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70이레 논문(짐승에 의해서)131205-31강a-이 근호 목사
가락-70이레 논문(짐승에 의해서)131205-31강a-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70이레 논문(짐승에 의해서)131205-31강a-이 근호 목사
오늘은 어려운 것이 많이 나오지만 찬찬히 따라오시면 고맙겠습니다. 244페이지에 첫 번째 등장한 게 에피쿠로스라는 철학 학파가 나오는데 에피쿠로스학파가 뭐냐 하면, 세상의 시간의 최소단위를 생각한 거예요. 시간을 최소단위로 쪼갰다 말이지요. 시간을 쪼갠다는 말이 보통 어려운 게 아니잖아요. 1시간을 60으로 나누면 분이 되겠지요. 1분을 60개로 나누면 뭐가 되지요? 초가 되지요.
수메르문명에서 비슷한 겁니다. 원래 시간을 쪼개는 것은 농사짓는데 필요해서 쪼갠 거예요. 농사짓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별이나 달 그리고 해를 관찰했고, 그런데 에피쿠로스학파는 시간의 최소단위를 쪼개서하는 말이 어떤 운동도 일어나지 않고 정지된다고 보는 거다. 이것은 왜 그렇게 했느냐 하면, 참 이 사람들 어려운 시도를 했어요. 그게 뭐냐, 물질에서 영으로 어떻게 도약할 수 있는가, 그걸 시도한 겁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 했잖아요. 육에서 난 것은 육해도 인간들은 인간의 정신 사고는 어떻게든 육에서 영으로 한 번 점프를 해보겠다. 육에서 허무하게 육으로 끝나는 것은 아주 짜증스럽다는 거예요. 제대로 살았을 때에 영의 세계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야! 이게 영이구나! 맛보고 살아야 인생 진리를 알았다, 이렇게 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 영의 세계를 육으로서 만들어내려고 하는 겁니다. 참 우리 보기에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시도인데, 인간의 본성이라 하는 것은 육으로 만족하지 않고 영의 세계를 봐야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영의 세계를 보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육의 세계를 해가지고 육의 세계와 다른 것을 영의 세계로 하면 되겠지요.
육의 세계는 시간이 가요. 시간이 간다는 것은 모든 것이 변화 되니까 변화되는 그게 속이 타는 겁니다. 변화지 않는 스톱 되는 것, 시간이 멈춰버리면 변화지 않을 거잖아요. 시간가면 변화니까 시간이 스톱되면 변화지 않는 것이다. 그 변화지 않는 순간을 찰나를 노려서 변화지 않는 그 상태에서 도약을 시도하게 되면, 그게 아마 영적인 세계가 아닌가, 라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244페이지 중간에 보면, 어떻게 했느냐 하면, 시간단위를 대자연의 원자단위로 모눈형식으로 하는 겁니다. 모눈형식은 시간을 촘촘히 칸으로 지어놓으면 요 하나, 하나가 각 칸에 점유돼 가지고 요 순간은 뭐냐 하면, 요 안에서는 정지가 되지요. 시간이 정지가 되면 요거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육의 세계가 아니고 영의 세계가 된다. 순간에.
그럼 이걸 어떻게 시도할 수 있느냐, 의식과 정신집중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겁니다. 불교도 마찬가지고. 그냥 깨어있으면 자꾸 시간이 느껴지지만, 시간을 못 느낄 정도로 정신을 집중시켜 버리면 고 순간은 내가 지금 천년을 살았는지 백년을 살았는지 1초를 살았는지 그 시간 자체가 경계가 없어지지요. 모눈종이 요 안에 들어온 셈이 된다 말이지요.
그러면 시간이 정지돼 있으니까 자기는 신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내 안에 다 들어있으니 신이 되는 거죠. 이런 식으로 한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다가 옆으로 가잖아요. 아, 정신 차려야지! 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요리로 옮겨가잖아요. 옮겨갈 때 이걸 뭐냐 하면, 새롭게 또 운동이 시작되는 거예요. 이걸 비켜남이라, 운동이 시작된다. 이리 되는 겁니다. 운동이 시작되면 어떤 것을 알 수 있느냐 하면, A라는 모눈종이에 있을 때는 어떤 낯선 세계인데, B라는 세계에 가면 질적으로 새로운 세계가 되겠지요.
그러면 이걸 확대해서 보면, 오늘 12월 5일이지요. 12월 4일 날 해가 지고 12월 5일 날 아침에 해 뜨면 요거는 새날로 보는 겁니다. 새로운 날. 새로운 날로 보게 되면, 어제의 질과 다른 새로운 다른 질의 인생을 사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날로, 날로 하루, 하루가 새날이 되겠습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있잖아요. 마음가짐을 그렇게 살게 되면 하루, 하루 계속 새날이니까 그야말로 이것은 다시 한 번 가뿐한 마음으로 보람찬 하루일과를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정신의식으로 훈련시키면 된다는 겁니다.
이런 아이디어를 왜 끄집어낼까요? 사는 게 너무 힘들고 각박하고 어려우니까 정신적으로 어떻게 잘 정리한 게 인간을 각성할 수 있는 좋은 어떤 이론 같은 게 있으면 그 이론을 내가 외운다든지 그걸 적용시킬 경우에는 매일같이 씩씩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갈 수 있고 또 과거는 잊어버리고 새로운 날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새날을 질적으로 더 성숙된 삶을 살지 않을까라는 그런 아이디어 때문에 에피쿠로스가 그렇게 하는 겁니다.
에피쿠로스학파는 보통 쾌락주의라고 번역하는데 늘 즐겁고 늘 행복하고 늘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그러한 방법론을 연구하는 학파, 그렇게 되니까 하루가 시작되었어요. 12월 5일, 그러면 시간이 찰칵 찰칵 가겠지요. 하지만 어제하고는 단절시키는 겁니다. 단절이니까 이걸 ‘불연속성’이라 할 수 있죠.
여기서 제가 에피쿠로스를 거론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70이레를 할 때, 70이레를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 70이레를 그냥 역사적으로 보면 7+62+1 이잖아요. 어쨌든 간에 연결 지어 합쳐서 70이레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부러 칼자국 냈다 했죠. 7따로, 62따로, 1따로 했지요. 그러면 이것은 질적으로 단절된 하나의 관절을 뒀다고 보면 됩니다. 무릎의 관절, 탁탁 끊어지는 것. 7의 질이 62로 갈 수 없고 62가 1로 갈 수 없는 3토막 내는 끊어진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이유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해서 이야기한 겁니다.
오늘 아침에 대구에서 떠나려고 하는데 전화가 왔어요. 우리교회 교인인데요. 전화하기를 “목사님, 큰일 났습니다.” 하는 거예요. 큰일 났다는 말을 오래간만에 듣거든요. 복음 안에서 큰일이라는 게 없어요. 왜냐 하면 예수님 재림하면 큰일이고 예수님 재림이외에는 다른 큰일 없다 이 말이죠. 자기 죽는 것도 큰일 아니에요.
“큰일이라고 하는데 어떤 일입니까?” 이렇게 여유 있게 물으니까 “내 아내가 신천지에 빠졌습니다.” 하는 거예요. 신천지에 빠진 게 큰일인가! “신천지에 빠졌다고 누가 하던가요?” 상담원이 이야기했다는 거예요. “상담원이라는 게 누굽니까?” 신천지에 갔다가 나온 목사를 상담원이라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상담원이 기존 교단에 다시 돌아갔습니까? 따로 있습니까?” 그것은 모르겠다는 겁니다. 제가 “상담원 자체가 수상합니다.” 했어요.
왜냐 하면, 한국교회가 신천지보다 못해요. 모든 면에서. 그런데 신천지에서 빠져나오면 다시 기존교회 교단에 갔다하면 이건 더 나쁘게 됐어요. 그래서 진정시키고 ‘집사님, 걱정할 일도 아니고 큰일도 아닙니다.’ 했는데. 큰 일 났습니다. 한다는 말은 이미 자기 것이 있다는 거예요. 자기 것이 있으니까 그동안 자기 것 지킨다고 얼마나 불안, 불안 했겠습니까?
자기 것이 있을 경우에는 복음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요. 복음이라 하는 것은 자기 게 없어지는 거예요. 여기 3가지에 7이레, 62이레, 1이레, 자기 게 없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다니엘 중 모든 계시는 자기 게 없어요. 다니엘도 인자에요. 이름도 다니엘이 아니고 인자에요. 우리보고 뭐라 합니까? 성도라 하고 또는 우리 이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보고 이스라엘이라 하거든요. 이 말은 우리끼리는 사적인 게 없어요. 복음 안에서는 사적인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배정받은 모든 자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자리지 십자가 안의 자리지, 내 자리가 아니다 말이죠. 큰일이 터져야 큰일이 아니고 처음부터 큰일을 안고 살았어요. 처음부터 큰일 날 일을 품고 있다가 그게 공개된 셈이죠. 왜, 자기 것이 있으니까.
신명기 12장 5절 봅시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오직 너희 하나님이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그들의 약속의 땅에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이 상당히 중요한 대목인데. 약속의 땅이 뭐냐 하면, 누구 이름이 등기된 땅이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등기된 땅이에요. 약속의 땅이.
약속의 땅에 이게 층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래층은 뭐냐 하면, 이방민족이 처음에 있었던 원주민들, 이방민족이 살고 있는 땅이에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 여호수아가 그 땅을 차지하면서 전쟁이 일어나잖아요. 전쟁이 일어날 때, 가나안 원 민족들이 남의 땅에 들어와서 전쟁을 일으켰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누가 도둑놈이고 누가 피해자에요?
땅의 주인이 누굽니까? 가나안 땅이잖아요. 이스라엘이 도둑질하러 온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가만히 자기 집에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짐을 들고 들어와 보세요. 어떻게 합니까? 나가라고 해야지. 경찰신고 하던지 해야지. 같이 삽시다. 이런 게 없다 말이지요. 도둑놈인데 왜 같이 살아요? 안되잖아요. 기를 쓰고 내쫒아 보내야지요. 어디서 굴러온 민족들인지 모르지만. 내보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모압 땅에 가서 모압이 나가라고 했고, 압몬 땅에서 나가라 했고, 가나안 10족속이 나가라 했고, 누가 정당합니까? 가나안 땅 그 사람들이 정당하고 본토박이들이 정당하고 어디서 날아온 돌이 박힌 돌을 빼고 간다고 애굽에서 땅도 없이 와가지고 자기네 땅이라고 내놓으라 하면 그런 억지도 그런 억지 없잖아요.
그러면 우리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누구 편을 들어야 되겠습니까? 도둑놈 편들어야 돼요? 주인 편들어야 돼요? 주인 편들어야 된다고요. 만약에 도둑놈 편 되면 그 사람이 도둑놈 되는 거예요. 층이 두 층이 있습니다. 약속의 땅이 주께서 가나안 땅 싹 이사 다 비워놓고 이사 갈 때, 보통 전에 있던 주인이 자기 짐 다 가지고 가잖아요. 청소도 깨끗이 해놓고 들어가는 게 아니고 이미 살고 있는데 들어가요. 살고 있는데.
살고 있는 땅을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이것은 약속의 땅이라고 들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약속을 모르는,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너희들은 저주 받아야 돼! 라고 추방시키고 안 나가니까 심판해버리고 저주해버리고 하는 겁니다. 그 여리고성 누가 지었습니까? 여리고 민족들이 지었잖아요. 누가 부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부순 거예요. 남의 집을 자기들이 부순 거예요.
그런데 신명기12장 5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기 위해서 약속의 땅에 뒀다. 그럼 층이 두 층이 되는 겁니다. 하나는 같은 인간적인 안목에서 이 땅은 원래 사는 사람들이 주인이야, 라는 그런 역사적 안목의 질이 있을 거고, 그 위에 하나님의 약속이 우선이야, 원래부터 이 지구와 우주는 다 하나님의 건데 모든 땅이 자기 건데 그동안 가나안 민족한테는 잠시 살도록 그냥 배려했을 뿐이고, 이제는 천국 갈 진짜 백성이 오게 되면 자기가 알아서 기어야지, 알아서 그 땅을 비워둬야지, 아이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 백성들이시옵니까? 그렇다면 어서 기다렸습니다. 이 땅을 드리오니 마음껏 사시고 우리는 알아서 거지꼴로 나가겠습니다. 이리 되어야 되는데 그럴 사람 아무도 없지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무 집에 가서 야, 빌딩 좋다. 이거 이제부터 오늘부터 내 접수다. 하면 아이고, 그렇게 하세요. 이런 게 어디 있어요? 없지요. 그런 경우 딱 한 경우 있어요. 예수님께서 나귀타고 가야 되는데 탈 나귀 없을 때, “아이고, 나귀 없는데요.” 하니까 “어디 가서 주께서 쓰신다 하면 해줄 거다.” “주께서 쓰시겠습니다.”“아이고, 준비됐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
또 시므온과 안나도 마찬가지지요. 아기예수 보려고 동방박사도 그렇고 그래서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일으킬 사건, 원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을 영접하는 자와 그걸 못 알아보는 사람들의 구분 지음, 분리 작업, 그것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신명기12장 5절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여호와는 자기 이름이죠. 자기 이름이라면 이스라엘은 이름이 사라져야 됩니다. 이스라엘인으로서 사적인 욕심을 채우다가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이 있어요. 아간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사적으로 외투하고 금, 은 챙기다가 돌에 맞아 죽지요. 아까도 동영상 했습니다만,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께서 전쟁할 때에 이스라엘이 동참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먼저 하나님께 바친바 돼야 돼요. 이스라엘 자체가.
바칠 때는 자기 이름을 바치는 게 아니고 집단적으로 바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 이름으로 바쳐지는 거예요. 천국에서 우리가 예물 드린다, 할 때 성경에는 우리가 드리는 예물만 예물이 아니고 예물 드리는 우리 몸 자체가 예물이에요. 그게 로마서에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제가 이방인들을 제물로 갖다 바칩니다. 했거든요.
성도란 “야, 이 귤은 내거다!” 하고 따로 내거라고 챙길 나의 것이 있으면 여기가 마귀의 표적이 돼요. 귤이 내거다. 이제부터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감사합니다. 하면 마귀가 요걸 뺏어가요. 뺏어 가면 우리는 누구한테 섭섭해 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섭섭해 하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큰 일 났습니다.” 하는 거예요. 아내가 신천지에 빠지면 결국은 나중에 극단적인 제일 나쁜 상황이 뭐냐, 이혼하는 상황이잖아요. 이혼하면 되잖아요.
이 가정이 누구 가정이다? 내 가정이 된다면 이것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고 질적으로 이것은 내 땅이라 하는 게 있고 거기다가 하나님을 첨부시키려하는데 그런 하나님은 그냥 파스예요. 파스 아시죠? 붙였다가 필요 없거나 답답하면 떼어내면 되지요. 파스 붙이듯이 구원받을 수 없는 겁니다.
약속의 땅, 이것부터 정립이 되어야 되는데 정립하는 게 중요한데 누구도 이 이야기를 잘 안 하는데, 약속의 땅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자기 이름이 거하는 곳이에요. 그 이름이 거하기 때문에 약속의 땅의 특징이 뭐냐 하면, 개인이에요. 개인. 개인은 누구한테만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에게만 개인이 되고 나머지는 그냥 그한테 종속된 집단에 불과한 거예요. 약속의 땅의 특징이.
그래서 나중에 구원받을 때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지요. 몸은 누구입니까? 몸은 개인이에요. 예수님 개인이고 우리는 그의 몸에 달라붙어있는 지체라니까요. 지체. 그게 구약에 있는 바로 이스라엘과 하나님 이름과의 관계가 신약에서는 변동 없이 그대로 가는 거예요.
사적인 나의 것이 있으면 나중에 결국 잘못되면 큰 일 났습니다. 라는 그런 외침이 나올 수가 있어요. 큰 일 났다고. 지금 교회 머리 되신 예수님에게 무슨 이상 있습니까? 주님한테 아무 이상이 없으며 붙어있는 그 지체에도 아무 이상이 없는 거예요.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예수님 이름으로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지, 우리 사적인 행동 때문에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개인적인 행동이 우리한테 전체에 골고루 다 주워졌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는 겁니다. 십자가마을에 누가 질문했지요. 상급 차등 론. 그 상급 차등 론 없다 하는 것 우리가 알고 있지만, 다시 그걸 읽어보니까 또 기억나지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여성 두 명이 있는데 160Cm안 되면 모델로 채용 못합니다. 할 때 160이냐 160아래인가로 구분될 거 아닙니까. 그런데 159.9가 자기 누이동생이라면 어떻게 돼요? 합격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친척이냐 친척 아니냐로 또 구분되는 거예요. 160이냐 160아니냐 이 기준에다가 인간으로서 어떤 기준가지고 분류했다가 다른 기준으로 분류해버리면 또 다른 기준으로 또 다시 헤쳐모이는 거예요.
마치 천국에서 성경공부 많이 하면 천국 넣어준다고 했다가 귤 싫어하는 사람 지옥가라 이리 되면 또 귤 좋아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개인이 갖고 있는 속성 사적인 개인이 여겼던 속성을 일체 주께서는 천국 가는 기준으로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개인이 갖고 있는 재능 있잖아요. 흔히 말하는 달란트 이런 거. 일체 그것은 구원 받는 기준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그러면 구원받는 기준은 모든 개인에게 아무도 갖지 않는 기준으로 구원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기준은 인간 말고 외부의 다른 인물이 등장해야 되겠지요. 그 분이 누굽니까?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주게 되면 그건 구원이고 거지 나사로가 됐던 부자가 됐던 상관없이 구원이고 예수님의 의가 없어버리면 아무리 착하게 살고 장로로 봉사로 아프리카 선교해도 그건 소용없고 지옥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수요설교에서 했는데요. ‘복음을 모르면 구원 못 받습니다.‘ 복음을 모르면 구원을 못 받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복음에는 관심 없고 특정 교단이라든지 특정 파, 신천지냐 아니면 대한예수교 합동 측이냐 어떤 파에 소속되면 어떤 집단에 소속되면 그것이 자기를 구원을 보장해 주는 것처럼 그러고 싶은 거예요.
왜냐 하면, 복음을 알게 되면 그 안에서 자기 것이라는 게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주님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다.” 이 말은 주님도 살았습니다. 나도 살았습니다. 이런 뜻이 아니고 주님 앞에서는 내가 여기 있다는 그 자체가 날아가 버리거든요. 파일이 날아가요. 나는 어릴 때부터 어느 학교 나오고 고등학교 나오고 어릴 때 얼마나 은혜 받았고, 그 파일자체가 삭제가 돼서 없어요. 파일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온다 말이지요. 파일이 날라 가 버렸어요.
지난 시간에 한 것처럼 우리가 인생 살아온 그 모든 것은 주의 이름으로 약속의 땅이니까 주의 이름으로 배정받은 것이지 주께서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는 오해하기를 내가 가꾸어 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평생을 노력하고 애쓰면서. 사람들이 자기하는 일에 애쓰면 애쓸수록 자기에 대한 애착과 집착이 더욱 더 강렬해져요. 점점 더 복음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겁니다. 점점 더.
남은 저만큼 갔는데 나는 무슨 꼴인가, 차라리 자살해버릴까, 남은 저만큼 갔는데 나는 이것밖에 못 갔으니까 인생 내가 왜 살았지? 소주나 까먹고 한강에 뛰어내릴까? 이리 하잖아요. 뭐든지 이렇게 복음 앞에서는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 전쟁 앞에서는 아간은 없어야 돼요. 아간은 용서가 안돼요. 그래서 아간 죽을 때는 여호수아가 몰래 죽이는 게 아니고 온 백성이 전부 다 돌 들고 아간에게 던져서 돌무덤이 생겨버렸어요. 이것이 아골 골짜기입니다. 전설의 고향 아골 골짜기입니다. 실제지만.
모든 사람이 던졌을 때에 뭐냐 하면, 어떻게 너는 네 생각만 하고 우리 주님 생각은 안하고 주님 앞에서 감히 자기 생각만 따로 하다니 이것은 이 전쟁에서 패배해야 된다. 왜? 우리 몸은 바쳐야 되는데 딴사람은 다 받쳤는데 저 혼자 안 바친 거예요. 안 바쳤기 때문에 좋은 물건은 자기가 챙길 수 있는 따로 자기 것을 만들 영역공간을 항상 염두에 두고 전쟁에 참여한 거예요. 아간이. 다른 사람은 주님만 보고 갔는데 자기는 가고 난 뒤에 난 뭘 뷔페에서 그릇에 음식 담듯이 따로 챙겨서 주님 덕분에 나도 이익 봤다는 딴 생각을 가지려고 한 거예요. 그걸 백성들로 하여금 돌로 쳐 죽이게 한 거예요.
그렇게 따지고 보면, 참 뭔가 큰일까지 안 났지만 항상 큰일 날 수 있음을 걱정하는 사람은 또 돌로 쳐 죽임을 받아야 돼요. 아우~ 이런 일이라면 큰일 나는데. 이번 혼사 깨지면 큰일 나는데. 뭐 어떻고 큰일 난다는 이렇게 한다는 자체가 이미 마귀한테 지금 많이 시달리고 있는 거예요. 오늘 통화를 많이 했어요. 상담원에게 들은 게 있어서 이혼하게 되고 재산 다 날아가고 아주 조직적이고 이래가지고 해서 겁을 내는데 이야기 했어요. 아내가 거기 갔다고 이렇게 걱정부터 하지 말고 신천지가 뭐를 가르치며 무엇을 했기에 다른 데서는 만족을 못하고 거기에서 만족을 얻는지 이런 것을 남편 되는 본인도 같이 알아야 되지, 어쨌든 간에 목사님한테 거기에 가지 않고 여기에 남아있게 해 달라, 이렇게 해버리면 그러면 여기는 뭐예요? 여기가 천국이에요? 여기라는 게 사적인 공간이잖아요. 복음 모르면 구원 못 받는데 거기가나 여기 있으나 구원 못 받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름대로 결론내린 것은 문제해결은 단 하나밖에 없다. 복음이 들려지게 하는 것. 그동안 사는 게 바빠 가지고 복음에 신경 안 썼다가 복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 과연 복음으로만 구원받지 내 것, 내가 복음을 안다는 이런 거 가지고 구원 못 받고 복음으로만 구원받지 그 앞에서 나는 사라져야 될 존재이고 나는 내 자신이 잊어져야 돼요. 내 자신이라는 게 내거라는 게 없어져야 돼요.
내게 있으면 자꾸 마귀가 시험 한다니까. 흔들어버리고. 곤고와 핍박과 기근, 이런 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 잘 믿었는데 왜 이렇게 힘든 게 주어집니까?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것 없애기! 이러한 새로운 성질, 이것이 70이레가 보여주는 취지입니다.
다시 한 번 해 봅시다. 약속의 땅에는 밑에 아래층에 뭐가 있다. 가나안 땅이 있다. 그건 육신, 육에서 난 육이니까. 가나인 땅의 원주민들은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이 땅은 누구 땅인데? 내 땅인데 어디서 굴러온 게 어디서 이 땅을 침범해 놓고 하나님이 주신 우리 여호와 이름이 계신 곳이라고 엉뚱한 소리 하지 말라. 이 땅은 우리가 살던 땅이다. 너희들이 죽던지 나가던지 해라. 고런 게 있고. 그게 뭔 뜻입니까? 여호와가 누군지 모르겠고 하여튼 이 땅은 내 것이라는 거예요. 내 것.
거기에 반해서 들어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는 내 땅으로 되고 싶지 않은데 우리 하나님께서 이끄시네. 그러니까 이건 내가 원해서 차지한 땅이 아니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겠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쓰시겠다는 나귀처럼. 주께서 나도 쓰시고 이 땅도 쓰겠다는데 잠시만요, 여러분들 나가 주실 게요. 다 내보내야 될 판인 거예요. 그 전쟁이 뭐냐, 여호수아 전쟁입니다. 그 전쟁이. 그 전쟁은 지금도 되지요. 지금도.
우리 인생은 이 가정과 이 돈은 다 내겁니다. 하고 그리고 주께서 하시는 것은 “니 거가 어디 있어. 내가 배정해주고 내가 준거지. 이건 처음부터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너한테 준거야.” 라고 주님이 턱하니 주인공으로 들어오는 것과 이 싸움이 매일 우리 일상의 싸움입니다.
제가 아침마다 늘 외우고 기도하는 게 있어요. 주기도문을 아침마다 하는데 주기도문 시작부터 끝까지 나의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겁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땅에는 내가 내 스스로 나한테 먹일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에요. 주께서 먹여줘야 됩니다. 참새같이, 잡초같이. 키워주고 길러줘야 되지 내 것 가지고 먹고 살지 못합니다. 처음에 나오는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그러니까 완전히 뭡니까? 내 이름, 내 명예, 내 자존심, 내 체면 이런 것은 주님 앞에 고려의 대상이 안 됩니다.
우리를 아예 없다고 여기고 시작하는데 왜 자꾸 우리는 나 여기 있잖아. 자기 있다는 것을 자꾸 내세웁니까? 주께서는 보지도 않는데. 뭐가 있다고? 아닙니다. 이리 되어야 되지. 누가 있다고? 아니 없습니다. 네 몸은 네 몸이 아니고 내 몸인데.
제가 쓴 글에 우리는 살 권리가 없어요. 왜냐 하면, 우리를 살리게 하는 것은 주님의 자기 몸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기 몸을 자기가 살리고 있는데 우리는 완전히 오해해가지고 내 몸을 주께서 살린다고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내 몸을 주께서 살리는 게 아니고 내 몸은 없어요. 내 몸이 없고 주께서 자기 몸을 살려주는데 우리는 이 육신의 본성이 있어가지고 ‘아이고, 고마워라. 내 몸을 주께서 살리는구나!‘ 주께서 ’놀고 있네. 웃기고 있네.‘
그러다 갑자기 젊을 때 혈액 암 4기 걸려서 나중에 두뇌까지 전파돼가지고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전 남편이 와서 돌볼 수도 있고. 오로라 이야기에요. 주님의 몸입니다. 빨간 티 건 파란 티 건 상관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입혀준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고맙습니다, 하면 너 고맙습니다, 하는 말도 수상해. 복음에 대해서 알겠습니다, 할 건데 요런 거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면 확 뺏어가 버릴 긴데. ㅎ
참 성경이 이처럼 따지고 보면, 성경은 한 사람 이름만 남겨요. 주의 이름만 남겨지고 우리의 이름은 사실은 마귀가 쏙 들이민 이름이라니까요. 마귀가. 그래서 발로 주께서 차버려요. 우리는 우리 이름으로 기도할 자격이 안돼요. 뭐든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 했거든요. 우리는 우리 이름으로 기도할 그런 자격조차 입장조차 안 되는 존재다 이 말이죠.
그런 뜻에서 70이레를 이제 봐야 됩니다. 70이레는 아래층과 위층이 있는데 아래층은 육신적인 시간관념, 가나안 원주민들이 갖고 있던 시간관념. 내가 노동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무조건 내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지루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간단하게 시민대학에서 그동안 12강좌를 했는데 내일은 13강좌를 할 예정인데, 강의한 것을 간단하게 1분 동안 요약할 게요.
간단한 겁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처음부터 신을 섬겼어요. 왜냐 하면, 사냥감이 빨리 오라고. 알타미라 동굴 같은데 보면 신을 섬겼잖아요. 행운이 오기를 기대했던 겁니다. 사냥감 빨리 오라고. 그러니 신이라 하는 것은 나를 재수 좋게 하는 거예요. 이 신을 섬기다가 BC 6세기경부터 신이 제사로 너무 많이 가지고 가니까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제사를 너무 많이 하니까. 제사 많이 하면 귀찮잖아요. 며느리들이.
신을 제사하지 말고 제사 없이 신을 아예 알아버리면 어떨까? 신 자체를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규정을 한 거예요. 플라톤으로부터 해서 탈레스 이런 사람들 그러니 신은 제물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신이 누구인가를 알기를 원한다고 바뀌어졌어요. 왜? 돈이 아까우니까. 다른 게 아니에요.
그래서 성경공부하고 헌금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처음에는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 때 아부하고 뇌물주면 복줄 줄 알았지요. 그런데 성경공부 좀 하고 나니까 아, 그동안 헛수고했구나! 목사도 십일조 안하는데 내가 미쳤다고 십일조 하나. 알았으니까 아는 대신 돈을 안 내도 되거든요. 성경공부 열심히 하세요.
신을 알아버렸으니까 이제는 신이 로고스가 되는 거예요. 로고스. 이왕 한 거 더 들어가 봅시다. 로고스가 뭐냐 하면, 이게 이성이거든요. 이성은 구체적으로 언어입니다. 그러니까 이성, 말, 이거 가지고 철학체계를 잡아보면 그것은 우리가 신을 아는 게 되지요.
그 이성, 로고스는 인간 속에 있다고 본 겁니다. 이게 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 사도행전에 나오는 학파에요. 아덴 사람들아, 하면서 사도행전에 나오거든요. 이 사람들이 인간 속에 신성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본 거예요. 완전히 한국교회의 신학 같지요.
이성이 내 안에 있으니까 내 안에 있는 양심, 착함, 거룩을 개발해 나가면 돼요. 개발하게 되면, 육신은 이 땅에서 힘들게 고생하지만 죽고 난 뒤에 건전한 영혼은 하나님과 합류가 된다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기독교 들어오기 전에 벌써, 벌써.
그런데 여기에 드디어 AD1세기에 누가 들어 왔습니까? 기독교가 들어온 거예요. 기독교가 들어오니까 내 안에 로고스 있지요. 신성, 내 안에 신성, 이것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로고스를 예수님이라고 본 거예요. 예수님을 봐가지고 삼위일체가 되는 겁니다. 로고스가 구체화된 인물이 예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말은 내가 양심이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내 안에 있다는 셈이 되는 겁니다. 그 예수님을 이제 섬기면 되겠지요. 그 예수님을 섬기면 되는데 교회에서 뭘 제공했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남기신 게 있습니다.” 기념하라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살과 떡 그리고 세례 받는 것 그것은 유대교에서 온 풍습을 그대로 해가지고 예수를 믿는다 했다 말이지요.
그래서 인간 속에 있는 로고스가 있으면 그걸 성령 받은 걸로 여겨서 이렇게 성령 받은 사람들의 집합체, 이 성령을 받았겠습니까? 안 받았지요. 안 받았으면서도 착하게 살면 성령 받은 걸로 간주해 주는 겁니다. 왜 그렇게 했느냐, 그렇게 돼야 나라 전체가 모든 국민 전체가 전부 다 같은 신자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신자가 되면 전쟁할 때도 단결이 잘 되니까. 신의 이름으로. 깃발로. 나가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예수님의 십자가 가지고 이겼잖아요. 깃발가지고 이겼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로마 전체가 전부 다 기독교 신자가 된 거예요. 기독교 신자가 되니까 기독교신자를 자동적으로 아는 방법은 정리된 교리를 이야기해서 교리를 납득하면 다 신자가 되는 거예요.
그 처음에 나온 교리가 뭐냐 하면, 사도신경이에요. 사도신경 외우면 돼요. 외우면 신자 돼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외우면 되는 거예요. 외운 대로 반복하면 최고 아닙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믿나? 믿습니다!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 로마제국 자체가 교회가 된 겁니다. 이게 천년왕국이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천년왕국. 이것이 드디어 이루어 진 거예요. 이루어졌는데 천년왕국이 오래 안가잖아요. 깨지니까 이제는 그런 신학가지고 버티지를 못해서 이제는 뭐냐, 실속 무기하고 전쟁 이런 거 제물 이런 게 필요하기 때문에. 신을 위로 보내버립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이미 정답 알았으니까. 하나님은 이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알았으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이 땅에서 삼위일체 그런 속성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그것이 이제는 신자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럼 삼위일체가 뭐냐 하면, 삼위일체가 지. 정. 의, 지식과 의지와 그리고 감정, 감정은 기도하는 것이고 의지라 하는 것은 착한 일이나 전도하는 것이고 지식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지적으로 아는 겁니다. 그 세 가지를 구비하게 되면 그 사람은 신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삼위일체 하나님 밑에서 뭐가 생기는가 하면, 계급이 생기지요. 똑똑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정된 자리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엘리트라 똑똑한 사람이 되고. 기도도 못하고 이런 사람들은 밑에서 농부들, 지배를 받아야 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다가 점차로 무엇으로 가느냐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지가 있어? 그러면 우리의 의지가 곧 신의 의지겠네. 그럼 우리가 의지로서 세상을 개발하고 과학을 발달시키는 이것도 신의 의지네. 이러면 이제 하나님은 필요 없어. 하나님은 그저 하늘에서 지켜보고 계시고 밑에 있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과학적으로 발달하게 되면 그게 뭐가 되겠어요? 신의 축복된 나라가 되겠지요.
그게 오늘날까지 온 거예요. 유럽에. 신을 인정 안하는 건 아닙니다. 해놓고 일은 누가 다해요? 인간의 노동으로 얻은 것은 신의 축복으로 보는 겁니다. 긍정철학에서 번 내 돈은 이건 신이 주신 축복이 되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존로크가 이야기한 유명한 게 있지요. 존로크가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감나무가 있는데 감이 떨어진다. 감이 떨어지는데 감이 떨어질 때, 새벽에 나와 감 주운 사람은 그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느냐, 오늘날 우리는 소유권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산에 있는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는데 주인 없으면 주운 사람이 주인 되잖아요. 옛날에는 안 그랬어요. 그 산에 감나무가 왜 있느냐, 하나님이 주신 거죠. 그러면 거기서 감 땄으면 누구한테 바쳐라 해요? 교회한테 바쳐야 돼요. 교회 십일조로 바쳐야 되지.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니고 내 것이 되는 거예요. 이래서 생긴 것이 뭐냐 하면, 사유재산. 사유재산이 등장합니다. 사유재산이 등장하니까 사유재산을 투기하고 계속 굴려버리면 각 금융시장 내에서 사유재산 자본을 굴려버리면 이제는 노동에서 얻은 수입보다도 있는 돈 굴리는 것이 더 수입이 많을 때는 돈 빌려주고 이자 받는 것이 훨씬 더 수익이 많다 이 말이죠.
놀고먹는 사람은 갈수록 부자 되고 빡세게 일하는 사람은 갈수록 시장원칙에 의해서 점점 단가가 떨어지니까 갈수록 가난해지는 거예요. 자본자체가 시장자체의 성격을 바꿔놓는 겁니다. 그냥 돈 빌려주고 이자 받는 게 아니고 자본이 많이 투입 될수록 그 다음부터 인간의 노동의 단가는 떨어지게 돼있어요. 마르크스가 이걸 이야기했잖아요. 그러니 이 세상이라 하는 것이 그걸로 번 걸 가지고 신의 축복으로 보는 거예요.
방금 긴긴 이야기했지만 이 이야기가 뭐냐 하면, 지평 가나안 땅의 있는 원주민들이 뭐라 했습니까? 내가 노동한 것은 누구 것이다? 내 것이다. 따라서 애굽에서 올라온 그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땅을 가질 자격이 없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현대인의 입장에서 누구 말이 맞아요? 가나안 원주민의 말이 맞지요.
내가 일군 땅을 왜 너희들이 와서 젖과 꿀이 흐른다고 일방적으로 남의 농사를 짓는 걸 가지고 그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할 때에 포도송이가 커서 두 사람이 낑낑대고 왔잖아요. 그 포도송이 누가 기른 거예요? 그 원주민들이 기른 거잖아요. 원주민들이 기른 건데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길렀다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원주님들은 가만히 있다가 땅 빼앗기고 다 빼앗기니까 그들은 단합해서 이주민들을 들어온 사람들을 전쟁을 벌였는데 하늘의 해도 멈추고 우박도 떨어져가지고 패배해 버렸지요.
우박 떨어지고 해 멈추는 건 좋은데 제일 밑에 있는 가나안의 원주민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현대인의 입장으로서는 많이 억울하다 말이죠. 도둑놈이 와서 남의 노동한 것을 다 갈취해 놓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으니까 너무 억울하잖아요. 뿐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아내가 둘이 있지요. 사라와 하갈이잖아요. 하갈이 애를 낳는데 애 이름이 이스마엘입니다. 이스마엘을 낳을 때 남자가 누구지요? 아브라함 아닙니까. 아브라함의 애기를 낳았다 말이지요. 자기는 그냥 몸만 빌려주고. 그래서 이스마엘을 낳았는데 누가 학대합니까?
자기 여자 주인 사라가 하갈을 학대하지요. 원래 하갈은 사라의 몸종인데 자기 몸종을 자기 남편한테 애기 낳으라 해놓고 씨받이 줘놓고 자식 낳으니까 이제 와서 자식 낳으니까 구박을 할 때 세상에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래서 가출했지요. 굶어죽을 뻔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굴 저주해요? 이스마엘과 하갈을 저주하고 누굴 축복합니까? 사라를 축복하지요. 이 당황스러움. 우리의 윤리적, 도덕적인 것하고 너무 차이나죠.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는 겁니까? 약속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선악과 따먹고 익히 아는 윤리 도덕과 전혀 상관없다는 겁니다. 노동해서 얻은 내 생산물이라 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은 하나님의 약속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층에다 얹읍시다. 70이레 다음 시간부터 할 건데, 밑에는 철저하게 우리가 어떤 식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가를 충분하게 우리는 인정을 합시다. 내 것 만들기, 내 것은 내가 애쓰고 힘쓰고 노동해서 얻은 내 결실을 채워주는 그 아래층이 있고 그것은 우리가 구원받는데 방해가 될지언정 전혀 보탬이 되지 못하는 사고방식, 이 사고방식은 위층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덮쳐짐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우리가 생각하는 이 자체는 저주받을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마태복음 20장에 포도원비유 나오지요. 아침에 온 사람과 저녁에 온 사람, 예수님이 마지막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 줌으로 말미암아 처음에 온 사람에게 삐지게 만들지요. 일부러 삐지게 만들어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면 우리 같으면 줄을 나중에 서겠습니까? 먼저 서겠습니까? 결국은 우리는 나중에 서가지고 공짜로 얻기를 원하는데 서로가 나중에 서려고 밀치고 당기는 그 인간들이 사실은 먼저 온 자들의 사고방식이에요.
왜, 1층과 2층을 다 용납을 해야 될 건데 우리는 2층을 알았다고 건방지게 1층이 2층의 흉내를 내고 있는 거예요. 이거 주의하고 굉장히 조심해야 돼요. 우리는 흉내 내지 말고 자기 성질대로 막사세요. 제발 모방하지 말고 그냥 사시면 2층이 지적합니다.
목사님, 큰일 났어요.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해서 다시 한 번 복음이 대체 내가 그동안 복음을 믿은 거야, 아니면 어떤 복음 아는 교회를 믿은 거야, 분명히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안 주면 어떻게 하고요? 안 주면 그건 구원 못 받은 사람이고 나보고 할 문제가 아니고. 안 오면 할 수 없어요.
가나안 백성가운데 구원받은 사람 있습니다. 기생 라합이잖아요. 분명히 자기는 매국노에요. 북한 스파이를 신고도 안하고 신고는커녕 완전히 이적행위 했잖아요. 진보당 이석기입니까? 기생 라합이. 간첩 숨겨주고 간첩보고 하는 소리가 우리나라 망합니다. 이게 어디 간첩보고 할 소리에요? “간첩 보내 주신 당신 나라가 이 나라를 침범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 때 저를 생각해 주세요.” 이게 어떻게 세금내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이 노래 부르고 월드컵의 16강을 기원하는 그 대한민국의 사람이라 할 수 있겠어요? 이거 매국노지요. 이게 우리의 입장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내 노동과 내거라고 내 사유재산이라고 하는 1층의 성질밖에 없는데 주께서 이 성질이 저주받을 성질이라고 알려주기 위해서 새로운 성질이 덮치게 해주시는 겁니다. 이 은혜를 항상 우리는 증거하고 감사해야 됩니다.
70이레라는 것은 바로 거기에 엎치고 덮치는 그 과정을 보여주는 건데 두 번째 시간에 상세히 하겠습니다.
10분 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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