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9-신비주의
201312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9-신비주의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1210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9-신비주의
(강의:이근호 목사)
3페이지에 조르다노 부르노(1548~1600), 상당히 늦은 사람이죠. 사람들은 이 사람을 중세에 속하지 않고 근세에 속한다고 합니다. 중세와 근세를 구분하는 것은 종교개혁입니다. 구분 지을 때 특징이 뭐냐? 중세는 신을 위하여 인간이 존재한다면, 신과 인간이 직접 교류한다면, 근세는 신이 인간에게 맡겨놓고 인간이 스스로 알아 뭔가 해놓고 그걸 신에게 영광으로 돌리는 방법으로 한 거예요. 신에게 직접 지시를 받는 게 아니고 내 할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본 훼퍼가 이야기하는 성인된 사람들, 다 컸다 이거지. “하나님, 다 컸습니다. 너무 하나하나 간섭하지 마세요. 우리가 알아서 해요.” 그런 신을 이신론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해놓고 저절로 돌아가도록 만든 거예요. 시계 같은 거지요. 그전에는 시계가 아니었지요. 매일같이 주께서 시계를 움직여줘야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단 만들어놓고 이제는 알아서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런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는가? 천문학에서 나온 거지요. 갈릴레이 갈릴레오 같은 경우에 자연세계를 보니까 자연세계가 스스로 알아서 돌아가더라.
거기에 등장한 인물이 조르다노 부르노입니다. 이 사람의 주장은 이겁니다. 이 우주, 세상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게 더 나가면 세상이 곧 신이라고 나오는 겁니다. 스피노자의 사상도 마찬가지에요. 세상밖에 아무것도 없다고 할 때 부르노가 천문학에 동의한다는 게 아니고 천문학이 보고 있는 그 세계의 천장을 부셔버리는 겁니다. 천문학으로 다룰 수 있는 모든 것이 세상이고 그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이 세상은 하나겠지요. 하나가 곧 모든 것이 돼요. ‘하나=모든 것’이 될 때 이제 남은 일은 뭐냐 하면, 하나가 신이죠. 그 하나가 우리와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 이것만 따지면 모든 문제는 다 풀리는 겁니다.
그래서 부르노는 이런 이야기했어요. 하나밖에 없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사는 모습과 우리 모습이 동일하다. 쿠자누스가 약간 언급했는데 부르노는 그걸 세밀하게 했어요. 예를 들면 우리 몸에 핏줄이 있듯이 우리 바깥에는 냇물이 흐른다. 저 하늘에는 구름이 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두뇌가 위에 있다. 그리고 여러 강들이 있고 산이 있고 산맥이 있지요. 그처럼 우리 몸에는 뼈대가 있다. 또 산에는 나무와 풀이 있다. 그게 바로 우리의 형제와 자매다. 꼭 아메리카 인디언들 사고방식이 부르노 사고방식이에요. 모든 것을 하나가 되어서 신에 대하여 찬양하자. 달 형제여, 그리고 바람 자매여. 이런 식으로. 너 따로 나 따로가 아니고 모두가 형제다. 왜? 하나 속에 동일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보면 말이 안 되지요. 과학은 내가 있고 바깥이 따로 있어요. 과학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내가 만약에 A라면 바깥에 있는 것은 -A가 되겠지요. 과학의 문제점은 그냥 있는 건 의미 없고 내가 그 이름을 불러줄 때 의미가 되는 겁니다. 마치 나를 위해 있는 것처럼 오해를 하는 거예요. 그럼 이 세상은 오해와 오해가 난무하고, 오인이 넘치는 오인의 바다, 착각의 바다, 그게 세상이 되는 겁니다.
비가 오게 되면 짜증내는 사람이 있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왜 달라요? 자기가 놀러 가는데 비가 오니까 싫고, 어떤 사람은 놀러 가지 싫은데 비 오니까 핑계 댈 게 생겨서 좋고.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비가 오는 것을 눈물 흘리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비가 오거나, 말거나 비를 형제, 자매로 간주한다면 비가 잘 왔다고, 잘 못 왔다고 따질 대상이 안 된다는 겁니다. 서로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데 뭘 따지고 누굴 비난하는 게 어디 있느냐 말이죠.
그래서 부르노는 이야기합니다. 창조가 창조주보다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어떤 화가 작품을 그려놓으면 남들 보기에 화가가 잘 생겼다고 하는 말보다 그림 참 잘 그렸다고 하는 게 더 기쁘게 하는 것처럼 현재 하나님을 직접 기쁘게 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만든 이 세상이 자기를 포함해서 인간을 포함해서 심지어 두더지, 개구리까지를 포함해서 참 잘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겁니다. 굉장히 은혜롭지요. 폭풍이 치잖아요. 인간의 호흡도 작은 폭풍의 일종이고 큰 폭풍은 우리보다 형님 되시는 대자연이 부는 바람이고.
부르노는 이 사상을 더 깊이 들어갑니다. 창조가 창조주보다 더 중요하다고 봤지요. 부르노는 최소자와 최대자로 분석에 들어갑니다. 최소자란 인간이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보다 더 작은 것. 그러면 인간의 눈에 띠지 않겠지요. 그러나 모든 것 속에는 최소자가, 제일 작은 것들이 다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 작은 것들이 많이 들어있으면 무한이 되겠지요. 그러면 찻잔의 녹차물은 한정돼 있잖아요. 강물이나 바다보다는 양이 안 많지요. 우리는 제한돼 있잖아요. 그러나 최소자로 따지면 이 안에 무한이 담겨있어요.
그래서 인간의 가치가 키가 몇 센티고 몸무게가 얼마고 계측적으로 볼 때는 얼마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걸 최소자로 나누어서 보면, 최소자의 무한한 집합이 오늘날 인간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어느 것 하나 무시하거나 가벼이 볼 대상은 없어요. 그냥 누려! 인생을 그냥 모든 것을 누리며 사는 거예요. 참, 은혜 받는 방법도 가지가지지요.
아까 존재, 현존재, 실존과는 다르지요. 그것은 개체를 두고 개체가 고유의 가치가 있을 때 영광이 된다고 했잖아요. 부르노는 개체 자체도 최소자로 나누면 우리가 감히 나눌 수 없는 최소자끼리의 집합이 바로 무한이 있으면 그게 바로 무한자가 최소자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들어있다. 그러니까 최소자 안에 무한이 들어있는 거예요. 무한자가 최소자의 모습으로 들어앉아있으니 신이 곧 인간이 된다는 것과 똑같은 원리다 이 말이죠.
신이 인간이 됐다는 것을 예수님에게만 적용시키지 말자 이 말입니다. 간단히 이야기해서. 기존교회에서 신이 인간이 되었다, 끝. 그러지 말고 우리 몸까지 하나님의 모든 것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밟고 지나가는 모든 것이 무한을 밟고 지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부르노도 쿠자노스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에 신이 있다고 한 겁니다.
모든 최소자가 점이죠.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면 되니까 무한이 유한 속에 들어있고 유한이 무한과 더불어 있고. 중요한 것은 바로 모든 세상은 창조주의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겁니다. 이걸 정액의 로고스라고 해요. 그 의미가 음란한 의미가 아니고 정액이 있어야 자식을 낳잖아요. 모든 세계가 생산이 끊임없이 쉬지 않고 방출되는 그 현장, 살아있는 거죠. 살아있다는 것이 신의 에너지는 살아있으니까 어느 것 보고도 신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자는 것이 부르노의 사상입니다. 그래서 감각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명상하고 더 합일에 이르면 결국은 우리가 곧 신이고, 전에 선배들과 똑같아요. 우리가 곧 신이고, 신이 곧 우리가 된다. 왜? 우리 속에 세포 하나가 신의 에너지가 넘치니까.
여기서 스피노자는 말하기를 산출하는 자연의 개념이 있습니다. 폭발하는 자연. 꼭 화산이 터지기 직전에 부글부글 끓지요. 라면 끓을 때 물이 가만있지 않고 끓지요. 실제로 부르노 같은 자연의 모습은 입자가속기로 돌리면 입자가 깨지면서 힉스까지 발견했다고 하잖아요. 초창기 빅뱅 상태에서.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초끈이론에서는 새로운 차원에서는 표면이 요동치고 있어요. 그걸 요동치는 입자라고 하는데 에너지가 요동친다고요. 우리가 이렇게 점잖게 있는 순간에도 우리 내에 있는 전자는 쉴 새 없이 요동치고 있잖아요. 그래서 최소자의 모습에서 진정한 신의 모습, 신의 에너지를 발견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냥 껍데기만 달이다, 별이다. 하나님이 운영하시는구나. 하나님 멋있다. 이걸로 끝나지 말고. 더 깊이 있게. 부르노의 말을 증명하려면 오늘날 입자물리학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걸 표현하기 위해서 난타할 때 북 위에 물 뿌리고 쳐보세요. 물방울이 막 튀지요. 그걸 생각하면 됩니다. 그게 현재 에너지가 요동하는 거예요. 거기서 그냥 튀기만 하는 게 아니고 에너지가 나오고 그 에너지가 현재 모든 사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예요. 부르노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과학시대에 과학적 발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신비주의에 대해서 복음적으로 은혜 받으면 되잖아. 아무리 들어봐도 탓할 게 하나도 없네. 탓할 게 하나도 없지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탓할 게 있습니다. 시편74편 5~7절, “저희는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같으니이다 이제 저희가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주위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이것은 파괴지요. 첫째 시간부터 지금까지 이야기한 건 뭡니까? 신의 가치, 신의 존재, 신의 활동성, 신비에 대해서 이야기했잖아요. 신비가 들어보면 하나님이 하신 일처럼 느껴지지요. 그런데 막상 하나님이 역사 속에 나타난 일은 뭐였습니까? 방금 읽었던 시편74편 5~7절에서 성소를 불사르고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히고.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신과 우주를 만드신 신과 실제로 유일하게 독점적으로 신의 계시, 언약을 알아채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뭐였습니까? 주의 이름이 계신 성소가 비 언약, 마귀지요. 마귀에 속한 세력으로부터 철퇴를 받고 무너지고 파괴되고 훼손되고 불사르고 모욕을 받고 침 뱉음을 당하는 바로 이 모습이 진정한 신비에요. 언약에 의해서 파괴되는 그게 신비라니까요.
그러면 대자연이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신비는 뭐냐? 바로 대자연이 십자가 지신 주님의 명령에 의해서 홀라당 불타버리는 거지요.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은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지구는 불 속에 녹아지고 지옥 갈 사람은 불구덩이에 가는 것. 성경말씀 전체가 졸지에 신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성전이 깨졌다는 신비는 생각 안 하고 관조와 명상에 잠겨서 신과 합일을 기대하고 있으니. 저는 말합니다. 기대한다는 자체가 성경에 나오는 진짜 신비를 모독하기 위한 마귀의 장난, 마귀의 수작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마태복음 5장 11절에 보면 나오지요. 처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했던 그 복의 마지막 복은 11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이것 신비주의로 접근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부르노에 의하면, 예수란 존재도 최소자로 무한이 모여 있는 요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곳에 모든 것이 있다는 거예요. 어디에도 모든 것이 함께 있다는 것이 부르노거든요. 부르노에 의해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실제로 그래요. 부르노나 에크하르트나 쿠자누스는 이걸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것은 예수님을 본받자는 이야기에요. 예수님을 모델로 해서 본받자는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이 식대로 지금 세상을 다루겠다는 겁니까?
세상은 지금 나로 인하여, 나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 사람이고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은 나라는 예수님은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메시아로 대우합니까? 죽여 버립니까? 아담에 속한 죄 때문에 우리 죄에 의해서 죽어 마땅한 존재가 나라는 분이잖아요. 그런데 세상은 나를 위하여 핍박받고 나를 위하여 설움 받는 그 사람만이 천국에 간다고 하니까 결국 천국은 신비주의로부터 가려진 겁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는 신비주의가 왜 잘못이냐는 그 이야기입니다. 신비주의는 결코 신비주의를 통해서 십자가 고난을 타 넘어갈 수 있는 길이 없는 거예요. 왜 방법이 모자라서? 왜 방법을 몰라서? 근본적으로 우리는 차단된 게 있어요. 우리에게는 능력도 주어진 적도 없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에게 깨달으라고 준 게 아니고 우리가 아무리 깨닫고 신비주의고 어떻고 고상한 티를 다 내도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는 한 절대로 알 수 없는 바깥에 주께서 일하셔서 주께서 활동하시는 내용이 지금 성경에 나와 있어요.
흔히 성경을 문자적으로 하지 말라 하지요. 이걸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하라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선지자가 신비주의 때문에 순교 당했습니까? 선지자들이 신비주의 지킨다고 그들이 욕을 얻어먹었습니까? 이 좋은 신비주의를 누가 욕합니까? 이건 불신자도 은혜 받겠다. 생각해보세요. 에크하르트 같은 경우에 진리는 하나밖에 없는데. 모든 게 무고. 무 속에서 번쩍 섬광이 떠오르면 그것이 깨달음이다. 이것은 기독교인지 불교인지 분간이 안 되지요. 모든 것이 공이다, 모든 것은 헛된 것이다. 그 가운데 깨달음이 오게 되면 해탈이잖아요.
그 신비주의가 요즘만 있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지요. 쿰란공동체 같은 그런 게 얼마든지 신비주의에요. 자연을 통해서 자기를 알고 자기를 통해서 자연을 해석하고 해석된 자연으로 다시 자신을 해석하고. 거기서 거기, 거기서 거기. 그게 바로 신비주의입니다.
그런데 부르노란 신비주의자가 왜 유명하냐? 그나마 모든 걸 따지는 과학시대에 과학을 능가한 가장 신비로운 종교적인 아이디어를 부르노가 제시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사람들이 호감 간 거예요. 호감간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사람들이 교회 가는 대신에 부르노를 연구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들도 좋다, 멋있다. 써먹어야지. 이렇게 된 겁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복음이 아니에요. 왜 아니냐 하면 예수님 뒤에 붙어있는 ‘존재’란 단어가 어디서부터 출발해서 그 의미를 알겠습니까? 예수님은 존재라고 말하는 내가 먼저 존재하잖아요. 인간이 기껏 아는 존재는 자기가 존재한다는 그 존재를 안다고. 그 존재에다 예수님도 나처럼 존재한다고 하면 예수님이 그런 식으로 존재하겠어요? 그런 식으로 존재하지 않지요.
학교에서 동생이 얻어맞으니까 동생이 우리 형은, “나보다 세 살 많다.” 그럼 때린 애가 겁납니까? 겁 안 나지요. “우리 형은 너보다 싸움 잘 한다. 태권도 5단이다.” 이럴 때 겁나잖아요. “예수님은 존재다.” 그러면 예수님이 좋아하십니까? 그게 어디서 나온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보다 힘세다.” 이러면 예수님 좋아하십니까? “우리는 흙으로 돌아가지만 주님은 오래 산다. 주님 오래 사는 것 맞지요. 주님 지금 잘 대우하고 있지요?” 그럼 주님이 착하고 하십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우리의 술어, 우리의 속성, 이런 것으로 예수님에게 붙인다고 예수님이 좋아하실 분이 아니에요.
그 다음에 우리는 실존한다. 돌멩이는 존재하잖아요. 실존에는 가치가 붙지요. 인간은 스스로 가치를 챙길 수 있는 그것이 실존이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실존하잖아요. 그럼 예수님은 실존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좋아합니까? 안 좋아하지요. 그러니까 신학 자체가 주님이 안 좋아해요. 신학에 붙는 모든 용어들이 우리가 쓰는 용어들을 쓰기 때문에. 밥에다가 어디 걸레 같은 걸 붙여서 이 밥 먹으세요. 하는 것과 똑같은 거잖아요.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의 동생들이 이제 시간이 됐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광고해야 뜹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두 번째 시험받을 한 거예요. 여기서 뛰어내리면 사람들이 따라온다고. 지금 동생들이 예수님한테 그런 제안을 할 때 동생들이 갖고 있는 나름대로의 때가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내 때가 아직 안 됐다는 거예요. 그러면 동생들이 둘둘 감고 있는 시간이란 때와 주님의 때가 다르지요. 인간이 갖고 있는 시간과 공간이 주님의 시간과 공간이 같을 수가 없어요.
다윗과 다윗언약이 달라요. 에스겔 34장에 보면, 다윗이 오지요. 다윗이 오는데 그분이 여호와 하나님이 오신다고 돼있지요. 그런데 실제로 죽은 다윗이 오는 게 아니고 다윗언약으로 오지요. 다윗은 죽어도 다윗언약은 안 죽는 거예요. 그걸 말을 바꾸면, 다윗언약을 다윗을 죽임으로써 다윗언약을 보여줬지요.
지금 새 언약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지요. 새 언약을 증거하기 위해서 새 언약이 우리에게 덮치면 죽기는 누가 죽어요? 우리가 죽어야 돼요. 왜 죽습니까? 죄 값은 사망이라. 우리는 이 땅에서 죄 값으로 죽어가면서 새 언약, 복음의 가치가 드러나는 겁니다. 마치 다윗언약이 다윗을 다뤘듯이. 다윗이 사울 왕한테 핍박받았지요. 다윗언약을 위해서 악신 들린 사울이 필요한 거예요. 오늘날 성도를 위해서 마귀들이 필요하고 마귀의 종들이 필요한 거예요. 뭐가 문제입니까? 언약으로 당연한 조치인데.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예수님은 존재다. 이것도 탈락이에요. 예수님은 실존이다. 이것도 탈락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영광 돌릴 수 있는 어떤 이념과 어떤 생각이 있어야 예수님을 기쁘게 합니까? 성경에서는 언어라 돼있어요. 언어는 영적으로 풀어내야 돼요. 언어 자체는 의미 없어요. 언어를 앵무새처럼 반복해야 소용없어요.
성경에서 예수님은 주시다. 구약에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이름이잖아요. 구약이 전부 다 이름이니까. 그러면 주란 이름은 구약에 보면, 이름을 부른다고 일하는 게 아니고 이름 스스로 일하지요. 정답은 뭡니까? 예수님은 주라고 불러주기만 기다리는 게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주가 주답게 부르도록 우리를 그냥 가만두지 않고 일생동안 작용을 하시는 그 기능 안에서 우리는 죄인으로 고백하고, 성령을 통해서 책망 받고, 회개하면서 역시 십자가뿐이라고 고백할 때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다시 정리하면 신비주의가 뭐가 문제냐 하면, 우리가가 알고 있는 여분의 존재, 나라는 한계성 말고 더 여분의, 나는 유한성이니까 무한이 있을 것이라는 거기에 신을 담은 거예요. 인간은 한계가 있고 신은 무한하다. 그 무한을 유한에 담으면 그게 아마 하나님을 기쁘게 만드는 우리가 진짜 깨달은 신비주의가 아닌가, 해서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겁니다.
그 자체가 전혀 복음이 아니지요. 진짜 복음은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주의 이름으로 하시는 일이라고 했지요. 주의 이름이 뭐라고 했습니까? 심지어 언약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언약이 아니라고 불태워버리고 하나님이 자신이 기거했던 성소라는 건물까지 불태워버리고 스스로 모욕 받고 스스로 피조물한테 뺨 맞고 얻어맞고 핍박받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하나님은 그 이름을 높여서 만유의 주가 되시고 모든 만유로 주라고 시인하게 하심으로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하신 그런 시나리오, 그런 계획, 그러면 그 계획의 뭐도 와장창 다 부정당해야 됩니까? 신비 또는 신비주의마저 십자가 앞에서 부정당해야지요.
부정당하게 되면 무엇이 신비입니까? 고린도전서 1장, 2장 말씀대로 바로 십자가 사건 자체가 신비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걸 뻔히 알면서도 약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 다른 말로 하면, 신비가 눈앞에 있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신비 보고도 모르느냐? 이거거든요. 보고 알 것 같으면 신비를 빼든지.
마태복음 11장에서 이걸 슬기롭고 지혜 있는 자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한테 나타내신다고 할 때 그 이야기를 왜 해요? 애들도 알 것 같으면 어른들도 알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부러 애들만 알고 어른들은 모른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이것은 아는 자에게는 신비가 아니지만 알기 전에는 아무리해도 알 수 없는 그야말로 비밀이고 신비가 되는 겁니다. 그 신비를 어떻게 누구한테 납득을 시켜요. 문제가 되지요. 납득시키는 게 아니고 증거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21장에 서경수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베드로에게 너는 십자가를 지고 간다고 간단하게 할 문제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네 원대로 안 된다는 말을 왜 합니까? “베드로야. 너, 성령 받았나?” “성령 받았습니다.” “네가 알아서 하지?” “성령 받았는데 알아서 하지요. 내가 원하는 것이 주가 원하는 것 맞지요.” 얼마든지 좋게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띠 띠고 계속해서 원치 않는 길로 가요. 세상에 무슨 이런 억하심정이 있습니까.
그러면 베드로가 내가 죽을 때 처참하게 죽어야지. 그것도 안 돼요. 베드로가 거꾸로 매달려 죽으려고 하면 주께서 부자 되어 죽입니다. 절대로 한 순간도 우리 원하는 대로 안 되는 것이 그게 신비에요. 나는 신비롭게 주님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그게 안 될 때 신비라니까요. 나는 하나님과 합일해야지. 함께 깨달아야지. 전에 에크하르트에서 다 나왔던 이야기에요. 함께 깨닫는 것이 그들의 최종상태에요. 부르노 같은 경우에 함께 깨달았잖아요. “여러분, 여러분 속에 최소자가 있는데 그게 바로 무한의 속성입니다.” 하면, “우린 형제구나.” 하고 함께 깨닫잖아요.
그게 우리가 원하는 바고 주께서는 그걸 피해서 오시고.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고백은, 이것은 제가 아이디어 내서 믿은 게 아니고 주께서 일방적으로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참 세상 일이 우리는 그냥 여러 번 이야기해요. “세상 내 마음대로 안 되네.” 그러면 우리는 그걸 감사하고 기뻐해야 돼요. 요한복음 21장대로 실행되는 걸 보고 아까 섬광처럼 감전돼야 돼요. 오늘도 내 원대로 안 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마지막 4페이지 봅시다. 13,4세기 하다가 왜 갑자기 셸링을 언급하느냐? 셸링이 ‘그것’과 ‘무엇’을 나눈 거예요. 그런데 둘 다 동일한 원천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셸링의 이야기입니다. 셸링은 이 세상에 왜 악이 있고, 왜 불의가 있고, 왜 죄가 있느냐는 그 문제에 대해서 앞에 있는 어떤 철학자나 신학자들이 만족할만한 해답을 주지 못했다는 걸 알았어요.
이 세상에 신이 만들었다는데 왜 악이 있느냐? 신이 만들었으면 왜 악이 있느냐고 물으면 돼요. 이런 게 어려워요. 신이 없다면 물음을 어떻게 돼요? 신이 없는데 양심대로 사람들이 왜 있습니까? 이것도 질문거리가 돼요. 그러면 신도 있고 악마도 있고 둘은 섞이지 않는다. 그게 조르아스터교입니다. 그럼 그것 믿는지. 어거스틴이 처음에 그것 믿었잖아요.
신도 있고 악마도 있으면 창조 문제가 걸리네. 악마를 누가 만들었어요? 결국은 물음표밖에 없어요. 신은 누가 만들었느냐에 대해서 물음표가 있을 수 없어요. 신은 스스로 있었기 때문에 누가 만들었느냐는 물음에 해당이 안 돼요. 신 개념 자체가 막장이라니까. 신 뒤쪽은 없어요. 그럼 개념을 바꿔야 돼요. 신의 아들이라 하든지, 보조신이라든지, 두 번째 신이라든지. 그러면 두 번째 신은 누가 만들었지? 할 수 있는데 신은 누가 만들었느냐는 질문 자체를 빼기, 그런 것 이야기하지 않기로 동의된 상태에서 나온 것이 신 개념이에요.
악마는 누가 만들었는가는 물음이 되지요. 뭐 못 돼먹은 것 누가 만들었어? 못 돼먹은 걸 만들었다는 것은 못 돼먹은 게 또 있다는 이 말이잖아. 그래서 배화교는 이신론입니다.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문제에요. 오늘 오다가 착하게 생긴 수녀가 ktx에서 장시간 전화를 했습니다. 제가 또 갔지요.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안고 십자가 희생의 정신으로. “여기서 전화하면 안 됩니다.”하니까 수녀가, “예, 예.” 이렇게 했지요.
수녀가 ktx 안에서 조용히 소리하게 되면 할 수도 있다고 자기 지식 범위 내에서는 선한 일이 되지요. 나이 많은 할머니가 새로 생긴 육교가 있는지 모르고 무단 횡단해서 교통순경이 3만 원짜리 벌금 끊을 때 할머니는 텃밭 얼마나 가꾸어야 3만 원 나옵니까. 그럼 할머니가 육교 있지만 부정선거 했다고 박근혜 사퇴하라고 일부러 무단 횡단한 거예요? 차 없으니까 걸어간 거예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죄와 의, 악함과 착함은 결국은 무엇과 관련된 거예요? 소크라테스와 관련돼있는데 무지함이에요.
학교 선생님이 욕하고 화낼 때 무엇 때문에 무지합니까? 95%가, “이 바보야. 이 문제도 못 푸느냐.”고 화내잖아요. 자기 집에서는 착한 아들인데 학교 오면 욕 얻어먹는 거예요. 수학문제 못 풀어서. 그러다가 병이라도 나면, “공부 못해도 괜찮다. 몸만 성하면 된다.” 그것 진심입니다. 그런데 퇴원하고 나서도 그렇습니까? “남들 이 시간에 공부하고 있어. 티비 왜 봐. 빨리 들어가서 공부해.” 그럴 때 그 부모가 선한 행동한 겁니까? 부모가 신이 아니잖아요. 세상의 모든 걸 모르잖아요. 모르는 상태에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화내면 자기 딴에는 선한데 그게 주님 보시기에 선하겠느냐 이 말입니다. 안 선하지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선과 악이 있다는 판단기준에 문제 있지요.
그래서 셸링은 인간적으로 선과 악은 안 된다는 거예요. 안 되는데 희한하게 선과 악을 인간적으로 안 나눈다고 해도 대립요소가 있잖아요. 낮이 있으면 밤이 있지요. 요한복음 1장에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다. 특히 셸링이 보기에 예수님이 하나님인데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대접 잘 받고 곱게 늙어 돌아가셨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면 선과 악이란 인간들이 모여서 판정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간에 대립요소는 있지요. 그 대립요소가 어디서 나왔느냐에 대해서는 기존의 신학자나 철학자들은 해답이 없단 말입니다. 셸링의 철학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기존의 인간들은 대립요소의 원천을 못 찾지요. 이 대립요소를 신속에 집어넣자는 게 셸링의 신학입니다.
그러면 대립요소니까 갈등이 있을 것 아닙니까. 신 안에 대립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신 스스로 대립요소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헤겔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어요. 신이 스스로 자기의 대립자를 만들고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음으로 말미암아 나온 그 펑퍼짐, 그렇게 대립했던 모든 것이 창조로 이어지는 그 세계가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대자연이란 창조세계입니다.
셸링과 기존의 신비주의와 어떤 차이가 있지요? 기존의 신비주의는 내가 존재한다. 신이 존재한다. 존재에서 발전된 것이, 내가 실존한다. 신도 실존할 것이다. 또는 내가 자연과 하나다. 마찬가지로 신도 자연과 하나일 것이다. 스피노자나 부르노나 에크하르트나 쿠자누스나 전부 다 인간이 곧 신이고, 자연도 신이고 그렇지요.
셸링은 그게 아니지요. 전에는 대립된 것을 합일로 바꿔서 그러니까 자연세계는 대립해도 신은 그걸 하나로 봐서 뭉쳐졌다. 그걸 오히려 셸링은 그 대립을 자연으로 끝나고 해소되는 게 아니고 그걸 신에게로 가져가는 거예요. 그걸 다시 자연세계로 끄집어내면 자연 속에 대립이 있는 것이 더 정당하고 자연스럽다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셸링은 말합니다. 그게 고통이다. 고통 받는 게 있기 때문에 신이 계시다. 참 은혜롭지요. 하나님이 계시면 어쩌면 내 하는 일이 안 되고 꼬이고 가난하고 어렵고 이러느냐 말이지요. 어떻게 주께서 살아계시면 복음 전하는데 안 도와주시고 안 맞춰주시느냐 하는데 셸링은 욥을 봐라. 욥의 고통 속에서 숨어있는 진짜 신을 발견하는 거예요. 신학자 아니에요. 철학자입니다.
질서라는 것은 반드시 폭력적인 것을 수반한다 또는 부과한다. 그리고 늘 폭력과 접하고 고난과 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신의 내부와 접하고 있는 순간이라고 보는 거예요. 이 셸링이 원래 피히테 계열입니다. 피히테는 인간이 아무 일도 안 하고 내가 누구냐, 신이 누구냐, 존재가 무엇이냐, 자연이 무엇이냐? 도 닦듯이 하는 건 필요 없다는 겁니다. 칸트는 맨날 왔다갔다, 왔다갔다. 칸트는 자기가 사는 도시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어요.
그렇게 하는 것 아니고 사행事行이라 하는데 인간이 마음껏 행동하는 그것을 통해서 내가 누구냐를 찾을 때 앉아서 찾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는 속에서 찾자. 그러면 내가 행동하는 모든 행동이 결국은 내가 누구냐를 증명하는 식으로,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식으로 되돌아오더란 말이죠. 물마시든지 또는 아무리 남을 사랑해도 결국 나를 생각하지 않고 하는 행동은 없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그런 일은 없는 거예요. 오른손이 하면 반드시 이미 왼손이 알아차리게 돼있고 결국 내가 했다고 마지막 귀결되는 겁니다. 그래서 피히테 철학은 간단해요. 나는 나다.
그렇게 될 때 셸링은 선배 되는 피히테 보고 그러면 고유적인 대자연의 것이 빠져있지 않느냐? 대자연을 겸해 보면 나는 나란 것이 아니고 자연은 자연이다. 더 나가서는 자연 속에 고난과 폭력, 쉽게 이야기할게요. 내가 나라고 하면 깔끔하게 모든 게 정리가 돼요. 글 쓰는 것도 나를 위해서. 누가 썼지? 내가 썼고. 이걸 대자연 속에 나를 집어넣으면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대자연과 더불어서 하게 되면 해답이 안 풀려요. 지금 미국에 폭풍이 일어났다? 왜 일어났어요? 나와 관계가 너무 멀어요. 안 풀려요. 장성택이 왜 축출됐습니까? 나 때문에 그랬습니까? 이게 연관성이 없지요. 연관성을 있게 하려면 나는 나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셸링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대자연과 되나, 안 되나? 안 되는 건 마찬가지잖아. 그럴 때 셸링은 말하기를 대자연 자체가 안 되는 것끼리, 대립자끼리, 갈등을 일으키는 서로 안 맞는 것들끼리 요동치는 바다지요. 그게 바로 우리가 제대로 지식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신의 솜씨라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이용할 생각하지 말자. 아프면 그냥 아프면 되고, 암 걸리면 암 걸리면 되는 거지. 낫겠다는 건 욕심이 되는 거예요.
모든 것은 그냥 흘러가는 데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된 것처럼 돌고 도는 것처럼 물레방아 인생처럼 그냥 살아가는 거란 말이죠. 살아가면 고통이 오는 게 아니고 살아가는 자체가 이미 대립자 요소를 품고 살아가는데 그것이 전개되는 것이 내 인생인데 이걸 누굴 탓하랴. 참 은혜롭습니다.
끝으로 이걸 복음적인 평을 해야 되겠지요. 방금 셸링에 의해서 아까 시편74편 5~7절 이야기가 나옵니까? 셸링은 뭘 놓치고 있어요? 구체적인 지적, 예루살렘, 성소, 주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체적인 것이 없지요. 왜 없느냐 하면, 십자가 고통으로 구원받지 내가 이 땅에 고생했다고 구원받습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면 나의 고통과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연결할 수 있는 셸링이 제공 못하고 있지요. 고생 많이 했으니까 이것도 신의 뜻이다. 이래서 구원받습니까? 신비주의의 한계잖아요.
뭐가 빠졌어요? 언약에 의한 성령의 역사가 빠졌지요. 성령의 역사가 들어가게 되면 셸링이 돼요, 쿠자누스가 돼요, 부르노가 돼요, 에크하르트가 됩니까? 성령의 역사는 나 말고 구체적으로 이 땅에 누가 오셨다? 십자가, 그분의 피가 아버지 앞에 어린양의 피로서 언약 피가 돼요. 그 피가 반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 겁니다. 이걸 철학자가, 과학적으로 할 수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보면 나옵니다. 모든 세상의 철학을 꺾어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려 하심이라고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한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참 뭘 많이 알아도 십자가는 여전히 성령이 아니면 깨달을 수 없는 복음인 것을 다시 한 번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들 십자가 늘 바라보면서 십자가 때문에 살아있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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