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린 방향성 131227
엇갈린 방향성 131227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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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수(IP:218.♡.227.232)
14-01-10 11:48
광주 강의(2013. 12. 27) 49-1
제 책 [교회를 넘어서] 207~265페이지에 보면 에스겔의 내용이 잘 나와 있습니다. 오늘은 에스겔 46장 17절부터 공부하는데, 46장, 47장은 주석이나 신학자, 목사 할 것 없이 너무 난해하기 때문에 언급조차 못해요. 지난 수요일 에스겔 설교를 했더니 제 아내가 어렵다는 말을 해요. 어렵다는 말에 대해 제가 동감을 하고, 제가 좀 쉽게 설교 내용을 요약해서 올렸습니다.
수요일 설교가 어려운 이유가 있어요. 이방민족이 침략해 왔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밖에 믿을 것이 없어서 성전에 집결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유인책으로 이용했어요. 저주로 한 방 먹일 수 있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성전에 집결 한 그것을 에스겔은 ‘가마솥’이라고 했어요. 가마솥 밑에 진노의 불을 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피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다.’고 해서 성전에 왔는데, 이런 경우에 사사기에서는 하나님이 또 구원자를 준비해서 기적적으로 반전이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면 그들은 “그 봐! 하나님 살아 계시잖아.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니 하나님이 다시 우리로 지켜 주시잖아.” 이렇게 되는데, 에스겔 24장 가마솥 비유에서는 그것이 아니고 ‘제대로 걸렸다.’ 즉 하나님 의지하겠다고 나오기 때문에 제대로 저주 받아야 합당한 극단적인 죄가 된다고 규정한 거예요.
하나님만 의지하면 우리는 구원 받는다고 여겼던 그 태도, 신앙적인 조치가 바로 하나님이 저주로 때리시는 궁극적인 죄가 된다고 규정하시는 겁니다. ‘잘 걸렸다. 이것들아. 이제 지옥 불 한 번 맛봐라!’해서 가마솥에 갇힌 형국이 되고, 밑에 하나님의 진노의 불을 붙이는 거예요.
그 진노의 불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부터 처참하게 파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조치를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때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구원은 어떻게 됩니까? 그들이 이해하고 있던 구원은 구원이 아니라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생각이 저주 받을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의지해서 구원 받아야지.’라는 생각이 죄의 근원임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믿으리오? 그러니까 이것을 현장에서 설교했던 사람이 짜증날 수밖에 없지요. 설교 내용에는 관심이 없고, ‘말이 빠르다, 톤이 너무 높다, 언어의 유희다.’ 등등의 소리를 해서 제가 다시 들어 보았어요. 전혀 톤이 높지도 않았고, 못 알아들을 정도로 말이 빠르지도 않았어요.
왜 이런 말이 나오는가 하면, ‘왜 설교를 이런 식으로 전개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저는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고 제가 뻔한 교훈 하나를 던졌어요.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숙여요. 왜 그렇게 합니까? 고개를 숙여서 스스로 자신이 익은 벼로 보이려는 것이지요. 이것이 극단적인 죄가 되는 거예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는 말을 듣는 순간 사람들이 예수를 믿어버린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누가 말려야 되는데 안 말려요. 본인이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다고 우기는 것을 누가 좀 말려야 됩니다. 이것이 저주 받아야 할 죄악입니다.
그래서 설교 끝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믿는지 안 믿는지 확증할 수 있는 증거를 내 쪽에서 제시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더 화가 났을 거예요. 목사라면 말씀을 전해서 “이것 믿으세요.”라고 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믿을 준비를 해요. 제가 설교한 것은 ‘그런 믿을 준비를 하지 마세요. 그것을 하게 되면 그것이 죄가 됩니다.’라고 했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믿는 것이 죄라면 안 믿으면 되겠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안 믿으려 하지 않고 믿으려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라고.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인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안 숙일 위인이 없어요. 다 고개를 숙여요. 왜냐? 익은 벼 행세를 하고 싶기 때문이지요. 이건 말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제 설교의 결론은, 인간은 결국 저주의 가마솥에 가야 된다는 겁니다. 저주를 안 받기 위해서 온갖 조치를 취하지만 그런 짓 아무 소용없고 결국 우리는 저주의 가마솥에 가야 합니다. 저주의 가마솥에 가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하면, 나를 그만 놓아주는 효과가 있어요.
그전에는 어쨌든 내가 나를 다독이고 절제시켜서 예수 믿는 사람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애를 섰는데, 하나님이 쳐놓은 그물인 가마솥에 들어가 저주를 받게 되면 내가 나를 위해 한 조치는 쓸데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그 조치 이후에 내 몸이 지옥 불에 들어간다면, 내 자아가 말하기를 “가지 마! 절대 가서는 안 돼.”라고 외칠 수 있는 자격이나 권리마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 동안은 내가 지옥 가지 않고 천국 가도록 힘쓰고 애썼다가, 마치 아이가 가지고 놀던 인형을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다가 그것마저 빼앗기는 것처럼 에스겔은 그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예수님의 모든 조치는 합당한 것이었음이 믿어지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이 자기 몸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관리하는 몸이 되겠지요. 그게 믿어지는 사람이 성령 받은 성도입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디서 온 거예요? 성령은 내가 다가감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나의 손을 탈치고, 나로 하여금 “따라 오지 마!”하고 방치한 후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치에 의해서 찾아드시는 분이 성령이고, 그 때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고 구원이 되는 거예요. 이제 신약성경이 이해가 되지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으로가 아니면 아무도 하늘나라에 올 수 없다’는 말이 이해되지요? 이것이 이해된다면 그는 니고데모보다 우수한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는 몰랐어요. “어떻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을 때, 예수님 대답이 “성령이 바람같이 분다.”즉 바람을 잡을 수 없듯이 성령은 네가 잡을 수 없다는 의미인데, 니고데모는 계속 자신에게 미련을 갖고 있었지요. 바람 같은 성령을 잡아서 자기를 구원하려는 조치를 하니까 안 되지요.
니고데모가 구원 받으려면 예수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성령이 찾아오셔야 돼요.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12제자마저 탈치고 주님 혼자 지시지요. 그 이야기가 에스겔 46장 16-17절 이야기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왕이 만일 한 아들에게 선물을 준즉 그의 기업이 되어 그 자손에게 속하나니 이는 그 기업을 이어 받음이어니와 왕이 만일 그 기업으로 한 종에게 선물로 준즉 그 종에게 속하여 희년까지 이르고 그 후에는 왕에게로 돌아갈 것이니 왕의 기업은 그 아들이 이어 받을 것임이니라.”
이게 뭐냐 하면, 왕이 건설하는 영토에서는 모든 것이 왕의 소유가 된다는 말입니다. 왕의 소유가 되니까 ‘내 몸은 나의 것’이라고 우기는 사람은 왕의 영토에 못갑니다. 그것을 신약에서는 ‘천국에는 아무도 못 간다.’고 했어요. 아무도 못 간다는 소식을 가지고 왕이 등장하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나의 것은 아무것도 없고 전부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기에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들의 소유욕을 비켜가는 식으로 언급하도 보니까 예수님 말씀이 그들에게는 먹히지 않습니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계3:7)”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지역이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천국에 내가 문 열고 들어가면 되지.’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복음이 아니고 불교입니다. 불교는, 눈에 보이는 세상은 고통과 모순과 갈등이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 있으면서 고생과 고통을 느끼면서 인간 자아는 여분의 빈자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져요.
이 부푼 자리는 공터가 되는 겁니다. 여백이죠. 이 여백에 기독교나 성경 말씀이 들어오면, 내가 들어가고 싶은 멋진 미래의 나라(이상 세계)가 천국이 되는 겁니다. 이런 세계는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왜냐? 우리는 왕이 아닙니다. 왕이 아닌데 천국을 꿈꾸는 것이 지옥의 불쏘시게 거리밖에 안 됩니다.
‘이렇게 힘든데 하나님 의지하면 날 구원하시겠지.’라는 것이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시키는 번개탄 조각입니다. 결국 천국 가겠다는 것은 자신을 즐겁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의 말씀은 그런 생각 자체가 하나님의 화를 돋운다는 것입니다. 선악과 따먹었는데 왜 행복해야 됩니까?
에덴을 반복시키지 않으면 인간은 죄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죄는 어디에서 발생되었습니까? 죄는 에덴동산에서 발생했고 그것으로 끝이에요. 여기에 호두과자가 있는데, 우리는 접시는 두고 호두과자만 먹고 이것이 죄라고 생각하잖아요. 혹시 창세기 2, 3장을 읽어보셨습니까?
우리는 선악과 따먹은 것을 죄로 보잖아요. 그게 아니에요. 이 접시를 깨뜨린 것이 죄가 되는 거예요. 에덴동산을 망친 거예요. 주님은 에덴동산을 안 망치기 위해서 사람보다 나무를 더 귀히 여겼어요. 인간은 말썽꾸러기이기 때문에 생명나무 보호하기 위해 말썽꾸러기를 추방시켰지요.
이게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겁니까? 하나님은 생명나무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생명나무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어요. 창세기 2, 3장을 나만 읽은 것이 아닌데 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없는지. 왜 이게 눈에 안 띄었을까요? 그 이유는 ‘나는 행복해야 돼. 나는 죽어서 천국 가야 돼.’라는 인간의 유토피아적인 저주받을 욕망이 눈을 어둡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도 날 행복하게 하기 위해 읽기에 말씀 자체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면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믿지 말라고 합니다. ‘네 속에 있는 그리스도가 믿게 하는 경우 외에 너 스스로는 믿지 마라.’ 즉 ‘내가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라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네가 믿지 말고 너와 함께 있는 예수님께서 믿게 하는 경우에만 이 성경은 예수님과 연관되면서 이해될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신약성경에서는 ‘주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은 반드시 십자가 사건을 전제로 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주의 이름은 안 믿고 내 이름을 믿겠습니다.”라고 한다면 “너는 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잖아. 죽인 놈이 왜 여기 와서 네 이름을 주장해?”라고 하시겠지요.
구원 받아야 할 죄인인 우리가 우리 이름을 내세우면 안 됩니다. 우리 이름은 예수님을 죽인 저주 받을 이름이고, 주의 이름으로만 구원이 가능해요. 죄, 구원, 천국 이 모든 개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에덴동산 사건이 지금도 반복되어야 합니다. 내 인생도 날마다 에덴동산이 반복되는 식으로 주께서 죄를 규정해요.
인간에게는 시간이 있어요. 과거, 현재, 미래의 심리적 의식이 시간인데, 해와 달이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는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지만 체제로 보면 붙박이처럼 박혀 있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여기에 파인애플이 있는데 네모로 잘려있는 파인애풀이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움직이면 파인애플의 다른 면이 보이지요. 파인애플은 고정되어 있지만 우리가 변하기 때문에 세상은 변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해와 달을 통해서 무엇이 규정되는가 하면, 수메르 문명에서는 60진법이 만들어졌어요. 시간 측정이 나와요. 이것은 농사와 고기잡이를 위해서 했습니다. 달을 보면서 밀물, 썰물을 예측합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 삶의 유용성을 위한 것이죠. 그런데 시간을 계산할 때 시간이 맞는지 해와 달에게 물어봤습니까?
히스기아가 15년 생명이 연장 될 때 하나님이 주신 기적이 뭐였지요? 해시계의 그림자가 뒤로 물러갔지요. 이 말은, 태양이 뒤로 간 거예요. 그리고 여호수아가 전쟁할 때는 해가 지지 않고 하늘에 머물러 있었어요.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고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별이 자기 궤도를 이탈했다는 말은 사실을 별이 이탈했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고정된 별을 보고 그동안 고정된 주체 의식을 만들어 왔다는 겁니다.
별이 궤도를 이탈했고, 동방박사가 그 별을 따라왔다는 것은 자기 주체를 포기했다는 뜻이고, 포기함으로 앞으로는 ‘우리가 보는 세상은 늘 그 별이고, 그 달이고 늘 똑같다.’ 똑같으니까 그것을 중심으로 ‘우리는 이런 인간이다.’ 라고 확정할 수 있는 모든 체제가 별이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무너질 때가 왔다는 거예요.
그리고 별은 우리에게 시간 측정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아기 예수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던 별이에요. 이처럼 지상에서 움직이는 별이 있었어요.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에스겔 46장에 나오는 왕이 별이에요. 지상에서 별이 움직이고 하늘에도 별이 움직여서 만나지요. 이 만남이 창조주가 아기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은 에덴동산에 살기 합당한 인간이 최초로 태어난 순간입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붙인 그 이름을 하나님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인간은 예수님뿐입니다. 따라서 천지창조의 중심이 태어났다면 세상의 모든 달과 별은 누구를 따라 가야 됩니까? 아기 예수를 따라 같이 움직여야지요.
아기 예수만 창조주이기에 창조주를 보이기 위해서 모든 피조물이 만들어졌기에 별도 아기 예수를 향해 움직였다면 진짜 왕의 영토에서 백성이 된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따라 움직이겠지요. 그래서 악마의 사주를 받은 헤롯은 동방박사를 죽이려고 했지요. 동방박사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죽이려 합니까?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 왔습니다. 예수님 따라 움직이는 것은 모든 피조물이 당연히 해야 될 일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와서 다른 길로 가도록 인도합니다. 이 말씀도 얼마나 불공평합니까? 동방박사는 천사가 와서 피신케 하고, 베들레헴에 있는 2살 이하의 아이는 피신시키지 않고 죽도록 버려두고.
그러면 동방박사가 더 예수님을 확실히 보여줍니까, 베들레헴에서 살해된 아기가 더 예수님을 확실히 보여줍니까? 죽은 아기지요. 왜냐? 십자가로 가야하기 때문에. 결국 저주의 자리에서 메시아가 주신 선물을 느끼게 됩니다.
46장 19절을 봅시다.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 곁 통행구로 말미암아 제사장의 북향한 거룩한 방에 들어가시니 그 방 뒤 서편에 한 처소가 있더라.”
성전에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동쪽에 문이 있고, 남쪽이 있고, 북쪽이 있고, 서쪽이 있는데, 동쪽 문은 닫혀 있어요. 1년에 한 차례만 문이 열립니다. 왕이 올 때 문이 열립니다.
20절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제사장이 속건제와 속죄제 희생을 삶으며 소제 제물을 구울 처소니 그들이 이 성물을 가지고 바깥뜰에 나가면 백성을 거룩하게 할까 함이니라.”
지금 우리가 이 구절을 읽을 수는 있어요. 그런데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알기 힘듭니다. 서쪽에는 문이 없어요. 별관이 있는데 여기는 제사장들이 고기를 저장하는 창고 같은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왕이 들어갔다가 나와요. 그러면 들어 올 때는 왕이잖아요. 제물이 있는 곳에 갑니다. 여기는 제사장이 근무하는 곳이지요.
그러면 왕과 제사장이 만나는 거예요. 에스겔 46장은 새 성전이니까, 그 전의 제사장의 실력과 제사는 왕이 등장하면 그 앞에서 소실되는 겁니다. 히브리서 7장 11절을 보겠습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교인들은 히브리서 6장 11절 말씀을 해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어요. 아무도 해석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의 장성택이 처형당했다.” 이런 말을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아베 총리가 신사에서 참배했다.”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6장 이런 말씀은 너무 어려워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구절 몰라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 알면 구원 받는 줄 알아요.
그런데 어떤 율법사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알았는데 이웃의 범주가 모호해서 예수님을 묻지요. “누구를 이웃이라 합니까?” 오늘날 교회는 이런 질문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 설명하기 전에 먼저 할 것이 있어요.
천국은 폐쇄 영토입니다. 영토는 반드시 코드가 결합되어 있는데, 폐쇄란 말은 아무도 못 들어가는 곳이에요. 생명나무를 아무도 못 따먹듯이. 아까 에덴동산을 계속 반복시킨다고 했지요. 그러면 폐쇄된 공간에 아무도 못 들어간다면 이것은 ‘무’입니다. 없는 거예요. 없으니까 ‘무’라는 말을 해서도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입니다.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 무엇.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냥 ‘무’가 되면, 이것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하면 ‘유’의 후광입니다. 보통은 ‘유’가 먼저 있고 ‘유’에서 빠진 것, 모자라는 것, 칸트에 의하면 ‘물 자체’ 또는 ‘숭고함’ 즉 있음이 적당하지 못한 것, 그 세계는 반드시 ‘유’를 전제로 했을 때 ‘무’가 나옵니다.
독일의 신비주의는 이런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신비로움이 너무 신비롭기 때문에 이것을 아예 구체화 시킨 사람이 있는데 그가 스피노자입니다. 스피노자는 ‘눈에 보이는 자연이 곧 신’이라는 겁니다. 그 전에 데카르트가 말하기를, ‘신은 인간이 접근할 수도 없고 파악할 수도 없는 초월적인 분이다.’
하나님이 초월적이라고 하니까 좋게 들리지요? 초월적이란 말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땅의 일은 인간인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즉 주체의식이 발현되는 시기입니다. ‘하나님은 간섭하지 마세요. 땅의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렇게 된 거예요.
스피노자가 ‘눈에 보이는 대자연이 신이다.’라고 할 당시에,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신은 위에 계시잖아!’라고 했는데, 스피노자가 ‘대자연이 신이다.’라고 하니까 그 말에 아무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스피노자가 노린 것이 바로 이거예요. ‘신이 따로 있다는 말은, 신이 좋아서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을 독자적인 실체로 세우기 위해서 그런 주장을 했다.’고 보는 거예요.
스피노자는 ‘자연이 실체고 우리는 자연이 만들어낸 하나의 거품, 양태’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스피노자는 얼마나 대단한 신비주의겠습니까? 스피노자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은 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묵사발 만든 거예요. ‘잠시 있다 사라질 인간이 무슨 말이 많아!’ 하고 입을 막는 거예요. 그리고 진짜 중요한 것은 공동체라고 했습니다.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윤리, 도덕이 자리를 잡고 더불어 살 수 있지, 나 개인을 중요시하면 함께 살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폐쇄 공간은 없는 거예요. 없기 때문에 사람이 천국을 간다는데 이 천국은 지옥을 의미합니다. 왜 지옥이냐 하면, 그 천국에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놈들이 함께 천국에 있으면 그것이 천국이겠습니까? 세상에 살 때 날 괴롭히고 스토커처럼 따라다니면서 협박하고 못살게 굴었는데 천국이라고 가보니까 그곳에서 그 사람이 있을 때 그곳이 천국이 되겠습니까? 또 자기 사랑하는 부모는 지옥에 가고, 자기 혼자 천국에 가면 조바심이 나서 천국에서 제대로 살겠습니까?
천국은 폐쇄 공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없는데 돌출되는 거예요. 피부에 난 두드러기처럼. 우리가 피부에 살고 있는데 피부가 융기되면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 못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나는 이렇게 살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다르게 살고 있어요. 그게 뭐냐? 밑바닥이 융기했는데 우리는 들러리처럼 거기에 같이 얹힌 거예요. 이게 바로 ‘예수 안’이에요.
“누구야, 날 이렇게 붕 뜨게 만든 자가?” 예수님이죠.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아무 생활의 달라짐이 없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내가 다라졌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데, 다른 점이 있다면 ‘다른 지시를 받고 산다’는 점입니다. 생소한 다른 원칙,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른 사람은 미쳤다고 욕할 이상한 원칙인데, 그것이 왕의 등장이고, 그 왕이 제사장 역할을 한다.
제사장 역할을 한다는 것이 뭐냐? ‘너 대신 내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생각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내 삶을 유지할까 하는 것이었는데, 나의 허락도 없이 ‘너 대신 내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올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융기된 것입니다. 이미 천국에 속한 자입니다. 이것을 에스겔에서는 ‘새 성전’이라고 합니다.
새 성전의 특징을 한 마디로 하면 ‘에덴동산’입니다. 에스겔 47장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 강을 이루고, 생물이 살고,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열매를 맺는데,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옵니다.
에스겔에서의 표현방식은 지상에서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에스겔 말씀을 그대로 믿으면, 낙원을 설명할 때 온갖 과실이 다 열리는 곳이 천국이라고 하겠지요. 그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본 거예요. 이들은 여전히 구약에 갇혀 있는 거예요.
하지만 구약은 그림자에요. 그림자는 부피도 없고 높이도 없어요. 그림자는 우리의 현실 언어와 현실 상징을 그대로 타넘고 다닐 뿐이에요. 따라서 현실 용어를 그대로 차용해서 사용할 뿐입니다.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사11:8)’ 이런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그림자로 사용하다보니까 이 세상 용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보석 있지요? 예루살렘이 그런 보석으로 되어 있다면 예루살렘 보는 것이 간단해요. 지금도 보석가계에 가면 각종 보석이 있는데 그곳이 천국입니까? 아니지요.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락의 세계는 우리와 함께 있는 분의 대신 죽음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매일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일어나야 됩니다.
10분 쉽시다.
(2014. 1. 10. 09:13 녹취 마침)
서경수(IP:121.♡.32.172)
14-01-23 16:40
광주 강의(2013. 12. 27) 49-2
교재(교회를 넘어서) 254페이지 세 번째 줄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어요. “제사장들이 분주하게 제사를 드리고 레위인들이 범죄해서 망해버린 성전을(겔44:10) 왕이 대표해서 다시 재건하는 것도 모두 온전히 죽어 없어져야 될 속된 목숨들을 처리하는 시설들이다.”
왕이 대표해서 재건하기 때문에, 여기 그 당시 제사장은 백성들의 대표입니다. 제사장의 제사가 소용없다는 말은 모든 백성들이 소용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왕이 친히 성전을 만들고, 왕이 친히 동쪽 문으로 들어오고, 왕이 친히 제사장이 못했던 제사직을 다 하는데, 그렇게 될 때 관심사는 그 왕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재림’이란 말은, 반드시 오시는 분, 인간들이 아무리 말려도 오시는 분, 죽어도 다시 오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인간이 죽였다는 것을 전제로 재림하시는 겁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또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을 불심판하기 위해 오시는데, 그렇게 해도 우리들은 불평할 수 없는 그런 식으로 오십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모든 기준과 가치는 예수님께만 쏠리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모든 기준과 가치는 전혀 소용없는 것입니다.
254페이지 밑에서 넷째 줄에, “동쪽 문이 하나님 이외에는 사용할 수 없어 언제나 닫혀 있는 문이라면, 다른 문들은 언제나 열려 있는 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문들을 이용한다. 단 새 언약 관계에 있지 않는 이방인들은 성소에 들어올 수 없다.” 이게 에스겔 44장 9절에 있습니다.
그런데 255페이지 위에서 네 번째 줄에 보면 “오직 새로운 다윗 왕에 의해 언약이 맺어진 돌아온 백성들은 이 문들만을 사용해야 한다.” 여기서 ‘이 문’은 북쪽 문과 남쪽 문을 말합니다. 동쪽 문은 평소에 닫혀 있는데, 그 문으로 들어오시는 분이 왕입니다. 왜냐? 늘 닫혀 있으니까.
왕이 와서 무엇을 바라보는가? 문이 없는 서쪽에 있는 제사장들의 일을 완수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255페이지에 중간에 보면, “왔던 방향의 문으로 도로 나갈 수는 없다. 곧바로 직진해야 한다.”고 되어 있지요. 북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남문으로 나가고, 남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북문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인데,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이것 때문에 새 성전에는 문이 세 방향으로 설치된 것이다. 그런데 왜 반대편의 문을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가? 그것은 유일하게 동쪽 문 앞에서 제사 드릴 자격이 있는 왕이 행사하는 제사에 의미를 실어주기 위함이다.”
제가 쓴 글인데, 참 불친절하게 문장을 구성했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제 친절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이 방향은 ‘주의 이름’이 아니고 ‘인간 이름’만 통행이 용납되도록 문을 뚫어 놓았어요. 새 성전은 없어요. 없는데 왕 때문에 새 성전을 만들어요.
성전 만들 때 문을 만들었는데 이 문 하나하나가 인간들 통행에 편리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고, 왕의 나라가 이렇게 세워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문이 있어요. 그러면 이 문으로 들어올 때부터 어떤 취지가 있어야 해요. ‘주의 이름은 우리 인간의 이름과 달리 어떤 식으로 움직이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관람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직접 나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선 방향과 직각 방향으로 움직이는 분이 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움직여야 됩니까, 가만히 있어야 됩니까? 움직여야 되는 거예요. 제가 ‘막 살아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는 더 심하게 말했어요. ‘성도는 죄를 지어야 한다.’고 했지요. 이걸 달리 표현하면 ‘막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 안 짓고, 막 살지 않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한다든지 성경공부 해면서 조용히 살려고 해요. 마치 새색시가 시집와서 모든 행동을 조심하는 것처럼.
그러면 안 돼요. 예전보다 더 설쳐야 해요. 왜냐?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채용된 직원인데, 설쳐서 이 사실이 확인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막 살아도 되고, 죄 지어도 되는 이유가 이미 구원 받았기에 우리가 할 일은 나의 본성이 어떤 속성을 품고 있었던가를 발현해야 합니다.
야곱이 선한 일을 해서 구원 받았습니까? 에서는 나쁜 짓을 해서 저주 받았습니까? 창세기만 보면, 야곱이 복을 따내서 구원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9장에 보면 이들의 구원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되었어요. 그러니까 이들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이지요.
이 말은, 악을 행해야만 지옥가고 선을 행해야만 천국 간다는 이런 생각이 나기도 전에, 창세전에 야곱은 사랑받기로 되어 있고, 에서는 미움 받기로 작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랑받기로 작정되었다는 말씀은 수용할 마음이 있어요. 그런데 미움 받기로 작정되었다는 것은 잘 용납할 수가 없어요. 우리 이성의 범주를 넘어선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왜 이런 말을 했는가? ‘안 믿어지면 믿지 마라.’ 이런 의미입니다. 보통 배짱이 아니지요. 이것은 납득을 시키거나 이해시킬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구원 받자고 해도 안 됩니까?” 이것에 대한 성경적 답변은 “미움 받기로 작정된 자는 아무리 선을 행해도 구원 안 시켜 줍니다.”
이런 답변을 듣고 사람들은 존경받은 한경직 목사나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을 찾아가서 또 질문을 합니다. “로마서 이 대목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할 겁니다. “성경에서 구원 받기로 작정되었다는 말은 적극적으로 사용되지만 저주 받기로 작정되었다는 말은 소극적으로 사용됩니다.” 이 말의 뉘앙스는 적극적인 말씀은 믿고 소극적인 말씀은 안 믿어도 상관없다는 식이지요. 그러면 지옥가기로 작정되었다는 말씀이 적극적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 책임은 누가 지는데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왔던 방향의 문으로 도로 나갈 수는 없다. 곧바로 직전해야 한다. 맞은 편 문으로만 나갈 수 있다. 이것 때문에 새 성전에는 문이 세 방향으로 설치된 것이다(동쪽 문과 대립시킬 수 있는 서쪽 문은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하면 사람들이 알레고리라고 욕을 하는데, 방향을 보세요. 왕이 서쪽으로 가는 이 방향에 대해서 우리가 합류할 수 있습니까? 합류할 수 없어요. 따라서 12제자가 자기 구원을 위해 한 일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것 보여주기 위해 12제자를 세운 거예요. ‘아버지가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제대로 이해했다면 다 삐쳐야 됩니다. 재산 다 바치고 청춘 다 바쳤는데 이게 뭐냔 말이지요.
‘아버지가 내게 오게 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는 말은, 내가 이런 소리를 하는데도 왜 내게 붙어있느냐는 뜻이거든요.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얼마나 퉁명스러워요. 그런데 베드로의 반응은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온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나이까?”라고 건사한 멘트를 날렸는데, 이런 멘트도 자기 구원에 전혀 보탬이 안 되고, 그 다음 말이 중요해요.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했어요. 이게 정답이에요.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다.” 이 말은, 너희들이 백날 내개 충성해도 마귀에서 붙잡힌 한 명의 행동을 말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선도 아니지만 선하다고 여기는 11명이 악한 사람 1명을 못 이기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구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막 살아야 돼요. 어쩔 수 없어요.
제가 길에서 담배피우는 사람한테 간섭하고, 꽁초 버리는 사람에게 잔소리하고, 식당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한테 주의를 주고 하는데, 저의 이런 행동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라고 하는데, 제자들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다가 자신들이 바위인줄 몰랐던 거예요. 자신들이 깨져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자기 자신을 저주의 자리로 데려가는 것이 구원의 자리라는 것을 제자들도 몰랐어요.
그저 저주를 피하면 구원 되는 줄 알았어요. 우리의 저주 자리는 내 이름이 사라지는 자리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고, 십자가를 반복해요. ‘네가 어찌 나를 핍박하느냐?’ 그래서 이미 우리 자리는 십자가를 양산시키는 자리인데, 미천한 우리를 통해서 주님은 지금도 십자가의 자리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선택은 항상 제한적이에요. 중국집에 가면 늘 고민하는 것이 ‘짬뽕을 먹을까, 자장면을 먹을까?’ 이처럼 우리의 선택은 제한적인데, 주님은 우리의 선택이 제한적인 것을 알려줘요. 우리가 아무리 선택을 해도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의 자리는 이미 십자가 자리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고정 자리가 마련되었기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막 살아야 되죠. 지금 동에서 서로 가는 자리가 확정되었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자리입니까? 절대로 주의 자리와 섞이면 안 돼요. 따라서 뒤따라가면 안 되고 우리는 내 갈 길로 가야 합니다. 막장으로 가게 되면, 막장으로 가는 나의 모습과 이런 우리를 대신 살리기 위해서 죽는 주님의 자리가 비로소 보이는 겁니다.
256페이지 중간에 보면 “옛날 모세를 통해서 전달된 성막과 솔로몬 왕 때의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의 새 성전 사이에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성전을 지으라는 그 자체는 이미 백성을 죽은 자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은 자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하고 또 보여줌으로써 자신들의 죽음을 확인시키겠다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차이점이 뭐냐? 256페이지 일곱 번째 줄에 있어요. “동쪽 문에서의 제사 행위는 하나님의 문으로서 동쪽 문이 지닌 언약적 특이성을 더욱 부각시켜 준다.”
차이점은, 새 성전은 왕이 제사장이 되는 것이고, 옛 성전에서는 육신을 가진 제사장이 제사장 직을 한다는 것입니다. 공통점은 둘 다 죽는다는 점이고, 죽음으로써 주님의 죽으심에 참여해서 영생을 얻는 백성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야곱이 외쳤던 ‘하나님의 전’은 특정한 건축물이 아니었고” 특정한 건축물이 아니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2장 1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유대인들은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했어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아무리 예배당 짓고, 성전을 크게 지어도 그곳에서 하나님 만날 수 있습니까? 못 만나요. 왜냐? 예수님이 규정하는 성전은 ‘내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님의 자기 이름이 있는 집이란 말이지요. 심지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는 ‘내 아버지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 하나님이 곧 내 아버지가 된다.’고 했어요. 결국 예수님 오신 것은 인간들이 각자 죽어서 좋은 나라에 가겠다는 그런 상상을 다 찢어버리고 우리를 아버지 집에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아예 예수님이 내 몸을 주님의 몸으로 바꾸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 이름으로 살게 만들어서 예수님의 아버지에 함께 합세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오신 목적입니다.
우리 몸을 ‘성전’이라고 하지요. 이제는 달리 표현합시다. ‘예수님 아버지의 집’이라고. 예수님의 아버지는 곧 우리 아버지입니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평소에 종교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큰 방해가 되었습니다.
256페이지 밑에서 네 번째 줄에, “블레셋 나라에 탈취 당했던 언약궤가 그 나라의 신전 안에서 그 나라의 신인 다곤 신상의 머리와 두 손을 부러뜨린다.” 이것은 원인이 뭡니까? 1) 전자파가 흘렀다. 2) 지진이 일어났다. 3) 인간은 알 수 없다. 몇 번이 답입니까? 3번입니다. 창세기 6장에 보면, 사람이 육체가 되면 하나님의 신이 함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상태에서는 인간이 아무리 머리를 쓰도 물리학, 생물학만 나오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전혀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만큼 하늘나라는 폐쇄적인 영역입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문제는 결과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이 역사 속에 사건화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데카르트의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참 말하기 편하지요? “맞아,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어. 인간은 유한하고 하나님은 무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알 수 없어.” 이렇게 말하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어떤 사건이 벌어져요. 십자가라는 사건, 그리고 다곤 신상이 실제로 언약궤 앞에 넘어진 거예요.
다윗과 골리앗이 붙어서 누가 이겼습니까? 다윗이 이겼지요. 그런데 모든 것이 삼세판입니다. 한 번 더 붙으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만약 다윗이 한 번 더 해보자고 나온다면 그것은 다윗의 능력으로 이긴 것이 돼요. 그러나 그 자리에 다윗은 없었습니다. 삼층천에 누가 올라갔습니까? 사도 바울이 올라갔지요. 그런데 바울은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신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다’고 한 것은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들이죠. 그래서 손을 씻고 먹었잖아요. 예수님은 이것을 전제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더럽지 않다.’고 하신 거예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지 않은지 현미경으로 살펴볼까요? 더럽잖아요.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하는 이야기를 배경에 깔아놓고 말씀을 하신 겁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왔다 갔다 해야 왕이 동쪽으로 와서 죽는 그 자리가 의미가 살듯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지 않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는 이 말이 맞습니까, 틀렸습니까? 틀렸어요. 왜냐? 십자가를 놓고 보면, 우리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도 더럽고, 입에서 나오는 것도 더럽습니다. 따라서 늘 정답은 ‘십자가’입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 그대로 한다고 해서 정답이 아니에요.
왜 그런가 하면, 주께서 인간을 버린 것이 아니고 인간을 활용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죄로 규정함으로써 ‘너는 십자가로 이미 구원 받았다.’는 이야기만 자꾸 해주고 싶은 겁니다. 예배에 참석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뭘 생각하는가 하면, ‘예배에 참석할까, 말까?’를 고민해요. 그러면 선택이 두 가지 밖에 없어요. 예배 참석하지 않는 나와, 예배에 참석하는 나.
그런데 예배에 참석해서 복음을 듣고 난 후에 생각하는 것은, 내가 예배에 참석할까, 말까 고민한 자체가 죄였다는 것입니다. 참석해도 죄고, 참석 안 해도 죄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참석해야만 하는 사실입니다. 항상 우리는 주님께 이용당할 뿐이에요. 그러니까 막 사시기 바랍니다.
죄 지으세요. 죄 지어야할 이유가 우리 능력으로 죄를 지을 수 없기에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 능력으로 죄를 지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지을 때는 반드시 선을 의식하고 선 아닌 쪽을 선택하거든요.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 선 아닌 쪽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육신은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평소에 냉장고를 여는 것이 악이 아니라고 여겼는데 아내가 하는 말이 “왜 쓸데없이 냉장고를 열어서 냉기를 허비하는가?” 라고 할 때, 냉장고 여는 것이 죄가 되었어요. 범위를 넓히니까 이렇게 됩니다.
나는 그냥 냉장고에 무엇이 있나 싶어서 열었는데, 아내는 “반찬 신경 쓰지 말고 내가 차려주는 대로 먹지 왜 냉장고를 뒤지느냐?” 아내의 범주에서 냉장고를 여는 나의 행위가 죄가 되더란 말이지요. 이것을 확대해 봅시다. 주님 보시기에 우리가 죄 아닌 것이 있을까요? 다 죄입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내가 미처 볼 수 없는 죄를 깨닫게 해주니까. 아내의 잔소리 없이는 사람이 안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기를 ‘모든 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했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마운 것이 뭔가 하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이야기했어요.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질문을 합니다. 언약궤와 함께 있던 다곤 신이 박살이 났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람이 불어서 신상이 넘어졌습니까? 지진이 일어났습니까? 대답 못해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잘못은 뭡니까? 원인을 못 찾은 게 잘못이 아니고,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잘못이에요. 철학을 공부하는 이해인(부산대 철학과 석사과정) 양도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새로운 논문을 하나 썼으면 좋겠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자기 주체에서 나와서 내가 쏟아낸 나의 체계를 다시 회수하는 여정에 불과한 거예요.
모든 것은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결과로만 나타나요. 이 세상 자체가 그림자입니다. 실체는 주님 오실 때까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비밀’이라고 하지요. 이 ‘비밀’이 오게 되면 어떤 인간도 그리스도가 하시는 일에서 관람객으로 남아 있을 수가 없어요. 인간이나 천사나 악마 모두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에 동원되어 각각 자기가 해야 할 일을 그동안 해내고 있었던 겁니다. 누구도 여기에서 배재된 사람은 없습니다. 죽고 난 뒤에는 이 사실을 다 알게 돼요.
원인을 찾겠다는 자체가 어리석은 짓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원인을 무엇으로 봤습니까? 언약궤를 화나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여기고 이스라엘이 드려야 할 제사를 블레셋 사람들이 드렸어요. 그리고는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냅니다. 돌려보내는데 누구한테 옵니까? 언약궤라는 상자가 어떤 인물에게 옵니다. 그게 뭐냐? 다윗 언약이 기다립니다.
다윗과 다윗 언약은 달라요. 아까 골리앗 앞에 선 다윗 본인이 ‘나는 이 자리에 없다’고 했지요. 다윗이 없었기에 골리앗이 넘어진 겁니다. 없다고 여기는 그 순간을 주께서 가로채서 사용하신 거예요. [별에서 온 그대] 드라마를 보면 전지현이 술에 취해서 흔들리는 배에서 뛰어내려 죽으려는 순간 모든 상황은 정지되고 오직 수현만 움직여서 안고 선실로 옮겨오지요. 순간 포착입니다.
모든 주의 일에는 반드시 내가 했다는 것이 일체 섞이지 않도록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천국에서 살 우리의 삶을 미리 이 땅에서 경험케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상대를 사랑한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사랑은 아닙니다. 억지 사랑을 하는 겁니다. 언제 사랑이 되는가? ‘내 자체가 남들 보기에 욕먹을 자세인가? 남들이 날 놀리겠지?’ 이런 생각이 순간적으로 사라질 때가 와요. 그냥 상대만 크게 보이고 나의 존재는 전혀 의식되지 않을 때가 사랑하는 순간입니다.
오 목사님, 이런 사랑 언제 했습니까? 너무 오래 전 이야기입니까? 몸이 그 사랑을 기억해요. 자기 자신을 잊고 주님의 이름만 높일 때 이게 사랑입니다. 기도 끝날 때 내 이름이 아닌 주의 이름을 붙이지요. 이것은 주께서 기도하게 했지 내가 기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통해서 당신의 기도를 한 거지요. 그러니까 내 이름을 붙이면 사칭이고 문서 위조가 됩니다.
주의 이름이 붙은 기도는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지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이루어질 리가 없어요. 왜? 우리 이름은 주님께 안 통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내 마음대로 하고 응답은 주님 마음대로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는 일이 벌어지게 하십니다.
성경은 주님이 자기 일하라고 미리 쓴 일기장인데 건방지게 우리는 이 책을 자기 것이라고 가져가서 지킨다고 애를 쓰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런 짓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 책을 내 책으로 여기고 복이나 따내려 하고 내 위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합니다. 매를 맞고 혼이 나도 우리는 내 위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나는 이렇게 하겠다.’가 아니라 ‘나를 이렇게 살도록 하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 관계가 바로 선물로 준 믿음입니다.
교재 260페이지 위에서 여섯 번째 줄에 “즉 ‘선물’이라는 취지에서 땅을 공여 받게 되는데 이는 왕적 권위를 근거로 해서 주어진다.”고 했는데, 그러면 천국에 들어가는 자체가 남의 땅에 들어가는 것인데 이것이 선물이라는 겁니다. 진짜 예수님이 산타크로스 할아버지인데, 문제는 기다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와 사전에 조율이 없었다는 겁니다.
일방적으로 우리를 집어넣고 우리 자체가 선물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예쁜 신부가 있다니” 라고 하시는 겁니다. 나만 위해 살고, 내 영광만 생각하는 죄인을 천국에 불러 기뻐하신단 말이지요. 하나님 취향도 참 이상해요. 죄인 중의 괴수를 구원해 놓고 ‘그러니까 더욱 더 예쁘지 않니?’라고 하시는 거예요.
탕자를 영접하는 아버지의 취향을 보세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같이 있던 맏아들은 홀대하고 집나갔다 돌아온 아들은 환대하는 것이 상대적 불평등 아닙니까? 방탕한 아들을 위해 소 잡고, 반지를 끼워주고 동네잔치를 한단 말이지요. 내 아들 돌아왔다고.
만약 큰 아들이 동생과 같이 집나가서 허랑방탕하다가 돌아오면 아버지로부터 환대를 받을까요? 아닙니다. 왜 그런가 하면, 큰 아들이 집에 있었던 그 기획은 탕자를 반기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냥 조연 역할로 있는데, 조연이 주인공 될 수 없어요. 그러니까 맏아들은 날 때부터 미움 받기로 되어 있고, 그런데 그 미움은 미움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일방적인 사랑을 돋보이기 위해서 미움 받을 맏아들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듣는 자가 이상한 사람입니다.
261페이지에 보면 땅을 분배합니다. 이 땅은 누구 땅입니까? 왕의 땅이죠. 왕의 땅인데 거기에 백성이 있다는 말은 백성들이 선물을 받은 것이지요. 그러면 이야기가 47장으로 갈 필요가 없잖아요. 이것으로 끝나야 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에스겔을 끝내야 되는데, 그 다음 이야기가 왜 필요하죠?
왕이 일방적으로 깨끗하고 거룩한 땅을 만들어서 자기 백성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러면 끝난 것 아닙니까? 그런데 261페이지에 보면, 12지파에게 땅을 주되 중첩되지 않고 구분됩니다. 263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에 “문 방향을 소개하면서도 일상적인 동쪽 문부터 소개하는 것이 아니다. 민수기 2장에서는 ‘동→남→서→북’ 형태가 되는데 이러한 방향 순서는 바로 정실 측부터 먼저 거론하고(북과 동), 그 다음에 여종 측(남과 서)을 제시하므로써 여전히 정실과 여종의 대립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복잡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땅을 선물로 주시려면 그냥 주시면 되는데 뭐가 이렇게 복잡합니까? 그러면 천국에 1구역, 2구역, 3구역 나눠져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이 왜 있는가? 아브라함 언약으로 되돌아가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민수기에서 야곱의 12아들에게 어떤 식으로 땅을 분배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공부에서 강의를 들으면 정답을 확보했다고 느끼는데 그 정답은 오늘, 12월 27일 알았던 정답입니다. 28일 되면 새로운 정답의 체험에 나서야 합니다. 29일 되면 또 새로운 정답을 체험해야 하고. 정답은 이미 바구니 안에 들어 있어요. 그런데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북에서 남으로 계속 가야 돼요.
내일이 되어 내일 분량의 하루를 살게 되면, 오늘 몰랐던 정답을 새롭게 알려 주십니다. 그렇게 되면 어제 알았던 정답은 새로운 정답을 보여주는 바탕으로 활용하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내 몸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당신의 몸이라고 살려주셨기에 이제 주님의 십자가란 정답에 앞으로 남은 일을 통해서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에 더욱 더 잠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4. 1. 23. 15:36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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