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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전20131121b-마14장22절(외부상황)-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마태복음

대전20131121b-마14장22절(외부상황)-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179)

대전20131121b-마14장22절(외부상황)- 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14장25절에 보면 유명한 말씀 나오지요.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있는데 예수님이 바다가운데 걸어왔다는 거죠. 그런데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이다! 하고 멋도 모르고 가보니까 지도 물 위를 걸었다는 이야기거든요.

자, 이 대목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는가, 이겁니다. 외부적 환경이 인간내부에 젖어드는가, 외부적 환경이 엄습해버렸습니다. 엄습이라는 말이 적당하네요. 엄습을 할 때 또는 깊은 안개가 왔을 때, 그게 촉촉하게 인간내부에 적신다는 겁니다. 지금 요러한 상황은 십자가이후에 그대로 지금 오늘날 대전에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겁니다.

외부적 환경 속에 예수님을 나둬 놓고 “제가 주님께 갈게요.” 라고 하는 방식으로는 함께 하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임마누엘도 아니고 성령 안에서도 아닙니다. 촉촉이 젖어들어야 돼요. B.B크림처럼 뭔가 바르면 촉촉이 젖어야 돼요. 화장한 듯, 만 듯처럼.

초청이 될 때는 언어가 빠져야 돼요. 한 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설 수 없을 때, 저 쪽에서 이미 다가섰기 때문에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좋아한다! 당신 너무 좋아해! 말할 필요가 없어요. 말 안 해도 알아요. 가만히 있어! 그냥 내 바바리 안에 들어와! 해가지고 바바리 속에 들어와서 쵸코렛은 이 맛이야! 하던지 그냥 내 넓은 바바리 속에 폭 안기는 것처럼. 그게 여성의 로망 아닙니까?

그런데 외부적 환경이 촉촉이 젖어드는데 물론 우리 쪽에서 이런 걸 기대하게 되면 이것은 뭐가 되는가 하면, 최고의 악이 됩니다. 나쁜 짓이 돼요. 최고의 나쁜 짓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자기 자신의 책임감을 전가하기 때문에 그래요. 도덕적으로 악하다 하는 것은 본인이 책임 안지는 것을 가장 악이거든요. 본인이 책임을 지지 않는 가장 악함 중에 악함이 뭐냐 하면, 모들 걸 하나님께 다 미뤄버리는 것. 맡기는 것. 그게 최고의 악이에요. 종교가 악입니다.

오늘아침에도 바그다드에 수니파, 시아파 폭탄테러 일어났지요. 왜 자꾸 수니파, 시아파 싸웁니까? 종교적 이슈 아닙니까? 종교가 뭐냐 하면, 둘 다 알라신에게 맡겼다는 것 때문에 싸움을 벌이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말이 안 되지요. 맡겼으면 시아파가 볼 때 수니파가 다 차지해도 그것도 하나님이 하신 거니까 입 다물고 있으면 되지, 왜 폭탄을 해가지고 시아파들 다 죽으라고 왜 폭탄 테러하는 겁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 모든 걸 신에게 맡기고 나는 자유를 얻기 위한 결국 마지막 목적이 뭡니까?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마음껏 책임지지 않으려고 신을 들러리로 세웠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하는 거예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막살아도 나는 책임 없다, 하는 그것은 막사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고 절대화시키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설교나 강의할 때, 막살라고 한 거예요. 신자 아니면 신자 아닌 티를 내란 말이죠. 신자도 아닌 게 막산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막살고 있으면서 절제하면서 사는 위선의 티를 이제는 그 가면을 이제 벗어라, 이 말입니다. 실제로 막 살고 싶어 환장하고 있으면서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거룩을 위해서 스스로 관리하고 자제하고 이런 식으로 하는 위선의 티를 이제는 많이 해먹었다 그만해라. 이제는 그런 짓 그만하란 말이지요.

자기 자신이 어떤 짓을 해도 자기가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수작으로 하나님의 모든 교리와 고상한 성경 구절을 갔다 버리는 그것이 악마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최고의 악입니다. 자기 쪽에서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 모세와 히브리인들이 알아서 애굽에서 나가 봤자 소용없습니다.

아까 했던 이 울타리가지고 예를 들게요. 적절한 예가 될까 싶은데요. 지금 집사님께서 이렇게 울타리를 쳐놨어요. 개 넘어 오지 말라고. 그런데 개가 주둥이로 밀어서 울타리가 어떻게 됐어요? 요렇게 나란히 있어야 할 울타리가 죽 밀려 있지요. 밀려 있을 때, 지금 어린양이 죽었잖아요. 죽음으로서 구원했잖아요. 구원했는데 그들은 어린양이 했으니까 홍해 건너와서 애굽에서 벗어난 거예요. 분명히 눈에 보이는 현실적으로 벗어난 거예요. 벗어났는데 주님 보시기에 주둥이로서 이 어린양의 죽음을 통과하지 못하고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애굽에서 밀어붙이니까 어린양이 계속 밀리는 거예요. 어디까지? 나중에 십자가지실 때까지 계속 밀리는 거예요.

누가 애굽이야? 니가 애굽이야. 애굽에서 나왔다고 우기는 니가 애굽이라니까. 애굽 사람들은 그냥 가만히 있어서 애굽질하고 너는 애굽에서 탈출한 입장에서 계속 애굽질을 해야 돼요. 겉으로 애굽 말고 마음속으로 애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보고 할례를 행하라 한 이유는 할례 받지 못한 상태를 할례 받았다고 우기는 인간들을 통해서 확연히 드러내기 위해서 할례 받게 하신 거예요.

육신으로는 할례를 받았지만, 마음으로 할례는 무슨 수로 받아요? 받을 수가 없거든요. 기껏 들이 내는 것이, 개처럼 들이 내는 것이 "우리도 할례 받았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 자손인 것처럼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라고 자꾸 들이미니까 예수님이 밀려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계속 박아버리니까. 예수님까지 죽으라고 밀어 박아버린 거예요.

사람이 구원받고자 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메시아가 너무 더디 오시지만, 심판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메시아가 너무 일찍 온 거예요. 뭐냐 하면, 창세기3장에 이미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금지가 있다는 것은 심판의 조짐이 선악과 그 축복의 동산 안에서 이미 금지가 있다는 것은 징계가 있고 징벌이 있다는 것이 그 에덴동산 안에 내용으로 속속히 담겨있어요. 심판이 함유한 에덴동산이에요. 심판 없는 에덴동산 아니고.

그래서 에덴동산 틀에서 심판하는 것이 뭐냐, 심판에서 “나가! 에이씨~ 나가!” 나가는데 고상하게 이야기하면, “생명은 니하고는 끝났어. 생명나무 니한테 없어! 너는 이제 죽음뿐이야.” 그것이 에덴동산 안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밖에 나가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그럼 에덴동산 그 안에서 벌어진 그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서 에덴동산 바깥이 밀려간 거예요.

에덴동산 바깥에서 인류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개시되면서 그 전체 내용은 사실은 축약하고 응축하게 되면 에덴동산의 선악과 따먹은 그 사건이 단축되어 있어요. 응축되어 같이 포함돼 있는 거예요. 스크린에 있는 화면은 사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필름 통 안에 있지요. 영사기에 있는 필름 통 안에 있는 걸 펼치다 보니까 스크린에 2시간 반이나 1시간 반이나 1시간 동안 상영이 된다 말이지요.

들면 간편하게 드는데. 선악과 따먹으면 간편하게 먹는데 이걸 푸니까 선악과 따먹으면 왜 죽느냐,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너무 오래 걸린 거예요. 지금. 언제까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십자가로서 이미 그 핵심은 보여줬지만. 선악과 따먹은 것이 결국은 이 하나님을 죽이겠다는 악마의 작전에 니가 말려든 거다. 이리 되는 겁니다. 마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악마의 작전에 아담이 말려든 거죠.

애굽의 속내가 계속 가니까 애굽은 애굽나라에 머물지 않고 확장되는 겁니다. 확장되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 하면, 마태복음 2장에 동방박사 이야기할 거 생각하면 아주 신이나요. 지금 벌써 한 달 남았는데도 신나요. 주일학교 애들한테 동방박사 이야기하면. 2장 15절에 보면,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 재미있는 것이 지금 예수님의 가족이 어디서 어디로 갑니까? 이스라엘에서 도로 애굽으로 가는데, 성경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

뭐가 애굽이에요? 바로 예수님 계신 곳만 애굽이 아니고 그 외에는 전부다 애굽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애굽에 가도 애굽은 애굽이고 예수님 계신 곳만 애굽이 아니고. 겹쳐진 포개진 두 개의 층이 예수님을 통해서 서서히 균열이 갈라짐의 징조가 서서히 보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호세아의 예언을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었다. 이 말을 실제역사에서는 반대로 이스라엘에서 애굽으로 도피한 걸로 그렇게 사건을 연결시켜 버리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는 모든 이 말씀을 무슨 말인지 당체 못 알아듣는 거예요. 자기들이 알고 소통하는 그런 단어는 같이 사용되는데 내용은 정반대의 내용이 들어있는 이유는 정반대의 것이 대비되는 것이 모든 언어 속에 같이 이중으로 겹쳐서 있어요. 시루떡 같아요. 우리가 아는 소통이 있고 이 밑에 숨어있는 주님의 다른 것도 같이 있습니다.

똑같은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11장에도 나오지요. 주여,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시고 소위 지혜로운 자에게는 이걸 감추심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라고 돼있거든요. 알려고 한다면 감춰버리고 나는 몰라 하면 알려주고 예수님의 하는 모든 단어에서 담긴 내용은 그런 식으로 전달되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니 쪽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없다. 의지해봐야 그것은 최고의 악이 된다. 하나님을 믿고 모든 걸 맡겼습니다. 라는 것은 니 쪽에서 시작한다면 그건 전부 다 악마의 수작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실패한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누구 쪽에서 출발합니까? 자기 쪽에서 출발해요. 왜? 자기는 할례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뭔가 출발할 수 있는 요건이 갖춰졌다고 생각하거든요. 교회 와서 등록했으면 이제부터 성령이 온다고 생각하는 그 아이디어나 유대인들이 예수님 십자가 못 박아 죽이는 아이디어나 동일한 아이디어입니다. 내 쪽에서 출발한 거예요. 내 쪽에서 준비할 준비물을 가져가겠다는 거예요.

지난 주일날 설교에서 그 이야기했습니다. 생각나십니까? 안 물어봐요. 돌아서면 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기억안나지만 말하면 또 이상하게 생각나요.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세상 모든 현실이 환타지인데요. 내가 만든 세상을 꾸리는데 내가 예수 믿고 죽으면 천국 간다는 그것까지 내 속에 이미 나의 환타지처럼 내가 만들어놨는데 거기서 어떻게 벗어납니까? 강아지코로 밀어봐야 자기 영역만 확장될 뿐이지 벗어나질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마태복음 14장에 다시 돌아와서 하는 이야기는 주님 쪽에서 만약에 개시, 일을 한다면 내 쪽에서 말고 주님 쪽에서 개시해버리면 그걸 ‘외부적 환경의 변화는 자아의 변화로 이어진다.’ 라는 그 말을 제가 쓰고 싶은 거예요. 다시 한 번 쓸게요. ‘외부적 환경변화가 자기변화로 이어진다.’ 쉽게 합시다.

외부적 환경변화가 자기변화로 이어지는 거예요. 베드로는 사람입니다. 물고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물위를 걸었어요. 물위를 걸었을 때, 이것의 원인제공은 어디서 왔습니까? 물위를 걸어야지! 걸어야지! 해서 자기한테 온 게 아니고 외부적 환경에서 왔지요.

그러면 “어떻게 물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 자체가 잘못이 되는 거예요.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은 그 묻는 순간 다시 출발점을 어디서 출발하는가 하면, 현재 내가 여기 있으면서 내가 아는 현실 속에서 다시 그 놀라운 성과, 물위를 걸을 수 있었던 그 성과를 얻어내려고 시도하게 되겠지요. 그게 극도의 악이 된다는 거예요.

제가 지금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베드로가 물을 건넜다. 신기하다. 그게 아니고 인간배후에 숨어있는 악마를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벌일 때마다 숨어있는 악마를 그 베드로를 통해서 사도제자를 통해서 자꾸 들추어내는 거예요. 정체를. 하늘에 별이 있지요. 주님께서는 별과 관계함으로서 별 자체를 붙박이처럼 묶어 매는 어두움이란 하늘, 하늘 자체를 지금 통째로 뜯어내려 하는 거예요.

“마귀야, 더 이상 숨기지 마! 내 니 알고 있어. 마귀야 빨리 얼굴 내밀어.” 어디서 니는 마치 없는 둥 이렇게 있느냐 말이죠. 우리는 별이 반짝 반짝, 이 세상 속에서 나 혼자 살아야 밥 먹고 산다. 이런 식을 자꾸 생각하는데, 사실은 죽기를 무서워하도록 그런 식으로 시달리게 만드는 붙박이 같은 배경이 있어요. 배경. 그 단단한 배경. 애굽이라 할 수 있고 이게 바로 어두움의 세계 악마가 만든 조성한 세력입니다. 영적세계인데 이게 통째로 예수님에게 대드는 겁니다.

헤롯은 아기예수 태어났을 때,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했으니까 자기가 현재 유대인의 왕으로 있으니까 자기 정권을 자기 아들에게 물려줘야 되는데 만약에 아기 예수가 태어난다면 많은 사람이 아기예수 태어났다. 왕이 태어났다. 그러니까 기존의 왕은 뭐냐, 이것은 인정하지 않고 아기 예수에게 왕권을 물려줘야 된다. 이렇게 나오는 것을 익히 안 이상은 어떻게 되어야 됩니까? 제거해야 되지요.

제거하면서 목격자도 제거해야 돼요. 목격자는 누구냐 동방박사라, 동방박사를 제거해줘야 증인이 없어지지요. 놔두면 동방박사가 나발 분다고요. 나발 불기 때문에 다 죽여야 됩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것이 신기합니까? 동방박사가 안 죽고 다른 길로 간 게 신기합니까? 둘 다 신기해요. 왜냐 하면, 둘 다 외부적 환경에서 주는 변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은 게 신기합니까? 여러분들이 알아서 교회 가는 게 신기합니까? 믿은 게 신기한 거예요. 교회 가고 안 가고는 그건 신기한 게 아니에요. 교회 가는 건 차려입고 등록하면 들어갈 수 있거든요. 옷차림은 노숙자 차림으로 가면 안 되지만. 옷차림만 멀쩡히 하고 가면 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제거합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제거해 보세요. 내가 분명히 교회 가는 것도 우리 가정 잘되기 위해서다. 그러면 가지 마세요. 내가 이거 바짝 기도하는 것은 애 수능 앞두고 합격을 위해서다. 그러면 하지 마세요. 뭐든지 하지 마세요. 잘라 보세요.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막 사세요. 성실하게 살아야지, 거룩해야지, 착하게 살아야지를 의도적으로 안 해보는 겁니다.

그러면 진짜 막 살게 되면, 그건 원래부터 신자 아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서게 하는 주님이여, 주 앞에 망하게 될 자입니다. 라고 그런 고백이 된다면 마음속에서 올라온다면 이건 마귀백성이 아니고 주님 백성입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어온 거 너무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 물위를 걸은 것보다 더한 겁니다. 물위를 걸은 건 한 번만 걸었지만, 그런 고백은 계속하게 되기 때문에.

여기서 여담입니다만, 물위를 한 번 걸어보세요. 그러면 다른 사람 시선이 매우 따갑습니다. 어쩌다가 홈런 친 타자보고 또 홈런 치라 하면 그 사람들은 평생 마음의 트라우마 짐 됩니다. 어쩌다가 물 위를 한 번 걸어가지고 지도 모르게 물위를 걸었는데 “베드로야, 한 번 걸어봐, 한 번 걸어봐.” 이러면 “그거 나도 안 돼, 나도 몰라.” 예수 믿는 사람보고 “전에 예수 잘 믿었는데 한번 믿어봐.” 하면 “나는 예수 못 믿어.” 라고 해야 돼요. 전에 한 윤범 목사님이 어느 교인하고 이야기할 때, 목사님, 예수 믿습니까? 하니까 예수 안 믿는다, 했지요. 그 말이 맞아요. 나 물위를 못 걷습니다. 하고 같은 말이에요.

나는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왜? 주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이 선물은 내가 만들었어, 라는 말을 내가 못합니다. 이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내가 어느 십자가마을에 글을 써놨더니만 옛날에 십자가마을 초창기에 어떤 사람이 그걸 보고 사이트에 올려놨어요. 이 근호목사는 예수 믿지 않는다고. 소문내놨어요. 이 근호목사는 예수 믿지 않는다고 자기는 예수 믿지 않는다고 소문내놨어요.

그게 뭐냐 하면, 주께서 이해 못할 말을 한 것처럼 성도도 남들이 이해 못할 말로 달라지는 이것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베드로로 하여금 물위를 걷는 겁니다. 물위는 걸었는데 설명이 안 되네요. 미치고 환장할 일입니다. 예수는 믿었는데 어떻게, 어떻게 믿었는지 설명은 안 되네요. 이게 설명이 되면 가짜입니다. 기도원에 가서 소나무뿌리를 한 번 뽑아봤더니만 믿었다든지 룰루랄라 룰루랄라 방언 터져서 그랬다든지 우리 이상규 집사님이 우리교회에 글을 참 잘 써놨어요. 우당탕탕 우랄랄라 소리하는데 아주 글을 잘 써놨어요.

어떻게 했더니만 어떻게 했더니만 하는 것이 사실은 있을 수가 없어요. 간증집회가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내처럼 하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는 믿고 난 뒤에는 늘 믿음에 실패해야 됩니다. 가짜는 뜯어져야 돼요. 은광에서 은을 뜯어내기 위해서는 은이 아니면서도 은의 주변에 붙어있는 것들은 하나님의 진노로 십자가의 진노로 전부 다 뜯어놔야 돼요. 우리는 뜯겨나가는 그러한 것을 하면서 우리는 참된 이스라엘로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게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외부환경이 자아를 변화시킨다. 그런데 외부환경을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은 외부환경을 누가 만들어요. 내가 만들어요. 어떻게 만드는가, 나는 역사적 존재다. 역사적 존재로 구원이 안 되니까 역사에서 무엇으로 구원되어야 된다? 묵시로 가야된다. 그래서 나는 역사도 믿고 묵시도 믿고 다 믿는다. 이게 신학이거든요.

제가 이런 강의를 할 때는 성령이 있는 사람만이 알아듣는데 성령 없는 사람도 다 알아들었다고 하니까 그거 뭐 내 책임 아니지요. 사실은 내 책임 아니에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목사가 무슨 수로 남을 구원합니까? 십자가진 분은 예수뿐인데,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어요.

십자가 지신 분은 예수님이지 사도바울이 십자가 안 졌거든요. 사도바울은 십자가 진 여파에 포함이 돼버렸지 십자가 진 외부환경이 엄습해가지고 자아가 그만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가 일어난 것뿐이지 변화의 주체는 내가 아니거든요. 변화의 주체는 자기가 아니다 말이지요. 저는 그걸 강간이라 합니다. 그냥 영적 강간당한 겁니다. 왜 이러세요? 왜 이러세요? 벌벌 떨면서. 가만히 있어! 왜 이러세요? 그래서 구원받은 거예요. 당해버렸어요. 심지어 예수님을 임신까지 해버렸어요. 그런 상태가 돼버렸어요. 그래서 그걸 영적폭력이라 합니다. 이걸 칼 바르트는 위기라고 합니다.

우리한테 위기가 와가지고 위기가 오고 난 뒤에, 동화에 보면 천사가 마술로 뾰로롱~ 하면 변화잖아요. 거지인데 천사가 와가지고 뾰로롱하니까 갑자기 신데렐라가 딱 되는 거예요. 그런 동화 있지요. 그것처럼 성령이 오게 되면 뾰로롱인데 문제는 그걸 다시는 재현할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 쪽에서.

처음에는 좋았는데 나중에는 점점 더 십자가를 닮아가는 십자가 죽음을 닮아가는 인생을 갈 수밖에 없어요. 십자가 지고 날 따르라. 그래서 베드로에게 물위를 걷게 만들고 결국은 베드로 입에서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라고 해서 야! 베드로마저 배신을 때렸구나! 그러면 배신했다고 지옥 가는 건 아니라는 거죠. 야, 제가 지난 주일날 바닥을 치라 했잖아요. 바닥을 쳐야 돼요. 바닥을 칠 때, 인간 쪽에서 먼저 하나님을 버려야 되고 그 다음에 하나님 쪽에서 우리를 버려야 돼요. 그 현장이 십자가지요.

그 속에서 마술사가 베드로에게 뽑아낸 것처럼 쏙 뽑아 올린 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올라오지요. 그 틈 사이에서. 그러면 그 예수님이 올라오면서 같이 우리도 덩달아 올라오게 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이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일을 그렇게 하셔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여러 명이라도 다가 아니고 오직 한 사람만 아브라함 자손이에요. 아브라함 자손을 올리게 되면 새로운 영적인 아브라함 자손, 이스라엘이 새롭게 조성되어 만들어지는 거죠.

이제 그렇게 아셨으니까 계속 내용 봅시다. 25, 26절에 봅시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밤 사경에 새벽 2시쯤 됐을 거예요.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니까 캄캄하다 조명시설이 없다 이 말이죠. 제자들이 그걸 보고 유령이라 했지요. 지금 제자들은 외부환경이 아니고 제자들 나름대로의 현실을 만들어서 어떤 내부와 외부가 없이 그냥 환경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대전에 사는 사람들처럼 그냥 이 세상 환경이에요.

현실 속에 물 위를 걸어오는 어떤 존재가 있었어요. 물위를 걸어오는 존재, 그렇다면 현실 속에서 물 위를 걸었던 인물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지요. 예상하지 못한 거죠. 그래서 우리는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외부환경이 올 때는 반드시 예상 못하게 온다는 거예요. 제자들이 평소에 기도했습니까? 주여, 주께서 오실 때 물위를 걸어 오셔야 됩니다. 이런 걸 인간들이 기대하면서 기대했습니까? 아니지요. 결국 인간의 모든 기도의 예상과는 달리 오는 거죠. 왜냐 하면, 기도해 봤자 내가 아는 이 환경에 연장이 만들어진 것뿐이에요. 아까 강아지가 코로 울타리를 계속 밀어내면 마치 면적은 넓어졌지만 맨 동일한 성질은 넓어졌을 뿐이지 결국 울타리를 넘은 건 아니잖아요.

우리가 백날 기도하고 매달리고 주여! 하고 해봤자 정월 보름달에 비는 거나 교회 와서 비는 거나 삼위일체를 이용하고 주님을 이용하나 그냥 비는 거나 거기서 거기에 똑같은 거예요. 똑같은 성질이에요. 그래서 이 상규 집사님 글에 답변을 했잖아요. 기도의 응답이 뭐라고 했습니까? 부동산 잘 팔릴까 기도할 때 진짜 기도 응답은 소유용에서 벗어나는 게 기도응답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그걸 알고 기도를 많이 안 해요. 소유하는 즐거움이 빼앗길까봐. 진짜 기도 응답이 올까봐. 가진 게 없는 즐거움보다도 가지면서 오는 즐거움이 못내 잊지를 못해가지고 아쉬워서.

애인하고 헤어졌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애인이 돌아오는 게 아닙니다. 그 애인보다 그 애인을 잊을만한 더 좋은 애인을 만났을 때, 모든 문제는 게임오버, 끝난 겁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애인이 내가 예상한 애인 같으면 안돼요. 왜냐 하면, 이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예상하면 안돼요. 그런데 난데없이 등장했는데 보니까 옛날 내가 누굴 사귀었지? 하는 이 자체를 잊어버렸을 때, 그게 바로 예수님이 나타난 거예요.

예수님이 나타나버리면, 지금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 조차도 생각이 안나요. 하여튼 나에 대한 생각자체가 휭 날아가 버렸어요. 지금 나는 절대로 물위를 걸으면 안 돼 라는 생각도 날아가 버렸으니까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거예요. 베드로가 물위를 걸은 건 하나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나는 물위를 걸어서는 안 돼 라는 생각조차도 생각이 안 났기 때문에 물위를 걸은 겁니다. 언제까지? ‘나는 절대 물위를 걸으면 안 돼’ 라는 생각이 날 때까지만 물위를 걸었어요. 몇 걸음 걸었는지 몇 미터 걸었는지. 앞에 ‘나는’ 하는 것이 있을 때는 빠져버리고 ‘나’없으면 ‘나’ 생각 안 날 때는 주여, 누구십니까? 부를 때는 계속 나는 물위를 걷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외부환경이 나로 하여금 변화시키는데 어떻게 변화시키느냐 하면, 나라는 자체가 변화되어야 된다는 생각, 나는 구원되어야 돼, 나는 천국가야 돼, 라는 생각조차도 이걸 지워버리는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구원은 내가 생각한 구원이 구원 아니고 천국이 아닙니다. 구원은 난데없이 나타나서 그냥 나를 데려가는 거예요. 천국은 난데없이 나타나서 나를 그냥 납치해가는 게 천국이지 천국가려고 애를 쓰는 것은 그것은 강아지가 이 울타리를 넘으려고 코를 들이 박는 것밖에 안돼요. 그냥 애굽의 확장밖에 안돼요.

밤 새벽2시라서 어두워서 기자들은 몰랐습니다. 바다를 보고 놀라 유령이라 했습니다. 참 재미있지요. 유령. 유령이라는 것은 아무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럼 유령이라는 말을 왜 하느냐, 인간 아니니까 유령이지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의 뒤에 나타나는 아우라라고 합니다. 인간은 평소에 나만 보는 게 아니고 인간이 아닌 어두움도 같이 겸해서 같이 보면서 인간 본인을 생각한다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은 인간을 생각하면서 늘 공포에 사로잡혀 있지요. 여분의 것. 잉여의 것. 초과의 것. 초과된 그 무엇이 더 있을 텐데, 라고 하는 그것이 우리한테 불안감과 공포를 줍니다.

예를 들면, 춘천 닭갈비 먹으면서 분명히 이 집보다 더 맛있는 집이 있을 거라고 하는 순간 맛은 없습니다. 여분의 것, 초과의 것, 둘이 결혼해 놓고 내 남자보다 더 멋있는 남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남자가 아무리 잘해줘도 재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부부는 항상 나는 화인 맞을 놈이다. 라고 둘 다가 그렇게 해야 되지 니한테 내가 아까워하면 안돼요.

인간의 존재라 하는 것은 항상 어두움을 동반해서 이걸 하나의 짝을 이뤄가지고 본인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요거 누구 작품이냐 하면, 악마의 작품입니다. 악마의 작품인 동시에 하나님이 의도한 거예요. 따먹지 말라하는 것은 따먹어도 귀에 쟁쟁쟁 남아 있습니다. “따먹지 말라 했잖아!” 떠나질 않아요.

우리는 어떤 일을 성과 했으면 잊어야 되는데 금지된 것을 넘어설 경우에는 그 금지는 안 죽어요. 넘어서도 ‘내가 지금 안 올 자리에 왔지.’ ‘안 올 자리에 왔지 이러면 안 되는데.’ 그래서 금지한 것을 넘어섰는데 아담은 따먹고 넘어섰는데 전혀 넘어서지 않았어요.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했으면 이 죽음마저 넘어서야 되는데 따먹는 까지는 넘어섰는데 죽으리라는 못 넘고 죽음 안에 갇혀있는 거예요. “요거 잘됐다.” 덫에 걸린 거예요. 사실은 인간을 잡으려고 덫에 갇힌 게 아니고 마귀를 잡으려고 덫에 가둔 거예요.

그래서 지옥이라 하는 것은 선악과로서 심판하는 것이 지옥이고 천국은 이 자체를 벗어나는 거예요. 선악과는 이제 바이, 바이. 생명나무만 있는 거예요. 천국에. 이 사실을 물위를 걸어오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제자들에게 미리 다 보여준 거예요. 제자들은 이런 내막을 성령 받고 난 뒤에 알고 그 전까지는 몰라요. 드라마 보고 영화 보면서 참 안됐다. 아이구 좋겠다, 하지만 막상 내 자신이 하나의 연극이 아니고 내가 그 사태에 한복판에서 지금 같이 사태와 움직일 때는 아찔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누가 죽고 난 뒤 그러잖아요. 차라리 이것이 연극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또는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이야기하는 이유가 평소에 우리는 모든 일을 남의 일처럼 여기는데 막상 본인의 입장이 되게 되면, 전에 남의 일을 볼 때와 시각이 유지가 안돼요. 오로라 공주의 드라마를 보면, 그 주인공 오로라하고 마마하고 이혼을 했거든요. 일단 이혼을 했어요. 일단 이혼을 했을 때, 우리는 잘했다! 잘했다! 할 수 있어요. 그게 드라마가 아니고 진짜 내 이야기라면 남들이 그 이야기하는 조차도 불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령이란 말을 한 것은 뭐냐 하면, 왜 불쾌하게 어두움이 어두움으로 그냥 있지 배경이 배경으로 그냥 있지, 왜 배경이 아우라가 나를 덮치느냐, 그래서 뭐라 하느냐 하면, 유령이란 말은 “저리 꺼져나가! 오지 마! 저리 꺼져. 우리 산 사람끼리 있는 곳에 오지 마!” 하는 공포입니다. 그러니 평소에 공포라 하는 것은 어두움이 있는데 어두움은 어두움자리를 유지해 주고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끼리 있고, 고 질서를 그 약속을 서로 지켜주는 한 우리는 어두움이 있더라도 숨쉴만한 거예요. 휴~

애들이 번개치고 천둥칠 때, 애들은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어른은 왜 안 무서워하지요? 번개, 천둥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많이 겪었잖아요. 어른은 천둥, 번개가 무서운 게 아니고 사채업자 쳐들어오는 게 더 무서워요. 그렇잖아요? 애들과 다르다 말이지요. 애들은 번개, 천둥이 어리기 때문에 그게 가까이 오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물론 화산 근처에 사는 애들은 안 무섭지요.

그것처럼 사람들의 현실이라 하는 것은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밝은 것이 있다는 사실은 항상 이미 배경이 어두움을 깔고, 휴유~~ 다행이다. 항상 매일 하루 24시간 일과 끝나고 난 뒤에 “여보! 오늘도 무사히 집에 오는 거죠. 아이고, 오늘도 차사고 안 나고 무사하구나!” 무사하다는 말은 늘 상 두려운 요소가 떠나지 않고 있다는 말이에요. 항상. 오늘도 애들 진이는 잘 있는지? 이것은 뭐냐 하면, 항상 세상이 너무 두렵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이런 CF있잖아요. “지아야, 세상이 너무 위험해.” 8살 먹은 애가 그런 이야기하지요.

유령이 왔으면 더 놀라운 사실은 유령으로 “유령아, 가라.” 갔으면 덜 무서웠을 텐데 유령이 무엇으로 등장했습니까? 자기들과 함께 있었던 예수님이란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아까 중첩된 거죠. 그리스도에 대해서 중첩된 거예요. 보기는 보아도 전혀 저 분이 누구인 줄 모르는 겁니다. 포개져있던 거예요. 제자들이 평소에 예수님을 존경했지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었잖아요. 그 믿은 게 자기 지평의 확장에 불과한 거예요. 그게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백날 확장해봐야 주님 모른다고 3번 부인할 거예요.

정말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 때문에 제가 달라졌습니다. 이리 되는 것이지 제가 주님을 알아 모시겠습니다. 라는 말을 그런 생각을 들 수가 없게 돼 있어요. 제가 앞으로 주님 잘 섬기겠습니다. 라는 말을 하지 말고 주님이여, 나를 더욱 더 죄인 되게 하옵소서. 왜 주님만이 귀한지 왜 주님 아니고서야 안 되는지 이유를 평생 살아가는 동안에 내가 담고 있는 이 아담의 죄를 날마다 두레박으로 퍼내게 하옵소서. 주께서 지금도 그 소리해도 퍼내고 있는 중이야. 늘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밖에는 자랑할 게 없어요. 십자가 죽으심 이외에는 자랑할 게 없어요. 신학박사들이 박사학위를 받는다.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개척교회 안하고 학위 받겠다고 간 거 그 자체가 이미 그건 예수를 떠난 거예요. 진짜로 강제로 누가 신학 하라고 떠밀 것 같으면, 진짜 떠밀어서 주의 뜻으로 갔으면요, 이 박사학위 나는 이것도 죄입니다. 라고 고백할 것이지 이거한다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 그런 소리 안 나옵니다.

박사학위 따서 신학교가서 면접 보는데 총장이 “당신은 박사학위 따는데 애 먹었지요?” 하면 “이것도 죄입니다.” 하면 누가 그 사람을 신학교 교수로 하겠어요? 신학교 교수 자체가 불신자라 보면 돼요. “그게 다가 아닙니다. 진짜 신자 맞습니다.”하면 고거는 그야말로 물위를 걸었던 베드로 쯤 되고, 고맙고 감사할 일이고요. 없다는 일이 아니고 그런 기적이라도 있기 위해서는 좀 떼 내자 말이지요. 좀 떼어 내어 보자. 혹시 숨어있는지. 성도를.

무서워 소리 지르지요. 왜 소리 지릅니까? 귀신이면 꺼지라고 소리 질렀겠지요. 하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안심해라. 내니 두려워 말라. 예수님이 나타났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가 아니고 이미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너희들이 자기를 빛이라 여기고 바깥의 배경을 뭐로 여깁니까? 어둠으로 여기는 이 자체가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이 자체가 의미 없게 된 것을 걱정하지 말라 이 말이죠.

니가 상상한 그 이상으로 내가 나타나기 때문에 니가 상상한 것 때문에, 니가 실수한 것 때문에, 잘못한 것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 이 말이지요. 니가 오인한 것 때문에 그것 때문에 내가 탓하지 않겠다. 그런 뜻이에요. 안심해라. 니는 인간이잖아. 니는 어디까지나 인간이잖아.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주께서 아시는 거예요.

14장 28~29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지금 베드로는 누구만 시선을 맞춥니까? 예수님에게만 시선을 맞추지요. 진짜 예수님인지 확인하겠다. 확인하는 방법은 나도 물위를 걷게 하옵소서. 라고 확인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물위를 걷되 그 다음 뭡니까? 뭘 봤어요? 예수님을 바라봐야 되는데 갑자기 뭘 봤습니까? 바람을 보고 바람을 본다는 것은 괜찮아요. 바람을 무서워하지요. 참 이상하지요. 왜 바람을 보면 무서워합니까?

바람이 불게 되면, 물결이 잔잔하지 않고 요동칠 것이고 요동치게 된다면 지금 걸어가고 있는데 물결치면 걷는데 힘들지요. 힘들어지면 나는 물에 빠져야 돼요. 결국은 뭐냐 하면, ‘나는 물에 빠져야 돼’ 를 믿는 거예요. 결국은 ‘나는 어떻게 되지?‘ 를 신경 쓰면서 시선이 주님한테 돌아간 겁니다. “주여, 저 어떻게 돼요?” 지금 어떻게 돼요? 라고 하면서도 구원받았는데 물위를 걷든지 관계없이 지금 주님 쪽으로 가고 있으면 주께서 가게 하시거든요.

이거 아셔야 돼요. 아까 마태복음 14장에서 뭐라 했습니까? 사도라 하는 것은 우편배달부라 했지요. 그들이 귀신을 쫒아내고 병을 고치고 말씀을 전했잖아요. 그거 다 누구의 힘입니까? 주님의 힘이지요. 교통사고 났는데 어떤 사람이 그 교통사고를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법원에서 목격자를 찾아서 찾아가서 증언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교통사고 목격한 것이 누구의 능력입니까?

그냥 교통사고를 일으켰기 때문에 지는 바라봤을 뿐이지 거기서 아주 기다려서 이쪽에서 교통사고 일어나야 되는데 해서 기다렸다가 본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 모든 것은 교통사고 일으킨 쪽이고 지는 보기만 했잖아요. 사도는 그런 입장이에요. 우리는 그냥 당했을 뿐이에요. 그냥 영적으로 강간당했어요. 주님한테 그냥. 엄습해가지고 외부적 환경이 내부적 자아로 파고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다음부터는 눈을 돌립니까? 구원받았으니까. 아니에요. 그 달라진 분을 쳐다보고 가는데 베드로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람이 불어?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이는데. 자기가 평소에 옛날에 알고 있던 논리 있잖아요. 원인과 결과 거기에 신경 쓴 거예요. 내가 교회를 안 나가? 안 나가면 그러면 나는 믿음이 떨어지고 믿음 떨어지면 안 되지, 안되지, 이러고 있다고요. 그럼 지가 교회 나가서 구원받았습니까? 그게 다시 애굽으로 퐁당 빠지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물에 빠졌지요. 육지에 가만히 있지 나가긴 왜 나갔어요. 이제 물에 빠졌으니까 지가 물고기 아닌 이상 부레가 없는 이상 죽게 되었습니다. 죽게 되니까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지요. 물 좀 마신 것 같아요. 뭐라 하느냐 하면 소리 질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처음부터 구원했어요. 처음부터.

물에서 빠진 것을 살려달라고 할 게 아니고 처음부터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기 세계에서 환타지에서 나만의 현실에서 이미 빠져있습니다. 이 세상이 물이에요. 이 대전이 물이고. 물에서 건져달라고 할 때는 이미 예수님이 이 세상 바깥에 나가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에요. 이미 무사히 죽어서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주여, 저도 구원해주소서.” 하고 외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미련 없다 이 말입니다. 이 대전바닥에 미련 없어요. 청주 바닥에 미련 없어요. 다 미련 없이 우리는 “건져 구원해주소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건져주는 게 아니고 주께서의 답변은 “나는 건져 달라 하는 니 인생 속에 내가 들어갈게.” 빼내주는 게 아니고 아예 그 안에 들어와 버리는 거예요. 들어와 버리면 이 몸은 주님의 몸이 되고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겁니다. 바로 그걸 계획하고 주께서 오신 거예요. 빼내주는 게 아니고 빼내가는 것이 아니고 빼내기는커녕 아예 들어와 버려요. 껍데기는 우리고 속에는 그리스도가 살았어요.

껍데기는 흙으로 죽어가고 있고 속에는 예수님의 생명나무가 살아나는데 그게 뭐냐, 어떻게 아느냐 피,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용서받고 의인됐다는 의가 우리한테 피어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것은 주께서 우리에게 이미 찾아온 사람이에요. 그 상태가 구원이지요.

31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이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했지요. 믿음이 적다고 했지요.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그러면 믿음이 많으면 어떻게 됩니까? 의심 안하겠네요. 믿음이 적다, 많다는 것은 어디까지냐 하면, 예수님 십자가 이전까지의 그 당시의 사회, 12제자도 유대사회에 속합니다.

이들은 믿음에 있고 믿음을 키워야 된다는 사고방식이 그들의 현실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걸 그대로 사용하신 거예요. 니 상급이 크다, 작다. 뭐든지 상급이 많으니라, 크다, 적다, 많다, 를 따지는 것은 십자가 이전에 따지는 거고 십자가 이후에는 믿음이 있든지 없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어요.

믿음의 분량대로 섬기라는 것이 로마서12장에 나오지요. 믿음의 분량대로. 그것은 뭐냐, 니 쪽에서가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사용하신다는 거예요. 우리가 보기에 크게 쓰기도 하고 작게 쓰기도 하고 그렇게 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하는 것보다 니가 더 큰일을 하리라, 요한복음14장에 나오잖아요. 우리가 한다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십자가 지고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의 상상이상으로 지금 예수님이 하는 것보다 더 큰 일을 하시는데 그게 바로 사도바울의 일이고, 사도들의 일 아닙니까?

예수님의 하는 것보다 더 큰일을 하잖아요. 본인들이 한 게 아니에요. 주께서 그 안에서 하신 거예요. 그래서 정리하게 되면, 니가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아예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는 그 과도기에 이런 말씀하시는 거예요. 과도기에. “믿음 똑바로 하란 말이야. 키우란 말이야. 왜 의심해.”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이 크면 물위를 풍덩풍덩 돌아다니는 게 아니고 이제는 물위를 걸었다는 자체도 그건 믿음의 토대가 아니고 물위를 걷건 안 걷건 괜찮아요. 병 안 나도 괜찮아요. 죽었다가 부활했던 십자가가 곧 진짜 믿음의 완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물위를 걸은 것보다 더 놀라운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알아서 다른 사람은 귀하지도 않은 그 예수를 우리를 마지막 귀한 분으로 알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가 예수 믿지 말고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살면서 죄가 무엇인지 더욱더 죄인 되게 하기 위해서 일하시고 십자가만 증거 하라는 일을 우리를 통해서 한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대전20131121b-마14장22절(외부상황)- 이 근호 목사.hwp (33.5K), Down: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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