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56강 (죽음의 두 견해) ,마태복음 47강( 율법 해석)
사도행전56강 (죽음의 두 견해) ,마태복음 47강( 율법 해석)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공은주(IP:218.♡.193.179)
14-01-11 17:05
대전131226a-행21장1절(죽음의 두 견해)56강 - 이 근호 목사
21장입니다. 작별하는 대목입니다. 대목이 누구하고 작별하느냐, 그리스거든요. 이태리 아드리아반도다음에 그레테섬이 있고 구브로섬이 있고 지금은 키프로스섬이라고 하고 터키, 흑해, 카스피, 두 군데 섬이 있고 고스, 로도 섬이라고 있어요. 여기에도 나와요. 21장 1절에 보면,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배를 타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구브로가 섬입니다. 섬을 바라보면서 도착한 지점이 뭐냐 하면 상륙해서 두로가 있고 두로 위에는 유명한 도시마을, 시돈이라는 게 있어요. 두로에서 상륙해서 7절에 보면,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서 그 다음에 돌레마이에서 어디 가느냐 하면, 예루살렘으로 가요.
가는데, 원래 그리스 이 동네가 사도바울은 터키 안디옥 다소출신이고 여기서 성장하고 공부를 했는데 예루살렘으로 유학간 적 있어요. 나중에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또 예수님 믿는 사람 핍박하고 그랬는데, 어쨌든 간에 자기가 사는 요 동네 말고 이 동네는 자기하고 상관없는, 자기 출생하고 상관없는 그 동네에요. 그리스 동네가. 터키, 그리스 동네 없는데 여기 뭐냐 하면, 작별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여기에 있는 모르는 사람들인데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여기에 성경 자체가 계시입니다. 계시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도바울에게 계시를 먼저 주었습니다. 그걸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은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리스도의 종 받으면 본인만 달랑 구원받고 천국가라고 준 겁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분들도 구원이 전파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도 구원받는 거죠.
그래서 로마서보면 사도바울이 나는 복음에 빚진 자라, 하는 게 있지요. 나 혼자 구원받기 위함이 아니고 나누어 주어야 될 중요한 것. 나누어 주는데 이 복음은 뭘 나누어 주느냐, 그리스도의 의를 나눠 줘요. 이 그리스도의 의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의라 합니다.
이 의는 어디서 통하는 의냐 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통하는 의에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의 의만 통해요. 하나님의 의와 예수님의 의가 같은 말이에요. 그 말은 예수님 빼놓고 어떤 인간의 의는 하나님 나라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한 경진 목사나 손 장호 목사의 의는 전혀 통하질 않아요. 그런데 보세요.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이 자기가 “나는 크게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나는 살 가치가 있습니다.” 우기는 걸 보면,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살 자격이 있습니까?” 물어보면 “내가 이러 이러한 의롭고 바른 인간으로 살 가치가 있습니다.” 하잖아요.
그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의를 모르면 그런 소리를 하겠습니까? 제가 언젠가 그런 강의를 한 것이 기억이 나는데. 지난 오후 설교인가. 사람은 왜 햇빛과 빗물과 공기를 받아야 되는가, 그 질문을 던졌지요. 오늘도 비가 조금 왔는데 왜 받아야 돼요? 그 햇빛을 왜 받아야 되는지를 생각해 본적 있습니까?
하나님은 저한테 왜 햇빛을 주시는 겁니까? 그리고 비는 왜 주시는 거죠? 공기는 왜 주시는 겁니까? 답답하게 숨 막고 살아야 되는데 왜 공기를 주시는 겁니까? 라는 것을 물어본 적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뭔가 문제가 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건방을 떨어도 보통 건방을 떨며 사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이것은 정말 매를 맞아도 할 말 없을 정도로 평소에는 주신 것은 입을 싹 닦아버리고 매일 교회 와서 바닥에 빌면서 달라 더 달라.
그러면 주께서 제대로의 응답은 “햇빛과 공기와 빛은 어디서 오는가, 니가 아느냐?” 하고 묻는 겁니다. 제가 오후 설교에서 정답을 내렸지요. 햇빛과 공기와 빛이 우리에게 오는 것은 우리가 예뻐서 오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희생에서 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후 때 질문을 했지요. 여러분들이 “나는 왜 주님의 희생이 어떻게 나로 하여금 지금의 나를 살게 합니까?” 그 과정을 알고 있으면 그것은 성도고 그걸 전혀 모르고 있으면 그걸 아는바가 없으면 성도가 아니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물론 늘 알아야 되겠지만, 우리는 너무 일상에 바쁘다보면 자꾸 잊어버립니다.
그 유명한 ‘러브스토리’란 영화가 있지요. 음악도 감미롭습니다. 우~~우우우~우우~ 눈 오는 장면에 남녀가 붙들고 하는데. 사랑하는 여자가 암에 걸린 시한부 여자지요. 사랑을 불태우면서 눈 오는 날에 아름다운 음악도 멋있습니다. 그럴 때 전부 다 슬퍼하는 거예요. 참 슬프지요. 젊은 청춘인데 암에 걸렸으니까. 감정이입해 보세요. 집안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슬프겠어요. 슬프다 하는 것은 아직까지 암 걸리지 않은 나는 기쁘다는 그런 뜻인데, 정말 하늘 나라의 슬픈 자는 그리스도의 의, 하나님의 의를 모르면 정말 슬픈 자에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사도바울이 보기에 이 모든 사람들은 시체입니다.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의를 전하겠다는 것은 내가 빚진 자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여기에 있는 우리들이 필요한 안목이 바로 그 안목이에요.
세상에 있는 사람을 돌아다니는 시체로 봐야 되지 그것을 만약에 사람으로 간주해 버리면 그 때부터 스트레스 받습니다. 왜냐 하면, 그들의 시선과 그들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되니까. 그게 두려움이 돼요. 우리한테.
내가 이런 짓을 하면 남들이 얼마나 욕하겠나, 이게 우리 하나, 하나의 표창으로 막 박혀요. 표창 같은 거 맞으면 아프잖아요. 우리는 항상 표창 막 던지는 식으로 매일같이 표창 맞고 또 누가 던지지 않더라도 던질까를 두려워하면서 스스로도 아파하는 그러한 것이 일상의 생활로 되고 말았어요.
세상에서 아무리 점잖은 사람도 집에 있으면 특히 혼자 사는 사람들, 집에 가면 안방에서 훌러덩 벗어도 아무도 말 안하지요. 그러니까 가정 아닙니까? 그러니까 스위트홈 그게 좋은 집인 거예요. 집에 와서도 넥타이 메고 격식 갖추면 그게 집입니까? 감옥이지요. 힘들지요. 감옥과 군대가 왜 가기 싫은 줄 알아요? 세상에 자는 시간도 보는 눈이 많아서 그게 문제에요. 자는데도.
스피노자가 그런 이야기했어요. 인간의 행복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자유에 있다 했습니다. 스피노자가 본인이 인생을 살아보니까 마지막 결론이 뭐냐 하면, 제발 내가 하고 싶은 데로 내버려둬. 돈? 권력? 다 소용없는 거예요. 정말 나한테 필요한 것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한테 간섭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스피노자는 몰랐던 게 있어요. 간접하지 말라고 할 것이 아니라 니한테 수시로 간섭하는 그 인간들이 좀비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그건 살아도 죽은 시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사람은 그걸 모르는 거예요.
사실은 알지도 모르겠네요. 스피노자의 철학이 뭐냐 하면, 인간의 모든 것은 실체는 오직 인간이 실체가 아니고 실체는 오직 신밖에 없다. 인간은 잠시 보였다가 사라져버린다는 철학을 주장했습니다. 그게 스피노자의 ‘실체의 이념론’이라 합니다. 실체는 하나 밖에 없다. 하나님 밖에 없다. 그럼 우리는 뭐냐, 우리는 신이 만들어 낸 근육조직, 울퉁불퉁한 신이 만들어낸 양태, 양태라는 말은 빵이 있으면 빵은 실체잖아요. 겉에 붙은 것을 속성, 양태라고 합니다. 바깥의 모양새.
그러니까 어떤 남자가 근육이 울퉁불퉁 튀어나왔으면 튀어나온 근육 하나, 하나가 우리들 남자, 여자, 어린애, 어른들, 개, 소. 본체는 하나님밖에 없다. 이렇게 한 겁니다. 그 당시 철학에 반대한 철학입니다. 그 당시는 데카르트 철학인데요. 우리가 시민대학에서 들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이해되지요.
데카르트는 뭐냐 하면, 인간은 기계다. 기계기 때문에 인간은 기계라는 물질로도 실체고 그 다음에 기계는 모양 바뀌면 다른 사람 되지만, 이렇게 성형수술해도 나라는 것은 잊혀 지지 않으니까 정신은 또 하나의 육체하고 다르다. 육체가 달라졌다고 우리 인간 자아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체도 주셨고 영혼도 주셨다고 하는 실체이원론을 주장한 것이 데카르트입니다.
그리고 신은 그냥 위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우리에게 활동력을 주신다, 이렇게 본 겁니다. 그런 이야기는 시민대학에서 이야기했지만, 전에는 신을 섬기다가 이제는 신께서 멀리계시고 지상의 문제는 우리에게 의지를 줬으니까 나의 의지가 곧 신의 의지가 되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 그러니까 내가 밥 먹는 것도 신의 뜻이고 그렇다. 전에는 어떻게 했는가, 하나님만 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만들어준 우리도 우리한테는 중요한 문제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껏 아이디어를 끄집어내고 과학을 발달시켜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세. 라는 것이 데카르트의 신학입니다. 철학입니다.
데카르트 철학을 들어보니까 오늘날 소위 교회 다니면서 일상 생활하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그게 신앙인 줄 알지 데카르트의 철학인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자기들은 그게 예수님의 생각이라 생각해요. 예수님의 생각이 아니고 옛날 우리 선배들이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나는 어떤 존재인가, 거기에서 나왔던 어떤 중에 하나의 아이디어가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생각하는 고 정도밖에 안 되는 거예요.
문제는 그것이 예수님의 생각과 일치된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우기는 인간들이 절망적이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뭡니까?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사람이 아니무니이다. 이거에요. 굉장히 복음은 간단하지요.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의가 지금 주의 종인 사도바울을 통해서 맡겨줬잖아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인간도 아닌 자에게 인간되라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되라고 이제는 귀한 것 주는 거예요.
아까 집사님이 빵이 맛있다고 할 때, 그건 집사님이 자부심이 있는 거예요. 맛없기만 해봐라, 했잖아요. 비싸게 한 거니까 귀한 분이니까 귀하게 대접한다는 그런 차원이잖아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에요. 여러분들이 출세, 권력, 장관 그 딴 거 다 인간들끼리는 대단해보이고 우수해 보이고 삼성그룹 현대고 대단해 보이지만, 이 바보 같은 인간들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생각해야지 같은 고만 고만한 인간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왜 죽은 시체한테 자신의 평가를 맡기느냐 이 바보들아, 하는 그런 심정이지요.
제가 몇 시간 전에 십자가마을에 글을 올려놨어요. ‘타인은 나의 무덤이다.’ 타인은 나의 무덤이다. 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글의 내용을 죽 보면, 타인을 보게 되면 나의 죽는 이유가 나타나는 거예요. 남들이 웃을 때 나도 같이 웃고, 남들이 울 때 같이 울고, 두려워할 때 같이 두려워하고, 남이 좋아하는 거 같이 좋아하고, 걱정하는 거 같이 걱정하고, 그러면서도 남이 죽을 때 나도 같이 죽어 사라지고. 그러면 남하고 나하고 차이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마지막이 뭐냐, 남이 죽을 때 나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왜 우리는 잊고 사느냐 말입니다. 남이 죽을 때 너는 죽어라, 나는 안 죽을란다. 왜, 다른 건 다 따라하면서도 똑같이 하면서도 남이 죽을 때는 마치 그 사람은 큰 실패하고 죄인인 것처럼 하고,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 죽으니까 남의 일처럼 “아이고, 안 됐다.” 안 되기는 뭐가 안돼요. 우리도 따라 그렇게 죽을 수 있는 문제인데요.
그래서 결국 산다는 것은, 산다는 것보다도 차라리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마지막 수면내시경을 마치고 난 뒤에는 마취에서 깨어나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을 왜 내가 더 살아야 되는지를, 그냥 죽도록 놔두지 왜 눈 떠가지고 침대에 누워서 병원의 흰 커튼을 왜 보게 하는지,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한테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이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다. 고린도후서5장에 나오는 말씀을 제가 마지막에 인용해 놨어요.
“아, 주여! 이 몸이 벗는 날이 온다니요. 이 귀찮은 육체를 벗는 날이 온다니.” 세상에 사도바울은 살맛이 나는 거예요. 죽음에 대해서 감사하는 거예요. 사는 것에 대해서는 믿음은 없어요. 내가 곧 죽음에 합류하고 있다는 사실이 두근 두근거려요. 너무 기뻐서.
아니 복음을 안다는 게 뭐예요? 이런 재미로 살아야 복음 아는 거잖아요.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이거 개콘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아주 내가 죽을 날이 온다니, 아이고 산 사람을 보니까 가련해서 미치겠어요. 거리에 돌아다는 시체 말의 평가를 왜 우리가 거기다가 그걸 귀담아 들어야 됩니까? 아니어도 스트레스 받을 일이 한 둘이 아닌데.
지금 사도바울의 사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싫으면 말고 예요. 한두 번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있는데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것은 내가 전하는 것이 아니고 윗분께서 시켜서 하는 거예요. 시켜서.
그러니까 자기는 그리스도의 종, 나 사도된 사도바울 그리스도의 종, 종이에요. 주인은 따로 있다는 말이죠. 너희들 눈에는 안보이지만 나한테는 있지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메섹에서 나타나셨으니까. “사울아, 사울아, 나를 핍박하느냐.” 분명히 사도에게 자기 귀에게 들리도록 했다 말이지요.
이상스러운 것은 자기 귀에는 들렸는데 다른 사람은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은 들리지 않았다고 내 받은 사명을 환청이라고 우길 필요 없지요. 자기가 받은 것만 하면 되니까 전한 거예요. 아무도 돌아다니는 인간은 없어요. 돌아다니는 시체인데, 전했더니만 아니 사람이 거기서 하나 둘 살아나네요. 부활되는 겁니다.
사실은 그리스도 예수의 의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딱 깨놓고 이야기해서. ‘죽은 사형수가 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인입니다.’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복음이 다른 게 아닙니다. 항상 출발을 죽음으로 시작하거든요.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가 복음이 아니고 죽음부터 시작해야 돼요. “지금 죽었어요? 살았어요?” “살아있어요.” “저 사람은?” “살아 있어요.” “그러면 우리 이야기는 뺍시다. 빼고 죽은 어떤 분? 죽은 어떤 분인데 대신 죽었답니다. 주가 우리를 대신 죽어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대요.” 라는 “그 소식이 그 분이 이사야에 예언돼 있는데 그 예언된 그 당사자가 다녀갔답니다.”
이것은 장사가 되고 안 되고 하루 더 살고 부모님 치매 어떻고 그 문제, 그것은 문제거리가 안 됩니다. 지금. 빵이 맛이 있느니 없느니 이건 문제자체가 안돼요. 진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매일같이 거기에 빠져있고 매일같이 그곳에 황홀해 있느냐, 인생의 행복은 거기에 있는 거예요.
스피노자는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이 필요한 것은 자유라 했잖아요. 우리는 그 딴 자유는 필요 없어요. 스피노자는 철학자라서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최고로 연구해 보니까 제발 날 좀 가만히 놔 둬. 간섭하지 마. 타인들아 내가 어떻게 살던 나한테 간섭하지 마. 스피노자는 그 광학, 안경테를 갈아주면서 밥 먹고 살았는데 나중에 그것도 포기해 버렸어요. 그것도 귀찮데요. 이제는 자유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 이게 자유인데 사도바울은 그런 자유마저도 좀 주께서 가져가세요. 나는 자유 되기도 싫어. 왜, 나한테 자유 줘봐야 자유 감당하기도 그것도 귀찮아. 매일 자유 줘봐야 짬뽕 먹을래? 간 짜장 먹을래? 이것은 그동안 3개월내내 짬뽕 먹을까? 기스면 먹을까? 기스면은 한 번도 못 먹어보고.
주께서는 그냥 니가 아는 그리스도 의 나눠주고 니는 빨리 은퇴해서 빨리 올라 와. 몸을 벗어버리고 빨리 나와 합류 해. 그냥 못 죽지요. 그게 오늘 본문의 작별인 거예요. 이 사정을 모르고 에베소, 골로새 여기 있는 사람이 모여서 고소에서 작별인사하고 헤어지는데 그들이 “가시면 안 됩니다.” 가이사랴로 와서 하니까 또 한 무리들이 있어요. 하여튼 사도바울이 소문이 커졌어요.
8절에 보면,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사울바울과 빌립이 만났습니다. 고수끼리 만났습니다. 빌립도 대단한 분이죠. 성령에 이끌림 받아서 난데없이 저 밑에 있는 이집트에 가까이 있는 사마리아까지 홀연히 나타나가지고 거기서 이집트 내시만나서 세례주고 홀연히 다시 가이사랴로 왔습니다.
거기에 딸이 네 명이 있는데 전부다 예언하는 여자에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는 성경이 없기 때문에 성경이 확정 안됐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령께서 많이 각 요소에 성령의 예언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예언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통역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방언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병 고치는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병 고쳤잖아요.
그러나 신약성경에 오게 되면 그게 줄어들어요. 이게 하나의 과도기니까. 그래서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폐하고 이미 사도바울이 예언한 것처럼 12사도가 죽어버리면 더 이상 계시라는 것은 추가될 계시는 없어요. 있는 계시를 활용할 뿐이죠.
수학정석 있지요. 그 다음에 나와 봐야 수학정석 그런 걸 활용할 참고서지, 수학정석Ⅰ은 변함이 없습니다. 성경은 변함이 없어요. 성령께서 이렇게 일부러 성경 한권을 만들었어요. 성령께서 로마서만 지은 게 아니고 창세기 1장도 하신 거예요. 창세기 1장도.
성경을 이렇게 주시고 성경을 주시는데 성경의 어느 것이 성령의 글이고 아니고는 우리가 판정할 수는 없어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은 반드시 오류가 있습니다. 다만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성경 말씀이 새롭게 영적으로 해석이 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는 것을 보여줄 수가 있습니다.
전에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예를 들어서 어떤 집사님이 묻기를 “목사님, 성경의 중심이 뭡니까?” 마트에 서서 단도직입으로 물어요. 자기 생각에는 ‘우리가 영생 얻는 게 중심이라고 봅니다.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예수님이 주시라는 것이 초점입니다.” 다르잖아요. 자기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오류, 멸망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이 있어요. 그 다음엔 하나님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이 있어요. 이 둘이 같이 가요. 누가 망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이스라엘이 망하지요. 이것은 제가 지난 주일날 크리스마스설교 때 했어요. 메시아의 탄생에서 했잖아요.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이 출애굽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출애굽 했고 이스라엘은 그냥 망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망할 때 그냥 망하면 안 되고 짐승인 것을 드러내면서. 그래서 오늘날 교회도 망해야 돼요. 망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에요. 1월 1일 신년예배 때는 올해는 제발 교회 문 닫읍시다. 이렇게 설교자가 설교를 할 수 있어야 돼요. 왜, 교회가 문 닫아야 비로소 교인들이 자기가 교회 믿는지 아니면 예수 믿는지를 분간될 게 아닙니까.
아까 영국에서 오신 분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기독교는 하나의 문화라 했지요. 정말 잘 이야기한 거예요. 문화는 믿는 게 아닙니다. 즐기는 거죠. 문화는 취미 중에 하나에요. 기독교를 문화라 생각하고 교회를 문화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더 중요한 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뭐냐, 가정입니다. 내 혈족, 내 육의 소산물들, 내 새끼들, 내 남편, 내 아내, 그런데 그 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나! ‘나’가 중요해요. 그래서 이 대목을 예수께서 아시고 마태복음 10장에서 누구나 처나 자식이나 심지어 나조차도 예수님보다 더 좋아한다면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천국이라는 게 교회, 기독교, 천국하고 전혀 상관없는 놀이문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 놀이문화에 가는 것은 사람들이 꾀를 내서 그래요. 정작 중요한 것은 가정이 더 중요한데 교회 가서 기도함으로서 정작 중요한 이 가정, 내 가정 뭔가 밥이나 빌어먹고 살까? 어떻게 도움 받을 수 있을까와 우리 가정을 위한 신, 줄여서 가신, 사사기17장에 나오는 장로 미가가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 있잖아요. 돈 훔쳐가니까 엄마가 저주했는데, 저주 당사자가 누구입니까? 자기 아들 저주하니까 우상 드라빔을 드려가지고 제발 내가 내린 저주가 우리 아들에게 오지 않게 해 달라 하는 것. 그 사사시대의 그 꼴 그 종교 꼴, 그 양태, 이것은 구약의 이스라엘도 그렇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자꾸 제가 십자가, 십자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스스로 그것을 철회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데 우리가 내가 나만 사랑한다는 이것을 내가 이걸 철회하지 않으면 우리는 희망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내가 나 스스로 이걸 믿는다는 것이 가짜다, 하는 것을 철회할 용의가 우리한테는 전혀 없습니다. 그럴 의사가 자기한테는 전혀 생기지를 않아요. 그게 어제 수요설교였습니다. 절대로 철회하지 않습니다.
“저, 하나님 잘 믿었는데 저를 이렇게 대하면 섭섭하지요.”라는 항상 그 자리가 우리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항상 우리 자리에서. “하나님, 기도했는데 왜 우리 집안에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십니까?” 라는 그러한 반발의 영역이 항상 우리 속에서 이 모닥불은 꺼지지도 않아요. 항상 모락 모락 피어나요. 항상. 마지막 피어나는 것은 나도 아니고 자아 주체도 아니에요. 알 수 없는 그런 검은 연기, 계속 우리 몸에 퍼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꺼진 불도 다시 보자 해가지고 발끝으로 아무리 밟아 꺼도 안 꺼져요. 평생을. 아무리 살아도 꺼지지를 않아요. 어제 우리 어머니가 또 가스 불을 켜놓고 주무셨어요. 제가 약을 3개정도 드렸더니 잠이 왔는지. 요양사가 와보니까 온 집안에 연기가 자욱했어요. 불을 끄고 했는데, 그 다음의 현상이 뭐냐 하면, “어머니, 불냈습니까?” “아니!” “그러면 시커먼 냄비는 뭡니까?” “몰라, 어떻게 냄비가 꺼매졌지?” 알면서도 그렇게 하는 이유가 그 어떤 경우라도 내가 아랫사람한테 “그래, 내가 잘못됐다.” 라는 말을 하기가 싫은 거예요. 왜냐, 잘못했다 하게 되면 그것뿐만 아니고 다른 일도 자기가 고개 숙여야 된다는 사실이 그게 싫어서 그래요.
그래서 오늘 다시 가니까 어제 일을 다시 하니까 좀 억압적인 분위기로 나오니까 자기의 실수를 인정했어요. 증거가 있는데 자기가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받아내는 건 완전히 전두환 대통령에게 받아내는 것보다 더 힘들어요. 그 모닥불. 그 마지막 꺼지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자기 의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지옥 가는 사람을 건지기 위함도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전해야 왜 이 세상이 지옥갈 수밖에 없는가를 아울러서 이게 보여주는 겁니다. 지옥갈 수밖에 없는 세상이 복음을 전할 때만 뚜렷하게 드러날 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옥 보내도 얼마나 그것이 하나님의 정당한 조치인지를 아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보낸 아들을 사람에 의해서 테러당해서 죽었잖아요. 그 죽은 분을 다시 일으키셔서 너희들 때문에 죽었다는 소식을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햇빛과 공기와 단비만 내리는 은혜뿐만이 아니고 마지막 은혜가 이 은혜거든요. 이 은혜조차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악마와 더불어 유황불에 지옥가도 그들은 항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하나님의 정당성입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안에는 반드시 인간의 의에 대한 대척점, 서로 대비되는 게 있습니다.
여기에 고스에 있는 사람들이 로드로 가고 여기서 작별하고 또 여기서 가이사랴에 있는 사람들이 빌립의 가족들 딸 넷이 여기서 또 작별하면서 하는 말이 21장 11절에 읽어보세요.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이것은 말로 하는 것보다도 허리띠를 푸는 게 나아요. 나는 나훈아는 아닙니다. ㅎ
허리띠를 풀고 따님이니까 여자 분이 풀고 성령께서 하는 거예요. 성령께서. 이렇게 사도에게 매는 겁니다. 그 빌립의 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왜 성령께서 이렇게 하게 하시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가지 말라는 거예요. 가면 죽기 때문에. 그러니까 고린도후서 5장에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도바울의 소원이 뭐라고 했어요? 지금 사도바울보고 제대하지 말라는 소리와 똑같은 거예요. 마지막 찬스를 믿음 좋은 사람이 말리고 있으니 사도바울도 기가 차지요. 세상에서 은퇴할 유일한 찬스가 왔는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좋은 기회인 것을.
어떤 분이 말합니다. “당신이 거기에 가면 이단입니다. 저주받습니다.” 할 때 바로 그게 우리가 듣고 싶었던 소리 아닙니까. 저주받는 소리가 천사소리로 들려야 돼요. 지금 우리 저주 덜 받았어. 정말 미치겠어. 덜 받은 거예요.
정말 하나님의 의를 아는 사람은 저주를 받아야 하나님의 의가 빛이 나요. 왜냐 하면, 저주받는다는 말은 나한테 의가 없으니까 니 죄 지은 게 많으니까 벌 받는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점점 뭐만 의지하게 됩니까? 십자가만 의지하게 되지요. 하나님의 의만 의지하게 될 게 아닙니까.
만약에 내가 독자적으로 잘 나아버리면 하나님이여, 저 착하니까 복 주셔야 됩니다. 이리 살면 이게 죄에요. 점점 더 뭣과 외면되게 됩니까? 십자가와 멀어지겠지요. 매일 니가 그 성경모임가면 니가 잘못된 길로 가는 게 아니냐, 잘못된 길로 가면 하나님이 벌주시지요. 그래, 그러면 그 쪽에 안 가야지. 마귀의 전략은 뻔해요. 그게 전부에요.
왜 이단에 빠지면 안 되는가? 벌 받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현재에 소박한 이 행복마저 이단에 빠지면 벌줘가지고 홀랑 다 가져간다는 거예요. 얼마나 바로 자기 위주입니까? 이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인간의 본심입니다. 인간의 본심이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없는데 고맙게도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해주니까 누가 옆에서 저주 받아라 하거든 아멘. 아멘. 할렐루야, 제가 저주 받겠습니다. 손들고 환영을 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 빌립의 딸들은 그냥 자기 들은 계시를 이야기합니다. 빌립의 딸들이 뭔가 오해를 했는데, 이 오해가 왜 성경에 나와 있는가,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의 의만 십자가만 증거 합니다.
성령께서 “가지 마세요. 사도님 가면 안돼요. 가면 우리는 복음 못 들어서 싫어요. 아저씨, 얼마나 좋아하는데 가지 마세요. 성령께서 이렇게 허리띠로 하면서까지 못 가게 하십니다.” 말리는 그 장면도 같이 보여줍니다. 어지간하면 “고래요? 아이고 큰일 날 뻔 했네. 어이 식은 땀나네. 아이고 아가씨 아니면 죽을 뻔 했습니다.” 이리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소리를 다 듣고도 “그러면 제가 가야 되겠습니다.” 하는 사도바울의 모습과 같이 보여주는 겁니다.
사도행전 21:9에 나오는 빌립 집사님의 네 명의 딸과 사도행전 21:10에 나오는 선지자 아가보라는 사람은 별개 인물입니다. 단지 사도 바울이 예언의 영을 가진 네 명의 딸과 더불어 빌립집사님이 가이사랴에 살고 있었고, 그 소식을 들은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일부로 사도 바울을 뵙기 위해서 따로 시간 내어 방문해서 바울의 띠로 자신의 수족을 매면서 자신이 성령을 통해 받은 계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양쪽 다 보여주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항상 우리는 우리 이익 되는대로 듣는 그것이 결코 주의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주의 은혜 받았습니다. 이제는 주의 은혜를 안 주셨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이 자체가 이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에 빠질 생각은 안하고 하나님의 의보다도 자기를 위해서 살기 위해서 이용해 먹겠다는 그 사고방식은 사도바울하고는 완전히 달라요.
13절에 봅시다.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보세요. 엉뚱한 겁니다. 니는 지금 마귀에 의해서 한다는 게 아니고 맞아요. 분명히 그 앞에서 성령에 의해서 예언하는 자로 돼있으니까 분명히 맞아요. 처녀도 예언하는 영이 맞는데,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어떻게 했다? 각오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니가 받은 게 있으면 나도 받은 게 있다는 거예요.
둘 다 모순되고 틀린 게 아니고 결국은 내 사는 쪽으로 계시 준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얼마나 중요한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계시를 줄 때 나의 자존심, 명예, 위신, 내 의, 잘남, 이런 것을 가지라고 우리한테 계시 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일방적으로 해석하기를 어떤 성경도 역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내 잘되기를 위해서 주실 것이라는 그 선입감은 도대체 어디서 온 선입감입니까? 그거야 마귀가 줬지요. 그러니 우리는 예수 믿는다 해놓고 결국은 아직도 마귀의 조종을 받고 있는 그런 형편에 있습니다. 원인은 단 한 가지. 죽으면 되는데 죽음에 감사해야 되는데 사는데 감사하고 싶으니.
마지막 결론이 뭐냐,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정말 할 말이 없지요. 주의 뜻이니. 말은 맞는 말이에요. 주의 뜻대로 한다. 주의 뜻은 바로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주의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 아닙니까. 사도.
그래서 성경 편지를 지었거든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사도바울 글 중에서 그걸 사람의 말로 들으면 안 된다고 베드로가 이야기를 해요. 후배한테 그렇게 찐빡 먹었으면 우리는 화가 나가지고 니 한 번 보자, 어디가도 니는 죽었어. 이리 생각해야 될 건데, 어디 감히 후배가 선배한테 대들어. 이렇게 면박주고 하겠는데 베드로는 그렇지 않아요.
사도바울의 편지 중에서 더러는 성령이 썼기 때문에 이것은 사람이 함부로 풀 수 없다. 풀 수 없다는 말은 뭡니까? 하나님의 뜻이란 것이에요. 사도행전5장에 보면 아나니아, 삽비라가 나오지요. 그 사람이 헌금 잘못해서 죽었잖아요. 지옥 갔습니까? 그런 소리하면 안돼요.
그것은 사람이 지옥 보낸다는 말은 아니고 지옥 갔다는 말도 아니고 교회가 사람을 살리는 곳이 아니고 사람을 죽이는 곳입니다. 죽이는 곳인데 앞에 뭔가 붙어요. '제대로‘ 제대로 죽이는 겁니다. 사람이 그냥 죽어버리면 죽는 이유도 몰라요. 너무나 아쉽고 가련해요. 죽을 때도 제대로 죽어야 돼요. 교회가 사람을 죽이는데 죽는 이유를 분명히 보여주면서 죽입니다.
니가 속이는 것은 니가 나를 속임이 아니고 나 베드로를 속이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속임이라. 제대로 속이는 거예요. 창세기6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해서 육체가 되어서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지 않는다고 했지요.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의 신이 성령이 함께하지 않으면 그것은 돌아다니는 시체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나 어릴 때부터 돌잔치부터 해서 고깔모자 쓰고 분위기가 누구만 눈에 보이는 분위기에요? 일가친척 사람들, 그냥 사람들만 웅성, 웅성거리는 그게 현실이고 그게 리얼리티고 그게 이 세상 전부고 그게 사람 사는 걸로 우리는 돌잔치부터해서 어릴 때부터 그런 식으로 배웠어요.
초등학교가고 중학교 가고 전부 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잖아요. 가끔 동물 보려면 동물원에 가면 보이고. 대부분 우리가 만난 사람이 전부 누굽니까? 같은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그 중에서 하나님이 계셨습니까? 하나님이 없었잖아요. 하나님이 없으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람위주로 사는 것이 옳은 삶으로 생각한 겁니다.
혼수는 어떻게 해야 되고 돈 주면 반은 쪼개야 되고 이불은 해야 되고 말아야 되고 시누이는 얼마 해야 되고 시아버지는 시계 해주니 마니 아휴~~ 갔다가 왔다가 또 왔다가 갔다가 주고 코메디도 아니고 그게 다 풍습이라는 겁니다.
천국에서 지은 풍습입니까? 그게 하늘나라와 관계있어요? 이런 일을 하면서 자꾸 게이지 숫자 높아지는 것은 교만입니다. 자만심이고. 내 딸이 더 낫고 내 아들이 더 낫고. 자꾸 높아지는 거예요. 주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친다는데 마음을 낮출 수 있는 기회를 우리는 점점 더 갔다 버렸어요. 일부러. 그런데 그걸 알기 때문에 십자가만 전하고 우리의 저주와 심판을 전하니까 이제 높아진 마음에 그게 듣기 싫은 거예요.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러지 않았어요. 듣기 싫고 좋고는 지 소관 아니고 목회 소관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교인수가 몇 명이었지요? 있다 하면 있고 없다 하면 한 명도 없지요. 단 한 명도 없는 거예요. 왜냐 하면, 교인 수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는 그냥 우편배달부 빚진 자에요. 그리스도의 의만 그냥 나눠줄 뿐이고 싫으면 말고 이런 거지요. 우리는 그리 좀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리 살려면 사람을 볼 때 사람을 보지 말고 돌아다니는 시체로 보세요.
시체로 봐야 사람이 두렵지가 않아요. 이웃이 무섭지가 않아요. 누가 궁시렁 궁시렁 하는 소리가 전혀 자장가보다 더 달콤하게 들릴 수밖에 없어야 돼요. 저주받는다. 저주소리를 달아도 우리는 저주소리를 오히려 그게 전부 다 복으로 받을 수 있어야 돼요. 누가 뭐래도.
지난번에 에베소에서 작별했지요. 여기서는 가이사랴에서도 작별하지요. 연속된 작별입니다. 좀 어렵게 진도 나가봅시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하나님의 의를 전한다 할 때 지금까지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의는 우리의 구원용으로 이야기했잖아요. 사도바울은 더 깊이 들어가 버립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는데 배제될 인간은 없다. 하나님의 의를 전파하는 것이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가 전하고 자기는 종이기 때문에. 자꾸 종에게 따지고 묻지 마세요. 종은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이고 누구한테 따져야 돼요? 예수님한테 따져야 돼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니까.
이 모든 일에 모든 인간이 관람객이 되거나 구경꾼이 될 수 있는 자리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말려들었어요. 추진수가 계약금 1억 달러 받았거든요. 이것도 그리스도 의와 다 관련 있는 이야기입니다. 장 성택이 처형당했잖아요. 이것도 그리스도와 다 관련 있어요.
어떤 인간도 팔짱 끼고 그리스도 의를 바라볼 수 있는 자리를 하나님께서는 허용하지 않고 몽땅 다 덮을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다녔던 그 길은 사실은 세상에다가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한 게 아니고(잘 들으셔야 돼요.) 세상이 있고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한 게 아니고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고 자국만 새롭게 세상으로 전환되는 겁니다. 새롭게 세상으로 전환되는 거예요.
유흥업소의 더덕더덕 화장 떡칠한 그 아줌마들이 낮에는 손님이 없잖아요. 그러면 치마 걷어 부치고 화투치지요. 화투를 해서 뒷면을 깔아버리면 누리끼리한 색깔이잖아요. 아줌마가 들치면 1월달 나오고 3월달 나오잖아요. 세상은 희희 죽죽 칙칙해요.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 화투를 들치면 비로소 세상의 정체가 밝혀지는 거예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세상은 세상이 아니고 세상은 다시 재 정렬되어야 되고 헤쳐 모여! 다시 복음 앞에 헤쳐 모이는 겁니다. 천국이라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을 천국과 지옥으로 재배열하는 작업의 일환이에요. 복음 전파가. 그러니까 이 미천한 우리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이게 세상을 복음 중심으로 다 재배치하는 작업입니다. 모든 성령 받은 사람은 거의 이미 그 작용에 들어갔어요.
여기에 있는 빌립보에 처녀가 예언하는 것도 자기는 라면이나 끓이고 살림이나 하는 여자인 줄 모르겠지만, 이 딸들도 사실은 이 사도바울과 함께 현실 만들기에 이미 차지했습니다. 어떻게? 허리띠 띠고 가시면 안 됩니다. 하는 역할로서 이미 새로운 현실을 사도바울과 더불어서 합작해서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 현실의 중심에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의, 그리스도의 의가 있는 거예요. 사명을 소유하지 마세요. 이미 사명 속에 우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내가 사명대로 행하지 마세요. 주의 사명이 나를 지금도 오늘도 끔직 거리고 했습니다.
사람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그냥 돌아다니는 시체고 우리 할 것만 하시면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공은주(IP:175.♡.146.206)
14-01-25 11:36
대전20131226b-마15장1절(율법 해석)47강-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에는 마태복음15장 1절하겠습니다. 마태복음15장부터가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항상 마태복음 이렇게 하고 사도바울의 편지를 하면서 설교를 이렇게 하면서 제가 여러 번 그런 이야기했는데, 일반 평교인들은 그 느낌이 잘 전달이 안 된 것 같아요. 뭐냐 하면, 다시 한 번 원점을 이야기할게요.
사도바울의 편지를 할 때는 반드시 마태복음, 마가복음, 공관복음을 거쳐서 오세요. 그리고 마태 할 때는 반드시 사도바울 편지를 거쳐서 오시기 바랍니다. 말을 제가 수시로 자주 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 중간에 무슨 사건이 있었습니까? 십자가사건이 있잖아요. 자,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마태복음 할 때 마태복음하고 달랑 가버리면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를 놓쳐버린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를 병 고치니까 믿는 자 외에는 이런 능력이 없다. ‘아우, 믿음이 있어야 병 고치는구나!’ 그렇게 되면 ‘나도 병 낫는데 믿음만 있으면 고칠 수 있구나.’ 이렇게 돼버리는 거예요. 뭘 놓친 거예요? 십자가를 놓치고 온 거예요.
그리고 로마서10장에서는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아~ 로마서10장에 보니까 예수 이름 부르면 구원받는구나. 예수 이름 부르지.‘ 야! 예수 이름 불렀다. 구원받았다. 손들고 나와 가지고 이것도 이리 나오는 거예요. 이건 또 뭘 놓쳤어요? 또 십자가를 놓친 거예요. 참~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워낙 기독교문화가 되다보니까 전부 다 급해요. 자기 집구석 문제가 더 급해요. 성경말씀 보다도 자기 집안 문제 딸 챙기는 게 더 급해요. 여기에는 하나도 관심이 없어요.
여기 내 문제가 있는데, 내 문제 들고 와서는 이 문제와 같은 게 공관복음에 있으니까 아! 이 문제 기도하면 낫겠구나. 하고 와버리고. 다 마찬가지에요. 십자가 근처 통과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설교자가 문제가 돼요. 설교자가 설교할 때 이미 사람들이 그걸 은근히 노리고 와요. 전부 다.
자기 집안이 중요하지 말씀은 하나도 안 중요해. 그럴 때 마태복음을 통해서 십자가를 통과하게 하는 거예요. 통과해 버리면 바로 그렇게 기도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묻는 자체가 십자가 이후에 사도바울이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는가 하면, ‘육신’이라 하는 거예요. “주여, 내가 기도하는 것마저 죄 있는 육신인 것을 기도하는 내가 먼저 알게 하옵소서.” 그럼 육신이 되어버리면 육신에서 나온 것은 다 육이기 때문에 죄이기 때문에 안돼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성령의 뜻으로 기도하면 되지요. 그러면 십자가를 경유하게 되면 주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그러니까 십자가의 복음, 하나님의 의를 더욱 더 깊이 알게 해 달라. 이렇게 기도하게 되면 그러면 다시 나한테 오게 되면 우리 집안에 우환이 있는 것은 그것은 바로 내가 육신인 증거고 평소에 내가 주님은 관심 없고 그저 내 집안 내가 간수하려하니까 일곱 귀신 들어와 가지고 북새통을 떠는 거예요. 그러니 내가 거기에 말려들어가서 우왕좌왕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거예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여. 뭐가 잘못됐는데 이렇게 어려움을 주십니까?”라고 따지려고 왔다가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주신 공기와 햇빛과 단비만 해도 따질 자격도 못되고 특히 그리스도의 의를 이야기해버리면 우리는 그 앞에서 그저 부끄러울 뿐이고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살려고 내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한 그것이 저주받을 짓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지요.
모든 일은 십자가에서 소외되지 않습니다. 모든 일어난 일들은 다 십자가에 집중하라고 발생시킨 일들이에요. 바다가 있는데, 우리는 바다의 물결에 불과한 거예요. 바다 전체는 그리스도 의의 바다가 출렁이고 있습니다.
이 마태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인데, 그럼 십자가 사건의 시발점이 뭐냐, 바로 15장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서서히 갈구기 시작하는 겁니다. 갈구기 시작하는데, 처음부터 하면 어렵기 때문에 쉽게, 쉽게 해서 마태복음 20장 볼까요.
마태복음20장보면, 잘 아는 비유기 때문에 언급합니다.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되어 있거든요. 요 해석에 16절에 보게 되면,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는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리라. 이거 누구 들으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결국 바리새인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서서히 주님께서 갈구지요. 주님이 십자가에 죽었던 이유가 먼저 시비 걸어서 그래요.
그러니 주님이 상당히 부정적 안목을 가지고 있어요. 세상에 대해서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어요.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노력하는 줄 알아요. 참 노력하거든요. 그 마음을 좀 긍정적으로 순수하게 바라보면 되는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보지 않고 너희 애비는 마귀라 했다 말이죠. 한 경직목사, 손 장호목사에게 누가 마귀의 자식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어요? 예수님은 이야기합니다. 너희들이 템플턴상을 받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희생하신 그 분, 손 장호 목사 사랑의 무슨 폭탄? 사랑의 원자탄. 사랑의 핵폭탄. 그런데 그들이 마귀 자식이라고 하면 믿어지겠습니까?
그 사람이 마귀 자식이라면 그럼 다른 사람은 마귀, 마귀, 마귀 자식 중에 마귀 자식이 되겠지요. 그렇지요? 십자가가 그거에요. 모든 인간은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거 보세요. 마태복음20장 이야기해놓고 로마서 3장 10절에 보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제 뚫리지요. 십자가를 통과해야 뚫려요.
교인들은 그냥 십자가 빼버리고 사도바울이 쓴 편지 중에서 자기 필요한 것만 찾는데, 예를 들어서 집사 된 사람은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하는데 그리하면 안돼요. 집사는 무조건 복음 알아야 되지요. 세상에 술에 인 안 박힌 사람 많아요. 집사 주면 안 됩니다. 집사는 복음에 든 사람이 집사 되어야 되지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목사는 구타하지 아니하고, 목사 중에서 지 마누라 패는 사람이 한 둘입니까.
항상 십자가를 경과해야 되는데, 마태복음 해석은 어떻게 십자가로 갈 수 있느냐, 마태복음 20장 보면 포도원 비유에 아침에 일찍 온 사람, 늦게 온 사람, 아침 일찍 온 사람이 바로 먼저 된 자, 바리새인들이죠.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남보다 먼저 됐다고 그들이 우겨요. 자기들이 우겨요. 본인들이 그렇게 우긴다니까요.
본인들이 7계급을 만들었어요. 성전과 멀면 멀수록 더러운 사람들이고 가까이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사람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해줘야 나라가 돼요. 나라 질서가 잡힌다니까요. 성만찬 할 때에 목사만 떡을 떼야지 중구난방으로 다 떼면 아수라장되지요. 교회가. 교회가 말이 안 되지요. 아무나 와가지고 “잠시만요, 떡 떼고 갈게요.” 지가 해가지고 지가 다 먹어버리면 안되잖아요.
성당에 신부들이 성만찬 하는데 복장 있잖아요. 구약에 나오는 복장해가지고 심지어 그 관까지 쓰고요, 난리도 아니에요. 특별한 행사 때는 관까지 쓰고 향 뿌려가면서 떡 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 뒤에 있던 허름한 사람이 와가지고 내가 할게요. 하고 나오면 성당 말이 안 되지요. 질서가 엉망 됩니다.
마찬가지로 유대 나라가 국가적 종교입니다. 제가 강의에서 종교국가와 국가종교를 제가 구분한 적이 있습니다. 종교국가라 하는 것은 바티칸 정도. 교회 내가 국가 행세 되는 것이 바티칸. 국가종교라 하는 것은 국교에요. 국교. 모든 백성들은 다 무조건 그 종교에 전부 다 예속되는 거예요. 유대교는 국가종교에요. 국가종교기 때문에 경찰도 종교법에 귀속되고, 종교법이라는 게 지금도 이슬람교에 있지만. 종교법에 의해서 전부 다 경찰들이 조종하는 거예요. 바로 이 국가종교를 가지고 하나님은 ‘짐승의 본모습’이라 하는 겁니다.
제가 가락강의에서 했는데, 강의내용이 아주 어렵기 때문에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라 할 때, 이 바다는 어디 있느냐 라고 언급했어요. 바다는 지중해도 아니고 바다는 없어요. 바다가 없다는 말은 짐승도 없다는 말이에요. 이 짐승은 혼합체라. 소면 소고 독수리는 독수리여야 되는데 소도 아닌 것이 독수리도 아닌 것이 곰도 아닌 것이 그런 짐승이 이 지구상에 없습니다.
방금 이 지구상에 없다고 했지요. 그럼 우리가 보는 이 지구상이 없다는 것은 이 지구가 현실이 아니다 라는 거예요. 현실이 다 가 아니라는 거예요. 성경을 언급할 때 우리가 미처 모르는 현실을 전제로 하고 하신 말씀이 이 성경책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볼 때,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하고 자꾸 이 성경을 보거든요.
그렇게 되면 천국도 천국이 아니고 지옥도 지옥이 아니에요. 이것은 기존에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살기 괴로우니까 “아이고 뭐, 후딱 죽어서 천국 갈란다.” 할 때 그 천국은 결국은 자기 편하기 위한 천국이지, 그건 천국 아닙니다. 그건 하나의 인간의 상상력의 환상이죠. 환상. 망상이라는 게 적당해요. 그냥 망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천국은 어디 있는가 하면, 천국은 이 땅에 어디 가면 있는 게 아니고 바로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바로 너희 안에 있다 했어요. 너희 안에 있다 하니까 그들이 말하기를 그러니까 없다는 말이에요. 왜 없는 게 되느냐, 쉽게 하려다 어렵게 됐는데, 현재 내가 여기 있잖아요. 여기 내가 있으니까 천국은 나한테 없는 게 돼요.
그런데 말을 바꿔서 내가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있는 곳이 천국이에요. 천국은 나를 있어도 없는 존재로 만들어 바꾸게 하는 그 능력이 천국의 능력입니다. 나라고 하는 나는 없고 그리스도의 것으로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있음은 누구한테 쓰는가, 바로 예수님에게만 있음이라고 쓸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만 있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여기 사는 겁니다. 그럼 내 이름은? 내가 있어야 이름인데 내가 없는데 내 이름이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소속된 육신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걸 ‘지체’라고 해요.
손가락 한 번 보세요. “손가락아, 니 이름이 뭐니?”그러면 손가락이 뭐라고 합니까? “제 이름은 용철 이예요.” 말하면 안돼요. 이름이 없어야 돼요. “저 이름 없어요.” 이리 돼야 돼요. “그럼 니가 단독적으로 어디 있지?” “단독적으로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니까 “단독적으로 있다는 말도 나한테 써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럼 너는 누구한테 붙어있지?” “저는 주인님한테 붙어 있잖아요.” 그래야 말이 되는 거예요. 성경이 참 어렵지요. 성경을 나한테서 출발하니까, 내가 단독자로 출발하니까 성경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바리새인이 왜 주를 죽게 했는지 알아요? 바리새인이 하나님이 나를 만들었다는 말로 시작해요. 그러면 하나님도 있고 누구도 있어요? 자기도 있어요. 자기가 단독 자 예요. 그러니까 그 중간에 율법이 있으니까, 율법은 누구 지키라고? 단독자인 내가 지키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율법 지키면 나만 구원받고 못 지킨 놈들은 탈락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은 그게 아닙니다. 지킨 놈이 없어. 주의 말씀을 지킨 사람 있습니까? 없어요. 지킨 분은 대신 죽으신 예수님밖에 지킬 수가 없어요. 예수님만이 있음이 되고 우리는 그분의 지킴에 지체가 되니까 덩달아서 그분 십자가 안에서 하나님의 의인이 되어 버렸어요.
너무나 엄청난 말이기 때문에 이렇게 내가 말을 저지를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믿고 안 믿고는 제가 설득할 문제가 아니고. 학원 강사 문제가 아닙니다. 서울대 가는 것은. 서울대 가는 것은 지 실력이지 학원 강사 문제가 아니잖아요. 강의해도 소용없는 거예요.
정리해 봅시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어떻게 봤다? 신이 저기 계시고 나 여기 있고 중간에 율법 주신 순서니까 쉐마, 이스라엘아 들어라, 그리고 지켜라, 들어라 지켜라하기 때문에 이것은 듣고 지키면 지킬 수 있는 걸로 그렇게 오해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따지는 거예요. 예수님은 내용을 아는 거예요. 못 지키는데. 지킨다고 우기니까 슬슬 시비 거는 거예요. 너희들이 율법을 지켜? 개가 웃겠다. 예수님은 개가 웃겠다보다 더 심한 말을 했어요. 개는 그래도 살아 있잖아요. 니 들이 구원받으면 돌도 구원받겠다. 돌도 하나님의 뜻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겠다. 이 말은 너희들은 돌보다 더 못해. 돌은 반항은 안하지. 돌은 마귀새끼는 아니잖아요. 바리새인들은 마귀새끼입니다. 돌보다 더 못해요.
그러면서 자기들은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이래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율법을 줬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백성이 되는데, 백성 되는데 필요한 게 있다는 겁니다. 율법이 있어야, 지켜야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매개’라고 해요. 쉬운 말로 하면 ‘중매’에요. 중매하고 매개하고 좀 달라요. 중매쟁이는 맺어주고 빠지는데 매개는 항상 같이 있어요.
철 구조물이 있지요. 저는 어릴 때 한 때 오해했어요. 철 구조물은 건물지어 놓고 다시 다 빼는 줄 알았는데 철 구조물은 건물과 함께 같이 영원히 함께 있어요. 이게 바로 매개에요. 아시겠지요? 예수 십자가 믿고 이제는 예수님 감사합니다. 하고 떠나면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이걸 신학자들이 몰라요. 웃기지요. 목사들은 더구나 모르고. “이제는 십자가 잊으세요. 구원받았으니까. 여러분들이 이제는 말씀 지키면 됩니다.” 이리 나온다고요. 그러니 얼마나 바리새인들의 후손들입니까?
하나님께서 왜 바리새인의 후손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내는가 하면, 모든 인간도 어느 인간도 다 하나님의 의의 체계 안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마귀가 있어야 되고, 짐승이 있어야 되고, 악마가 있어야 우리가 구원을 받아요. 왜? 우리 생애에서 십자가가 반복되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리새인역할을 누가 해야 돼요. 누군가 해줘야 됩니다. 특히 가까운 집안 식구들이 하나님의 너희의 원수가 되어야 돼요. 집안 식구들이.
왜냐 하면, 집안 식구라 하는 것은 우리를 가장 가까이 우리 육체의 몸을 지켜주는 식구 없이는 못 살거든요. 특히 청소년들에게는. 다른 건 다 버려도 집안 식구는 육으로 맺어진 사이는 호적 뺀다고 빼질 관계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뭐다? 하나님의 원수, 우리 자신의 웬수가 되는 거예요.
내가 온 것은 집안 식구끼리 불화하게 함이라. 가정 파탄되게 만들었어요.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싸우고 아버지가 아들과 싸우고 온 천지가 다 조각, 조각 마치 강한 유리 깨지면 와장창 깨지는 것처럼 산산조각 나게 만들어요.
화평? 화평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온 것은 불 지르러 왔다. 주님께서는 오른손에 신나, 왼손에는 횃불 들고 신나 뿌리고 불 지르러 왔어요. 이 땅에. 도대체 목사들이 왜 그런 대목을 설교 안하는지 모르겠어요. 왜 본문을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장로한테 부정적인 사고를 하고 있다고 해서 쫓겨나기 싫어서 그런 거 안 하지요.
목사는 그리스도의 의만 전해야지 목회 교회 이런 거, 전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만 전하면 그게 교회에요.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가 망해야 비로소 교회가 되는 겁니다. 우리교회 같은 경우는 이미 망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 없어요.
여기에 바리새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였나이다. “예수님이여, 당신 제자들 좀 간수 잘하소.” “왜?” 하니 “우리의 장로들의 유전을 범했는데 왜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습니까?” 라고 나온 거예요. 자, 여기 유전이 전통이거든요. 전통이란 말은 단순히 우리가 하는 전통이 아니고 전례 되는 해석법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왜 전통이고 이게 왜 법이냐, 이게 영국에 보면 무슨 법이냐 하면 관습법이 있습니다. 영국에는 관습법이 더 많아요. 이게 뭐냐 하면, 영국에는 법원이 재판할 때 관습법이 법입니다. 관습법이 왜 존중받느냐 하면, 관습법이 이미 시행착오를 겪어봤거든요. 겪어봤기 때문에 오류가 적어요. 그냥 법은 정권 유지 체계에 따라서 법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예를 들면 국가보안법들은 이런 법들은 지금 말고 옛날의 박정희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 국가 보안법 같은 경우는 영장 없이도 체포할 수 있다는 겁니다. 나도 변호인 영화 보고 알았어요. 최근에 개봉한 변호인이라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그냥 법은 정권 잡은 자가 법을 지 맘대로 바꿀 수 있는 약점이 있는 거예요. 하지만 전통은 뭡니까? 몸에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대대로 가정에 다 품고 있는 거예요. 가정이 모여서 국가 되잖아요. 가정이 모여서 국가가 되니까 가정에서 납득이 될 때 그 국가는 안정성을 얻는 겁니다.
대통령이나 왕이 안정해서 안정한 것이 아니고 그 구성원들이 공감을 하게 되면 이게 기초가 단단해가지고 잘 무너지지 않아요. 이스라엘에서 관습법이 그렇게 중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