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70이레 논문(짐승에 의해서)131205-31강b -이 근호 목사
가락-70이레 논문(짐승에 의해서)131205-31강b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70이레 논문(짐승에 의해서)131205-31강b -이 근호 목사
바리새인, 사두개인은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막상 예수님, 진짜 하나님이 오셨으니까 오셨을 때는 그들의 아비는 마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경 말씀대로 용서도 하고 심지어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구제도 하고 많이 했잖아요. 그 짓들이 전부 다 결국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은 죄를 가중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용서하고 말고는 죄를 알아야 용서를 하는데 자기 죄도 모르는데 무슨 용서를 구해요? 있을 수 없죠.
그래서 이 주기도문은 오직 아버지와 아들 사이만 아는 내막을 십자가와 병행해서 같이 나란히 감으로 말미암아 십자가 앞에서 어느 인간도 마땅히 용서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거예요. 없고 십자가의 은혜를 받게 되게 되면 아! 우리가 십자가대로 해야 될 그런 입장도 못 되는데 이 십자가의 내막을 예수님이 대신 다 치러줬기 때문에 성취됐기 때문에 십자가에 따라오는 그 혜택, 내가 남한테 용서했더니만 주께서 용서해줬다는 그 혜택마저 십자가 안에 그게 선물로 보따리 속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해태 종합선물, 그 안에 모든 게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주기도문 하면서 어떤 면에서 우리는 용서 받았고 어떤 면에서 우리는 주께 영광을 돌려야 되는지 이유를 주기도문 외우면서 그걸 반복하면서 다시 한 번 아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일용할 양식을 달라 했죠?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달라 해서 밥 굶지는 않습니다. 왜, 우리는 일용할 양식 말고 내일 치까지 은행에 지금 잔고로 돼 있어요. 일용할 양식 달라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우리는 하루하루 의존하지 않아요. 일단 돈 있고 재산 있으면 주님보다도 내 돈 의지하다가 돈 떨어지면 그때 ‘주여 살려 달라.’고 하잖아요. 뭐 일용할 양식 하는 사람도 계시지만 힘들게 사는 분도 있지만 보통 여유 있게 살거든요.
그런데 보세요. 어떤 경우에도 주기도문을 지킵니까? 못 지킵니까? 못 지키니까 반복해야 돼요. 왜, 이런 것도 죄기 때문에 이런 죄에서 주께서 용서를 해주셨구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죠. 주기도문뿐만 아니고 오늘 하려고 하는 70이레도 마찬가지입니다.
245 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줄에 봅시다. 『‘죄에 대한 속죄의 은총’』이 마지막 1이레에 있습니다. 7+62+1에서 제일 마지막 1이 주어진 그게 뭐냐 하면 영원한 속죄가 되는, 속죄 앞에 뭐가 붙죠? 영원함이죠. 그러면 영원함이 되려면 우리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누굴 용서하는 것은 그 사람이 돌아서서 나한테 또 해코지 하면 그 다음부터 용서가 안 됩니다. 베드로가 7번 용서하는 것도 본인 딴아 어지간히 참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흔 번의 7번 하라 하니까 이거는 차라리 이건 용서 안 하는 게 낫다. 왜냐 하면 489 번 용서 했는데 마지막 한 번에 화딱지 나서 용서 못하면 490번 다 날라 갑니다. 그게 소용없는 거거든요. 차라리 용서가 안 된다, 이런 말이 솔직하죠.
여기 ‘영원’이란 말은 우리 인간한테는 해당이 안 되고 영원한 속죄가 된다는 이것은 예수님이 와서, 메시야가 와서 해야 될 일이잖아요. 그러면 70이레는 누가 할 일입니까? 메시야가 할 일 이예요.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70이레가 다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70이레(7이레+62이레+1이레)가 다 들어있다 이말 이예요. 다 들어있다는 말은 이것은 누구의 역사입니까? 이스라엘 역사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를 거북이 등짝처럼 짊어졌다고 보면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 것이 있고 자기 것을 지키면서 행복을 유지하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게 되면 자기만큼 행복하지 않은 사람을 보고 측은히 여기고 동정심을 나타내요. 오로라 공주란 드라마에 보면 젊은 나인데 암 4기에 걸렸을 때 굉장히 주변에서 동정을 많이 하거든요. 그 말은 자기는 건강하다는 뜻 이예요.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보고 뭐라 했습니까? ‘저 사람은 누구 죄 때문에 그렇습니까?’ 이 말은 자기들은 ‘아휴, 다행이다.’ 이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그 잘못된 생각은 예수님 십자가 지고 갈 때 예루살렘 아줌마들이 어떻게 했느냐 하면 예수님 보고 울었어요. 그런 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너 날 보고 울었어? 운거야. 정말. 그럼 너희들은 괜찮다 이 말이지?’ 하긴 여자는 자기 것 밖에 몰라. ‘지금 날 보고 운단 말이지, 날 위해. 너 딸보고 울어라. 날 위해 울지 말고.’
지금 누가 누굴 동정하는 입장입니까? 남 동정할 잽입니까? 예루살렘이 곧 디도 군사에 의해서 완전히 처참하게 망가지는데. 성전이 다 깨져요. 62이레에요. 다 깨져요. 62 다음에 7 나오지만 층으로 보면 62가 계속 가는 겁니다. 어디까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인류의 멸망의 그 장면까지 62이레가 다 가요. 62이레 깨지면 1이레가 또 가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시루떡이라 했잖아요. 시루떡 기억납니까? 시루떡! 제일 밑에 7이레, 그 다음에 62이레, 1이레, 이게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같이 가요. 황폐하면 계속 세상 끝 날까지 황폐해지고 성전 있으면 끝 날까지 성전 있고 1이레는 완성은 완성대로 같이 가는 거예요. 요한계시록은 3층이 같이 돼요. “또 하늘을 보매” “또 하늘을 보매” 자주 나와요. 중간에 62이레는 완전히 이 세상을 폭격기를 가지고 폭격을 하고 폭격을 하기 전에 독수리가 공중에서 시위를 해서 ‘곧 폭격이 있습니다.’ 돌아다니고 한다 이 말이죠.
이 세 층이 겹쳐져 있는 겁니다. 겹쳐져 있는 것을 70이레를 통해서 층을 하나하나 뜯어내는 겁니다. CSI에요. 과학수사대라니까요. 철저하게 과학적인 증거에 의해서 범인을 찾는 그 장면을 할 때 핀셋을 가지고 죽었던 상처를 하나하나 뜯어내듯이 우리가 성경의 세 가지 층을 뜯어내는 작업을 지금 하는 거예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를 뜯어내는 겁니다. 뜯어내게 되면 뜯어낼 때 힌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셔서 부활 승천할 때까지 이 역사가 예수님 공생애에 응축이 돼서 다 들어있습니다.
귤이 있잖아요. 귤의 시간은 어디에 담겨있습니까? 귤안에 들어있어요. 한 개의 귤을 피우기 위해서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던 거죠. 귤이 갖고 있는 기억이 이 안에 귤이 기억을 하고 있어요. 서리 맞은 거, 고생한 거, 동네에 가서 귤 따먹으려고 하다가 걸려서 도망가던 그것도 귤은 다 알고 있죠. 범인의 모습을.
귤이란 이 안을 들여다보면 사실 귤의 역사가 응축돼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 안에 모든 인류의 역사가 응축돼 있습니다. 그 근거가 뭐냐 로마서 8장 3절 이예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주름진, 죄가 이렇게 겹쳐져 있는 거예요. 책을 한 권이지만 펼쳐보면 페이지 수가 나오잖아요. 겹쳐진 것을 하나, 하나가 펼쳐보면 죄의 역사가 나와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죄는 예수님한테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이 기적을 원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기적을 보여줄 마음이 없다. 했습니다. 기적 같은 소리하고 있네, 기적 안 행해 준다. 너희가 정 기적을 보여 달라면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이다.
요나의 기적이 뭡니까? 죽었다가 다시 나타난 거죠. 분명히 죽었다가 다시 나타났어요. 만약에 육지에서 보면 요나는 물속에 빠질 때 이미 죽었죠. 죽었고 며칠 지나도 사흘 지나도 안 나오죠. 사흘 지났는데 자기가 박 태환이도 아니고 숨을 쉰다고 사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 분명히 죽은 자에요. 예수님이 지금 살아서 돌아다니는 건 죽은 자로서 돌아다니는 거예요. 주께서 일일이 일하시는 거, 앉은뱅이를 낫게 하시고 사도바울을 로마에 보내고 하는 이런 것은 전부 이미 죽은 자로서 일하시는 거예요. 부활했다는 것은 산 자로 나타나지 않고 죽은 자로서 문 열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도마한테 보여준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뭡니까? 이미 죽은 자로서 살아계신 분을 믿는 거니까 그 믿는 자도 이 땅에서 사실은 십자가 안에서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은 자요.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세상이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서로 보고 죽었대,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서로 보고 죽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화가 안 되는 것은 죽은 사람하고 대화가 안 되죠.
대화가 안 돼야 돼요. 대화가 안 될 때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을 알아먹어서도 안 되는 겁니다. 그걸 설득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어요. 알아먹어서도 안 되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께 속한 자만이 내 말을 알아듣는다고 요한복음 8장 47절에도 나오고, 요한일서 4장 6절에도 나오고. 요8: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이게 누구 이야깁니까? 예수님 이야기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귤이죠. 안에 뭐가 들어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으니까 이 안에 인간의 모든 죄는 이 안에 다 들어있죠. 그 육신 속에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이 얼마나 엉터리 하나님입니까?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독생자를 본 자가 있다? 없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는데 놀라운 사실 이예요. 요한복음 1장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자, 이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캥거루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칩시다. 캥거루라는 동물 자체가 안 보이고 없으면 캥거루 이름도 없겠죠. 어쨌든 캥거루가 있는데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칩시다. 그런데 정작 나타난 것은 뭐냐, 캥거루 뱃속에 있는 새끼가 이 땅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나는 캥거루 새끼다.’ 라고 할 때 그 말을 누가 알아듣겠습니까?
아버지를 본 사람이 없는데 자기 아버지 아들이라고 하니까 당연히 못 믿죠. 왜 못 믿느냐, 그래야 육신이 온 것이 정당화되기 때문에. 육신이어야 돼요. 육신은 믿는다? 안 믿는다? 믿으면 육신이 아니죠. 믿으면 영이 되잖아요. 못 믿을 세상에 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들은 독생자 하나님을 못 알아보게 돼 있어요. 그래야 세상이 어두움이 되니까. 어두움을 더욱 더 어두움이 되게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순간부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는 죄인이 되는 거예요.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라고 할 정도로 죄인 되는 거예요. 큰일이 없는데 뭔가 일 터짐으로 말미암아 큰일이 생겼다는 것은 결국 그동안에 뭘 믿었다? 복음 앞에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 영역을 챙겼다는 것이 들통이 난 순간이죠. ‘나는 내 자식이 최고고 나는 내 가정이 최고지, 이것 지키려고 예수님을 살짝 이용했구나.‘ 하는 것이 들통 나 버린 거예요. 노출된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라 하는 것은 노출된 그걸 탓하지 않고 바로 네가 앞으로 지을 모든 죄가 이 귤 안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70이레를 돌돌 감아버리면 노란색 페인트칠하면 귤 돼요. 뜯어보면 세 겹 나옵니다. 삽 겹 살.
그러니까 예수의 공생애가 인류의 전 역사고 그 역사는 뭐로 돼 있다? 세 층으로 돼 있고 이걸 누구한테 알려준다? 인자보고 이야기하죠. 다니엘 보고 뭐라 합니까? ‘인자야!‘ 라고 하죠. 그 인자라고 이름 붙여놓고 그 이름을 누가 가져갑니까? 예수님 본인이 ‘이거 내 이름이야.’ 하고 자기 이름만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다니엘에게 주어졌던 70이레의 그 예언도 자기가 같이 가져가 버리죠. 가져가서 70이레를 보여주는 주체자로서의 뭘 살아간다? 공생애를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70이레가 (이제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주어진 계시 바깥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70이레가 묵시기 때문에 바깥에 등장하는 나라가 무슨 나라? 짐승의 나라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70이레를 품고 구름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면 예수님 주변에는 뭐가 달려듭니까? 짐승들이, 마귀들이 달려들죠. ‘주께서 왜 이리 일찍 오셨습니까? 우리를 멸망하러 왔죠?’ 이런 소리 하든지 광야에 갔을 때는 이 돌더러 뭐 되게 하라? 떡 되게 하라, 이런 소리 한다든지, 또 제자들이 예수님 능력 받아서 행하니까 ‘예수님, 예수님.’ ‘왜?’ ‘지금 하늘에서 귀신들이 떨어지는 걸 봤습니다.’ ‘그래, 놀라지 마라.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더 좋아해라.’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가신 곳에 미처 몰랐던 짐승의 속내, 귀신들이 마구 등장하는 거예요.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하늘나라라는 것은 누구 집에 들어가서 집 주인을 묶어놓고 세간을 들고 가는 강도와 같이 내가 도둑이다. 그리고 너희들은 지금 어디 묶여 있느냐? 마귀한테 묶여있다. 주인을 묶어 놨기 때문에 너희들을 데리고 내가 이 마귀세계에서 너희를 벗어나게 하는 그 작업 자체가 하늘나라다.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70이레라는 것이 이레 자체가 지난번에 했지만 묵시적 시간 개념입니다. 70이레가 490년이 아니라고 했죠? 역사적 개념으로 다시 바꾸면 안 돼요. 이레를 살려놔야 돼요. 7이라는 게 뭐라 했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천지를 창조하심, 완성하신 거예요. 완성의 모습이 70이레로 펼쳐진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완성! 완성이 되려면 여기 교재에 보면 뭐라 했습니까? ‘영원한 속죄’ 그러니까 창조의 완성이 영원한 속죄죠. 영원한 속죄니까 영원하다는 것은 우리 인간 소관이 아니니까 메시야가 오셔서 하실 문제고, 속죄, 죄를 용서하는 것도 주께서 하실 문제인데 남아있는 건 뭐예요? 죄가 남아있죠. ‘속‘은 메시야가 하니까 ’죄‘가 있죠.
그러니까 70이레를 통해서 인류자체가 죄라는 것을 보여주는 그런 기능을 하실 분이 메시야로 앞으로 오실 겁니다. 그 기능을 하실 메시야라 하면서 미리 앞당겨서 여기 참여된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유다나라고 그 유다나라는 70이레 있는 스케줄 따라 그것을 그대로 시행함으로써 인류 전체가 ‘죄’다 하는 것을 밝히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인류가 죄인데 그 죄의 절정이 뭐냐? 그것은 바로 메시야를 살해하는 것. 예수님을 살해하는 것, 피조물이 하나님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죄는 다 보여준 거예요.
처음부터 보여줬어요. 처음부터 아담이 손대면 톡! 손대면 안돼요. 선악과 따먹었다는 그것이 선악과나무인 줄 알았지만 선악과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이 십자가에서 아는 거예요. 선악과를 훼손하는 그것이 처음도 죄였고 결국은 그 죄의 궁극적인 죄도 예수님을 죽이는 걸로 그것이 선악과 따먹은 것이 하나의 나무지만 나중에 실내용을 보니까 메시야를 죽이는 그 성질이 악마로부터 주입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악마는 메시야를 죽이고, 죽었던 메시야를 다시 살림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누가 죽을 차례입니까? 누가 죽을 차례에요? 누가 영원히 심판받을 차례죠? 마귀와 마귀의 속성, 마귀에 속한 자들을 영원한 형벌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옥이라는 곳은 필수적으로 있어야 될 자리입니다.
제가 대구 강의하면서 김 중우 집사님이 질문한 4가지 유형을 언급했잖아요. 하나님 나라 중심이냐, 구원 중심이냐, 언약 중심이냐, 예수님 중심이냐, 각자, 각자 봤을 때 성경은 어떤 식으로 전개되느냐, 그걸 내가 강의했거든요. 다 직장 가시니까 못 들었겠지만 들었어요? 거기 죽 나열된 가운데 보면 이 전체가 잘 이야기 돼 있습니다.
거기 보면 언약 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나무는 귀중히 여기고 사람은 내치는 그런 하나님, 왜냐 하면 나무 한 그루 보호하려고 사람보고 ‘나가 놀아라.’ 쫓아내 버렸잖아요. 그 생명나무는 나무인데 그 나무가 뭐라고 나무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내치시는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그래서 해석이 안 되죠.
하나님 나라 중심은 뭐냐, 임마누엘이거든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으로써 우리는 회복된다고 생각해요. 통일교도 아닌데 회복이란 말을 많이 써요. 아마 신천지도 많이 쓸 걸요. 그러나 회복이 아니고, 회복될 것 같으면 나무 하나보다 취급 못하는 인간을 내치시는 그 취지가 하나님 나라 사상으로서는 나올 수가 없죠. 그저 하나님과 함께 있음, 임마누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약만을 위하여 인간을 그냥 내치시는 분이예요.
영원한 속죄를 위해서 죄의 역할을 이스라엘이 지금 하게 되는 겁니다. 아담이 마귀의 사주를 받고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이스라엘은 누구의 사주를 받고 메시야를 죽입니까?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짐승의 사주를 받고 메시야를 죽이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이레라는 묵시적 시간 개념에서 인간은 한 발자국도 이레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사건 현장에서 범인은 다시 도망가지를 못해요. 맨 범인은 그 자리에 있었어요. 선악과 따먹은 그 자리, 선악과 훼손된 그 자리 범인이 있었던 거예요.
그 비밀이 범인이 새끼치고 해서 인류가 수백억 인류가 되더라도 전부 다 한 아담입니다. 동일한 범죄를 저질렀어요. 그 범죄가 뭐냐, 예수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 지금도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예수는 죽어 마땅하다. 하나님은 인간 손에 죽어도 하나님은 할 말 없다는 거. 왜 ‘나, 이 고귀한 나, 이러한 인간을 힘들게 만들다니, 하나님 네가 한번 당해봐.‘ 그러한 심보로서 오늘도 아침에 눈을 뜹니다. ’하나님, 너 한번 당해봐. 너 오늘 죽여 버린다.‘는 그런 심보로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보람찬 하루 일과를 이렇게 힘차게 나대면서 ’하나님 너 죽어봐라.‘ 그걸 달리 말하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잘난 나를 보라.‘ 그런 뜻이 되겠고 ‘내가 당신을 의도적으로 안 믿을 때 안 믿는 이 용기를 당신은 날 향해 찬양하라. 의도적으로 당신을 의지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당신을 믿지 않는 이 대범함에 대해서 하나님도 감탄해야 된다. 이런 자부심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원한 속죄를 위해서 우리는 영원한 죄인이 돼야 되겠죠. 그 일을 누가 도와주느냐? 고마운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내 주변의 마귀가 도와줍니다.
마귀가 어떻게 도와주는지를 245 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에 보겠습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기한을 72이레로 정했죠? 기한하니까 역사적 시간 개념처럼 느껴지죠. 하지만 중간에 이레가 있으니까 이건 역사적으로 어떤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 자체가 이제는 끝나버린 거예요. 묵시 세계로 넘어가는 거예요.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여기 영속이란 말은 영원한 속죄가 된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246 페이지 위에서 네 번째 줄에 『다니엘 9장 7절에 보면 “주여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치는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이나 먼 곳에 있는 자들이 다 주께서 쫓아내신 각국에서 수치를 당하였사오니』수치를 당하죠. 수치를 당하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수치를 당하신 분이 누구죠? 예수님이죠. 예수님은 하나님이지만 침 뱉음을 당했습니다. 그 수치에 비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한 수치는 수치도 아니죠. 하지만 이스라엘이 당한 수치는 장차 메시야가 당할 수치를 미리 앞당겨서 보여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수치를 당하는 그걸 가지고 신경 쓰지 말고 누가 수치를 줍니까? 그걸 생각해야 돼요. 주변의 짐승이 수치를 주겠죠. 수욕과 치욕을 당하고 모독과 멸시를 받고 그렇게 구박을 주는 것은, 이 세상의 주인공들이 자기들이라고 그렇게 우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럼 물어봅시다. 수치를 당하면 구원받습니까? 구원받았기에 수치를 당하는 겁니까? 구원받았기에 수치를 당하는 겁니다. 베드로전서에도 나와요. 세상에서 나쁜 짓해서 고난 받지 말고 주의 의와 복음으로 고난 받으라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0절~12절에도 "내 복음과 의로 고난을 받으면 오히려 기뻐하라 선지자들도 이와같은 수치와 모멸과 고난과 핍박을 받았느니라“
그러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받고 싶어 되는 게 아니라 구원받는 구조가 우리한테 내려와요. 덮친다니까요. 새가 이렇게 앉아있으면 새장을 만들 때 새가 새장은 이렇게 만들고 파란색, 노란색 이렇게 주문해서 만듭니까? 그냥 앉아있으면 덮치는 거예요. 덮칠 때 이게 성도라면 수치와 고난도 같이 덮쳐 오는 거예요. 왜냐 하면 이게 장차 올 메시야의 상황이기 때문에. 구약의 선지자라면 구약의 선지자한테 장차오실 메시아의 고난이 덮쳐 와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 같은 경우에 “아버지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다윗은 아무 이유도 모르는 체 15년 동안 군만두 먹듯이, 아무 이유도 모르는 체 사울한테 쫓겨 다니잖아요. 개그 콘서트 보면 나오데요. 15년 동안 아무 이유도 모르는 체 여자가 안 생긴다고.
다윗은 정말 아무 이유도 모르는 체 그냥 고난이 와요. 예레미야도 그렇고 엘리야도 그렇고 오늘날 성도도 그렇고, 왜 고난 받습니까? 물어보면 성령이 왔으니까 고난 받지. 그러면 성령이 안 오면? 주의 이름으로 고난 받는 것도 없습니다.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이 있을 때 오히려 기뻐하라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사도바울의 생애를 보세요. 사도바울의 생애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고난입니다. 사도가 되고 난 뒤에. 며칠 새고 이틀 세고 사흘 지나서 고난 받는 게 아니고 매일 아침에 눈만 뜨면 매일같이 고난 이예요. 전 인생이 다 고난 이예요.
주께서 날마다 죽음에 넘기우면 우리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살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주께서 우리들을 이 마지막 때 쓰레기 취급하신 것은 우리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살게 하심이라. 우리를 마지막 때 쓰레기로 미말에 아무 무가치한 쓰레기 취급하시는 거예요. 주께서 사도바울을.
예수님께서 가셨던 그 고난이 이렇게 덮치는 거예요. 덮칠 때 이 구조가 바로 70이레라는 겁니다. 70이레를 다시 이야기하면 성전 세웠다. 그 다음에 부서졌다. 그 다음에 성전 부서지고 그 부서진 그 자리에서 메시야가 오셔서 영원한 속죄를 위한 제사가 예수님, 메시야에서 제사가 완성된다. 이거잖아요.
그럼 이제부터 관절을 해봅시다. 246 페이지 위에서 열 번째 줄에 『이것은 바로 1이레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성읍과 성소가 훼파하려니와) 단 무엇이 같은 점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훼파케 하신다는 점에서 다니엘이 기도 가운데 깨달은 것과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부응해서 정리해주신 창조의 단위로서의 70이레가 보조를 맞추어서 연결된다. 그렇다면 가운에 있는 62이레는 별 의미가 없다. 즉 62이레는 7이레와 1이레의 간격을 나타내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70이레는 두 개의 관절을 가진다. 기간을 말하기 위한 절단점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사건의 층이 같은 유로 유지되면서 흐른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창조적 단위를 동원해서 그렇게 합리적으로 배치해 놓은 것이다.』
어렵죠? 질적으로 다른 사건의 층, 제일 밑에 7이레, 그 위에 62이레, 그리고 1이레, 질 적으로 다른 층이 같은 유로 이게 죽 흘러간다는 거예요. 창조적 단위, 천지 창조가 뭡니까? 천지 창조를 마치고 다 이룬 거죠? 만족하죠. 만족스러운 그 시간 단위를 동원해서 이것이 만족스러운 상태, 상태에서 이 7, 62, 1이레를 이제는 다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70이레 참 어렵네요. 굉장히 어렵죠. 이렇게 관절을 두 가지로 끊어야 되는데 이 어려운 이유가 장차 올 메시야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왔지만 성전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교신의 장소, 통하는 곳입니다.
이걸 요한복음 2장에서는 아버지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딴 데 기도하면 된다? 안 된다? 안 된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입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라는 거예요. 다윗 언약에 의하면. 열왕기상 8장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솔로몬이 성전 짓고 난 뒤에 다른 곳에 기도하면 안 돼요. 심지어 다른 곳에 있더라도 방향은 어느 쪽으로 틀어야 된다? 성전 있는 곳으로 틀어야 돼요. 그걸 한 사람이 요나에요. 요나는 신기해요. 요나가 바닷물 속에 들어가서 성전이 어느 쪽인지 어떻게 알았을까?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 대충 잡아서 마음속으로 성전 있는 곳을 향하여 기도하니까 응답이 된 거예요.
성전은 유일하게 UFO와 통하는 UFO본부? 센터, 지지직~ 지지직~ 만화보면 지지직~ 번개가 치는 곳. 산이 있는데 갑자기 번개가 칠 때 여기 구석에 본부가 있어요. 그게 성전 이예요. 하나님과 유일하게 교류하는 성전,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 하는 곳.
그 성전이 예수님 시대에는 성전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 때는 예수님 몸이 성전이죠. 지금도 몸이 성전이지만. 예수님 가신 곳에 지지직~ 아버지의 뜻은 떨어지는 거예요. “아버지여, 오늘은 뭐할까요?“ ”이거 해라.“ 그러면 예수님이 그거 하시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예수님 가신 곳이 ”아버지여 무슨 이야기할까요?“ ”이 이야기해라.“ ”알겠습니다. 이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곧 아버지의 말씀 이예요. 예수님이 가신 곳이 곧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이 상당히 우리한테는 당황스러운 것이 예수님이 가신 곳, 공간, 특정 장소잖아요. 지금 예수님이 만약에 예루살렘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가기 위해서 비행기 타고 예수님 근처 가야 돼요. 근체에 가면 제자들이 ‘오지 마세요. 안 됩니다.’ 그러다가 집사님이 어떤 여인처럼 예수님 옷 만져서 병이 나았다고 이럴 수도 있습니다마는 뭐 갱년기가 낫다든지.
어쨌든 간에 제자들이 보디가드처럼 못 오게 했을 때 그러면 구원받는 것이 어떻게 돼요? 제한적이죠. 그러면 성전을 이렇게 하지 말고 드론, 무인비행선, SF 영화 보면 많이 나오죠. 성전이 뜨면 어느 공간에 매이지 않고 우주 전체에 떠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한꺼번에 빛을 받을 수 있잖아요.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여기서 부활 승천하셔서 그냥 있으면 안 오죠. 뭐가 와야 되죠? 성령이 와야 되죠.
어떤 경우는 한창 마차 타고 이럇, 하고 이디오피아 내시가 타고 가는데 ‘게 섰거라.’ 하고 왔다란 말이죠. ‘누구십니까?’ 하니까 ‘나는 빌립 집사인데 성령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마침 성경 이사야 53장 펴놓고 '이거 뭡니까?‘ 하고 물어보니까 창세기부터 죽 다 살펴 주니까 그때부터 믿었어요. 성령을 받고 믿고 성령 세례 받고 그래서 세례 받았잖아요. 결국 이 작업을 누가 했어요. 드론, 주께서 부활 승천하신 주께서 서로가 만나게 하는 거예요. 고넬료와 베드로를 만나도록 주선을 시킨 겁니다. 빛이 나와서 만나서 세례 주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은 머리고 우리는 몸의 지체가 되는 거죠.
교회 있어요? 없어요? 교회 있잖아요. 교회 있는데 무슨 남의 교인을 뺏어간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무슨 빼앗기는 교회가 있고 빼앗는 교회가 있습니까? 무슨 그런 교회가 다 있어요? 전혀 예수님을 안 믿는 거예요. 자기들의 영업장으로 만든 것만 믿고, 안 믿는 거예요. 영업장 하니까 바다 이야기가 생각나네요. 경찰 덮치면 피하여 도망하는 거. 교회는 한 군데밖에 없습니다. 제가 수십 번 이야기했는데 교회는 한 군데밖에 없어요. 자꾸 여러 군데 생기면 교인 뺏어가는 일이 생겨요.
예수님께서 소자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라 했거든요. 그렇다면 옛날 예수님께서 특정 어느 공간이었던 그 성전이 주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내려 줘버리면 성령 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증거 하고 예수의 모습을 살고 할 때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옛날 예수님이 성전 움직이는 그거와 동일하게 되는 거예요. 성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예수님의 종들에 의해서. 소자한테 한 것이 나한테 한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받은 신분이 얼마나 귀한 신분 이예요? 돈 몇 푼주고 바꾼다든지 돈 몇 푼에 고개 숙일 신분이 아닙니다. 이 신분은 엄청난 신분 이예요. 인간적으로 어떻게 설득이 안 되고 표현이 안 되고 일을 놓으실 정도로 엄청난 신분을 우리가 배정받은 거예요. 성도라는 것.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이 진짜 예수를 믿을 것 같으면 이 사람에게 절해라.’ 이렇게 할 때 그거 따라 할 필요 없어요. 절 한다고 그들에게 나쁜 게 아니거든요.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뭐냐, 이럴 경우에는 ‘네가 신자 맞다.‘고 이미 기준을 누가 만들었어요? 저쪽에서 만든 기준을 성도는 항상 벗어나요. 네가 어떤 기준을 해도 내가 그 기준을 따를 필요가 없는 이유는 성도라는 것은 내가 따라 했다고 해서 성도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걸 항상 능가하는 거거든요.
주께서 성도되게 한 것을 인간적인 표현으로 표현할 방법이 없어요. 이 성전, 이 성전이 뭘 하느냐, 핍박, 고난을 받습니다. 이게 뭐냐 62이레에요. 핍박을 받아야 됩니다. 왜, 그래야 짐승의 정체가 드러나니까.
기원 전 3천 년 전에 현재 이라크 땅인데 수메르는 최초의 국가에 해당되거든요. 거기서 신상을 만드는데 미술사에 보면 나오는데 신을 섬기는 자를 조각한 게 있는데 재밌는 게 외계인 같아요. 얼굴이 있다면 눈을 엄청 크게 했어요. 왜 이렇게 하느냐, 신을 볼 때는 우리의 눈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이 전달된다고 이렇게 한 거예요. 그 당시에 수메르 문명에서는 다 이런 식으로 조각을 만들고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봤다 이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여기에 예수 믿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성도가 있다고 한다면, 이거 따라 했겠어요? 안 따라했겠어요? 안 따라 했죠. 눈 크게 한다고 해서, 남들 보기는 잘 믿는 것 같지만, 남들 보기에 잘 믿는 것 같은데 우리가 거기에 같이 따라갈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 하면 따라 하던 안 하든 간에 우리 신분은 주께서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빼고 자시고 취소시키고 이걸 탈락시키고 할 어떤 능력도 없어요. 성령이 준 것을 무슨 수로 안 하겠다고 ‘나 안 해, 성도 안 해. 짜증나서 못해.’라고 버릴 수가 있습니까? 안 버립니다. 안 버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환난과 핍박과 곤고와 기근과 적신과 위험이 우리에게 계속 찾아오는 거예요. ‘아이 씨, 이런 것 같으면 예수 안 믿으련다.’ 하는 소리가 입가에 나오더라고 심지어 입 밖으로 흘러나왔더라도 다시 3초 뒤에는 ‘아니구나. 죄송합니다. 아까 그 말 취소하겠습니다.’
이게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이 당해도 너무 당했어요. 다니엘도 다 축구하고 싶고 다니엘도 다 노래방도 가고 싶어요. 그러나 다니엘은 다니엘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환장합니다. 사람이 남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하면 열심히 노력하면 되는데 다니엘이 해야 될 일이 남들 다 해보다가 안 되니까 오는 일 있잖아요. 집사님 꿈꾼 걸 제가 알아맞혀 볼까요? 안 돼요. 왜, 남이 꿈꾼 걸 어떻게 알아맞춥니까? 다니엘 본인도 미칠 지경 이예요. 자기가 연습해서 노하우로 할 수 있는 것 같으면 아주 쉽게 하죠. ‘아이, 저거 5년 전에 한 거.’ 이렇게 되는데.
다니엘 하는 것은 전혀 못해본 거예요. 예를 들어서 사흘 동안 굶은 사자 앞에서 까불기, 이런 거, 사흘 동안 서울 대공원에서 배부른 곰한테도 맞아 죽는데 그것도 잘 안다는 사육사가, 사자한테도 얼마 전에는 맞아죽었죠? 이건 굶어서 뭐든지 나오면 뼈까지 으깨서 먹을 정도로 만반의 준비가 돼 있는 그 사자 앞에서 까불기. 약 올리기. 그거 다니엘이 해야 됐어요.
다니엘 세 친구는 더 황당합니다. 포항제철 제 1 용광로 속에 들어가기, 옆에서 붙드는 사람이 결국 타죽었다 말이죠. 인간의 세포는 단백질로 돼 있거든요. 온도 200도~500도만 되면 타든지 녹든지 합니다. 단백질 세포가 원래 그래요. 그런데 다니엘 세 친구의 단백질은 무슨 단백질로 돼 있는지 머리카락도 안타고 그을리지도 않아요. 머리카락이 쇠로 돼 있어요? 티타늄으로 돼 있는가? 인조인간 로봇인가? 왜 불이 안타는데?
불이 왜 안타는지 좋아하지 말고 당사자들한테 물어보세요. 얼마나 놀랬겠습니까? ‘나도 인간처럼 살고 싶다.’ 이런 소리가 나올 거예요. 왜 인간이 못하는 짓을 왜 내가 구태여 해야 됩니까? 이게 오늘날 성도입니다. 예수, 십자가 부인하면 그만 이예요. 그게 안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착한 일 하고 선교 헌금내고 봉사 많이 하고 구제 많이 해서 성과급 쌓아서 스펙 쌓아서 천당 가는 이게 얼마나 납득하기 쉬워요?
그런데 막 살아도 구원받는다는 이것이 남한테 설득도 안 돼, 납득도 못 시켜, 온 식구들 전부 다 납득 안 된다고 삐져서 복음 전하는데 잠 오기만 하지, 듣지도 않아요. 그런데 도대체 나는 무슨 팔자가 이런 팔자가 다 있습니까? ‘착하게 하면 여러분 복 받습니다.‘ 이거 얼마나 좋은 거예요? ’착하게 해봐야 지옥 갑니다.’ 이 소리를 해야 된다는 이 자체가 무슨 운명이 이런 황당한 운명이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주일 낮 설교에 이런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식품회사나 운영하시지 이거, 언약, 예수, 구원, 중심 알아서 뭐하려고? 그분도 참 희한하다. 식품회사나 운영하지 이거 알아서 뭐하려고? 평신도가.
다니엘 입장이 오늘날 성도 입장이고 예수님도 이 길을 가는 겁니다. 삼겹살이 끼었어요. 성도된 사람은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되는데 고난 받기 때문에 어디를 쳐다봅니까? 고난 받기 때문에 어딜 쳐다봐요? 영원한 속죄를 바라보죠. 영원한 속죄가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을 바라보기 위해서 우리는 말 안 듣거든요. 우리에게 고난이 와야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라고 전화해야 그래도 알면 천만다행이에요. 아! 원래부터 큰일 날 일이 나한테는 ‘내 꺼는 없었구나.‘라는 것을 알아야 모든 것이 예수님이 주신 팔자라는 사실을, 내 인생을 예수님께서 살려주는 게 아니고, 주님의 인생을 주님이 살아가는데 우리는 자꾸 오해하기를 내 인생인 줄 알고 고맙다고 이야기하다가 된통 당하면 짜증냈다가 고맙다 하다가 짜증냈다가 이건 미친 널뛰는 것도 아니고 맨날 반복하다가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죠.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의 여기 247 페이지 위에서 여섯 번째 줄에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짐승의 나라의 도움으로』뭘 세워준다? 성전 세워주죠. 짐승의 나라가 참 고맙죠. 짐승의 나라로 성전 세웠다가 그 세워줬던 짐승의 나라에 의해서 성전이 부서지고, 우리가 차타고 가다가 차타이어 펑크 났을 때 목사도 지나가고 장로도 지나가고 집사도 지나가는데 여호와증인이 도와줬을 때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래서 그때부터 여호와증인 믿을까요? 고마우니까. 아니에요.
내가 우산 없을 때 지나가는 몸배 바지 입은 보살이 와서 ‘여기 불자님 우산 받으세요.’ 목사인줄 모르고 불자인줄 알고 등산 갔는데 절에 온 줄 알고 이렇게 도와줄 때 얼마나 짐승이 고맙습니까? 세상의 모든 안 믿는 남편이 짐승이고 그 남편 때문에 밥 먹고 살고 이렇게 성경공부 참석하고 얼마나 짐승이 고마워요?
고마운 짐승이 또 핍박은 짐승이 하네. 그럴 때마다 이 짐승을 누가 파견해 주시는가? 1이레 되시는 바로 예수님의 영원한 속죄를 증거 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꼭 주님이 요물 같아.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우리로 하여금 하여튼 1이레, 예수님의 영원한 속죄는 이뤄졌고 그것을 너한테 아까 독수리 새장처럼 우리를 옴팍 뒤집어씌운 거예요. 이것을 우리 힘으로 어떻게 뺄 수가 없어요. 십자가 외는 네가 그리스도 십자가 죽으신 것 외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하는 그 말씀이 이렇게 실제로 내 인생이 될 줄이야. 오직 우리는 십자가외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갈라디아서 6장 14장의 그 말씀이 나의 일평생의 과제가 될 줄이야. 이거 어디 초등학교 때 미리 알았습니까? 대학 시험 칠 때 알았어요?
이거는 성령이 왔을 때 아는 거예요. 성령이 오게 되면 착한 일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나의 의로움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된다는 이 사실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이미 70이레 다니엘처럼 인자라는 이름을 호칭으로서 지금 주님한테 다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밑에 봅시다. 『이것은 그 성전 중심으로 짐승의 나라를 전복시키고』짐승의 나라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하고 짐승의 나라로 하여금 성전 부수고 그 짐승의 나라보고 ‘너 성전 왜 부쉈어?’라고 책임 물으면서 짐승을 지옥으로 보냅니다. 불쌍한 짐승! 짐승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마귀가 무슨 죄가 있어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나쁜 천사들. 악마가 뭡니까? 타락한 천사 아닙니까? 하나님은 놀랍게도 타락한 천사까지 예수님을 주로 만드는데 철저하게 네지마시, 나사 못 하나까지 버리지 않고 말끔하게 다 이용하네요. 로봇청소기 같아. 돌아다니면서 빨대 같은 발로 다 쓸어 담아요.
하나같이 버릴 게 없이 전부 다 예수님한테는 모든 것이 ‘아니오,가 아니고 모든 것이 ‘예‘가 된다. 아멘이 되는 거예요. 마귀가 있더라도 세상 권세가 있더라도 어떤 것이라도 너에 대한 사랑을 끊을 수 없느니라. 주님 자신이 주신 사랑을 위해서 마귀가 항상 우리를 옆에서 설치도록 흔들어대도록 그렇게 조치해 놓고 그 마귀는 마귀도 마땅한 사람을 지옥에 보내시고 결국 승리한 것은 어린양, 어린양이 뭐냐, 어린양이라 하는 것은 당하신 양 이예요. 십자가 당하신 양 이예요. 결국은 천국 가도 무슨 보좌? 십자가 보좌만 남잖아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십자가외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다? 없다? 없다. 그리고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지금 우리가 이걸 증거 하는 그런 팔자가 되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70이레 통해서 다니엘처럼 다루어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괴롭고 힘들고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할 때 참 난처하지만 그것마저 주님께서 주님 십자가 바라보라는 조치인 것을, 우리가 얼마나 못난 존재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아서 죄인이라는 것을 알라고 주신 하나님의 축복인 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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