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10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9-신비주의
20131210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9-신비주의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1210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9-신비주의
(강의:이근호 목사)
중세 신비주의의 계보. 신비주의란 그냥 자신이 도 닦는 것으로 보면 되는데 여기에 계보가 있다고 했을 때 이것은 자신이 신비를 찾더라도 선배들이 했던 신비성을 참고로 한 것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보통 신비라 하는 것은 홀로 책도 안 보고 공부도 안 하고 깊은 산골에서 깨달음에 이른다 하는데 그건 심령주의라 하거든요.
신비주의의 계보라는 말을 하는 것은, 학자들이 그렇게 붙였는데 신비란 말은 헬라 말로 뤼에인λυειν이라 해서 눈을 감는다. 눈을 감는다는 말이 일단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눈을 뜨게 되면 보이는 게 있잖아요. 그런 것들로부터 안 들키는 곳에 눈을 감아버리죠. 너희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전부지, 우리는 눈을 감았기 때문에 눈 뜬 사람들이 미처 보지 못하는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것, 그게 바로 신비주의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영적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신비주의가 아니에요. 모든 것은 헛것이라고 공부도 안 하는 이것도 신비주의가 아니고. 눈에 보이는 현상적으로는 한계가 있는 거예요. 너 잘났다, 나 잘났다하니까. 그럴 때는 눈을 감음으로써 모든 것이 어디서 나는가를 직관적으로 찾아 나설 때는 눈을 감아버리죠. 눈을 감았을 때 나타나는 그 무엇이지요.
뤼에인이란 헬라 말인데 눈을 감는다는 뜻입니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은폐돼있다. 이러한 사상이 중세에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중세에서 왜 일어나기 시작했느냐 하면, 교회가 그만큼 성에 안 찬다는 뜻이지요. 교회가 하는 모든 것들이 신비성, 경건성이 떨어진다는 불만이겠지요.
교재 1페이지에 보면,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키파 혹은 위디오니시우스. 2세기 말에 벌써 교회를 버리고 수도승으로 나간 사람들이 있어요. 이미 이야기했지만 에크하르트 같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교회제도나 형식, 직분, 교회에서 하는 성만찬으로는 신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당연히 교회에서 이단 취급했는데 이단재판 받기 2년 전에 죽었어요.
왜 신을 찾는데 눈에 보이는 것으로 찾느냐? 그것이 제대로 찾아지느냐? 교회 직분 맡고, 성만찬 드리고, 예배드리는 것으로 신을 찾는 게 아니다. 직관이다. 눈을 감아라. 직관으로 신을 직접 찾아야 되지 형식적으로 모여서 찬양하는 그것은 요새 말로 하나에 이벤트란 쇼에 참석하는 거잖아요. 축구시합 관람한다고 구원받는 것 아니잖아요. 물론 축구경기는 신의 지배하에 하더라도 축구 보니까 구원받았더라. 이럴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성만찬 참석하고, 예배 참석하니까 구원받았다. 이러지 말란 말입니다. 기도회에 참석했는데 은혜 받았다. 은혜가 기도회 참석한다고 받느냐고 그런 것을 아주 용감하게 에크하르트는 외쳤어요.
에크하르트가 그렇게 할 때 이미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디오니시우스 아레오기파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그전에 플로티누스가 있었다고 하지만 플로티누스는 기독교가 아니에요. 철학적으로 한 사람이고. 기독교 내에서 신비주의는 디오니시우스 아레오키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신비주의자가 된 것은 최초 신비에 대해서 글을 남겼기 때문에 그렇지요. 그전에 광야나 사막에 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글로 남긴 거예요.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지요. 신비를 글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그런데 글로 남긴 것이 의외로 신비주의의 최초가 되고 말았다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세계를 말로 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선배들의 신비에 대해서 참고할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겁니다.
이게 참 중요한 것이라 이야기 안 할 수 없는데. 일반교인이 요한계시록을 봤다고 합시다.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상한 이야기들, 알곡을 묶고, 가라지를 묶는다고 할 때 묶는다는 게 뭐냐? 그게 궁금한데 기존의 목사들은 아무도 안 가르쳐주는데 신천지는 가르쳐주더라. 성경에 사자가 나오는데 사자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런 걸 자기들 마음대로 영적이라 하는데 그걸 연구하는 선배가 오리겐이라는 사람이에요.
오리겐은 성경에 나온 모든 것을 삼위일체와 관련된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영적 해석은 간단하지요. 모든 성경에서 정답을 안다는 것은 거기서 삼위일체적인 것을 그럴싸하게 꾸며내면 되겠지요. 1대지, 2대지 이런 식으로. 예를 들어서 사자가 뭐냐? 사자는 용감하다. 그래서 성도가 되면 용감하다. 이런 식으로 말 만들어내는데, 그런데 무지한 일반교인들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신천지에서 또는 고상한 마지막 때에 목자를 통해서 신비롭게 풀어주니 감사합니다. 풀어준다는 말도 수상하기 그지없는 말인데.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 때 언어로써 성령의 신비라 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성급하게 언어 속에 신비가 있다. 성경을 풀면 신비가 같이 풀린다. 이런 선입감은 크게 잘못된 겁니다. 엄청나게 잘못된 거죠. 그리고 그들은 초조해하는 게 성경말씀을 풀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는다. 푸는데 거기에 성령이 동원된다는 겁니다. 몇 퍼센트 풀리는 게 성령입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성령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는 기준이 있잖아요. 그 기준이 십자가이잖아요.
구약에서는 언약을 근거로 해서 언약을 적용시키기 위해서 성신으로 역사했고, 신약에는 십자가 새 언약을 근거로 해서 우리를 책망하면서 새 언약의 질서가 덮임으로 말미암아 천국화시키는 그 작업을 성령께서 하시는 거예요.
이것이 성경적인데 세상 사람들은 영이라 하니까 영이란 자체가 이미 신비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것 말고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책이니까 온통 우리가 생각하는 영으로 뒤덮여있으니까 그것을 풀어주면 성령 받은 목자고, 그걸 못 풀어주면 삯군 목자가 되고. 그렇게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신천지가 그대로 이용하는 거지요. 기존교회에서는 이야기 안 해주지요. 우리는 풀어줍니다.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이야기합니다. 말씀은 저주입니다. 말씀은 그야말로 영적인데 이것이 왜 영적이냐 하면, 인간을 저주하고 심판하는 판결문이에요. 그래서 성경 앞에서 심판 받고 나는 저주받아야 마땅하다고 나오면 그게 성령의 역사에요.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어디로 집중하느냐 하면, 십자가로 달려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했단 말이죠.
우리가 보기에는 구약의 약속이 안 이뤄진 것 같은데 왜 다 이루었다고 하느냐? 구약 말씀 자체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서 일어난 일을 전하기 위해서 쓰인 글이기 때문에 인간의 글을 사용해도 그 내막 진리는 누가 아느냐 하면, 아버지 알고, 아들 알고, 성령님 아실 거고. 그분밖에 몰라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런데 그분만이 아는 그것이 우리 쪽에서 접촉이 되려면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장담하느냐?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오잖아요. 인간의 어떤 지혜로도 알 수 없는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십자가에요(고린도전서 1장 18~25절). 세상 보기에는 십자가가 말도 안 될 정도로 굉장히 어리석게 보이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일부러 그래요. 막아놓고 구원받는 자는 오직 그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구원받는다.
그러면 우리가 그 말씀을 대하면 소위 영적인 해석, 신비로운 해석 자체가 우리의 어리석음을 그대로 폭로되는 거예요. 얼마나 어리석으면 영적, 영적 해석. 문자적 말고 영적 해석에 얽매이겠어요. 영은 우리 쪽에서 다가가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나온 영이 성령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능력이 임하면 그것이 성령을 통해서 주님 쪽에서 십자가 앞장세워서 우리에게 다가오면 그게 성령이지 그 외에는 성령의 역사 없습니다.
꼭 성령 안 받은 자들이 영적 해석이라 해서 사람들을 신비에 몰아넣고 하는데 그러한 오늘날의 현상들이 옛날에도 못지않아요. 기존의 교회제도가 썩었다. 따라서 교회제도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고 선언하고 여러분의 직관을 믿으세요. 여러분이 직접 신을 찾을 수 있습니다. 모든 있음을 없애는 무의 세계로 들어가서. 에크하르트의 주장입니다. 에크하르트의 이러한 사상도 성령의 역사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아요.
이것은 인간이 현세에 나타나있는 이성의 한계를 스스로 그 한계 자체를 느끼는 이성이 또 어떤 영역을 설정한 것에 불과하다. 그게 18세기의 칸트철학이에요. 인간의 이성 자체를 판단해보자. 인간의 이성이 아무리 똑똑해도 신과 영혼과 자유에 대해서는 손 못 댄다. 그쪽 세계는 예지계가 되어서 요새 말로 천국이지요. 그것은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예지계 말고 이 세상은 뭐냐? 현상계라 했습니다. 현상계는 자기 한계성 안에서 이성으로 움직이는 모든 과학적인 것. 현상계는 오성과 이성으로 돼있다. 오성은 뭔가 딱하고 깨닫는 것. 이성은 따지는 것으로 원인이 뭐고 결과가 뭐고, 지구는 어떻게 되고, 방정식이 어떻고, 중력의 법칙이 어떻고, 물은 왜 흐르고, 인간은 세포로 돼있고, 세포는 어떻게 움직이고. 이런 모든 것을 따지는 게 이성이에요. 그런데 그 이성적으로 따져도 오성을 다 장악하지 못해요. 거기서 마치 바늘처럼 뾰족하게 이성이라는 합리적인 질서에 구멍을 뚫어버리고 뭔가 쳐다보는 것, 그게 오성이 되는 겁니다.
그 인간의 이성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주셨다. 늘 방황하게 만드는 이성도 주신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실천이성입니다. 윤리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주는 명령이 있습니다. 정언명령. 조건부로 지키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무조건적인 의무인데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이것 안 하면 복 줍니까? 따지지 않고 무조건 안 해야 된다는 사실이 주어진다는 그것, 그것은 바로 신의 음성이다.
그걸 물자체라 하는데 어쨌든 나중에 이성을 넘어서면 판단력비판이라는 게 있어요. 판단력 자체를 판다는 하는 숭고함, 드디어 종교가 나와요. 이성이 넘어서는 종교의 영역입니다. 신을 숭고한 마음으로 바라볼 때 이것이 신이 주신 이성의 빛나는, 이성이 신과 닿을 수 있는 것이라 봅니다. 상당히 칸트가 신비롭지요. 그리고 칸트의 주장에 이어서 그 뒤에 신학자들이 신칸트주의라는 신학을 펼칩니다. 리츨 같은 사람들.
그렇게 신칸트주의로 새로운 신학을 하게 되면 그전에 교회는 뭘 쥐고 설교했느냐? 그 당시 교회는 개신교가 출발해서 다듬어놓는 게 있어요. 그게 신앙고백서라는 게 수십 개 나와 있었어요. 그걸 반복해서 학습하는 걸로 끝났어요. 거기에 창조론, 계시론 다 나오잖아요. 목사가 이것 가르치는 것도 목회 수십 년 해도 다 못할 정도니까 다른 걸 볼 필요가 없잖아요. 그렇게 가르침으로써 어떤 효과를 얻느냐 하면, 교인들로 하여금 그 교회를 떠나지 않고 그 교회에 계속 출석하게 만드는 목회적인 효과를 노리는 겁니다.
그런데 칸트가 저렇게 나오면 목사한테 안 배워도 인간에 이성이 있으며 이성 속에 신이 들어있다면, 교회 갈 필요가 뭐가 있어요. 신의 음성에 순종하면 되지. 기존교회와 칸트의 이러한 갈등이 결국 중세에서도 마찬가지란 말이지요. 중세의 신비주의가 기존교회에 동의할 것 같으면 절대로 신비주의 같은 게 나올 이유가 없잖아요. 교회에 이미 삼위일체 다 돼있겠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예배순서 다 있겠다, 뭐가 문제에요? 그런데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그런 제도와 형식에 언제까지 매여 있지 않는다는 겁니다. 신과 영혼과 자유는 어떤 굴레도 어떤 제도도 다 담을 수가 없게 돼있다. 넘어서게 되지요.
그래서 디오니시우스는 세 가지 성사만 주장합니다. 세례, 성체, 견진. 세례는 아시지요. 성체는 성만찬 하는 것. 견진은 세례 받고 이미 교인 됐다고 교회에서 확정하고 난 뒤에 성령을 날마다 충만하게 받기 위해서 특별 미사도 받고 교육도 받아요. 그리고 세 가지 신분이라 해서 수도승, 일반그리스도인, 예비자들. 벌써 교회 내에 계급이 있지요. 이 모든 죄들은 지속과 유출과 귀환으로 구성된다. 이게 뭐냐 하면, 하강할수록 말이 많아지고 상승할수록 말이 줄어든다.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디오니소스는 플로티누스의 사상을 받았거든요. 세상은 원이고, 이것은 에크하르트와 쿠자누스 뒤에 나올 부르노 다같이 이야기한 겁니다. 중심이 있고 현실이 있으면 특징이 뭐냐 하면, 중심과 현실이 안 끊어진다는 겁니다. 이게 안 끊어져야 이동할 수 있어요. 여기 영혼이 있는데 이 영혼이 수동적인 영혼으로 움직이는 겁니다. 이게 나중에 보나벤투라라는 신비주의자가 나와요.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시대에요.
플로티누스가 영혼의 움직임을 발견했는데 수동적 관조와 운동의 현상. 관조한다는 것은 도 닦는다고 보면 돼요. 수동적이잖아요. 그것 말고 능동적으로 움직일 때 신비주의가 드디어 발생이 되지요. 가만있으면 안 되고 뭔가 찾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능동적인 영혼으로써 중심 되는 신을 찾아가는 이러한 방식을 생각했습니다.
그게 아폴로시스와 에노시스라고 있는데 처음에 이 말이 어렵지만 번역하면 쉬워요. 단순함과 합일. 합일이 되려면 모든 쓸데없는 것을 다 끊어내면 합일에 이르는 것이 신비주의의 방식입니다. 신비주의는 신에게 어떻게 합일하느냐는 것인데 이것이 더불어 깨닫는다는 등 나중에 여러 가지 변형되지만 근원은 플로티누스에서 나온 합일이에요.
어떻게 합일하느냐? 간단해요. 단순함이에요. 단순하려면 복잡한 걸 끊어내면 되겠지요. 복잡한 것이란 성만찬, 기도 이런 것. “식사하기 전에 기도해야지. 사도신경 외우시고, 설교도 듣고, 성경공부 해야지.” 전도, 헌금 이런 것도 다 복잡한 거예요. 다 끊어버려야 돼요. 가장 단출한 것만이 신에게 합일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단출한 게 어디까지 단출해야 하느냐? 이제는 시간도 단출해야 돼요. 그러면 관조, 묵상을 할 때 몇 시간해야 됩니까? 몇 시간도 길어. 그것도 복잡해. 그럼 꿇어앉아서 할까요, 서서 할까요? 그런 것도 복잡해.
그럼 어떻게 한다? 순간이에요. 전부 다 단출하게. 하여튼 단출하게. 순간이니까 1초도 아니지요. 어떤 사람이 인도의 종교를 연구해서 순간을 조사해보니까 순간이 0.3초라고 하는데 0.3초보다 0.1초가 더 순간이지요. 말도 안 되지요. 흔히 인간들 의식 속에서 0.3초를 순간으로 느끼고 그것보다 더 짧으면 인간의 의식으로 간파가 되지 않으니까 한계선이 0.3초라 이 말입니다. 아무리 침묵의 소리라 해도 음파가 있더라도 인간의 귀가 한계가 있어서 못 듣잖아요.
순간순간 신의 존재를 느끼는데 그냥 존재한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중요합니다. 존재보다 현존재가 더 많고, 현존배보다 실존이 더 많고, 실존보다 현실이 더 많다. 이걸 예를 들면 존재는 보이지 않는 것이고, 현존재는 나타난 것으로 걸상, 책상 같이 현존재는 여기 있는 것. 실존은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 현실은 생각하고 움직여서 만들어낸 모든 것. 현실이 제일 풍성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많을 것일수록 가치가 떨어진다는 겁니다.
셸링이 이런 이야기했어요. ‘그것’과 ‘무엇’이 다르다. 그것이란 존재를 이야기하고, 무엇이란 가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 돌멩이는 있어도 가치 없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있다면, “실례지만 뭘 하시는 분입니까?”라고 묻지요. 돌멩이한테는 왜 그걸 안 물어요? 존재는 있지만 가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에게는 존재+가치가 있는 거예요. 당신은 무엇이냐고 물을 대상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신을 찾아갈 때 그동안 교회에서는 신이 존재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신이 존재하다는 것은 의미 없다는 겁니다. 셸링이 이야기하기 전에 신비주의도 다 이야기한 거예요. 신이 어떤 가치를 품고 있느냐를 봐야 된다는 겁니다. 이걸 플라톤도 이야기했고 어거스틴이 노골적으로 강조한 거지요. 존재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품고 있는 가치에 의해 존재의 질이 차이가 난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같은 교인들이 있다. 이 집사, 박 집사가 둘 다 교회에 왔으니까 둘 다 똑같은 인간입니까? 아니에요. 한쪽은 교회 봉사 잘하고, 한쪽은 그냥 왔다 갔다 한다면 어느 것이 하늘나라에 보시기에 가치 있다고 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교회에 봉사하는 게 가치 있지요. 뭔가 자기의 존재를 보여주는 자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 없고 존재+가치, 흔히 말하는 달란트, 이제 이해하기 쉽지요.
가치를 보여줄 때 신에게 가치 있다고 본다면 그렇게 판정하는 하나님은 존재로 받아주기를 원해요, 가치로 받아주기를 원합니까? 가치를 받기를 원해요. 어떤 인간도 가치로 평가하시는 그 하나님마저 우리는 가치로 봐야 되지 존재로 봐서는 안 된다. 가장 좋은 가치는 선이잖아요.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가치는 최고의 선이라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선이냐? 하나님한테는 악이라는 없을 정도로 선이라는 겁니다.
그럼 어거스틴의 후계자들은 신비주의자들이 어거스틴을 염두에 두고 존재의 합일이 아니고 가치의 합일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가장 선하게, 가장 가치 있게 하려면 순간순간 쓸데없는 데에 신경 쓰면 되느냐 하는 겁니다. 내년 6월에 월드컵 조 편성과 하나님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그게 바로 복잡한 거예요. 그걸 어떻게 합니까? 잘라버려야 되는 거예요. 어떻게? 단순함으로.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이 신비주의가 이렇게 크게 번성하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신비주의의 가치와 뭔가 들을 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결국 신비주의의 가치는 뭡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데 그동안 쓸데없는 세속에 빠져서 무가치하게 하나님 영광에 안 되는 쪽으로 그동안 살아왔음을 회개한다는 근거가 신비주의에서 마련되니까 일반대중들이 관심을 두는 거예요. 일반목사들은 맨날 성만찬, 전도 일반교인들은 그게 전부고 하나님께 영광인 줄 알았더니만 신비주의는 깔끔해요. 산뜻해요. 꼭 산소 같아. 정말 신비주의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겁니다. 단순함이 가치를 높인다는 겁니다. 신비주의가 뜰 수밖에 없지요. 교회 가면 모두 구원받는다는데.
이러한 사람들을 우리가 공부하고 있다는 것은, 이런 현상이 오늘날도 일어날 수 있고 일반교인들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교회 다니는 것보다 더 하나님께 가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미리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까 신천지 해석 예를 들었지요. 마찬가지거든요. 기존교회에서 내 궁금증을 만족시키지 못할 때 누가 만족시킬까? 나는 너희들과 다르게 신을 가치 있게 섬기고 싶다는 신비주의를 요청하는 욕구가 인간에게 있게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기존교회는 어떻습니까? “그런 것 하면 안 돼. 그것은 잘못된 길이야.” 그래서 일단은 억눌렀지만 억누른 것은 용수철에 불과한 거거든요. 억누른 것은 사라진 게 아니에요. 놓으면 몇 배나 더 충돌해서 터질 수 있단 말이에요.
신비주의는 전부 다 단계에요. 보나벤투라는 육체적 시간, 영혼적 시간, 정신적 시간이 있어요. 육체적 시간은 실제 눈에 보이는 시간, 영혼의 시간은 자기 성찰하는 시간이고, 정신의 시간은 명상. 그게 3단계인데 쿠자누스는 6단계, 헤겔은 14단계까지 이어졌어요. 불교도 마찬가지고. 지금 개척교회에서는 빨리 성공하려고 이런 수법을 도입해서 제자훈련 10단계인가 있잖아요. 단계라면 사람들이 좋아해요. 뭔가 심화학습 받는 느낌이 들잖아요. 남이 못하는 걸 앞서서 한다는 우월감, 종교적인 자긍심.
생빅토르 리사르(1123~1173)를 봅시다. 교재 1페이지 중간에 보면, 인간의 영혼 안에는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인 하늘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두 가지 힘 이성과 감성이 있다. 리사르는 야곱과 두 아내와 몸종으로부터 얻은 비유를 통해서 연합한다. 명상에 이른다고 했어요. 야곱은 영적으로 하나님, 야곱의 아내 레아는 감성, 라헬은 이성, 레아의 하녀 실바는 감각, 라헬의 하녀 빌하는 상상, 레아의 일곱 자녀는 르우벤은 고통의 두려움, 시므온은 죄와 슬픔, 레위는 용서와 희망, 유다는 의의 사랑, 잇사갈은 내적 달콤함.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주장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걸 할 때, “은혜 되면 되지. 우리가 어디 나쁜 걸 가르치나.” 두 마디면 끝나버려요. 뭘 했든 간에 이걸 외우고 은혜 받으면 그만이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은혜 받는다는 게 뭡니까? 성령의 역사지요. 성령의 역사는 십자가를 근거로 해서 너는 저주받는다고 책망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인간이 상상하는 영은 바로 신비주의로 다가오죠. 단계를 밟아가게 되면 에노시스, 신과 합일. 존재적으로? 아니에요. 가치를 높여서.
왜 신비주의가 그렇게 유행하느냐 하면, 일반 대중들이 원하고 있다는 거예요. 와서 자고, 점심 먹고 가고. 재미 하나도 없는 거예요. 목사가 됐으면 나의 갈급함을 채워달라는 거예요. 이런 것으로 채워달라는 거예요. 신비주의는 마귀 역사에요. 이런 공부를 안 하게 되면, “맞아. 내가 목사로서 너무 소홀히 했구나.” 그래서 제보고 신천지에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 “목사님은 맨날 십자가 피, 십자가 피.” 그럼 뭘 어떡하라고? 그래서 속에서 올라오는 게 “그럼 십자가 싫어요?” 십자가 싫다는 것밖에 더 돼요?
십자가는 죽으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죽으려고 십자가 믿는 게 아니고 살아있는 나를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 이야기를 들은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한 곳에 치워놨단 말이죠. 진공청소기 사놓고 로봇청소기 또 사고. 그래서 자기를 풍성하게 채우게 되면 자기는 점점 더 확장되겠지요. 그러면 신에게 합일되겠지요. 가만 보면 인간 자체가 신비로운 신비주의에요. 이게 나중에 부르노에 나와요. 인간이 곧 신이라고.
에크하르트는 이 한 단어만 하면 돼요. 섬광. 뭔가 빛이 번쩍 비추는 게 섬광이에요. 에크하르트는 마지막 단계가 섬광이 비추는 단계, 섬광은 어둠 속에서 확실히 느껴지겠지요. 섬광 하니까 베드로후서 생각나지 않습니까. 베드로후서 1장 19절,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신비주의자들의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아마추어들이 아니란 말이죠.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 나오잖아. 샛별. 그걸 에크하르트는 섬광이라고 표현했고. 섬광이 떠오르려면 자기 마음이 어두움, 무. 에크하르트의 주장은 우리 속을 무로 봐야 섬광이 떠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에크하르트가 기존의 교회고, 성당이고, 사제고 다 무로 돌리란 말이죠. 그런 데 가지 말고, 종교제도, 기도 같은 것 의지하지 말고. 그냥 섬광이 떠오면 된다는 거예요.
섬광이 우리의 어떤 요소에 떠오르는가? 인간의 이성에다 떠오른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중요합니까, 이성이 있는 내 몸이 중요합니까? 바로 이성이 있는 내 몸이 중요하지요. 그래서 에크하르트는 말하기를 신이 인간의 형상을 만드는 건 맞는데 신만이 인간의 형상을 만드는 게 아니고 인간도 자기 형상을 만들 수 있다고 한 겁니다. 모든 것의 무의 세계에서.
에크하르트가 나중에 포이에르 바하라는 철학자와 통하는데 “신이 어째서 인간인가?” 그 문제에 대해서 기독교를 굉장히 욕하거든요. 신은 인간을 투사한 것이다. 배트맨 영화에 보면 푸른 창공에 배트맨 박쥐 투영이 보이지요. 낮엔 안 보이고 밤에 어두울 때 보이지요. 그래서 세상이 어둡다고 느낄 때 신은 번쩍하고 섬광처럼 떠오른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신이 곧 인간이고, 인간이 곧 신이다. 이걸 안 믿는 사람들이 들으면 진짜.
그래서 현재 우리가 신을 믿는 것은 있는 상태에서 믿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밝은 대낮에 배트맨 영상 찾는 것 같아서 신이 안 보이지요. 따라서 신이 없는 자리에 신이 등장하는 겁니다. 이것은 무신론과 통하지요. 유신론을 넘어선 무신론. 그러니까 무가 됨으로서 비로소 나타나는 하나님. 그게 에크하르트가 최초입니다. 에크하르트 멋있지 않습니까. 상당히 대단하지요.
그 다음에 쿠자누스 봅시다. 종교를 통해서만 모든 세계는 전쟁을 없앨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전쟁은 종교전쟁이기 때문에 종교가 하나 되면 전쟁도 사라진다고 본 거예요. 그럼 종교는 어떻게 만듭니까? 바로 쿠자누스가 신비주의 아닙니까. 종교라 하는 것은 하나에서 나온 다양성에 불과하니까 각자 종교로 출발점으로 하되 하나라는 지점에서 만나면 되잖아. 그래서 쿠자누스는 단계를 감각과 오성과 타성이라 했어요. 타성이란 타자성, 자기만의 독특한 개성을 유지하고 있는 남을 배제하는 타자성.
이 타자성을 초청함으로써 쿠자누스는 파고 들어갑니다. “왜 신은 하나인데 다양할까?” 하는 질문에 들어가요. 왜 신은 하나밖에 없는 사람은 각자 다 다른가? 우리는 그걸 다르다고 하지 말자. 타자성이라고 하자. 독자적인 개성이 있는데 개체 안에 하나님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면 우리가 그걸 왜 몰랐는가? 오성이 있다면 타자성이 있다는 걸 알고, 그 다음에 이성이 있고, 이성 다음에 관찰하면 된다.
관찰하게 되면 모든 개인 안에 바로 하나님이 들어있다. 개인 안에 타자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 싸우면 대립되겠지요. 대립된 속에서 동일성을 찾아내면 그것이 우리 속에 삽입돼있는 하나님의 신성함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쿠자누스입니다.
하나님이 들어있다는 걸 알게 되면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에베소서 2장에 나오는 성령의 공동체의 교회론 같아요. 각자 은사는 다른데 안에는 다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있지요. 그러면 어떻게 교제해야 됩니까? 자기는 다름을 내놓지 말고 나한테 있는 것을 꺼내게 되면 그것은 폐쇄적이지 않고 개방적이겠지요. 그 개방성이 모든 종교의 갈등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모든 대립성은 일원성 안에서 해소될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쿠자누스는 한 가지만 알면 돼요. 대립 속에 동일성. 그리고 달리 말하면 유한자 속에 들어있는 무한자. 이게 쿠자누스의 신비주의입니다. 도 닦고 그런 건 아니지요. 뭔가 자기가 깨달은 것을 늘어놓는 거예요. 그렇게 보면 이미 무한하신 신께서 유한 속에 들어왔지요. 이 말은 뭐냐?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이 계시잖아요. 모든 것 속에서 모든 것에 전체로 반사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불교에 화엄경과 유사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거울이 산산조각 났어요. 깨어진 거울조각 하나하나가 이 반송3동을 전체에도 비추고 쪼개진 조각에도 다 비추겠지요. 하나 속에 전체가 다 들어있는 거예요.
개 한 마리 죽었다고 여자 주인공이 울고불고 하잖아요. 오로라 공주에서 개 죽었다고 장의사 불러 관 맞추고. 개가 죽었는데 사람이 자기 아버지 죽은 것처럼 왜 웁니까? 개 속에 자기의 사랑과 모든 게 들어있지요. 드라마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만 쿠자누스는 그렇게 보지 않고 개 속에 우리 인생이 들어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들어있는 거예요. 개 같은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니까 그것이 죽을 때 하나님이 죽었구나. 그럼 개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이나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이니까 내가 죽을 때 개가 울 것이고, 개가 죽을 때 나도 울고 것이고. 그렇게 설명해야 세상을 신 안에서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다.
쿠자누스까지 이야기하다 보면 신학은 다 쓸데없는 거예요. 신학은 따지지만 우리는 직관으로, 인간의 오성으로 그리고 오성에서 나온 관찰로서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진짜 어떤 장애물 없이 신과 직접 소통하고 있고 진리를 깨닫고 있는 결과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31210a 부산강의.hwp (29.0K), Down: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