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마저 질식시키는 철학배설물들의 잔치
성령마저 질식시키는 철학 배설물들의 잔치!― 1997년도 총신대학교 언어연구소 추계 학술특강을 듣고서 ― 이 근 호 목사 복음의 세계에 전혀 발 들여 본 적이 없는 자들은, 늘 북적거리는 종교 시장 주변에서 혹은 중앙을 점거하여 자신의 명성과 지위와 출세를 수위를 탐색하며 어설픈 종교인 행세를 하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론하고 부활을 복음의 핵심으로 꼭꼭 인정한다고 공공연하게 발언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실은 이들의 관심사는 딴 데 있다. 돈 되는 종교시장에서 자기의 터전을 든든하게 닦기 위해 애들 노리개 감도 안 되는 값 싼 지식과 배도적인 성향의 학식을 여기 저기 팔려 다니기 바쁘다. 예수와 함께 조용히 죽기도 무엇보다도 싫어하고 오히려 기독교 세계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적 권위와 존경을 받아내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계속해서 자기 존재의 힘으로, 사회적 힘으로 작용하기를 원한다. 남들 앞에서, 특히 보수주의 계열 안에서 복음에 기준해서 아무런 이상 징후가 없는 자로 처신하면서 실제로는 복음의 적대자로 최첨단에 나서는 자들이다. 싸구려 개혁주의자들로 위장한 이들은 애초부터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사는 모든 삶을 포기한 자들이다. 그저 남들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점잖은 태도와 종교적 경건과 기독교적 냄새피우는 것으로 보수주의 편에서 충분히 자기 심장부를 숨길 수 있다고 계산하고 사는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내뱉는 주장들은 한결같이, 주님과 성령에 대해 인간적으로 대항하겠다는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즉 인격 전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복음 대적자'로 무장한 자들이다. 이들은 어디서 '복음' 소리만 들어도 구역질을 내는 자들이다. 바로 이런 구역질이 도리어 탁월하고 심오한 학문 발표장으로 변질되어 공개된 현장이 바로 '1997도 총신대학교 언어연구소 추계 학술 특강'이라는 행사였다. 그 자리에는 너무나도 순진무구한 신학생들이 이들의 노리개 감으로 앉아 있었다. 이들 신학생들은 이들의 비복음적 전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그저 외국 박사 학위 소지자가 벌리는 화려한 말장난에 스스로 암묵적으로 지배받고 싶어 했다. 혹시나 무조건 옹호하고 추종하므로서 지적 상승을 합세할 수 있으리라는 허영심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런 간사한 자들의 자유함과 도도함과 도발성을 부러워하기까지 하면서 이들에게 격려의 박수까지 아끼지 않았다. 한 질의자가 복음을 가지고 그들 교수에게 용감하게 대들었지만 오히려 이러한 순교자적 충정과 십자가 고통에 같이 동참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교수들과 같이 비웃음과 조롱으로 일관했다. 도대체 오늘날 이 총신에 복음은 도서관 어느 구석에서 잠자고 있단 말인가! 지금 이 순간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신자 각자 각자에게, 총신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떤 행동과 정신 상태를 요구하는지 완전히 외면해 버린채 이들은 오늘날 총신의 마당을 제멋대로 쓸고 다닌다. 참으로, 참으로 성경에 따르고자 하는 자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신자가 신자임을 드러내는 것은 먹든지 마시든지 오직 십자가를 최종적으로 지향한다는데 있다. 왜냐하면 신자란, 이미 십자가 안에 들어 있기에 세상에서 볼 때에 벌써 죽은 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왜 이토록 신자에게 십자가 안의 생활이 필수적일까? 그것은 신자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세례) 상태로 있기에 십자가에 이미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은 항시적이다. 신자가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이제부터 홀로 서기를 제대로 실시하게 되었다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의를 드러내는 종으로 전환되었기에 자신의 죄악과 무지를 십자가 앞에서 늘 자백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제부터 사는 것은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는 날마다 죽이고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모습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정말 이 본문을 믿는 신자라면, 왜 주님께서 나를 꼭 죽이셔야만 하시고 그리스도가 먼저 부활하셔야 하는지에 최종 관심사를 갖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러니깐 예수님이 자신을 위하여 꼭 죽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자신이 그토록 죄인인가를 알게 되는 상황은 불신자 시절에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며 성령이 임하여 비로소 주님의 십자가 의미를 알게 된 신자에게나 일어나는 현상이다. 만약 해석학을 전공한 불신자가 만약 성경을 본다면 무어라고 생각하겠는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게 된다. "그래 이 부족한 죄인이 이제 주님의 십자가 부활을 통해 주어진 성령을 받아서 제대로 된 인격체가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성경 해석학을 구축할 수 있겠다" 라는 포부를 갖는다. 바로 이러한 정신 상태를 가진 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그 당시 유대인들이었다. 하나님의 경전인 율법책을 통해서 지금보다 더 완벽하고 향상된 자아 갱신이 도움을 받고 보다 더 나아가 자아 중생을 시도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러한 본성적 종교적 욕구에 대해 주님은 큰 욕설로서 그들을 저주하셨다. "너희 아비는 마귀다!", "독사의 새끼들아!" 예수님은 왜 이런 욕설을 꼭 구태어 해야만 했을까? 그것은 십자가 죽으심과 성령 오심의 진정성은 그들의 악마적 도발성을 배경으로해서 부각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갈등구조가 예수님 이후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한결같이 벌어지는 사태였다. 결코 사도들이 성경 해석학을 가르치다가 고난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심만을 증거 했을 뿐이다. 바로 이점이 주위의 인간들을 화나게 한 것이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성신을 받아서 다시 육적인 것에 의미와 가치를 두려고 했다. 거듭난 자의 멋진 자아상을 대외적으로 으시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이런 주장을 일축하고 정죄했다. 모든 하나님의 일은, 즉 성령의 역사든,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과 십자가와 교회 모든 형식까지라도 오직 주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으라 에 초점을 맞추어 계시될 뿐이라는 것이다. 교회를 세우는 방법이라든지 심지어 예수를 믿게 하는 방법까지 그들 사도들은 거부했다. 오직 회개를 촉구하면서 다가오시는 주님의 명령이 성령이 사역되어 그 결과로 각처에 교회가 생겨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오직 말씀 자체의 능력일 뿐이며 성령의 능력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 3- 5) 이 본문에 그 어떤 성경 해석학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나올까 봐 사도는 다음과 같은 단서를 붙였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 2) 정말이지 사도가 정말 전하고 싶었던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도에게 있어 다른 학문의 의의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 7- 9)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가지고 배를 채우려는 자들이 있었다. 이 일 때문에 사도는 분통을 터뜨리며 눈물짓는다고 했다. 쉽게 말해서 '재주는 곰이 하고 돈은 중국 사람이 번다'는 속담과 같이 격이다.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8-19) 사도에게 있어 관심사는 오직 십자가밖에 없기에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을 곧 복음을 헛되이 하는 것으로 보았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 9-10)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5-17) 자,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 십자가 역사 안에 있는 자라면, 과연 성경 해석학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예를 들면, 참된 신자가 외국에 나가서 철학과 해석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를 세 개씩이나 받아 왔고 그 방면에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어 왔다고 치자. 그 사람이 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뭐라고 강의할 것인가? 만약 신자가 아니라면 다음과 같은 취지로 시작할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성경책만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이 알아서 이 언어로 된 성경을 잘만 해석하면 우리가 계시를 이해하게 되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철학적 해석학에 기초한 문학적 방식으로 해석하면 방식만 도입하면 모든 성경 해석은 다 가능합니다. 성경 해석의 주체는 어디까지는 우리들이고 우리들의 지혜니깐 성령이니 주님은 여기에다 개입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참된 신자라면 다음과 같은 신앙 고백으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학생 여러분, 불신자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 줄 여러분들은 그 내막을 잘 모르지요. 저는 숱한 학문적 탐구를 통해서 불신자의 사상과 철학을 전공하고 이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질 수밖에 없었는 가를 이런 학문을 통해서 증언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철학이란, 인간 속에 잠재되어 있는 죄악의 모든 총체입니다. 신을 대하면서, 인간을 대하면서 인간들은 끊임없이 십자가 정신과 반대되는 악마의 정신으로 접근하고 소망하고 사랑하고 믿음을 갖습니다. 이런 죄인들의 대표자들이 바로 예수님의 당시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꼭 죽일 수밖에 사상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신앙인이 자청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대한 것은 자신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력 증진과 그 세력의 향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근원적으로 그들 전부를 저주하고 부정해 버렸습니다. 바로 그들은 자신의 죄악을 감추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지금의 인간들은 대표합니다. 십자가를 알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 죄악의 본질을 감추며 살아갔습니다. 학문적 깊이로서 감추었고 선한 양심으로 열심히 사는 자신의 삶의 모습으로 죄를 가리워왔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변명용이었습니다. 신을 향한 신뢰나 충성심이나 봉사나 이웃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은 얼마든지 우리 자신의 양심으로도 가능한 줄로 알았습니다. 주위에 늘 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에 그 말씀대로 살고 믿으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런 원초적 종교성이 바로 악마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성령 안에서 비로소 우리의 이러한 본 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늘 죽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직 자신의 십자가 지셨음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 되기만을 원하고 계십니다. 이것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만 알게 하십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 8-10), 여러분, 배설물(똥)이 왜 꼭 배설되어야만 하는 배설물이겠습니까? 조금이라는 성경 해석이 도움이 되고 쓸모짝이 있었으면 배설물이라고 극단적인 표현까지 했겠습니까? 여러분, 성도와 그리스도는 십자가 안에 함께 들어있기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은 무조건 죽임을 당하고, 정죄당하고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시간관, 철학관, 인생관, 우주관, 과학관, 교회관, 기독교관, 심지어 믿음, 소망, 사랑까지도 말입니다. 모두가 배설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사라지고 나면 십자가 안에서는 주님의 십자가를 지향하는 믿음, 십자가를 지향하는 소망, 사랑, 우주관, 인생관, 철학관, 학문관, 십자가만을 지향하는 성경해석관 등 모든 것을 새로이 선물로 공급받게 됩니다. 제가 외국에 나가 그 어려운 학문을 하고 온 것은 바로 그런 학문들이 십자가 앞에 배설물에 불과함을 여러분 앞에 바로 증거 하기 위함이요 그래서 참된 형제만을 찾아 나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철학에서 시작된 해석학이란, 일단 성령님과 주님을 빼놓고 작업을 시작하자는 주의입니다. 인간들인 우리끼리만 성경책 주위에 돋보기 들고 둘러 모여 서로의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어 해석 보자는 식입니다. 그러니 살아 계신 주님과 성령님의 활동을 무시해도 완전히 무시하는 행태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주님은 그런 자들은 때마다 심판하지 않으시고 성도 앞에서 강렬하게 활동 전개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참 의미를 그 상황에서 성도에게 체험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복음을 외롭게 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성령 받은 자만이 아는 진리는 바로, 십자가 앞에서 모든 것은 배설물이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 인간의 교만성은 자칭 거듭난 성령의 사람 안에서도 피어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이 거듭났다는 이유만으로 교만성을 도리어 긍정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복음가 있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 차라리 그 사람보다 날마다 죽어라고 권고해 주는 것이 참된 사랑의 태도라고 여겨집니다. (상대방을 도리어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고 여기겠지만)" 과연 예수님이 해석해서 성령을 통해서 알게 하시는 십자가 진리 이외에 과연 다른 해석이 가능할까? 또한 다른 결론이 구원에 의의가 있을까? 정말 참 신자로서 신학교 강단을 지킬 수 있는 자라면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하지만 예수도 죽이고 성령마저 질식시켜 놓고 자기들끼리 언어유희로 희희덕 거리면서, 애처로울 정도로 순진하기 짝이 없는 신학생들의 영혼에다 더러운 지식으로 여유만만하게 페인트칠하고 있는 자들에게 과연 총신이 아직도 그들의 놀이터의 제물이 되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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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2-03 19:07
성령마저 질식시키는 철학 배설물들의 잔치! ― 1997년도 총신대학교 언어연구소 추계 학술특강을 듣고서 ― 이 근 호 목사 복음의 세계에 전혀 발 들여 본 적이 없는 자들은, 늘 북적거리는 종교 시장 주변에서 혹은 중앙을 점거하여 자신의 명성과 지위와 출세를 수위를 탐색하며 어설픈 종교인 행세를 하게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론하고 부활을 복음의 핵심으로 꼭꼭 인정한다고 공공연하게 발언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실은 이들의 관심사는 딴 데 있다. 돈 되는 종교시장에서 자기의 터전을 든든하게 닦기 위해 애들 노리개 감도 안 되는 값 싼 지식과 배도적인 성향의 학식을 여기 저기 팔려 다니기 바쁘다. 예수와 함께 조용히 죽기도 무엇보다도 싫어하고 오히려 기독교 세계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적 권위와 존경을 받아내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이 계속해서 자기 존재의 힘으로, 사회적 힘으로 작용하기를 원한다. 남들 앞에서, 특히 보수주의 계열 안에서 복음에 기준해서 아무런 이상 징후가 없는 자로 처신하면서 실제로는 복음의 적대자로 최첨단에 나서는 자들이다. 싸구려 개혁주의자들로 위장한 이들은 애초부터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사는 모든 삶을 포기한 자들이다. 그저 남들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점잖은 태도와 종교적 경건과 기독교적 냄새피우는 것으로 보수주의 편에서 충분히 자기 심장부를 숨길 수 있다고 계산하고 사는 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내뱉는 주장들은 한결같이, 주님과 성령에 대해 인간적으로 대항하겠다는 정신으로 가득 차 있다. 즉 인격 전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복음 대적자'로 무장한 자들이다. 이들은 어디서 '복음' 소리만 들어도 구역질을 내는 자들이다. 바로 이런 구역질이 도리어 탁월하고 심오한 학문 발표장으로 변질되어 공개된 현장이 바로 '1997도 총신대학교 언어연구소 추계 학술 특강'이라는 행사였다. 그 자리에는 너무나도 순진무구한 신학생들이 이들의 노리개 감으로 앉아 있었다. 이들 신학생들은 이들의 비복음적 전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그저 외국 박사 학위 소지자가 벌리는 화려한 말장난에 스스로 암묵적으로 지배받고 싶어 했다. 혹시나 무조건 옹호하고 추종하므로서 지적 상승을 합세할 수 있으리라는 허영심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런 간사한 자들의 자유함과 도도함과 도발성을 부러워하기까지 하면서 이들에게 격려의 박수까지 아끼지 않았다. 한 질의자가 복음을 가지고 그들 교수에게 용감하게 대들었지만 오히려 이러한 순교자적 충정과 십자가 고통에 같이 동참하지는 못하고 도리어 교수들과 같이 비웃음과 조롱으로 일관했다. 도대체 오늘날 이 총신에 복음은 도서관 어느 구석에서 잠자고 있단 말인가! 지금 이 순간 하늘에 계신 주님께서 신자 각자 각자에게, 총신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떤 행동과 정신 상태를 요구하는지 완전히 외면해 버린채 이들은 오늘날 총신의 마당을 제멋대로 쓸고 다닌다. 참으로, 참으로 성경에 따르고자 하는 자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신자가 신자임을 드러내는 것은 먹든지 마시든지 오직 십자가를 최종적으로 지향한다는데 있다. 왜냐하면 신자란, 이미 십자가 안에 들어 있기에 세상에서 볼 때에 벌써 죽은 자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왜 이토록 신자에게 십자가 안의 생활이 필수적일까? 그것은 신자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세례) 상태로 있기에 십자가에 이미 죽은 자로 살아가는 것은 항시적이다. 신자가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이제부터 홀로 서기를 제대로 실시하게 되었다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의를 드러내는 종으로 전환되었기에 자신의 죄악과 무지를 십자가 앞에서 늘 자백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제부터 사는 것은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는 날마다 죽이고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모습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정말 이 본문을 믿는 신자라면, 왜 주님께서 나를 꼭 죽이셔야만 하시고 그리스도가 먼저 부활하셔야 하는지에 최종 관심사를 갖게 될 것이 뻔하다. 그러니깐 예수님이 자신을 위하여 꼭 죽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자신이 그토록 죄인인가를 알게 되는 상황은 불신자 시절에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며 성령이 임하여 비로소 주님의 십자가 의미를 알게 된 신자에게나 일어나는 현상이다. 만약 해석학을 전공한 불신자가 만약 성경을 본다면 무어라고 생각하겠는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게 된다. "그래 이 부족한 죄인이 이제 주님의 십자가 부활을 통해 주어진 성령을 받아서 제대로 된 인격체가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성경 해석학을 구축할 수 있겠다" 라는 포부를 갖는다. 바로 이러한 정신 상태를 가진 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그 당시 유대인들이었다. 하나님의 경전인 율법책을 통해서 지금보다 더 완벽하고 향상된 자아 갱신이 도움을 받고 보다 더 나아가 자아 중생을 시도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러한 본성적 종교적 욕구에 대해 주님은 큰 욕설로서 그들을 저주하셨다. "너희 아비는 마귀다!", "독사의 새끼들아!" 예수님은 왜 이런 욕설을 꼭 구태어 해야만 했을까? 그것은 십자가 죽으심과 성령 오심의 진정성은 그들의 악마적 도발성을 배경으로해서 부각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갈등구조가 예수님 이후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한결같이 벌어지는 사태였다. 결코 사도들이 성경 해석학을 가르치다가 고난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심만을 증거 했을 뿐이다. 바로 이점이 주위의 인간들을 화나게 한 것이다. 그들은 주장하기를 성신을 받아서 다시 육적인 것에 의미와 가치를 두려고 했다. 거듭난 자의 멋진 자아상을 대외적으로 으시대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이런 주장을 일축하고 정죄했다. 모든 하나님의 일은, 즉 성령의 역사든,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과 십자가와 교회 모든 형식까지라도 오직 주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으라 에 초점을 맞추어 계시될 뿐이라는 것이다. 교회를 세우는 방법이라든지 심지어 예수를 믿게 하는 방법까지 그들 사도들은 거부했다. 오직 회개를 촉구하면서 다가오시는 주님의 명령이 성령이 사역되어 그 결과로 각처에 교회가 생겨났을 뿐이라는 것이다. 오직 말씀 자체의 능력일 뿐이며 성령의 능력뿐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 3- 5) 이 본문에 그 어떤 성경 해석학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식으로 나올까 봐 사도는 다음과 같은 단서를 붙였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 2) 정말이지 사도가 정말 전하고 싶었던 구원의 능력은 십자가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도에게 있어 다른 학문의 의의는 과연 무엇이었던가?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 3: 7- 9)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를 가지고 배를 채우려는 자들이 있었다. 이 일 때문에 사도는 분통을 터뜨리며 눈물짓는다고 했다. 쉽게 말해서 '재주는 곰이 하고 돈은 중국 사람이 번다'는 속담과 같이 격이다.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8-19) 사도에게 있어 관심사는 오직 십자가밖에 없기에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을 곧 복음을 헛되이 하는 것으로 보았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갈 4: 9-10)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골 2:15-17) 자,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 십자가 역사 안에 있는 자라면, 과연 성경 해석학에 대해서 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예를 들면, 참된 신자가 외국에 나가서 철학과 해석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박사 학위를 세 개씩이나 받아 왔고 그 방면에 세계적인 권위자가 되어 왔다고 치자. 그 사람이 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뭐라고 강의할 것인가? 만약 신자가 아니라면 다음과 같은 취지로 시작할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성경책만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들이 알아서 이 언어로 된 성경을 잘만 해석하면 우리가 계시를 이해하게 되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철학적 해석학에 기초한 문학적 방식으로 해석하면 방식만 도입하면 모든 성경 해석은 다 가능합니다. 성경 해석의 주체는 어디까지는 우리들이고 우리들의 지혜니깐 성령이니 주님은 여기에다 개입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참된 신자라면 다음과 같은 신앙 고백으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학생 여러분, 불신자의 세계가 어떤 세계인 줄 여러분들은 그 내막을 잘 모르지요. 저는 숱한 학문적 탐구를 통해서 불신자의 사상과 철학을 전공하고 이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가 질 수밖에 없었는 가를 이런 학문을 통해서 증언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철학이란, 인간 속에 잠재되어 있는 죄악의 모든 총체입니다. 신을 대하면서, 인간을 대하면서 인간들은 끊임없이 십자가 정신과 반대되는 악마의 정신으로 접근하고 소망하고 사랑하고 믿음을 갖습니다. 이런 죄인들의 대표자들이 바로 예수님의 당시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꼭 죽일 수밖에 사상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신앙인이 자청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대한 것은 자신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력 증진과 그 세력의 향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근원적으로 그들 전부를 저주하고 부정해 버렸습니다. 바로 그들은 자신의 죄악을 감추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지금의 인간들은 대표합니다. 십자가를 알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 죄악의 본질을 감추며 살아갔습니다. 학문적 깊이로서 감추었고 선한 양심으로 열심히 사는 자신의 삶의 모습으로 죄를 가리워왔습니다. 물론 그것들은 변명용이었습니다. 신을 향한 신뢰나 충성심이나 봉사나 이웃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은 얼마든지 우리 자신의 양심으로도 가능한 줄로 알았습니다. 주위에 늘 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에 그 말씀대로 살고 믿으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바로 이런 원초적 종교성이 바로 악마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지금 성령 안에서 비로소 우리의 이러한 본 모습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늘 죽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직 자신의 십자가 지셨음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 되기만을 원하고 계십니다. 이것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사실을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만 알게 하십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 2: 8-10), 여러분, 배설물(똥)이 왜 꼭 배설되어야만 하는 배설물이겠습니까? 조금이라는 성경 해석이 도움이 되고 쓸모짝이 있었으면 배설물이라고 극단적인 표현까지 했겠습니까? 여러분, 성도와 그리스도는 십자가 안에 함께 들어있기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은 무조건 죽임을 당하고, 정죄당하고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시간관, 철학관, 인생관, 우주관, 과학관, 교회관, 기독교관, 심지어 믿음, 소망, 사랑까지도 말입니다. 모두가 배설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사라지고 나면 십자가 안에서는 주님의 십자가를 지향하는 믿음, 십자가를 지향하는 소망, 사랑, 우주관, 인생관, 철학관, 학문관, 십자가만을 지향하는 성경해석관 등 모든 것을 새로이 선물로 공급받게 됩니다. 제가 외국에 나가 그 어려운 학문을 하고 온 것은 바로 그런 학문들이 십자가 앞에 배설물에 불과함을 여러분 앞에 바로 증거 하기 위함이요 그래서 참된 형제만을 찾아 나서기 위함이었습니다. 여러분, 철학에서 시작된 해석학이란, 일단 성령님과 주님을 빼놓고 작업을 시작하자는 주의입니다. 인간들인 우리끼리만 성경책 주위에 돋보기 들고 둘러 모여 서로의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어 해석 보자는 식입니다. 그러니 살아 계신 주님과 성령님의 활동을 무시해도 완전히 무시하는 행태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주님은 그런 자들은 때마다 심판하지 않으시고 성도 앞에서 강렬하게 활동 전개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참 의미를 그 상황에서 성도에게 체험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복음을 외롭게 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성령 받은 자만이 아는 진리는 바로, 십자가 앞에서 모든 것은 배설물이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아, 인간의 교만성은 자칭 거듭난 성령의 사람 안에서도 피어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이 거듭났다는 이유만으로 교만성을 도리어 긍정해 줄 수 있는 그 어떤 복음가 있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 차라리 그 사람보다 날마다 죽어라고 권고해 주는 것이 참된 사랑의 태도라고 여겨집니다. (상대방을 도리어 자신을 미워하고 있다고 여기겠지만)" 과연 예수님이 해석해서 성령을 통해서 알게 하시는 십자가 진리 이외에 과연 다른 해석이 가능할까? 또한 다른 결론이 구원에 의의가 있을까? 정말 참 신자로서 신학교 강단을 지킬 수 있는 자라면 다음과 같은 주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하지만 예수도 죽이고 성령마저 질식시켜 놓고 자기들끼리 언어유희로 희희덕 거리면서, 애처로울 정도로 순진하기 짝이 없는 신학생들의 영혼에다 더러운 지식으로 여유만만하게 페인트칠하고 있는 자들에게 과연 총신이 아직도 그들의 놀이터의 제물이 되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