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206b 울산강의-출애굽기 30장 : 사건의 물체화
20131206b 울산강의-출애굽기 30장 : 사건의 물체화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1206b 울산강의-출애굽기 30장 : 사건의 물체화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에 분향단에 대해서 좀더 이야기할게요. 분향단에 대해서 요한계시록에서 약간 추가적인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30장에서 보고 있는 성전구조가 그대로 하늘로 가요. 어린양의 보좌, 어린양의 좌석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1장부터 하늘나라 전체가 성전구조로 묘사해놨어요. 어린양은 죽기 위한 제사용도에요. 요한계시록은 이 땅에서 어린양의 역할을 완수하신 그 티를 내시면서 하늘나라의 영광의 보좌에 주로써 앉자있다고 되는 겁니다.
그러면 어린양을 봤다는 것은 그냥 하늘나라에 어린양이 계신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이 지상에 했던 것이 그대로 이어지면서 효력을 내면서 어린양으로써 다시 지상을 향하여 기능을 발휘하는 거예요. 그러면 천사가 파견된 장소가 어린양의 보좌에서 천사들이 나와서 이 세상을 심판하는 거죠.
천사들이 심판하고 활동을 하는데 이 점을 분명히 해야 돼요. 천사가 심판할 때 믿는 사람이든 안 믿는 사람이든 다 힘들게 해요. 이유가 뭐냐 하면, 이것은 이 세상에서 고생한다는 것은 아담의 죄 값으로 당연히 고생을 해야 돼요. 발상을 바꿔봅시다. 왜 이렇게 고생이 없지? 오히려 이것을 이상히 여겨야 된다니까요. 교도소가 왜 이렇게 한가하지? 그걸 이상히 여겨야 돼요. 분명히 오늘도 죄 많이 졌을 텐데 오늘은 죄 값을 안 치루고 넘어가나? 내일 것까지 모아서 한꺼번에 조지려하시려는가? 이렇게 생각하셔야 돼요. 어차피 이 세상은 천사들이 모든 걸 심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출애굽 할 때 애굽사람이나 히브리 사람이나 다같이 하나님의 심판에 참여돼요. 마지막 열 번째 재앙 때 장자들 죽을 때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자기 아들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아들 빼앗기기는 애굽인들도 빼앗기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빼앗겼어요. 도로 자기 아들로 되받을 수는 없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죽은 채로 받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 채로 받지요. 받을 때 브랜드가 바꿨어요. 전에는 내 자식인데 이제는 하나님의 장자.
하나님의 장자란 말은 너는 내가 택한 가정이라는 증표가 아들이라는 신체를 통해서 지정돼있는 거예요. 그러면 아들 죽으면 저주일 것이고, 아들이 또 자식을 낳으면 하나님께서 이 가정을 축복하신다는 그런 증표가 돼요.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지시와 명령은 아들이 기억했다고 그 다음 아들에게 축복할 때 전수하고 전수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축복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 전달이 축복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양이 축복, 소가 늘어나는 게 축복이 아닙니까? 이스라엘, 약속의 땅의 특징은 뭐냐? 말씀이 우선이에요. 말씀대로 살면 양이고 소고 늘어나고 말씀대로 못 살면 곡식도 안 되고 소도 죽고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께 아브라함이 제사 드릴 때 양, 염소를 바쳤잖아요. 왜 바쳤느냐 하면 양, 염소가 약속의 땅에 소속된 하나님의 것이에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하나님이 받아요. 우리 것은 안 받습니다. 또 하나님은 누굴 받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을 받아요.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받기 때문에 따로 이스라엘 것이라고 챙길 게 없어요. 이 몸 전체를 드리는데. 여기 지갑이 있거든요. 이 몸 드리겠습니다. 해놓고 지갑은 빼놓고요. 이 몸에 붙은 건 다 바친 게 되기 때문에 그래서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어린양으로 성전으로 완성됐는데 특히 분향단이 요한계시록에서 뭐로 돼 있느냐 하면, 기도, 땅에서부터 올라가요. 8장 3절에 보면,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하나님의 보좌와 가장 가까이 있는 성전의 구조가 분향단이라 했지요. 그 분향단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이 땅에서 성도의 기도라 했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기도라는 개념자체를 수정하자는 겁니다. 기도를 한다는 것은 기도가 시작이 아니고 기도가 모든 것의 마무리 짓는 것이다.
병원에 가서 잠이 안 온다고 할 때 이상한 주사를 하나 놓게 되면 잠 오는 주사를 놨으니까 점차 어떤 현상이 나타나겠습니까? 잠이 오겠지요. 그러면 그게 본인이 잠자는 거예요? 외부에서 잠자게 한 겁니까? 외부에서 잠자게 한 거지요. 기도란 외부에서 기도하게 한 겁니다. 그것만 분향단으로써 하나님의 보좌에 도달이 성사가 돼요. 내가 한 기도는 성사가 안 됩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에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했는데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주의 이름이 뭐냐 하면, 이름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살아있지요. 살아서 뭐하십니까? 살아서 활동하잖아요. 이름의 역할은 활동이에요. 모든 성도를 성도답게 하는 분류작업, 활동이거든요. 활동이 압박을 가하게 되면 성도의 기도가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 없게 만들 때 그게 주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가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시다. 율법을 우리가 못 지키듯이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도 우리가 못 지켜요. 성경말씀에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은 주께서 그 말씀대로 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교회라는 게 성경에 나오지요. 에베소서에도 나오고. 그러면 교회가 있습니까? 성경에 교회 나오니까 교회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교인 뺏겼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게 성립돼요, 안 돼요? 교인 뺏겨서 교회 문 닫았다? 교회 문 닫는 게 성립됩니까? 지금 성경에도 없는 엉뚱한 교회를 생각하니까 신천지에 다 뺏겼다든지 그런 소리 나오는 거예요. 우리 교인이 그리고 다 갔다든지, 교회가 문 닫아야 된다든지.
교회가 문을 닫아요? 교회도 문이 있습니까? 천국엔 문이 있는데 교회에는 문이 없지요. 에베소서에 교회가 있지요. 그리스도는 교회 머리다. 교회가 있으면 우리가 믿을 교회는 무슨 교회밖에 없습니까? 새롭게 순이 나는 새순교회? 아니에요. 우리들끼리 모이는 우리교회? 아니라니까요. 그냥 교회, 그리스도 몸 믿으면 되는 거예요. 교인을 빼앗기다니? 주님도 참 어지간히 무능력한 분이다. 자기 교인을 마귀한테 다 빼앗기다니.
교회 문 닫았다. 교인 빼앗겼다. 그게 무식한 것처럼 기도도 내가 한 기도는 무식한 거예요. 우리가 기도할 수 있어요. 안 받을 기도만 해요. 그러나 주께서 압력을 가해서 주의 이름으로, “내가 살아 있잖아. 여기 있잖아. 내가 살아 있어서 너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 거야.”라는 식으로 기도케 하는 기도는 주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고 그 기도는 바로 하늘나라 어린양의 보좌에 상달됩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분향단이라고 소개하는 거예요. 그걸 근거로 해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분향단은 하나님의 지성소와 가장 근접하게 만나는 마지막 접촉지점에 있는 인간 편에서 마지막 모습이 분향단이라는 물체가 되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좀더 구체화하면, 시편 65편에 보면 나옵니다. 2절에 보면,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제가 옛날에 이런 강의했어요. 기도를 할 때는 그냥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제단의 제사가 응답됐을 경우에만 기도할 수 있다고 여러 번 이야기한 것 같아요.
여기 보면,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라고 돼있거든요. 기도가 응답된 이유가 3절에 나옵니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사람이 죄를 품으면 듣지 않습니다. 어디 나오느냐 하면, 시편 66편 18절에 보면,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인간은 율법 앞에서 죄인 아닌 자가 없어요.
기도한다는 말은 기대한다는 뜻이거든요. 기다린다, 소망한다, 목표로 삼는다. 사람이 실망할 때가 언제냐 하면, 뭔가 은근히 기대했을 때 실망과 허탈이 많습니다. 내일 0시 20분에 월드컵 조 추첨해요. 11시에는 김연아 경기하거든요. 지금 은근히 기대하고 있어요. 제일 실력 떨어지는 나라와 같이 편성이 되어서 16강에 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것도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거예요. 그게 죄에요. 그러니까 그 기도에 응답 안 하지요. 월드컵 조 추첨과 하늘나라와 무슨 관계있습니까? 주님께서 팬티 입고 박지성처럼 오십니까? 아니잖아요.
주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에요.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죄가 있어야 되겠지요. 하나님께서는 죄 짓게 해서 죄 용서로써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거든요. 그러면 우리가 짓는 죄가 뭐냐 하면, 조 추첨입니다. 조 추첨이고 김연아 선수고. 김연아 선수, 우리시대에 왜 태어났어? 200년 뒤에 태어나든지, 안 그러면 200년 앞서 태어나든지 하지 왜 지금 태어나서 김연아 넘어지면 아사다 마오한테 지면 우리는 기분 나쁠 준비부터 하고 있어요. 마음 준비가 벌써 기대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주께서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놓는 겁니다. 주께서 살아계셔서 우리가 평소에 주님을 전혀 안 좋아해요. 김연아 좋아하고 조 추첨에서 좋은 조에 편성되는 그걸 좋아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조건이 뭐냐 하면, 나를 잊어버리는 경우에요. 나를 잊어버리는 경우에 우리가 그런 죄에 빠지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0시 20분에 조 추첨한다는데 0시 15분에 누가 로또복권에 당첨됐습니다. 20억이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조 추첨 강팀과 붙어도 나의 기쁨에 손상이 가지 않습니다. 20억을 손에 쥐었다는 여기에 내가 이전하다보니까 그 소식 들리기 전에 조 추첨 잘 되기를 바라는 여기에 내 기대가 있었잖아요. 그런데 20억에 빠지면 조 추첨이 브라질과 붙어도 아무 상관없어요. 이것 때문에 내가 마음이 아프거나 괴롭지가 않지요.
제가 로또 20억 이야기를 했는데 이렇게 됐다고 문제 해결 된 건 아니고 내가 다른 더 좋은 게 있어서 잠시 자리가 비껴났을 뿐이지요. 주님께서는 우리는 십자가 안으로 옮겨 버려요. 십자가에 안겨버리면 김연아가 폼을 너무 잡아서 세 번 돌려다가 넘어지고, 조 추첨은 브라질과 붙어서 16강은 날아가 버려도 상관없어요. 양쪽 다 내가 없으니까.
이게 0.5초 순간에 와요. 짧은 순간에. 믿은 좋은 사람은 3초 가는데 아주 짧은 순간에 와요. 왔다가 사라져요. 왜 사라져야 되느냐? 온 것은 내가 가져버리면 그걸 가질 나를 따로 만들어요. 나는 은혜 받았다고 간직하기 때문에 가지기 전에 후딱 가버려요. 다음에 또 지적하기 위해서. 우리가 다음에 또 자랑질하는데 거기 찾아갑니다. 그러면 그 3초 동안에 무슨 기도하겠어요? “주여,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든지, “세상이 이렇게 썩었을 줄 몰랐습니다.” 할 때 그 기도만이 하나님의 보좌와 교신이 성사돼요.
시편 65편 3절에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내가 죄를 품으면 기도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 뒤에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주께서 사하시니까 이미 하나님께 속죄 받은 사건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그 속죄의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물체로서 인정해주는 겁니다.
다시 오늘 본문 30장 9절.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며 번제나 소제를 드리지 말며 전제의 술을 붓지 말며 아론이 일 년 일차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왜 이제 물체에다 속죄하는 이유를 알겠지요. 속죄 받는 이 자리가 기도하는 성도되기 위해서 주께서는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주의 활동 항목 속에 출애굽기 30장 10절이 포함돼있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분향단에다 속죄했지만 지금은 누가 분향단입니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우리가 분향단으로 주께서 그렇게 간주하시는 거예요. 그 대신 주님은 어린양의 보좌가 되고. 우리는 통째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일 년에 딱 한번만 속죄를 하지요. 그런데 히브리서에 보면 일 년에 한번이 아니고 단번에 끝내버렸습니다. 매년 드릴 필요 없이 완전하게 속죄가 돼버린 겁니다.
영원한 속죄가 되기 위해서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영원한 죄인이 돼야 됩니다.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고맙게도 마귀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들뜨게 만들고, 십자가보다 더 좋아지는 것이 눈에 확확 들어오게 만들고, 이제는 예수 없이도 살 수 있는 자신감도 솟아나게 만들어서 이제는 말씀 들어도 듣지도 않고 신나게 돈 벌이하는데 정신 팔리는 그런 죄를 짓게 하시는 거예요. 적당하게 굽혀야 돼요. 너무 뜨겁다고 뒤집어질 때 “주여, 제가 잘못됐나이다.” 하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갈 수 있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십니다. 물론 너무 자주 뒤집어지면 아파요.
지금까지 한 걸 간단하게 요약하게 되면, 우리가 바로 사건화 된 물체다. 우리는 성소의 비품이었다. 이 물건이 신약 되면 인간으로 바뀌지요. 그러면 구약에는 없느냐? 있습니다. 여기 12절에 나옵니다.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 말 참 어렵다. 생명의 속전. 속전이란 죄 용서하는 돈. 생명이란 영원한 생명, 영생. 영생 주는 속전을 여호와께 드려라. 그러면 돈 주면 구원받습니까? 그런 게 아니고 생명을 돈 내는 행위로 표현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취지입니다. 그러니까 돈 내고 구원 못 받아요. 돈 냄을 당하면 구원받지요. 말 한 끈 차이인데 어려워요. 돈, 백날 십일조 해도 구원 못 받아요. 돈 냄을 당하면서 구원을 받지요. 그러면 시장에서 콩나물 사는 것도 속전이 되고, 애들 피아노레슨 비용도 속전이 되고. 왜냐하면 말씀을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이 말씀대로 우리라는 육체, 세포덩어리를 물체로 간주해요. 이 물체로 출애굽기 30장 12절의 말씀을 주님께서 살아계셔서 실현에 옮기시는 거예요.
그래서 헌금한다는 자체가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 말을 분명히 해봅시다. 헌금하지 말라는 것이 한때 기쁜 소식으로 들릴 때가 있어요. 많이 오해했습니다. 그게 기쁘다는 말은 뭔가 수상하다는 뜻이고 오해한 거예요. 목사가, “여러분 헌금하지 마세요. 헌금 안 해도 구원받습니다.” 이 말을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이렇게 새겨듣지요. 헌금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하라 하셔서 우리를 이용해서 헌금하게 하는 겁니다. 이렇게 나와야 돼요. 그렇게 나오는지 확인하면 다들 좋아해요. 뭔가 수상하다. 내 취지가 제대로 전달 안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헌금을 안 해도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어떤 감을 줄 수 있느냐 하면, 예수 피를 믿는 사람은 더 이상 헌금과는 담 쌓았다. 헌금 안 해도 상관없어. 여유 있으면 몇 푼 내고 없으면 한 푼도 안 내고. 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내겠지. 이 뻔뻔스러움까지 주께서 용서하시니까 난 뻔뻔스럽게 나가겠다. 이렇게 계산하신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씀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가 아니라 우리 허락 없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 살아계심을 증언케 하시는데 어떤 사람은 봉사, 어떤 사람은 헌금, 어떤 사람은 청소, 어떤 사람은 선교사로 하는 거예요.
헌금 안 해도 구원받는다는 말은 지금 당신 자체가 주 앞에 드리는 헌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에서 아이들 돌보는 돈도 내 돈이 아니고 하나님 돈으로 유치원 보내고 공부시키고 하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니까 어떤 분은 말하기를 그렇게 헌금 안 해도 교회가 운영이 됩니까? 하는데 아까 배웠지요. 그 교회라는 개념은 잘못된 개념이에요. 교회 만들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디모데전서에 보면 장로 된 자, 집사 된 자가 나오지요. 감독, 장로, 집사로 교회 만들라는 뜻이 아니고 이미 있는 교회에 감독, 이미 있는 교회에 집사라는 뜻입니다. 설명하면 쉬운데 막상 다시 일상에 들어가면 또 A라는 특권을 발휘해요. 이것은 집에 쓸 돈, 이것은 교회에 낼 돈, 또 구분한다니까.
그래서 교회에 헌금하다 보면, 나 혼자 쪼다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요령껏 안 내도 교회재정 돌아가는데 내가 미쳤다고 내나. 바보 같이 나 혼자 꼬박꼬박 절기헌금 냈네. 한 달 쉬고 가야지. 그런 되도 않는 통박을 굴린다니까요. 우리 몸 자체가 바쳐야 될 헌금입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하나님이여, 이방인들을 제물로 바칩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해서 복음 아는 이방인을 제가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돈을 드리는 것은 생명의 속전, 누구 돈입니까? 하나님의 돈은 하나님께 냈을 뿐이에요. 왜 돈을 다 바치지 여기 13절에 보면,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왜 이렇게 액수를 정하느냐? 왜 액수를 정합니까? 그 질문을 확장하게 되면, 왜 속죄제가 일 년에 한번밖에 없습니까? 왜 상번제를 하루 세 번 드리지 않고 두 번 드립니까? 양을 열 마리, 스무 마리 잡지 않고 왜 일곱 마리입니까?
그것은 율법 자체가 이 땅에서 통용되는 범위 내에서 제정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그 율법을 지킴으로써 나는 할 것 다했다는 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십분의 일 드렸으니까 나는 이번 달 헌금 다 했어.” 내가 헌금 자체인 줄 모르고 나는 헌금을 낸 사람이라고 간주하고 싶은 우리의 심성, 일상생활이 그러니까. 어떤 범위를 정해주면 그 범위까지 함으로써 나는 지켰다고 하는 인상을 우리는 평소생활에서 그걸 받거든요. 율법은 바로 일상생활에서 끄집어내서 인간에게 그런 죄들이 있다는 것을 펼치기 위해서 제한을 둡니다.
"나는 믿음 좋은데 아침, 저녁만 하지 말고 상번제를 점심에 한 번 더 드려야 되겠다." 이것은 지 기분 따라 하는 거예요. "하지 마. 시키는 대로 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말은 특권이 누구한테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A이고, 우리는 -A에요. 우린 특권이 없어요. 주님이 모든 특권이 가졌다는 그런 마음이 없으면 어떤 율법을 지켜도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거짓말을 안 하였나이다.” 이러면 벌써 그게 바로 인간들끼리 거짓말 안 한 것을 하나님 앞에 거짓말 안 한 죄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처럼. “오늘은 마음속으로도 간음을 안 했습니다. 참 잘했지요. ‘참 잘했어요.’ 도장 찍어 주세요.” 꼭 자기 의를 뭔가 따로 끄집어내려는 자세, 그런 것이 인간은 아무리 애를 써도 율법을 지킬 수 없고 율법은 우리 입을 막고 사실은 모든 것을 무너지게 만드는 겁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켰는데 상관없이 고난이 온 사람이 욥입니다. 욥은 당대의 의인이었지요. 친구들도 찾아낼 수 없었어요. 욥이 죄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서 만들어진 죄밖에 없습니다. 고난 오기 전까지는 죄가 없어요. 고난이 옴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비로소 그는 죄인 된 것을 본인이 알게 된 겁니다. 그게 축복입니다. 내가 있을 자리가 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게 축복이고 실제로 그렇게 된 상황 자체가 축복이에요. 내 생명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몸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생명은 하늘에 감춰졌다는 골로새서 3장 4절의 말씀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게 축복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하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그 말씀을 주게 되면 사람들이 그 말씀 지키려고 나름대로 노력할 게 아닙니까. 그 노력하는 중에서 드디어 자신의 감추어졌던 속마음이 다 까발려지는 거예요. 죄가 다 튀어나오는 겁니다. 보물을 무슨 수로 하늘에 쌓아둡니까? 던집니까? 중력 때문에 도로 내려오는데. 교회에 헌금으로 갖다 바칩니까? 하나님께 바칠 방법이 없는데요. 안 되는 겁니다. 오른손이 한 걸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없고요. 기도할 때 네가 필요한 것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라는 것을 우리가 지킬 수 없습니다. 금식할 때 기름은 바를 수 있어요. 하지만 금식하고 금식 안 한 걸로 여길 수는 없어요. 참 어려워요.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내놓으라는 이 말씀을 인간은 못 지킵니다. 왜냐하면 왼뺨을 내놓을 때 항상 의식하는 것은 “너, 오른뺨을 때렸잖아.” 하는 것을 잊을 수가 없어요. 오른 뺨을 때렸으니까 왼뺨을 내놓잖아요. 그러니까 왼뺨을 내놓았다는 말은 너는 날 때린 적이 있어. 하고 꼬깃꼬깃 기억하고 있거든요. 주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고 오른뺨을 때리더라도 안 맞은 걸로 여기라는 뜻이거든요. 누가 오리를 가자하거든 십리를 가주라는 말은 오리 갔다고 애 먹었다는 걸 잊어버리란 뜻입니다. 누가 그렇게 살아갑니까?
심지어 제일 무서운 말이 뭐냐? 오늘날 자본주의사회에서 제일 무서운 말이 누가 돈을 꿔달라고 하거든 그냥 줘라. 미쳤습니까? 시험들 해볼까요? 산상설교 하신 이유가 누가 돈 빌려달라고 할 때 그냥 주라는 그것을 우리가 지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때부터 슬퍼진다는 사실입니다. “돈 가져가라. 안 갚아도 돼. 저 돈 벌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또 찾아오면 또 줘야 돼.
베드로가 용서를 자기 딴에 일곱 번까지 봐주겠다고 했어요. 일곱 번이면 인간적으로 많이 봐준 겁니다. “베드로야 심하다. 다섯 번까지만 봐줘라.” 이럴 줄 알았지. 베드로가 율법을 지키겠다고 나설 때 율법의 진수가 나옵니다. 율법은 항상 지켰다고 여기는 경계선을 손에 잡힐만하면 달아나버리는 경계선으로 확장시켜버려요. 일흔 번씩 일곱 번. 일곱 번 따라오는 것도 헉헉거리면서 따라왔는데 거기다가 490번을 따라갑니까. 내가 베드로 같으면 490번 용서합니다. 주께서 일곱 번에, 일곱 번에, 일곱 번 합니다. 이제 왔어? 진작 그러지.
차라리 그러지 말고 눈물로 향수 뿌렸던 막달라 마리아처럼 모든 걸 주한테 맡기면 되는데 이것은 자기가 A라는 특권으로 구원하는 사건을 자기 육체로 만들어보려고 마치 향 피우면 향내 나듯이 자기 속에서 태우면 구원의 향기가 나는 것처럼 왜 도 닦는 그 짓을 합니까? 말이 안 되지요. 지금도 교회 가면 도 닦는 일 많이 해요. 크리스마스 되면 유난히 도 많이 닦지요. 새순교회는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지킵니까? 안 지키잖아요. 크리스마스는 성경에 없으니까. 안 지키는 방법은 애들과 같이 놀고.
그 다음에 15절에 보면,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이것 예리하지 않습니까? 아까 한 말 그대로지요.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반 세겔 내라 하는데 “나는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았고 가난한 사람들 고려해서 적어도 반 세겔은 부자한테 몇 푼 안 되는데 더 내야지.”라고 오버하지 말란 말이죠.
그런데 실제로 한국교회는 오버해요. 구약에는 십분의 일 내라 하지만 신약에는 복음을 알았으니까 더 많이 내야지. 스스로 김정은한테 알아서 충성하는 사람 있잖아요. 참 가관입니다. 하여튼 율법만 보면 이걸 어떻게 지킬까 궁리하는데 궁리 자체가 죄입니다. 속전 내는 죄를 죄 용서하는 돈을 내면서 죄를 짓고 있는 거예요. 돈 내면서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왜 부자 됐을까요? 부자 되더라도 반 세겔 낼 수 있는 사람 되라고 부자 되게 한 거예요. 말이 원인과 결과가 뒤바뀌고 엉망진창 됐지요. 부자라도 너 내지 말라는 말은, “만약 네가 부자가 될 경우라도 돈과 구원과 상관없다는 사실을 아느냐? 어떤 경우라도 부자가 구원되는 건 아니라고 믿지?” “믿습니다.” “돈 다 가져와라.” 이러면 갑자기 하나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다른 것은 되고 이것만은 안 된다고 나오지요.
오늘 강의는 사건이 물체가 된다. 왜냐? 하나님 존재는 우리 존재와 만날 수 없습니다. 만날 수 없는 것을 주께서 성사시킵니다. 성사시키기 위해서 우리의 존재를 물체로 바꾸는데 그냥 물체로 바꾸면 안 되니까 사건이 담긴 물체가 되는 겁니다. 이 물체에서 사건이 끄집어내는 것은 주님의 몫이지 우리 몫이 아닙니다.
그런데 끄집어내는 방식은 반드시 속죄라는 형식으로만 끄집어낸다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기도, 헌금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주께서 우리를 용서했습니다. 저는 주님께 십자가 피가 사건화 된 하나의 물체에 불과합니다. 사물인 것을 고백하면서 이 땅에서 우리로 하여금 살게 하시는 거예요. 따라서 그 삶을 감당하기 위해서 갈수록 많은 죄를 져야 됩니다.
사실은 죄를 지어야 된다고 해서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이래나 저래나 죄 짓게 돼있어요. 말을 바꾸겠습니다. 내가 많은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의라고 여긴 것마저도 죄고, 그 죄를 알게 하는 그것이 살아계신 주의 이름이 우리를 물체로 다루고 주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17절 봅시다. 거기에 물두멍이 나오는데 이게 세숫대야입니다. 크기는 안 나와 있어요. 다만 놋으로 만들라고 나와 있습니다. 21절 봅시다.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죽기를 면하라는 말은, “~하면 죽는다.” 이것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 그 이후에는 죽기를 면치 못한다. “~하면 죽는다.” 할 때는 아직 안 죽었어요. 하면 죽게 돼요. 그런데 이쪽은 이미 죽은 것을 주께서 속죄함으로써 살려냈어요. 만약에 이런 짓을 하게 되면 너는 도로 죽어버린다는 거예요. 앞의 이야기가 생명의 속전이잖아요. 죄 용서해줄까, 말까가 아니라 이미 용서해주기로 돼있기 때문에, 이미 영생 얻었기 때문에 돈을 내라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여기 죽는다는 말은 영생을 받았는데 손을 안 씻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건 뭐 죽어야지요.
노아 때 방주 타고 왔지요. 뒤에는 우리가 모른다고 치고 방주 타고 왔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뭘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셔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셔서 우리는 이제부터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겠지요. 그게 오해라니까요. 만약에 그게 맞는다면, 방주에서 나와서 우리가 어떤 짓을 해도 더 이상 심판이나 죽는 게 없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창세기 9장에 들어오게 되면, 누구든지 생명의 피를 먹는 자는 죽으리라고 돼있다고. 죽이려면 진작 죽이지. 물에 빠져 죽으나 사람 때려죽이나 죽기는 마찬가지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마찬가지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은혜 안 받은 상태에서 죽은 것과 은혜 받고 죽은 것의 죽음의 질이 달라요. 성경 참 어려워요.
자연 상태와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초월적 상태, 이 층을 구분합시다. 자연 상태는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미 죽었어요. 죽은 자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연 상태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어요. 언약을 주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로 비로소 속죄가 되고 영생의 속전, 죄 용서하는 돈까지 주고받는 그런 사이가 된단 말이지요. 그런 사이 될 때 죽음은 자연스런 죽음이 아니고 언약에 의해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은 죽이는 요소가 있다는 거예요. 같은 죽음이라도 자연적 죽음은 죽음의 내막이 많이 들어있지 않아요. 하지만 은혜 받고 난 뒤의 죽음은 그냥 죽음이 아니고 심판의 죽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옥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암시하고 지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적으로 살았다가 죽은 사람들은 그냥 죽은 사람이 아니고 자기도 나중에 가보고 알았지요. 우리가 죽는다고 하는데 사실은 인간은 죽지 않습니다. 마귀도 죽지 않아요. 천사도 죽지 않아요. 죽음은 아예 없어요. 왜? 죽은 자도 무덤에서 다시 부활하기 때문에. 나와서 한쪽은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 가는 것으로 죽음이라고 했구나. 그럼 진작 이야기하지. 진작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가, 인간이 죄를 짓고 주께서 준비된 은혜와 사랑의 깊이만큼 죄와 죽음과 심판의 내용도 같이 심화되고 깊어지는 거예요. 학습 가운데 심화학습이 있잖아요. 점점 더 내용이 깊어져요.
그 일을 이스라엘이 담당하면서 그들은 좀 더 깊이 있는 죄를 짓는 그런 사명을 받고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우상을 섬기든 어떤 짓을 해도 주께서는 그냥 묵인해요. 하지만 이스라엘은 조금만 어기면 이 창기 같은 이스라엘이라고 하면서 자기 백성을 욕하면서 나중에 멸망시키고.
바벨론은 마르둑 신(원래 태양신에서 나온 신)을 섬기면서 온갖 나쁜 짓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망하다고 하면서 즉각 안 망하고. 이스라엘은 즉각적으로 떨어지고. 그만큼 죄에 대해서, 용서에 대해서 민감하게 대했습니다. 그런 백성으로 언약 있는 백성으로 다루시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날 성도들은 세상을 볼 때 상당히 예민하게 봐야 되는 겁니다. 세상을 그냥 세상적으로 보는 게 아니고 십자가 은혜가 고맙다는 것을 민감하게 느끼면서 살아야 되겠지요.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31절, 32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이것은 너희 대대로 내게 거룩한 관유니 사람의 몸에 붓지 말며” 사람이 직접 거룩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인간이 사건화 되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간여하는 방법은 없습니다. 사건이 개입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의 성전을 이루는 벽돌, 하나의 장치의 일부가 되어서 같이 움직여야 되고 말씀에 종속돼야 되고 그걸 통해서 우리는 죄의 깊이와 병행해서 그 죄마저 용서하시는 새롭게 준비된 하나님의 새로운 용서의 방법을 또 유발시키는 유발 요인으로 살아가야 돼요.
성도는 죄 지을 때마다 이런 죄 같으면 지옥 간다고 했는데 그것마저 용서가 되는, 또 무슨 죄를 어쩔 수 없이 짓게 됐는데 죄 아닌 줄 알았는데 나중에 은혜 받고 보니까 죄인데 이런 죄마저 주께서 또 용서될 정도가 십자가 피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될 때 성도는 날이면 날마다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폭이 더 커질 수밖에 없지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움직임이 주의 움직임과 함께 병행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지금 주님 살아계셔서 우리를 통해서 십자가 증거하는 일에 우리가 종사하는 이 자부심을 갖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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