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3월 29일 강의 요한복음
대구 3월 29일 강의 요한복음
이름 : 이근호(IP:)
001 20040329 요한복음
http://media.woorich.net/~woorich/study/daegu/daegu040329.hwp
daegu040329
[ 대구 강의 1 - 요한복음 ]
우리교회당 040329 강의: 이근호 목사 정리 : 구득영 목사
오늘은 요한복음을 강의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전체적인 성경내용이 요한복음에 보면 아주 함축되어서 잘 들어있다는 것이다. 모두 직장생활을 하랴 아이들을 키우랴 엄청 바쁜데, 그래서 성경내용을 줄줄 다 외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또 언제 죽을지도 모르기에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게 챙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한복음이 제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임을 통해서 우리에게 뭔가 남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어떤 특별한 교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손에 이 성경책이 있으니, 그때 그 당시에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기에, 즉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반드시 영생을 얻는다고 그렇게 장담을 하시고 큰소리를 치셨는지, 그것을 살펴보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 신이시여, 기다리소서. 제가 올라갑니다 !!
보너스로 잠시 지난 시간 강의를 요약해보자면, 지난주에 '사닥다리'에 관해 이야기를 했는데, 성경에 있는 사닥다리는 내려오는 사닥다리인데, 그런데 우리 인간이 또 여기에 대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신이시여, 기다리소서. 제가 올라갑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은연중에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사닥다리 말고 그 옆에 계단을 만들어서 올라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서로 핀트가 잘 맞으면 좋을 텐데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시도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이미 유대인들이 과거에 그런 계단을 만들어서 다 시도를 해보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십일조하기, 중보기도하기, 주일성수하기, 예배당 짓기 등등, 모두다 시도를 해보았는데, 그런데 이런 것들이 왜 하나님 앞에서 통하지 않았는고 하니,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의(義)' 라는 것이다.
그들이 얼굴이 못 생겼다든지, 열심히 부족하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이 하나님의 의가 없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이나 사닥다리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런 사닥다리로 우리가 천국에 간다고 하면, 지금 우리는 이렇게 모여서 성경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 기도원에 가서 열심히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의(義) !!
이렇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의를 모르고 자꾸만 올라가는 자기가 만든 의를 고수하니까, 그것은 전혀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10장에 나오는데, 다름 아닌 사도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롬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롬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사도바울은 자기가 먼저 여기에 대해서, 이런 열심에 대해서는 도사라는 것이다. 또 사람들이 호응을 해주니 물론 기분은 좋았지만, 그러나 하늘에서 직접 오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흠도 티도 없는 완벽한 '의' 말이다. 그러니 우리의 의는 완전히 탈락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전혀 가망이 없어지는 것인데, 그런데 놀랍게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사닥다리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창세기 28장에 나오는데, 야곱이 꿈을 꾸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사닥다리가 보이더니만 천사가 거기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창 28: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창 28:11) 한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창 28:12)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사실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에 불과하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천사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어서 피를 흘릴 수는 없다는 말이다. 물론 천사가 훌륭하고 참 착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래서 "천사답다" 라는 말도 있지를 않는가? 하지만 천사는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우리 친구들 가운데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그런 착한 녀석들이 있지 않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공부해주고 돈을 벌여다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제 아무리 좋고 친한 친구라고 해도 타인이기에 말이다.
◈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
천사들도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천사들은 누군가의 앞잡이, 즉 길라잡이인데, 그런데 바로 그 뒤를 따라 오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분은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려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이 바로 '어린양' 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과거 구약의 율법에 보자면, 어린양은 자기는 죄가 없지만 흠이 있고 죄가 있는 인간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의 진노의 손길 속으로 빠져서 들어가는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제사를 드릴 때 보면, 제단불이 시뻘겋게 나와서 다 태워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에 대한 징벌인데, 사실 우리가 다 그렇게 비참하게 태워짐을 당해야 하는데, 우리 대신 어린양이 그렇게 제물로서 당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어린양을 보시고서 하나님께서 흡족해하시는데, 바로 오늘 우리가 공부하고자 하는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을 두고 어린양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그냥 착한 어린양 정도가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말이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이렇게 인정했는데,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세례요한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몰아 부치지 말고 말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지고 가셨다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죄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끙끙거리지 말자는 것이다.
◈ 더 이상 끙끙거리지 말자 !!
사람이 아무리 반성문을 써도 그때뿐이고, 돌아서면 다시 그런 일들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데,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싶어서 친구들이 그렇게 유도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산 속에 들어가 도를 닦으면, 아니면 한강다리에 가서 다이빙을 하면 되겠는가? 그렇게 해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어린양이 대신해서 가져간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채찍을 때리고 자학을 하고, 또한 하루에 성경 5장 읽기와 같은 방식으로 정신적인 압박을 가한다고 해도, 다음 날 또 문제가 있어서 더해서 아무리 7장을 읽어도, 그런 것은 자기 스스로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연극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일종의 재롱이 되는데, 할아버지는 손자의 재롱이 넘어갈지 몰라도 하나님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의 승려들이나 인도의 도인들을 보면, 그들이 이런 방면에 그야말로 도사들이 아닌가? 빗자루로 마당을 쓸어도 벌레들을 살피면서 하니 말이다.
그러니 사람이 어떻게 자기 죄를 스스로 없앨 수가 있겠는가? 물론 남의 죄로 어떻게 해줄 수 없고 말이다. 그러니 그것을 대신해서 해결해줄 수 있는 분은 따로 계시다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물론 교회에서는 자기도 뭔가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분위기를 띄워주어야 돈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데,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말씀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교회에서는 왜 그렇게 말씀대로 하지 않는 것인가? 목사들은 서로가 동업자니까 아마추어인 교인들의 눈을 속여서 그렇게 넘어간다는 것이다. 교인들도 처음에는 이상하다 싶다가도 교회마다 다 그렇게 하니까, 자기들보다는 그래도 프로인 목사들이 맞겠지 하고 그렇게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성경공부를 하면서 중요한 것은, "내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궁금한가?" 하는 점인 것이다. "돈도 안 되는데..." 라고 하면서 군지렁거리면 안되고, 그분이 대신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정말 그분의 그런 사랑이 우리가 좋아하는 돈보다도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다가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의 쓸데없는 것들의 걱정에서 초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천사처럼 산다" 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모습인데, 이것을 주시려고 이미 예수님께서 모두 준비해놓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공부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이러한 어린양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는 그 취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
그러니 혹시 다음에 모이게 되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지만, 아무튼 그때는 다 성경책을 가지고 와서 함께 살펴보자는 것이다. 예? 오늘 다 가지고 왔다구요? 우리가 이제부터 요한복음을 살펴볼 텐데, 진도는 조금씩 나가면서 강의를 들으면서 성경구절이 자연스럽게 외워지도록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먼저 1장 1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우리가 이런 구절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고 하니, "아니, 누가 그것을 물어봤어? 말씀이 하나님과 같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말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런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말씀이라는 하나님이 또 계시던지 말던지, 또 하나님이 그렇게 한 분인지 두 분인지 자기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4절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요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여기 4절에 보면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여기 '생명' 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 생명이 어디 있는고 하니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는 바로 그 태초에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한고 하니, 우리가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되는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서 엄청난 걱정거리를 가져다주는데, 죽음은 바로 끝장났다는 것이다. 자기의 사라짐, 그것만큼 우리 자신을 허무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결혼을 자식을 낳게 되면, 수많은 아이들이 있어도 그 중에서 자기 자식만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잘생겼던 못생겼던 상관없이 말이다. 아니 아이들을 바라보는 관점도 자기 자식을 중심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식이 눈이 적으면 눈이 적은 아이가 예쁘다는 식으로 말이다.
왜 이렇게 자식이 자기에게 그렇게 가슴에 박히는고 하니, 데카르트에 의하면 자식은 자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죽 늘어난 것이 바로 자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식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학교 운동회를 해도 유족 자기 자식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인간이란 언제나 자기를 잃어버리는 법이 없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 존재에 대한 집착에서 시작해서 집착으로 마치게 되는데, 자기를 위한 집착 말이다.
케네디가 대통령취임연설(1961년 1월20일)에서 이런 말을 했는데, "자, 미국 국민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해보십시오" And so, my fellow Americans,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라고 말이다.
이것이 성문종합영어에도 나오는 유명한 문구인데, 그런데 사실상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이 아무리 국가에 충성한다고 해도 그것은 바로 자기가 그 국가에 존재한다는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평생을 오직 자기만을 바라보면서 살아온 인생인데, 그런데 그것이 드디어 오늘 끝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그러면서도 "내 인생이 끝나는데 무엇을 하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니 자기 인생이 끝나는데 자기가 무엇을 하고 살겠는가? 이것은 말이 서로 모순이란 것이다. 아니 자기가 없는데 무슨 삶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모순을 알면서도 어떻게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앞서간 사람들처럼 죽는다는 것이다. 마치 콜라공장에서 병이 순서대로 착착 지나가듯이 말이다. 인생이란 그렇게 미끄러져 간다는 것이다. 꼭 그렇게 순서대로는 아니지만 말이다. 대충 맞는 것이다.
이렇게 죽음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종착점이 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그 생명은 누가 준 것인가? 이 세상 사람들은 전혀 여기에 대해서 깜깜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한복음 1장에서 뭐라고 하는가? 생명이 어디에 있었는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바로 그 말씀이라는 하나님 속에 계셨다는 것이다.
◈ 생명 되신 분이 직접 내려오시다 !!
그렇다면 왜 굳이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셨다" 라고 간단하게 말하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말씀되시는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직접 방문하셨음을 말하고 싶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 귀하신 몸이 말이다.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이야기인가? 세상에 태초부터 계셨던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렇지 않는가? 이것보다도 더 충격적인 사건이 어디 있겠는가? 그분이 우리가 사는 이 인간 세계를 방문하신 적이 있으면 또 그렇게 떠나가셨다는 사건보다 더 말이다. 그것도 대한민국 같은 아름다운 나라가 아니라, 그 먼지 날리는 광야와도 같은 이스라엘이라는 곳에 2000년 전에 말이다.
그런데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는데, 왜 그렇게 하셨는가? 그것은 바로 '나를 믿지 않으면 정말 죽는다" 라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죽음이란, 그야말로 마귀와 함께 지옥으로 가는 영원한 멸망이 되는데, 그것을 통고하러 오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예수를 믿지 않는가? 처음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그것은 바로 자기들은 나름대로 죽어도 좋은 곳에 간다는 자신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이 정도로 착한데, 하나님이 있어도 설마 나를 지옥에 보낼 리가 없지. 천사 같이 착한 나를 ..."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아니, 네가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너는 왜 아프고, 결국은 왜 죽지?" 라고 반문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런 상태가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그런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천국백성으로 간주한 적이 없다고 하신다는 것이다.
◈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
그래서 생명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외부에서 주입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요한복음은 바로 이 생명 되시는 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고, 즉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라고 14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 하나님은 두 분이 계시는데...
인 간 들 : 그런 것 나에게 말하지 마라. 나와는 상관없다. 듣기 싫다.
요한복음 : 그런데 그분이 이 세상을 방문했다.
인 간 들 : 오잉? 하나님이 이 세상에 왔어? 언제?
요한복음 :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인 간 들 : 그 하나님이 누군데?
요한복음 : 말씀이다.
인 간 들 : 말씀이 뭔데?
요한복음 : 말씀은 하나님 쪽에 계실 때에 호칭이고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예수' 라는 분이다.
인 간 들 : 왜 오셨지?
요한복음 :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인 간 들 : 잉, 나에게도 그런 사랑은 좀 있는데... 나도 좀 착한데...
요한복음 : 하지만 율법에 의하면 완벽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착하다고 말하지 말래.
인 간 들 : 그러면 우린 가망이 없네.
요한복음 : 아니, 그분은 이 세상 죄를 대신 지고 가시기 위해서 오셨어.
인 간 들 : 정말?
요한복음 : 물론이지. 그래서 그분을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된데.
인 간 들 : 그렇다면 누가 그런 믿도록 하는 일을 하지? 목사인가?
요한복음 : 아니, 그분이 직접 자기가 택한 사람 마음속에 성령을 넣어서 믿도록 하신대.
이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바깥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속에 들어온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좀 어려운 말인데, 하나님이 우리 밖에 계시면 안에 있는 우리와 연결될 매개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매개체를 교회라고들 생각하는데, 즉 교회에 등록을 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칼빈도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주장했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란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 밖에 있으면 그런 공식이 성립할지 몰라도, 그러나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 속에 있다면, 우리는 그 순간부터 예수님과 더불어 예수님 안에서 합세가 되어서 언제 죽더라도 항상 천국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앞길이 구만리인 여러분에게 자꾸만 죽음을 이야기해서 죄송하지만 하지만 이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밖에 계시는 분이라면, 우리는 그분과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 날마다 엄청난 종교적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가? 하루에 성경 5장 읽다가, 7장으로, 10장으로 점점 더 늘어나야 하고, 기도하는 시간도 그렇고 말이다. 그러니 3장 읽으면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게 연결고리가 설령 있다고 해도 골치 아프고, 사실 율법이 그 연결고리인데, 그러나 율법은 완전하기에 우리에게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 되는 것이다. 지킬 수 없기에 말이다. 탐을 내었다가 탐내는 것이 취소가 되는가?
◈ 엘리야의 외로움을 느껴봐요 !!
선지자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의 거짓 선지지들과 '850:1'로 전투를 했는데, 여기서 한번 상상을 해보라는 것이다. 자기가 엘리야 라고 여기고 말이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과연 싸움을 할 맛이 나겠는가? 여기서 민중들은 누구를 좋아했겠는가? 그것은 바로 바알 선지자들이라는 것이다.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서 말이다. 참과 거짓보다는 말이다.
이러한 전투에서 엘리야가 감당해야만 했던 그 외로움과 고독감이 이해가 되는가?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의 모인 숫자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아무리 모아봐야 전혀 쓰레기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이다.
바알 선지자들은 밤이 새도록 울고불고 옷을 찢고 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마치 교회에서 철야기도를 하듯이 말이다. 그래도 안 되면 이제 자기 몸에 칼로 상처를 내기 시작하는데, 물론 칼을 가지고서 상처를 내면 아프겠지만, 그러나 그것도 처음에 좀 아프지 그것이 지나고 나면 쾌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스스로 자기 몸을 찌를 만큼 믿음이 좋은 자기를 보면서 감탄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런 짓들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엘리야는 그들의 행위를 비웃기라도 한 듯이, 아주 간단하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타내주실 줄 믿습니다' 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니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제단 주위에 물을 가져다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단과 제물을 다 태우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알 선지자들과의 대전투가 있고 난 다음에 엘리야는 다시 쫓기는 신세가 되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타나시는고 하니, 크고 강한 바람이 불고 바위가 갈라지는 일이 나는데 그곳에서 안 계시고, 그리고 그 뒤 지진이 일어나는데 그곳에도 안 계시고, 그리고 이제는 불이 피어오르는데 아마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불꽃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모세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곳에도 안 계시고,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그러한 폭풍과 지진 뒤에 세미한 음성이 들리는데, 바로 그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계셨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 우리가 조용히 말씀을 보고 있지 않는가? 너무나도 조용해서 잠이 다 올 지경인데, 아니 조용하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어디 말씀이 무효가 되는가?
중요한 것은 큰 소리로 하거나 떠드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인데, 정말 이 땅에 누가 왔으며, 그분이 진실로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벌리셨으며, 그분이 어떻게 다시 하늘로 올라가셨는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얼마나 어떻게 해서 목회를 성공하고 실패했는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제가 목회를 한지 20년이 넘어가는데, 아니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도대체 바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아니 고함을 지른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좋아하시겠는가? 귀를 만드신 분이 듣지 못하겠는가?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는 분인데,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 옷을 좀 잘못입고 와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의 어린양이 세상 죄를 담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냐는 것이다. 죄는 그 어린양 되시는 주님께서 다 알아서 처리를 하는데, 왜 자기가 알아서 하려고 그렇게 난리를 피우는지, 그것이 오히려 주님을 그 얼마나 모욕하는 것이고 섭섭하게 하느냐는 것이다.
◈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어린양의 일솜씨 !!
목사나 사람들이 무슨 소리를 하고 모슨 짓을 하든지 그것에 신경을 쓰면 안되고, 인간은 그냥 자기 욕망대로 살아갈 나름이고,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무슨 말씀을 하시고 무슨 일을 하셨느냐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요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여기에 보면, 심판은 목사나 사람이 아니라 다 아들에게 맡겼다고 하는데,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을 공경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아들공경, 끝!"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천국도 영생도 말이다. 아들을 공경하면 그것으로 다 된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얼마나 간단한가?
◈ 오직 아들공경으로 !!
그러나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사람들의 심보가 고약하고 더러워서 그러한데, 사람이란 자기가 기도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줄 것으로 잔득 기대하고 있는데, 그런데 그 모든 행동들이 다 묵사발이 되고 자기의 요구가 무시될 때 과연 공경이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아니면 원망이 튀어나오겠는가?
이렇게 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들이 공경이 아니라 원망으로 똘똘 뭉쳐진 그런 원망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말로는 주님을 공경한다고 해놓고 날마다 돌아보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없고, 남은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관심이 없고 말이다. 그러니 언제나 우리에게서 터져 나오는 것은 죄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이러한 자기 자신을 깨닫고서 날마다 회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회개한다" 라는 것은 "반성한다" 라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인데, 회개란 그런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임을, 즉 자기의 진솔한 면모를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할 때 예수님의 '대신 희생'이 얼마나 고맙게 다가오겠는가? 왜냐하면, 자기에게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나올 것이 없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그분께서 그렇게 다 이루어주지 않으면 그야말로 자기에게는 절망밖에는 아무 것도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분의 다 이루심을 철저하게 고백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 그때부터 그것을 "믿는다" 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믿음은 철저히 자기 자신을 믿지 않음이 전제되는 것이다. 자기를 믿으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고 말이다. 이러한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공경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이야기한 이 요한복음 1장과 5장의 내용을 그대로 강단에서 설교한다고 가정해볼 때, 아마 교인들 중에서 엄청 좋아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상당히 불쾌하게 여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말은 맞지만 그렇게 해서 교회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은 자기 존재 가치를 큰 예배당에서 찾으니 말이다.
그런데 말씀대로 설교를 해버리면 모든 영광은 누가 다 가져가는고 하니, 그 아들이 몽땅 다 독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는 뭐가 되는가? 그렇게 고생하고 수고한 자기에게도 뭔가 좀 떨어져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말씀대로 설교를 하니 틀렸다고는 말하지 못하고, 그래도 못내 아쉬운 것은 왜 자기에게 돌아올 몫은 없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은 이제 일겠는데,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래도 자기에게 필요한 몫은 도대체 누가 챙겨주느냐고 하소연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런 것을 추구하려고 하는가? 오직 예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지금의 그 수준보다도 더 한 계단 올라서려고 하는 욕심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남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즉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는 가겠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서도 더 남보다 더 잘살고 공부도 잘하고 그렇게 뛰어나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마음가짐, 그것이 항상 골칫거리라는 것이다.
◈ 무엇이 인간을 화나게 하는가?
이렇게 설교를 하고 내려오면, "목사님, 말씀은 모두 맞지만 앞으로 그렇게 설교하면 재미없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감추어져 있는, 바로 인간들이 은근히 고대하는 것을 그대로 짓밟아버리니 자기를 모독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사람을 화나게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서 갈라디아서 1장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갈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여기서 조금 문맥에 관심을 두게 되면 무엇을 추론할 수 있는고 하니까, 이렇게 사도바울이 사람을 기쁘게 일을 하지 않은 것은 예수님 자체가 사람들을 기쁘게 일을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더 나아가 평소에 사람들이 무엇을 얻었을 때에 기분 좋아하는지, 그 원하는 것을 예수님을 결단코 호응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조금 복잡해서 혼란스러운 것 같은 데 무슨 말인고 하니, 왜 평소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이것도 좀, 저것도 좀..." 이라고 나오지 않는가?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전혀 호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것인데, 그 하나님의 뜻이 바로 "택한 자는 천국으로 데리고 가겠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분명 성경에 있는 이야기임에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이런 설교를 하면 대단히 기분 나빠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교회에 나올 때는 뭔가 나름대로 챙겨갈 것은 좀 챙겨가려고 나왔는데, 그것이 전혀 용납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은가?
사람에게 자식이 생기게 되면 자기 소유가 되고, 또 인간이란 자기밖에 모르니까 자기 위신을 위해서 그리고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잘 자라주기를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이 성경말씀을 보지 않는다면 이런 생각이 얼마나 당연하게 여겨지겠는가? 그것이 무엇이 틀렸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말씀을 보게 되면 그런 생각이 얼마나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반해버리는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제 아무리 열심히 성경공부를 하고, 제가 "주님을 공경하라" 라고 외쳐도, 일단 여기 이 문밖을 나서게 되면 그런 소리는 마치 에프 킬라가 사라지는 것처럼 공중으로 모두 날아가 버리고, "그래도 나는 살아남아야 돼" 라는 것만 남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만나, 즉 생명의 양식이라는 것이다.
◈ 신자 -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 가까이 계신데 그런데 우리는 우리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택함을 입은 자들은 주께서 그들 안에 계셔서 말씀으로 인도해주신다는 것이다. 그때 성경을 펼쳐서 읽다보면, "그렇게 은혜를 받아놓고 또 이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어이쿠..." 라고 하면서 회개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생활이 반복되는 것을 두고서 '신자' 라고 하는 것이다.
전혀 완벽하고 향상되는 생활이 아니라 말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자기 집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스스로 그렇게 목표를 세워놓고 거기에 사로잡히는 자기 집착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는데, 그런데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면 평소에 자기가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고 남에게 받은 그런 칭찬들이 얼마나 부끄러운가를 알도록 주님께서 조치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들어오셔서 황당하고 난감한 일을 발생시킴으로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믿음이 있는 자만이 그것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자식을 키우다 보면 제일 짜증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수면방해인데, 아이는 낮에 실컷 자고 밤에 울면서 얼마나 괴롭히는지 말이다. 당해본 사람은 그 위력을 알텐데, 계속 당하다보면 아이를 집어던지는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부모 본인들도 아이일 때 그렇게 부모 속을 괴롭혔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왜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가? 사실 자기 자식이 아니라 마귀자식이고, 즉 아담의 후손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죄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갓난아이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전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젖을 우면 그치고 아니면 울어 제치는데, 아니 자기가 뭘 잘했다고 우느냐는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반항하는가?
사실 어린아이들이 이렇게 반응하고 우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 그것을 그냥 그대로 넘기지를 말고, 아니 왜 아이들은 이렇게 일방적으로 자기밖에 모르는지를 한번 살펴보라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는데, 그러면 어른들은 왜 안 그런가? 어른들은 사회의 윤리와 도덕이 있기 때문에 "부족합니다" 라고 하면서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어른들도 파고 들어가 보면 결국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 칭얼대는 노인네들, 왜?
그래서 노인이 되면 다시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어리광을 부리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누가 어른인지 아이인지 분간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동안 버텨왔던 자기를 위장하고 포장했던 그 정신력이 육체의 쇠약함으로 말미암아서 같이 붕괴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는 것은 갓난아이 때의 태어난 그 본능만이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인네들은 칭얼댄다는 것이다. 여기서 칭얼댄다는 것은 남의 배려하지 않고 자기밖에 모르는 것인데, 하지만 이렇게 칭얼대는 노인네들도 젊었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들의 구원받으려고 하는 의지를 처음부터 봉쇄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 주제파악을 하라는 것이다. 이니 그런 주제에 구원은 무슨 구원이라는 말인가? 인간이란 자기 몸이 피곤하면 모든 것이 다 귀찮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컨디션에 따라서 좌지우지된다는 것이다. 예수도 믿음도 그 다음 문제라는 것이다.
알다시피 우리 몸의 그 수억 개의 세포들이 우리 몸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들 자기가 살려고 그렇게 몸부림을 치는 것이니, 그런 몸을 가지고 있는 이상 어떻게 말씀대로 항상 온유하고 화평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알아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고 구원받을 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위선' 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 위선을 반드시 나쁜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가 이 세상이 위선이 아니면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다 하면서 살면 안 되고, 위선적인 요소들이 있어서 속은 뒤집혀도 겉은 웃으면서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 페르소나 같은 인생 !!
이것을 라틴어로 페르소나(Persona), 즉 '가면' 이라는 말인데, 이것을 '인격'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왜 이 단어가 튀어나오는고 하니, 그것은 우리 각자가 살면서 마치 가면연극을 하듯이 그렇게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가면을 쓰지 않으면 사회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서로 사업상 이야기를 하고 돌아가면 "잘 부탁합니다" 라고 인사를 하지만, 그러나 속으로는 "개코로..."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겉으로 속마음을 보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위선'을 하나님에게까지 갖다 부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자기가 착한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하나님에게 통하겠는가?
주님에게 나와서는, "예수님, 제가 이런 놈입니다. 그러니 제가 예수님이 안 게시면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라고 하는 것이다. 목사로서 위선, 남편으로서 위선, 부모로서 위선, 그리고 자식으로 위선, 그러한 것들을 모두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얼마나 위선적인 인간인지 그것을 주님 앞에서는 솔직히 다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주교에서는 이러한 위선을 신부에게 인정하는데, 하지만 신부는 위선적인 인간이 아닌가? 그러니 그런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신부가 아닌 십자가를 자신 분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놓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매일 같이 말이다.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신부가 비딱하게 앉아서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듯이 그렇게 고해성사를 받는데, 듣고 나서 뭐라고 하는가? "주기도문 두 번 더 외우세요. 그 다음..." 그런 식으로 나간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뭔가 일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을 인간들끼리 장난치는 것에 불과한 것이고, 정말 성도라면 항상 십자가를 지신 주님 앞에 겸손하게 자기가 얼마나 위선적인 인간인지 더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속에 계신 성령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 요약 - 신자의 나타남은 기적 그 자체 !!
오늘 많이 참석을 못했기에 진도를 더 이상 나가지 않고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요약하고 마치겠는데, 우리가 지금 요한복음을 공부하고 있는데, 우리가 목사의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왜 성경말씀을 직접 보아야 하는고 하니, 지금 이 성경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마치 엘리야 시절처럼 폭풍 후에나 불 가운데가 아니라 세미한 음성과도 같다는 것이다.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까, "태초에 말씀이 계시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라고 아주 속삭이듯이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 죄는 다 그 말씀되시는 어린양이 지고 갈 것이니 전혀 걱정하지 말라. 만약 걱정한다면 그것은 나를 모욕하는 것이다" 라고 역시 조용히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아니 그것을 말로는 누가 못해요?" 라고 하겠지만, 그러면 주님은 "아니야. 직접 내가 그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갔었어. 그러니 하나님을 공경하려면 나를 공경해. 그것이 정말이지 제대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야" 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그것은 이미 그분이 어린양으로서 세상 죄를 모두 다 지셨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곳을 나가 버리면 그런 생각이 모기약처럼 다 날아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실컷 강의를 하고 나면 "이근호 자기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반응이 나오는고 하니,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나니까" 그렇다는 것이다. 그냥 주님만 공경하면 되는데 자꾸만 자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데, 그렇게 되면 다시 성령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속삭인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듣고 '아멘' 하고서는 밖에 나가서는 잊어버리고, 또 성령께서는 속삭이시고, 그런 것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자기의 모습을 제대로 발견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얼마나 못난 놈인지 말이다. 그러니 더 이상 자기가 아니라 오직 주님만 의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통틀어서 두 글자로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신자(信者)'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자는 결코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누가 뭐라고 해도 기적이고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참 욕심이 많습니다. 끄집어 내어놓으면 그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남에게 자기 싫어하고, 꿀리기 싫어하고, 우리 가정이 더 잘되기를 원하고, 박수를 받기 원하고, 최고라고 칭찬듣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우리의 죄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을 믿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미 해결된 것을 의지하게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랜만에 작업을 하니 마음은 즐거운데 온 몸이 죽어나는구만... 2005,2,17 0시 50분 마침- 구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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