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70이레 논문(계시 공백)131107-29강b -이 근호 목사
가락-70이레 논문(계시 공백)131107-29강b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70이레 논문(계시 공백)131107-29강b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242 페이지에서 인자에 대해서 거기 나옵니다. 성경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인자라고 하는데 인자에 대해서 알 때는 242 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뭐라고 돼 있죠? 『그렇게 해서 계시 공백₍구멍₎을 메우려 한다.』계시 공백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 인자가 나와요. 인자란 분은 어디 나타나느냐? 공백, 블랙홀에서 구멍 속에서 나와요. 구멍 속에서 나오려면 인자가 먼저 자신의 자리가 구멍에서 나온다면 그 자리가 먼저 우리를 통해서 구멍을 뚫어야 되겠죠. 우리를 구멍을 뚫는 거예요.
우리가 의인이고 싶어 해요. 왜냐 하면 의가 있어야 복이 오니까 착한 짓했을 때는 복이 오고 나쁜 짓하면 벌 받잖아요. 그래서 복을 계속 부여받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착한 것을 편집해서 ‘요거 착합니다.’ 요거 기억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건 인자가 안 와요. 인자는 계시 공백을 통해서 오거든요. 그러면 뭘 받아야 하느냐 하면 우리보고 인자가 임하려면 인자 임할 장소를 구멍을 파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제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나이다.’ 하잖아요. 주님은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합니까? 구멍을 뚫죠. 그 십계명 지켰다는 그 화려한 과거, 멋들어진 과거, 그걸 구멍을 뚫습니다.
그 뚫는 방법은 사람마다 달라요. 부자 청년은 부자기 때문에 구멍을 어떻게 뚫느냐 하면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아무것도 없이 되고서 나를 따라 오너라.’ 우리 같이 돈도 없는 인간은 그런 소리 안 합니다. 만약에 공부를 잘한다면 ‘너는 꼴찌가 돼서 오너라. 반에서 제일 꼴찌가 돼서 오너라.’ 이렇게 하겠죠. 만약에 몸이 건강하다면 ‘당뇨 걸려서 오너라.’
왜냐 하면 사람이 ‘선한 선생이여’ 할 때 사람은 이렇게 돼요. 선하다는 것을 출발을 어디서 출발하느냐 하면 나의 선함에서 출발합니다. 나의 선함이, 선함이, 선함이, 선함이 있는데 자기가 생각해도 완전하게 선하지를 않죠. 인간은, 자기가 알잖아요. 지금도 강원도의 할머니가 눈과 심장 달라 하면 우리가 떼어 줍니까? 그 정도 선하지는 않죠. 그러나 내 자식이 아프다 하면 얼른 떼어주죠. 왜, 내 자식이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선하다고 하지만 항상 나와 가까운 사람한테는 선하고 남들한테는 그렇게 냉정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하지만 완전하지는 않죠. 완전하지 않을 때는 아까 첫째 시간에 빈 공터가 있다고 했죠. 요거는 앞으로 내가 더 선해져야 될 그러한 미진하게 남아있는 거예요. 그것마저 채우면 내가 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선한 선생님이여’ 하면서 예수님 바라볼 때 신의 이름입니다. 신의 영역과 이 선함을 여기서 연못에 돌 던지면 뭐가 일어납니까? 파장이 일어나죠. 물결 따라 가보세요. 물결 따라 가보면 저 호숫가 맞은편에 딱 도착되죠. 그 물결이 있는 그곳이 뭐냐, 선중에서 최고의 선, 진리의 최고의 진리, 아름다움 중에 최고의 진, 미, 진선미, 모든 궁극적인 모든 최고의 귀한 고귀한 가치, 그것을 인간들은 무슨 세계로 봅니까? 바로 신의 세계로 봅니다. 착함의 극함, 아름다움의 극함, 모든 황홀함의 극함, 이것을 중세 때는 이걸 무한이라고 이야기했고, 이 무한을 칸토르란 수학자는 19세기지만 그전에 수학에서 이게 칸토르는 수학에서 집합론에 나오는데 그 전의 수학자들은 이 하늘에 있는 무한을 지상의 무한으로 내렸어요. 데카르트나 라이프니치가 이렇게 했어요. 거기서 나온 게 둘 다 미분을 만들었습니다.
미분이 뭐하냐 하면 흐르는 운동을 정지시켜서 해석하는 겁니다. 그걸 분석하는 방법 이예요. 자르는 거예요. 이렇게 가잖아요. 이걸 잘라 보세요. 자르면 이렇게 나오겠죠. 더 잘라보면 거의 직선 되죠. 직선 된 것을 그냥 무한대로 자르면 그 값이 나온다 이렇게 생각 하는 겁니다. 이것이 나중에 현대 기계에 들어오면 파동을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어요. 파동(소리)을 수식으로 표현하게 되면 그때부터 우주가 계속 발달하고 하지만, 이 미분이라 하는 것은 원래 우주가 넓은데, 여러분 우주가 넓습니까? 내 안에 있는 세포 안에 있는 그 전자가 무한합니까? 둘 다 무한하겠죠.
그래서 바깥의 신의 세계를 세속에 가져오게 되면 이제는 천문학이 발달합니다. 갈릴레이, 갈릴레오, 천문학, 무한의 세계를 통해서 신이 남긴 작품을 통해서 신에게 접근해 가는 거예요. 이게 무한을 벗어나는 겁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나는 요거 십계명까지 지켰는데 어떻게 더하게 되면 신의 세계, 진짜 선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할 때 예수님이 뭐라 했습니까? ’조금만 더해라. 아유, 착하네. 이만큼 한 사람 별로 없었어.‘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선함이라는 것은 네가 선하다. 신약과 연결해서 결속되고 너의 선함의 확장으로서 신의 세계라 했던 그 잘못된 선함이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네가 부자기 때문에. 네가 돈이 많기 때문에 그렇다. 정말 네가 선하다면 그 모든 것을 팔아버려라. 네가 나한테 선한 선생님이여, 할 때는 너 가진 것 다 팔고 나한테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는가, 한번 보자, 하니까 그 부자 청년이 어떻게 됐습니까? 그거 다 팔고 예수님 따라 갔습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근심했죠. 왜 근심할까요? 그럼 근심 안 할 경우가 어떤 경우입니까? 돈이 있었을 때는 근심 안 했는데 돈이 없어지면 근심하죠. 결국 그 인간은 결국은 선함이 목적이 아니었고 돈을 목적으로 살았던 거예요.
그럼 제가 퀴즈 하나 낼게요. 어떤 사람이 돈도 없고 건강도 잃었는데 착하기만 해요. 착한 짓하는 사람에게 주님께서 어떻게 이야기하겠습니까? 너는 죄인이다. 그리고 난 뒤에 날 따라 오라 하면 그 사람 따라 가겠습니까? 안 따라가겠습니까? 안 따라가죠. 마지막 자아가 그나마도 자존심이라고 걸치고 있는 게 돈도 없고 건강도 잃었지만 남한테 해코지 안한 자아, 선함만 있었는데 그나마 그것마저 건드려버리니까 그 사람도 근심하고 돌아갔을 거예요.
그러니 사람마다 다 달라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착함, 선함, 천국 이 계시가 뻥! 하고 구멍을 뚫어버려요. 한 가지 예를 들면 대전에서 강의했던 건데 요한복음 9장에서 그 소경을 낫게 하죠. 소경이 눈 뜨고 난 뒤에 비로소 자기가 소경인 걸 알았어요. 소경일 때는 소경인 줄 몰랐는데 소경에서 눈을 뜨게 해주니까 ‘내가 진짜 주님 앞에 소경이었습니다.’라는 것을 이미 주님에 의해서 구원받았기에 ‘내가 소경입니다.’ 하는 거예요. 그걸 듣고 주께서 하는 말이 ‘자기가 소경이란 사람은 나를 본 자요. 자기가 소경 아니란 사람은 아직도 나를 못 본 자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경에 그게 있어요. 그것도 핵심부분입니다. 그걸 놓치고 무슨 성경을 해석을 합니까?
사도바울은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라 해서 사도바울은 지옥 갔습니까? 아니잖아요.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란 말을 못하는 겁니까? 그것은 주님께서 구멍을 안파서 그래요. ‘아직도 주님 없이 요거 힘으로 살지,’라는 게 따로 있어요. ‘아이고, 주님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주님 없으면 이것으로 살지, 이빨 아프면 잇몸으로 살지. 주님 없으면 딴 거 가지고 버티지, 뭐.’라고 얹을 수 있는 게 아직 있어요. 그걸 깨주신다면 그건 복 받은 사람이고 그게 축복이고 그게 남아있으면 그걸 저주받은 사람 이예요.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는 자로다” 했죠? 그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모든 게 채석장에 돌 깨죠. 우리 딱딱한 돌이 말씀이 정이 돼서 말씀이 모든 걸 다 깨버리고 우리를 벌거벗게 만들어요. 참, 아파요. 정말 아파요. 아프지만 원래 청춘은 아파야 돼요. 아프니까 청춘이죠. 아프니까 아직도 우리가 살아있는 거예요. 주께서 이렇게 정으로 우리를 톡! 톡! 우리의 두껍게 쌓인 고드름 같은 우리의 위선을 말씀으로 탁 깨줍니다. 우리가 굳은살이 너무 많이 끼었어요. 나이만큼 많이 꼈어요. 그걸 다 때려서 거할 때 그 자리는 우리 자리 아닙니다. 그 자리는 인자가 안착하는, 하늘에서 우주선이 내려오는 자리 있잖아요. 결국 주님이 자기 자리를 만든 거예요. 그걸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전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전! 성전이 만남의 장소에요.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시내 산에 갔잖아요. 그거 왜 갔습니까? 놀러갔습니까? 쓸데없이 4번이나 왔다 갔다 했어요? 시내 산을 왜 올라갔습니까? 올라오라 해서 올라갔죠. 다이어트 하려고 등산 간 게 아니잖아요. 결국 올라갔다는 말은 누굴 만났다고 하잖아요. 만날 때 그냥 만나기만 했습니까? 뭔가 보고 듣고 받은 게 있죠. 받은 건 십계명이고 들은 게 뭐냐 하면 바로 그 외의 많은 율법을 받았지 않습니까?
율법! 그 율법 속에 뭐냐 하면 놀라운 게 있어요. 뭐냐 하면 만남의 장소를 받아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만남의 장소는 인간들이 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만남의 장소를 정했다는 이 말은 그동안 인간들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아무리 고상하게 아주 유난 떨어도 그건 아무 짝도 소용없는 거죠. 만남의 장소는 누가 정하고 누가 만드신다? 주께서 정하시고 주께서 만드시는 거예요.
그럼 만남의 장소면 휴식이 있을 게 아니냐? 제가 십자가마을에 답변한 게 있죠. 추도예배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할 때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인간의 어떤 형식과 제도로도 영적 예배를 그냥 재현할 수 없습니다. 구현할 수 없어요. 11시에 예배드리려 하면 10시 50분에 오면 주님이 아직 안 오시는 겁니까? 안 되거든요. 아무리 인간이 반듯하게 해도 철저하게 형식을 갖춰도 그것은 영적 예배가 자동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적 예배가 되지 않아요.
만남의 장소라 하는 것은 인간이 만들 수 없어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줄 때만 만나는 거예요. 꼭 유괴범 같아요. ‘당신 딸이 지금 내 손에 있는 것 알죠? 5천만 원 준비해서 나와라.’ ‘그러면 5천만 원 가지고 어디로 나갈까요?’ ‘경찰에 알리지 말고.’ ‘알겠습니다. 어디로 나갈까요?’ ‘만남의 장소는 내가 정해.’
만남의 장소는 누가 정해요? 주님이 정하시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만남의 장소만 ‘주께서 그러면 어디서 만날까? 송파구청 있는 데서 만날까?’ 이러고 있는데 뭔가 드르륵 하는 소리가 나서 보니까 내 구멍을 뚫고 있잖아요. 만남의 장소가 구약 율법에서 만남의 장소가 어떻게 형성된다는 걸 알게 되면 이미 만남의 장소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게 출애굽기에 보면 만남의 장소의 요건이 있어요. 요건이 뭐냐 할 때 출애굽기 20장 25절에 보면 나오죠. 정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단을 쌓고 그 다음에 흠 없는 제물로서 화목제와 번제를 드리게 되면 누가 오느냐 하면 주의 이름이 오셔요. 주의 이름이 계신 그곳이 하나님이 전에 약속했던 만남의 자리입니다.
지금 오늘 두 번째 강의 주제가 뭐냐, 인자죠. 인자를 설명하는데 제가 초반에 이야기했는데 인자라 할 때는 반드시 인자가 자기 자리를 구멍을 파야 한다 했죠. 그걸 뭐라 했습니까? 성전이라 하죠. 성전이 만남의 장소인데 성전이 만남의 장소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성전 이전에 먼저 있었던 게 있어요. 그게 회막입니다. 그때는 천막이라 했는데, 성전은 건물이지만 회막, 천막은 그냥 텐트 아닙니까? 텐트는 이동성이 있어요. 이동성이 있다는 말은 이 자리가 다가 아니다. 또 어디로 훌쩍 떠나야 되는 자리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성전이 이 땅에 다윗 때 예루살렘에 있었거든요. 예루살렘에 있던 성전이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난 뒤에 예루살렘이 어디로 갔습니까? 바벨론에 갔죠. 바벨론 갔던 예루살렘이 어디로 갔죠? 다시 예루살렘으로 왔죠. 예루살렘 와서 예루살렘이 어디 갔죠? 예루살렘이 죽어버렸어요. 사흘 만에 주님께서 예루살렘이 살아났어요. 그 예루살렘이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갔어요.
요한계시록 21장에 예루살렘이 위에서 내려옵니다. 재림하시거든요. 강림하시죠. 예루살렘에 가는 길을 추적해 보자. 그것이 우리의 구원의 추적입니다. 그게 곧 구원의 유일한 만남의 장소에요.
그러면 지금은 예루살렘이 어디 있느냐? 예루살렘이 지금 하늘에 있죠. 하늘에 있으면 죽어야 가는데 죽어도 못 가요. 하늘나라는. 그래서 신약에서 제일 어려운 게 뭐냐, 하늘나라가 이 지상에 있는 하늘나라가 아니고 주님이 계신 그곳이 하늘나라가 되는 거예요. 이 보잘 것 없는 우리의 몸이라 할지라도,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곧 하늘나라가 되는 거예요. 이거는 찬송가에 나오기 때문에 계시가 아니기 때문에 못 믿겠다 한다면 믿을 만한 거 이야기할게요.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래서 관건은 뭐냐, 주의 이름이죠. 누구든지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또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 함께 있겠다, 하잖아요. 그러면 주의 이름을 부르면 되겠네요. 그러면 주의 이름을 뭐라고 부를까요? 지저스로 부를까요? 예수라 부를까요? 뭐라고 부를까요? 소프라노로 부를까요? 바리톤으로 부를까요? 뭐로 부를까요? 저같이 발음 안 좋은 사람은 예수가 될지 사투리가 돼서 사투리를 어느 사투리로 할까요? 어떻게 톤을 딱 맞춰서 예수~ 예수~♫ 예수~♬ 예수~~ 하고 사중창으로 할까요? 아카펠라로 할 일 있습니까? 어떻게 불러야 주님 오십니까? ‘그냥 불러라 내가 올게.’ 되려면 어떤 톤으로 불러야 ‘그래 날 불렀지.’ 하고 쫓아오십니까? 어떻게 기도원에서 부르듯이 성부 성자 부르면 오십니까? 고함지르듯이. 자기 목만 아프지. 목 아픈 게 아니고 마귀가 오죠.
그래서 성경은 해답 다 주고도 여전히 비밀이라는 겁니다. 해답 다 줬는데 이게 해답이 왜 해답이 안 되느냐 하면 아까 첫째 시간 끝에 이야기했습니다. 질문을 그 해답에 맞춤 질문을 우리가 할 능력이 없어 그래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해답은 준비해 놨는데 우리가 뭐가 안 된다? 질문이 안 되니까 우리로 하여금 질문 하게끔 주님께서 말씀으로 사태를 그렇게 몰아넣어버려요. ‘어찌합니까?’ 이런 식으로.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부르기도 하고요. 임 재범은 아니지만. ‘어떻게 할까요? 저 보거 어쩌란 말입니까? 그 여인만 주시면 내가 모든 걸 드리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죠.
‘이거는 제가 예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면 저는 어쩌란 말입니까?’ 라고 하는 그때 멀리 있던 주님이 바짝 가까운 정도가 아니고 아예 내 속까지 완전히 와 버리면 그때 일어난 전환의 분위기가 바뀌게 돼요. 전에는 우리가 있잖아요. 그러면 주님이 여기 오게 되면 우리는 주님과 악수하고 주님과 나하고 하나이고 싶어 합니다.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 이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질문케 한 질문이 있잖아요. 너무 난감할 때 질문 같으면 주께서 오시면 이미 오신 순간 우리는 내가 주님을 믿는다.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 주님을 소망한다. 이 모든 것은 다 묵살되고 주님이 우리를 가져가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고린도후서 6장처럼 ‘내가 가난한 자 같으나 부한 자요. 내가 너희들 보기에는 곧 굶어 죽지, 사실은 내가 살았고 너희들이 죽은 자고, 내가 슬픈 자 같으나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자요. 이것이 바로 고린도후서 6장에 나오는 사도바울이 성령에 충만할 때 나오는 그 고백인데 그거는 성령님의 고백입니다. 이용하기는 사도바울의 혀를 이용하는 거죠.
주께서 우리 몸을 충분히 이용해서 튀어나오기는 주님 자기가 튀어나와 버려요. 그러한 경우가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주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용서해 주세요.’라는 말이 나온 것은 이거는 본인의 능력이 아니고 주의 능력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렇게 한번 살아보시렵니까? 그거는 할 수 있어요. ‘주여 이 떡이 먹고 싶은 떡이 아니고 주신 것이니 감사합니다.’ 그래서 떡이 안 먹고 싶은데 떡을 주게 되면 그런 난감한 사태가 일어나는데 ‘아, 어디 떡 없나?’ 할 때 갑자기 떡이 생겨버리면 그건 자신도 모르게 뭐가 튀어나옵니까? ‘주여 감사드립니다.’
우리 애가 분명히 반에서 30명 중에 15등인데 어느 날 보니까 ‘엄마, 나 100점 맞았어.’ 하고 들고 돌아다니더란 말이죠. 그럴 때 기쁘기도 하지만 그때는 애가 무섭죠. ‘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애가 이제는 무서운 거예요. 사람이 언제 무서우냐 하면 예상 밖에 벗어날 때는 항상 무서워요. 주님 찾아온 순간입니다. 그래서 진짜 주님이 찾아오시면 성경에 여러 군데 나옵니다. ‘아, 고기 잡아야 되는데, 고기 잡아야 되는데.’ 막상 고기를 딱 잡게 해주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뭡니까? 무서운 거예요. ‘주여, 저 같은 인간하고 상종하지 마시고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이게 바로, 이 자리가 무슨 자리냐? 주님이 그 자리에 실제로 있는 자리다. 그러니까 그 순간만큼은 베드로 여기 있고 몇 발자국 바깥에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주님이 아예 베드로자리에서 완전히 장악해 버렸어요. 그게 바로 예수 안이라고 하고 그걸 성령 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바울 서신에서. 이게 늘 상 그런 게 아니에요. 다만 우리가 엇길로 샐 때는 그런 사태가 일어나서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고, 내가 암담하고 앞이 캄캄하더라도 주님이 훤하다면 주님이 훤하지, 내가 왜 내가 운전사도 아닌데 내가 왜 뒤에 탄 승객이 왜 요동치느냐 말이죠. 앞에 운전사는 끄떡없는데, 터널 속에 들어갔다고 우리가 자살해야 됩니까? 터널 밖에 튀어나오면 난데없이 설국이 나오는데. 설국열차 영화 첫 장면이 그렇잖아요. 차타고 터널 나가니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죠. 삿보로의 하얀 눈 덮인 산이 나오죠. 터널 끝나고 난 뒤에.
그처럼 모든 것이 한 순간의 꿈인 것처럼 아는 그 순간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라는 것을 우리 속에 탕, 탕 십자가를 우리한테 박아서 우리들 옆구리에 창 자국 생기도록 그렇게 조치합니다. 자랑할 것은 십자가밖에 자랑하지 않도록 그렇게 합니다. 돌아서면 마찬가지지만, 돌아서면 모기 약 뿌리고 난 뒤에 1분도 안 돼서 윙 하고 모기가 냄새 없다고 달려드는데. 하지만 우리 옆에 또 모기가 있다는 거, 그러면 또 뿌리면 된다는 걸 알죠.
영적 예배라 하는 것은 우리한테 포착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필요할 때마다 영적 예배를 드리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산 제자 드리게 하게 할 때 우리는 말씀 안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로마서 12장 안에 놓여있는 거예요. 우리가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우리를 가지고 말씀이 스스로 말씀됨을 드러내는데 우리를 활용하죠. 그게 바로 계시의 구멍을 뚫는 겁니다.
유대인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가 말씀 지키려고 했어요. 건전한 내가 또 십계명까지 지키고 안식일 지킨다고 안식일 지키려고 질문을 ‘안식일 날 어떻게 지키면 돼요? 가만히 있어봐, 세칙,’ 세부 사항까지 만들어요. 그래서 이렇게 지키면 된다 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는 말이 엉뚱한 소리 했죠.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 하는데 주님은 하시는 말씀이 “지킬 것 없다.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니까 안식일 발생 자가 주님 이예요. “내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니까 이건 지키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내가 지켜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고 안식일의 주인이 안식일에 그 원리를 그냥 적용시키면 자비가 주어지고 그 자비 받았음 자체가 안식일 완성이 되는 거예요.
안식일을 주일로 바꿔서 지키는 게, 지키는 게 아니고 용서받으면 그게 안식일이 덮친 게 된다니까요. 용서 받으면! 이 이야기를 참 많이 했습니다. 도무지 안 믿어요. 도무지 믿지를 않아요. 안 생겨요, 가 아니라 도무지 안 믿어요. 믿지를 안 해요. 사람들이. 돈 10% 내는 게 십일조가 아니고 예수님 만난 게 그게 예수님이 우리한테 십일조를 하셔서 ‘십일조 내가 다 냈다.’라고 통보해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일조를 누구한테 내는 게 아니에요. 십일조를 받아먹는 그 인간들은 뭐예요? 웃기는 인간들 이예요. 자기가 뭔데 받아요? 하나님도 안 받는데 자기가 왜 받아요? 무슨 하나님이 십일조를 받아요? 하나님이 예수님을 받죠. 히브리서 7장에 보세요. 예수님이 십일조인데요.
그것도 모르고 옛날에는 십일조만 했는데 지금은 신약이니까 말씀을 더 키우기 위해서 십에 2조, 십에 3조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아까 이야기한 인간의 선함을 확장시키기 위한 보다 완벽하면 그게 신의 세계가 된다는 그 사고방식과 똑같은 사고방식입니다.
242 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봅시다. 『70년 포로 기간은, 7일이라는 원래 창조완료 시간과, 70이레라는 확정된 종말의 날의 시간대 가운데 끼어서 그 창조성을 종말까지 전달하는 매개구실을 하게 되고』무슨 이야기냐 하면 처음에 7이라는 말이 언제 나옵니까? 창세기에 나오죠. 70이레는 언제 나옵니까? 다니엘에 나오죠.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는 어디 나옵니까? 신약 요한복음 19장에 나오죠. 그러니까 70이레는 그 중에 끼어 있다 이 말입니다.
7, 7 할 때 천지창조 했잖아요. 이번 수련회 할 거 미리 해볼까요? 창조할 때, 붕어빵 안에 뭐가 들어있어야 됩니까? 앙꼬 있어야 되죠. 앙꼬 없으면 그건 붕어빵이 아니죠. 그냥 풀빵이죠. 그러니까 안에 앙꼬 있어야 되잖아요. 모든 창조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예수님이 하셨다는 정보가 내장돼 있어요. 7에 예수님이 하셨다는 사실이 내장돼 있어요.
그런데 막상 창조된 자들은 창조됐으니까 있음이죠. 있음이 한자로 하면 뭡니까? 有죠. 있음에서 창조를 파악하다 보니까 ‘어떻게 창조됐지? 아! 없음에서 창조됐다.’ 없음에서 있음이 됐다. 이걸 창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뭐가 빠졌죠? 아까 앙꼬 빠졌죠. 없었는데 있었다, 가 누가 있었는가? 하나님이 하셨다. 이건 창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날 없었는데 있게 했다. 이것이 창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있게 했는데 내 안에 뭘 집어넣은 걸 이야기해야 돼요. 집어넣은 걸 창세기 1장 26절 우리의 형상대로, 뭔가 형상을 집어넣은 거예요.
형상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인간은 깨져도, 피조물은 깨져도 뭐는 깨질 수 없다? 형상은 깨질 수 없어요. 그러면 왜 깨지느냐, 인간의 껍데기를, 풀빵 껍데기가 깨져야, 앙꼬의 가치가 도드라지게 돋아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조 자체가, 창조물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된 거예요.
말은 어렵지 않은데 이거 믿는데 어떤 사람은 수십 년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돌아가신 우리 허 운석 선교사님 같은 경우 저한테 이야기해요. 돌아 돌아왔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위해서 있다는 것을 왜 몰랐느냐 이 말이죠. 그동안 예수님을 위해서 있다는 걸 모르고 뭐냐 하면 예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한 거예요. 그게 얼~마나 엄청난 반대의 생각입니까? 사나 안사나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있는데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것뿐이겠습니까? 한국교회 전체가 그래요. 주를 위해서 기쁘게 해야 주의 사람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교회서 다 그렇게 가르쳐요. 그렇게 훈육하고 그렇게 세례 주고.
아무것도 안 하고 심지어 죄짓고 있으면서도 주님이 내 안에 있다는 생각을 왜 못할까요? 좀 하면 안 됩니까? 그 얼마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한순간에 다 날라 가 버립니다. 내가 병들었다. 암에 걸렸다. 내일 모래 죽는다. 내일 모래 죽더라도 그게 주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왜 그렇게 생각할 줄 왜 모르느냐 이 말이죠.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인데 우리는 바락바락 대들잖아요. ‘왜 아프게 하십니까? 하필이면 왜 엄마입니까? 그렇게 늙은 70대 할아버지, 할머니가 많은데 왜 나에게?’ 하잖아요. 하필이면 왜 나에게, why me? 가 왜 하필이 왜 들어가요? 하필이면 왜 머리가 희어졌어요? 다른 사람은 안 희어졌는데. 왜 하필이면.
주님께서는 ‘그걸 질문이라고 했나?’ ‘정답 이야기해줄까?’ ‘예’ 이미 네 안에 내가 있어서 너로 하여금 하필이면, 이란 죄를 유발시켰느니라. 됐나? 이게 기도의 응답이다.‘ 그 기도 응답 받고 우리가 그 다음부터는 뭐냐 ‘제가 입이 열 개라도 욥처럼 재를 뒤집어쓰고 제가 유구무언입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욥에 나오죠.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만듭니까?’ 할 때 하나님의 하신 방법은 ‘네가 황무지에 비내리는 이유를 아느냐?’ 사람들은 항상 비라 하는 것은 자기가 경작하는 채소밭에 비가 와야 되고.
그런데 제가 어느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죠. 내가 있는 곳에 가물면 안 되고 내가 있는 곳에는 늘 촉촉해야 되고, 내가 있는 곳에는 날씨가 너무 추우면 안 되고 날씨가 포근해야 된다 할 때 항상 앞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내가 있다 했죠. 욥도 마찬가지에요. 하필이면 왜 내가 아프게 합니까? ‘나라는 자리에’ 아까 계시 공백, 그걸 구멍을 뚫어버리고 나라는 자리에 뭐를 집어넣는다? 인자를 집어넣으면 거기 인자와 우리의 만남이 그렇게 성사되는 거예요.
흉측한 예지만 이게 무슨 그림입니까? 물고기 그림이죠. 고기가 입을 벌리면서 ‘왜 하필이면 물고기입니까?’라고 하니까 주께서 계시에 의해서 이걸(입) 잘라버리고 여기다 여자 얼굴을 붙여주면서 ‘이제 됐나?’ 인어공주. 내가, 나는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필이면 나라는 말을 하지 말라 이 말 이예요. 네가 없는데 왜 자꾸 나라는 말을 붙이냐 이 말입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로마서 14장 8절, 고린도전서 15장에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그 말 들으면 ‘사도바울은 좋겠다. 믿음 좋아서.’ 우리는 그냥 남의 이야기에요. ‘지는 좋겠다. 저렇게 멋들어진 소리 하고’ 그런데 성령이 와서 그걸 사도바울의 현실이 아니고 나의 현실로 바꿀 때 우리는 눈물 쏟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주 극렬한 반항 뒤에, 애들이 막 울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뭡니까? 조용해서 보면 자고 있죠. 우리는 극렬한 반항 뒤에 잠자고 있는 순간 이예요. 주께서 우리를 자신의 복음 전파에 우리를 활용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이발소에서 잠자고 있을 때 이발 다 깎고 있잖아요. 자고 있으니까 이발 다 하고, 우리로 하여금 까부니까 잠재워서 주께서 구원에 합당한 사람으로 만들어내고 보니까 머리 다 깎였어요. ‘오, 내 머리 누가 했어?’ ‘내가 했다. 왜? 내 건강한 세포 누가 했어? 내가 했다. 내가 암세포로 다 바꿔 놨어.’ 왜, 구원받기 위해서. 구원시키기 위해서. 그래서 그 사람은 나중에 암 걸려 죽었다. 아니에요. 그랬던 그 사람이 사흘 뒤에 암이 깨끗하게 나았다. 이렇게 할 경우에 ‘당신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병이 나았습니까?’ 물으니까 ‘내가 참, 내가 믿음은 좋은 모양이다.’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건 아주 엉터리거든요.
나는 절대로 암에서 나을 사람도 아니고 살고자 하는 마음도 일체 없었고 나는 내 계획도 그게 아니었는데 예수님이 지 맘대로 낫게 하게 된 거예요. 여러분 그런 마음 준비 돼 있죠? 앞으로 여러분들이 260억 재산 가지거든 나는 부자 될 마음 없었고 나는 차를 4대 가질 그것도 없었고 아주 화를 내듯이 주님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부자 되게 했으니까 나는 짜증나 죽겠다. 나는 이렇게 할 마음도 없었고 서울대 법대 합격할 줄 몰랐는데 이건 주님께서 자기 맘대로 했는데 장난질 쳐서 됐는데 나는 화가 나도 보통 화가 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걔가 왜 변호사가 왜 되는데? 수석으로 왜 되는데? 그렇게 되게 만들어요.
질문: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쌓아올린 것들이 무너지는 거 아닙니까? 아까 부자청년도…
그것도 문제가 있어요. 자기가 무너질 것을 미리 예상하면 절대로 안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이 요거 무너뜨려서 나를 구원하죠? 하면 그걸 피해 갑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자기 공로를 우리하고 동업을 안 해요. 일방적으로 우리를 세리와 창기로 만들기 때문에, 죄인으로 만들기 때문에, 죄인하고 동업하고 협력하지 않습니다.
질문: 그러니까 자기가 나라는 걸 의지, 아까 부자 청년은 돈을 의지해서 돈으로 쌓은 선이 아닙니까? 그 돈을 무너뜨리라고 하니까 근심하고 간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만남으로서 자기가 부서지는 거 아닙니까? 십자가 앞에서.
부서지는 그 결과에 대해서 우리가 미리 점칠 수 없죠. 어떤 사람은 부자 되는 식으로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차를 좋은 차타고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애가 공부 잘하므로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갑자기 국회의원 돼서 많은 사람이 자기한테 권력을 쥐는 식으로 무너지고 무너지는 방법도 여러 가지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정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지금 창조 이야기했거든요. 7일 간의 창조라 할 때 반드시 앙꼬가 들어간다 했죠? 고 앙꼬가 70이레로 전달됩니다. 전달, 전달, 전달, 전달, 전달되면 그 전달하는 매체가 뭐냐? 언약이라는 거예요. 창조와 그 다음에 70이레 다니엘 사이에 무수한 언약이 개입됩니다. 그 언약 하나마다 전달, 전달하는 거예요.
뭘 전달하느냐? 요걸 전달해요. 우리말로 ‘피’ 뭐죠? 피를 전달합니다. 창세기 4장에서 전달 요인을 흘린 사람이 누굽니까? 가인이 아니고 누구죠? 아벨! 아벨이 피 흘려 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벨의 피에서 스가랴까지. 스가랴는 선지자거든요. 요아스 왕 때 선지자인데 바른 소리 했다고 맞아죽었어요.
그거 생각하면 예레미야 같은 사람은 바른 소리해도 하나님이 살려두죠. 만약에 죽은 스가랴 같은 사람이 그걸 보면 ‘누구는 바른 소리 했다고 죽이고 누구는 살려두고 아이 씨, 나는 손해 봤다.’ 이런 생각 들 수도 있지만 진짜 영적 세계 들어가게 되면 살리기 위해서 태어나게 했고, 이쪽은 애초부터 죽이기 위해서 태어난 거예요. 그러니 죽을 인간은 그거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그 시점에 죽게 돼 있습니다. 괜히 자기가 더 생각해서 할 생각 없어요.
히스기아가 15년 더 살았잖아요. 원래부터 15년 더 살게 돼 있어요. 그런데 왜 애초에 죽을 뻔 했느냐? 히스기아가 왕으로서 인간의 한계성을 드러낸 겁니다. 왕으로서 그런 식밖에 안 된다는 말은 히스기아는 아무리 해도 메시야는 될 수는 없다.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메시야와 대비시켜서, 예수님과 대비시켜서 왜 다윗 왕도 아니고 왜 솔로몬도 아니고 왜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이름이 없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기 위해서 앞에 쫙, 쫙 미리 많은 사람들을 깔아놓는 거예요.
솔로몬 지혜도 있겠다. 부자 됐겠다. 우리 같으면 솔로몬 같으면 믿겠는데 솔로몬도 아니에요. 솔로몬 입은 옷도 들풀보다 못하다 했잖아요. 우리 눈에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느냐 하면 많은 사람 만나지만 메사야는 아니란 말이죠. 우리가 다 정 주고 정 받고 좋은데 우리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은 그분은 아닌 거예요.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지, 예수 잘 믿는 사람을 믿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이 강의에서 앞으로 해야 될 것은 뭐냐? 7이레에서 70이레에 공통점을 찾아내는 작업을 해야 되겠죠. 그걸 제가 죽 해놨습니다. 해놨는데 워낙 어려워요. 그 흐르는 노선이 어려워요. 왜 어려우냐 하면 이게 언약이 개입되기 때문에 중간, 중간에 언약이 개입되면서 7이레에서 70이레로 가는 그 노선이 방향이 완전히 사다리 타기 이상입니다. 이 길이라 생각하면 저 길로 가고 저 길이라 생각하면 이 길로 가고 항상 사람들의 예상 밖을 벗어나면서 죽죽 이어지거든요.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244 페이지 봅시다. 그런데 형상대로 했는데 골로새서 1장 16절에 나왔죠. 아까 그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형상대로 했는데 여러분 한번 물어봅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했는데 형상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 했는데 그 형상이 어디 있죠? 없죠. 죄 짓고 난 뒤에 형상이 없습니다. 형상이 없는데 죄 지어서 형상은 없는 껍데기는 있죠. 그게 창세기 5장에 보면 나옵니다.
껍데기! 형상이 없는데 형상이 빠져나간 껍데기는 나와요. 여기 창세기 5장 4절 봅시다.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삽십세를 향수하고 죽었어라” 죽었더라. 구백 삼십년 살았으니까 많이 산 것 같죠? 아담한테 구백 삼십년 산 아담한테 물어보세요. ‘할아버지 참 오래 살았네요.’ 하면 귀때기 맞습니다. 왜 ‘내일 되면 나 더 살고 싶어.’ 내일 되면 죽어야지. 백년이고 천년을 살아도 내일 되면 또 살고 싶어요. 결국은 ‘죽었더라.’ 하면 백년을 살든 천년을 살든 죽었으면 살아있으면 하고 똑같아요.
우리 몸이 있잖아요. 가고 나면 똑같아요. 여기 아무도 없잖아요. 여기 풍경 사진 찍어보면 똑같아요. 카메라 보면 훤해. 그러니까 아담이 있을 때만 아담이 있고 아담이 없을 때는 아담이 없습니다. 제가 지금 바른 소리 하고 있죠? 그렇잖아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말 이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있을 때나 써먹는 것이지, 내가 죽고 난 뒤에는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을 못하잖아요.
결국 이렇게 이야기해요. ‘나는 없는 존재가 잠시 여기 있을 뿐이고 난 아마 곧 없어질 거야. 없어지니까 나한테 너무 기대하지 마.’ 이렇게 나와야지. 그런데 그 껍데기가 뭘 남기느냐? 자식을 남겨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없는데 형상이 빠져나간 그 껍데기는 하나님이 창조하십니다. 왜, 나중에 형상이 그 껍데기를 타야 되니까. 차고 들어와야 되니까. 그걸 로마서 8장 3절에서는 뭐냐 하면 “하나님 아들이 육신대로 오셔서 육신에 죄를 정하사” 우리가 보기에도 허접스러운 이 껍데기를 주님께서는 그 껍데기를 하나 버리지 아니하고 주가 되시는데 활용하시는 거예요. 우리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셔서 더 이상 죽지 않고 영원히 부활하는 육신으로 만들어내는 하나의 재료로서 충분하게 우리를 활용하신 겁니다. 거기에 걸려든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주님 되기 위해서 천국에 집합해야 될 사람으로서 이 껍데기를 활용당한 사람들, 성령이 임하면 누구든지 성령이 있으면 그리스도 사람이라.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껍데기로 사용하도록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하는 겁니다.
여러분, 지하철에 보면 요새도 그런 사람 있는지 모르지만 지하철에 보면 자리가 남아 있잖아요. 이런 게 있어요. 지하철을 타고 있는데 자기 친구가(50대 이상 아줌마) 지하철 바깥에 있거든요. 그러면 그동안 그 자리에 앉으려고 그렇게 사당에서 잠실까지 서서 와서 앉으려고 하는데 보니까 저 바깥에 친구가 전철 타려고 있으니까 들으라는 듯이 ‘야, 야 빨리 와, 자리 마련 해놨어.’ 얼마나 화가 나는지 몰라요. 지금 거기 앉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오지도 않은 사람을 불러서 자리 마련해놓으니, 화나죠. 주님이 꼭 그런 일을 해요. ‘빨리 와. 빨리 와. 네 자리 마련해 놨어.’ 하고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임하게 만들어요. 태어나게 해서.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 사람 되어서 천국에 합류시킵니다. 로마서 8장 이야기에요. 이런 말 지어낸 이야기라고 하지 마세요. 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육신대로 왔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인 것을 알고 육신의 운명은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된다는 운명을 우리가 인정을 해줘야 됩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정리합시다. 7이레 창조에서, 첫 번째 창조에서 70이레 가는 그 노선에는 뭐가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주께서 언약을 실은 구르마라 하죠. 소달구지에다 인자를 싣듯이 인자를 실은 소달구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주변사람한테 핍박을 많이 받습니다.
시편 23편 유명한 말씀, 교회 좀 다니는 사람들은 알고 더 다니는 사람들은 액자 만드는 유명한 구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 구절이 뭐냐 하면 바로 주님이 자기를 마차로 사용했다는 겁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게 뭐냐 하면 ‘네 자리 마련해 놨어. 빨리 와.’ 하는 것처럼 다윗의 자리에다 주님이 거기 싣기 위해서 성령께서 자리를 마련해 놓은 거나 똑같은 거예요.
다윗이 애기 낳아도 죽고, 우리는 왜 껍데기냐? 낳아 봐야 죽고 우리는 잠시 있다 사라지고 또 내 자식이 장가가서 또 애 낳아야 또 죽고 그냥 고리가 죽음의 연쇄고리에요. 죽음의 연쇄고리인데 내 아담의 노선, 에녹의 노선, 노아의 노선은 지금 어디 가 있습니까? 엘리야, 모세 지금 어디 가 있습니까? 지금 하늘나라 가 있잖아요. 그거 누가 갈아탔어요? 바로 예수님의 영이 먼저 올라탔기 때문에 지금 하늘나라 가 있는 겁니다. 그게 구약에서는 언약의 모습으로 그것이 우리에게 설명되는 거예요.
다음시간부터 이 7이레부터 70이레의 그 여정을 진도 죽 나가면서 그 여정을 어떤 식으로 다니엘까지 되는가. 그걸 살펴볼 겁니다. 그래야 성경이 하나의 통으로 쫙 연결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저희들 남하고 비교하지 말고 주님 십자가 앞에 저희를 세워주옵소서. 그렇게 될 때 먹고 마시는 것도 다 은혜인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고 생생하게 현실화 시키면서 이제는 나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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