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131121a-행20장28절(포개진 현실)55강- 이 근호 목사
대전131121a-행20장28절(포개진 현실)55강-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179)
대전131121a-행20장28절(포개진 현실)55강-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20장28절,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성경을 안 보게 되면, 눈에 보이는 현실만 달랑 남지요. 현실에서 그냥 밥 먹고 살고 그러면 그게 인생이에요. 더도 필요 없고 어쨌든 같이 사는데 같이 껴가지고 버텨가지고 나이 한90돼가지고 나중에 치매 약간 걸려가지고 죽으면 그걸로 인생 그나마도 대단한 건 아니지만 살았다, 이리 되는데 그게 우리가 보기에 현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경만 펼쳐버리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 딱 등장하게 되면, 만약에 그냥 살았다 하는 것은 뭔가 엄청난 게 빠져버렸죠.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가 안 되면서 90을 살게 됐을 경우에 그 나중에 나오는 낯선 현실, 우리가 예측도 못한 눈에 보이는 애굽만 전부라 했는데 애굽 바깥에 다른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죽고 난 뒤에 알았을 때의 경악 감. 이것은 인생 헛산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성경을 일부러 안 보려 해요. 성경아 튀어나오지 말라고 콱 눌러요. 콱 누르려고 하지요. 교회가면 그런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 교인들은 성경 이야기하면 외면해요. 딴소리해요. 교회를 자기가 알고 있는 현실 한 모퉁이에 교회를 집어넣지 교회라는 현실과 세상이 나중에 분리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이게 분리 돼버리면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에 있는 사람은 저쪽 천국으로 가는데 거기에 가입되지 않고 포함되지 않은 사람은 결국은 아무리 억지로 살던 실하게 살던 지옥으로 가기 때문에 분리되는 요 점을 굉장히 거북스럽게 여기는 겁니다. 우리는 시원하지만. 빨리 분리됐으면 하지만.
그래서 이 대목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28절에 “성령이 저들 가운데” 한 번 적어볼게요. 저들은 사람들이지요. 이건 우리가 이해합니다. 여기 성령은 사람이 아니거든요. 사람이 아니고 귀신도 아니고 그런데 ‘성령 +저들 가운데’가 이게 합치가 된다는 것. 이게 굉장히 보통 세상에서는 이것을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중국에서 선교사 하다가 북한에 넘어가서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사람이 있어요. 아직도 억류되어 있고. 북한에서는 간첩이라고 우기고 한국에서는 그냥 선교사라고 우기고 그렇게 됐는데. 만약에 그 선교사가 성령 받았다면, 성령 받아 중국에서 선교 생활하던 땅이라는 경계선은 그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어요. 그 사람이 왜 넘어 갔는가 아는 사람을 통해서 알아보니까 자기와 같이 성경 공부하는 사람이 북한으로 넘어갔데요. 그래서 그 사람 만나려고 따라 넘어갔답니다. 그러다가 걸린 건데.
진짜 성령 받은 사람에게 경계선이라 하는 것은 이 땅의 경계선은 북한 땅, 중국 땅 상관없는 거죠. 왜냐 하면, 성령이 두 세 사람이 있는 곳에 함께 있겠다고 주님이 하셨으니까 이 성경공부 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거라면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한다면 이걸 어느 정치권력이 사이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어떤 힘이라도 어떤 권세라도 주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라고 되어 있는데.
그래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성령이 저들 가운데’ 이 말을 방금 이야기한데로 정리해 보면, 이건 뭐냐 하면 ‘끊을 수 없다.’ 로 포함되지요. 끊을 수 없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이 현실은 인위적으로 영토나 철조망 또는 인간들의 감정 같은 걸로 전부 다 어떻게 됩니까? 전부 다 끊어지지요. 우리 갈라서! 하면 끊어지잖아요. 끊어지는데 니 나하고 살지 마, 지금부터 갈라서! 하면 우리는 끊어졌다고 생각하는데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우리가 헤어져! 해도 헤어진 것이 헤어짐이 아니라는 거예요. 헤어짐이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가 성령을 선택했으면 이제는 성령하고 안 놀아! 되는데 성령께서 자기가 계시겠다고 선택한 이상은 우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주님이 떠나는 방식이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말이 어렵지요?
주님이 만약에 떠나지 아니하면 숫자를 세요. 12제자 +1=13명, 주님하고 제자들하고 같이 중국집에 갔다면 자장면 13그릇주세요. 되잖아요. 예수님이 숫자가 하나밖에 안돼요. 13명 중에 1명일뿐이에요. 주님 떠나지 아니하면. 주님이 떠나버리면 두 세 사람 모인 곳에 주님 온다면 4명 되는 게 아니고, 2~3 사람이라도 1로 만드는 그러한 현실을 우리가 이해하고 납득하도록 그렇게 조치를 하는 겁니다. 이 성경대목이 교인들에게 많은 위로가 되는 게 고린도전서 5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이 대목입니다.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다. 그러니 우리가 갈라설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겁니다. 요점을 생각해 주시고요.
그 다음에 우리가 생각할 것이 상당히 난해한 건데요. 성령이 저들 가운데 함께 있으면, 이걸 쉽게 하기 위해서 예를 들면, 바다가 이렇게 있습니다. 바다에 보면 정어리 떼가 헤엄치고 있습니다. 정어리 군집이지요. 군집. 여기에 정어리 한 마리를 생각한다면 이 정어리 떼에 자기가 포함돼 있으면 자기네들의 세계라고 여길 겁니다. 그런데 바다 전체에서 보게 되면 이 정어리 떼는 그냥 바다의 일부 부분에 지나지 않지요.
정어리 떼는 생각하기를 이렇습니다. 우리 정어리 떼라고 생각할 때 이걸 ‘틀’이라고 할 수 있어요. 여러분, 그림의 액자 있으면 액자 바깥은 그림입니까? 아닙니까? 그림 아닙니다. 액자를 딱 틀지어서 그 안에 있는 것을 그림이라 하지요. 인간들의 현실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그냥 현실이라 하지만 그렇게 이해 못하고 틀지어져야 그걸 현실로 생각해요. 틀이 지어졌을 때.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성령 안에 저들 가운데 있을 때 하니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뭐냐 하면, 성령이라는 이 현실을 따로 보고, 이 성령 자체를 우리의 하나의 현실에 틀지어진 성령 세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제가 언급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 생각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바다에 있거든요. 바다에 있는데 우리는 성령 받았다 해서 우리끼리 있다고 틀지어서 액자를 씌워서 우리는 성령 안에 있고 저 사람은 성령 밖에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평소에 생활습관이 되고 말았다 말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생각한다면 성경말씀이 제대로 이해가 안돼요. 그리고 이렇게 한다면 신앙생활하면서 의문점이 너무 많이 생겨요.
어떤 의문점이냐 하면, ‘아이고, 옛날에는 성령 받은 거 같은데, 요즘은 성령 받은 거 같지가 않아.’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럼 평소의 버릇이 뭐냐 하면, 자기가 자꾸 틀을 만들어서 그래요. 액자를 만들어서 그래요. 전에는 성령 안에 있었는데 지금은 성령 밖으로 쫓겨난 게 아닌가, 라고 스스로 액자 틀을 만들 게 되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거 정어리 떼라 보면 돼요. 우리는 바다에 속했지 정어리 떼에 속한 게 아니거든요. 하나의 바다에 속한 거예요.
사도가 평소에 살아갈 때에 어디서나 그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지요. 로마가나 어디서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 다른 사람이 사도를 보기에는 “아이고 사도님, 이제가면 두 번 다시 못 보는데 어떻게 하나?” 이게 지난 시간에 했던 20장 22절 내가 예루살렘에 간다. 매인다. 하니까 “아니고, 가시면 안 되는데요. 조심하세요.” 하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나의 달려갈 길 다 달리고 그 이야기다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잘 들어보세요.
사도가 예루살렘에 가서 고생한다는 것을 뻔히 예견되어 있으니까 그렇게 고생하면 안 되는데요. 하는 우리는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우리는 아직까지 고생 안할 수 있다 이 말이거든요. 사도는 고생할 현실로 들어가는 것이고 정어리 떼에 들어가는 것이고 우리는 그런 고생 안하는 입장에서 아이고, 사도님 몸조심해야 됩니다. 아이고, 저런 고생을 다해야 되다니.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령 안에서는 둘 다 바다에 속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가 예루살렘에 가는 이유가 뭐냐, 너희들도 너희 나름대로 액자틀의 사고방식을 나처럼 지워버리라는 식으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너희들은 내가 가는 게 고생으로 보이나? 내가 보기에는 남아있는 니가 고생이라.” 나는 나의 갈 길을 사명을 다 달리고 마치는데 이 바다 밖으로 나가는데 아직도 바다 안에서 사도는 고생하고 우리는 고생 안 해도 되고 누구는 고생하고 우리는 누구 고생덕분에 편히 살고 자꾸 자기만의 액자, 자기만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는 시선을 가지고 아이고, 누구 고생 많이 하더라. 아이고, 누구 애 많이 먹었더라. 이런 식으로 측은해 하는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여인보고 하는 이야기 있죠. “아이고, 예수님 이렇게 돌아가실 분이 아닌데. 응응” 우니까 나를 위해 질질 짜지 말고 니 신세나 타령하라, 니 딸을 위해서 울어라. 니 딸이 불쌍하다. 너희들은 나를 불쌍히 여기지만 집에 과외 받고 있는 니 딸이 불쌍하다. 그런 관점이 되려면 성령 받아야 됩니다. 성령 받아야 우리 편이라 하는 우리끼리라 하는 정어리 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마을도 주의해야 되고 우리교회도 주의해야 되고 복음 아는 교회 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 교회, 우리끼리, 우리들만 구원이 있다는 그런 사고방식은 갔다가 버려야 돼요. 사도는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다. 현실을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 현실을 사는 게 불안해요. 언제 성령 안에 벗어나면 안 되잖아. 지금은 믿음 좋지만 믿음 떨어져서 살면 그럼 나는 어떻게 하지. 만날 정어리 떼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가 성령을 받지 않을 경우에는 내가 옛날에는 성령 받지 않아서 세상살이 하다가 이제는 성령 받은 모임에 들어간다. 라고 생각하는 요 생각, 이 자체가 성령 받지 않은 틀지어진 액자 같은 의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을 받으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다 같이 바다에 있기 때문에 오징어 떼에 있으나 정어리 떼에 있으나 내가 전에 성령 안 받은 그 때도 이미 우리 주님께서는 이미 나를 알고 계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오징어 떼에 있으나 정어리 떼에 있으나 항상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사고방식의 문제가 뭐냐 하면, 자기 존재를 우선시 하는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나 지금 어디 있지? 예수 안에 있을까? 예수 밖에 있을까? 만날 내가 어디 있지? 묻는 그 자체가 이것은 관심사가 자기 자신에게 계속되고 있으면 그건 힘들어요. 신앙하는 것도 사는 것도 힘들고.
어제 수요설교 들은 적 있으십니까? 이사야가 뭐라고 했습니까?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했지요. 이사야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해놓고 나중에 선지자 노릇하면서 하나님, 저는 어떻게 됩니까? 묻는 입장이 돼요? 안 돼요? 안 돼요. 나는 화로다, 망하게 되었는데 살아도 사는 게 아니고 나는 이미 죽고 망하게 된 존재인데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한 질문을 안 하지요. 그러면 그게 자유 아닙니까? 그게 자유거든요.
간음한 여인에게 이미 너를 용서했다고 했으면 예수님, 저 어떻게 돼요? 묻는 필요가 없는 거예요. 용서했으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했으면 자유 안에서 만끽하면 되지, 왜 자유를 바라봐야 되지 자유 안에 구원받은 나를 왜 자꾸 신경 씁니까? 안 되거든요. 그래서 이런 구분 자체가 이런 사고방식 자체가 성령을 받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예수 안과 예수 밖으로 나눠지는데요.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바다전체와 바다 바깥 사이에 경계선을 뭐로 보느냐 하면, 자기 존재가 바다 안에 있다, 바다 밖에 있다, 이리 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어떤 효과를 어떤 능력을 낳았는가에 관심 두고 있습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할게요. ‘내가 지금 예수 안에 있어? 예수 밖에 있어?’ 이게 생각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는 지금 어떻게 작용해?’ 용서거든요. 용서는 지금 나에게, 그러니까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의 피를 어떻게 이용할까’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를 증거 하기 위해서 나는 지금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고 어떻게 지금 주님 앞에 활용되고 있을까?’ ‘주님, 오늘 또 무슨 일을 통해서 또 예수님의 피만 증거 하게 하십니까?’ 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주체가 내가 아니고 누가 주체인가 하면, 이 바다 같은 현실의 주체는 내가 아니고 예수님이 조성한 현실 속에 나는 거기에 다루어지는 거예요. 그 현실이 현실답게 증거 하라고 우리는 다루어지는 겁니다.
누굴 만났다. 내가 길에서 누굴 만났다면,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저 친구는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저 친구는 혹시 예수 표를 믿을까?’ 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 표를 믿을까? 라는 생각이 들도록 주께서 저 친구를 다시 한 번 나와 부딪치고 만나게 해준 거예요. 명절이 되었는데 먼 친척이 왔다. 전에는 친척이 와 가지고 또 얼마나 묵고 갈라나? 귀찮아 죽겠는데. 이렇게 했는데 ‘저 시어머니는 예수 표를 알까?’ ‘요양병원에 가있는 우리 시어머니는 예수 표를 알까?’ ‘우리 어머니는 복음을 알까?’ 왜 복음을 알까? 예수 표를 알까? 왜 그런 생각이 들까? 성령 안에서 함께 있기 때문에. 주께서 그런 앞잡이로서 주님이 우리를 주의 피의 앞잡이로서 사용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현실 속에 움직이도록 하는 거예요. 헤엄치게 하는 거예요. 성도는 헤엄칠 때마다 예수의 복음을 저 사람은 알까? 알까? 이렇게 헤엄치게 돼있어요.
그런데 성령 안 받은 사람은 나는 지금 위치가 어디 있지? 예수 안에 있을까? 예수 밖에 있을까? 만날 지 구원이 불안해서 만날 지 생각하고 있다 말이지요.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과 성령 안 받은 사람과의 질문자체로 대번 알 수 있어요. 요새 밥이나 먹고 사십니까? 라는 인사, 우리도 물론 그런 인사하는데 그건 개한테 진주를 던질 수 없으니까 잘 있습니까? 할 수 있지만, 정말 속마음은 이리해요.
어떤 학자가 이런 소리했어요. 친구가 반갑다고 이야기하니까 니는 나를 만나서 정말 반가우면 반가워해야지 왜 반갑다는 소리를 하느냐 했어요. 웃기지요. 반갑다는 소리를 함으로 말미암아 안 반가운데 안 반갑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반갑다는 소리를 했다는 거예요. 진짜 반가우면 반갑다는 소리를 말란 말이지요. 이건 뭐냐 하면, 성도는 절대로 성도인 채 하면 안 됩니다. 북한에 가서 “당신이 예수쟁이야?” “아닙니다.”해야 돼요. 그럼 예수의 사진을 밟아라. 마구잡이로 밟아줘야 돼요. 미워! 미워! 왜? 내가 말하는 것과 나의 믿음하고는 출처가, 근거가 달라요. 내가 고백함으로서 내 고백이 근거가 되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께서는 믿지 않는 사람과 만나서 나로 하여금 저들이 아는 신앙적인 증거를 얻어내기 위해서 나에게 말을 시킬 때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줌으로 말미암아 성도답게 살도록 그렇게 조치하신 겁니다. 아이고, 문장이 길어라. 너무 길다. 이해는 되지요?
사도는 말하기를 율법 있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것으로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없는 것으로 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무슨 상관이냐 이 말입니다. 왜 상관없느냐 하면요, 사람 대 사람의 만남에서 대화가 언어가 곧 그 현실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실이라 하는 것은 말과 말의 뭉치에요. 누적된 더미라 하지요. 말과 말의 더미가 현실이에요.
만약에 한 번 상상해 봅시다. 내가 아~ 하고 소리쳤는데 그 소리가 나도 안 들리고 상대방도 안 들린다 할 때 이 세상이 공기가 없어진 것 같겠지요. 우주공간처럼. 야, 내 말 들려! 했는데 그 소리가 나도 안 들리고 상대방도 입만 뻥긋뻥긋하고 안 들릴 때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사람이 혼자 살 때 답답한 것이 자기가 말하는 것을 들어줘서 반응을 나타낼 사람이 없다는 것이 그렇게 외로운 거예요. 그래서 연세 많은 노인네들이 배우자 죽고 난 뒤에 그렇게 우울증 걸리는 이유가 반응이 없으니까 자기는 지금 옛날에 살았던 그 현실하고 전혀 다른 현실에서 어떻게 대처할 줄 모르는 거예요.
몸의 습관은 뭐냐 하면, 주고받고 하는 것이 현실인데 그야말로 진공상태에서 혼자 외쳐봐야 들리는 쪽이 없을 때에 그 다음부터는 말이 줄어들 게 되고 사람이 말을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환장하지요. 개도 짖는 것도 지 환장 들 하기위해서 짖는데. 속에 담아 있는 것은 터져 나온 게 언어 말인데. 말하지 말라하면 그건 환장하는 거죠. 그래서 부부싸움에서 마지막 징벌과 징계가 뭐냐 하면, 말 안하기! 상대에 대해서 말 안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니한테 벌주고 있는 기간이라 하는 것을 인식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답답한 쪽에서 왜 이래~ 해가지고 간지럽게 한다든지. 왜냐 하면 내가 답답해서 내가 미칠까봐 외치고 싶은 거예요. 부부싸움하면 아내는 친구 집에 가잖아요. 잘 통하는 사람한테 가잖아요. 학생들은 지가 아는 이메일을 한다든지. 그렇게 해서 숨통 트는 거예요.
바로 그 현실에 대해서 예수님이 지금 오신 거예요. 인간들이 만든 그 현실 속에. 그 현실 속에 그들은 말합니다. “예수여,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구원받겠습니까?” 또 나불나불 입을 벌려 말을 하네. 그 말 백날 해봐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이런 하나님 맞죠?” 라고 시끄럽게 떠들어봐야 공기만 시끄럽게 파동을 일으키고 그렇게 해서 해답을 얻어 봐야 자기들끼리 만든 자기들만의 현실이에요. 그건 어떻게 하든 애굽이에요. 주님께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다문 경우도 있지만, 그들이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들이 답답해서 발로 차버리잖아요. 우리세계에서는 꺼져! 해서 발로 차버렸지요. 못 자국 표적남기면서 추방된 겁니다.
추방될 때 마지막 남긴 것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 28절에 ‘자기 피로 사신 교회’ 그러니까 주께서 헛수고한 것이 아니고 그 말 안 통하는 세계에서 빠져나오면서 그냥 빠져나온 것이 아니고 그 흘린 피로 말미암아 피로 그 중에 어떤 부분을 어떤 일정한 사람들을 교회로 만들어서 데려나와 버린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예수의 피를 이야기하고 모든 이야기할 때 피로 소통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둘 다 그리스도인, 둘 다 복음을 아는 성령 받은 부부라면, “밥 먹었어?” 하면 다른 현실과 똑같은 말이지만 중간에 생략되어 있지요. “예수 피로 구원받는 여보, 밥 먹었어?” 반드시 밑에 깔리는 거예요. 그러면 남편이 “밥 먹었다 하는 태도가 왜 그래? 한 번 줘 패까?” 하면 그 밑에 깔린 게 “피로 구원받은 여인이여, 때려줘?” 이게 부부싸움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그러면 아내가 “때려줘” 남들 보기에는 완전 사랑싸움이지 부부싸움이겠어요? “때러줄까? 예수 피 믿는 남편이여.” 톡! 아야! 이거 뭐 연극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성령 받은 부부가 좋은 거예요. 어떤 소리해도 관계없어요. “예수 피 묻은 아내여, 나 바람피웠어.” 그럼 “꺼져버려, 이 양반아.”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이혼해도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사실, 이혼해도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거예요. 이 현실을 설명하려고 제가 어렵게 설명한 거예요.
현실은 새로운 언어가 동원됩니다.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새로운 복음적 언어가 됩니다. 그래서 24절에 보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복음을 증거 한다는 게 아니고 “너희들이 내 말 알아듣지? 그렇지?” 그런 뜻이에요. 못 알아듣는 사람 같으면 “사도님, 복음 전해서 한 달에 얼마 받았습니까?” 이리 나올 거예요. 그런데 알아 듣는 사람은 둘 다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는 뭐만 유효하게 돌아갑니까? 복음만 유효한 언어로서. 왜, 그 복음만 현실이니까. 저 쪽은 인간끼리의 현실이라면 이쪽은 예수의 피에서 나온 복음이 현실이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떠남으로서 비로소 우리와 함께 있는 거예요. 우리를 떠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이 땅에 잠시 동안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때문에 그래요. 떠나도 되는데 주께서 함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우리가 다른 현실과 겹쳐서 있는 거예요. 포개져서 있는 거예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본다면, 성경만 우리가 덮어버리면 우리는 모든 언어는 세상에서 다 통용되는 시장에서 아낙네들 이야기들 언어와 다 똑같아요. 같은 현실의 지평선, 같은 창고에 있는데 같은 정어리 떼지요. 바다는 모르고 너는 니편, 나는 내편, 민주당, 새누리당 각자 있는데 성령이 와버리면 예수님의 피가 와버리면 이 세상의 현실에 헤어져도 항상 그리스도 피 안에서는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함께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들은 우리와 함께 있는 게 아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속한 미국에 어떤 사람도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몸은 떨어져있으나 영은 어떻다? 영으로 함께 있다. 이것이 내 영혼이 함께 있다는 뜻이 아니고 주님 안에서 희한한 현실 안에 같이 포함됐기 때문에 내가 내 쪽에서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 이제 안 믿어! 나 성령 떠날 거야. 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런 입장은 세상도 마찬가지에요. 나 대전 안 살고 서울에서 살래. 해도 대전 살던 그 세상버릇은 서울 가도 마찬가지거든요. 북한가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지리적으로 이사를 갔다 뿐이지 애굽이란 현실 속에서 한 발자국도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복음이 없는 교회에 놀러갈 수 있어요. 그들과 사이좋게 잘 지낼 수 있어요. 하지만 복음 이야기 나오게 되면 각각 다른 현실, 다른 층에 속했다는 겁니다. 만날 수 없는 다른 층에 속하고 그 층과 층 사이에서 니가 뭔데 우리와 달라! 라고 했을 때는 그 달랐을 때 하나님의 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차이점을 제시하지요. 내가 똑똑하고 못 났다가 아니라 피로 인하여 우리는 피 안에 있고 십자가 안에 있고 저들은 십자가 밖에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29절 봅시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여기서 이리가 나오는데요. 이리라는 것이 아무리 양의 탈을 써도 복음 아는 사람한테는 이리로 발각되는 거예요. 말을 교묘히 했다, 안 했다가 문제가 아니고 결국은 하나님이 피를 흘렸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그냥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이것뿐이에요.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이것뿐이라니까요. 예수의 피 이야기할 때 니만 아나? 나도 안다! 이렇게 나온다면 이것은 피를 모르는 사람이라니까요. 또 피 앞에서 누가 더 하늘나라에서 높습니까? 라는 소리와 똑같은 소리거든요. 피 앞에서.
우리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 누가 높은 자리에 앉겠습니까? 이건 십자가 이전에 제자들이 한 행세입니다. 십자가 이전에. 십자가 이후에는 그런 게 있을 수가 없지요. 까마득한 후배 사도바울이 대선배 베드로보고 꾸짖잖아요. 형님, 그거 복음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면박주고 하잖아요.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오직 그리스도 피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흉악한 이리는 뭐냐, 비로소 이런 복음적인 안목이 있을 때 이리가 들어왔다. 이리가 어떤 존재인가 눈치를 채게 되지요. 이리가 노리는 점은 뭐냐 하면, 바로 제자를 끌어들이는 겁니다. 우리가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소홀히 하는 대목이 있어요. 요한복음10장10절에 보면,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아주 목사들이 좋아하는 거예요. 신천지 들어올 때 이 이야기하고, 통일교나 여호와증인들도 이거 많이 하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니는 삯군 아니냐, 할 때 삯군이다, 삯군 아니다, 할 때 교회는 뭘 제시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죽음을 제시하는 게 아닙니다. 뭘 제시하느냐, 웨스트민스터라든지 정통 개혁주의라든지 그런 걸 제시하고 천주교에서는 뭘 제시하느냐 하면, 교황무오를 주장합니다. 교황무오를 다른 말로 하면, 교회는 오류가 없다. 왜 오류가 없느냐,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되시기 때문에 교회를 오류 없게 만들어서 오류 없는 교회를 통해서 천국 가도록 조치했기 때문에 그렇다. 라고 천주교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개신교회에서는 우리는 개혁주의의 정통주의를 따랐기 때문에 모든 오류 있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 추려내고, 추려내고 진짜로 진짜배기만 진리만 지금 우리가 그대로 인수했기 때문에 받았기 때문에 우리 교회에 오시면 안심 푹 놔도 됩니다. 라고 하지요. 고거 이리입니다.
진짜 이리가 아닌 사람은 피 앞에서 내가 나를 정당화할 수 있는 모든 접시를 다 깨는 겁니다. 나는 정통신학을 했기 때문에 그걸 깨고 나는 박사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어느 단체에 소속됐기 때문에, 십자가마을 소속이기 때문에 다 깨는 겁니다. 이걸 자기 부인이라 하지요. 자기를 제거하는 게 아니고 자기를 제거하는 건 불교고 자기 부인, 죄 있는 자기를 더욱 더 도드라지게 나타나야 돼요.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말씀으로 우리에게 억압을 주는 것은 아무리 우리가 내용으로 죄를 끄집어내도 아무리 내용을 퍼내고, 퍼내고 퍼내도 그 죄라는 형식은 우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상당히 말이 어렵지요. 방에서 물이 나와서 퍼냈는데 퍼내도 자꾸 물이 올라왔다. 그건 다른 곳에서 물이 더 들어온다는 말이 아닙니까? 내가 이제는 용서받았어. 나는 이제는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라 해도 인간이 평생 살아올 동안에 죄책감은 계속 발생되는 이유가 있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내용상 죄라고 하는 죄는 전부 다 끄집어내도 주님 앞에, 율법 앞의 죄란 그 형식은 죽을 때까지 계속 가져가야 돼요. 지옥 갈 때까지도 그 형식은. 왜? 십자가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용서받았으면 우리는 형식도 의인이기 때문에 의인에 합당한 내용만 채워지는 것이 아니고 죄란 형식 속에 예수님의 피가, 관계가 의로 등장하는 겁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죄인 중에 괴수가 돼 있어야 되는 겁니다. 이것도 모르고 이 근호 목사는 만날 죄밖에 모르느냐, 우리가 막산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도덕을 의미하는 거예요. 여기서 여기까지 땅 파라. 정해줘 버리면 우리는 땅 파면 뭐가 생깁니까? 나는 지시대로 따랐다는 어떤 자부심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막살라고 해버리면 어느 정도 막살아야 막 사는 걸 졸업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평생 동안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더 고귀한 율법이 되는 거예요. 막 사는 것이. 개판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따지고 보면, 최고의 정점에 있는 강압적인 율법적 모습이에요. 율법적인 지시가 되는 겁니다. 니가 막 살아봐라. 니가 막 사는데서 벗어날 수 있는지 막 살아보면서 이야기해봐라. 아무리 막 살아봐도 인간은 지가 원만큼 막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용상 아무리 반성하고 또는 나 이정도 죄를 아니까 더 이상 남아있는 죄는 없을 거야. 아닙니다. 돌아서면 또 거기서 물이 올라와요. 죄라는 것이 또 올라와요. 야! 이것도 죄였군. 이것도 죄였군. 십자가가 바로 그겁니다. 십자가가 늘 용서한다. 너는 의인이라는 그 말씀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죄인일 수밖에 없어요. 그 앞에서 할 말을 잊습니다. 할 말을 잊어요.
바로 이리라는 것은 이처럼 강도라 하는 것은 도적이라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미 한물간 과거사로 제거해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거해 버리면 남는 게 뭘까요? 누가, 누가 잘났나? 그것만 남아요. 누가, 누가 멋있게 살아가는가? 그것만 남기지요. 그게 바로 이리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이리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실한 방치 또는 성실한 분류작업 때문입니다. 성실한 방치라 하는 것은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내어버려두는데 하나님께서 아주 성의 있게 내어버려두십니다. 성의를 다하여. 니는 천국 오면 안 되거든. 저쪽으로 가서 놀아라~ 아주 성의 있게 저쪽으로 몰아붙이십니다. 늘 관심 두고 행여나 넘어올까 싶어서. 관심 두고 몰아 붙여요. 여기 어림도 하지 말라 했지? 가! 가란 말이야. 여기 개 나온다고 울타리 쳐놓은 거 보세요. 얼마나 성실한 울타리입니까? 개 넘어오지 말라고.
지금도 주께서 십자가 피로 이야기하는 것은 가짜들은 결국은 어디에 넘어지느냐 하면, 십자가 피에 대해서 나중에는 질겁하고 십자가 피 없는 곳으로 도피해 버려요. 은근히 십자가 피 없는 곳으로 가버려요. 그래서 그들은 가면서 합니다. “십자가 피 그것은 알겠는데 그 다음이 뭐냐 말이야? 그 다음? 그 다음을 이야기해달란 말이야.” 수십년동안 저보고 욕하면서 비판은 그거 하나였어요. “그래, 십자가 피는 우리도 아는데 그 다음을 해야지. 왜 자꾸 십자가만 이야기하고 부활은 왜 안 넘어가는데?” “부활로 좀 넘어가자. 부활로. 성령의 열매로 좀 넘어가자.” 이리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고린도전저2장2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너희에게 예수님의 죽으심 이외에는 알지 않기로 원하노라, 했는데 왜 그런 말을 했겠어요? 그건 왜냐 하면, 성령 안 받은 티를 마구 내는 거예요.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식으로 확보해버리니까 자기는 우수한 존재가 되었어요. 십자가까지 아는 사람이 돼버렸으니까. 이제는 관심사가 뭐냐,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가, 어디까지 점보하고 어디까지 진도 나갈 수 있는가, 어디까지 더욱 더 아는 범위를 넓힐 수 있느냐, 잔뜩 거기에 신경 쓰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 뗐으니까 그 다음에는 부활 떼시고 가실게요. 부활까지 떼시는 거예요.
부활은 죽음에서의 삶이 아니고요, 죽음 자체가 되살아나는 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닌데. 죽음을 벗어나서 죽음을 취소시키는 게 부활이 아니라 죽음 자체를 되살아나느냐, 그러니까 중간에 사진 찍고 난 뒤에 집에 가는 것이 아니고 사진 찍은 걸 들고 가는 겁니다. 십자가 죽었다는 것을 품에 안고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인공은 십자가 죽으심, 다 이루었다가 그게 모체가 되고 핵심이 되고 그것을 받들어 모시는 것은 그걸 받들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던 거예요. 부활되고 난 뒤에도 주는 뭐가 되느냐 하면, 십자가가 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 보면, 오직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지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되지 않습니다. 오직 십자가로 구원되지 부활로 구원되지 않아요. 그냥 죽었다는 사실을 뜯어내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해운대 모래사장에 갔잖아요. 뛰다보니까 자기 발자국이 있잖아요. 이걸 떠서 가지고 다니는 게 이게 부활이에요. 십자가 죽은 것은 갈릴리라는 장소지만 이걸 부활로 떠버리면 이제는 성령이 가는 곳엔 다 이 십자가가 드러나기 때문에 주께서 십자가로 떠남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이나 그 장소, 그 시간에 억매이지 않고.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모든 시대의 십자가. 이제는 앞으로 과거 창세기까지 십자가에요. 창세기를 해석하면 십자가를 집어넣는 해석을 해야 돼요. 그걸 요번 겨울 대전수련회에서 합니다. 혹시 시간 나시면, 가까우니까.
자, 그 다음에 봅시다. 33-35절에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나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 요 대목에서요,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했는데 예수님이 친히 그런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여기 유사한 것이 있나 한 번 찾아봅시다. 유사한 것이 뭐냐 하면 마태복음 10장9절에 보면, 요 취지와 비슷한 취지가 뭐냐 하면 너희 전대나 금이나 동을 가지지 말라. 아까 사도바울은 뭐라 합니까? 너희들의 금이나 금을 의복을 탐내지 아니했다. 마태복음 10장에서는 12제자에게 전도하면서 너희는 은이나 금이나 동을 가지지 말고 8절에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라고 이런 취지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그러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그 말씀은 없어요.
그런데 여기 보면 ‘거저 주었으니 거저 주어라.’ 그러면 제자들의 하는 일은 하나의 뭔가 위에서부터 와서 그냥 쭉 빠져나가는 흘러가는 하나의 수도관 같은 역할 또는 우편배달부 같은 역할, 우편배달부가 가방에 가득 물건이 있다고 소포가 다 자기 게 아니잖아요. 이것은 나눠줘야 될 거잖아요. 그 나눠지는 우편배달부 같은 위치가 뭐냐 하면, 바로 사도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열왕기하5장에 보면 나오지요.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걸렸을 때에 엘리사를 찾아왔거든요. 엘리사 입장은 뭐냐 하면, 문둥병은 엘리사가 낫게 하는 게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낫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굳이 엘리사를 만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요단강에 7번 물 담고 낫거든 그냥 가세요. 라고 했을 뿐이죠. 그런데 게하시가 어떻게 했습니까? 잠시만요, 수금하고 가실게요. 우리 주인님이 수고비 가지고 온 거 일부러 가지고 갈 필요 없고 달랍니다. 했을 때 지금 게하시가 뭐가 잘못된 거예요? 게하시가 우리 선생님이 낫게 했다는 사고방식이 문제란 말이죠. 아까 인간적인 현실에서는 그래요. 그러나 새로운 현실에서는 뭐냐, 하나의 통로역할밖에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에서 제일 하이라이트가 뭐냐 하면, 문둥병이 어디로 갔느냐 하는 것이 제일 멋진 반전이에요. 뭐냐 하면, 나아만 장군에게 있던 문둥병이 나으니까 우리는 문둥병 자체가 날아갔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문둥병이 어디 갔습니까? 잠시만요, 하는 그 인간에게 문둥병이 있었지요.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문둥병은 누가 가지고 갔는가, 문둥병은 바로 예수님이 가져가신 겁니다.
십자가 의의가 그겁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찍어 바르는 어떤 크림정도 생각하시면 안 되고 우리가 십자가로 용서받는 것은 우리 죄를 누가 가지고 갔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 가지고 가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틀에서 저주가 축복으로 달라져서 주어진 거예요. 바로 그것을 아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내가 이만큼 수고했기 때문에 이만큼 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지요. 그것은 이쪽현실에서 하는 짓이고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그냥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망해도 쌉니다. 그런 입장에서 내가 당신을 구원했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지요. 목사나 전도 많이 하는 권사나 교회 집사, 전도 왕 이런 사람들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전도왕은 누가 받아야 하는가, 예수님이 전도 왕이지 다른 사람은 전도 왕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리 생각하면 돼요. 우리가 지금 오늘 하루 살았잖아요. 사는 것도 주님 증거 하라고 사는 것이지 살아서 전도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 살아있는 자체가 전도입니다. 주님 덕분에 살았어예! 이런 생각으로 세상에 나가면 십자가 모르는 현실 앞에 전도가 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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