정론을 유발하는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갇힐 교도소를 본인이 만들어놓고 “나는 갇혀있다. 나는 자유를 잃었어!”라고 외치면서 주접을 떨고는 다시 그 교도소를 헐어버리고 자신을 더욱 비참하고 굴욕적인 모습으로 드러낼 교도소를 새로 또 지어보는 그 무한한 자유성에 비유할 수가 있다.

‘신이 일방적으로 정해놓은 예정론에 우리 인간은 꼼짝없이 갇혀있다’고 엄살을 떨고서는 그것마저 과감하게 무시하듯이 행동하는 자유함을 보이고서, 곧장 자신이 가진 자유성에 맞상대가 될 정도의 품격 있는 예정론을 다시 요청하는 식으로 신에게 배틀battle(시비)을 거는 식의 예정론은 있을 수 없다.

예정론의 초점은 ‘사물의 자연스러운 운용’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과정을 주도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예정된 자유이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진정 자유롭다는 것을 알려면 우리 자신이 그 내용을 채워서는 아니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을 확인해주기 위해 그 내용과 본질을 우리 자신이 채운다면 그야말로 예정된 자유가 아니라 속박을 의식하는 거짓 자유다.

마치 고속도로를 주행 중인 두 대의 자동차가 시비가 붙어 갈 데까지 가보자고 고집을 피웠더니 결국 둘 다 본인들이 가려고 했던 목적지가 아닌 엉뚱한 데로 차를 몰고 간 경우와 같다. 창조물 안에 담겨 있는 ‘예정된 자유’는 투쟁해야 될 자유인데, 이 자유의 주변에서 “너는 신의 예정론에 속박되어 있기에 너에게 어떤 선택이나 자유는 없어. 천국과 지옥도 네가 결정해서 갈 수 있는 데가 아니야.”라는 시비성 발언을 유혹처럼 늘 듣는 가운데 진행된다.

그러나 이 유혹을 물리쳐야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의 자유를 증명할 수 있는 어떠한 내용도 우리가 채워 넣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이다. ‘예정된 자유’는 항상 소급해서 이해되는데 그 투입되는 근거는 오직 예수님의 자유로운 행위뿐이다.

따라서 예정론은 창세기 처음부터 개입되어 있지만 그 의미는 피조물의 ‘자기 자유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병행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의 결정과 선택 결과를 놓고 갈등과 절망과 고민에 빠져야 한다. 그리고 기존의 ‘자유’에 대한 확정된 이해를 수정해야만 한다. 그 와중에 ‘자유→예정된 자유’로 이해가 바뀌면서 ‘예정된 자유’의 근거를 자기 쪽에서 그 내용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자각하게 된다. 이로써 ‘인간의 자유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부터의 해방문제’와 결부되고 이는 절대적 생명의 창조적 흐름에 완전히 잠겨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에게 주어진 ‘예정된 자유’는 그 어떤 세력에도 방해받지 않는 절대적 능력을 발휘하는 자유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3. 투쟁적 화해

화해란, 행동한 것을 따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 평가로써 모든 비판과 정죄를 종식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는 매개자의 자격으로 취하는 조치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통해서 인간을 타인으로 여기시는 동시에 스스로 매개자로 등장하신다. 그리고 선악과 따먹는 것을 금지하신다. 이로써 인간은 주변에 보이는 현실이 자신을 위한 현실이 아니라 너무 일찍 오신 메시아나 너무 늦게 오신 메시아를 위한 장(場)임을 알리고자 하신다.

심판의 하나님으로 이해되는 인간에게는 메시아께서 너무 일찍 일하시는 셈이 되고 구원을 고대하는 처지에서 볼 때에 메시아는 너무 늦게 일하시는 바가 되게 하신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매개자이신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치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금지를 딛고 넘어설 그 영역에 대해서 인간은 배제되어 있는 처지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 화해성은 영원히 반복된다.

하지만 금지의 등장은 인간으로 하여금 욕망을 자극하는 계기가 된다. ‘건널 수 없다’는 말인지 아니면 ‘건널 수는 있어도 그곳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인지 명확치 않은 상황으로 인하여 새로운 유혹거리가 발생된 것이다.

타인이 건네 줄 명령으로 인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분명하게 확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자기 쪽에서 아는 자아와 금지된 저편 영역에서 바라보는 자아 사이에 분열이 생겨버린 것이다. 악마는 거짓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금지 명령에 대해 다른 가능성을 열어준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위반하는데 있었다.

창세기 초반부터 인간의 역사는 위반으로부터 시작되면서 금지의 영역으로 건너가지도 못할뿐더러 생명나무 과실마저 이제는 접근 금지 항목에 추가된다. 그리고 현실의 판은 하나님에 의해 모든 게 인간에게 극히 낯선 취지에 의해서 재편된다. 그 판은 바로 ‘하나님과 악마’의 투쟁의 판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는 종식되고 하나님이 약속으로 제시한 ‘여자의 후손=생명의 후손’ 사이의 화해의 장이 악마와의 투쟁의 모습으로 지상에 깔린다. 여기서 인간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타인과- 쌍을- 이룬-존재’로 살게 된다. ‘나를 위하여’ ‘나에 대하여’ 나타나는 대상이라고 오인되는 가운데 항상 등장하는 타인으로 인하여 투쟁과 갈등이 일어나고 이는 약속의 파기로 이어지고 하나님마저 죽음 사건에 의해 함몰된다. 바로 이점을 겨냥해서 심판이 주어지는데 이 발생된 심판이 도리어 화해의 근거가 된다.

하나님의 ‘투쟁적 화해’를 위한 ‘투쟁적 형상’이 개입되는 현장이 늘 이러하다. 나의 것으로 마저 환원되지 않는 어떤 것을 타자의 얼굴로 등장시켜서 타자의 시선에 비친 나의 모습을 괴로워하는 타인의 고통과 고난 속에서 발견케 하신다. 내 안에 있는 나는 진정 내가 아니었다. 나로 인해 고통 받는 그 타인 속에 나의 원형이 드러나는데 이로써 성도는 ‘이미 십자가 못박인 자’가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이 십자가 안에서만 하나님과 화해가 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

4. 창세기 내용 전개

(1)에덴동산에서부터 노아 시절까지

창세기 3장에 보면, 범죄의 주체는 인간이고 약속을 유지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이 약속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흔적을 지상에 긁고 새기는 식으로 인간 나라와 대결 구조를 유지한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거부하시는데 그 이유는, 창세기 3장의 범죄 흔적을 지우는 식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도리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인간에 실려서 후대로 고스란히 전달되는 범죄성이 재현되는 현장이다.

제사행위가 나름대로 거룩해 보여도 죄악은 언제 어디서도 죄악이다. 이 죄악으로 인해 ‘원수관계가 될 두 주체가 역사에 등장해야만 한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세기 3:15).”

이 약속에 의하면 앞으로의 인류 역사는 두 패로 나눠지고 이 두 패 사이는 원수지간이 되며 동시에 치고 침을 당하는 결과가 빚어진다는 것이다. 한쪽은 여자의 후손, 다른 한쪽은 뱀의 후손이다. 제 3의 지역은 없다. 반드시 서로는 적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이는 자신의 본 모습은 적의 등장과 더불어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 간격은 항상 유지되고 인간의 힘으로 그 틈을 메울 길은 없다. 에덴 시절에서 땅의 시절로 들어오면서 땅은 전쟁터가 된다.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진 이를 계속해서 추방시키고 침입을 저지하는 성질이 가동되는 생명나무의 성질 아래서 땅은 저주를 뿜어내면서 모든 것을 죽인다. 이로써 세상은 뭐든지 ‘죽음 속’에서 움직인다. 그 안에서 여자의 후손은 생명을 생산한다. 즉 제대로 ‘산 자’가 되는 것이다. 여자의 이름이 생명(하와)으로 바뀐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것이다. 바로 이 산 자와 선악 지식을 고수하는 자 간의 전투가 역사 안에서 개시되었다. 선악 지식으로는 생명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창세기 6장에서 드디어 ‘죽음을 보지 않은 이’ 에녹이 나타난다. 아담으로부터 줄곧 내려오는 ‘죽음’의 연쇄 고리 안에서 발생된 생명이다. 이 에녹에게 생명을 부여한 동행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 하나님이 노아 홍수 심판으로 노골적 의지를 드러내신다. ‘싹 쓸어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아 가족은 살아남았는데 이는 에녹의 취지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조치이다. 이 약속에 담겨서 생명은 유일하게 발생된다. 그래서 앞으로의 역사는 두 가지 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하나님께서 때마다 내려주신 약속 안에 들어오는 자와 그 약속에서 배제된 자의 전쟁이다. 이 비-약속민들은 무엇에 근거해서 살아가느냐는 약속과 대비되면서 알려진다.

노아의 아들이 셋인데 그 중 하나가 저주의 대상이 된다. 함의 후손이 저주를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성을 인정치 않고 아버지를 흉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두 형제는 하나님의 은혜성을 덮는 행위로 고백했다. 이것이 생명이 지상에 떨어지는 모습이다. 함의 족속들은 자꾸만 인간의 자력과 공로를 염두에 둔다. 그래서 세워진 것이 바벨탑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탑의 정신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참으로 창대케 될 민족은 바벨탑 민족이 아니라 따로 있었다. 그것이 아브라함 민족이다.

(2)아브라함에서 요셉까지

아브라함의 전쟁은 조카 롯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롯을 잡아간 무리를 아브라함이 공격한다(창 14장). 그런데 아브라함이 승리한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아브라함에게 승리가 오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으로 ‘누구든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축복하지만 만약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내려진다’는 그 약속이 현실화 된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기로 약속했지만 거기에는 이미 기존의 민족들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감히 아브라함을 대적할 수 없었던 것은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으로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전쟁에서 큰 방패와 같은 분이다(창 15:1).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신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신다. 하나님은 그 신의 나라가 이 땅의 악인들을 물리치고 난 연후에 이루어질 거라고 약속하셨다.

그것은 아브라함 자손이 4대만에 지금의 땅에 돌아와서 한 나라를 이룰 때이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원수가 누군지를 알게 된다. 이 땅의 이방민족들이며 함의 자손들이다. 이들이 적이 되는 이유는 전에 노아에게 내린 하나님의 저주를 실현시키기 위해서이다.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창 9:25).” 그래서 아브라함 후손이 계속해서 적을 물리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약속을 담을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즉 사람의 공로에 의한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인물이어야 한다. 그 사람이 바로 이삭이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창 22:17).” 그리고 이 이삭과 혼인하게 되는 리브가라는 여인도 사실은 원수의 성문을 열고 정복이 가능한 자식을 배태할 사명을 지닌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지어다(창 24:60).”

이처럼 아브라함의 씨들은 전쟁에서 적을 무찌를 수 있는 요소를 구비한 사람이다. 그 요소란, 그들 안의 하나님이 적과 싸워 반드시 이긴다는 약속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삭 이후에도 전쟁에서 승리할 인물이 나온다. 그 사람은 야곱이다. 야곱은 그의 쌍둥이 형인 에서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처음에 자기 힘을 의지했고 자신의 속임수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그런 인간의 노력과 방법은 하나님의 싸움이 아니었다. 결국 그의 잘못된 싸움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찾아온 하나님마저 이기려고 덤벼든 꼴이 되고 말았다.

즉 하나님의 원수가 자신이 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여 살려주신다. 여기서 야곱이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전쟁은 야곱이 사용한 힘에 의존한 방법이 아니라 축복을 통한 방법인 것을 발견하게 된다(창 32장). 축복을 통해서 야곱은 하나님을 이기고 사람마저 이긴 자로 달라진다. 이 축복은 하나님 자신이 사다리를 타고 이 지상에까지 낮아진 그 희생의 겸손으로 인해 주어진 축복이다. 야곱을 축복하기 위해 야곱에게 몸소 오신 그분을 야곱은 몰라 뵙고 싸움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은 평소에 자기 힘을 의존해서 살았던 본래의 성품 때문이다.

그 성품마저 수용하면서 하나님은 얍복 강가에서 야곱을 용서한다. 그리고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꾸신다. 이 이스라엘이 알게 된 정신으로 함의 족속을 정복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요셉이다. 요셉은 자기가 뭔가 특별한 사명을 입게 될 것임을 꿈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런데 그 꿈의 성취를 위하여 자기가 아버지와 형제들의 희생물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성실했고 유혹까지 물리치면서 바르게 살았지만 날이 갈수록 자기 신세는 초라해지고 주위 사람들은 복을 받게 된다. 하나님이 왜 자기를 그런 쪽으로 사용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요셉의 그런 희생적인 운명은 야곱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 때문이었다. 형제들의 주가 된다는 것은 그 전에 오히려 형제들을 위해 희생물이 된다는 의미이다. 섬기는 자가 높은 자가 된다는 사실을 야곱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창 48:16-19).”

손을 어긋나게 손자에게 축복하는 그 야곱의 마음속에는 지금까지 자신에게 바로 계시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의 본심이 다 들어 있다. 그리고 그 본심으로 인해 하나님은 이 지상에 신의 나라, 거룩한 나라를 건설하시려는 것이다. 요셉이 총리대신이 된 것은 결국 야곱에게 축복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이었다. 부모와 다른 형제들을 살리는 방식이 기존의 야곱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적인 것이다. 바로 이 방식에 의해 새로운 국가가 가나안 땅에 등장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가 등장되면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의 지배가 4대만에 달성될 것이다.

하나님은 뱀의 후손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 전쟁에서 반드시 이긴다고 약속하신 바 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계시하면서 줄 곧 언급하신다. 문제는 승리의 방법이다. 그 방법은 희생이다. 희생 안에 있어야 적이 보인다. 희생은총의 의미를 모르고 오직 자기 공로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선악체제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Ⅲ. 결론

인간은 애초부터 문제 유발자였다. 자기만의 자리를 장만하겠다는 식으로 나왔다. 에덴동산에 같이 있었던 생명나무는 그것을 용납하지 아니했다. 생명과 결별되면서 인간은 죽음을 잔뜩 짊어지고 지상으로 내어쫓긴다. 이로써 인생이란 ‘죽음의 굳어짐’이 보이는 진행과정에 해당된다. 청춘 때는 말랑말랑한 죽음(피하고자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만만한 죽음)이 노년에는 딱딱하게 굳은 모습으로 비쳐 나온다.

약속의 완성, 즉 신약에 들어와서 거론되는 약속 용어에는 ‘하나님의 형상’과 십자가 피언약과 의와 화해와 예정하심과 구원과 천국과 이스라엘 등이 구약을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그 기반이 모두 창세기에 들어있었다. 창조란 구원을 통해서 그 내막이 드러나고 완성된다. 이 와중에 전쟁이 있었다. 그 전쟁의 방식은 제물의 쪼개짐이다. 택함 받은 자들은 아브라함이 드린 제물처럼 쪼개져서 그 절개면을 공개하고 그 가운데로 하나님이 지나가셔야 한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창 15:17).”

태초부터 모든 창조에 말씀이 개입하셨다. 그리고 스스로 원리의 변화를 주시면서 찾아오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 이 말씀이 성사되는 방향으로 창조 작업을 펼치신 것이다. 창세기는 여기에 대한 이야기다.

관리자(IP:203.♡.42.222)

14-01-18 22:42

2014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제1강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 감히 주의 말씀을 대합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데 창조 받은 우리가 도로 그 말씀을 파악하고자 할 때 우리의 능력은 미미하고 하지만 성령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우리가 성령 안에서 주의 본 뜻을 깨닫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창세기 1장이 성경에 나오지요. 창세기 1장이 시작일 수도 있고 마지막 결론일 수 있어요. 책인데 책을 세워놓겠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여기 있다면 그전까지는 성경책에 대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을 묻고 필요한 정보를 가져와서 나를 키우고 하는 식으로 성경책을 하나의 대상으로 본 겁니다. 나는 여기 있고 필요한 것들을 퍼 담아갈 수 있는 그러한 대상으로 봤는데 신약성경에 와서 하나님의 새 언약에 의하면 구약이든 신약이든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를 어디다 집어넣느냐 하면, 우리를 점선으로 해봅시다. 점선이란 항상 사라질 가능성이 있는 거고. 끌로 성경책을 파면, 빈 공간을 파서 집어넣으면 해답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체가 해답이 돼요. 성경 속에 우리가 있으면 성경 전체가 해답이라면 거기에 포함된 우리도 해답이 되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해답을 알 필요도 없이 우리가 바깥에 나가게 되면 질질질 해답을 끌고 나온 셈이 되지요. 우리가 나오면 덩달아 말씀이 끌려나오면 모든 것이 해답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해답의 자기 전개, 자기 펼침이 되겠지요. 내가 움직이는 모든 것이 해답이다. 그 해답이 어떤 내용인지 말로 해보라. 말로 하면 안 돼요. 말하기 전에 이미 해답인데 말로 하면, 말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사라져가는 이쪽의 소통이 원칙이거든요. 여기서 통용되는 거란 말이죠. 말을 하려면 이쪽에 사라지는 것을 거쳐서 다시 말하려면 가고 오고 가는데서 이미 해답성을 상실해버려요. 아무리 해답을 말로 설명해도 여기에 통용되는 말 자체, 언어의 한계가 있어요. 한 번 거쳐 왔다하면 진짜 진리성은 다 빠지고 그냥 형식만 남아요.

예를 들면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하는 것이 과연 진리인 이유가 뭐냐? “내가 여기 있잖아.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하잖아.” 이게 해답이거든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으리라는 그런 구원자가 여기 있단 말이죠. 그럼 됐는데 그걸 말로 설명하려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다시 돌아오면 주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거든요. 이것 외운다고 구원 되는 건 아니란 말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행동이 해답인 새삼스럽게 해답을 제시해달라고 하면 해답을 제시하는 방법은 없는 거예요. 창세기 1장에 들어갈 때 앞으로 이 방법을 앞으로 계속 적용할 겁니다.

유럽의 성당을 보면 건축물 지을 때 밑 구덩이에 동굴처럼 파서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를 안치해놓고 열주, 기둥들을 도리아식, 이오니아식이라 해서 나와 있을 거예요. 여기에서 우리가 해답을 아는 게 아니고 해답 자체로서 우리가 존재하게 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 나갈 때는 “무엇이 진리입니까?”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무슨 질문을 하게 되면 이런 답이 될까요?”라고 해야 되지요. 답은 이미 챙겼으니까 “이 답변에 해당되는 어떤 질문들을 하게 되면 여기 있는 이런 답변이 나오게 됩니까?”라는 질문을 해야 된다. 그러니까 답변을 새삼스럽게 구하는 게 아니고 이 답변이 답변될 수밖에 없는 질문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남은 여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게 바로 확인 작업에 들어가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진리를 끌어 모아서 나는 진리를 알았다는 게 아니고 내 자신이 답변이기 때문에 왜 나는 이런 식으로 남자가 되었을까? 내가 남자가 되는 것이 정답이어야 하는 질문을 찾아가는 거예요. 질문을 만들어보는 겁니다. 구원받는데 어느 것이 수월합니까? 이미 구원받아놓고 저 같은 죄인을 왜 구원하셨습니까? 이게 수월합니까? 제가 어느 정도 착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어느 쪽이 여러분이 힘들고 애써야 됩니까? 두 번째가 더 힘들지요. 도대체 어디까지 따라 붙어야 하느냐? 어디까지 가야 상글리아(이상사회), 유토피아에 도달하는가? 자꾸 헤매는 거예요.

오늘 낮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제가 아는 선교사님이 태국에 갔어요. 방콕에는 더러워서 못 가고 거기는 이미 삯꾼 선교사들이 있기 때문에 자기는 아무도 찾지 않는 밀림으로 들어갔어요. 거기는 접시도 없어요. 나뭇잎사귀를 접시 삼아 밥을 싸먹는 거예요. 일년 내내 쌈밥 먹는 거예요. 인터넷도 안 되는 곳에 들어가서 주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거예요. 이제 말합니다. 사실은 내가 해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이게 해답인지 싶어서 시도해본 거란 말이죠.

해답이란 내 몸이 해답이 아닌 이상 어딜 가도 해답이 아닙니다. 만약 내 몸이 이미 해답이라면 어딜 가도 나는 해답이 되는 거예요. 뭔가 성경 속에서 발을 떼어서 세상으로 나간다면 뒤에 해답이 줄줄 따라 나와서 실타래처럼 성경 속에 있던 진리들이 엉덩이에 붙어서 잡아당겨져서 살아간다는 자체가 해답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살아간 사람들이 누구냐? 성경에 나오는 모든 선지자와 사도들이 이렇게 살아갔어요. 스데반 집사가 신학 연구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기드온이 신학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기드온은 방앗간 주인이었어요. 방앗간 주인이 신학을 하면 얼마나 했겠습니까. 그냥 하나님의 신이 임하니까 그 자체로 해답이 된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해답에서 나올 때 존재로 나오느냐, 아니면 사건으로 나오느냐? 이것이 문제가 되는데 만약에 존재로 나온다면 내 뒤에 있는 사슬처럼 줄줄이 따라오는 것들이 다 존재가 돼요. 그러면 존재와 존재 사이에 이어진 게 갑자기 끊어지면 나는 해답이 안 되는 수가 생겨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다는 존재로써 진리를 존재로 끌고 오면 항상 뒤돌아서 점검을 해야 돼요. “잘 있느냐? 하나님과 관계는 좋지? 벌써 기도 안 한지 사흘 됐는지 관계 끊어졌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살아가는 것처럼 진리가 어디 있는지 찾는 수고 이상으로 여전히 불안해요. 안정감이 없고 초조합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이 바깥으로 나올 때는 존재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건으로 나와요. 아담이란 사람이 분명히 있었지요. 자기는 아담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심지어 선악과 따먹을 때도 있다고 생각했고, 선악과나무도 있다, 생명나무도 있다. 존재입니다. 왜? 내가 여기 있으니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선악과 사건이 일어났다. 생명나무가 그 값을 한다. 나는 아담으로서 아담에 합당한 사건이 일어나서 흙이 되어가는 사건화 속에 사건들이 터지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말씀이 바깥에 나올 때는 존재로 나오는 게 아니고 사건으로 나오는 겁니다.

하나의 사건이 되려면 사건은 시공간에 저촉되지 않습니다. 여기 있다가 갑자기 저기 있고. 시공간을 초월해서 사건화 돼버리면 이 사건, 저 사건이 터지는 겁니다. 사건에 제일 좋은 예는 이런 거예요. 갑자기 파리가 날아왔을 때 파리를 치는 거예요. 이것 예상 했습니까? “파리가 아마 2초 뒤에 올 거야.” 이것은 파리를 내가 쳐야 된다는 내가 미리 예상치 못한 나의 돌발적인 행동과 파리가 나타나는 행동이 모여서 거기서 파리 치기라는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또 한 예를 들면 차가 절벽으로 떨어지려고 하는데 지금 2초만 지나면 절벽으로 떨어져요. 그런데 뭔가 날아와서 차를 막으니까 자기는 손 다 베이고 붕대 감고, 차는 벌떡 섰다가 퉁하고 내려앉고. 보니까 김수현이라. 착한 전지현은 벌벌 떨면서 봤고 뒤에 있는 범인들은 뭐 저런 게 다 있나하고 도망치고. 이게 사건입니다.

말씀이, 우리가 정답입니다. 우리가 정답을 알려면 우리가 존재로 내가 규정할 수는 없고 말씀에 대한 해답으로써 나도 모르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발생되는 거예요. 그 사건이 일어나면서 일어난 A사건에 그동안 잠잠하던 자들이 갑자기 관련성 있는 사슬로서 사건화 되어서 붕 뜨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예를 들면 기존교회에서는 구원받으려면 교회 나오세요. 목사가 사람들에게 존재를 명령합니다. 집에 있지 말고 당신 존재를 이 시간, 주일 낮에 교회에 와야 됩니다. 내가 확인할 거예요. 출석 점검할 겁니다. 나오세요. 그래서 말씀 듣고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성경을 그렇게 하지 않고 내가 집에 있다가 교회 나옴으로 말미암아 거기 다른 집사, 목사, 장로들과 얽히게 돼있어요. 새로운 사건에 얽히게 돼있어요. 어떤 사람은 나한테 존재를 요구했지만 막상 나는 거기 가서 사건의 유발자로 행세하게 되는 거예요.

사건, 사건하니까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어떤 물체를 A라면 3초 뒤에 B로 바뀔 때 우리는 이 물체가 B로 바뀌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뭘 놓치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바뀌는지 그 생성에 대해서는 몰라요. 바뀌기 전과 바뀐 후를 파악할 뿐입니다. 왜 그러냐? 우리 자체가 나를 존재로 보기 때문에 존재에서는 존재만 보이지 사건은 안 보이거든요.

예를 들어서 어떤 학생이 반에서 15등하다가 10등 됐을 때 전에는 15등하는 학생에서 이제는 10등하는 학생, 전에는 15등하는 존재에서 10등하는 존재가 되었구나. 앞으로 네가 5등까지 하는 존재, 그런 인간이 되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15등에서 10등까지 됐는지는 모른단 말이죠. 학원을 다녔습니다. 학원을 다녀서 뭘 배운다는 그것이 어떻게 15등에서 10등 됐는가를 따지고 보면 항상 존재기 때문에 존재와 존재는 연결이 안 돼요. 끊어져 있어요.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10등 되는 사건에 휘말리게 해버렸다. 휘말린 사건 속에서 나는 우연히 영어학원을 알게 되었고 영어학원도 내가 10등 되는 사건에 휘말렸고, 거기서 유명한 학원 강사를 만나서 기초를 알았는데 마침 시험 문제에 기초에 관한 것이 나와서 풀다보니까 15등에서 10등까지 되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나도 미처 모르는 어떤 사건에 휘말렸는데 그 사건을 구태여 이름을 붙인다면 내가 10등한 사건. 내가 10등해야 될 사건.

그렇다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구원에 대한 모든 과정은 하나님만 아시지 우리는 하나님만 아시는 구원 작업에 어쩔 수 없이 말려든 거예요. 요한복음 6장에 내가 온 것은 아버지 뜻을 행하려 함이라. 아버지 뜻은 뭐냐?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내가 마지막 날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게 성경 안에 있잖아요. 성경 안이 예수에게서 나올 때는 존재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건으로 나오지요. 그 사건에 휘말리면 구원받은 거예요. 그리고 그 사건에 진짜 휘말렸는지 어떻게 아느냐 하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아버지께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한다는 것이 믿어져버리면 내가 나쁜 짓 한 것과 구원 안 되는 것과는 전혀 별개 문제인 겁니다.

그러면 구원 안 되는 것은 뭐냐? 구원 안 되는 사건이 따로 있어요. 그 사람은 본인이 지옥 가고 싶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구원 안 되는 작업 속에 그쪽 노선의 사건에 휘말리다보니까 아무리 애를 써서 구원이 안 됩니다. 심지어 회개해서 자살까지 해도 구원이 안 돼요. 아무리 해도 구원이 안 생겨요. 가룟 유다가 스승 팔아먹었다고 자살할 정도로 착해요. 하지만 15년 동안 해도 구원이 안 생겨요.

구원이 안 생기니까 자기 존재가 항상 불안정하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억지를 부리는데, 자기는 구원받은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떤 사건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일으킨 사건에 휘말려서 구원됐다고 고백하는 게 아니고 나는 어느 교회에 가서 뭘 배웠고 세례 받았기 때문에 나는 누가 뭐래도 구원받은 존재, 구원받은 사람 맞는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리고 질문합니다. “목사님, 구원받았는데 그 다음에 무슨 일을 해야 됩니까?” 질문 자체가 사건에서 해답에서 나온 질문이 아니고 자기가 용쓰고 애쓰는 가운데 뭘 또 추가해야 구원에 도달 되겠느냐는 그런 존재에 관한 질문밖에 나는 어떻게 해서 구원받겠습니까? 성경구절을 어떻게 공부하면 구원되겠습니까? 어떤 정보를 확보하면 구원의 근거가 되겠습니까? 자꾸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2014년도 우리 교회 목표를 정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 교회가 이미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래놓고 하는 말이, 옆의 교회는 300명이 목표인데 우리는 500명을 목표로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500명 채우고 저쪽은 한 100으로 갈 때 이겼다는 즐거움이 있다고 해버리면, 성경에선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산 거지요. 그러면 이런 교회는 성경에는 없는 교회에요.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밖에 없어요. 그런데 교회가 벌써 두 개가 돼버렸어요. 다 가짜에요. 가짜기 때문에 바른 교회 하겠다는 자체가 가짜 교회에요. 성경에는 바른 교회라는 게 없어요. 왜? 교회 자체가 미흡함이 없기 때문에. 마태복음에 16장에 보면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거예요. 죽음의 권세, 지옥의 권세를 이기는 힘이 교회에서 나오잖아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지만 교회의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입구에 문 열면 힘이 나옵니까? 열면 거기서 에어컨이나 히터 바람만 나오는데. 그러면 강대상 기어 올라가면 지옥의 권세를 이기는 힘이 나옵니까? 제도적으로 봐서 평신도 되면 기를 적게 받고, 집사 되면 기를 더 받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 되면 기를 더 받아서 나자빠집니까? 도대체 권세가 어떤 행정조직에서 어떤 장소에서 어느 시간대에 오느냐 이 말입니다. 그게 설명이 안 되지요.

아까 파리가 날아온 게 사건이지요. 파리가 언제 날아올지 압니까? 사건은, 파리가 날아가는 것처럼 본인도 모르게 그 사건 때문에 본인도 존재에서 갑자기 사건화 돼버려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것이 교회라면 교회 자체가 성경의 내용이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사건화 된 교회로서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 사건화 된 교회는 설명이 안 된다니까. A에서 B로 변할 때 설명이 안 돼요.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오지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었습니다. 헌금 반을 감췄다가 걸려서 네가 나를 속임이 아니고 성령을 속임이라고 해서 성령이 죽이실 때 탁 쳐서 죽였습니까? 질질 끌면서 죽였습니까? 성령이 죽이실 때 심장부터 멈추게 했습니까, 두뇌부터 멈추게 했어요? 어떻게 했어요? 그게 안 되지요. 그냥 죽였다는 사건에 같이 말려있지 성령께서 탁 치니까 그때 숨을 거두었는지 치고 난 뒤에 2.5초 뒤에 숨을 거뒀는지 그런 것은 우리가 알 필요도 없고. 다만 거기서 성령이 계시는구나. 성령이 교회 되게 하기 위해서 죽이시는구나. 그것만 알면 된다니까요. 진짜 교회는 성령에 의해 죽어 나가봐야 그게 교회라니까요.

만약에 어느 교회가 예배당 지었는데 몇 사람 죽어 나가면 황무지 돼요. 죽으려고 옵니까? 겁나서 다 도망가지요. 그래서 진짜 교회는 어느 공간이나 어느 장소를 독점할 수 없다. 그걸 붙잡을 수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 속의 내용은 전부 다 사건화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관심은 사건이라 할 때 그 사건의 중심은 뭐냐? 사건의 중심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신약 쪽에서 창세기를 봐야 돼요. 사건의 중심은 구약에서 어린양입니다. 신약 요한계시록에서도 어린양의 보좌에서 모든 사건의 중심이 내려옵니다.

생명나무가 나무로서 그냥 존재하는 줄 알았지요. 생명나무가 오지 못하도록 사건화 된 힘이 나올 줄 아담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그 독성 때문에 죽는 줄 알았지 선악과 따먹은 그것이 저주의 영역으로 추방되는 것으로 죽음을 표현할 줄은 아담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사건화 될 때 그러면 창세기 1장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이야기에서 어떻게 사건을 끄집어낼 수 있는가? 우리는 사건을 끄집어낼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사건의 원천이 아니고 사건의 원천을 경유해야 됩니다. 사건의 원천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을 경유해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아는데 그러면 경유하기 전에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했다. 그럼 예수님을 경유하고 난 뒤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이 맞는가, 틀리는가? 이것은 대번이 틀린 거죠. 왜냐하면 예수님을 경유하기 전에 알았던 그 모든 용어들은 존재에서 나왔거든요.

내가 여기 있는데 신이 나를 만들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경유해버리면 나는 믿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을 믿습니다. 나란 존재가 사라져버린 후가 돼버려요. 예수님을 경유하게 되면 우리가 경유하기 전에는 “내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에 대해서 예수님도 아마 동의하실 거야.” “천지를 누가 만들었다고?”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기특해라. 사탕 줄게.” 이렇게 칭찬받을 줄 알았는데 여기에 사탄이 등장해요. 예수님을 경유하면 인간 존재는 안개가 되어 날아가 버리고 있으나마나한 존재고 진짜 한바탕 붙을 대상인 예수님의 적수가 나와요. 하나님의 원수가 나온다고. 고래 싸우는데 새우가 왜 끼어듭니까. 빠져야지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투장. 거기에 어디 사람이 끼어듭니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목사님, 내가 진실을 이야기할게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맞지요?” 틀렸습니다. 왜 틀렸습니까? 그것은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 말을 인용했기 때문에 틀렸습니다. 성경 그대로 읽었는데? 그대로 읽어도 틀려요. 그러면 목사님은 안 틀리게 읽어 보세요? 안 틀리는 게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개입할 입장이 못 되기 때문에.

성경에서 나를 앞장세울 때는 이걸 내가 사건화 되게 되면 이 속에서 우리는 뭘 만나느냐 하면 나의 원수가 아니고 천지를 만드신 예수님의 원수가 우리 눈앞에 목격 되게 돼있고 그 일처리는 우리가 처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보내신 사건화 시켰던 예수님께서 마귀를 처단시키고 마귀를 좇아내고 마귀를 굴복시키는 그 현장에 우리는 단순히 목격자로서만 사건에 말려들게 하신다는 거죠.

나는 이렇게 못났는데 나를 구원했습니다. 왜 못났는데? 그것은 그동안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이 마귀의 유혹에 의해서 살아온 나. 그런데 주께서 하나님의 원수를 발등상에 함께 하시도 주가 되사 그 주된 값을 마음껏 발휘하신다고 우리로 하여금 마귀와 놀고 있다고 지적질 해주시는 거예요. 주님이 주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마귀와 같이 살고 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에 의해서 사건화 되게 되면 세상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흠뻑 젖어드는 위대한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이 놀라운 고귀한 거룩한 사명을 감당해야 돼요.

신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에요. 우리 몸이 죄를 기억해요. 누려! 이제는 마음껏 누리는 거예요. 어떤 인간이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할 수가 없어요. 두뇌에 뇌간이라는 게 있어서 왼쪽, 오른쪽 정보가 교류되는데. 그러면 오른손 하면서 한 손은 수술하면서 뇌간을 자르고 바쁘다. 한쪽은 구세군 냄비에 돈 넣어야 되고 한쪽은 내가 몰라야 돼요. 팔이 몇 개가 돼야 돼요? 오십견 있는 사람은 하지도 못해. 팔이 올라가지도 않아.

처음부터 다시 해볼게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내용이 성경책에 있더라. 그러면 우리는 어디 있느냐? 여기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점선이 아니고 실선이에요. 신약에 와서 성도들이 성령을 받았어요. 그러면 갑자기 자기는 예수 안에 있어요. 창조주 안에 있단 말이에요. 우리의 본모습은 진리 안에 있어요. 진리 안에 있으면서 뭘 바라보느냐 하면, 내가 했던 행세, 나의 모형이 자기 존재를 긍정하고 자기 의를 챙기기 위해서 착한 척하면서 성경을 연구하고 계속 보는 거예요. 이 모습을 우리가 보고 있는 거예요.

이 모습을 볼 때 여기에서는 내가 여기 있고 단지 책이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는 나는 이 안에 있고 바깥의 모든 것은 묵시적 존재, 내가 여기 버티고 있는 존재로 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던 진짜 실체, 그게 뭐냐? 악마가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우리 자신을 가지고 계속 앞장세우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보이는 거예요.

그렇다면 전에 창세기 1장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건 맞는 말이죠? 하고 외쳤던 그것이 배후에 악마가 그렇게 사주한 것이 벌써 들통 난 거예요. 마귀가 네가 그것 알면 구원받아. 그것 알면 하나님 앞에서 칭찬 받을 걸. 라고 나한테 사기를 친 거예요. 이미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는 뭘 해도 죄가 되거든요. 사기를 쳐서 네 자신이 대견하고 훌륭하고 믿음 좋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마음껏 과시하라 이 말이거든요.

사탄이라는 것이 서서히 등장해요. 이런 걸 공부하려면 어려운데 사탄이 등장하는 것이 뱀으로 돼 있다가 서서히 등장합니다. 성경책이 있는데 성경책이 우리를 파견하거든요. 우리를 사건화 되어서 파견돼요. 창세기 5장 때 파견된 사람이 아담이고, 7, 8, 9장 때 노아고. 노아니까 그 당시에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장사하고 대조가 되면서 보이는 거예요. 그 다음에 모세 시대에는 모세 당시에 대조되는 새로운 모세 상이 있을 것이고. 엘리야 당시는 엘리야.

그러니까 모세, 엘리야 이런 사람들의 뒤 배경은 말씀에서 이미 존재 자체가 답이에요. 답으로서 나와서 그리고 이들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질문을 만들어서 답을 주신 주님께 도로 질문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셔야만 됩니까?”라는 질문을 하는 거예요. 이미 답은 나와 있어요. 천지를 창조했다. 남은 것은 왜 세상은 스스로 진화되지 않고 왜 하나님이 7일 만에 창조해야 됩니까? 8일도 아니고 10일도 아니고, 45억년도 아니고. 진화론에서 지구가 45억이고 우주는 137억년이거든요. 어지간히 길게 잡았어. 시간을 길게 늘어놓고 지 마음대로 요리하겠다는 거거든요.

왜 45억 동안 세대별로 주라기 공원도 나오고 이런 식으로 하지 않고 왜 7일 만이냐. “우리가 알기에는 45억년이 적당한데 왜 7일입니까?” 하고 물으면 정답은 45억년이란 대답은 이게 존재에서 나왔으니까 존재에서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지만 7이라는 것은 사건화 되거든요. 사건에 무슨 존재적인 논리가 개입됩니까. 말이 안 되는데. [별에서 온 그대]에서 전지현 차 몰고 가는데 김수현이 차를 막는 걸 어떻게 설명합니까? 유비쿼터스 식으로 막무가내로 등장하는 어떻게 설명이 돼요.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불수레가 존재론적으로 따지면 불수레가 과연 중력을 이깁니까? 가스는 만유인력에 의해서 온도가 높을 경우에 올라가는 거예요. 나중에는 결국 중력에 의해서 떨어지지만. 그처럼 과학적으로 설명이 됩니까? 별 크기 얼마나 작아야 “바로 이 집에 태어났습니다.” 하고 사라지고. 별이 얼마나 큰데. 그게 설명이 되겠어요? 홍해가 갑자기 벽이 되고. 저쪽도 빠져야 되는데 왜 벽이 돼요.

사건은 이미 나를 존래로 내가 여기 있다는 걸 통해서 파악해나가면 사건은 도망쳐요. 해명이 안 되는 쪽으로 도망쳐버려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쪽으로 도망을 쳐버려요. 사건은 우리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건 속에 있는 존재는 사건이 더 크기 때문에 그 존재는 사건에 대해서 무화, 존재는 사건의 일부로서 날아가 버려야지 거기서 따로 안 깨지고 남아있는 존재덩어리는 사건 속에서는 용납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초짜 기자가 와서 “여기는 화재현장입니다. 지금 화재사건입니다.” “김기자,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고시공부하다 촛불을 넘어져서 불이 났습니다.” “그럼 그 초가 얼마짜리입니까?” 중요한 것은 불이 났는지 사건이 중요하지 초가 중국산인지, 얼마짜리인지 묻는 게 아니지요. 단독적으로 묻는 게 아니라니까. 그 중에서 사건을 중간에서 끄집어내면 여러 개의 존재로 변해버리지 그걸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연결고리는 다 깨져버린 겁니다.

그냥 흘러가는 데로 사세요. 이 말이 더 쉽네. 지금까지 설명한 것보다. 그냥 흘러가는 데로 사시는데 이건 잊지 마세요. 그 사건의 원천은 오직 예수님에게서 나온다는 겁니다. 사랑받을 자는 사랑받고 미워할 자는 미움 받고. 그 모든 것이 예수님에게서 나온 거예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 이것 하고 끝났어요? 이게 시작이에요. 천지를 창조한 사건 속에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겁니다. 그것은 천지를 창조한 것이 원천이 아니고 십자가가 원천이었고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깔아놓는 환경으로 조성해나가는데 화단공사. 아직까지 거실 안 지었어요. 밑에 도로 닦는 것, 천지를 창조한 거예요. 마지막에 다 집 짓고 보니까 우리 눈에 띠지 않았던 악마가 나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창세기 1장부터 뭘 겨냥했다? 악마 나와! 너, 숨지 마.

악마는 인간의 존재로서는 파악되지 않습니다. 파악되지 않지만 아담 당시에 사건화 되면서 악마 대신 뱀이라는 피조물이 나왔어요. 피조물이 아담과 대화했습니다. 그 시대에 맞는 사건에 휘말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동물원에 가서 뱀과 이야기해봐야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이 시대 사건에 부합되기 때문에 한 거예요. 노아 당시에는 방주라는 배를 만들고 들어가기만 하면 심판에서 면제됐습니다. 요즘 배 만들어놔야 그냥 박물관용으로 입장료 오천 원 받고 사진 몇 장 찍고 할 뿐이에요. 이게 방주란다. 아이고, 크기도 해라. 여덟 명밖에 구원 못 받았다면서. 글쎄 말이야. 우리 같으면 많이 오겠는데. 노아가 지을 때 애썼을 텐데.

이것은 노아 방주가 사건이 아니고 존재가 되는 이유가, 들어가는 우리 자신이 존재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나를 존재라고 인정하게 되면 남는 문제는, “하나님이여 이 존재 어떻게 구원시킵니까?” 존재를 구원해달라는 거예요. 존재 구원은 없어요. 모든 것이 예수님 사건에 휘말린 판에 무슨 새삼스럽게 존재를 의미합니까. 안 되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라는 존재는 여기 있고, 그 다음에 나를 구원할 하나님의 존재가 저기 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이 있다고요? 야고보서 2장에 보세요. 하나님이 있다고? 귀신도 그 정도는 안다.

귀신이 지금 겁내는 것은 존재가 아니고 십자가 사건에 휘말려 있다는 이 사실을 아무도 이야기하지 말기. 존재는 없고 모든 것이 사건뿐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알려주지 마. 그것 하는 거예요. 지금도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을 때 마귀의 전략은 하나밖에 없어요. 너라는 존재를 네가 지켜야 된다. 스피노자가 한 말이에요.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이 만드는 겁니다. 스피노자 아니라도 할 수 있지만 나라는 인생은 내가 만듭니다.

그것이 마태복음 4장에 보면 마귀가 와서 돌이 떡 되게 해라. 네가 잘 돼. 네가 뛰어내려라. 네가 안 다칠 거야. 나한테 절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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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506건 중 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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