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상급에 대하여...
천국 상급에 대하여...
이름 : 박성산(IP:221.153.107.23)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날씨가 추운데 어찌 지내시는지요...
다름이 아니라 천국 상급론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부탁 드립니다..
게시판의 글에서 한번 본 기억이 있는데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찾을 길이 없어서 다시 여쭙니다..
자세한 설명을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근호(IP:119.♡.93.55)
13-12-04 15:07
상급의 차등론에 대해서
어떤 두 개의 실체 사이에 만약 ‘구별’이 있다는 말은, 이 둘 사이가 일치되지 않는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고 더 나아가서 각기 다른 원천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얼굴이 각기 구별된다’는 말은, 같은 얼굴이 없다는 뜻이요 각기 다른 유전 요소의 결합(DNA)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격상으로 볼 때,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하나 안에 묶어 판단해 버리신다. 즉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것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5:12) 이 본문에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라는 말이 나온다. 원천을 하나에 담아 놓고 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계시하기를 원하실까? 모든 인간의 얼굴이 동일해서? 아니다. 지구상의 모든 인종들 사이에는 생리적으로 성 결합이 가능하다는 인종적 이유 때문에? 아니다. 그렇다면 과학적으로 통계학적으로 인간들의 분석하고 분류해 본 결과 모두 다 동일하다는 최종 컴퓨터 결론이 나왔기에?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무차별성을 보이기 위한 수단과 배경으로 창조 질서가 존재하고 있다는 언약적 상황 때문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로마서 3:21) 즉 오직 ‘한 사람’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집중시키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그 분과 하나님 아버지 사이에서만 모든 계약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공간은 오실 그 마지막 아담을 표현해 내기 위해서 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다”(로마서 5:14) 하나님은 여기에 관심 있다. 이 언약에 의해 새로운 세계가 언약적 관계 위에서만 열린다.
‘차등’이라는 말은, 가치의 비교 우열을 논하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이다. 상급에는 차등이 없다는 말은, 더 나은 상도 없고 더 못한 상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상급에는 구별이 있다는 말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각기 다른 종류의 상이 있다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어보면, 여성 10명을 뽑아 놓고 모두 다에게 “‘아름답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자. 그런데 어떤 여성은 농사짓는 자요, 어떤 여성은 미인 콘테스트 출신이요, 어떤 여성은 신체 장애자요, 어떤 여성은 교도소 안에서도 말썽을 부린 전과자요 여성이요, 어떤 여성은 수녀로서 살아간다고 간주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우열 없이 논했다면 여기에 사용한 ‘아름답다’라는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성격의 단정함도 아니요, 외모의 단아함도 아니다. 결국 무근거성일 뿐이다. 어떤 가치를 말할 때는 무엇이든지 반드시 그 가치에 준한 요건을 만족시키는 요소가 그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성경에서 상을 줄 때는 그만한 상 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성경에서의 상은, 구약에서 ‘거룩한 여호와 전쟁’에로의 참여이다.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세기 15:1) 그런데 ‘거룩한 여호와 전쟁’의 핵심은, 의와 죄 사이의 싸움이다. 다른 말로 말해서 거룩/비거룩의 싸움이다. 가나안 족속들은, 인간에서 나온 행위들의 가치를 의존해서 자기들을 지탱했던 반면에, 이스라엘은 그들과 함께 동행하는 분의 거룩성과 긍휼함에 의존해서 전쟁을 시작했다. 달리 말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계약 관계에 있었다는 말이다.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애굽기 19:6)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신명기 9:5-6)
하나님의 거룩이 과연 차등은 없지만 구별은 있다는 말이 가능한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려 내리시는 용서가 과연 차등은 없지만 구별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옳은 주장이라고 할 수 있는가가?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과연 구약의 선지자의 상과 세례 요한의 상과 신약 성도의 상 차이에 차등은 없지만 구별이 있다는 말이 옳은 주장일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태복음 11:11) 차라리 차등이 있다고 말하는 편에 보다 솔직하지 않을까? ‘크다는’ 표현이 있으니 말이다. 마태복음 10:40-42에 나오는 말씀을 살펴보면,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본문에 해석의 핵은 ‘상’이 아니라 ‘이름’이다. 상이란 그 ‘이름’의 따라 마땅히 결과적으로 제공되는 것이다. 즉 상이란, 그 상의 근거가 되는 이름이 따로 있다는 말이다. ‘이름’이란 상을 유발한 행위의 주체를 지목한다. 어쨌던 성도가 상 받는 것은, 자기 행위가 근거가 못된다는 말이요 자기 행위, 즉 자기 이름과 무관하다는 말이다. 상의 차등이나 구별을 말하는 본문이 아니라 나 예수에 대해서 그 어떤 의미로서 보든지 상관없이, (동일하게 주의 제자를 다른 사람들이 어떤 의미로서 받아들이든지 상관없이) 주님과 관계 지어진 자는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다는 이야기이다. 더 이상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여기서 아무리 생각해도 상의 차등이나 차별이 나올 리가 없다. 고린도전서 3:5-9도 주님과 똑같은 관점으로 사도 바울에 의해서 전해진 주님의 계시이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 뿐이니라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린도전서 3:5-9) 이 본문에서 ‘― 무엇이며 ― 무엇이뇨’, 라든지 ‘아무 것도 아니요’, ‘일반이나’라는 용어를 유념해서 보면 상에 대해서 더 이상 곡해나 오해가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사도의 일을 하는데 하는데 있어 무엇이 상인지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고린도전서 9:16-18) 여기에서 사도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과 상을 연관시키고 있다. 부득불 하는 일이라는 말은, 전도의 일로 남과 비교해서 더 이상 자랑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시키시기에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내용뿐 아니라 전도자의 직분을 통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 한다. 그는 하나님이 내리시는 상에 이미 접수한 것으로 보는데 이는 자신이 곧 전도자로 직분을 맡은 그 자체로 보고 있다. 만약 자신이 자기가 원해서 사도의 직분을 맡게 되면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른 특별한 자기에게 상이 주어질 것이 분명하고 또한 도중에 그만 두게 되면 상은 자동적으로 없어지겠지만 자신이 받은 직분은 자신의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기에 거기에 따른 상도 자신의 공과와 무관하게 주신 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사도 자신은 성도들에게 상의 본질을 분명히 밝히기 위해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마저 다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사도가 스스로 그런 고생을 감당했기에 그 공과에 따라 그 양만큼 상이 주어진다는 오해를 심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에는 그 어떤 구별이나 차별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것처럼 해석하려 드는 것이 수상쩍하다. ‘차별’이라는 말은, ‘차등’이라는 표현을 더 원으로 둘러 감싸고 있는 표현으로서 일종의 동어 반복성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범위를 더 크게 확대시켜서 마치 새로움을 더 추가시킬 수 있는 개념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속임수이다. 범주를 넓힌다고 해서 속성이 달라지지 않는 법이다. 차별이 갖는 속성 중의 하나가 차등이다. 차등 속성을 나타내지 않는 차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상의 차등이나 차별이나 구별에 대해서 꼭 말하고 싶어하는 그 본심은, 주의 뜻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찌하든지 이미 많이 교인 수를 확보되어 있는 한국 교회를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봐주려는 아부성이 가득찬 발상이다. 일단 확보해 놓은 교인들을 더 이상 세상으로 놓치지 않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교회가 사회적으로 욕얻어 먹지 않아서 계속적으로 선교나 전도에 보탬이 되자는 방법을 모색하자는 술책인데 이런 술책이 마귀에게 먹혀 들어갈 것인가? 양도 많이, 질도 향상이라는 정신 상태에서 교회를 생각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교회라는 것을 햄버거 체인점 정도밖에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한국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열매를 맺고 있는 괜찮은 교인들이라는 긍정적 평가도 사회로부터 들어보고자 하는 시도는, 자아 확대에 불과한 우상 조직을 하나 만들어 놓고 그 조직이 구원받는 교회이기를 기대하는 것은, 차라리 가나안의 바알 종교가 곧 여호와가 세운 이스라엘이라는 주장을 늘어 놓는 것이 보다 솔직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주님을 보고 싶어한다든지 그리워하기보다는, 번창하고 부흥하고 남한테 욕 안 들어먹는 멋있는 근사한 교회상을 더 그리워하는 사고 방식은 자기 부인이 들어 있지 않고 십자가 장신이 누락된 가짜 교회이다. 사람의 교회를 주님의 교회로 전환시켜 놓고서도 계속 교회라고 우기는 것은 무리이다. 정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두고 있지 않는 인간들은 자꾸 엉뚱한 궁리만 한다. 선교나 전도에 정신을 팔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복음은 모르고 자기 욕심만 아는 자이다. 무의식 밑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세상 정복욕을 스스로 자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욕구 불만과 거기에 따른 결핍증 증세를 심하게 밖으로 토하는 자들이다. 도대체 자기 부인이 안되는 인간들이다. 세계 정복 욕구는 본인이 시체가 되는 때가 오기 전에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다. 이런 자들은 눈에 띄는 대로 세상의 모든 것을 전부 자기 지배력 밑으로 굴복시켜야 비로소 만족할 자들이다. 이들이 교회라는 자기 조직 내에서 제일 싫어하는 자들은 약한 자들이다. 그래서 약한 자를 강한 자로 만들려고 한다. 그래서 강제 훈련(소위 제자 훈련, 전도자 훈련) 시킨다. 그래서라도 초인과 같은 자기 자신과 부합되는 부하 직원으로 재 탄생시키려 한다. 교회, 즉 교인을 자기 사유물화 하는 정신이 이런 데서도 드러난다. 교회를 자기 탐욕의 크기를 측정하고 실험장소로 사용한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자기가 교회를 통해서 스스로 만들어서 그 때 그 때마다 써먹는다. 이단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에는 이런 자들이 집결되어 행동을 같이 한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탐욕자인가를 발견해서 회개되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이들은 이단이다. 정말이지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탐욕이 우상 숭배니라”(골로새서 3:1-5) 하나님의 의는 소위 교회라고 자처하는 조직 내에서 이러한 차별성과 차등성 발상을 지닌 각양 각색의 경향들로부터 참으로 심한 피해를 입으면서 실시되고 있다. 이 세상의 어떤 조직에서든지 약한 자는 서러움을 받기 마련이다.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데없다 하거나 하지 못하리라 이뿐 아니라 몸의 더 약하게 보이는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린도전서 12:21-27) 어쩌면 그리스도의 몸 자체인 교회가 이 세상에서 약한 자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믿음이며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4-5) 바로 믿음이 발생된 자에게는 하나님의 의도 ‘선물’이라는 방식을 통해 하나님의 의는 적용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