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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30212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2 - 육신의 역사(끝)자유게시판다니엘

20130212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2 - 육신의 역사(끝)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20130212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2 - 육신의 역사
(강의 : 이근호 목사)

◈ 침멀리는 왜 '구약선포의 개방성' 이란 제목을?

오늘이 침멀리의 '구약신학' 마지막 시간입니다. 그동안 줄기차게 왔는데 마무리를 잘해야 되겠지요. 교재 304페이지인데, '제 23절, 구약선포의 개방성' 이란 제목으로 마지막에 돼있습니다. 새로운 번역에는 뭐라고 돼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제목부터 설명해야 되겠지요. 침멀리가 이러한 제목을 붙인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침멀리는 구약신학자인데, 구약신학만이 하나님의 계시의 전부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겠죠. 그래서 '개방성' 이란 말을 붙인 거예요. 개방성이란 무슨 뜻이냐 하면, "아무리 신약성경이 있더라도 구약이 출발이 돼야 된다. 그리고 구약만이 하나님의 계시의 전부라고는 이야기고 싶지는 않다" 라는 겁니다. 자기는 기독교에 속해있지, 유대교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는 "구약과 신약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라는 것인데, 그냥 구약과 신약을 합해서 성경이라고 해버리면, 그런 것은 누구나 다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그것을 어떻게 말하느냐 하면, "구약 선포의 개방성이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개방성이란 말은, 왜 옛날의 축음기에 보면 나팔에서 소리가 나오잖아요. 그렇게 전체가 구약이라면, 신약을 향하여 닫힌 것이 아니고 활짝 열려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굉장히 상식적으로 보이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어요.

그게 무엇인고 하니, 신약에 있는 모든 개념은 신약에서 출발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예요. 즉 예수님에서부터 출발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즉 "이미 시작을 구약부터 했으니까, 신약의 모든 개념은 구약신학을 거치지 아니하면, 신약신학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구약신학자의 자존심이고,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것이죠. 즉 "신약에 나오는 모든 개념을 알고 싶다면, 구약신학에서 충분히 훈련과 교육을 받으세요" 라는 뉘앙스를 품고 있어요. 구약도 모르면서 신약부터 시작해서, 예수부터 출발한다고 해서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 침멀리 - '역사는 끊어지지 않는다' !!

그런데 정작 우리가 궁금한, "구약과 신약에 어떻게 연결된다는 말이냐?" 라고 질문했을 때, 여기서 침멀리가 내내 주장한 것이 있어요. "역사는 끊어지지 않는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묵시가 있지 않느냐고 할 때, 그 묵시는 사실은 묵시가 아니고 역사에 속한 아이디어였다는 것인데, 그것을 '묵시문학'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녹취 '구' - 그러면 '묵시'와 '묵시문학'은 오히려 반대말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문학은 사람이 하는 것인데, 물론 사람은 묵시에 속한 것이 아니고 말이죠. 그러니 역사에 속하고, 그 역사에 속한 사람이 구약의 개방성, 다른 말로 하면 역사의 개방성인데, 즉 하나님의 역사는 여기서 멈추는 게 아니고, 여전히 남아있고 여전히 뭔가 하실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남아있는 대목을 '묵시문학' 이라고 하자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신약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이미 구약부터 예상된 일이기 때문에, 구약이 끝난 이 지점에 묵시문학이 있었고, 이 묵시문학을 하는 주인공들은 역사에 속해있고 이 역사는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즉 역사에 속한 구약과 신약의 연결은 처음부터 끊어진 적이 없는데, 다만 끊어진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 간격은 묵시문학이 메우면 된다는 말입니다.

◈ 묵시문학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러면 묵시문학은 어떻게 해석하는고 하니까, 역사가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데 묵시문학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 묵시를 설명할 때는 다시 역사적으로 환원시켜서, 그렇게 역사로 되돌려서 해석을 하시면 그건 오케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겁니다. 침멀리가 말이죠.

이러한 이야기를 꼭 이렇게 구약신학을 하면서 해야 될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게 여기 304페이지 윗부분에 보면 나옵니다. 초반부터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 나와요. 마지막이기 때문에 침멀리가 어떤 대목은 함축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네 번째 줄에 보면 '여호와의 군대' 라고 했죠.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대목을 누가 새로운 번역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이러한 의식은 드보라의 노래(삿 5:11, 13)에 나타난 '여호와의 군대'에 관한 초기의 언급에서부터 다니엘서 7장 27절의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 관한 후기의 진술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구약의 진술을 포괄하였다.

① 여호와의 군대, ②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 !!

여기서 의견이 두 가지가 나왔는데, 하나는 '초기' 라는 말이 나왔고, 그리고 '후기' 라는 말이 나왔죠. 방금 제가 설명한 그대로인데, 그런데 후기는 무엇으로 끝납니까?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 이라는 것인데, 이런 것이 다니엘의 묵시문학적 표현이라는 겁니다. 침멀리의 말에 의하면 말이죠. 그 초기는 여호와의 군대이고 말이죠.

이러한 말이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데 벌써부터 상당히 신경을 쓰게 만들어요. 물론 사람은 군대는 될 수가 있어요. 청년들이 대한민국의 군인은 얼마든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이 과연 하나님 나라의 군대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게 가능합니까? 어디까지나 사람인데 말이죠.

천사가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은 우리가 이해가 되는 거예요. 그들은 본적지가 하늘나라이기 때문에 말이죠. 하늘나라에서 징집하면 하늘나라의 군대가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사는 동네가 부산이고, 그리고 대구잖아요. 그러면 거기에서 징집소집을 하나님이 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할 수 있는데, 과연 그게 우리에게 이해가 될 일이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의 군사들이 모자라서, "보충을 어디서 하지? 대구에 사는 놈을 뽑을까? 서울에 사는 놈을 뽑을까? 너희들, 여기 군대에 들어와" 라고 해야 군인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엇이 답답하고 무엇이 아쉬워서 사람을 하나님의 군대로 뽑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그렇게 뽑아서 무엇을 할 것이냐는 말입니다.

◈ 침멀리와 사도바울 !!

침멀리가 이야기한 '여호와의 군대' 라는 말을 생각해봅시다. 여기서 저는 두 가지를 이야기하겠는데, 먼저 침멀리 주장인데, 즉 "여호와의 군대라는 자의식이 시초였다. 그리고 후기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이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의 백성이다" 라는 겁니다.

그 맞은 편에는 제가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하면, 사도바울은 구약을 어떻게 보았느냐는 겁니다. 이것을 여기에다 대치시키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구약을 어떻게 해석했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침멀리는 이것을 생각하겠어요? 아까 강의에 의하면, 이런 생각을 안 하지요. 왜냐하면, 모든 신약은 신약부터 출발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 벌써부터 그의 신학이 수상하지요? 출발점을 신약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의 개방성이니까 말이죠. 에디슨이 만든 축음기의 나팔꽃처럼, 그 시작은 구약부터고 벌어지기는 신약인 거예요. 그것을 빅뱅처럼 다시 모으면, 출발은 신약이 아니고 구약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는 법은 없다는 말이거든요.

이렇게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는 법이 없다는 말은, 결과가 원인이 되는 법이 없다는 거예요. 원인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시간 순서에 따라서 결과가 나오고, 그것이 상식적이고 옳다는 겁니다. 따라서 구약이 먼저 있고 신약이 가기 때문에, 시작점을 신약으로 해서는 반칙이고, 그건 터무니없다는 생각을 침멀리가 하는 겁니다.

◈ 사도바울은 구약을 어떻게 봤는가?

그러니까 침멀리가 '구약선포의 개방성' 이라고 하는 거예요. 즉 구약에서 질문하면, 그냥 신약적으로 답변하면 된다는 겁니다. 질문을 신약이 구약에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저는 그런 줄 알면서도 고집(?)을 부립니다. 과연 "사도바울은 구약을 어떻게 봤는가?" 라는 겁니다.

침멀리가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군대라고 했지요. 보세요. 이게 벌써 인간 중심이잖아요. 침멀리에 의하면 "우리는 뭡니까?" 라는 것에 대한 구약의 답변은, "너는 거룩한 하나님의 군대야" 라는 겁니다. "그렇지요. 그럼 이야기가 되네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 하늘나라의 거룩한 성민이야" 라고, 그것이 마무리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시작은 여호와의 군대로 해서, 마무리는 여호와의 백성으로 끝난다" 라는 것, 이게 침멀리의 주장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질문 자체가 뭡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거기에 답변서로서 구약이, 즉 하나님의 계시가 여기에 부응하듯이 주어진 거예요.

그러나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증거한다고 했어요?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죠. 그러면 우리는 "나는 누구입니까?" 라고 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은 "나는 누구입니까?" 라고 물을 자격이 그 자체로는 없다는 말이죠.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너희는 하나님의 군대이다" 라고 할 때, 맞다고 수긍하면 안 되요. 수긍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기다렸다는 것이거든요.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저는 누구입니까? - 하나님의 군대야. -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요" 라고, 그렇게 은근히 기다렸으니까, 이것도 역시 반칙이죠. 사도바울이 보기에는 말입니다.

◈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그러니 이렇게 해야돼요. 사도바울이 주를 만났을 때처럼, "주님이 누구인데 우리를 하나님의 군대로 삼았습니까?" 라고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모든 활동의 주체가 우리가 아니고, 즉 "내가 어떻게 되느냐?" 라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주님이 누구인가?" 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에 그냥 들러리로 채택된 것이죠. 이게 선택의 의미인데, 즉 "너, 이리 와" 라고 호명되고, 호출된 겁니다. 이번 수련회 때 이야기를 했잖아요. 호명되고 호출된 것이라고 말이죠.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이다" 라고 해버리면, 사람들이 이렇게 답변할 수가 있어요. "나는 이스라엘에 관심이 없다" 라고 하면 이야기는 끝난 것이죠. "나는 이스라엘 자체에 관심이 없어요. 지금 우리나라를 걱정하기도 바쁜데, 남의 나라까지 걱정하지 못 합니다. 나는 단군의 자손으로 만족합니다. 단군의 자손, 그 이상의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아요" 라고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저희끼리 놀고, 우리는 우리끼리 놀자" 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아, 너희들끼리 하나님의 군대라고 많이 해라. 나는 거기에 굳이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 라고 해버리면, 그 이야기가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로 전환이 돼버립니다.

◈ 구약은 나의 족보 !!

그런데 과연 신약에 구원받은 이방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만 있으면 돼. 구약은 필요가 없어" 라고 했습니까? 그게 아니지요.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주님이 누구십니까?" 라고 나왔지요. 그렇게 나오면 남의 인생이라고 여겼던, 자기와 상관이 없는 역사라고 여겼던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가, 이미 우리 선배들의 역사였다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게 종합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때부터는 구약성경을 보는 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자기 족보 이야기를 보고 있는 것이죠. 이방인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마치 혈육적인 족보인 것처럼 읽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지금 자기한테 찾아온 그 예수님이, 그 똑같은 하나님이 이미 이스라엘을 찾아왔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면서, 그냥 찾아오시지 않고 구약 때 했던 이스라엘을 몽땅 이끌고 우리를 접점으로 해서 들어와 버렸다는 말입니다.

◈ 주님은 흥부가 아닌, 놀부 !!

여러분, 흥부전을 아시지요? 흥부전의 마지막에 박을 타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슬근슬근 톱질하세" 라고 해서 박을 깨면, 도깨비도 나오고, 똥물도 나오고, 또 보화도 나오잖아요. 그럴 때 놀부가 제비 다리를 분질러서 다시 고쳐주는데, 그 놀부가 한 일이 주님이 하신 일과 똑같아요. 일부러 분질러놓고, 즉 병을 주고 약을 준 거예요. 완전히 하나님은 놀부인데, 흥부의 착함을 거부하고 일부러 분지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분질러서 다시 붙여놓고는 박을 켜니까, 도깨비가 나와서 놀부를 매우 치거든요. 그렇게 칠 때 그 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기를 드리겠습니다. "① 박을 허락도 없이 개방했다. ② 박 속에 있으면서, 놀부의 과거 흔적까지, 그의 역사까지 이미 책임을 물어서 쳤다" 라고 하면, 이 중에서 몇 번입니까? 2번이잖아요.

우리가 예수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예수님이 와서 박을 켜보니까, 구약에 있었던 모든 이야기가 우리가 저질러온 일들과 합세가 된 거예요. 아담의 죄 때문에 우리가 죄 지배 아래에 있잖아요. 우리는 아담을 본 적도 없는데, 선악과는 구경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 개방이 아닌, 거꾸로 우리가 구약에 참여 !!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박을 켜보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그 짓이 지금도 우리가 일상처럼 하는 짓이 그 짓이라는 겁니다. 구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던 그 짓을, 지금 우리는 아침에 눈만 뜨면, 눈을 감기 전에도 그렇지만, 아무튼 눈만 뜨면 그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 때문에 구약역사가 남의 역사가 안 되는 겁니다. 개방은 무슨 개방이에요? 뭘 개방해요? 새삼스럽게 개방이란 것은 없어요. 우리가 구약에 참여하는 겁니다. 거꾸로 말이죠.

침멀리는 역사의 진행방향을 구약에서 신약으로 보잖아요. 그런데 성령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신약에서 도리어 구약 쪽으로 우리를 밀어버려요. 즉 "네가 바로 가인이야. 네가 바로 바리새인이야" 라고 말이죠. 하지만 우라는 십자가를 구경도 못했다는 겁니다.

사실 사도바울도 십자가를 구경하지 못했죠. 그렇게 구경도 못했으면서도 하는 말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라고 이야기한단 말이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네가 십자가를 언제 봤어?" 라고 하면, 사도바울이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구약의 사건에 반복적으로 참여시켰다" 라고 할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사도바울이 구약을 어떻게 볼 것이냐?" 라는 겁니다. 그렇게 봐야 구약이 풀린다는 이야기죠. 사도바울이 구약을 십자가 중심으로 봤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 중심으로 보니, 우리는 침멀리 잊어버린다" 라고 하면, 그것도 안 돼요. 십자가란 자체가 피해를 받은 자니까, 반드시 십자가 바깥에서 하는 구약해석을 철저하게 우리가 알고 있어야, 어떤 것이 가해자인 것을 알아먹게 된다는 말이에요.

◈ 짐승의 정체가 곧 국가 !!

이번 수련회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물렁물렁한 역사를 딱딱하게 냉동동결을 시킨다고 했지요. 그렇게 냉동동결을 시키는 이유가 뭐겠어요? 그것은 곧 짐승의 나라를, 즉 유동하고 변화하는 짐승의 활동과 사건을 하나의 젤리처럼, 혹은 우뭇가사리처럼, 또는 묵처럼 동결을 시켜버리면, 그러면 드디어 짐승의 정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 짐승의 정체가 바로 국가인데, 그런 국가가 무슨 성향을 갖고 있어요? 그것은 바로 종교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종교국가, 국가종교, 그렇게 두 개가 모두 해당되는 겁니다. 종교국가라는 것은 로마카톨릭과 같은 경우이고, 그리고 국가종교는 동방의 모든 교회들과 이슬람교가 여기에 해당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불교는 부탄과 같은 경우입니다. 부탄은 국민의 90% 이상이 불교도인 불교왕국인데, 세계에서 행복감이 일등이라는 말이죠. 왕은 영국의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사람인데, 불교적인 정신으로 어떻게 행복을 줄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 옆에 있는 나라가 네팔이고 말이죠.

그리고 헌법에 의해서 종교를 규정해놓은 이슬람 국가가 있는데, 말레이시아와 같은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는 겁니다. "모든 말레이인들은 이슬람교인이다" 라고 아예 규정해놨어요. 물론 실제로는 다른 종교도 허락하고 있지만 말이죠. 그게 종교국가이고, 또 국가종교라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어디의 줄기냐 하면, 로마의 국가관이 성립되고 번진 거예요. 로마총독 빌라도의 선언에 의해서 예수님은 살해를 당하는데, 그렇다면 로마가 결국은 짐승의 앞잡이고, 그런 짐승 중의 하나가 헤롯이죠. 짐승의 속국, 즉 로마에 종속을 받는 형태로서, 로마가 해야될 일은 여호와 이름을 빙자해서 진짜 여호와 하나님을 죽여버리는, 그게 여호와와 여호와의 만남이라는 겁니다.

◈ 여호와와 여호와의 만남 !!

이번에 수련회 때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박상민과 박상민의 만남, 즉 진짜 박상민이 가짜 박상민을 만났을 때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겠습니까?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이것은 이미테이션이 아닙니다. 진짜로 자기를 박상민이라고 하니까 말이죠. 그러면 진짜는 박상민이 아닌 것이 돼요. 즉 "내가, 내가 아닌가?" 라는 겁니다.

복음을 알고 있다는 증거가 뭔고 하면, 기독교라는 취미생활에 밀리지 않을 때 비로소 복음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보통 사람은 기독교가 취미가 아닙니까? 사람이 취미라는 말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문제인데, 복음을 아는 사람은 복음이 없으면 살아도 산 게 아니잖아요.

하지만 취미생활을 하는 사람은 대수롭지 않은 문제고, 하지만 복음을 아는 사람은 복음이 자기보다 더 소중한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 둘이 만났다고 하면, 그러면 누가 복음에 대해서 진지하겠습니까? 취미 쪽이겠어요? 생명 쪽이겠습니까? 그럴 때 우리는 생명이란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이 복음이기에, 그것을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 그런데, 복음을 취미로 여기는 인간들 !!

그런데 "복음은 생명이다" 라는 것을 취미로 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십자가 때문에 삽니다" 라는 것을 취미로 여기는 사람들, 바로 그런 자들이이 이단이거든요. 그런 사람들은 만나서 대화를 해보면 대번에 들통이 나요. 자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결국은 복음이고 예수고 간에 자기가 귀하기 때문에, 자기를 받쳐주기 위해서 그런 취미생활을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대번에 그 차이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로마나라의 지배를 받는 유대나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복음이 아니고 유대나라라는 국가 정체성이 제일 우선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 나라는 내 나라에 속하지 않다' 라고 하며 죽고 마는데, 그러니 로마나라 밑에 있는 헤롯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구약은 그야말로 구약 선포의 개방성이 아닌, 구약역사의 개방성이 되어야해요. 제목을 바꿔야 된다는 겁니다.

◈ 그러니 구약역사의 개방성이 아닌가?

침멀리가 선포라는 말을 한 것은, 구약을 복음이라 여기고 그런 말을 했는데, 하지만 그의 주장에 의하면, 구약선포의 개방성이 아니고 구약역사의 개방성이라 해야 맞아요. 구약역사는 짐승나라 만들기인데, 그렇게 만들어서 무엇을 하는고 하니, 예수님을 가해하는 가해자로서, 인류의 대표자로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아담에게 찾아왔던 바로 그 악마가, 국가란 이름으로 드디어 예수님 만나서 자기의 본색이 드러날 때까지, 구약은 그렇게 긴긴 시간을 흐르고 흘러온 거예요.

그것을 사도바울은 한 마디로 이야기했습니다. "구약은 육에 있다" 라고 말이죠. 이것을 사도바울은 함축해서 어디에 담았느냐 하면, '육신' 이라고 표현했어요. 그것이 고린도후서 3장의 이야기입니다. "너희들은 성경을 읽을 때 문자로 읽지? 나는 영으로 읽는다" 라고 했을 때, 영으로 읽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자유로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읽는다는 겁니다.

(고후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 감춰놓은 비밀이란 말은?

그러면 성령을 안 받으면 구약은 해석이 안 되지요. 감춰놓은 비밀이라는 말이죠. 사실 이 말도 어려워요. 감춰놓은 비밀이란 말은, 드러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드러나기 때문에 비밀이란 뜻이죠. 말 자체가 어렵지요. 계속 드러내기 때문에, 즉 비밀로 유지될 수밖에 이유가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그 이야기를 못 알아듣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어보면, 저기 아프리카 콩고 나라의 말을 우리가 알아듣습니까? 콩고 사람이 계속해서 말을 하는데도, 그것이 우리한테는 비밀이 되고 감춰진 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세상에 속한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은 십자가 복음을 어리석은 말로 여겨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되어있다" 라고 했어요.

그게 마태복음 13장이나 사도바울의 서신서에 보면 나오잖아요. 사도행전에도 나오고 말이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또한 감추었다는 말이 아니고, 분명히 드러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그냥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못 알아듣도록 해서 드러낸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성령에게만 고유한 해석권한을 주기 위해서 말이죠.

(행 28:26)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 성령이 없으면, 무지몽매한 '나' !!

그러니 "내가 성령을 받아서 해석했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일깨워줄 때만 이해됩니다" 라고, 그렇게 돼야해요. 즉 "내가 성령을 받아서, 이만큼 수북히 가지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해석을 해봐?" 라고 해서 해석이 되는 게 아니고, 성령께서 깨우칠 때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 성령이 없으면, 성령을 받은 '나' 자신은 어떻게 됩니까? 그냥 무지몽매한 자가 되는 것이죠.

지금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것 같은데,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제가 미처 설명을 하지 않은 게 있어서 그러한데 말이죠. 육신이란 것은 몸뚱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만약 몸뚱이라고 하면, '근육질+성령' 이라고 되는데, 물론 그렇게 되면 자기 몸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육신 개념은?

하지만 사도바울의 육신 개념은 무엇인고 하니까, 이 껍데기 개념에다가 성령을 받는 개념이 아니고, 이 육신은 하나님이 다룰 때 육신이 되는 거예요. 계속 다뤄져야 돼요. 그런데 "이제는 성령이 있으니, 주께서 안 다뤄도 됩니다" 라고 하면, 애초부터 육신이란 개념 자체가 날아가 버려요.

이런 것 때문에 철학적인 개념들이 필요한데 말이죠. 즉 "나한테는 이런 점이 모자란다. 그러면 모자란 부분을 채우면 될 것이 아니냐?" 라는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사도바울은 육신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에 의하면, 우리는 "나를 '나' 라고 할 자격이 없다" 라는 겁니다. 그냥 육신이죠.

이 육신이란 말은, 구약에 의하면 언약에 의해서 다뤄지는 재료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영혼으로 다루면 네가 찬양하게 될 것이고, 육신으로 생각해서 다루면 너는 흙이 될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게 시편에 나오거든요. (목사님, 시편 어디죠?)

◈ 주님께서 '나'를 다룰 때만 !!

그러니 "하나님, 나는 육입니까? 영입니까?" 라고 물으면 안 돼요. 다뤄진다는 말을 이해를 못할 때는 그것을 묻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고, 주님이 나를 다룬다" 라는 뜻이 아니고, "내가 다룰 그 순간에만 비로소 너의 본체가 드러나는데, 너를 죄 있는 것으로 다룰 때는 한 줌의 먼지나 흙으로 다뤄진다" 라는 거예요.

그러니 아무리 노래를 잘 부르고 운전을 멋있게 해도, 그것은 흙이 운전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믿음이 와서 찬양할 때는, 이것은 영으로 다뤄진다는 말입니다. 즉 육으로 다루든 영으로 다루든 간에, 그 우리가 방향을 바꿔서, "그러니까 나는 여기에 있잖아요" 라는 답변을, 주님 쪽에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나는 여기에 있다" 라고 우길 때도, 자기가 자기 입장에서 볼 때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는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너, 거기에 있나? 무엇을 해줄게" 라는 입장이 아니고, 그냥 주님의 이름이 계시매 덩달아 있다는 거예요. 주님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뭔가 주님의 기능을 하라고 있다는 겁니다. 불신자도 마찬가지고, 지옥에 간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지옥에 간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죠.

◈ 주님은 말씀이 전부 !!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라고 할 때, 주님은 우리한테 관심이 없고 "따먹지 말라" 라는 것에 관심이 있어요. 말씀이 우리보다 우선하는 겁니다. "따먹지 말라" 라는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주께서는 "따먹었나? 이번만 봐줄게" 라고 게 것이 없어요. 분명히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라고 했죠? 그러면 그 근원을 다 발생시켜줘야 말씀이 말씀으로 위신이 살아요. 하나님은 그게 전부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의 위신을 살리기 위해서 아담을 필히 죽어야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아담에게 약속을 남긴 것은, 아담을 살리기 위해서 약속을 주신 게 아니란 겁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약속을 남긴 그 약속의 위신을 위해서 아담은 반드시 지옥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보다 말씀이 먼저라는 말이죠.

우리는 풀과 같고, 아니 풀에 피어있는 꽃과 같죠. 그야말로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데, 하지만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라는 겁니다. 그게 이사야 40장의 이야기인데, 그리고 로마서 9장에는 뭐라고 합니까? 거기에 에서와 야곱 이야기가 나오는데 말이죠.

에서와 야곱이 선이나 악을 저지르기 이전에, 그 뒤의 중요한 말씀을 놓치면 안 돼요. 말씀을 세우기 위해서 야곱은 무엇을 하기도 이전에 사랑을 받아야 되고, 에서는 태어나기도 이전에 저주를 받아야 되는데, 이것은 에서와 야곱을 살리고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고, 말씀을 굳게 세우기 위함이란 말이죠.

(롬 9: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롬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이 말씀 위주로 가버려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말씀이 없이 아무 것도 된 것이 없다" 라고 했잖아요. 우리 위해서 말씀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에서 사기를 치는 겁니다. 무엇이든지 주님 앞에서는 '아니오' 라는 것이 없어요. 우리는 자식이 죽고 교통사고가 나고, 그야말로 개판이 돼버렸어요.

◈ '우리' 라는 봉지는 이미 찢어져 !!

그 예를 얼마 전에 설교시간에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니까 '우리' 라는 봉지가 찢어졌다는 말을 했잖아요. 찢어진 봉지를 억지로 스카치 테이프로 붙이려고 하지 말고, 찢어진 채로 놔두란 말이죠. 그래야 엄청난 분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주님께는 '아니오' 라는 것이 없어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모든 것이 '예스' 라는 겁니다. 만약에 주님이 영화감독이라면, 모든 장면에 대해서 오케이, 다음 장면도 무조건 오케이예요. 우리는 낭패를 당해서 지금 엎어지고 자빠지고 그야말로 난리가 났는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전부가 오케이라는 말이죠.

◈ 믿어야 하는가? 명령을 따라야 하는가?

그런데 침멀리는 무엇을 주장합니까? 역사인데, 그게 누구 역사입니까? 인간이 주인공이 되는 역사, 그래서 그 뒤에 보면 스스로 딜레마에 빠진 내용이 나와요. 교재에 보면 말이죠. 그게 무엇인고 하니, "믿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명령을 하시는가?" 라는 겁니다. 그것이 교재 305페이지에 보면 나옵니다.

그래도 침멀리가 구약의 박사인데, 그리고 이 정도 수준의 책을 썼다고 하면 그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끝까지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돼요. 믿어야 된다고 하면 "믿으면 구원이 된다" 라고 하든지, 그게 아니라면 "명령을 따르면 구원을 해주겠다" 라고 하든지, 둘 중의 하나여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믿어야 된다고 해놓고 왜 명령이 추가적으로 들어가는지, 그 이유가 납득이 안 된다는 겁니다. 마치 로마서에서 보는 그 이야기와 똑같은 것을,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이야기를 최고의 구약학자가 하고 있어요. 딜레마인데, 그래서 기껏 내놓은 것이 '개방성' 인데, 자기는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해결을 어디서 합니까? 신약에 가서 해결을 보든지 알아서 하라는 겁니다. 자기는 구약학자니까 이렇다고만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죠.

여기서 교재 304페이지와 305페이지를 보겠습니다.

** 이 명령은 일면 야훼의 자비로운 인도하심과 적으로부터 고난을 당할 때 보호한 것과 혈연 장소에서 특별히 나타난 축복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 그러나 이 명령은 동시에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며 복종을 기대하고, 만일 불복종할 때는 생존에 위협을 가져오는 강압적인 계명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 예언은 결국 심판의 심연의 길로 안내하였다.

이것이 딜레마라는 겁니다. 보호를 해준다면, 그러면 보호해주니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거리면 끝나는 문제잖아요. 그런데 보호해준다고 하면서 명령을 하면, 명령을 안 지키면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말인지, 그게 아니면 순종을 안 해도 보호해준다는 말인지, 우리는 항상 과정보다 그 결과가 보고 싶잖아요. 침멀리는 그 결과에 대해서 계속 미진한 채로 자기의 거대한 책을 마무리를 짓는다는 겁니다.

◈ 여전히 육적인 침멀리 !!

그러면 어디에 문제가 있습니까? 처음부터 자기를 위한 세상이 아니고,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란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겁니다. 다시 할게요. 육신은 뭐가 육신이냐 하면, "하나님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라고 하니까, 그게 육신인 거예요. "하나님이여,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는 말을 하니까, 주님께서 "이런 인간아, 그러니 육신에서 못 벗어나지"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왔다고 하면,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그런 질문을 할 필요도 없고, 입장도 전혀 아니고, 그럴 권리도 없구나"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태초부터 오직 주 예수님을 위해서 만들어져야 될 놈인데, 그동안 철이 없고 성령을 안 받아서, 그래서 육신적인 생각만 해서, 맨 날 "주님은 저한테 무슨 의미입니까?" 라는 질문을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자체가 후회스럽다는 겁니다.

하지만 후회만 하면 무엇을 합니까? 지금도 매일같이 쏟아내고 있는데 말이죠. 지금도 우리는 매일같이 그렇게 하잖아요. "하나님이여, 왜 일이 잘 안 됩니까? 왜 내 뜻대로 안 됩니까? 앞으로 어쩌란 말입니까?" 라고, 그렇게 계속 입을 나불나불 거리고 있잖아요.

◈ 로마, 그 이상의 국가는 없어 !!

그럴 때 흔히 하는 것이 "명령을 지켜라. 지시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 라고 나오니까, 이게 바로 짐승의 나라, 예수님을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자, 그래서 구약이 결국에는 헤롯왕국이 되었고, 그 헤롯왕국은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로마는 이 세상 모든 국가의 최종적인 상태인 바벨론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국가는 로마 이상이 되는 국가는 없는 거예요. 지금 세상에 216개국의 모든 나라는 전부가 다 로마에 붙어있는 작은 타일과 같은 거예요. 타일을 통해서 외벽이 형성이 되잖아요. 로마라는 짐승이 외부에 드러나는, 그런 햇빛에 반짝이는 각종 작은 조각의 타일들이란 말이죠.

그리고 그 로마가 하는 일들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함으로서 그동안 감추었던 비밀이 비로소 드러나는 겁니다. 그게 로마의 제일 중요한 임무라는 말입니다. 나머지 모자라는 것은 10분만 쉬고 채웁시다.

2013-02-22 녹취 : 한윤범

2014,1,3 재정리함 - 녹취 '구'

20130212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32 - 육신의 역사
(강의 : 이근호 목사)

제가 첫째 시간에 했던 '여호와의 군대' 라는 말을 아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이 여호와의 군대를 어떻게 설명했는지, 거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백성'도 설명하지 않았는데, 즉 사도바울이 구약을 해석할 때, 지극히 높은 성민도 어떻게 했는지도 설명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지난 시간에 제가 한 것은, 침멀리가 모든 것을 역사적으로 했다는 것인데, 자기의 책을 역사적으로 처리해버리는 식으로 되어있다는 것이죠.

첫째 시간에 한 것을 다시 한 번 대립을 시켜봅시다. 여기에 이렇게 선을 그어놓고, 이쪽은 침멀리의 "역사적으로 끊어지지 않는다" 라는 것이고, 여기 이야기한 것은 "사도바울이 구약을 어떻게 봤느냐?" 라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구약을 해석할 때 제가 제시한 핵심개념이 뭐냐하면, '육신' 이라는 용어를 썼지요.

사도바울의 '육신' 이라는 개념이, 성령이 왔기 때문에 역사적 개념으로 인간을 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역사 속에서 인간은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명령을 받고 실천에 옮기는 주체로서 인간은 역사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어요. 그러나 육신이란 것은, 명령을 받되 그 명령이 알아서 육신이 되게 해서, 명령이 정녕 죽으리라는 쪽으로 나간다고, 그것을 아까 창세기 2장의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으리라" 라는 것으로 설명을 했잖아요.

◈ 육은 죽으리라 !!

이 육신에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오늘 강의에서 제일 핵심적인 부분인데, "육신은 죽음을 함유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이게 로마서의 핵심이 아닙니까? "인간은 죽는다" 라는 것이 아니라, 육신은 죽음을 함유하고 있기에 육신이라고 표현되는 거예요.

그러니 "육은 죽으리라" 라는 것은, "잘 해라. 잘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뜻이 아니고, 육신이기 때문에 반드시 죽는다는 겁니다. "제가 나쁜 짓을 했군요" 라고 해도, 나쁜 짓을 해서 죽이는 게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육신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육신은 죽는 게 운명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안 죽으려고 하지 말고, "누구십니까? 나를 죽이시는 분이?" 라고, 그것을 알면 되는 거예요.

흥부와 놀부 이야기를 하면서, 죽음을 함유한 육신으로 표현함으로서 그 안에 구약역사가 다 포함되어있다고 했지요. 박을 타면 구약의 새로운 육신적 의미로서 쏟아지는 거예요. 즉 육신은 육신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은 육신으로 살아왔다는 것이 뒷받침이 돼야하는 겁니다.

그러나 침멀리는 모든 것을 역사로 봤기 때문에, 그런 신학적인 개념이 없이 그냥 확성기처럼, 마치 나팔꽃처럼 벌여놓고, 그것을 '구약 선포의 개방성' 이라고 했다는 말이죠. 우리가 이런 점에 대해서 모른 척하고 그냥 넘어가면 안 되고, 필히 알아야만 돼요. 그렇지요?

◈ 성전은 없고, 나라는 망해도, 제사만 있으면 산다 !!

침멀리가 여기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고 성실하고 함축성이 있게,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 305페이지와 306페이지에 보면 설명을 잘해놓았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읽어보면 상당히 복잡하겠지만, 제가 쉽게 설명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 'P 역사' 라는 것이 나오는데, 보수 측에 있는 사람들은 D, E, P 등이 나오면 그냥 왕짜증을 내요. 'P 역사' 라는 것은 최종의 역사지만, 최초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P 역사' 라는 거예요. 이 P는 'priest' 라고, 즉 제사문헌이라는 말이죠.

보수 측에서는 아예 이런 가설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나오면 때려치우라고 하거든요. 어쨌든 이 사람들이 이렇게 거론하는 이유를 알아야 되니까 살펴봅시다. 이게 제사거든요.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성전은 없고, 나라는 망해도, 제사만 있으면 산다" 라는 겁니다.

매우 간단하죠? 마지막에 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에, 그러면 우리는 어떤 기반을 갖추어서 메시아를 기다릴 것이냐는 것인데, "제사와 율법만 있으면 우리는 메시아와 접촉할 수가 있다" 라는 가능성, 즉 개방성을 그것으로 챙기겠다는 거예요.

그 당시의 수많은 전설들 중에서, 오늘날 제사가 진짜 하나님과 메시아와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접촉점이라는 것만 골라서 편집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편집한 게 P문서라는 말이죠. 그 P문서에 준해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에 P문서의 조각들을 집어넣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집어넣으면,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제사' 라는 접촉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창조는 이렇게 했다" 라는 식으로, 그때 멸망하고 난 뒤에 사람들을 다시 규합하기 위해서 텍스트, 즉 신앙의 교과서를 재편집해서 줬다는 말입니다. 어디서 말입니까? 이집트에서 그렇게 만든 거예요.

왜 이집트냐 하면, 톨레미 정권 아래에서 유대교가 보호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죠. 예루살렘보다는 쫓겨난 이집트에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거기에서 70인역도 만들고, 묵시문학도 피어났다는 말이죠. 예루살렘은 버렸지만 디아스포라, 즉 '흩어진 사람들' 이란 뜻인데, 이 '디아스포라' 라는 유대공동체를 하나의 정신적으로 집결할 수 있는 교과서를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래, 우리는 그 어디에 있더라도 상관없어. 어떤 공간에 있더라도 상관없어. 왜냐하면, 메시아는 이 제사문헌의 성취를 위해서 말씀대로 오실 분이기 때문에, 기다리면 되는 거야" 라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호응해서 내부에서도 시리아와 반란을 일으켜서 '마카비' 라는 왕국이 세워져있었고, 마카비 왕국의 성립으로 말미암아서 로마도 유대인을 함부로 못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가 "저들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다 빼앗으면 안 되겠구나" 라고 해서, 즉 "종교는 네 마음대로 해라. 세금만 꼬박꼬박 잘 내라. 우리는 치안과 세금 문제만 관여할 테니 나머지는 알아서 해라" 라고 해서, 로마의 지배를 받는 분봉왕으로 헤롯이 세워진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붙잡혀서 로마 총독인 빌라도의 최후판결에 의해서 살해를 당하고 말이죠.

◈ 묵시가 역사의 단면을 완전히 까발리는 형국 !!

그러니 묵시가 역사의 단면을 완전히 까발리죠. 역사의 지층이 퇴적층이, 즉 누적이 된다는 말이죠. 단층이 아니고, 인간이 만들 수 있는 모든 국가적 정체성들은 시루떡처럼 차곡차곡 쌓여야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과하면서 지층들의 단면이 드러난다는 것이죠. 그래야 "나는 이 세상에 속한 게 아니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성립될 게 아닙니까? 사도바울의 편지에서도 다 겪게 되고 말이죠.

역사라는 것이 "그냥 역사다" 라고 할 때는,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자처하는 인간들만 보여요. 하지만 묵시로 보면, 인간도 육신으로 날아가 버리면, 결국은 역사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종교란 이름의 국가단체, 그런 것으로 악마의 활동성이 나오는 겁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예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는 말을 사도바울이 했잖아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희를 꾀더냐?" 라고 말이죠. 그런데 실제로 뭐가 보입니까? 십자가가 어디에 있어요? 로마 베드로 성당의 지하창고에 있어요?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가 보인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십자가가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꼬시더냐?" 라고 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사도바울의 편지가 진짜로 영으로 쓴 편지이기에, 억지로 풀다가는 멸망을 당하기 십상이라는 겁니다.

◈ P문서에 의하면 '남은 자'들이 있었다 !!

지금 두 번째 시간에서 설명해야 될 것은, 침멀리가 구약과 신약을 이으면서 무엇을 제시하는지 봐야 됩니다. 교재 305페이지에 나오는 유명한 말인, 즉 '남은 자' 라는 것인데, 침멀리는 "P문서에 의하면 남은 자들이 있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반박과 논란과 공격이 들어올 수도 있고, 거기에 대한 적당한 근거를 제시해서 자기 주장이 옳다는 것을 밝혀야 되겠죠.

여기에 대해서, 즉 "그렇게 남은 자가 될 때, 누가 자기 스스로를 남은 자라고 자처를 하느냐?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에 의해서 남은 자가 되게 했는가? 도대체 어느 쪽인가?" 라고 하는 질문에 대해서, 침멀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에 남은 자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남은 자가 아니고, 그것은 바로 성전도 없고, 모든 국가가 다 깨졌을 때 인간이 내세울 것은, 인간이 극한으로 몰리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 또는 제사, 그것을 붙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남은 자라고 했다" 라고 보는 겁니다. 거기서 나온 것이 P문서고 말이죠

◈ freude am Gesetz !!

그러면 여기서 "그들이 남은 자라고 치더라도, 그들의 과연 계명을 온전하게 지켰느냐?" 라고 했을 때, 침멀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계명을 지킨 게 아니고 즐겼다" 라고 말이죠. 그게 교재 306페이지 중간쯤에 나오는데, "계명을 즐긴다"(freude am Gesetz, Kraus), 그렇게 되어있죠.

이것은 '크라우스' 라는 구약학자가 말했던 "계명을 즐긴다" 라는 것인데, 즉 남은 자들은 계명을 즐겼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식으로 메시아를 만날 준비를 했다고 보는 거예요. 끝까지 그들은 역사를 포기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재 305페이지 중간에 보게 되면, '남은 자'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를 했어요. 하나님의 예언자들, 주로 에스겔을 언급하는데, 그 에스겔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스스로 심판해버리고, 거기에 에스겔 37장의 말씀이 나오는데, 적신(赤身), 즉 '벌거벗은 몸' 이라는 겁니다.

** 이제 적신이요, 헐벗고 죽음에 처하여 메마른 뼈와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겔 37: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겔 37: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겔 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겔 37: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 뼈다귀가 무슨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이스라엘이 뼈다귀처럼 죽음에 처하니까, 비로소 하나님이 돌아오라고 하신 그 음성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뼈다귀가 무슨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면 뼈다귀가 아니죠.

그러니까 침멀리의 이야기는 이겁니다. 에스겔이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해골에게 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런 이야기를 듣는 그 사람들의 역사적 실존이 더욱 중요하다고 보는 거예요. 에스겔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이죠.

에스겔이 하는 말이, "나는 하나님을 만났는데 뼛속에서 이런 음성을 들었다" 라고 할 때, 에스겔의 말을 듣는 청중들의 심성, 그들의 심리적인 상태, 그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 우리는 뼈였구나. 미처 우린 그걸 몰랐지. 늦으나마 이제 회개하게 되면, 우리는 남은 자가 되고, 그런 남은 자에게만 메시아가 찾아오게 된다. 그래 기다리자. 따라서 성경을 우리가 다시 해석하자. P문서적으로 성경을 창세기부터 다시 보자" 라고, 그래서 그들은 메시아를 만날 준비를 했다는 겁니다.

◈ 에스겔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네 ??

왜 침멀리가 이런 주장을 할까요? 침멀리는 어디에 껴들지 않습니까? 에스겔과 하나님 사이에 껴들지 않고 있어요. "에스겔이 하나님을 만났다" 라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에스겔이 말하더라" 라는 말입니다. 즉 "에스겔이 해골 골짜기에 갔다고, 그렇게 에스겔이 이야기를 하네" 라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 침멀리와 가다머 !!

침멀리가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면, 이게 가다머가 주장한 철학이고 해석학인데 말이죠. 구약의 해석, 역사의 해석이란 것은, 옛날 당시 그때 청중들의 마음가짐으로 돌아가게 되면, 옛날에 있었던 의미를 우리가 현재에 받을 수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니 구약성경을 해석하면서, 하나님과 에스겔 사이가 어떠냐는 것은 몰라도 되고, 에스겔이 받았던 그들의 심정을, 우리도 같은 인간이니까, 우리가 현재 21세기에서, 에스겔에게 계시가 된 것이 기원전 6세기 후반이거든요. 그러니 그때 심정으로 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그때와 동일하게 받을 수 있으니까, 이것이 바로 말씀이 우리한테 있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주장한다는 겁니다. 지금 침멀리가 말이죠.

이렇게 되면 하나의 교훈이니, 이것은 뭡니까? 우리는 교훈만 좋으면 언제든지 받을 가능성이 있는, 그런 마음이 강퍅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밖에 안 되는 거예요. 우리가 얻어맞아도 너무 많이 맞았으니, 이제는 더 이상 고집을 안 부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이란 맞으면 고집이 더 세게 돼요. 많이 맞았다고, 그리고 징계를 받는다고 해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지금 힘이 없다 뿐이지, 힘만 있으면 다시 헤헤거리면서 잘난 척하는 겁니다. 다만 힘이 없어서 잘난 척을 못하고 있는데, 옛날에 하던 그 행세가 어디로 갑니까? 안 갑니다. 다시 그대로 내밀게 돼있어요.

그래서 역사적인 해석법은 이런 한계에 있습니다. "다윗이 어떻게 했다" 라고 목사들이 설교할 때, "우리도 다윗을 본받아 그렇게 합시다" 라고 나오는 것과 똑같은 소리를 지금 침멀리가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모르는 목사들 설교를 들어보면, "우리도 본받아 그렇게 하자" 라고 나오는데, 그것은 100% 가짜입니다.

◈ '남은 자'는, 오직 은혜로만 남아 !!

그러면 진짜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무시했으면, 아예 우리를 제쳐놓고 하나님께서 에스겔하고만 상대를 하느냐?" 라고 나와야 돼요. 왜냐하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과 에스겔 사이에서 확답된 효과로 새롭게 생겨난 집단이 있으니, 그것이 로마서 11장의 '남은 자' 라는 겁니다.

(롬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롬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그래서 남은 자들은, 자기 행함으로 남은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남는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로마서에서 "은혜로 남는다" 라고 할 때, 그 근거가 뭐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나온 은혜로 남는다는 뜻이죠. 다른 말로 하면, 새 언약의 효과로서 은혜가 생겼다는 뜻이죠. 즉 "주님이 어떤 일을 성취하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은혜가 나왔기 때문에, 너희들은 현재 남은 자로서 구원을 받는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남은 자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면, "그래, 우리는 남은 자가 되자" 라고 다짐하는 게 남은 자가 아니고, "우리는 왜 멸망이 되어야 마땅한가?" 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늘 확인하는 것이 남은 자라는 겁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나는 날마다 죄인이다" 라는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왜 스스로 행함으로 건져지지 못하는 존재인가?" 라는 것을 늘 깨닫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자기 부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은혜죠. 소유하는 것이 은혜가 아니고 말입니다. 소유하는 것도 자기 소유가 아니라, "이건 하나님이 가져가도 저는 할 말이 없어요. 나는 그 정도입니다" 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게 은혜가 아닙니까? 그게 축복이거든요.

◈ 일을 아니할지라도 !!

지난 주일에 그런 설교했는데,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를, 일한 것도 없이" 라고 말이죠. 완전히 은혜의 삼종세트죠? 그래서 이런 이야기했어요. 아예 교회 벽에다가 "열심히 전도하자" 라는 것들은 다 지우고,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않은 자, 일한 것도 없이" 라는 것을 내걸자는 말이죠.

그것은 바로, 자기가 아무런 일을 안 해도 저러한 말씀에 해당되는 삶이라는 게 남은 자이고, 그러한 남은 자가 되는 것은, 그것은 바로 새 언약, 즉 십자가의 효과 때문에 그렇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전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침멀리가 P문서 이야기를 했잖아요. "자기 오기(傲氣)를 받쳐주기 위해서 성경해석을 다시 했다" 라는 것이 침멀리의 구약해석이에요. 구약을 인간이 손댔는데, 그 손댄 사람이 누구냐 하면, 마지막 때에 남은 자라고 자처한 인간들이죠. 그러니 원래 구약이 아니고 그들 입장에서 새롭게 조성된 게 현재 구약의 순서라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날 유대교인들이 자기들 입장에서 구약을 다시 손대면, 그것을 무슨 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까? 21세기 문서죠. 또 새로운 문서가 되잖아요.

◈ 언약에 의해서, 육신으로 다뤄지고 있다 !!

그래서 육신이란 것이, "육신이 되면 구원을 받습니까?" 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우리는 육신으로 다뤄지고 있다" 라고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육신은 죽음을 품고 있는데, 물론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우리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죽었던 그 죽음, 즉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라고 하는, 그 십자가의 언약완성의 죽음이 포함될 때, 우리는 육신의 입장에서 주님과 관련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인자' 라고 하거든요. 에스겔과 다니엘에서 말이죠.

◈ 하나님께서 에스겔과 상대했다고 하면 !!

아까 이야기한 것을 따져봅시다. 하나님께서 에스겔과 상대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에스겔과 상대한 그 내용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과 주고받으면서, 그 주고받은 이야기를 신약에 와서 완성시켜버리면, 그 사람들이 바로 남은 자이고, 그 사람들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구약해석을 어떻게 하는고 하면, 신약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인자가 되는 에스겔 사이에 주고받은 그 내용이, 마치 흥부전에서 박을 탈 때 와르르 쏟아지는 것처럼 그렇게 십자가가 와르르 쏟아져서, 창세기부터 양탄자가 깔이듯이 깔아버리니까, 그게 바로 구약까지 소급해서 완전히 깔린 양탄자인데, 그 내용을 따라서 구약을 해석하면 그게 곧 제대로 된 구약해석이란 말이죠.

◈ 십자가로 당겨보니, '아하, 그렇구나' !!

이것은 사도바울뿐만 아니고,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이 구약의 본문을 뽑을 때 어떤 구절을 뽑는데 있어서, 그런데 맞춰보면 문자적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죠. 마태복음에서 호세아 인용하면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라는 말도, 사실은 그 대목과 전혀 어울리지를 않아요. 부합이 안 되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를 다시 한 번 당겨보니까, 그게 전부다 구약 그때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하기를, 아들을 낳아서 그 이름을 뭐로 하라고 있어요? 분명히 '임마누엘'로 하라고 했는데, 그게 이사야 7장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하지만 그것을 해석할 때는 바로 그 임마누엘이 누구였다는 겁니까? 예수님이라고 해석을 해야한다는 것이 마지막 종착점에 이르렀을 때에만 나올 수 있는, 그야말로 박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완성된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해석노선을 따라가려고 하면, 우리는 육신이 아닌 인간이라고 여기고, 여기서 육신은 죽음을 품고 있지만, 그것도 예수님의 죽음을 품고 있지만, 그런데 인간은 역사를 품고 있거든요. 역사가 뭐냐하면, '과거-현재-미래' 라는, 곧 시간적인 연쇄 고리를 갖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바리새인도 그랬으니까 말이죠. 자기가 해석한다는 말은, "과거에 이랬는데, 현재는 이렇고, 미래는 이럴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해석을 한다는 뜻이란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사도들의 해석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튕겨 나가죠. 못 들어가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을 시간을 알고 있는 인간으로 보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역사를 갖고 들어가니까 안 되잖아요. 그러면 사도의 노선에 들어가려면 우리 자신의 역사를 죽어야 되겠죠. 그런데 죽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죽는다고 해서 죽는 게 아니잖아요.

성령이 와서 십자가에 우리를 동참시켜버리면, 우리가 이전에는 바깥에서 이 노선에 못 들어갔는데, 그런데 성령을 받아보니까 어느새 우리는 어느 노선에 와있습니까? 지금 십자가 피로 깔려있는, 아예 창세 전부터 있었던 모든 하나님의 긴긴 비밀적 시나리오, 그 비밀스런 복음의 시나리오, 창세 전부터 감추어진 그 비밀의 노선에 우리가 들어가 있는 거예요.

◈ 나는 날마다 해석되어진다 !!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런 양탄자 노선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내가 해석한다" 라는 것이 성립됐는데,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어떻게 됩니까? "나는 해석한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나는 날마다 해석되어진다" 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해석은 누가 한다는 겁니까? 주님께서 알아서 다 하신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지금 야쿠르트를 마신다" 라고 하면, "주님, 방금 제가 야쿠르트 마신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라고 물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주님한테 물을 자격이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가 살아있다고 여길 때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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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