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따르기
Re..마 16:24-25 (예수님 따르기)
이름 : 이근호(IP:)
예수님 따르기
2004년 7월 4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16:24-25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당부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왕 선악과를 따먹고 죽게 된 우리들에게 요즈음 시대에는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예수님 따라 오너라"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현실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쉴새없이 자기 나름대로 현실이라는 것을 조성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우 사육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 현실이란 한우 값이 나아지는 그 경제 상황을 염두에 두게 되고 채소를 키우는 사람은 채소 값이 오르는 현실을 고대하는 그런 현실관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밖에 그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바는, "예수님을 따라가거라"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현실이란 사실은 자기가 만들어낸 망상에 불과한 것이고 진정한 현실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를 때는 반드시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은, 자기가 생각하는 그런 현실관보다 예수님이 소개하는 현실이 더 확실한 정확한 참 현실인 것을 인정해주는 것을 뜻합니다.
즉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자기를 낮추고 겸손하게 굴면 자기가 염두에 둔 현실의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아예 현실관 자체를 교체해 버리겠다는 다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정도까지만 우리 인간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뭔가 더 보태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아오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필수적으로 알아야만 합니다. 십자가 사건은 무슨 의미를 띠고 있을까요? 로마서 8:3를 보겠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여기에 보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도대체 육신의 정체가 무어냐 하는 겁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육신의 속성은 그저 죄 덩어리 밖에 없음을 확실히 보여주자는 의도로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한 하나님의 아드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가차없는 형벌과 저주로 인해 죽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이로서 육신 그 자체인 인간의 정체는 드러났습니다. 인간은 곧 죄 덩어리였던 것입니다. 연탄 덩어리 같은, 숯 덩어리 같은 죄 덩어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어떤 공직에 있든지 상관없이 진정 제대로 된 새 현실 세계에 들어가려면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겁니다. 즉 자신이 죄 덩어리인 채 어떤 일에 직업인으로 종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겁니다.
목사의 설교도 마찬가지로 죄 덩어리입니다. 목사는 설교함으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구원받는 겁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육신의 죄를 확정지어진 바 됨' 그 자체를 자기 일로서 짊어지고 자기를 부인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가야 영생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과연 기독교나 천주교 내에서 과연 이 말씀이 제대로 통하게 될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십자가'를 안 지면서도 구원이 되는 방식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기독교나 천주교는 자신들의. 거대 교단을 마치 하나님의 계시인 양. 하나님의 뜻인 양 여기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성시화 하겠다는 겁니다. 자신의 종교로 정복해 버리겠다는 겁니다. 이들은 기독교가 마치 하나님의 계시로 여기고 있습니다.
만약에 스스로 천주교 신자라고 여기고 천주교 미사에 참여하고 막 성당 밖으로 나왔다고 칩시다. 무엇을 건지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세속되고 더러운 이 세상에 비해서 천주교 있음, 그리고 성당 있음을 얼마나 감사하고 그 존재를 긍정하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덩달아 수녀나 신부의 활동도 좋게 볼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무엇이 빠져버리는가 하면, 바로 '자가 십자가 짐'이 빠져 버린 것입니다. 그 원인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도 없는 교단의 활동을 마치 하나님의 활동인 양 제 마음대로 현실화시켰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어떤 목회자는 한국 기독교의 비리와 존경스러운 목사들의 타락에 실망을 느끼고 자기만은 제대로 목회하겠다고 따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되니,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이 주는 현실은, 이제 '완전한 자기 교회'라는 것으로 대체됩니다.
전에는 같은 기독교 교단에 속하여 불교 세력을 꺾어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겼다가 이제는 이 세상의 모든 교회는 다 썩었고 오직 자신의 교회만은 참으로 건전한 교회라고 여기는 그 현실관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여전히 그 안에서 '자기 십자가 짐'이 빠져버리는 엉터리 현실관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회자가 이번에서 자기 목회 교인들에게 실망을 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회자는 그만 자기 자아에게로 후퇴해버립니다. "에라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내 자아만 바르게 살면 그만이지"라는 투로 나갑니다.
그런데 이 목회자란 애초에 '자아'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즉 인간에게는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자아'라는 것이 없습니다. 사실 그런 것은 악마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절대화하면서 살아가고 허구를 심어준 결과에 불과합니다.
자아는 마치 유령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대학교란 없습니다. 단지 총장이 있고 교직원이 있고 학생들이 있고 캠퍼스의 나무와 울타리와 잘 정돈된 잔디밭이 있을 뿐이지 어디에도 '대학교'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모아놓고 대학교라고 그저 이름 붙여주는 겁니다.
이처럼 '자아'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두뇌와 사지가 있고 몸체가 있지 자아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아란 그런 것들이 모여놓은 가운데 생겨나는 겁니다. 따라서 자아가 자아를 관리하는 식의 자아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남에게 욕을 얻어먹으면 다리에서 뛰어내려 죽고 싶은 충동까지 느낍니다. 애매하게 사지와 몸체와 두뇌는 덩달아 파괴되는 대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따져보세요.
욕이라는 것은 보든지 듣든지 그저 잉크 자국이나 음파의 높낮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런 욕을 들었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자기 사지 지체를 이동시켜 다리에서 뛰어내린다든지 아니면 상대방을 칼로서 죽인다든지 행동을 왜 하게 됩니까?
그것은 자신을 절대시하는 욕망의 화신으로 인간의 육신이 지배받고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이 모든 착시현상은 바로 인간의 배후를 조종하고 있는 악마의 활동으로서 인간의 자아를 신성시하고, 최고의 우상으로 신봉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달리 이야기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욕망의 조종을 받는 자아로서 제멋대로 예수님을 평가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떡을 얻어먹을 때는 자칭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고 여긴 자들이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의 자아상에 의하면 예수님은 꼭 필요한 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신 데라면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자아상을 인정치 않았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고 단정했습니다.
즉 자신의 육신이 요구하는 그런 자아상을 갖고 예수님을 필요로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요구하시는 것이 아닌 엉뚱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자의 피를 마시고 인자의 살을 먹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요한복음 6:60, 66에 보면,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긍정해서 제자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자기 십자가와 그들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여전히 '자기 절대'라는 우상에 잠겨있게 마련이기에 그들을 부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을 보세요. 갈라디아서 2:20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자아를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아가 자아를 만들어내고 인도하고 유지하는 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에 의해서 유지되고 제공되는 자아상을 두고 말입니다. 정말 이 은혜를 받은 자아상이라면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코 제 힘으로 저는 자기를 부인할 수도 없고, 자기 십자가 질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제공하는 현실관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아라는 허구에 속지 말게 하시고 날마다 살려주시는 예수님의 은혜에 고마워하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