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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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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강-에스겔 23장 25-27(애굽의 잊음)131211-이 근호목사자유게시판에스겔

69강-에스겔 23장 25-27(애굽의 잊음)131211-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211.223.103.85)

69강-에스겔 23장 25-27(애굽의 잊음)13121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3장 25절에서 2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86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3:25-27

“내가 너를 향하여 투기를 발하리니 그들이 분노로 네게 행하여 네 코와 귀를 깎아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찌라 이와 같이 내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음행하던 것을 그치게 하여 너로 그들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며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

에스겔 23장에 들어와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예언의 말씀, 계시의 말씀,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나오는 음란하다는 두 여인은 특정인간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나라, 둘 합하면 그게 이스라엘이 되겠지요, 이 두 나라 자체를 두 여인으로 소개를 했다는 말이지요. 이것은 에스겔이 자기소설을 쓴 것이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과 유다를 음란한 두 창기로 표현을 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특정국가나 나라를 사람으로 생각해서 설명하지는 않거든요.

미국은 어떤 여인 같아, 브라질은 멋진 아가씨 같아, 러시아는 보드카 마시는 터프한 남성 같아, 이런 식으로 무엇 같다는 이야기는 할 수 있어도 “러시아 남자야, 술을 왜 그렇게 먹는가?” 이렇게 러시아 전체를 특정남자로 혹은 미국을 예쁜 여성으로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해버리면 뭐가 날라 가버리는가 하면, 국가 자체가 역사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인데 그 변화된다는 사실은 빠져버리는 겁니다. 하나의 돌, 돌로 만든 형체, 나무로 만든 조각품, 예를 들어서 “어떤 집에 가면 조각품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어떤 국가를 보고 “저건 조각품이야.” 혹은 “저전 사람이야.”라고 해버리면 지금 그 국가가 뭔가 움직이면서 시간상 흐르고 있는데 그 흐름을 어떤 조각이나 어떤 사람으로 전환시키기가 우리 인간의 비유로서는 상당히 무리한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를 가지고 “음란한 여인아, 네가 바벨론이란 남정네와 애굽이라는 남정네, 그리고 앗수르라는 남정네를 그렇게도 사모해서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온갖 귀한 것으로 장식하고 네 몸을 그들에게 바치고 그들과 관계하기 위해서 애를 쓰는구나.” 한다면 국가와 국가사이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직설적으로 이야기해버리면 평소 인간 사회에서 통하는 논리로는 와 닿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와 닿지도 않는 그 비유, 비유라고 하기 보다는 음란한 여인으로 해석을 하느냐는 말입니다.

서양 체스같은 경우에 사각의 판에 줄을 그어놓고 그 안에서 말들을 옮기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장기판에 말들을 세워놓는 입장에서 이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뭐가 빠지는가 하면, 시간의 흐름, 역사의 흐름은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물렁물렁한 것이 아니고 너는 네 실체는 아무리 시간이 흐르고 역사가 흘러도 음녀는 음녀행동 하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저는 역사의 형체 화라고 하는데 역사를 고정된 딱딱한 형체로 바꾸어버리면 우르르 뭐가 사라지는가 하면, 역사라든지 시간의 흐름 같은 것은 다 날라 가버리고 거기에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장기판의 말 같은 존재가 있는 거죠.

어떤 고정된 인물이 움직인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맨 그 창녀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지요. 어제도 그 창녀가 맨 그 창녀고 오늘도 그 창녀가 맨 그 창녀고 그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저 창녀만 있고, 방구석에 자기 혼자 있는 것처럼, 지금 낮인지 밤인지 시간적 요소를 다 빼버리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급을 할 때 시간적 요소를 다 빼버리는 겁니다. 대체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려고, 어떤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지금 한참 역사가 이 순간에도 흘러가고 있는 이것을 완전히 빼버리는 겁니까?

그걸 빼버리면 딱딱한 조각품, 그것만 달랑 남는데 왜 흘러가는 시간, 우리의 역사를 다 없는 것으로 치고 다 잘라버리고 “너는 어제나 오늘이나 맨 창녀야.”라고 도드라지게 하는 의의가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오늘 본문 23장 27절 끝에 보면,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 애굽을 기억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보고 하는 이야기잖아요.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기억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구태여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를 창녀로 표현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걸 밝혀내는 것이 오늘 성경에서 제일 핵심부분에 도달되는 겁니다.

애굽을 기억하지 못하게 한다. 코미디프로에 이런 것이 있죠. 내 몸이 과거를 기억한다는 거예요. 내 몸, 이스라엘 몸이 애굽을 기억해요. 애굽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역사가 흘렀던 간에 한약 쥐어짜듯이 쫙 짜면 덩어리만 남는데 그 덩어리 자체를 음녀로 보는 거예요. 역사를 다 밑으로 짜내버리고 본체, 이스라엘의 실체를 덩어리로 만들면 그 덩어리가 음녀가 되는데 그 음녀의 특징이 뭐냐 하면, 애굽을 기억한다는 말입니다. 그 애굽을 기억한다고 추궁하면서 “애굽을 기억하는 이 음녀야.”라는 말을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지만 이 유다나라가 애굽에게 힘을 빌려서 문제를 해결하자 나설때는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벨론 나라가 침공하니 바벨론보다 더 힘이 센 것으로 보이는 애굽을 기대한 거예요. “이 음녀 같은 유다야, 네가 애굽을 기억하는구나.”라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하시기 위해서 바벨론으로부터 침공을 받는 사건과 사태를 만들어내신 거예요. 그렇다면 애굽을 기억할 때 애굽을 기억하는 방법에 두 가지가 있거든요. 하나는 우리가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을 기억하는 경우, 또 한 가지는 ‘역시 우리는 애굽처럼 살아야 제대로 살맛이 나. 애굽이 그리워.’라는 두 가지 경우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뭐냐, 출애굽 할 때 우리는 뭐만 생각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다고 생각하잖아요. 이스라엘도 그렇게 생각하고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것이 우리가 음녀라는 솔직한 본색을 노출해버린 사태가 되어버린 거예요. 애굽에서 나왔던 것을 구원으로 이해하고 감사하는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구원해준 의의와 아무 상관이 없고 오히려 네 감추어진 죄를 그대로 폭로하는 식이 된다는 겁니다. 애굽에서 우리가 나왔다고 하게 된다면, 애굽에서 우리가 빠져나와서 구원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헛된 구원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바벨론을 준비해놓았다가 바벨론으로 하여금 우리를 공격하게 되면, 우리는 그 때부터 “차라리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어.”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차라리 안 나왔으면 더 좋을 뻔 했다는 것을 더 생각하게 만드는 본성과 속성인데 이게 한약 짜듯이 짜면 나오는 음녀의 속성이 된다는 이야기죠.

제가 이렇게 하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히브리인들을 출애굽 시킨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할 때 정작 애굽에서 나왔던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고 애굽에서 나왔던 분이 따로 있어요. 그 분이 누구냐? 하나님이 빠져 나온 거예요. 하나님이 출애굽 했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이스라엘이 빠져나왔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데리고 빠져나올 때 지금 이 에스겔 23장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창녀를 데리고 나온 거예요. 창녀를 데리고 나왔는데 이스라엘은 오해하기를 ‘애굽에 살던 우리인데 이제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릴 애굽에서 빼내줬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창녀된 것들을 더욱더 노골적으로 창녀 화하기위해서, 네 본색이 창녀라는 것을 더욱 더 뚜렷하게 비춰주기 위해서, 그 속의 알맹이가 창녀덩어리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끌어내신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구원 안 받은 거예요. 창녀가 자신이 창녀인줄을 몰랐다가 창녀로 등장한 것이 무슨 구원입니까? 그게 무슨 거룩한 나라로 가는 거예요. 추접스럽고 더러운 것이지요. 추접하고 더러운 인간인데 그 정도로 더럽고 추접한 인간인줄은 몰랐지요. 하지만 하나님이 추접한 것을 애굽에서 건져낼 때 그들은 자기자신이 추접스럽다는 것은 모르고, “야, 우리는 거룩한 하나님에게 구원받았다.”라고 오해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은 생각 못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자기들이 나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게 오해를 유발시키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오해를 유발시켜서 창녀를 데리고 나옴으로 말미암아 정작 사람들이 자기 입장에서 구원을 생각했던 그 모든 구원과는 애초부터 상관없는, 인간이 갖고 있던 창녀로서의 자기본색에 불과한 거예요. 애굽에서 나왔더니 “야, 세상에! 바벨론이 이렇게 좋은 나라였을 줄, 앗수르의 남자들이 이렇게도 내 맘에 드는 것을 가지고. 저 앗수르 남정네 마음에 들기 위해서 나는 입술 칠하고 고운 옷 입고 유혹을 해서 어떻게 저 앗수르나 바벨론의 멋진 남정네들과 하룻밤을 지내볼까?”라고 바벨론과 앗수르가 있음으로서 비로소 자기의 본색을 감추지 못하고 마구 폭발하듯이 부글부글 끓는 자기의 본색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애굽, 앗수르, 베벨론같은 이방나라들이 원하는 것과 일치되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서 그들이 믿는 신들을 믿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에 대한 해석입니다. 우상숭배를 너희가 하게 된 것은 너희들의 본색이 주변나라를 보는 순간 더 이상 속일 수 없도록 마구 발휘되었고 그들과 의사소통이 되기 위해서, 그들과 일체감을 갖기 위해서 그들이 기대하고 원하는 바를 채워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는가? 애굽에서 나온 것이 너희들이 아니고, 출애굽의 목적도 너희들이 아니고, 너희와 함께 있는 하나님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 음녀인 이스라엘과 유다나라가 걸치고 있는 옷들을 벗기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잊지 말아야 될 것을 잊었다는 그 말이지요. 그걸 벗기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걸치고 있던 것은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서 한 겁니다. 그들과 사이좋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도리어 발가벗기게 만드는 거예요. 25절, 26절에 보면, “내가 너를 향하여 투기를 발하리니 그들이 분노로 네게 행하여 네 코와 귀를 깎아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찌라.”

옷을 벗기고 장식품을 빼앗는다는 이 말은 “네가 나와 함께 있다면 절대로 걸칠 필요도 없는 것을 너는 계속 걸치고 있다.”는 겁니다. 걸치는 것은 네가 하는 일이고 그걸 벗기게 함으로 말미암아 다른 나라와 이스라엘나라하고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들과 생각을 같이 한다든지 그들이 사는 방식과 소통한다든지 그들의 생각을 같이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나라가 너희들이라는 거지요. 갈라디아서 1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그 다음에 나오는 10절이 뭐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9절에서 “우리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습니다.”라고 했을 때 듣는 사람은 백이면 백 다 오해를 하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오해를 하는지 그 마음은 이렇습니다. ‘아, 우리가 저 사람들에게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 말고 다른 복음을 전하면 안 되는구나.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 사람들이 안 믿는 경우가 생기는구나. 그러니까 제대로 복음을 전해야 사람들이 믿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안 믿는 경우가 생긴다.’라고 오해를 하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해주려는 의도가 있어서 복음을 줬기에, 그리고 우리가 그 복음을 지금 가졌기에 하나님의 지시대로 그들이 납득이 되고 그들이 잘 수긍할 수 있는 바른 복음을 전해야 된다, 라는 식으로 사도바울의 말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 저 사람들 구원하려면 어떤 복음을 전해야 됩니까?”라고 할 때 사도한테 어떤 해답을 얻는데 사도가 이런 식으로 했다는 거예요. “너는 내가 전한 복음만 전하면 그들이 믿게 되어 있어.”라는 식으로 오해하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게 오해라는 거예요. 왜 오해인가? 10절에 보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고 했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사람들에게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 “저주 안 받는 복음은 뭡니까?” “사람을 좋게 안하는 복음이 저주 안 받는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사도님, 사람들을 좋게 안하고 사람들이 좋아하지도 않는 복음이 진짜 복음이라면 복음 왜 전합니까? 사람을 좋게 해야 받아들일 것인데 사람들이 안 좋아하는 복음을 전해버리면 이것을 그 사람들이 못 받아들이고 못 받아들이면 그 사람들이 구원 못 받잖아요.”라고 항의하고 싶은 것이 우리들 생각이라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항상 이 복음에 대해서 뭘 염두에 두는가 하면, ‘사람들을 어떻게 구원시키지?’ 이걸 염두에 두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어떤 잘못과 같은가 하면, “우리는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이다.”라고 그 구원의 주체가 이스라엘이라고 여겼던 그 자체가 대대로 근본적인 잘못된 생각이라는 말이지요.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 구원된 거예요. 하나님이 애굽에서 구원한 거예요. 하지만 같이 애굽에서 나왔던 그 인간들은 지금 나와 놓고는 어디를 겨냥하고 어디를 방향 삼는가 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 바벨론이 좋구나, 앗수르가 좋아, 나는 안 믿는 저 사람과 같이 재미있게 지내고 싶은데 이것이 그나마 사는 재미야.” 하는 식으로 구원받았다고 자처하면서 세상과 같이 있으니까 이것은 세상이 더 좋은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에서 빠져나오라고 하는 그 말 자체가 짜증스럽기 짝이 없는 말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내가 저 사람과 내가 얼마나 일치된 삶을 살고 서로 생각과 마음을 같이하게 되면 그것이 어떤 공동체에 포근히 잠기게 되고 그러면 그 공동체가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잖아요. 지리산 골짜기 속에 혼자 있으면 얼마나 불안합니까? 대도시로 가는 이유가 그만큼 대도시는 품이 넓은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어린아이가 엄마 품에 있을 때 어린아이가 생각하는 세계는 엄마 품 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세상의 전부입니까? 엄마품속이 이 넓은 세상의 전부냐 그 말입니다. 아니거든요. 하지만 애는 “엄마, 이제 넓은 세상으로 갈 거야.” 하지 않고 자꾸 어디로 기어들어오는가 하면, 엄마품속으로 기어 들어와서 그 속에서 그냥 보호받기를 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린애의 경우에는 그렇거든요. 나중에 좀 컸다고 가출도 하고 그렇지만 어린애의 경우는 그래요. 아무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끄집어내도 끄집어냄으로 말미암아 그 전까지는 자기가 애굽 성향으로 있다는 것을 몰랐는데 끄집어내고 보니까 긴 고무줄, 긴 용수철, 이게 안 끊어졌어요.

오히려 그런 용수철, 애굽지향의 고무줄이 나의 본성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된 겁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대처를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의 대처는,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다는 이 애굽의 의미를 그들은 나라라고만 생각한 그것에 뭘 보태는가 하면, 하나님께 대들었던 나라로서의 애굽이라는 의미를 거기에 담아버립니다.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들었던 이 모든 어두운 세력에서부터 너희는 빠져나와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하나님께 대적하는 이 모든 세상에서 빠져나올 때 빠져나오면서 하나님자신도 어떻게 빠져나오는가 하면, 어린양의 희생으로 빠져나왔다는 말이지요.

죽어서 빠져나온 거예요. 하나님조차도 이 세상에서는 살아서는 못나오는 겁니다. 어린양의 모습으로 나온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키운 그 일 년 된 어린양, 그 어린양을 하나님이 지목했다는 것은 바로 그 어린양을 통해서 뭔가 보여주고자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음으로써 이 애굽땅을 빠져나왔다, 그 이야기는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에 대해서 대들고 있고 하나님보고 죽으라고 함성 지르고 있는 이 세상 자체가 애굽이라는 겁니다. 출애굽기 15장 12절에 보면, “주께서 오른손을 드신즉 땅이 그들을 삼켰나이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오른손, 어린양이 있는 곳이죠, 오른손의 능력으로 나온 그 백성을 왼쪽으로 옮겨요. 왼쪽은 뭐냐, 바벨론이거든요. 바벨론은 애굽과 동일합니다. 바벨론으로 갈 때 바벨론에 이스라엘이 압제를 당하니까 다시 이 몸이 애굽을 기억해서 다시 애굽으로 가는 거예요. 애굽으로 갈 때 바벨론에서 당했기에 애굽이 바벨론보다 힘이 더 세니까 애굽의 힘에 의지해서 바벨론한테 구원받아볼까, 라고 생각하는 상황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만드신 것, 이제 이렇게 애굽에서 나와서 바벨론까지 가게 만들고 바벨론에서 다시 튕겨서 애굽을 지향할 때 그 애굽을 지향하는 것을 통해서 이제는 진짜 너희와 함께 있는 하나님이 출애굽의 진짜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무대로, 장치로 삼아버리시는 겁니다.

그 무대로 삼아버리기 위해서는 애굽과 바벨론, 바벨론과 애굽사이에 어떤 여인이 등장해야 되고, 그 여인은 누가 구원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없고 애굽을 잊지를 못했으니 애굽을 대신해서 바벨론과 앗수르 남정네, 세상적인 것을 그렇게 흠모하고 그들을 닮아서 일치되어 보려고 온갖 장식품으로 꾸며서 그들과 마음을 같이하려는 창녀, 손님 기다리는 창녀, 하룻밤 같이 보내면서 마음껏 즐거움을 맛보려는 그 창녀역할로 이스라엘을 세우는 겁니다.

그렇게 창녀로 꾸민다는 거예요. 꾸미는 이유가 그 꾸민 부분하고 속 알맹이하고 분명히 구분되게 하는 거예요. 꾸몄다, 뭔가를 뒤집어썼다는 것은 진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하나님이 그것을 하나하나 벗겨내는 그 기능을 이스라엘이 꾸밈으로 말미암아 충분히 보여줄 수가 있게 되는 겁니다. 여자애들 인형 옷 꾸미기 놀이가 있어요. 처음에 보면 인형이 발가벗고 있어요. 그러면 애들이 종이옷을 가위로 오려서 그 인형에 입히거든요. 입혀 놓으면 바비 인형이 돼요. 그런데 숙제는 안하고 그것만 하고 있는 것을 엄마가 보게 되면 “맨날 이 짓만 하고 언제 숙제할래?” 하고 그 옷을 다 벗겨버리죠.

그러면 원래 벌거벗은 그 인형의 속내가 다 나온다는 말이지요. 주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애굽 때의 벌거벗은 그 모습으로 다시 되돌아가게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출애굽 시켰던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오해하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그것은 아니다, 그 말이지요. 너희들 구원하려고 했을 것 같으면 바벨론을 왜 배치하고 앗수르를 왜 배치했겠습니까? 튕기고 또 튕기고, 애굽에서 나와서 바벨론까지 튕기고, 북쪽은 앗수르로 튕기고 남쪽 유다는 바벨론까지 튕겨서 그들은 자기의 진짜속내 ‘그래, 애굽이 그리워. 애굽생활이 우리에게 적당해.’라고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는 순간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자기의 본 모습, 예수 메시아를 보내시는 겁니다. 그 와중에 메시아를 보내는 거예요.

“이, 음녀 이스라엘아! 이 창기 이스라엘아! 너희들은 너와 함께 있는 하나님의 본성과 상관없이, 그 언약과 상관없이 그들을 흠모했느니라.” 여기서 우리가 낼 수 있는 결론은 그겁니다. 이스라엘창녀가 장식하듯이 꾸몄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기를 위한 종교였던 것입니다. 자기구원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고 자기가 죽어서 천국 가겠다고 한 그것을 위해서 자기 입맛에 맞는 온갖 것들로 자기를 꾸몄습니다. 그들이 그런 종교를 가진 마지막 결론은 뭐냐 하면,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것,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라도 나를 거룩한 인간이 되게 하겠다는 겁니다. 자기들은 그런 종교를 가지고 ‘경건’ 또는 ‘거룩’이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오늘 에스겔을 통해서 주신 말씀은 뭐냐, “이 추접스럽고 음탕한 여인”이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 자기구원을 위한 종교가, 가장 거룩하다고 여기는 그것이, 가장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지저분하고 더러운 음탕한 음녀의 짓이 되는 거예요. 온갖 것으로 장식을 한 거예요. 그런 장식을 해 봤자 세상에 시달리면 자기본색 다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잘 믿으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돈을 줘야 잘 믿지요. 하나님이 시간을 줘야 성경공부도 하지요. 집안에 우환이 있는데 어떻게 신앙생활을 합니까? 고부간에 갈등이 있는데 무슨 신앙생활을 합니까? 하나님은 내 우울증을 어떻게 해결할 건데요? 내 애가 성적 떨어지는 것도 기도응답으로 성적이 올라가게 해 주셔야죠.”

온갖 애굽적이고 세상적인 것, 세상에서 강한 것, 출세하고 성공하는 것, 그것이 부러워서 그것가지고 신에게 비는 것, 그 안에는 전부다 뭐냐? 나만 잘되면 된다는 것, 나만 천당 가면 되고 이 땅에서 복 받으면 된다는 이기주의의종교가 거룩을 빙자한 그것이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최악의 음탕하고 저질스러운 짓거리가 되는 겁니다. 그걸 두 자로 하면 ‘교회’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저지른 이런 행동은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다는 말은 우리도 그러고 있다는 뜻이에요.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못 벗어납니다.

제가 지난주일 낮 설교 끝 대목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벗어날 위인 나와 보라고 하세요.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좋다는 말은 하나님 찾고 예수 찾고 삼위일체 찾을 때부터 다 나 좋으라고 믿은 거예요. 그러니까 정작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죽어서 구원받았다는 사실, 하나님의 구원, 예수님의 구원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의 구원을 도용한 겁니다. 그게 창녀 짓이에요. 그렇다면 그러한 구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녀라고 지적했을 때 그 자리, 음란한 창녀라고 지적한 그 자리가 진짜 출애굽이 될 자리입니다.

놀랍고 고맙게도 충분히 음녀와 창녀라고 욕을 먹었는데 그 욕설의 자리에서 비로소 내가 나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가 오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때,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버지는 대체 누굴 구원한다는 말인가? 아버지는 어린양을 구원하십니다. 아버지가 어린양을 구원할 때 그 어린양의 주 되심을 외치기 위한 백성으로서 모집되고 택정 받은 그들이 바로 진짜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어린양 그 십자가 피 앞에서 “내가 나만 생각했던 더러운 창녀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백성, 그 백성 가운데서 주님은 주님만으로서 영광과 찬미를 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지막 준비된 출애굽, 곧 구원입니다. 그때 그 창녀 같은 인간들 입에서 나온 것은 오직 뭐 밖에 없는가 하면, 오직 주의 이름만을 부르게 되어 있어요. 주의 이름만을! 주의 이름만을 높이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 기적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자기한테 관심 끊었다는 사실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룰 수 없는 놀라운 성령의 기적입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주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성령이 임해야 가능한 기적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가 평소에 뭘 좋아하는지, 우리의 육신은 애굽을 기억해요. 우리가 육신이 있는 한 우리는 세상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창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의이름만 부르면 되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지적이 우리가 받아야 될 지적인 것을 깨닫게 해주옵소서. 시간 지나면 변하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보다도 역사도 끊어버리고 시간도 끊어버리고 달랑 남는 것은 음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발견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69강-에스겔 23장 25-27(애굽의 잊음)131211-이 근호목사.hwp (29.0K), Down: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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