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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70이레 논문(시간의 층)131128-30강b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미가

가락-70이레 논문(시간의 층)131128-30강b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70이레 논문(시간의 층)131128-30강b -이 근호 목사

243 페이지 제일 밑 끝에 『하나님께서는 ‘이레’라는 창조를 다루는 묵시적 해석 단위에 준해서 짐승과 짐승, 뿔과 뿔의 등장의 예와 같이 불연속적 경계면을 묵시적 스케줄에 맞게 조성해 나감으로서, 유비적으로 대자연의 영속성을, 내부적으로 유지시켜 왔음을 보이신다.』지금 여기 이 문장에 있어서 용어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나온 용어가 『불연속적 경계면』‘불연속적 경계면’ 나오고 그 밑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대자연의 영속성’ 나왔죠? 이것이 어떻게 같이 결합이 안 되는 단어인데 결합이 되느냐 하면 첫 번째 짐승이 바벨론이고 두 번째 짐승이 뭡니까? 바사나라죠. 메대 바사, 페르샤죠. 첫 번째 바벨론, 두 번째 바사, 세 번째 헬라, 또는 헬라 마케도니아, 네 번째가 로마거든요.

이 자체가 의미가 네 마리 짐승이거든요. 짐승! 짐승과 짐승 사이에 어떻게 곱게 정권을 이양해 줍니까? 전쟁이 일어납니까? 전쟁이 일어나죠. 그러니까 이건 뭡니까? 불연속적인 경계면이거든요. 이 불연속적인 경계면에 동원되기 위해서는 이들이 뭐가 돼야 되느냐 하면 짐승이 돼야 돼요. 짐승과 짐승, 뿔과 뿔 사이에 불연속적인 경계면이 되려면 여기에 동원되는 시간 개념이 뭐냐 하면 ‘이레’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레를 여기서 집어넣는 순간 이들은 똑같은 짐승의 나열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영속성을 갖추고 내부적으로 있다 말이죠. 그래야 돼요. 설명하니까 이걸 알겠는데 이걸 다 쓰려고 하면 페이지가 몇 페이지 돼야 돼요? 이걸 달리 축약해 보세요.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본인이 한 문장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짐승과 짐승, 뿔과 뿔의 등장』이렇게 보시고 다시 봅시다.『‘이레’라는 창조를 다루는 묵시적 해석 단위에 준해서 짐승과 짐승, 뿔과 뿔의 등장의 예와 같이 불연속적 경계면을 묵시적 스케줄에 맞게 조성해 나감으로서』이것이 역사로서는 연결돼 있지만 묵시로서는 다 끊어지게 된 것은 바로 이레 자체가 7이레, 62이레, 1이레로 끊어진 걸로 이것을 유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현재 박 근혜 대통령 이전 대통령이 누굽니까? 이 명박, 박 근혜, 분명히 역사적으로는 분명히 연결됐잖아요. 구데타 일으키고 전쟁 일으킨 게 아니고 연결돼 있죠.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는 뭐든지 연결되면 안 돼요. 왜냐 하면 역사와 묵시 세계 자체가 불연속적으로 돼 있기 때문에 불연속적으로 천국하고 지상은 연결이 안 되잖아요. 지상에서 천국으로 올라올 수가 없죠. 끊어져 있으니까. 요 끊어져 있는 것을 바로 세워봅시다. 바로 세워버리면 짐승과 짐승 사이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묵시를 집어넣으면 이건 단절되고 끊어져야 된다 말이죠.

이 사이, 사이 바벨론과 바사, 헬라마케도니아, 로마, 요 끊어진 요 사이에 누가 관여해서 끊게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레, 시간 스케줄을 조절하시는 우리 하나님 쪽에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이제 이해되시죠? 70이레가.

그럼 70이레가 7 + 62 + 1 , 로 끊어졌잖아요. 두 개의 관절로 끊어졌어요. 이 끊어진 이 위에 누가 관여합니까? 묵시적인 의미가 여기서 개입을 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만약에 시간적으로, 시간에 어느 역사가 일어났고, 이렇게 해버리면 이거는 묵시적 표현이 될까요? 안 될까요? 되지 않기 때문에 237 페이지 셋째 줄에 『칼빈은 처음 7이레를 49년으로 여겨서 고레스의 칙령에서부터 다리오 6년까지로 보았다.』이렇게 돼 있죠. 이게 틀렸다 이 말입니다. 이 유명한 칼빈의 해석이 나는 틀렸다고 본 거예요. 왜, 묵시적 절단을 이야기 안 하고 역사로서 표현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잘못됐다 이 말입니다.

이뿐만 아니에요. 유명한 사람들 다 틀린 거죠. 역사적으로 어떤 시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 틀린 거예요. 그러면 이걸 역사적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되느냐, 묵시적으로 설명해야 된다. 묵시적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되느냐, 묵시적으로 설명하기 이전에 그 7이레 단위부터 원역사로, 원창조로 가야 된다 했어요. 여기 어디 나오느냐 하면 243 페이지 밑에서 11번 째 줄에 『그런데 그 시간은 날(日)이나 년(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레에 따른다.』날이나 년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레에 따르죠. 70이레를 490년이라 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된다니까요. 490년하고 70이레는 달라요. 490년 돼 버리면 이미 차원이 역사적 차원이 돼 버리고 70이레는 그대로 살려놔야 돼요.

70이레를 490년으로 바꾸어서 기존의 역사에 따라서 이렇게 사건을 찾아내려 하니까 틀려버린 거예요. 그거는 인간에게 달라붙은 그림자 같은 몸에 붙어있는 귀신 같은 시간적인 관념에 불과한 겁니다. 신약에 보면 베드로후서 3장에 천년이 뭐 같다 했습니까?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는 것을 그 사람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설명이 안 되잖아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그러면 예수님 재림하신 지 이틀 됐네. 천년이 하루 같으니까.

그런 식으로 번역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이 이미 짐승에게 소속됐기 때문에 그 70이레를 이해하려면 ‘내가 바로 짐승에게 소속된 짐승의 몸입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게 그게 우선 이예요. 먼저 그것부터 나와야 돼요. ‘짐승이기 때문에,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기껏 70이레를 490년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그런 되지도 않는 해석을 해왔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해야죠.

그러니까 이 논문은 결국은 회개하라는 거예요. 그동안 70이레를 어떻게 해석했던 당신들 회개하라 이 말입니다. 그게 짐승의 짓인 것을 알아라, 이 말입니다. ‘모르겠다.’하는데 모르겠다, 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바로 마귀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라 이 말이죠.

그래서 거기 보면 밑에서 열한 번째 줄에 『날(日)이나 년(年)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레에 따른다.』그렇다면 천지창조 몇 일만에 창조했습니까? 7일 만에 창조할 때 7이라는 것도 묵시적 개념의 일이 되겠죠. 왜냐 하면 제일 마지막 일이 뭐냐 하면 안식일이 돼요. 안식일이 될 때 안식일이 어디서 어디까지냐? 라고 물을 때 두 가지 답변이 있어요.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가 안식일이다. 그건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이고, 그게 답변 하나일 수 있고, 또 안식일은 어디서 어디까지 입니까? 천지창조로부터 예수님까지입니다. 이게 안식일의 묵시적 해석이 되겠죠. 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니까.

그러면 그전에 천지창조부터 예수님 사이는 안식일이 예수님이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깔아놓은 카펫의 역할이죠. 그러면 유대인들이 지키는 7일만 지켰던 것은 카펫에 깔린 수놓은 무늬가 되는 거예요. 무늬의 특징은 납작하죠. 깊이가 없어요. 이스라엘도 납작하고 꼭 빈대떡 같아요. 전 부침 같이 납작해요. 납작한 이것이 종이로 만들 때 종이를 오려서 세워보면 이렇게 되는 거 봤죠? 이렇게 드러나니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이렇게 붙어있는 걸로 밑바닥에 카펫이 예수그리스도와 관계된 카펫인 줄 모르고 자기는 독자적으로 뭔가 이스라엘 역사를 자기가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한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디를 겨냥합니까? 그들의 바닥을 겨냥하죠. 이 바닥은 천지창조부터 예수님까지 연결돼 있죠. 그걸 243 페이지 밑에서 여덟 번째 줄에『원 창조』라 해요. 원 창조, 원래 창조했던 원 창조에 대해서 묵시적 시간개념을 가지고 전체를 다 해석한 것이 70이레다,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바닥에도 뭐가 있습니까? 원 창조가 있겠죠. 그러면 창세기는 지나갔어요? 안 지나갔어요? 아직도 우리바닥에 창세기 있죠. 창세기를 우리가 세척을 안 하고, 창세기를 우리 시간적 개념으로 보면 창세기는 옛날이야기 돼 버려요. 그러면 선악과도 옛날이야기 돼 버려요. 그러면 선악과 따먹은 그 당사자, 아담과 하와만 범죄인 되고, 우리는 선악과 구경도 못했어요.

지금 집사님이 떡을 잡쉈는데 집에 있는 자녀가 배부르다 하면 말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말이 안 되죠. 말이 안 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거예요. 우리보고. 주님께서는 그게 옳다는 거예요. 당신이 떡을 먹으면 집에 있는 자녀가 같이 배부르게 돼 있다는 겁니다.

자, 예를 들게요. 왕의 신하가 예수님한테 아들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한테 낫게 해달라고 왔잖아요. 요한복음 4장에 왕의 신하가 가버나움에 있는 아들이 죽어간다고 이야기를 했잖아요.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누구보고 이야기를 했습니까? 이 시점에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했잖아요. 분명히 아버지보고 했는데 나중에 집에 가보니까 ’나았다.’ 할 그때 이미 아들이 나아버렸어요.

그러면 예수님한테는 인간적인 시간 개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 거죠. 십자가라는 것은 그래서 반복이 가능한 거예요. 십자가는 묵시적 사건이기 때문에 아무리 앞으로 5천 년, 6천 년이 지나도 십자가만으로 구원받습니다. 이것은 미래뿐만 아니고 과거에 소급해서 아담도 십자가 때문에, 엘리야도 십자가 때문에, 그래서 엘리야하고 모세가 주님이 십자가 죽기 전에 변화 산에 계실 때 같이 이야기했잖아요. ‘주님 언제 별세하십니까?’ 그 이야기했다고요.

그러니 예수님 안에서 원 창조가 본래의 의미를 발산하게 돼 있어요. 그것을 인간들은 모르죠. 모르니까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완성 지으려 왔는데.

그래서 이레라는 것은 이레 안에 이미 천지 창조의 완료성이 다 들어있다는 겁니다. 234 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에 『이 완료성을 적용시켜 나가는 내용이다. 인간이 죄 지었다고 이 완료성이…』무효화 돼요? 무효가 안 돼요? 무효가 안 됩니다. 인간이 죄 지었다고 ‘아! 일 못하겠네. 나 안할래.’ 이런 일 없다 이 말이죠. 오히려 인간이 죄 지어야 되죠. 그래야 이미 있는 완성이, 완성되죠. 인간이 죄 진다고 이레가, 이레의 계획이 파괴되거나 취소되거나 이런 게 없습니다.

그 다음에 244 페이지 밑에서 아홉 번째 줄에 봅시다. 『성경에서는 처음부터 이 대자연의 구조가 완료적인 것이라서 보완이 필요 없다. 문제는 ‘이레’라는 특별한 창조단위를 왜 다니엘이라는 실존에게 적용했느냐 하는 점이다.』왜 그럼 이 이레라는 이것을 왜 아브라함한테 먼저 이야기 안 해주고 모세한테 왜 이레라고 이야기 안 했죠? 모세한테는 자꾸 ‘안식일 지켜라,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은 죽여라.’ 하고 그때는 안식일이 이레라는 소리를 안 하고 ‘안식일도 원래 이레에 속해.’ 이렇게 언질을 주지 않고 그냥 어떤 특정 날을 지켜라, 했는데 다니엘에 와서 왜 70이레를 이제 와서 다니엘에게 했습니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아까 했잖아요.

인자가 어디에 구체화 된다 했습니까? 뭐가 있을 때? 백성들이 뭐 됐을 때? 포로 잡혀 있을 때, 다니엘이 어떤 경우입니까? 백성들이 포로 잡혀 있을 경우에. 포로 잡혀 있으니까 땅도 없고 임금도 없고 선지자도 없고, 포로 잡혀 있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짐승의 나라에 사로잡혀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바벨론 나라가 짐승의 나라라고 등장하게 된 것도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지배했기 때문에 그렇죠. 본래 그것도 밝혀지지 않을 내용이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시다. 짝이라 하는 것은 뭡니까? 여자의 후손 등장하면 그 안에 뭐가 있고? 뱀의 후손 나오고, 뱀의 후손 등장했다 하면 그 안에 뭐가 있고? 여자의 후손 나오고, 이미 바벨론을 짐승의 나라라고 했다는 말은 이제는 여기는 이스라엘은 사라져도 누구는 살아있으면 돼요? 인자만 살아있으면 이스라엘은 다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다만 있는 그 장소가 짐승이 짐승 됨을 충분하게 그 속성을 발휘돼야 돼요.

짐승과 인자의 나라에 단절이 있어요. 단절성에 개입하는 것이 바로 70이레라는 묵시적 시간개념이 여기에 들어갑니다. 이 이레라 하는 것은 일종의 칼, 자르는 칼 ‘에이, 너하고 나하고는 이제 남이야.’ 하고 자르는 칼, 성전을 짓는 게 7이레, 성전 짓는 거하고 잘라버려요. 그 다음에 성전은 깨져요. 지었던 성전 다 깨집니다. 성전 지었던 것도 날라 가 버리고 깨어진 것도 날라 가고 이제는 성전은 일종의 폼이었고 아까 여기 종이 공작처럼, 여기에 진짜 등장하는 나라와 정작 등장하는 성전은 이제 1이레에서 마무리 집니다. 진짜 성전은 누구십니까? 예수님, 진짜 백성은 누굽니까? 예수님에 속한 인자의 나라의 백성. 그러니까 인자의 나라라 하는 것은 기존의 짐승의 나라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짐승의 나라라 하는 자체가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역사적으로 봐서, 인간적으로 봐서. 없죠. 대한민국, 필리핀, 중화인민 공화국, 북조선 인민 공화국, 이런 게 있지만 자진해서 짐승의 나라? 그런 건 있어요? 없어요? 없잖아요. 없다는 게 그게 반칙이라는 게 하나님의 뜻이다 이 말이죠. ‘어디서 짐승의 나라 아닌 척들 하고 있어?’ 월드컵에 196개국 참여하거든요. 자기는 196개국 나라인데 주님 보시기는 다 무슨 나라입니까? 짐승의 나라에서 벌리는 월드컵 이예요. 올림픽도 마찬가지고, 짐승의 올림픽 이예요. 완전히 동물의 왕국이죠. 그래서 금메달 딴 사람은 뭐하는 사람입니까? 짐승 운동회에서 금메달 딴 거예요. 금메달 땄다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되면 어떻게 돼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주의 영광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 때 그게 영광 이예요. 아까 시편 50편의 말씀처럼 제사로 말미암은 언약, 나의 죽음이 현실, 실제라는 것을 받아들일 때 영광입니다. 누구든지 살려고 하면 영광이 아니에요. 살려고 하면 협박 받아요. ‘이래서 밥 빌어먹고 살겠니?’ 보이스 피싱이 이게 다 살려고 하는 거예요.

이야기 좀 더 해봅시다. 정리해 봅시다. 이레라는 거, 짐승의 나라가 먼저 있어줘야 되고 이 세상 어떤 나라도 자진해서 자기가 짐승의 나라가 되겠다, 하는 나라가 아무도 없죠. 아무도 없는 이유는 그들은 그림자 같은 시간개념에 둘둘 휘말려서 그런 거예요. 시간이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역사가 있다는 말이고 역사가 있다는 말은 계획이 있다는 말이고, 계획이 있다는 말은 그들의 자기들 종교가 되고 그들의 낙이 돼요. 사람이 낙이 없이는 못 살잖아요. 지금은 고생고생해도 희망이 있다면 고생을 견딜 수 있습니다. 군대가 힘들지만 제대할 날이 있으니까 살아갑니다. 말뚝 박은 사람은 뭐예요? 승진할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말뚝 박는 거죠. 군에 장기 복무하는 것도.

자, 이레라는 것은 모든 것을 짐승으로 만들고, 그리고 그 가운데서 인자가 나오게 만드는 그러한 묵시적 시간 단위가 이레다. 이렇게 정리하시면 됐죠. 이레 앞에서는 모든 게 짐승입니다. 원 창조를 가야 거기 창조주 되신 주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44 페이지 제일 밑에 봅시다. 『다니엘에게는 더 이상 돌아갈 본향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지상에 있는 본향은 있어요? 없어요? 없는 거예요. 이레 차원이 본향입니다. 자기가 만약에 돌아간다면 옛날 이레에서 벗어나서 어디로 갑니까? 시간이 적용되는 기존의 역사가 적용되는 그 시절로 돌아가는 셈이 되기 때문에 돌아갈 필요가 없죠. 70년이라는 개념이 70년을 잊어버리고 이제는 뭘 기다립니까? 70이레를 기다리죠. 70년을 버리고 70이레 기다리는 겁니다.

70년이라 하는 것은 자기 몸 위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그건 끔찍해요. 그건 짐승에게 속한 그런 인생이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마음이 괴롭고 진짜 컬컬하고 답답할 때는 주님의 몸에서 다시 세상 몸으로 바뀌게 되면 우리는 답답하고 컬컬합니다. ‘이래 가지고 네가 밥 빌어먹고 살겠니? 밥 먹기 싫으니?’ 이러잖아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마라, 그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라고 돼 있죠. 특히 마태복음 11장 그 대목은 좋은 대목이 있잖아요. “ 이 모든 비밀을 똑똑하고 지혜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시니 감사합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어린아이가 구원받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 소급해서 어린아이가 된 사람들이 어른이라 할지라도 아버지로 말미암아 됐다는 걸 믿는 사람만이 주님 보시기에 귀여운 어린아이가 되는 거예요. 어린아이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구원받으면 그 사람이 곧 어린아이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뜻을 모르는 사람은 소위 지적 받는 똑똑한 지혜로운 자들이 자칭 그런 자들이 되는 거죠.

자, 245 페이지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이거 해보려고 그동안 수십 시간 했습니다. 『70이레는 두 개의 관절을 가진다.』관절이 있죠. 인간의 몸의 핏줄이라 하는 것은 소시지 고리처럼 이렇게 돼 있어요. 근육 덩어리하고 줄로 연결돼서 이 줄 잡아당기면 이쪽에서 다 잡아당기죠. 그래서 팔 여기가 안 좋다 싶으면 경락으로 여기를 누르면 다 같이 당겨져서 시원하답니다. 관절을 갖고 있는 거예요. 관절을 갖고 있다는 것은 열차에 객차와 객차를 이어주는 이음새처럼 그렇게 이레로 연결돼 있어요.

70이레는 7이레, 62이레, 1이레로 돼 있죠. 그러면 7 빼버리고 62 빼버리고 1 빼버리면 남는 게 뭡니까? 이레만 남죠. 이레가 중요한 거예요. 묵시적 시간 단위가 중요한 거예요. 이레만 남는 거예요.

도마에 노란 단무지를 세 토막 낸다고 보세요. 탁! 탁! 또는 고등어를 탁 탁 잘라서 머리 떼 내고 꼬리 떼 낼 때 몸통 남듯이 세 등분하잖아요. 주께서 이렇게 세 등분 나누신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걸 볼 때 두 가지만 생각하면 돼요. 하나는 이레를 생각해야 되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해서 두 개의 관절을, 두 개의 토막을 세 토막으로 나누기 위해서 두 개의 끊어짐이 있었는가? 왜 이게 끊어져야 되는가? 끊어짐에 대해서 이해하면 70이레는 깔끔하게 이해된 거죠.

논리적으로 따지면 굉장히 힘드니까 그때는 먼저 결론부터 이야기하게 되면 앞으로 논리가 쉽게 될 겁니다.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할게요. 하나님의 계시가 역사 속에 들어오기 때문에 역사적인 시간개념을 이야기할 때는 역사적인 시간개념을 사용해서 했습니다. 그래서 7 + 62 + 1 해서 토막을 이렇게 낸 건데 이걸 다시 묵시로 원역사로, 원창조로 되돌려 보면 이렇게 돼요. 창세기부터 마지막 요한계시록까지 여기가 7이레고 그 다음에 중간에 까지 52이레가 되고 그리고 끝에 있는 게 1이레가 돼요.

그러면 이것이 마치 시루떡처럼, 케이크처럼 7이레 층, 62이레 층, 1이레 층, 이게 나란히 같이 가게 돼 있습니다. 이 전체가 70이레라고 보시면 돼요. 그것은 이레라는 단어 자체가 역사적인 인간이 알고 있는 시간 단위로 들어오게 되면 어디를 쑤셔도 전부 이레가 돼요. 1962년을 쑤셔도 이레가 되고, 1945년을 쑤셔도 이레가 되고, 집사님 태어날 그때도 이레 속에서 태어나고, 이레 속에서 살다가 돌아가실 때도 이레 속에서 돌아가시는 겁니다. 다니엘은 이걸 안 거예요. 그전까지는 몰랐었는데 이레를 몰랐을 때는 ‘아이고, 우리가 70년만 지나면 가는데.’ 자꾸 시간의 차원에서만 몰랐었는데 이것이 이레로 바뀌니까 그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시간의 차원 같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 돌아가기 위해서 저 적들 바벨론 나라를 쳐부숴야 되는데’ 했는데 이레가 오니까 바벨론 나라는 이거는 쳐부수는 게 아니고 계속 연속 이어져야 돼요. 바벨론 이름의 바벨론, 바사 나라 이름의 바벨론, 헬라 마케도니아라는 이름의 바벨론, 그리고 로마라는 이름의 바벨론, 그리고 러시아 이름의 바벨론, 대한민국 이름이라는 바벨론, 북조선 인민공화국 이름의 바벨론, 요한계시록에서는 서울이라는 이름의 바벨론, 대구라는 이름의 바벨론, 이레가 모든 데를 쑤셔도 이레가 되는 것처럼, 이제는 모든 데 쑤셔도 바벨론이 되는 거예요. 짐승 판! 모든 짐승의 개판. 어느 교회를 들어가도 바벨론, 우리교회 들어가도 바벨론, 우리 집구석도 바벨론.

질문: 이레라는 게 묵시적인 시간 표현이 아닙니까?
그렇죠. 시간 표현이기 때문에 인간적인 시간적인 표현이 속성, 뱀에 속했다는 속성을 드러내는 여자의 후손에 속한 시간 개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짝이 돼서 항상 같이 등장하니까, 이레가 따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이레가 쑤실 수 있는 부정할 수 있는 역사적인 밑바탕을 깔아야 되거든요.

그래서 이레라 하는 것은 이렇게 역사적 바탕 위에 깔아보면 이렇게 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 말이죠. 63번째도 마찬가지, 45번째도 마찬가지, 하지만 끊는 것이 7 + 62 + 1 이렇게 세 층으로 언급한 겁니다.

질문: 왜 62 + 7 + 1 로 안 하고 7 + 62 + 1로 합니까?
그거는 요 끊어짐, 7과 1을 드러내기 위해서, 끊어지기 위해서 나머지 부분이 62이기 때문에, 62는 의미가 없어요. 끊어진다는 게 의미 있기 때문에 이렇게 끊고 이렇게 끊어 보니까 나머지가 62이레라. 62에 의미 있는 게 아니고. 그럴 때 제가 그래서 설명하는 거예요.

그래서 7로부터 62로 해서 1로 간다면 7이라 하는 것은 우리 역사 같으면 7이 있으면 7이 중요하잖아요. 그런데 1에서, 7이 아니고 원 역사, 묵시에서 일으킨 사건이 있어요. 이 사건이 뭐냐? 성전 짓기, 2층에는 뭐냐, 성전 깨어지기, 1이레는 뭐냐, 메시야 오시기, 고 사건은 묵시적 사건 이예요.

역사의 시간은 묵시적 사건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없어요. 이 대목이 어렵기 때문에
우선 결론부터 먼저 빨리 드리고 천천히 반복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설명을 드리면 묵시라 하는 것은 창세부터 전체를 다 내려다 봐요. 예를 들어 지도 같은 경우에 지금 대전에서 차타고 열나게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은 평평한 2차원 지평을 달리지만 지도 보고 있는 사람은 다 보고 있어요. 대전에서 서울까지 다 본다고요. 전체를 보는 거예요. 그걸 원창조라 했죠? 전체를 보는 거예요.

전체를 다 보게 되면 천지창조부터 전체를 본다는 말은 만들어진 피조물이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고 만드신 분이 다 보는 거예요. 알파요 오메가 되신 예수님이 전체를 다 보고 있다는 거죠. 전체를 다 보고 있으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건을 일으켜요.

두 가지 사건이 뭐냐, 성전을 짓는 사건과 성전이 깨지는 사건과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는 사건, 그리고 예수님이 오시는 사건도 반으로 나눠요. 오셔서 죽는 사건,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두 조각이 나눠지거든요.

그렇다면 주께서 오시는 이 사건을 이루기 위해서 뭔가 밑바탕이 준비돼야 되는데 밑바탕 준비해주는 그것이 바로 역사에 속한 사람들이 준비합니다. 누구냐? 그게 바벨론! 짐승에 속한 사람. 바벨론 나라가 짐승이라 했죠. 그러면 바벨론 왕하고 그 신하들은 생김새가 원숭이 같겠어요? 아니면 멧돼지 같겠어요? 우리하고 똑같아요. 얼굴 생김새보고 너는 짐승이니, 아니다, 구분을 못합니다.

인자에 속한 백성은 천사고 그 외는 다 짐승이거든요. 인자에 속한 사람과 짐승에 속한 사람하고 생김새 차이가 어떻습니까? 쌍꺼풀 있고 없고 그 차이 아니죠. 차이가 안 나죠. 그 차이 안 나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요한계시록에서는 이마에 도장을 박아요. 이마에 도장은 성도에게는 이마에 도장이 있다는데 하나님의 인이 있다는데 백날 들여다봐도 도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하나님의 성도의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은 도장이 안 보인다면 짐승에 속한 사람의 짐승의 도장이 보이겠어요? 안 보이겠어요? 역시 안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666해서 보인다는 겁니다.

그 인이 뭐냐, 성령을 말해요. 성령! 고린도후서 1장 22절,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 성령 받은 사람은 겉모습이 똑같아요. 왜냐 하면 다 육(흙)에 속했기 때문에 모습 가지고 분간이 안 됩니다.

차이는 어디서 차이가 나는가?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사람, 나는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성령 받은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 짐승에 속한 사람 이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나오는 사람 이예요.

그래서 앉은뱅이가 병 낫고 안 낫고는 아무 상관없어요. 병 낫든 안 낫든 간에 성도면 성도지, 똑 병이 나아야 성도가 아니에요. 가난하다 부자 됐다고 해서 성도 되는 게 아니고 또 부자가 가난하게 됐다고 성도 아닌 게 아니고 세상적인 어떤 기준을 내세울 수가 없어요. 왜 그 기준은 이레기 때문에, 묵시적 기준이기 때문에. 묵시적 사건이 일으킨 사건만이 기준이지, 인간이 기대하는 사건은 묵시적 사건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거 맞죠? 그게 묵시적 사건입니까? 그게 역사적 사건이죠. 묵시적에 의해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 되죠. 그런데 베드로 당사자가 물 위를 걸으면서 언제 빠졌어요? 주님 바라볼 때는 안 빠졌거든요. 주님 바라볼 때는 자기가 역사적 사건이라는 걸 생각 안 할 때 자기 자신을 생각 안 하고 주님만 바라볼 때는 안 빠졌는데 뭘 보고? ‘내가 미쳤지,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내가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어.’ 하고 자기를 바라볼 때 물에 빠졌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오늘날 성도가 늘 물에 빠져있어요. 그런데 성도가 물에 안 빠질 경우가 있어요. 그때는 주님만 생각하게 되면 ‘내가 지금 어떤 실패라도’ 부도가 나도 그건 부도도 아니고 실패도 아니에요. 성도한테는 실패라는 것이 적용이 안 돼요. 성도 뒤에는, 참 이런 게 어려운데 성도는 성공, 실패 안 보는 이유가 성도 자체가 이게 소유용이 아니고 이게 자리에요. 주님께서 마련한 자리에요. 이게 주일 낮 설교에 나오거든요. 미리 보내심을 입어서 된 사람들, 이 자린데 이 자리는 내가 만든 자리가 아니고 주님이 만든 자리에 ‘내가 앉았다.’가 되기 때문에 실패, 성공이 없습니다.

제가 주일 낮에 설교했습니다. 왕이 자기가 왕이라고 해서 왕입니까? 남들이 왕이라고 해주니까 왕입니까? 남들이 해준 자리에요. 그런데 그 왕이 ‘내가 왕이다.’ 한 순간 쫓겨나야 돼요. ‘백성이 주인인 왕입니다.’ 이게 유지될 때만 왕이 그 자리에 있지, ‘내가 왕이다.’ 이 말은 뭡니까? ‘너희들이 나를 왕이라 하던 안 하든 나는 못 들은 체 하겠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럼 백성들이 ‘미쳤나? 저게. 네가 왕다운 재주가 있었어? 우리가 뽑아줘서 왕 된 거지, 이게 어디? 다시 내려와.’하고 잡아당기거든요.

성도라는 것이 주님께서 주님이 십자가로 주님이 만든 자리에요. 주님이 만든 자리에 우리가 염치도 없이 왕도 아닌 게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기 앉아 있는 거예요. 거기에 무슨 성공, 실패가 있습니까? 무슨 성공이 있고 무슨 실패가 있어요? 성도됨 그 자체로 주님께 속했는데. 우리가 판정하고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미안하죠. 그저 미안하죠.

옛날에 한국에 쌀을 동그란 쇠판에다 홈을 파서 쌀을 부어요. 여기에 사카린을 넣고 뜨끈뜨끈할 때 위에서 압력으로 눌러버리면 먹기 좋게 바삭바삭한 쌀가루가 되죠. 요게 성도의 자리입니다. 성도의 자리에다 우리를 집어넣고 주께서 묵시적 압력을, 이레로 눌러버리면 우리는 창세전부터 예정된 사람 이예요. 우리가 창세전에 가봤습니까? 안 가봤습니까? 나이 얼만데 가보겠어요? 우리는 아담도 못 만났는데. 하지만 우리는 이미 창세전부터 이 자리가 예수 안에 있는 성도의 자리가 된 거예요. 그래서 이 쇠 덩어리 이 자리를 ‘성공했다. 실패했다.’ 고 말할 대상도 아니에요. 그냥 염치없이 머리 긁적이며 ‘고맙습니다.’하고 그냥 앉으면 될 자리에요.

세상의 자리는 자기가 승진하고 해야 앉을 자리지만 주님의 자리는 내쫓지 않는 자리입니다. 주께서 성령을 주신 자리기 때문에 성공, 실패 없습니다. 성도가 성공, 실패 없다는 말은 성도된 사람도 인생의 실패가 없다는 말 이예요. 그리고 따지고 보면 하루하루가 다 성공입니다. 주님이 성공한 자리! 우리의 뜻은 늘 실패하면서도 싱글벙글 할 자리! 실패한 것을 즐거워 할 자리! 내가 실패하지 않으면 주님이 안 보이기 때문에!

주님 보이라고 늘 우리로 하여금 매일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자리입니다. 돈 좀 벌리니까 좀 좋다고 헤~ 좋아하는 실패, 애 공부 잘하니까 애 공부 잘한다고 자랑 질하는 그 실패, 나이 서른 넘어 시집간다고 좋아하는 그 실패, 우리가 자랑 질 하는 모든 것이 그게 사실은 우리의 그런 실패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자리 들어갔다는 거, 그걸 증거 하라고 주께서 일부러 만남을 그렇게, 자식도 시집가게 만들고 돈도 벌게 하고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우리는 그거 좋아하는 그런 인간밖에 안 된다는 것을 뻥튀기가 그런 인간을 가지고 쌀 집어넣어서 튀기게 한 거예요.

자 이렇게 됐으면 객소리 좀 했습니다만 여러분이 70이레에 대해서 대충 알겠죠. 층으로 돼 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다. 그래서 70이레는 우리가 따질 게 아니고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 그것에 유념해야 된다. 그런데 그 사건을 이해하려면 우리부터 신분이 바뀌어져야 돼요. 멀쩡한 인간에서 짐승에게 속한 인간으로 바뀌어야 된다. 우리가 묵시적인 입장으로 되돌아가야 돼요. 되돌아가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전부 다 마귀가 아담을 꼬일 때 했던 그것에 맛이 들여졌어요. 핫쵸코, 너무 맛있어요.

질문: 7이레, 62이레, 1이레, 저것을 1이레라는 것은 신약이 1이레에 속한 게 아닙니까? 62이레는 이스라엘 역사를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까?

사건이 그렇게 만들죠. 그 사건 안에 전체가 다 들어있죠. 역사 + 성전이 깨질 때 자진해서 깨진 게 아니거든요. 짐승의 나라가 깨줍니다. 그 짐승의 나라의 정체가 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붙어있죠.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사건이 중요하려면 우리가 묵시적 존재로 달라지게 되면 우리는 짐승에게 속해야 되겠죠. 그러면 짐승에게 속하려면 어디로 가야 되느냐? 창세기 3장으로 가야 되죠. 거기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죠. 그러면 제가 어제 수요일 날 설교 내용에 봅시다. 오홀라와 오홀리바, 이게 에스겔 23장에 나오는 이야깁니다.

오홀라라 하는 것은 그녀 안에 있는 그녀의 장막이란 뜻이고 호홀리바는 그녀 안에 있는 나의 장막이란 뜻 이예요. 이 두 인물이 등장할 때 이걸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보게 되면 이쪽은 북쪽 이스라엘이고 이쪽은 남쪽 예루살렘이 되죠.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 이건 사마리아고 이건 예루살렘이다.

그런데 사마리아, 예루살렘은 이 오홀라, 오홀리바가 아니고 하나님하고 결혼해서 낳은 자식 이름이 사마리아고 예루살렘이거든요. 하나님께서 호홀라와 오홀리바와 결혼했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바로 이러한 범죄, 이러한 타락을 하나님께서 자기 인생으로 접수하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겁니다. 우리보고 묵시라고 하기 이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역사적 인물이 되셨다는 것에 우리가 모든 해석을 거기 두자 이 말이죠.

예수님께서 먼저 육신의 몸이 되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묵시가 되신 분이 어디 속에 들어왔다? 역사 속에 들어온 거예요. 묵시와 역사의 만남이니까 주위 사람들이 예수님 말을 알아먹습니까? 못 알아먹습니까? 알아먹지를 못하는 거예요. 심지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까지,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좋다. 아니다.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좋다.’ 하는데 ‘어느 장소에서 예배드리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라고 물을 때 지금 장소를 이야기해요.

장소! 철학적으로 토포스라 하는데 이 말은 어떤 논리를 전개할 때 딱 지정된 공간을 점유할 때 그걸 토포스라 합니다. 지정된 장소를 토포스라 하거든요. 항상 지정된 장소가 있어야 그걸 근거로 해서 전 세계를 해석을 하는데, 지금 토포스, 사마리아 여인의 토포스는 뭐냐 하면 이 예루살렘입니까? 아니면 그리심 산입니까? 라는 자기네 세상을 보는 기준점이 있는 거예요.

요즘 이 세상에 잘 사는 나라는 어느 나라만큼 잘 산다고 할 때 어느 나라가 기준입니까? 미국이죠. 미국이 우리의 정신적인 토포스가 되는 겁니다. 미국 손님 오면 잘 대해주고 콩고나 우간다 오면 무시해서 가버리고. ‘또 손 벌리러 왔구나. 이렇게 되고 하죠.

그런데 예수님의 토포스는 뭐냐 하면 지상에 없어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때가 곧 이때니라.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그러면 예수님 자신이 모든 해석의 중심, 토포스가 되는 겁니다. 누가 봐도 인물, 아저씨인데 서른 세 살 밖에 안 된 아저씨인데 본인이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돼요? 이해 안 되겠죠?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사마리아 여인이 이걸 이해를 했다는 거예요. 이해가 안 되는 게 정상인데 이해했다는 거잖아요. 오늘날 성령 받은 성도가 십자가라는 그 토포스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이해 안 돼요. ‘아이구, 나중에 보면 믿겠지만, 나타나겠지.’ 나중이 아니고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중심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지금! 내가 서울, 대전 찍고 부산 어디 가도 주께서는 나를, 성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중심지로 포토스로 핵심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이해를 하는 거예요. 내 인생이 내 인생이 아니고 주님이 함께 만들어 가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알아듣는 거예요. 느낌 아니까. 다 듣는 거예요.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속했지만 하나님 영광을 포기하시고 육신으로 오셨어요. 육신으로 오셔서 세상적인 시간과 같이 하면서 뭐가 발생됐느냐 하면 이겁니다. 카이로스! 우리말로 뭐냐 하면 때! 이때, 저때, 때가 되매, 그래서 성경에서는 뭐라 하느냐 “양을 치니 목자가 흩어지리라” 하는 것은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제는 자다가 깰 때가 되었나니” 이때. 이때가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는 계속 그 때가 주어져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이. 그때, 하늘에서 유황불 떨어지는 그때. 내가 어떻게 온다? “도적같이 오리라.” 역시 때!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해놓고 아직까지 안 왔죠? 구름타고 안 오죠? 그때. ”인자가 구름타고 오는 것을 너희들이 볼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때.

그 모든 때를 역사적인 입장에서는 그때를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역사적인 상황으로 그 날짜 스케줄을 짤 수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우리가 때를 알아채버리면 우리는 몸을 갖고 있습니다. 몸은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역사가 나와요. 이 시간 가지고는 주님의 때를 포착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방법이 간단해요. 저쪽의 ‘때’한테 이렇게 뒤집어 씌워서 파묻히면 되는 거예요.

그게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그 사마리아 여인이 고백한 거예요. “그때가 이때다.” 하니까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 갖다 버리고 하는 말이, 자기가 물 길러 왔으면 물 길어 와야지. 물동이 버려두고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니까 예수님이 그걸 보고 찰칵, 찰칵’ 찍어서 ”이게 바로 추수할 때니라“ 그걸 저는 지금이 뭐냐 지금이 심판 때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지금이 심판 때에요.

따라서 성도는 ‘지금이 심판이다.’ 생각하고 하루하루 살아가시면 되는 겁니다. 그게 성도의 삶이예요. 핫쵸코, 맛있어서 먹어보면 뭐하겠노, 이런 거예요. 떡이 맛있어서 하나 먹어보니 뭐하겠노. 그럼 안 먹고 버티면 뭐하겠노, 이런 거.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 책에 그 이야기가 나오는데, 나오죠? 모든 것이 헛되다. 허무에서 심판, 그것이 예수님 십자가로 말미암아 전도서가 이루어진 겁니다.

‘아빠 오늘도 성적 내려갔어.’ ‘그래 성적 오르면 뭐하겠노. 걱정하지 마. 그거 가지고 낙심하지 마. 그냥 예수만 믿어.’ ‘아빠 성적 올랐어.’ ‘오른들 뭐하겠노. 올라봐야 의사나 더 하겠나. 좋아해도 소용없는 기라.’ ‘엄마 깨졌어.’ ‘깨져도 관계 없고.’ ‘엄마, 나 결혼할래.’ ‘해도 아무 상관없고.’ ‘엄마 결혼하면 언제 행복할 건데?’ ‘행복할 필요도 없고 행복 찾지도 말고’ 지금은 심판 때에요.

재판관 앞에서 피고가 하는 말이 건방지게 ‘판사님’ ‘ 물 한 그릇 주세요.’ 판사 하는 말이 ‘지금 네가 사형 당하는데 물 한 컵 먹으면 뭐하겠노. 그냥 물마시지 말고 그냥 죽어. 너 사형이야. 이 괴씸한 거.’ 이렇게 하듯이. 이렇게 살아도 저렇게 살아도 이미 우리에게서 의미가 이미 철수했습니다.

열심히 시험치고 있는데 시험관은 이미 시험지 거두고 가버렸어요. 지금 앉아서 시험치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거 3번 답 맞습니까?’ 우리는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어요. 문제 정답도 없고 정답 아닌 것도 없고, 우리 사는 존재가 뭐냐, ‘아이고, 세상은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 심판이다. 재판중이다.’ 이걸 증거 하는 이것이 오늘날 성도의 삶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레를 봤습니다. 다니엘이 느꼈던 거, 다니엘이 보았던 거, 다니엘이 얼마나 좋았습니까? 이미 자기가 인자를 보았고 이레를 알았으니 그는 안심 놓고 죽었던 것처럼 저희들도 이 세상 유혹, 협박 받지 말고 위협 당하지 말고 편안히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가락-70이레 논문(시간의 층)131128-30강b -이 근호 목사.hwp (64.0K), Dow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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