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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 강의(2013. 11. 22) 1강자유게시판히브리서

광주 강의(2013. 11. 22) 1강

이름 : 서경수(IP:121.146.32.143)

광주 강의(2013. 11. 22) 48-1

에스겔 45장 18-19절에 보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정월 초 하룻날에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를 취하여 -- 희생의 피를 취하여 전 문설주와 제단 아래층 네 모퉁이와 안뜰 문설주에 바를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내용이 창세기와 예수님 십자가 사건 중간에 있지요. 중간에 있으면서 무엇을 가지고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는 내용을 전달하느냐 그것이 중요하겠지요. 상하기 쉬운 음식물을 택배로 보낼 때, 처음 물건을 담았을 때는 싱싱했겠지만 우체국에 갔을 때는 조금 시들어졌을 것이고, 마지막 소비자에게 도착했을 때는 처음보다는 시들었겠지요.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 달라지는 모양새가 에스겔에 나와 있습니다. 에스겔 그 시대 사람들은 무엇이 달라졌는지 모르겠지요. 왜냐하면 미래를 모르기 때문이죠.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십자가가 모든 제사를 다 이루었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요.

히브리서 10장 18절에 보면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고 했어요. 예배 드렸다고 죄 용서 받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천주교에서 성만찬 하면서 ‘이 떡과 이 잔을 마시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소리는 사기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다시는 죄 씻는 예배나 제도, 형식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 받느냐?’ 이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왜 저를 구원했습니까?’ 이렇게 과거완료형으로 되어야 합니다. ‘무슨 근거로 제가 구원되었습니까?’ 이렇게 물어야지, ‘제가 무엇을 준비하면 구원 받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 사람은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지금 에스겔의 경우에는 제사를 드리라고 했기에 제사 드리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신약에서의 구원은 사람이 드리는 제사를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아버지 하나님과의 약속에 따라 드려진 한 번의 제사가 온전히 드려졌다는 것을 통보받는 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래서 통보받은 사람은 ‘어떻게 해서 내가 구원 받았지? 아, 예수님 십자가 지심 때문이구나.’ 이것을 알지요. 고린도전서 2장 2절에 보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어요. 방금 이야기한 것이 남들 보기에는 그저 종교고 기독교의 교리에 관한 문제로 들리지만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은 ‘십자가로 구원 받는다’는 이것이 우리의 삶에 동력이 되지요.

살 때도 죽을 때도 이미 구원 받았다는 사실이 모든 구석구석에 파급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에는 ‘영적 예배를 드리라’고 했지요.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산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의 일상을 만들어놓고 그 일상 속에서 십자가를 끄집어내는 방식으로 예배를 받으십니다.

일상에서 십자가를 끄집어내는 방식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면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의 모든 것이 죄임을 안다는 것은 구약의 말씀으로는 안 되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신구약 전체가 해석되어져야 합니다. 구약의 십계명이나 신약의 사도바울의 권면이나 모든 말씀이 십자가가 바탕이 되어 올라오게 되면 우리는 그 말씀을 대하면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어떤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고 향유를 부었어요. 그 때 여자가 스스로 ‘나는 잘났어!’ 이런 생각하면서 발을 씻었습니까? 아니지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겁니다. 이러한 상황, 예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십자가가 모든 영역에 덮쳐서 조성된 상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 앉은뱅이가 걷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나를 걷게 하셨다는 것을 알 때, 자신이 걷게 된 것이 자랑스럽겠습니까, 아니면 자신이 죄인이란 생각이 들었겠어요? ‘이제 걷게 되었으니까 자유롭게 살 거야.’ 이것이 아니라 ‘걷지 못할 때나 걸을 때나 나는 죄인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살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걷게 되었다는 사실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나 같은 죄인도 용서 받았다.’는 마음, 다시 십자가로 환원되는 거예요. 앉은뱅이인 내가 걷게 된 것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사건의 의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앉은뱅이인 나를 걷게 하셨구나.’ 이것을 계기로 해서 내가 근원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항상 우리의 밑바닥을 보게 하는 거죠.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어요. 최초의 제사가 어디에 등장합니까? 창세기 4장이지요. 그 제사를 보면 두 사람이 제사를 드립니다. 가인과 아벨. 아벨이 먼저 제사를 드려 하나님이 받으신 것이 아니고, 가인이 먼저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그 제사를 거절했지요.

왜 가인의 제사를 안 받았을까? 창세기 3장에 보면 이미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습니다. 그러면 제사라는 것은 그 범죄한 흔적을 도드라지게 노출시키는 것입니까, 감추는 것입니까? 죄를 노출하는 제사를 하나님이 받습니까, 감추는 제사를 받습니까? 인간이 범죄했다는 것을 확연하게 드러내는 제사를 하나님이 받습니다.

그러면 가인의 제사를 안 받는 것은 인간이 범죄했음을 감추려고 한 것 때문입니다. 범죄의 현장을 통과하지 않고 돌아가려 할 때 그 제사는 거절당합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하면, 하나님이 받아 주신 아벨의 제사는 양을 받으신 것이 아니고 아벨에게 일어날 사건을 받으신 겁니다.

아벨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았다는 소문이 나면 죽임을 당하지요. 그 때 창세기 3장에서 있었던 사건을 제사를 통해서 반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 봐, 죄 지은 것 맞잖아?”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하시는 말씀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3:17).”고 하셨어요.

제사가 전에 있었던 말씀을 재현해서 그것을 구체화시키고 현실화 시키는 것이라면, ‘선악과 따먹은 것이 죄다.’라는 것에 머물면 안 되고, 죄인에게는 필히 ‘죽으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져야 하기에, 죽음의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등장인물을 통해서 ‘죽으리라.’까지를 다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 중 누가 죽었습니까? 가인이 죽은 것이 아니고 아벨이 죽지요. 오히려 가인이 살인을 했는데 살인자는 안 죽였습니다. 이건 구약 율법과 다르지요? 민수기, 신명기에 보면 살인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지 않고 살려 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살았다’는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들춰내는 죽음의 진수인 것을 산채로 보여주시는 겁니다. 죽었다는 것이 칼에 찔려 피 흘리고 호흡 중단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라는 개념을 확대시키는 겁니다. 소위 살아있는 것조차도 곧 죽은 것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확대시켜 나가는 거예요. 이런 놀라운 사실을 하나님은 제사 제도에 담으려 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제사 제도는 우리의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폭로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제사에 인간과 결부된 제사가 뭐냐 하면,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 죽이는, 사람이 사람을 제물로 바쳐 죽이는 인신 공양하는 그런 제사가 등장하지요.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라는 인간도 없고 이삭이란 인간도 없어요. 둘 다 없는 인간이에요. 아브람은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와서 새롭게 조성한 인간입니다. 아브람 본인이 아브라함 되려고 애쓴 적이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찾아와서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아브라함(많은 자의 아비)이 되게 하신 거예요.

그렇다면 일방적인 형식만(이름만) 그렇게 하나님이 만드시면 그 내용은 누가 채우는 거예요? 그것도 하나님이 채워요. 많은 자식의 아비가 되려면 아버지가 살아있어야 합니까, 죽어야 합니까? 살아있어야 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죽어야 비로소 ‘많다’가 나오는 거예요.

마태복음 13장 12절을 봅시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없는데 빼앗길 게 뭐가 있습니까? 예수님이 이상한 말씀 하신 것 아닌가요? 아무것도 없는데 뭘 빼앗아요? 이런 말씀을 해석하려면 구약과 관련시키지 않으면 해석 자체가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란 사람은 없어요. 이삭도 없는 사람입니다.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뿐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 배후에 약속을 던져놓고 자기가 던진 약속을 자기가 되찾으면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하나님. 그분이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고, 없는 이삭을 새롭게 만들어 냅니다.

없는 아브라함과 이삭이 약속 때문에 있게 되지요. 그러면 약속에 포함되지 않는 기존의 있는 것들은 뭡니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없는 거예요. 없는 것인데 있는 척을 하니까 없는 것을 빼앗아서 삭제해 버려야겠지요. 제 설명이 어렵습니까? 가짜라는 말입니다.

가짜 명품 어떻습니까? 가짜 시계, 가짜 비아그라는 제 기능을 못하고, 제 성분이 없지요? 효과도 없고. 없으니까 빼앗아야죠. 이것은 없는 것을 단순히 없애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현재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새로 등장하는 것들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저쪽은 착실하게 제거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저는 대구 강의에서 ‘성실한 방치’라고 했어요. 성실한 방치가 김장철에도 있어요. 보통 아줌마들이 김장을 하고 남편은 그늘진 곳에 구덩이를 파고 김장독을 묻을 때, 그 김장독을 방치해 두지요. 그 방치가 성실한 방치가 되는 겁니다. 늘 생각하고 있어요. 성급하게 꺼내면 안 돼요. 묵은지가 되려면 3년은 방치해 두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그 작업을 차분하고 착오 없이 성실하게 수행하십니다. 성경 자체가 없다고 여겨지는 것을 있음으로 만들기 위한 성실한 작업의 절차와 순서를 지금 우리가 에스겔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에스겔은 창세기와 십자가 사건 사이에 있어요.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일단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시작돼요. 모든 철학과 과학이 다 그래요.

유럽의 과학자들이 ‘힉스’라는 물질을 얼마 전에 발견했어요. ‘힉스’라는 물질의 의미가 뭐냐 하면, 영혼과 물질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를 찾아내는 겁니다. 정신과 물질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를 찾아내는 거예요. 이제 과학이 종교의 영역마저 점령하고 있어요. ‘힉스’를 넘어서면 ‘없음’이에요.

‘없음’에서 어떻게 ‘있음’이 나왔는가? 그 경계선에 ‘힉스’라는 물질이 있단 말입니다. 라이프니츠에 의하면, 모든 물질의 최후 알맹이(원자)가 물질로 된 이상은 끊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걸 ‘미분’이라고 합니다. ‘微(미)’는 아주 작은 것을 ‘分(분)’은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잘게 쪼개는 것이죠.

아무리 잘게 쪼개서 마지막 점이 되었다 할지라도 점도 끊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수학에서는 ‘점은 끊어지지 않는 최후의 것’이라고 했어요. 이것을 ‘공리’라고 합니다. ‘공리’는 인간들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정한 거예요. 과학은 신을 도입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마지막 신의 세계로 넘어가기 직전으로 보지만, 라이프니츠는 신을 믿는 철학자이기에 그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그것도 끊을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물질과 영이 함께 있는 것을 ‘모나드(단자)’라고 합니다. 이 단자의 특징이 뭔가 하면, 주름으로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단자를 만들었어요. 단자가 시간이 지나게 되면 주름이 펴지면서 안에 감춰진 것들이 하나하나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이 주름 속에 감춰져 있던 정보는 하나님이 창조할 때 ‘너는 2013년에 광주에서 누구를 만나야 해! 어느 골목에서 교통사고 나야 돼!’라는 정보도 이미 담겨 있어요.

모든 예정된 것이 펼쳐지면 세상은 지금의 모습대로 된다고 하면서 이것을 ‘예정 조화설’이라고 했어요. 하나님은 처음 창조할 때 ‘단자’와 더불어 시간도 같이 창조해서 만들어진 ‘단자’에 시간이 병행해서 펼쳐지도록 되어 있다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옥상에서 돌이 떨어져 죽었다면 그 돌은 때가 되어 바람이 불어 떨어졌는데, 그 바람 부는 것도 이미 하나님이 예정하셔서 바람이 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면, 그전까지의 신학은, 인간의 욕망은 나쁜 것이었어요. 왜 나쁜가 하면, 홉스에 의하면 인간의 욕망은 이기적인 것이기 때문에 남이 죽든 말든 자기만 살면 된다는 것이기에 나쁜 것으로 여겼습니다. 성경에도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라는 말씀이 있지요.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그렇게 보지 않고 주름이 펼쳐지는 것을 가지고 욕망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욕망을 나쁘게 보지 말고 욕망조차도 내가 나 되기 위한 하나님의 예정된 코스로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욕심내는 것도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되는 거지요. 라이프니츠가 이 정도로 이야기했으면 신학자들은 할 말이 없는 거지요.

당시의 신학자들은 뭘 했는가? 신앙고백서 만들어놓고 그것을 교회에서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일만 했어요. 개신교나 천주교나 신앙고백 가르치는 일에 바빴지 말씀 연구는 없었어요. 그것은 철학자들이 했어요.

철학자들이 다시 성경을 보니까 성경이 새롭게 열리지요. 그런데 문제는 ‘있음’에서 ‘없음’의 세계로 다가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내가 있잖아요. “있는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구원 받습니까?” 라고 할 때, 출발점을 나에서 시작한다는 자체가 이게 과학이 되었건 철학이 되었건 이것은 복음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복음은 뭡니까? 복음은 단순히 하나님 쪽에서 다가오는 것만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다가오고 우리 쪽에서 다가서는 그 경계선에서 십자가 사건이 벌어진 것이 복음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생각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유한하다고 봐요. 한계가 있다고 본 거지요.

오늘 강의 제목이 ‘한계’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한계가 있다고 봐요. 새처럼 날지도 못하고 또 죽어가고 있잖아요. 죽는다는 것을 꼭 교회 다녀야만 압니까? 어떤 사람이 노름해서 돈 잃고 옥상에서 뛰어내렸는데, 그 사람도 높은데서 뛰어내리면 죽는다는 것을 알았어요. 죽음을 아니까 죽음에서 사는 것도 생각하겠지요.

내가 여기 있는데 결국은 죽는다. 그러면 사는 방법은? 이렇게 되면, 역사에 묵시를 첨가해서, ‘역사의 생이 끝난 후 묵시의 세계를 기다린다.’ 라는 아이디어는 철학이나 과학이나 인간이면 누구나 표현을 못할 뿐이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에요. 역사에 묵시를 추가한 생각을 복음 안다고 여기면 안 됩니다.

역사와 묵시도 묵살 당한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역사와 묵시를 아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살해했잖아요. 그 만남의 현장에서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는데, 주님은 그 십자가 사건을 계속 들이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주님, 왜 이러십니까?” 이렇게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도마에게 자신을 알리는 방법이 뭐였습니까? 우리 같으면 “봐, 보란 말이야! 내가 살아났잖아?” 이렇게 보여 줄 텐데,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창자국, 못자국을 보여 주셨지요.

그것은 부활이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가 아니고 십자가가 드러나야 부활이에요. 십자가가 보여야 돼요. 도마는 뭘 봅니까? 창자국, 못자국을 보지요. 그걸 보면서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했어요. 성령은 그 지점을 부각합니다. 왜? 그 십자가가 부각되어야 성령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주장하시기를, ‘죄와 의와 심판의 근거는 오직 하나에게 나왔다.’ 그게 뭐냐? 인간들은 아무리 머리를 써도 예수님에 대한 판결은 잘못 되었다. 그 잘못된 지점을 한계 지점으로 우리에게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그동안 내가 알았던 과학, 철학, 경험 이 모든 것들을 내려놓게 되지요.

제가 쓴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서울에 있는 교회를 사임하고 자진해서 낙도로 간 목사 부부가 가난한 섬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예수님의 희생적 삶을 산다고 자부했는데, 여상 졸업하고 서울에 취직한 딸이 오랜만에 부모님 보러 온다고 갯벌을 건너오다가 밀물에 빠져 죽었어요. 사랑하는 딸은 죽고 딸이 신었던 장화를 발견했는데, 그 장화를 교회 강단에 집어던지면서 “주님, 저에게 어쩌라고 이런 일을 일으키십니까?”라고 울부짖었어요. 실화입니다.

제가 그 사실을 듣고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서울에서 목회하지 뭣 하러 낙도로 갔나. 영적 영웅이 되기 위해 갔는가? 본인은 그런 결단적 삶이 대단한줄 알았지요. 주님이 끝까지 밀어붙이면 ‘내가 낙도까지 자진해서 내려왔습니다.’라는 자부심도 다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하시는 일에 우리는 그냥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들 주사 놓을 때 어떻게 합니까? ‘이 주사는 어떤 성분이 있고, 이 약을 개발한 사람은 누구다.’ 이런 설명 합니까? 그냥 간호사가 아이 엉덩이를 치면서 주사바늘을 꽂지요. 아이는 그냥 일방적으로 당하잖아요. 따끔합니다. 성령이 들어오면. “왜 저에게 이런 아픔을 주십니까?” 이런 소리가 나와요.

우리가 ‘이것까지는 내 인생이고, 죽어서 천국 가겠습니다.’할 때, 그 경계선을 누가 정합니까? 보통 본인이 정하잖아요. 그러면 이 본인은 가인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이곳까지는 내 영역이고,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 영역이니까 내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 마음을 달래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 복을 받겠다.’고 하는 아이디어가 계속해서 우리에게서 나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는 더욱 경건한 생활을 하고 가능하면 나쁜 짓을 안 합니다. 혹시 나의 나쁜 짓으로 중요한 일이 파토나지 않을까 불안해하면서. 이게 바로 가인입니다. 경망스러운 행동을 스스로 자제하는 것. 역사와 묵시의 한계선을 자기가 정해 보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그렇게 경계선을 정한 그 자체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진짜 경계선을 만드는데 부정적 역할로 기여하게 됩니다. 그렇게 경계선을 정했던 그 인간이 동생 아벨을 죽였잖아요. 그게 경계선이에요. 이 경계선은 우리가 정할 수 없기 때문에 ‘정하지 말아야지.’가 아니라, 우리는 나름대로 ‘이것까지는 성령이 인도하는 삶이고, 이것은 막 사는 삶이다.’ 나름대로의 기준이 정해져 있으면 그 기준에 의해서 맞아죽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가 어떤 기준을 정해도 그것은 주님을 죽게 만드는 기준이 됩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는 순간 우리 쪽에서 뭔가 꿈틀거리기 시작합니다. ‘될 수 있으면 비판 안 해야지’라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인 우리의 속성이에요.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안 꿈틀거리게 성경 보지 말까요? 우리는 안 꿈틀 거릴 수가 없어요. 성경 말씀은 우리의 모든 욕망적 꿈틀거림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방향으로 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경을 보세요. 우리의 모든 욕망은, ‘이제는 예수님 앞에 바르게 산다’는 식으로 왜곡이 작동하게 됩니다.

교회 나와야 지옥 갑니다. 그리고 교회 나와서 지옥 가야 천국 갑니다. 자신이 지옥 가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어떤 여인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실 때, 그 여인은 옆에 바리새인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의식할 필요도 없어요.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이 있지요. 그 여자가 예수님 만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용서받은 여인이 바리새인 눈에는 어떤 사람으로 보입니까? 여전히 행실 더러운 여인일 뿐이지요. 그러나 용서받은 여인의 시각에서 보면 바리새인은 아마추어도 그런 아마추어가 없어요. 자기는 프로입니다. “너희들이 게 맛을 알아?” 이것과 같은 거예요.

바라새인들은 세상이 뭐고 인간이 어떤 자인지 전혀 몰라요. 야비하고 비겁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바닥에 글을 쓰니까 돌 들고 서있던 자들이 다 도망을 갔어요. 글을 쓸 때 그 글이 그들에게 찔림이 되었어요. 그러면 주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주님이 안 보이는 쪽으로 얼른 도망을 갔어요.

그물로 고기를 몰듯이 하나님은 바벨론을 시켜 예루살렘 주변을 먼저 침공해서 거기서 피난민을 만들어서 그 피난민을 예루살렘에 모아서 예루살렘을 불 질러 버립니다. 하여튼 하나님의 작업은 실수가 없습니다. 멸망할 자는 기어이 멸망케 하십니다.

복습해 봅시다. 제사란 인간과 하나님을 갈라놓는(경계선을 만드는) 작업인데, 인간이 나름대로 천국과 지옥, 또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일방적으로 규정하지요. 그러나 진짜 제대로 된 분류 작업을 위해 투입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또는 약속이 주어지면 이 세상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현실은 아니고 말씀에 입각해서 모든 것이 약속의 현실로 새롭게 조성됩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현실은 판타지(환상)입니다. 그러면 판타지 아닌 실재를 알 수 있는가? 전혀 몰라요. 내가 계속 판타지만 만들어 내기 때문에 판타지를 실재 현실로 알고 있어요. 이걸 알기 쉽게 말하면, 사람들은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글을 봐도 그 순간 자신이 선택한 보고 싶은 것만 모아서 그것을 현실이라고 우깁니다.

영화를 두 사람이 같이 보아도 어느 장면이 중요한가 하는 것은 서로 달라요.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30~40대 아저씨, 아줌마들은 전부 천사처럼 착한 분들이었어요. 그래서 그 어른들이 만드는 세상은 정말 내가 꿈꾸는 진짜 천국 같은 세상으로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린 시절 그런 생각 안 했습니까?

어린 시절 소풍을 가서 들판을 바라보면 갈대나 나무들이 아름답잖아요. 저 들판을 건너가면 마치 영화에 나오는 유럽의 아름다운 장면이 숨어 있을 것 같고, 멀리 보이는 예배당을 보면 그곳에는 천사가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는 것 같고 그런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그런데 지금 어른이 되어 그런 것들을 보면 전혀 달리 보이지요. 그러나 어린 시절에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보였어요. 왜냐? 자기가 아름답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은 천둥, 번개만 쳐도 무서워서 자기 방에서 엄마 방으로 옮겨오지요. 또 꿈에 귀신이 나타나면 얼른 엄마 방으로 오지요.

[사우드 오브 뮤직] 영화를 보면 마리아 선생님이 처음에 와서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게 된 것이 번개 때문이에요. 번개가 치니까 아이들이 무서워서 마리아 선생님 방으로 갔지요. 어린아이들은 자기와 비교해서 자기보다 월등한 존재(선생님, 또는 천사)를 의지하려 하는 거예요. 이게 아이들인데 어른이 되면 세상에서 비록 낙담해도 하나님(또는 부처님)을 의지함으로 안심을 얻는 거예요.

칸트에 의하면 이것이 최고의 악입니다. 왜냐? 자신의 책임을 자신이 믿는 신에게 미루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가장 악랄한 자라고 했어요. 대표적으로 교회 와서 하나님 믿는다고 “나는 부족합니다.” 하면서 자신이 지신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니 얼마나 뻔뻔합니까?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죄 짓고는 “용서해 주세요.” 이런 악랄한 자는 지옥 갑니다. 저도 지옥 간다는데 한 표 던집니다.

이런 자들은 지옥 가는 것 맞습니다. 이것은 칸트가 잘 본 거예요. 그렇다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향유를 부은 여인은 천국 갔잖아요. 그 사람은 본인이 믿은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믿게 하셨지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대목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한계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부족하니까 용서해 달라고 할 때는 또 하나의 한계를 내가 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내가 의지할 만한 대상을 찾는 것은 아직도 어린아이입니다. 아이들은 환상의 세계에 살고 있고, 그래서 산타크로스 할아버지를 좋아하는 거예요. 어른들이 산타크로스가 없다고 하면 아이들은 웁니다. 왜냐? 산타크로스는 자신이 의지하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 신이 없으면 나도 없는 거예요. 산타크로스 안에 본인의 이상체가 들어있는데 그것이 없다고 진실을 알려주면 받아들이지를 않습니다. 허구가 그들에게는 진실인데 그 허구의 허구성을 드러내 버리면 또 다른 허구를 끌어 모아 진실을 만들어야 하기에 새로운 수고를 또 해야 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마을에 아주 신비한 비밀스런 공간이 있다는 거예요. 거기에는 귀신이 있는데 거기에서 제사를 잘 드리면 복 받고, 제사를 잘 못 드리면 벌 받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함부로 그곳에 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나그네가 그 말을 듣고 호기심이 생겨서 그곳에 가보니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본인만 알고 있으면 괜찮은데 그 사실을 레스토랑에 가서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그 마을 사람이 그를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왜? 허구가 허구로 드러나는 순간 그 마을 사람들은 죽어요. 허구를 진실로 믿어야 본인들이 사는데, 이방인이 와서 허구를 허구로 드러내니 그들이 믿는 것이 뭐가 돼요? 그래서 이방인을 죽였어요.

바로 그것이 유대인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진실을 이야기하니까 죽여 버렸어요. 그리고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었다’고 전하는 사람을 내쫓고 복음을 제거하는 이유를 알겠지요? 그곳이 교회가 아니고 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름달을 보면서 늘 비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우주인이 달에 가서 테이프로 달을 가려 달 자체가 안 보인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때는 달을 보고 비는 사람이 ‘달이 없네!’ 하고 그 행동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달을 또 만들어요.

예수를 죽이면 죽은 자리에 그들이 원하는 예수를 만들어내요.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른 복음을 만들어요. 그것이 있어야 교회가 돌아갑니다. 인간들은 허구로 진실을 만들어냅니다. 본인 자체가 허구이기에 진짜는 다 죽여 버리고 허구를 만들어요. 허구에게는 허구가 맞아요.

진짜를 만난 사람만 진리를 알아요. 사울이 다메섹에서 진짜(예수)를 만났지요. 그 후 사울은 자신이 허구임을 알았어요.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는 말은, 자신이 누구보다 죄를 많이 지었다는 뜻이 아니고, 죄를 지금도 계속 생산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움직이는 모든 것이 죄가 된다는 거지요.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핍박한 예수를 만났잖아요. 핍박이 없으면 진짜 제사가 아닙니다. 가인이 아벨을 핍박했지요. 그 핍박이 내용이 되어 가인과 아벨 노선이 나누어지고, 아벨 노선에서 제사가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사울이 핍박한 예수를 만나고 난 뒤 (바울이 되어)그가 가는 길은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길인데 바울은 그 길을 아니 갈 수가 없었습니다.

눈물로 예수님 발을 적신 여인이 예수님께는 칭찬을 받았지만 그곳을 나서지 말자 바리새인에게 욕을 먹고 아마 그 동네에서 못 살았을 겁니다. 약점이 잡혀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은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것이기에 내게 속한 사람은 미움을 당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은 ‘네가 내 이름과 복음 때문에 미움을 받거든 이미 너는 나와 함께 있는 줄 알아라.’는 말입니다.

10분 쉽시다.

(2013. 12. 3. 18:17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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