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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31206a 울산강의-출애굽기 30장 : 사건의 물체화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131206a 울산강의-출애굽기 30장 : 사건의 물체화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1206a 울산강의-출애굽기 30장 : 사건의 물체화

(강의:이근호 목사)

분향할 단을 만든다는 대목입니다. 단 높이가 90센티미터, 가로, 세로가 50센티미터 정도의 단을 만들고, 그 분향단을 어디에 세우느냐 하면, 6절에 보면, “그 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장 밖에 두라 그 속죄소는 내가 너와 만날 곳이며”라고 돼있지요.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다고 할 때 그것이 과연 성사가 될 수 있느냐?

예를 들어서 로봇을 만드는 기술자가 로봇과 만난다. 그게 만난 겁니까? 그것이 만난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로봇을 만든 사람이, “로봇아, 내가 만들었어.”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로봇은, “주인님, 제가 만들었지요.”라고 그런 말은 안 하잖아요. 로봇청소기가 청소는 하지만 제가 잠시 노래방에서 친구들과 놀다 오겠다고는 안 하지요.

만남이란 이쪽에서 보는 것과 같은 안목으로 저쪽에서 볼 수 있을 때 만남이라는 게 성사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가정에서 대화가 없지요. 대화는 없지만 누구인지는 알아봅니다. 도둑인지 아버지인지 그 정도는 알아보거든요. 하지만 그걸 만났다고 하지는 않아요. 대화가 되지 아니하면 만난 게 아닙니다. 그냥 존재하는 건데.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만나고 할 때 이 대목이 난해한 정도가 아니고 난해보다 더 난해해요. 내가 너와 만날 때 또는 만날 곳이라고 할 때 여기 ‘너’란 아무나 ‘너’가 되는 게 아니고 만날 수 있는 자만 ‘너’가 되는 거예요. 로봇을 만난 기술자가 로봇을 만나면 그냥 놔둬요. 때려 부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만나면 죽여 버립니다. 거룩한 분을 만나면 죽게 돼있어요. 모세도 하나님의 얼굴을 못 봤어요.

그래서 여기 안 죽음에도 불구하고 만남이 성사된다는 것은 특별한 경우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잖아요. 그런데 안 죽고 살아났어요. 정확하게 말해서 죽었다가 살아났지요. 일단을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바뀌어서 다른 이름으로 살아났지요.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로 되살아난 겁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하나님과 만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추방할 때 인간은 하나님과 만난 수 없어요. 만나면 정녕 죽으리라 한 것처럼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너와 만날 때는 특별한 배려에요. 우리가 울산에 살면서 사람 만나는 것, 하나도 겁나지 없습니다. 같은 사람이니까 만날 수 있는데 만약에 여러분이 꿈을 꿨는데 내일 오후 3시에 미스터피자 집에서 하나님이 만나자고 하면, 피자가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만나자고 할 때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와 만난다고 할 때 아무도 만날 사람이 없어요. 없는데 하나님이 너와 만난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존재가 만나는 인간을 존재로 간주해줄 경우에만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 성사됩니다. 더구나 그 만나는 장소가 땅이에요. 지상에서 만나요. 울산, 대구에서 만날 때 이 존재와 존재에서는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 존재와 만나지 못합니다. 인간 존재는 죽으니까. 그럼 어떻게 만나느냐? 만나는 판을 새로 짜요.

이걸 뭐로 보느냐? 존재 이전에 사건으로 보는 거예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아브람아, 너는 본토 아비 집을 떠나라.” 분명히 만난 거잖아요. 만났을 때 아브람이 하나님 존재를 알았습니까? 모르지요. 존재와 존재가 만나야 그게 만남인데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 성사가 안 돼요. 죽으니까. 그러니까 존재 대신에 사건이 일어나는 거예요.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사건이 한 가지 경우가 아니고 계속 사건으로, 사건으로 이끄시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 응답해주세요.” “오냐. 기다렸다.” 해서 되는 게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그냥 수동적입니다. 위에서 조용하면 그냥 조용한 거예요. 자기 쪽에서 하나님을 찾아 방문할 수 없습니다. 어떤 아파트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시도 때도 없이 보고 싶다 하면 띵동하고 갈 수 있는 경우는 존재와 존재가 만났을 경우에는 그게 가능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 존재는 섞일 수 있는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만날 수 없어요. 죽어 버리니까. 사건을 일으켜서 사건 안에서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 존재로 만날 수 없고 하나님도 인간 존재를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존재를 대체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여기에 사건이 일어난다고 했지요. 사건을 물건으로 만들어요. 사물로 만듭니다. 그게 언약궤입니다. 이제 알았지요. 분향단이에요. 이게 성막입니다. 이게 법궤에요. 이게 성전입니다.

법궤 만들면 법궤에서 하나님께서 자동적으로 우리를 기다린다. 물건을 만든 이유는 사건이 물건화 된다. 사건이 물체가 되게 되면 물체 자체가 존재가 되지요. 왜 하나님께서 물건을 만드느냐 하면, 인간은 육체가 있잖아요. 하나님은 육체가 없지요. 인간은 육체가 있으니까 자동적으로 존재가 될 수 있다. 물건 있듯이 여기 있다가 돼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몇 번지에 계시는 거예요. 무슨 길 몇 번지 해서 대나무 올려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하나님 만나러 가게 되면 거기는 존재가 있는데 그 존재는 물건이 있지요. 분향단 또는 언약궤, 물건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물건 만지면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수정 구슬 만지면 내년에 어떻게 된다고 점치듯이 그 물건을 인간이 주도적으로 다룰 수 있습니까? 못 다뤄요. 왜냐하면 그 물건은 사건이 물건화 된 거잖아요. 이 사건은 인간은 수동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고 그 사건의 유발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경우가 사실은 사람한테 적절한 예가 있어요. 사랑하는 연인끼리 커플링을 하지요. 그걸 하는 이유가 똑같은 것을 끼고 나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커플링이나 커플티를 하거든요. 너는 내 것이라는 그런 뜻이지요. 그건 물건이지만 그 물건에 하나의 금이다, 은이다. 금, 은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사이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서로 좋아한다는 사랑의 사건이 물체화 된 것이 반지가 되는 겁니다. 그걸 약속의 언약반지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아브라함처럼 이제는 이쪽으로 가라. 이삭을 잡고. 사건으로, 사건으로 할 때는 그냥 기다리기만 했는데 모세시대에는 아예 물체를 따로 만들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백성으로 간주한다는 그것을 하나님이 만들라고 지시한 물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남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동적으로 만날 수 있느냐는 겁니다. 물건을 쓰다듬으면 자동적으로 뿅하고 “주인님, 뭘 도와드릴까요?” 뭔가 나타나느냐는 겁니다. 그렇지는 않아요.

우리가 호출한다고 하나님이 오지는 않는데 하나님께서 언약궤나 장치를 만든 것은 지시와 명령이 떨어집니다. 그걸 율법이라 합니다. 지시와 명령이 떨어지면 우리 쪽에서는 하나님을 호출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만약에 그 명령과 지시를 위반하게 되면 우리는 죽어요. 너무 불공평하지요. 하나님 얼굴 보고 싶다고 하면 여기 있네 하고 오는 식으로 그렇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우릴 죽일 권리는 있어요. 너는 제단불이 아닌 다른 불로 나한테 분향하는 거야? 나답과 아비후가 죽었잖아요. 하나님은 인간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그 사건 속에서. 물론 마지막에 인간이 하나님을 죽이도록 하나님이 허락을 하지요. 살살 약을 올려서.

천지일보에서 보낸 질문에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지금도 목자들이 예수를 핍박하겠습니까? 그만큼 한국교회 목사들은 이단이라고 악한 자라는 걸 유도하기 위해 질문한 거예요. 그래서 답변을 이렇게 했지요. 답변 자체가 상당히 어려워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라는 것으로 오셨다가 성립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오실 때 어떤 분위기 속에서 왔거든요. 그 분위기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율법체제 하에 주께서 오신 거예요. 그냥 들판에 추수하는데 오신 게 아니고 축구장에 축구 보러 온 게 아니고. 율법을 겨냥해서 오신 거예요. 율법을 모르면서도 율법을 아는 체하는 그 분위기를 향하여 왔다 이 말이지요.

그러면 질문을 할 때 “주께서 다시 오신다면”이라고 질문할 게 아니고 자세하게 질문하게 되면, 오늘날 인간들은 이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데 그 나아가고자 하는 그 자리에 주께서 다시 오신다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들이 핍박하겠습니까? 그렇게 질문해야 되는 거예요. 질문 수준까지 헤아려가면서 답변해야 돼. 그렇게 해야 질문 자체의 취지가 살아요.

전에 예수님 초림 때는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었잖아요. 그럼 한국교회가 지금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그 중심은 뭐냐 하면, 바로 인간 쪽에서 신에게 나아가기 때문에 지성이면 감천이다. 정성을 다하면 복을 받는다. 그게 교회 아닙니까? 교회라는 것이 말씀 같은 건 신경 안 쓰고 뭐든지 열심히 빌고 떼를 쓰고 간절히 빌면 응답받는다는 쪽으로 교회가 부흥되거든요.

그러면 예수님이 처음에 왔을 때 핍박했던 자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율법을 연구한 사람들이 핍박했잖아요. 그럼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면 누가 예수를 핍박하느냐 하면, 인간과 하나님께 교신을 하겠다고 했던 그 자리에 매인 자들이 핍박한단 말이죠. 그러면 누가 핍박하겠어요? 바로 사람들이, “열심히 하면 복 받지요.” 할 때 그렇습니다. “열심히 하면 복 받습니다. 착하게 살면 복 받습니다.”라고 했던 자들에게 예수님은 핍박을 받게 돼있습니다. 이게 나의 답변이었어요. 그러면 거기에 신천지도 포함되지요. 행함으로, 열심히 착하게 되면 구원받습니다, 복 받습니다. 하는 그것도 해당되는 거예요.

두 번째 질문이 뭐냐 하면, 이단이 뭐냐? 누가 알곡이며 누가 가라지냐는 그 질문, 제가 기다렸던 질문이거든요. 그것도 질문 바꿔야 돼요. “누가 알곡입니까, 누가 가라지입니까?”라고 질문할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알곡을 어떻게 만들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가라지를 만듭니까?”라고 질문을 해야 맞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성경에 알곡과 가라지가 마태복음 13장에 나오잖아요. 누구나 자기가 가라지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일단 자기는 알곡이라 치고 자기를 반대하는 쪽은 가라지라고 누구나 일방적으로 그런 잣대와 기준을 동원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고 떠나는 게 아니고 그 말씀 남기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예수님이 구름 타고 하늘로 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구름 타는 경우는 예수님이 부활 될 경우에만 구름 타는 거예요. 하늘나라 택시 아무한테나 오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 지시고 이미 하나님이 주라고 인정받을 경우에만 예수님을 구름 태워서 승천하는 거예요. 사명을 완수도 않았는데 가기는 어디로 가요. 완수하고 하늘나라 가야 될 것 아닙니까. 십자가 지시고.

그럼 예수님께서 던지신 가라지와 알곡과 많은 말씀은 그 말씀을 동반해서 십자가 쪽으로 가는 거예요. 그 말씀을 이해하려면 어디로 가야 됩니까? 우리가 알곡인지 가라지인지 궁금해 하면서 십자가로 들어가야 되지요. 십자가에 가면 그 속에서는 “내가 알곡입니까, 내가 가라지입니까?”라는 질문은 그 자체가 거기서 탈락이 되고, 예수님께서 알곡은 알곡대로, 가라지는 가라지대로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질문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면, 처음에는 내가 알곡일까, 가라지일까 하고 궁금하더라도 성령을 받아서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로마서 14장 8절)이라는 걸 안다면 이젠 내 것이 없잖아요. 우리가 오해하기를 이게 내 몸인데 하나님이 살려주신다고 하는데 사실은 주님의 몸을 주님이 살리기 때문에 내가 염려하거나 기뻐하는 것도 주제넘은 짓이에요. 왜 남의 몸을 지가 왜 좋아합니까? 주의 인생을 주께서 알아서 하는데 우리가 박수칠 입장이 못 되지요. 내 것이 있어야 박수치지 내 것도 없는데 박수는 왜 칩니까.

이미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성령을 받게 되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리스도가 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그 질문할 때는, “내가 알곡입니까, 누가 알곡입니까?” 하고 묻지 말고, 주님은 알곡을 어떤 식으로 만들고, 가라지는 어떤 식으로 만드느냐고 질문을 해야 돼요. 질문이 다 바뀌었어요. 그러면 거기서 알곡이 뭡니까? 주께서 일방적으로 알곡과 가라지를 만든다고 못하는 자들이 가라지에요. 이것도 신천지에요. 또 한국교회고.

출애굽기 30장에서 분향단 만든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려 해요. 율법은 지키는 게 아닙니다. 사건을 내가 만들 것 같으면 내가 지키지요. 율법을 글자대로 흉내 낼 수는 있어도 율법 안에 뭐가 담겨 있다? 분향단에 뭐가 담겨 있어요? 사건이 담겨있지요. 사건은 내가 일으킨 게 아니고 사건은 주님 쪽에서 일으킨 사건이잖아요. 주님 쪽에서 일으킨 사건은 자동적으로 내가 필요할 때마다 뽑아낼 수 있습니까? 안 돼요. 사건을 일으키신 분이 뽑아낼 수 있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총각이 아가씨와 결혼약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커플링을 하고 전화번호도 따냈습니다. 그러면 그 남자가 착각해서 이 사건은 내가 일방적으로 일으킨 사건, 내가 너를 찜해서 이제는 너는 내 것이라고 해서 시도 때도 없이 밤이고 낮이고 전화를 막 할 수 있는 그런 권리가 있습니까? “우리 갈라서.” 이런 조로 나올 수 있어요. “너는 내 것이잖아요. 갈라서자니 웬 말이냐?” 하지만 그 사건은 혼자 일으킨 사건이 아니고 같이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에 전화할 때는 지금 전화해도 되느냐고 물어봐야 되지요.

특히 한국 남자들 결혼하면 여자가 자기 것인 줄 알고 일방적으로 애를 먹이는 경우가 있어요. 어제도 티비에 나왔는데 아내가 하는 말이 우리 남편 때문에 못 살겠다는 거예요. 내 여자인데 왜 내 마음대로 못하느냐는 거예요. 부부란 사건이 자기 혼자 일으킨 사건입니까? 그럼 여자 쪽에서 너 혼자 부부하냐고 이혼하자면 어떻게 되겠어요. 안 되지요.

사람도 그런데 하물며 사람을 만드신, 이제 어려운 것 해봅시다. 사람을 만들 때 하나님이 창조했잖아요. 이번 수련회 주제가 창조인데 여기 있는 사람들만 미리 정답을 알려드릴게요. 우리 인간이 구원받는데 이런 구원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추방당했기 때문에 구원 자체가 있을 수 없어요. 인간이 왜 구원을 받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모든 이단들은 바로 구원시켜주겠다고 나오는 게 보이스피싱이에요. 사기꾼들이에요. 구원도 안 되는데 어떻게 구원을 시켜줘요. 말도 안 되지요.

어떤 사람이 와서 영국으로 이민 가게 해줄게. 이민 갈 자격도 안 되는데 이민 가고 싶어서 얼마면 돼요? 이게 말이 안 되지요. 마찬가지로 구원이란 말은 우리에게 하는 말이 아니에요. 구원이란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거든요. 이런 만남은 우리한테 성사가 안 됩니다. 안 되는 것이 성사되는 것은 여기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돼요. 사건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존재, 걔들만 천국 가요.

그런데 이걸 알기 위해서는 어디로 가야 되느냐 하면, 구원이 있더라도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에 넘보면 안 됩니다. 욕심내면 안 돼요. 구원이 창조로 갑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창조를 하는데 어려워요. 우리 있는 걸 보지도 않고 창조로 가버려요. 따라가도 소용없어요. 창조에 가게 되면 예정이 나옵니다. 기독론, 십자가, 주님이라고 해도 괜찮아요.

창조의 근원에 가서 창조주가 소개 되면서 우리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그분이 구원할 사람을, 원래 원천에서 창조주가 소개되면서 서서히 작업에 나서는 거예요. 그 창조 작업 중의 결과가 구원되기에요. 이렇게 돌아와요. 우리는 예수 이름 부르면 된다는데 우리가 부른다고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돌아와요. 우리의 믿음은 안 받습니다. 선물로 준 믿음이 돼야 돼요. 그 전에 있던 구약의 모든 믿음들은 다 실패한 믿음이에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쳐서 구원받았습니까? 천만의 말씀. 아브라함은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거예요. 처음 듣는 이야기 아니지요. 생각하면 맞는 이야기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대타를 기다리고 있어요. 나란 인간은 믿어도 소용없고, 울어도 소용없고, 슬퍼도 소용없고, 소망해도 소용없고, 사랑해도 소용없고, 나 말고 나를 대타로 하면서 내가 여기 있으니 하나의 창조 사건에 편입된 입장에서 그렇게 된 존재, 그 존재로 바로 주의 이름으로 구원된 존재입니다. 구원받은 내 이름으로 구원된 게 아니고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다. 내가 나를 구원하면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보세요. 한국교회가 얼마나 잘못 됐습니까? 신천지 욕할 게 아니지요. 신천지에서 벗어난 게 구원된 게 아닙니다. 구원론 자체에서 벗어나야 돼요. 신천지 벗어나서 다시 한국교회에 들어가면 구원받은 거예요? 성경에 어디 그런 게 있어요? 출애굽이 뭐예요? 애굽에서 벗어나야 되지 않습니까. 애굽에 들어가지도 못한 인간은 구원도 없어요. 애굽에 들어갔다가 나오게 되면 무슨 경험을 하느냐 하면, 자신의 대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 대타가 어린양.

애굽의 백성이 아닌 사람은 어린양을 몰라요. 다른 모든 민족들은 열심 내고 착하고 성의를 다해서 구원받고자 하는 겁니다. 어린양을 몰라요. 그러나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어린양을 알아요. 십자가를 알아요. 그리고 십자가는 그냥 내가 달린 십자가가 아니잖아요. 나를 대신할 분을 알아요. 그리고 그분에게 모든 걸 맡기고 의지합니다. 그걸 신자, 성도라고 이야기합니다. 들어보면 성도되기 굉장히 쉽지요. 예수를 믿으면 되니까.

그런데 예수 믿는데 시간이 길어요. 길어도 너~무 길어요.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고 돌아가신 허 선교사님이 그런 이야기했어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 길을 왜 그렇게 나는 멀게 돌아왔느냐 말이죠. 아마존에 가서 25년 동안 선교사로 일하고. 그것 안 해도 구원받는데 그렇게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온갖 사기꾼한데 다 속아 넘어가고 목사란 목사들한테 다 속아 넘어가고. 법궤, 율법 지키면 되는 줄 알고, “지켰습니다. 구원해 주세요.” 사건을 왜 지가 만들어요. “법궤 만들었으니까 구원해 주세요. 예배당 지었으니까 구원해 주세요.” 그런 것 없습니다.

사람이 물체를 만들게 되면 인간은 심리상 그 물체는 자신의 대타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물체는 하나님이 대타입니다. 31장에 보면 만들기는 누가 만드느냐 하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 오홀리압과 브살렐 이 두 사람이 만들잖아요. 그들은 자기 지혜로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신에 의해서 만들지요. 이것은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와 똑같은 거예요.

본인 자체가 다시 내 것으로 돌아올 수 있는 어떤 자리가 우리한테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천국은 내 것이라는 내 자리가 아예 없어요.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비유에서 아침 10시에 온 사람, 12시에 온 사람, 오후 3시에 온 사람, 다섯 시에 온 사람이 있지요. 그 네 명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 놀던 사람들이에요. 포도원에 아무 지분도 없는 사람들이에요. 그냥 일의 시킴을 당할 뿐이에요. 삐질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어리석은 다섯 처녀와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공통점이 뭐냐 하면, 신랑을 자기가 만든다는 거예요. “어이. 신랑 빨리 오란 말이야. 뭐야. 자꾸 잠 오려고 하는데.” 이렇게 명령할 권리가 어느 신부한테도 없어요. 그걸 간파할 줄 알아야 돼요. 천국에 간 사람의 특징이 있어요. 자기 것이 없어요. “주님께 복 받았으니까 내 것을 챙겨서 모아놔야 할 텐데.” 모아놓을 자리가 없다니까. 십자가 복음 앞에서 나란 자체가 용납이 안 돼요.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물으신다면, 성도는 매일의 삶 속에서 십자가 사건을 전파하는 그것이 성도의 삶이에요. 십자가가 보이도록 십자가와 만나서, 십자가 사건이 안 보이면 내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자기 존재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십자가가 보이는 순간, 어떤 사람이 교회 왔는데 목사가, “집사님, 점점 못 생겨 지내요. 갈수록 늙네요. 11월 되니까 팍삭 늙었네요. 왜 그렇게 못 생겼습니까?” 이렇게 할 때 평소에 예쁘다고 할 때는 내가 예쁘니까 내가 의식되지요. 그런데 못났다고 할 때는 기분 나쁘지요. 그 순간 십자가가 보입니다.

원인제공을 누가 했습니까? 내가 했어요. 나는 예쁠까, 안 예쁠까? 평소에 이런 마음으로 덜렁거리면서 사는데 거기다가 누가 못났다고 하니까 거기에 휘말리니까 그 순간 아차. 십자가 앞에서 못나도 구원받잖아. 내가 왜 그걸 몰랐을까. 다시 한번 나란 자체가 물체화 되고 이 물체에는 주님의 사건이 녹아진 물체라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단독으로 내가 따로 내 가치를 존중해서 자기 이름으로 살아가는 불신자와 다를 바 없는 그런 생활을 하게 하는 것. 그럴 때 주께서 못 생겼다는 사건이 쳐들어오게 되면 십자가 사건이 다시 기억날 때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의 삶 이야기하는 것도 길어요. 굉장히 길어요.

이 향단을 뭐와 마주치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증거궤, 하나님의 속죄소와 만나게 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10절에 보면 나옵니다. “아론이 일 년 일차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라고 돼있지요.

우리가 아는 상식에 의하면 속죄란 죄를 씻어준다는 것은 죄가 있을 경우에만 씻어줘요. 로봇 청소기가 죄졌습니까? 로봇청소기가 이상한 메이커인지 40%도 못 건진다 하지요. 그러면 로봇청소기가 때리면 눈물 흘리고 그래요? 그건 물체인데 물체를 때리고 벌주고 왜 그렇게 합니까? 그건 말도 안 되는 거지요. 죄를 짓지도 않은 물체에다 왜 속죄를 해요. 말도 안 되잖아요.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피를 바르는데 향단 뿔에다 바른다는 거예요. 물체에다 피를 뿌려요. 장난치는 겁니까? 향단 뿔은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는 속죄소에서 가장 근접한 최측근입니다. 청와대 최측근은 비서실장 아닙니까. 향단 뿔까지 오려면 제일 바깥에 있는 백성들이 사는 텐트촌부터 해서 성막 문 열고 제일 가까이 근접한 물체가 향단입니다. 마주보는 거기에는 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만 들어가요. 한쪽은 피를 뿌리고 한쪽은 피를 바르고 해요. 사건에 담겨있는 서로 마주보는 존재가 향단 뿔로서 일 년에 한 차례씩 누가 누구와 만나는지 그 취지를 보여주는 것이 분향단입니다.

내가 너를 만난다고 할 때 인간은 만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날 수 없는 것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만나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사건이 담긴 것이 물체였고 그 물체 중에서 하나님이 계시겠다고 하는 물체와 인간을 대표하는 물체가 가장 근접하게 만나는 물체가 분향단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이 인간 만나면, “보고 싶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 이렇게 이야기하면 될 걸 속죄, 죄를 씻어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성사된다는 것, 왜 그럴까요? 만났으면 하이파이브 하든지 악수하면 되는데 “하나님, 저 왔습니다.” “그래? 네 피를 내어라.” “아버지, 저를 모르십니까? 아들입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아들 전재용이 만날 때 “아들아. 네 손목을 잘라라. 피를 내라.” 이럽니까? 돈 이야기하잖아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돈 이야기한단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때는 무슨 이야기해야 됩니까?

제가 질문을 던졌습니까? 하나님과 인간이 만날 때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됩니까?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날 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하나님이 찾아왔잖아요. 그때 아담이 궁시렁궁시렁 자기변명, 구실을 막 댔단 말이죠. 그 말은 자기의 죄를, 자기부정을 안 한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올 때는 그 인간의 죄를 지적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죄인임을 지적하면서 다가오시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찾아온다는 것은 책망하면서 다가올 때 성령이 오신 겁니다. “너 못생겼다고 하니까 화나지?” “화났습니다.” “그게 죄야.”라고 책망할 때 성령이 찾아오신 줄로 아시면 됩니다.

선생님이 수업하는데 준비를 잘 못했는데 어떤 학생이 그걸 알 때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그러면 절대로 오래 가지 않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서로가 칭찬하기로 약속하고 좋은 점만 밝히기로 하는 거예요. 자랑질만 하기로. 그런데 하나님한테는 그게 안 통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죄를 지적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먼저 죄를 자복하면 어떠냐? 그것도 안 돼요. 그것도 자랑질이에요. 미리 반성하면 안 돼요. 왜 안 되느냐?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 죄라고 생각하거든요. 인간은 전체가 다 죄인데 자기가 알아서 이 부분은 죄고, 나머지는 죄가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수준 높으니까 수준 높게 가봅시다. A라고 할 때는 이 바깥은 -A에요. 그러면 당연한 건데 뭐 대단하다고 그런 소리하느냐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A가 될 때 나머지는 -A가 돼요. 문제는 여기서 A가 특권을 가졌다는 이게 문제에요. 이걸 꽃이라 할 때 듣는 꽃 기분 나빠요. 자기는 꽃이 아니고 개구리라고 주장하고 싶은데 일방적으로 특권으로 너는 이제부터 꽃이야. 하면 개구리인데 꽃이라고 일방적으로 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바깥에 있는 걸상, 타인 또는 무지개, 심지어 예수가 됐든 간에 일단은 전부 다 내가 이름을 불러준 나의 것으로 귀속되는 그런 특권을, 내가 잘났다는 것, 내가 절대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물건밖에 안 되는 겁니다.

여기서 벗어날, 탈출 가능한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오늘 날씨 조오타.” 이것은 날씨와 관계없어요. 아침에 해가 떠서 햇살이 비추니까 “오늘도 해가 떠서 내 얼굴에 비추는구나.” 하면 듣는 해 기분 나쁘다니까요. 너 따뜻하라고 해 뜨는 게 아닌데 자기만의 권리를 발휘해서 해는 자기만을 위해서 떴다는 겁니다. 이런 특권의식은 하나님이 됐든 삼위일체가 됐든 아무 상관없어요. 무조건 그런 것들은 내가 특권을 가졌다는 것, A라는 걸 증명해줄 -A에 불과한 것.

그러니 이런 사고방식으로 중무장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를 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던 이유를 알겠지요. 율법의 특권자가 누굽니까? 율법을 주신 분이잖아요. 그 율법을 예수님이 주셨는데 그들은 자기가 율법을 지키겠다고 하는 바람에 자기들이 특권을 가진 거예요. 그런데 그 참에 율법 안 지켰다고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적반하장도 세상에 이런 적반하장이 어디 있습니까.

남 욕 할 게 아니에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이제부터 예수 믿겠습니다. 하면 예수님께서 놀고 있네. 네가 뭘 믿고 뭘 해도 자랑질밖에 안 돼요. 따라서 율법은 우리 죄를 지적하는데 율법 속에 사건이 들어있다 했지요. 분향단도 사건이고, 증거궤도 율법이에요. 율법이 사건을 발생시켜줘야 우린 율법을 통해서 죄를 알게 됩니다. 사건 없으면 우리는 죄를 몰라요. 한 가지 예를 들고 쉽시다.

열왕기하 5장에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고치겠다고 엘리사를 찾아왔잖아요. 처음에는 만나주지도 않고 게하시를 통해서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가면 낫는다고 해서 나았잖아요. 문둥병은 엘리사가 말해서 나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걸 게하시가 봤거든요. 게하시가 특권을 부린 거예요. 우리 선지자의 말씀에 의해서 문둥병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거예요. 나중에 그 문둥병이 게하시 본인한테 덮쳤지요. 그러니까 게하시는 문둥병은 자기와 관련 없는 사건이라 여긴 거예요. 자기는 문둥병 환자가 아니었으니까.

머리 조금만 더 써봅시다. 나아만 장군이 갖고 있던 문둥병은 게하시가 문둥병 걸리기 위해서 나아만 장군을 운반책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사전에 게하시는 생각할 수 없었던 거예요.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 안 믿는 사람에게 나는 죄용서 받았다고 했을 때 안 믿는 사람은 좋겠네. 하고 끝나지요. 그 용서받은 죄가 자기한테 덮쳐서 본인이 이쪽이 천국 가면 자동적으로 이쪽은 지옥 간다는 사실을 지옥 간 사람이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지요. 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은, 용서받은 죄는 누가 가져갔습니까? 성도의 죄는 예수님이 가져갔고 그 죄를 지옥 갈 사람한테 덮쳐버린 거예요. 죄 있어야 지옥 갈 것 아닙니까. 죄 없는데 지옥 가면 반칙이잖아요. 없는 죄도 만들어서 지옥 보낸다니까요.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기. 미운 놈 죄 하나 더 주기. 그런데 미운 놈에게 죄가 뭐냐 하면, 어떤 죄인이 있었는데 용서받았데. 이게 그 사람한테는 기분 되게 나쁜 거예요. 뭐 그따위 종교가 다 있어. 무슨 죄도 십자가로 용서받는 그따위가 다 있어요. 그 그따위 죄가 자기한테 덮쳐서 그따위 죄 때문에 지옥 가는 거예요.

여러분이 주님 앞에 용서받을 때 사실은 조심해야 돼요. 여러분 용서받은 걸 욕하는 사람은 여러분 때문에 지옥 갑니다. 행동 좀 조심해야 돼요. 흙탕물에 차 몰고 갈 때 자기 차는 흙탕물 튀기니까 기분 좋지요. 하지만 길가는 사람은 흙탕물에 뒤집어쓰듯이 우리는 죄 용서받아서 참 좋은데 복음을 모르는 사람 특히 목사들 온통 그 죄 다 뒤집어씁니다. 복음 아는 사람 핍박했다는 죄를 다 뒤집어쓰고 지금도 지옥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옥 가고 우리는 10분 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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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2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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