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 겹치기 140102
선악 겹치기 140102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이한례(IP:203.♡.42.222)
14-01-27 00:07
가락-70이레 논문(선악겹치기)140102-33강a-이 근호 목사
250 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일직선분으로 묘사되는 시간관에 비추어보면 한 직선 위에서 ‘완료- 미완료‘ 혹은 ’이미-아직‘이라는 모순관계를 기하학적으로 점을 찍어가도록 만드는데 이 모슨 자체가 시간의 한계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자신의 몸을 구성하는 역사적 시간관을 고수하는 가운데서 예수님의 몸을 위한 시간성을 받아들이는 무리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돼 있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의 시간은 직선입니다. 인간은 폭이 없어요. 그냥 직선 이예요. 시간은 폭이 없습니다. 시간은 면적이 없어요. 전선 위에 기어가는 벌레가 전선 말고 다른 데로 옆으로 샐 수 있습니까? 안 되잖아요. 인간의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 단선으로 가고 있는데 여기 옆길로 높게 뛰어 들어갈 여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거는 인간의 시간관 속에는 면적 개념이 없어요. 1차원 개념이지 2차원 개념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이미-아직, 완료-미완료, 이렇게 되니까 요 직선으로 표현할 길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리델보스나 게…보스는 뭐라 하느냐 하면 면적을 만들어서 하는 말이 여기 십자가 여기 재림하는 걸 해서 그리고 이 지점(재림)에서는 ‘아직‘이라는 거예요. 이 지점(십자가)에서 보면 이미 하늘나라 되었지만 이 지점에서는 ’아직‘이라는 겁니다. 여기를 하늘나라라 봐서 이게 신학교 때 성경 신학 책에 배우거든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아직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두 종류 다 있습니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갑자기 면적이 어디서 생겼느냐 하면 이런 게 있을 수 있느냐 이 말이죠.
이미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너희 안에 있다.” 할 때 ‘이미‘고 아직 구원 안 됐다 하는 것은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아직 구원의 때가 남아있다. 열심히 하라.”라는 그런 대목이 있으니까 그 두 개를 같이 하다 보니까 이게 시간적으로 다 됐다는 말인지 안 됐다는 말인지, 그럼 이 지점에 와 있다면 이미 구원받았는데 아직 덜 구원받았다. 이게 무슨 이런 이야기가 다 있습니까? 이미 구원받았는데 덜 구원받았다. 성립 안 되죠. 성립이 점을 찍어줘야 열리는데 이런 점 자체가 없어요. 시간은 이런 위의 면적 이런 게 없다 이 말이죠.
이 잘못을 누구도 지적하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런 식으로 한 거예요. 이거는 왜 그런 식이 벌어지느냐 하면 인간이 자기 몸이 갖고 있는 일직선 몸에다가 예수님의 몸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그런 성경 말씀을 무리하게 작용하다 보니까 이거는 말도 안 되는 일종의 사기인데 엉터리 아닙니까? 이런 짓을 했다 이 말이죠.
그걸 이렇게 발표했는데 그 발표한 모임이 무슨 모임이냐 하면 ‘한국 개혁주의 신학회’ 모임 이예요. 신학회 모임인데 그 다음 251 페이지 위에서 네 번째 줄에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리델보스’를 비롯해서 개혁주의적인 성경신학자들이 이해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 오류는…』해석 오류 했다고 나오니까, 지금 보니까 그 사람들의 인상이 일그러진 이유를 알겠어요. 『‘하나님 나라‘ 인간적 시간관에 준해서 이해해주려고 노력한 점에 있다는 것이다.』하나님 나라를 인간적 시간관에 준해서 이해하면 안 돼요. 왜냐 하면 이해가 된다면 인간의 몸은 어떻습니까?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이 돼 버리니까 그럼 주님의 몸을 믿으면 안 되고 누구 몸을 믿어야 돼요? 자기 몸을 믿어야 되니까 이거는 종교죠.
이거는 뭐냐 하면 선악과 따먹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효로 돌리는 거와 똑같습니다. 분명히 아셔야 될 것은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그럼 선악과 따먹은 몸이 표현해 내는 종교가 있어요. 선악과 따먹은 상태에서 어떤 표현해 놓은 신앙이라든지 그걸 우리가 알고 있어야 돼요. 선악과 따먹은 채로 하나님을 섬기고 신학을 전개한다면 뭐가 나오겠습니까? 인간이 이미 선악과 따먹고 자기가 신이라고 행세하잖아요. 신이라고 행세하면서 어떤 성경책을 다 줄줄 다 외우고 신학을 전개한다면 나올 건 뭐가 나오겠어요? 선악과를 따먹은 걸 긍정하는, 선악과 따먹은 자체를 긍정하는 쪽이 나오겠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선악과 따먹은 입장에서 써버리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려고 그렇게 구원하려고 애씁니다. 이렇게 되죠. 그게 선악과 따먹은 종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신앙을 이야기하려면 선악과 따먹고 나오는 이론들이 이러이러한 이론들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죄였습니다.’ 라고 지적할 줄 알아야 그게 진짜 성령에 의한 믿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 어느 신학 책을 봐요. ‘선악과 따먹은 신학은 이겁니다.’ 라는 말을 아무도 안 해요. ‘그저 하나님은 인간의 종교성을 접촉점으로 해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인간의 종교성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부정적으로 보는 게 아니고 긍정적으로 어떤 신앙의 발단, 어떤 계기, 좋은 뜻으로 그렇게 그걸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럼 됐습니다. 거기다가 요거만 조금 보태면 됩니다.’ 이렇게 돼 버리면 선악과 따먹은 것을 긍정하고 거기다가 추가적으로 생명을 따먹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사람들 말이 맞아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따먹었나? 이왕 따먹은 거 소용없고 생명나무 따먹어야 살지.’라고 하나님이 생명나무 따먹으라고 줬다면 선악과 따먹은 바탕에다 생명나무 소식, 복음 소식을 담는 것이 가능한 것이 맞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렇지 않아요. 선악과 따먹은 그 모든 것 때문에 인간들은 어디 가느냐 하면 저주를 만나야 돼요. 그러니까 인간은 저주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신앙과 그런 종교와 그런 복음과 그런 믿음 그런 모든 신학이 없는 저주를 일으키는 그런 쪽으로 신앙생활을 하게 돼 있습니다. 그걸 저와 여러분들이 지적을 해주셔야 돼요.
선악과 따먹었을 때 나올 수 있는 신앙관, 종교관이 뭔지를 아십니까? 도를 아십니까? 이런 거 하지 말고 선악과 따먹었을 때 나오는 거, 종교. 그 대표자가 누구냐? 가인입니다. 가인은 추수 잘 되고 난 뒤에 기분이 업 돼서 이 모든 은혜와 공로는 다 하나님께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귀한 생산물 중에서 일부를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죠. 최초로 추수 감사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아주 기쁘게 받았습니까? 안 받았죠.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누가 드리느냐? 그건 누가 드리지 못해요.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내십니다. 그게 중요해요. 아벨이 드린 제사를 하나님이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만들어 낸 제사를 하나님이 받아요.
그게 뭐냐 하면 절대자 속의 분열과 통일이라는 겁니다. 절대자? 누굽니까? 하나님이죠. 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분열을 일으켜요.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마지막 때 이 땅에 보내셨죠. 그때까지는 우리는 분열이 아니라고 봤죠. 왜, 자기 아들을 파견근무 보내는 거예요. 재벌이 자기 아들을 미국 지사로 파견하는 거, 그게 분열입니까? 일을 더 하라는 거잖아요. 삼성그룹이나 현대그룹에서 파견 보내면서 십자가 이야기합니까? 할 필요 없죠.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냈다 하는 말은 ‘아! 일을 더 확대시키려고 보내셨구나.’라고 아는데 막상 아들이 와서 십자가에서 하는 말은 뭐였습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게 시편 22편인데 혹시 대전강의 들으신 분 계십니까? 여기 22장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요 대목 나옵니다. 요 대목 외우기 쉬운 게 23장이 시편에서 유명한 시편 이예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거보다 한 끗 더 작은 숫자가 22장입니다. 22장 앞에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돼 있거든요. 여기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돼 있어요. “내 아버지여”가 아니에요. 그런데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거기는 “내 아버지여” 라고 돼 있어요.
어쨌든 내가 다윗 강의하면서 뭐라 했느냐 하면 골리앗과 다윗 싸움할 때 다윗이 없다고 이야기했죠? 다윗이 없어요. 사울이 보기에는 다윗이 있지만 다윗이 보기에는 본인이 있다고 생각 안 하고 주님이 개입해 버린 거예요. 주님이 개입해 버리면 자기가 있다. 없다. 있음, 나는 있다 할 때 있음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예수님 있음으로 홀라당 다 빼앗기게 돼요. 참 말 어렵죠?
‘내가 있다.’ 할 때 ‘있다.’를 뚝 떼서 있음을, 실제적으로 있음은 그냥 있으면 안 되고 이게 기능적으로 발휘될 때 있음이 되는 거예요. 있음도 하나의 창조고 있음도 하나의 기능이다 말이죠. ‘내가 있다.’ 되려면 내가 있게 해서 있을 때만 ‘내가 있다.’가 되거든요. 이해하십니까? 내가 날마다 ‘숨 쉬라. 숨 쉬라.’ 해서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수면내시경이나 밤에 잘 때 본인이 그때 있습니까? 여러분 꿈속에나 본인이 보이지, 자기가 자는 모습을 자기가 느낍니까? 못 느끼죠. 그러니까 없는 거예요. 있다 할 때는 그냥 있는 게 아니고 기능적으로 있는 거예요.
다시 해봅시다. 있다. 없다. 하는 것은 시스타 노래 중에 나오지만, 있다. 없다. 할 때에 우리는 내가 평소에 살아가니까 ‘내가 여기 있다.’가 의미 있다고 보는데 주님께서 만약에 우리를 있게 하신다면 우리 있음을 종이 가져야 됩니까? 나를 있게 한 주인한테 가져가야 돼요? 주인이 가져가야 되죠.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 예수 안에서 우리가 있는 거예요. 예수 안에 없으면 우리는 지옥 갑니다. 십자가 안에 없으면 우리는 지옥 가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놓고 십자가 앞에 ‘있다. 없다.’를 보는 거예요. 우리는 자연적으로 몸둥아리 있는 이상 있다고 보는데 주님은 우리 몸둥아리 있다고 보는 게 아니고 우리 몸을 언약 적으로 보는 겁니다.
언약 적으로 봐서 언약 적으로 있으면 구원받고 천국 가고 언약 적으로 없으면 지옥 가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을 뭐로 보느냐 하면 언약을 금속 탐지기로 보면 돼요. 지지직~ 지지직~ 금속 탐지기로 해서 언약 적으로 있기, 없기. 해서 언약 안에 들어 왔으면 구원받고 안 그러면 지옥 가는 겁니다. 이게 이스라엘 이예요.
이러니 이걸 설명을 해야 된다니까요. 다윗 때 분명히 다윗은 말하기를 ‘이번 전쟁은 골리앗과 나의 전쟁이 아니고 만군의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할 때는 다윗은 남들의 눈에 보이더라도 ‘없기‘가 되고 그 자리에 하나님이 ’있기‘가 돼서 지금 골리앗은 다윗하고 상대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와 상대했느냐 하면 만군의 하나님을 상대한 겁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만군의 하나님이 우리들 이스라엘 보기에 소년 다윗의 모습으로 비춰 나온다는 거예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나한테 한 것이다. 이 얼마나 어려운 말입니까? ‘어, 소자 너 민증 까봐라. 혹시 별에서 온 그대인가 보자. 민증 까봐.’ 오로라 끝나니까 엉뚱하게 별에서 온 그대라 해서…
성경 해석을 다윗이 없다 하니까 기가 찰 일이잖아요. 실제로 이게 언약 안에 있는 통용되는 단어가 성경인데 언약 바깥의 이방인들이 이걸 보니까 이게 자기 맘대로 이야기되는 거예요. 마치 엄마가 장난감을 줘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라고 했는데, 은행 놀이하는 장난감, 부엌놀이 하는 장난감, 인형놀이 옷 갈아입는 장난감을 주니까 애가 바보가 돼서 애가 크레용 가지고 장난감 용도도 모르고 색칠하고 낙서를 한다면 아빠 엄마가 어떻겠습니까? 장난감 줄 마음이 듭니까? 안 듭니까? 안 들죠.
이 성경 말씀은 예수 안에, 언약 안에 있을 때만 구원받는다는 걸 알기 위해서 성경을 줬는데 인간들은 철이 없어서 성경 가지고 자기가 선악과 따먹은 것을 정당화하는 데다 이걸 쓰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 말씀이 오히려 바리새인 너희들을 더욱 더 심판케 한다는 거예요. 너희들을 심판하는 것은 내가 아니요, 모세가, 너희들이 그렇게 신봉하던 율법을 줬던 그 모세가 너희들을 심판할 것이다.
구원하려고 준 장난감에다 저들은 자기 옹호하는 쪽으로 색칠을 해서 기도하면 복 받는다. 헌금하면 복 받는다. 온갖 색칠을 하니까 이건 더욱 더 저주가 저주를 불러요. 화를 더 부른다고요.
개혁주의가 바로 뭐냐 하면 완전한 자기의 몸을 없는 존재로 만드는 신학이 아니고 자기 몸을 긍정해서 어떻게 이 몸과 예수님의 몸을 만날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한 아이디어가 연결된 게 개혁주의인데 그 개혁주의의 모든 사고방식은 뭐냐 선악과에서 나온 지성이고 이성이고 지혜입니다. 그러니까 개혁주의는 저주가 저주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개혁주의에서 칼빈, 루터, 거기서 나온 모든 교파가 개신교 교파입니다. 장로교, 침례교, 성결교 할 거 없이.
시편 116편 11절 보면 “모든 사람은 거짓말쟁이라” 돼 있죠? 다음에 15절에 보면 “성도의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 뭐로 봅니까? 귀중히 보시죠. 그 두 개를 연결하면 “이 거짓말쟁이들아, 죽어라. 죽으면 내가 그건 귀하게 볼게.” ‘모든 사람’에 우리는 포함돼요? 안 돼요? 예수님 빼놓고 다 포함돼요. 이 말씀이 곧 로마서 3장에 나오잖아요. “모든 것은 거짓되나 하나님만 참되시다.”
우리는 거짓말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어떻게 지어내는 게 아니고 몸 자체가 ‘내가 있다.’하는 자체가 거짓말이거든요. 언약 없이 보는 거예요. 그게 이방인입니다. 이번 주일 낮 설교가 이스라엘이 구원에 실패한 그건데 우리는 이방인이기 때문에 언약이 없기 때문에 언약이 없으면 있는 게 뭡니까? 육신이 있잖아요. 내 육신에다 뒤에 내가 있다고 붙이는 거예요. 언젠가 설교 했던가 지난주일 낮인데 이 근호가 누구지? 그런 사람 있었나? 그런 예를 든 게 기억납니까? 그게 아무의미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부터 제가 문제를 낼 테니까 여러분 답변해 보세요. 답변하기가 참 난처한데 어쨌든 질문한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그래요. 자, 문제낼 테니까 속으로 한번 답변해 보세요. 동영상 보시는 분들도 답변해 보시기 바랍니다.
악을 어떻게 제거 합니까? 이게 질문입니다. 선악 자체가 죈데 이 악을 어떻게 제거해요? 많은 책과 많은 철학자들이 악을 어떻게 제거하느냐에 대해서 답변을 못 내놓고 있어요. 기껏 뭐냐 하면 악이 있는 곳을 피하여 따로 살면 된다는 거예요. 이게 악이 제겁니까? 도망친 거예요? 이건 도피한 거예요. 그럼 악이 안 따라 옵니까? 지리산 혼자 가면 거기 악이 없어요? 기도원에 가면 악이 없습니까? 기도원에 수도세 전기세 내려하면 다 싸우고 하는데.
악을 제거하는 방법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악을 제거하는 방법이 이 질문보다 더 어려워요. 어떻게 제거하느냐 하면 악에다 선을 겹쳐서 선을 제거하게 되면 악도 같이 제거되는 거예요. 굉장히 쉽죠. 이것을 무슨 방법이라 하느냐, 설거지 방법입니다. 설거지 방법.
파올이란 물리학자가 같은 물리학자하고 스키장에 갔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놀라운 진리를 발견했다고 고함치면서 뛰쳐나왔어요. 그게 뭐냐 하면 설거지를 하기 위해서 더러운 그릇을 더러운 물에다 더러운 걸레로 씻어내죠. 자꾸 씻어내니까 물이 더러워질 게 아닙니까? 그걸 보고 그 사람이 뭘 알았느냐 하면 더러운 것을 씻어내게 되면 결국 마지막 남는 것은 씻어도 안 씻기는 것만 남아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거예요.
그래서 그전까지는 물리학은 무엇이 옳은가를 실험하고 그것을 논리로 전개해서 진리라고 규정했다면 파올 이 사람은 그렇게 하지 말고 무엇이 엉터리 이론인가를 실험해서 엉터리 됨을 끄집어내면 된다는 거예요. 하나, 하나 수풀 속에 물건이 있으면 나무 하나, 하나 벗겨내면 되는 거예요. 온갖 나쁜 짓을 다 끄집어내면 되죠.
그러면 선과 겹치게 하는 방법 이건 제가 생각한 거예요. 이건 파올이 생각 못 한 것이고, 파울이 만약 생각한다면 불교의 논리에 이런 게 있어요. 거울에 먼지가 끼어 있으면 거울의 먼지를 털어내면 비로서 맑은 것이 보인다. 그게 선 부분, 중국의 불교 부분에 도사들의 불교 철학에 보면 나오는데, 저는 그 방법이 아니고 악을 제거하는 방법은 뭐냐 악에다가 선을 입혀버려서 선을 악이라고 규정하고 제거해 버리면 거기 붙어있는 악도 같이 제거가 되면서 악도 떨어져 나가는 거예요.
제 방법이 왜 중요하냐 하면 선과 악이 결합될 때 지금 하나님께서는 악한 나무를 먹지 말라 했습니까? 선악을 아는 나무를 먹지 말라 했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제가 알기는 선악 이예요. 악한 나무가 아니고. ‘아담아 동산에 썩은 나무 있는데 잘라내라.’ 하면 대번 잘라내죠.
그런데 동산에 선과 악을 아는 나무에요. 그걸 제거가 아니고 따먹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따먹어서는 안 된다는 말은 무슨 늬앙스가 있느냐 하면 만약에 그걸 따먹었을 때, 선악을 아는 나무를 따먹지 말라 했는데 그걸 따먹으니까 선악 나무는 있으나 마나죠. 그걸 제거해야 되겠죠. 그걸 제거하는데 그걸 제거할 수가 있느냐 말이죠. 제거하는 그것을 선악을 따먹은 인간에게 그것을 제거할 수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자기가 좋다고 따먹었는데 자기가 자기 손으로 선악을 제거한다는 것은 그 선악과가 어디 있습니까? 선악과가 자기인데 자기를 죽이는 거잖아요. 이거는 불가능성이죠. 불가능함이죠.
하나님께서 악을 제거할 때 ‘그냥 악을 제거해 줄게.’가 아니라 먼저 뭘 언급하느냐 하면 너희들은 악을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언급을 하면서 인간이 언급을 하게 되면 인간이 거기에 대해서 수용을 할까요? 수용 안 할까요? 수용하지 않죠. 왜 선악을 따먹었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악은 제거하고 선 쪽으로 나가고자 하는 거예요. 그게 인간이 기껏 아는 한계에요. 선악을 따먹었기 때문에 인간이 노는 바탕이 선악밖에 없어요. 악은 버리고 선 쪽으로 나가고.
선악 자체를 제거할 수는 없어요. 선이 없다는 사항을 생각 못한다니까요. 항상 선은 악, 악은 선, 그걸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악을 제거하면 선만 남을 것이라는 생각이 인간의 기껏 생각이지, 선악이 같이 날라 간다는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그게 불가능해요. 악을 제거하는 것도 불가능 할 뿐만 아니라 선악을 함께 하는 것도 불가능해요.
이렇게 불가능하게 해놓고 하나님께서는 선악 자체를 제거하는데 거기에 누가 뛰어드느냐 하면, 바로 선하신 분 예수님이 뛰어들어요. 예수님이 뛰어들어서 그 다음에 뭡니까? 죄를 지심으로써 악인이 되면서, 예수님이 악인 됐다는 증거는 십자가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날 버리시나이까? 그 버리시나이까? 하는 사건을 발생시켜 버립니다. 발생시켜 버리면 그 사실에 대해서 그걸 지켜보거나 그것을 바라보거나 그걸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있겠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죠. 왜냐 하면 그걸 바라보는 사람은 항상 자기 위주기 때문에 ‘아! 저런 식으로 내가 하면 용서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구원의 불가능성 원칙에서 위배돼요. 인간은 어떤 식으로 해도 구원이 불가능해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일임했습니까? 예수님께 일임했잖아요.
그러면 인간은 관찰이고 뭐고 간에 인간의 구원에서는 그건 떨어져 나간 존재에요. 떨어져 나간 존재가 바라보면서 ‘야, 저래야 구원받는구나.’ 하는 감탄의 소리를 할 인간이 없다 말이죠. 만약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지금 주님의 취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 이예요. ‘주님이 저런 식으로 하니까 내가 주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되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거예요.
‘하나님이 날 구원하기 위해서 저런 조치를 했구나.’ 하는 그 자체가 이게 하나님께서는 설거지 방법에 해당 안 됩니다. 설거지 방법은 뭐냐 하면 모든 움직이는 것이 다 더러운 것이죠. 더러운 것을 씻으시는 분은 인간이 못하고 오직 누가 한다? 예수님이 하죠. 그러면 이 그릇에 묻은 때는 누구이어야 됩니까? 때는 우리자신이잖아요. 그럼 주님이 설거지 하면서 뭐도 날라 가 버려요. ‘나 어떻게 하면 구원되지? 주께서 하는 것 지켜볼까?’ 이러다가 설거지 같은 때로 물에 더럽게 빠진다니까요. 어디 거기서 기다려요?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면서 자기 자신이 예상한 전쟁과 전혀 다른 전쟁에 지금 빠져 들어간다는 걸 알았어요. 그렇다면 다윗은 ‘이번 전쟁은 내 전쟁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솔직하게 할 수밖에 없죠. 내가 이런 전쟁을 기다린 게 아니고 자기도 말려들고 모든 공로는 누가 가져갑니까? 주님께 가져가 버리죠.
그런 식으로 뭐가 오느냐 하면 이게 언약입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언약 안에서 있음이 있음이지, 그냥 내 몸둥아리 있음은 있음이 아니라고요. 있음이라는 것은 그냥 있다고 있음이 아니고 반드시 뭐 해야 되느냐 하면 반드시 기능으로 작용해야 돼요.
한 가지 더 예를 들면 돌이 있습니다. 이 돌에다 종이를 겹칠 수 있을까요? 또 컵이 있는데 요 자리는 뭐가 놓여 있습니까? 컵이 놓여 있죠. 컵이 놓여 있는 요 자리에다 매직이 요 자리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없죠. 왜냐 하면 어떤 사람이나 물건이 한 쪽을 점유해 버리면 그거는 그 사람의 자리가 되고 다른 사람은 못 끼어들어요. 우리네 아는 상식입니다. 분명합니다. 안경을 놓으면 요기는 안경 자리가 되고 안경 자리가 매직이 같이 침범할 수 없어요. 매직 자리는 그 옆에 붙어도 그 옆이 매직 자리지, 안경 자리 그 자리가 매직 자리가 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뭐라 합니까? 예수 있는 곳에, 예수 안에 누가 있다? 내가 있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예수님만 있으면 누가 있어야 돼요? 예수님 몸만 있어야 되죠. 거기 우리 몸이 겹쳐 있을 수가 없어요. 우리의 몸은 다른 공간을 점유하기 때문에.
그래서 선악과를 겹쳐서 한다는 요 아이디어는 여러분 이해는 되시죠?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아니까. 문제는 뭐가 문제냐 하면 선과 악이 어떻게 결합되느냐에 대해서 우리가 그 과정에 대해서 설명할 길이 없다. 어떻게 선이 악이 되느냐. 그래서 모든 신학자들과 모든 철학자들은 악을 제거하는 방법이 없어요. 왜냐 하면 선과 악을 일치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 ‘선과 악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라는 말은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있다가 ‘철학자님, 그런데 선과 악이 서로 충돌해서 튕겨 나오게 되는데 어떻게 대치되는 선과 악이 어떻게 하나가 됩니까?’라는 말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니까요.
악이라고 하면 이해돼요. 몽땅 악 이예요. 선이라 하면 이해돼요. 몽땅 선 이예요. 그런데 선과 악을 함께 아는 나무라는 말을 우리의 상식으로서는 이게 설명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자기가 지킬하이드도 아니고. 제가 봐도 어떤 경우에는 선하다가 어떤 경우는 악하다가 그걸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 경우는 있어요. 술 먹고 들어와서 마누라 개 패듯 패고 그 다음날 들어와서 프라다 명품 사주고 그럴 수 있는데 선이 있는 그 자리에 악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럴 경우는 없죠. 컵이 있으면 컵만 점유한 자리지, 컵자리에 다른 게 끼어들 수가 없잖아요. 이게 우리네 상식이고 누가 봐도 반박 못 해요.
그런데 우리는 창세기 2장에서 선과 악을 아는 나무를 너무 쉽게 ‘알았어. 다 알았어. 선과 악, 그냥 넘어 가.’ 넘어갈 때도 옛날에는 넘어갔지만 지금은 넘어가면 안 돼요. 지금은 그렇게 호락호락 자꾸 이것저것 다 빼버리고 차 빼고 포 빼면 장기도 아니고 다른 게임이 돼 버려요.
선과 악을 어떻게 겹치느냐, 한 자리 어떻게 겹치느냐, 이것이 설명돼야 됩니다. 개혁주의는 설명 못해요. 우리가 죄인이잖아요. 죄인에게 어떻게 선과 악이 함께 있을 수 있습니까? 탕자가 일 잘했습니까? 탕자가 모범돼서 탕자처럼 우리가 다 세상 기생한테 다 팔아먹고 이럴까요? 탕자가 분명히 악하죠. 이름도 탕자에요. 그런데 탕자에 대해서 아버지의 조치가 선하죠. 어떻게 악한 자에 대한 조치가 그러하십니까? 소고기 잡고 가락지 끼우고 좋은 옷 입히고 어떻게 악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어떤 신학자, 어떤 철학자는 이걸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아는 신학자 중에서 저희들끼리 최고의 신학자는 뭐냐 하면 도망치는 신학자에요. 에카르트, 부르노, 이런 사람들, 신비주의인데 이거는 ‘무’다 해서 다른 무의 세계로 도망쳐 버려요. 그레비티 영화 같아요. 무중력 상태로 날라 가 버려요. ‘아휴, 귀찮아, 귀찮아.’ 불교에서 뭐라 합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 이래서 도망가 버려요. 해인사로 도망가나 신비주의가 수도원에 들어가나 이건 설명 않기 위해서 도망치면 유명한 신학자 돼 버렸어요.
하지만 성경에는 ‘이 소자에게 준 것이 나한테 한 것이다.‘ 할 때 그 소자가 도망쳤습니까? 그냥 우리 일상에 만난 사람이 소자에요. 소자라 해서 소자만 모이는 특별한 기도원 따로 있습니까?
이 문제가 해결돼야 돼요. 그러면 이 문제를 해결할 때 힌트가 어디 있느냐? 십자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을 만나면 되겠죠? 십자가 제대로 아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난해한 십자가! 같이 겹치지도 못하는 그것을 할 때 사도바울이 썼던 용어들을 한번 봅시다.
예수 안에서 너희가 뭐가 된다 했습니까? “너희가 예수 안에서 의인된다.” 돼 있고, “예수 안에서 이미 창세전에 예정되었다.”고 이야기했죠. 에베소서 1장 4절~5절, 예수 안에서 의인되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는 죽은 자요,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분명히 우리가 아는 상식에서는 사도바울이 십자가 언급할 때 분명히 십자가 사건 언급하는 걸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 시대 사건은 이미 과거사건 이예요. 이미 한물 간 사건 이예요. 어느 사람이 우리보고 ‘네가 죽은 이순신 안에 있습니까?’ 하면 우리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잖아요. ‘네가 이순신 장군 안에 있으니 너는 살았고.’ 하면 무슨 소린지 아시겠습니까? 이순신 장군은 이미 1592년에 죽은 사람이잖아요. 그 사람은 임진왜란 때 이미 죽은 사람이다 말이죠. 하여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예수 안에서 우리가 의인됐다 할 때에 여기에 동원되는 모든 언어나 이런 이해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선악 안에서 나온 거예요. 그렇다면 이런 결론에 도달되는데 사도바울이 썼던 모든 성경의 용어는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여기는 우리에게 ‘너는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스스로 해결 안 돼.’라는 것을 폭로시키고 그걸 자극시키는 그런 쪽에서 성경 말씀들이 지금 발현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 말씀을 들어야 돼요. 듣고 우리가 무식하다는 것을 인정해줘야 돼요. ‘성경 말씀해도 나는 모르겠어. 기도 안 할 거야.’ 자꾸 도망치면 안 돼요.
구약도 우리가 이해 못하지만 신약 성경은 눈 감고 아무데나 펴보세요. 어떤 말씀을 봐도 우리가 이해 못하게 돼 있어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우리가 이해 못하는 걸 알지만 제가 이야기하기 전에는 전부 다 이해 다 되죠. 전부 다 이해 다 됐다고요. 이해 안 되면 그냥 넘어갔으니까.
그런데 막상 모든 성경 말씀에서 이해가 안 되는 이유는 이번 수요일 날 잠간 이야기했어요. 모든 말씀 밑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죽음이 깔려 있어요. 말씀이 있는데 우리가 지금 살아 있잖아요. 살아있는데 말씀으로 직접 나간다고요. 직접 나가면 안 되고요. 이 밑에 죽음이 깔려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씀으로 가지 말고 ‘나는 죽었고’라고 해서 이렇게 올라가야 됩니다.
이 죽음에서 기다리고 있는 분이 계세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죽음과 결합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음은 사흘 만에 부활했잖아요. 사흘 만에 부활했기 때문에 죽음은 죽음이고 그 다음에 말씀으로 데려가는 것은 부활의 영, 곧 성령이 와서 데려가줘야 말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말씀은 문자로 푸는 게 아니고 뭐로 푼다 했습니까? 영으로 해석해야 된다고 고린도후서 3장에 나오죠. 영으로 해석해야 된다.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물으니까 그리스도 영이 있는 곳에는 이상한 소리 했어요. 자유가 있다 했어요. 갑자기 자유는 왜 튀어나옵니까? 이거 오늘 뿌리 뽑아야 돼요. 모세가 시내 산에서 돌판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백성들이 쓰는 히브리말 아닙니까? 그러면 그 말씀. 십계명이라면 우리가 읽을 수 있어요? 없어요? 읽을 수 있죠. 우리가 읽을 수 있다는 말은 곧 이해가 된다 이 말이잖아요. 글쎄 그게 이해가 안 되는 말이라니까요. ‘아니, 그게 왜 이해가 안 돼. 부모를 공경하라. 부모 공경하면 되지 뭐. 살인하지 마라.’ 칼로 찔러 죽이지 말라는 이 뜻이지. 탐내지 마라. 얼마나 쉬워요? 그걸 왜 이해를 못해. 그걸 이해할 것 같으면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쓸 필요가 없어요. 그게 언약이라니까요.
모세 수건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모세 수건은 그 당시는 수건으로 보이죠. 이게 진짜로 모든 말씀이 다 개방이 돼 버리면 그건 성령입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 이해됐다는 그 자체가 그런 쪽으로 평소에 인간들이 살아왔다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그런 되지도 않은 해석 가지고 그것 가지고 자기 정당성을 하면서 자기가 믿는다고 우기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까발리는 쪽으로 모세는 수건을 썼다 이 말이죠.
모세가 수건을 써버리니까 백성들이 ‘어이, 모세 양쪽의 돌 판은 뭐야?’ 라고 묻기도 전에 모세 얼굴도 볼 수 있어요. 볼 수 없어요? 지금 스탠드 이정도 해도 나는 눈이 부신데, 이런 거 천 개 켜 두면 이거 뭐 모세 십계명 보려 해도 눈이 부셔서 보지 못해요. 모세가 들고 온 돌 판은 모세에 나타난 그 영광, 영광 때문에 해석도 하지도 못해요. 무슨 해석이 돼요? 들고 온 사람도 만나지를 못하는데. 그러니까 해석을 해야 되겠고 영광을 못 보니까 모세가 뭘 덮어 쓴 겁니까? 수건을 덮어썼죠. 수건을 걸치니까 겨우 백성들과 말씀이 되거든요. 그러면 그들이 이해 한 거예요? 안 한 거예요? 이해 못하죠. 왜냐 하면 수건 때문에 이해가 안 된 거예요. 수건을 벗겨버리면 안 돼요. 수건을 벗겨 버리면 또 영광이 안 되고 수건 덮어씌우고 하니까 이것은 제대로 된 해석이 수건에 의해서 가려워졌죠.
그러니까 이거는 수건이 결국은 뭘 주느냐 하면 말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한데 수건을 씀으로써 안 죽게 된 겁니다. 죽지 않게 된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안 죽었다는 것을 가지고 자유케 됐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참 사도바울도 용어 쓰는 것도 협의해서 쓰는 것도 아니고 자기 맘대로 막 내뱉으니까 감당이 힘든 거예요. 다시 말해서 자유라 하는 것은 행동을 맘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죽었어.’ 이 뜻 이예요. 죽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죽었으면 죽음을 제가 다른 말로 표현해서 해골이라 합시다. 우리 몸은 뭐냐 하면 해골 이예요. 해골을 품고 사는 게 아니라 아예 자체가 해골, 죽은 거예요. 죽었는데 말씀이 뜨면서 우리로 하여금 해골에서 뭔가 입혀진다면 그것이 말씀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거예요. 뭐냐 죽었는데 말씀 해석하라고 그나마도 살게 했을 때 그걸 가지고 그리스도 영 안에서는 뭐가 있느니라? 자유가 있느니라. 그게 뭐냐 ‘네가 죽어 마땅한데 말씀 제대로 해석하라고 내가 임시로 풀어줄게.‘ 그런 뜻 이예요. ’ 성령 안에서 임시로 풀어줄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의 해석은 뭡니까?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죽음을 유발할 수 있는데 내가 살기는 왜 살았는가,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 영이 오게 되면,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살아있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사건 안에서 예수님이 존재하게 되면 존재에서 사건이 발생되거든요. 예수님이 여기 퍽~하니 여기 있다. 라고 한다면 더러운 예를 들어서 죄송합니다만 이건 끝까지 이해되기 위해서 들어야 돼요.
내가 여기 있음에 방귀를 뀌지, 내가 없는데 무슨 방귀를 뀝니까? 주님이 여기 계시매 성령이 피어나잖아요. 부활 생명이 있잖아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말씀을 너희에게 신약 성경을 너희에게 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약 성경을 받는 순간 우리는 이미 산 사람이 되죠. 그리고 그 해석은 어떻게 됩니까? 그 해석은 이미 끝나버렸어요. 말씀 앞에서 우리는 죽어 마땅한데 내가 있음이 아니고 누가 있음이다? ‘주님이 여기 있음에 말씀보고 구원받으라고 주께서 선물로 주라고 내가 지금 살아있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그게 해석 이예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죽어야 마땅한데 예수님이 이 말씀을 주께서 이미 다 이뤘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 혜택을 입은 대상이 되라고 우리가 지금 살아있는 거예요. 이 말씀 외부에 나가서 소자처럼 증거 하라고. 이해되세요?
말씀은 누구 소관입니까? 전부 다 주님 소관 이예요. 우리는 말씀 볼 수도 없어요. 말씀 보기 전에 이미 영혼 보고 나자빠져야 돼요. 하나님 만나면 다 어떻게 된다? 죽는다는 거예요. 죽는데 제자들은 살았잖아요. 그건 뭐 때문에? 바로 언약 때문에, 성령 때문에 살은 거예요. 뭐 하라고? 그냥 살라고? 축구 하고 살라고? 말씀 제대로 해석해서 증거 하라고, 주의 증인 되라고 살게 하신 거라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뭐 안에 있느냐 하면 이미 살려준 말씀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맘껏 모든 말씀을 해석할 때 나는 왜 죽어야 되며 주님은 왜 살아나야 되는가를, 지금도 왜 살아 계신가를 보여주는 쪽으로 전부 다 해석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네 마음속에 확신이 있어야 된다. 그게 십자가를 의미하는 거예요. 우리 속에 확신이 있어야 된다. 사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요 긴 이야기를 다윗에게 적용시키면 ‘다윗 언약을 위해서 다윗이 있었습니다.’라는 문장이 돼요. 이제 이해되십니까? 다윗을 살리기 위해서 다윗 언약이 추가적으로 주어진 게 아니고, 다윗 언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다윗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 언약이 갖고 있던 그 내용, 그 내용이 메시야 내용이거든요. 그 내용을 위해서 다윗은 밧세바와 간통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남편 우리야 장군을 죽여야만 했습니다. 다윗이 이 사실을 알고 다윗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요.
뭐 이 기쁨을 뭐로 표현됩니까? 길에서 만 원 주운 것? 어떻게 이걸 표현해요? 내가 그동안 진리를 알려고 했는데 그 자체가 죄라는 사실 이예요. 진리는 아는 게 아닙니다. 진리는 진리가 와서 우리를 활용할 뿐이지, 우리가 건방지게 진리 알아서 뭐할 건데? 진리 알아서 살려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죠.
그런데 그 자유라 하는 것은 내가 살았다가 아니라 누가 살아있다? 주님이 바로 겹쳐서 이 자리가 주님의 자리로서 겹쳐서 살아있는 거예요. 거기서 나는 날마다 죽이고 주님은 날마다 내 안에서 살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그런 식으로 사는 겁니다.
그러면 결론이 뭐냐, 그냥 사시라니까요. 그냥 사시되 죄지으면서 사시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죄지으면서 사시면서 내가 왜 자꾸 늙어 죽는지를 알아가는 거예요. 왜냐 하면 그게 기능이기 때문에. 다윗도 간통했고 살인했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일부러 간음 안 했다는 거예요. 일부러 살인 안 했다는 사실 이예요. 환경이 그 사람을 그렇게 몰아넣은 거예요.
그렇다면 형제를 미워하는 환경이 곧 무슨 죄가 된다? 살인죄가 되죠. 마음에 음란 품는 것도 간음죄가 되죠. 오른 뺨 때리면 멱살 쥐겠죠? 그리고 오른 손이 한 것은 누가 알아챈다? 대번 왼손이 알아채죠. 모든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즐겁습니까?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마라. 그건 누가 구하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우리 일상이 그거잖아요. 내 죄를 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겠어요. 얼마나 기쁜지 이거는 돈 주고도 어디서 살 데가 없어요.
‘나는 새 언약의 사람입니다.’ 다윗은 ‘나는 다윗 언약의 사람입니다.’ ‘나는 내가 아닙니다. 나는 다윗 언약이 납니다. 우리는 새 언약이, 예수님이 나고, 나는 예수님에게 다루어지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이게 성령 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혜택입니다.
10분 쉽시다.
이한례(IP:203.♡.42.222)
14-02-04 16:08
가락-70이레 논문(선악겹치기)140102-33강b-이 근호 목사
자, 252 페이지 몰트만 이야깁니다. 위에서 다섯 번째 줄에 상당히 유명한 신학자인데 그 사람이 이야기한 걸 그대로 적어 놨는데 이렇게 돼 있어요. 뭐냐 하면 『우주론이 종말론적이 되고 우주가 역사적으로 종말의 과정 속에 끌려 들여질 것이라는 말이다.』이게 뭔 뜻이냐 하면 이런 겁니다. ‘옛날에는 시간적으로 종말론이 우주적으로 마감될 것이다.‘라고 본 거예요.
묵시 문학에서는 이 세상이 마지막이 되면 사라진, 이렇게 봤잖아요. 다들 그렇게 알고 있죠. 마지막 때 메시야가 오게 되면 이 세상이 불바다 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된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잖아요. 몰트만 본인도 그렇게 알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몰트만은 『우주론이 종말론적이 되고 우주가 역사적으로 종말의 과정 속에 끌려 들여간다.』
다시 말해서 뭐냐 하면 우주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 눈에 보이는 게 되는 게 아니고 그런 세상이 있으면 좋겠다, 하는 이것 자체가 멸망당해도 마땅한 현상 중에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우리가 이렇게 죄 많고 고생하는 것이 에덴동산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죠? 잘 들어보세요. 우리가 에덴동산 같으면 죄 질 필요가 있습니까? 남 사기 칠 필요 있어요? 뭐 바나나고 다 먹는데. 부끄러워하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에덴동산 쫓겨나고 난 뒤에 우리 소망이 뭡니까? 어떻게 하면 에덴동산에 돌아갈까를 생각하겠죠. 그게 바로 죄라는 거예요. 그게 저주받을 짓이라는 거예요. 뭐가 탈락됐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취지에 대해서 우리가 동감했어요? 동감 안 합니까? 전혀 모르는 거예요. 엄마가 매를 들고 애를 때리면 애는 아파서 때리지 말라는 것이지, 엄마가 때리는 취지를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모르죠. 나이 차가 많이 나니까. 애는 열 몇 살이고 엄마는 40이 넘었는데, 40이 넘은 사람이 무슨 뜻으로 그러는지 모르죠.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저주를 주니까 사람들의 본성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저주 없는 곳에 빨리 오게 하옵소서.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예수 믿으라고요?’ ’믿을게요.‘ 예수 믿는 것도, 십자가 믿는 것도 전부 다 누구 좋으라고 믿어요? 고생 덜하고 자기 몸 편하기 위해서 자기 행복을 위해서. 그러니까 주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게 뭐냐, 선악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종교가 되는 거예요. 그 종교가 바로 종교가 만들어 질 때 주께서 의도한 겁니다. 네가 종교를 만들어라. 그것이 죄의 극단이다. ‘나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믿겠습니다.’ 그게 바로 악의 절정이다 말이죠. 참 이이야기 다른 교회 하면 나자빠집니다. 한 명 교인 아까워서 지금 하나라도 더 데려와야 되는데 그런 이야기 해버리면 있는 사람도 다 나가겠다.
여기서『개인의 종말이 종말론의 마지막 내용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주적 종말론이 진정한 종말론의 시작을 알리면서 본격적으로 우주론을 개방하는 시점으로 본다.』그러니까 개인의 종말론을 무엇을 향해서 접어라? 주님의 종말론을 위해서 포기해 버려라. 그런 쪽으로 봐야 사도바울의 종말론이 이해가 된다는 것이 몰트만 생각이었습니다. 제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닌데 요점에 대해서는 기존의 개혁주의하고 다르기 때문에 그건 잘 봤다, 하면서 제가 이걸 인정한 겁니다.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개인의 종말론까지 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 추수했습니다. 하나님 제사 받으세요.‘ 라는 그것도 죄가 되는 거예요. 죄가 아닌 것이 없습니까? 묻지 마세요. 모든 게 죄가 되는 거예요. 그게 마지막 때 십자가 져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겁니다. 십자가 지기 전까지는 하나님 잘 섬기고 순종하는 것이 죄 아닌 줄 아는 이것이 선악으로 만든 종교, 신앙도 아니고 종교에 불과한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도 누구를 기다렸습니까? 아브라함도 자기 아들 바쳐서 믿음 얻었다 하면 그걸로 됐잖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누굴 기다려요? 예수님 기다린다고요. 왜 기다립니까?. 자기가 그렇게 아들까지 바쳐서 대단한 신앙을 했으면 느긋하게 ‘나 이제 구원받았다. 아들 바쳐서. 너희들도 나처럼 아들 바쳐라.’ 이러면 되는데 왜 예수를 기다려요? 그걸 바치면서 뭘 알았어요? 이 한 행위도 죄가 된다는 걸 알았어요. 절대로 십자가를 대체할 게 아니라는 걸 알아요.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뭘 알았느냐 하면 내가 아들 바침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어찌어찌해야 그 선조가 되는 내가 구원받아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후손이 누굽니까? 이삭이죠. 이삭은 또 말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내 후손이 될 것이다. 결국은 아브라함은 아브라함 자손에 의해서 아브라함 선조가 구원받는 그러한 체제가 수립되는 겁니다.
그게 갈라디아 3장에 아브라함 자손이 몇 명이라고요? 한명이죠. 아브라함 자손이 아무리 많더라도 오직 자손은 한명이다. 다른 사람은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죠. 아브라함 언약이 아니에요.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다와 똑같은 말입니다. 언약을 위해서 아브라함이 있었던 겁니다. 그걸 우리보고 이야기하죠. 우리보고 무슨 이야기합니까? 새 언약을 위하여 너희가 있지, 너희들 구원받으라고 십자가 있는 것 아니다는 겁니다. 이걸 믿어야 진짜 믿음이라는 거예요. 말려 들어간 걸 믿어야 돼요. 들어보면 어렵지 않아요. 조금만 생각하면 되는데 왜 그게 우리 일상에 체험이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체험 화 되지를 않아요.
아까 집사님하고 이야기하면서 집사님이 좋은 아이템을 줬어요. 뭐냐 하면 길에 돈 만 원 떨어져 있는데 왜 우리는 기뻐하는지 몰라요. 그런데 복음 들으면 별로 안 기뻐요. 어떻게 만 원어치도 안 되나. 제가 아무리 주일 날 설교해봐도 그 이야기한 건 입 다물고 있고 이승기하고 윤아하고 결혼하는 것은 나오자마자 4년째 사귄다는 것은 온 천지 다 퍼져버리고, 그래서 마음 같아서는 이승기하고 소녀시대 윤아하고 사귄다는 광고를 해서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습니다. 집어넣고 싶어요.
여기 그 뒤에 해설 보세요. 현재적인 시, 공간 자체가 인간의 몸에서 나온 시, 공간 자체가 이게 뭐냐 하면 바뀌어져야 돼요. 왜냐 하면 인간의 시 공간은 시간적 이미지와 공간적 이미지를 새로 만들어 내요. 이게 말썽꾸러기에요. 시간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버리면 죽고 난 뒤에 오실 것이라고 보고, 공간적 이미지로 바뀌면 이 세상 말고 하늘나라에 천국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선악과 따먹은 우리 몸, 이 몸이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죄의 절정이 그겁니다. 이 땅에는 주님 안 계시지만 저 하늘나라에는 있을 것이다. 이건 기독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그런 이미지 가지고 사람들에게 돈을 빼먹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늘나라 처소가 있으니 맨션아파트 있다고. 거기 도시가스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모든 상상하는 것이 내 몸이 현재 내가 날 살리는데 필요한 개념들과 용어들을 확장시켜서 그걸 건전하게 하늘나라까지 더 좋게 만들어 놓고 거기 가겠다는 거예요. 결국 뭡니까? 자기가 만든 영역을 확대시켜 놓고 거기에 자기가 가겠다는 거니까 이건 구원이 아니고 이사 가는 것밖에 안 돼요. 탈출하는 의미가 없어요. 우리가 탈출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는 거예요. 안 되니까 어린양 죽었고 안 되니까 예수님 죽으신 거예요. 내가 죽는다고 탈출되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 죽는다고 베드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내 대신 죽어서 구원받지를 못해요. 오직 한 분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을 완수하실 그분만이 죽어야 우리가 살지, 내 대신 자식 죽고 남편 죽는다 해서 내가 사는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살길이 애초부터 있었다? 없었다? 없었다는 이야깁니다. 애초부터 우리는 구원자체는 없어요. 구원을 주님 때문에 구원을 논하고 있다는 자체가 이미 구원받은 사람 이예요.
전제가 뭡니까? 절대로 나는 구원이라는 것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껏 하는 게 뭡니까? 종교적 구원밖에 없죠. 이 땅에서 하늘나라 가는 것. 실제 구원은 그게 아니거든요. 내 몸을 구원하는 게 아니잖아요. 내 몸을 없애버리고 그리스도 몸으로 바꾸어서 구원하기 때문에. 그게 뭐냐 하면 이름이니까, 이름이라 하는 것은 우리 이름은 없어졌어요. 우리는 기도해도 누구 이름으로 합니까? 주의 이름으로 할 일이지, 내 이름 자체가 없어요. 이게 주일 날 설교할 때 예로, ‘이 근호 어디 있지?’ 이 근호는 없어요. 이름 자체가 없다니까요. 이름 자체가 성립 안 돼요. 왜냐 하면 이름이라는 것은 뭔가 의미가 있을 때인데 의미 없는데 왜 붙입니까? 그냥 해골이라 할까요? 해골. 그냥 죄인. 우리는 내 이름을 위해서 주의 이름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니까 주의 이름이 작용을 해요. 작용을 하게 되면 우리는 주님을 부르게 돼 있습니다.
그게 로마서 10장 15절에 보면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숨어있는 분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모든 것은 내 쪽에서 다가서는 것은 선악과가 만든 종교, 선악과가 만든 기독교, 이 종교가 우리를, 구원을 훼방합니다. 십자가는 그걸 완전히 죄로 간주해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내가 만든 시, 공간 이미지로 같이 죄라고 규정이 돼야 됩니다. 그러면 시, 공간 이런 거 없이 내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걱정이 늘어지겠죠. 그런 걱정을 한다는 자체가 관심사가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 주께서 하신 건 관심 없고, 주님의 몸으로 하신 건 관심 없고, 내 몸으로 어떻게 내가 유지하고 왔느냐 하는 자기 역사에만 신경을 쓰다 보니까 그런 거예요.
그 다음에 253 페이지 합시다. 다섯 번째 줄에『후설의 현상학에 있어서의 시간이란 의식의 자기 촉발의 산물이다. 하지만 레비나스는 ‘근원인상’을 ‘자기 촉발의 구조‘ 안에서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으로부터의 촉발’ 의 구조 안에서 사유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묵시적 몸이신 예수님께서 발휘해주시는 주체형성의 장은 십자가 중심(보편적인 타인의 고통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새 언약 달성만의 고통)으로 진행되기에 성도의 신체성도 증거용으로 유지될 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단어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발휘해주시는 주체형성의…』그 다음에 뭡니까? “장”이죠. 필드(field)죠. 이 장이 뭐냐 하면 장은 일체의 개체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그런 영역을 말합니다.
페르디란 사람이 실험하기를 지남철 옆에 쇳가루 뿌려놓았는데 지남철 N극 S극이 있는데 쇳가루를 핀셋으로 하나, 하나 지남철에 놓았습니까? 쇳가루를 휙 뿌려놓으니까 어떻게 돼요? 쇳가루가 이렇게 돼요. 내일 뿌리면 어떻게 돼요? 내일 뿌려도 마찬가지고 모래 뿌려도 마찬가지로 지남철에 붙죠.
그럼 여기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 자력이 작용하죠. 마오메트가 죽고 난 뒤에 관을 메고 가는데 관이 공중부양 했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마에메트 관 할 때 거기에 자석이 있는 광물을 사용하다 보니까 잠시 쇠로 만든 관이 떴다는 거예요. 그걸 모르고 마오메트 관이 공중부양해서 마오메트 보통 분 아니다 해서 그게 이스람교 전설이 되었어요. 자석이 발견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쇳가루를 이렇게 뿌려 놓으니까 이 장은 인간의 손이 아니고 자연적으로 형성된 영역이 되겠죠. 여기는 하나의 배치와 배열 적당한 역할 이거만 있을 뿐이잖아요. 그래서 이 장 개념을 십자가에다 적용시켜 보자 말이죠. 십자가에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고 창조에 적용시킨 사람이 있어요. 판넨베르그인데 이 신학자는 이 자연세계를 하나의 장으로, 필드로 봐서 모든 것이 적절한 구조에 그냥 배치돼 있다. 신께서 그렇게 배치했다고 이렇게 보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십자가에서 장을 해버리면 장의 특징은 뭐가 없다? 주체가 스스로 자기 자리를 정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럼 이쪽을 염소라 하고 이쪽을 양이라 한다면 양과 염소의 자리는 이거는 십자가가 만들어 내는 그 장의 힘의 세기에 의해서 각자 자기 자리로 밀려나야 돼요.
사도바울이 한 말이 복음을 전하게 되면 구원 받은 자에게는 향기고, 구원 안 받은 사람은 악취가 날 것이다. ‘아휴, 냄새, 누가 홍어 삶았나? 아휴, 누가 간장 달인 냄새? 누가 발 안 씻고 양말 신었어요?’ 이렇게 하고 구원받은 사람은 ‘야! 이건 무슨 향기가 이렇게 좋으냐?’ 이렇게 보고. 장을 형성한다는 겁니다.
주체 형성의 장은 예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거기 계시다는 거예요. 삭개오 이야기할 때 했는데 삭개오 구원받은 건 딴 게 아니에요. 이 페르디가 이야기한 자석 때문에 했습니다. 나무 위에 올라갔거든요. 딴 거 아니에요. 딱 시선이 번쩍번쩍 시선이 마주친 거예요. 혹시 연애할 때 안 그랬습니까? 스쳐 지나가는데 뭔가 본 듯한 느낌이 들어서 한번 보니까 눈이 마주쳤을 때, 마치 ‘됐나?’ ‘됐다.’ 하는 느낌.ㅎ 뭔가 짜릿한 걸 느끼면서 잊어지지 않는.
삭개오가 돈을 횡령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돈 밖에 모르는 사람 이예요. 그 동네 소문났어요. 나무에 올라갔다가 시선 마주치고 ‘오늘밤에 너희 집에 간다. 구원이 너희 집에 이르렀다.’ 끝난 문제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장이예요.
십자가를 믿어요? 무슨 수로 믿습니까? 연구할까요? 김동리란 소설가는 십자가에 대해서 글을 썼지만 예수 안 믿었어요. 신학 연구한다고 믿는 줄 압니까? 지직! 요거에요. 십자가 앞에서 이유도 모르는 채 내가 죄인 되었을 때, 게임 오버! 게임 오버, 1,2,3,4…. 완전히 게임 오버 되었어요. 완전히 게임 끝났어요. 무슨 행위가 더 필요합니까? 무슨 헌금, 기도, 전도, 이게 왜 필요한데?
선악과는 어떻게 됩니까? 선악과는 목표를 정해놔요. 천국 가기 위해서, 하늘로 가기 위해서는 내가 고상하고 거룩해야 돼요. 어디서 배웠습니까? 성경책에서 배웠어요. 그리고 목사는 거기에 대해서 학원처럼 설명을 했어요. 야! 이 말씀 지켜야 되고 지금 할 게 많아요. 기본적으로 두 개, 주일성수, 십일조, 기본 점 두 개 깔아놓고 그 다음부터는 여러 가지 헌금도 해야 되고 할 게 많아요. 교회서는 송구영신 예배도 드려야 되고, 드릴 때 그냥 오지 말고 봉투에 담아오고 뽑기도 해야 되고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런데 십자가 보는 순간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강도고 죄인인 것을 안 순간 게임 오버!! 게임 오버! 1,2,3,4 게임 오버 끝나버렸어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인도 의인된다. 정작 하나님이 준비한 건 이거였습니다. 복음이었습니다. 그 복음으로 하여 얼마나 가짜들을, 지금 이 자리에서 가라지를 깔아놨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깔아놨는지 몰라요. 왜, 그게 장이거든요. 제발 좀 저쪽으로 가줘. 선악과가 만든 기독교 있잖아요. 제발 지옥 가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깔아놓은 거예요.
참 제자들도 불쌍하지, 실컷 죄 지어놓고 나중에는 십자가만 전하고. 실컷 3년 동안 죄졌잖아요. 그 전에도 죄졌지만, 주님 따라 다니면서 실컷 죄졌어요. 베드로는 3번 모른다 하고, 하여튼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 죄졌어요. 예수 믿는다 해도 권력자를 더 믿었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 보다 권력자가 더 무섭잖아요. 하늘나라에서 누가 높으냐. 하고. 그렇게 해도 막상 성령 임하니까 어떻게 됐어요? 게임 오버! 끝나버렸어요. 십자가 피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는 그 피! 출애굽한 그 피가 이 피라는 걸 알 때 더 이상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레비나스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레비나스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메시야는 우리에게 고난 받는 모습으로 찾아온다. 여기에 신학자들하고 철학자들이 뿅 갔어요. 그게 바로 기독교나 복음에 이렇게 했어요? 고난 받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하소연하면서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 이렇게 할 때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 곧 참된 메시야를 영접하는 것이다. 철학자가? 신학자도 아니고 철학자가 그런 이야기했을 때 참 천주교 신부들이나 기독교에서 공부 꽤나 한 사람들은 정말 이게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그거 복음 아니거든요. 그거 복음 아닙니다.
지젝이 말했어요. 왜 내가 레비나스를 반대하느냐? 내가 타인을 영접할 때 내 속에 저 사람이 메시야라고 알아먹는 나는 그 행동이 정당화되기 때문에 이건 옳은 게 아니라고 했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저분은 나 때문에 고난 받는 자다. 저분을 영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영접하는 걸로 받아들이자.’ 받아들이는 판단을 누가 한다는 말입니까? 본인이 하는 그것은 엉터리라는 겁니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가 잘 되기 위해서 자기 결정이 정당하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고 그게 거지가 됐든 노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