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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70이레 논문(계시 공백)131107-29강a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레위기

가락-70이레 논문(계시 공백)131107-29강a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70이레 논문(계시 공백)131107-29강a -이 근호 목사

241 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초반부터 어려운 단어 나왔죠?『초월적인 타자(신)와 초월론적인 타자(본인의 욕망을 야기 시키는 미지의 타자)』‘론’이란 말 하나 더 들어간 거죠. 그래서 이게 어렵기 때문에 제가 해석 붙여놨죠. 초월적인 타자라 하는 것은 신을 의미하고 초월론적인 타자는 본인의 욕망을 야기 시키는 미지의 타자. 타자라 하는 것은 야구할 때 타자가 아니고 타인, 남, 이렇게 돼 있어요.

질문: 자기가 만들었다고 봐야 되는 건가요? 자기가 만들 게 아니고 자기에서 발생된 거죠. 자기가 안 만들어도 자기에서 나오게 돼 있어요. 인간은 자아라는 게 없고 자아가 없으면 타인도 없어요. 없는데 인간에게 있는 것은 뭐밖에 없느냐 하면 인간은 몸밖에 없어요. 몸만 있어요. 몸만 있는데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꿈속에서 인간의 몸은 항상 풋풋해요. 20대 같으면 20대 모습이고 내가 30대는 30대 모습이고 내가 꿈속에 10대를 보게 되면 10대의 내 어렸을 때의 모습이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꿈은 그야말로 개 꿈 아닙니까? 꿈은 꿈이라고요.

그런데 꿈 깨고 나면 내 몸은 자기의 나이에 합당하게 지금 늙어있지 않습니까? 늙어있는 정도가 아니고 내일되면 또 늙어요. 그리고 지금 있는 요 몸은 내일되면 또 잊어야 됩니다. 왜냐 하면 지나갔어요. 내일만큼 늙어야 돼요. 모래 되면 모래만큼 더 늙어빠진 몸으로 달랑 남고 그 대신 며칠 전에 있었던 젊은 몸은 사실은 이미 없어요. 사라진 거거든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몸이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이 어느 자리에 있어줘야 거기에 대해서 규명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존재다.’ 하고 딱 고 자리에 고 위치에 변함이 없이 딱 있어줘야 ‘나요? 이런 인간입니다.’ 하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데 내가 이 몸이 자꾸 변하니까 거기에 따라서 자아도 그때, 그때마다 자꾸 변신해요.

그럼 몸이 가는 곳에 허겁지겁 누가 따라가는가, 자아가 따라가는데 따라갈 때 그냥 자아는 가는 게 아니고, 타인! 남을 아우르면서 따라간다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몸만 있고 정신이라 하는 것은 몸에서 발생하는 몸의 작용의 효과음이다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비행기나 차가 지나가면 윙~ 하고 지나가죠. 그 효과음 나오잖아요. ‘뭐가 방금 지나갔어?’ 하면 차가 빨리 휙 지나가지만 바로 대번 하잖아요. 자아라는 것이 내 몸이 변화되는데 따라서 나오는 효과에요. 그래서 자아는 없어요. 자아란 없고 실체는 몸이 실체고 자아는 몸에서 피어나오는 하나의 그림자 같은 거, 그림자인데 이 자아가 골치를 아프게 하죠.

다시 한 번 보면 몸밖에 없는데 몸인데 몸에서 아우라처럼 번지는 게 나오는데 그게 뭐가 나오느냐 하면 시간의식이 나와요. 참 이게 평생을 사람을 못살게 들들들들 볶게 만드는 게 시간의식 이예요. 시간의식!

시간의식은 뭘 뜻하느냐 하면 지나간 것을 과거로 보고 그리고 지금을 현재라고 보고 아직 미지에 남은 이걸 미래라고 이렇게 의식합니다. 그러면 과거도 없고 사실은 현재라는 실체도 없어요. 몸만 있어요. 따지고 보면 몸이 여기 있다면 정답은 뭐냐, 내 몸이 있는 그 순간이 현재기 때문에 사실은 어제도 현재고 며칠 전에도 현재였고 내일 되면 또 현재밖에 없고 결국 남아있는 것은 현재만 존재하는데, 이상하게 인간들은 과거, 미래를 자꾸 이걸 생각하면서 스스로 고민에 빠지고 스스로 희열에 빠지고 그래요.

예를 들면 ‘아, 어제 그런 짓 안하는 건데.’ 이래요. 후회하려 하거든 어제 가서 어제 그 몸 가지고 후회해야 돼요. 그런데 이미 우리는 어디를 떠났습니까? 어제를 떠나버렸잖아요. 그럼 지금 어제는 있어요? 없어요? 어제 내 몸이 없기 때문에 어제 한 일도 없어요. 말장난이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어제 행동을 후회하려면 어제 몸보고 닦달내야 되는데 어제 몸이 날아가 버렸는데 누구보고 닦달 내는데? ‘너 왜 그렇게 했어?’ ‘뭐?’ ‘네가 했잖아.’ ‘언제 내가 했어?’ ‘어제 네가 했잖아.’ ‘그럼 어제 나한테 물어야지. 지금은 오늘 나잖아. 어제하고 다른 사람이라니까.’

몸이 변하기 때문에 동질성이 안 된다니까요. 동질성이 안 되는데 동질성을 맞추려면 여기 뭐가 동원돼야 되느냐 하면 시간이 동원돼야 동질성이 돼요. ‘맞습니다. 어제 내가 그가 지금 바로 납니다.’ 이렇게 시간이 동원돼야 이게 앞뒤가 맞아진다 이 말이죠. 이것이 하나의 철학적 이론으로 끝나면 ‘이렇게 생각해서 늙어죽으나 이거 생각 안 하고 늙어죽으나 마찬가지인데 문제는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바로 요것을 활용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골치 아픈 겁니다.

이 이야기를 성경 해석하면서 이 이야기를 안 꺼내도 되는데 왜 꺼내야 되는가? 꺼낸 이유가 우리가 내 몸에서 나오는 이 자아성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게 되면 여기서 우리는 발작을 일으킵니다. 좋아서 일으킨 발작도 있을 것이고 화가 나서 일으킨 발작도 있을 것이고, 지옥이 있다 하면 ‘나 지옥 있는 하나님은 싫어.’라고 싫어하면서 발작을 일으키고 반대로 천국이 있다 하면 ‘딱 나네. 내가 가야 될 곳은 하나님이 진작 마련돼 있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 버리면 우리는 죽어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중간에 말씀을 주시는데 말씀을 주게 되면 인간들이 오해하면서 마중 나갑니다. 오해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곡해하면서 좋다고 마중을 나가죠.

아까 말씀한 친구는 ‘네가 누구냐?’라고 물어보세요. 왜냐 하면 자아가 없는데 ‘내가 누구다.’가 성립이 안 되거든요. ‘내가 누구다.’가 성립이 안 되는데 ‘내가 누구다.‘를 이야기할 때 그 말이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은 바로 내 몸에서 뭘 만드느냐 하면 자아를 만들어 내고 자아가 타인을 불러오게 돼 있어요. 그걸 지금 이야기하는 겁니다.

추월적인 타자와 초월론적인 타자란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의 자아는 하나님의 계시를 해석하고 분석하고 이해할 때는 반드시 타인이라는 것을 내가 불러와요. 왜 불러오느냐 하면 나라는 것은 남이 있기 때문에 내가 발언을 해요. 말!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하루 종일 가만있어요. 그런데 누가 딩동! 하면 ‘누구십니까?’라고 나오죠. ‘누구십니까?’ 라는 발언이 나왔잖아요. 왜 이런 말을 하죠? 내가 내 앞에 나 말고 다른 타인이 등장함으로써 그때부터 우리는 뭐가 발생한다? 언어가 나오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이 먼저 ‘아담아 어디 있느냐’라고 하죠. ‘아담아 어디 있느냐’라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아담은 나는 이러이러한 존재라는 말을 해요. 그리고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 하나님께 뭘 합니까? 제사를 드리잖아요. 인간은 자기 자아를 느낄 때는 반드시 혼자서 자아를 느끼지 않고 누굴 데리고 와요. 타인을 데리고 와서 그 둘 사이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누구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환자가 하나도 없다면 의사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죠. 환자가 없으면 의사도 없어요. 학생이 없으면 교사라는 말 자체가 없고 환자가 없으면 의사라는 말 자체가 없어요. 모든 인간의 직업은 타인을 의식해서 한 겁니다. ‘의사 돼.’ 뭔 뜻입니까? 앞으로 환자 있을 거야. 그런 뜻이거든요. 그럼 그 사람은 ‘나는 의사다.’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의사다.’ 할 때 이거는 환자라는 타인이 결정한 것이지, 본인은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니까요.

‘의사 말고 너 누구냐?’ ‘그건 모르지 내가.’ 그러면 모르죠. 그래서 환자가 없다면 나는 의사 아니죠. 그런데 내 자식을 데리고 왔다. ‘아, 나는 아버지네.’ 이렇게 되죠. 아버지라 할 때는 반드시 자식이 있을 경우에 아버지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몸은 가만히 있는데 자꾸 뭔가 지어내. ‘나는 누구다. 나는 누구다.’ 몸은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 몸은 자꾸 다른, 여기 말대로 하면 추월적인 타자, (신)에 의해서 몸이 늙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초월적인 타자를 뭐로 대체하느냐 하면 초월론적인 타자로 대체하면서 자아에 대한 가치를 사수하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내가 육신을 잘 만들어 냈잖아요. 이거 만들어 내면서 너무 천대하지 말아주세요. 너무 모욕하기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것이 마음에 들어있는 거예요. ‘내가 누구다.’ 할 때 흥, 이렇게 비웃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라는 게 있다고요. 나는 성의 있게 내가 누군지 아는데 애 먹었다 이 말이죠.

만약에 지금 간호학과에 다니는 다니는 여학생이 있다 합시다. ‘너 장치 뭐 될래?’ 하면 ‘나는 훌륭한 나이팅게일 같은 간호사가 되겠다.’ 하겠죠. 그런데 만약에 퇴학을 해버리면 제 기준에 의하면 몸이 어제 간호 대학 다녔는데 오늘 퇴학당하면 오늘 간호 대학 학생이 아니잖아요. 그럼 오지마라 하니까 안 다니면 되잖아요. 그런데 뭐가 달라버려요? 장차 나는 뭐다? 간호사가 돼야 된다는 꿈이 날라 가버렸죠.

오지도 않은 미래가 현재 내 몸에서 미래가 미리 걸치다 보니까 현재 있는 이 몸에 의해서 과거 현재 미래가 요동치고 자꾸 있는 겁니다. 지금 시청률이 20%라는 왕가네 가족들이라는 게 있죠. 나는 하나 보지도 않았어요. 휙 지나갈 때 보면 나오는데 거기 나오는 유명한 유행어가 있어요. 뭐냐 하면 ‘나 이래 봐도 이대 나온 여자야. 나 미스코리아 나갔던 여자야.’ 하거든요.

몸은 있는데 자꾸 과거 미스코리아 출전했고 이화여대 나왔다. 그걸 자꾸 걸치고 있는 겁니다. 이걸 걸치다 보니까 자기의 이화여대 나왔고 미스코리아 나왔던 사람이 아닌 격에 안 맞는 다른 타인을 만나버리면 여기서 어떻게 됩니까? 공격하게 돼 있어요. ‘나 이대 나온 여자처럼 왜 대우 안 해줘? 이래요. 그러니까 남은 결국 초월론적인 타자라 하는 것은 타인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사수하기 위해서 내게 만족이 되는 내가 꿍치고 있는 이 나 됨에 대해서 보탬이 되는 타인 같으면 내가 관계를 맺고 내가 나 되고 싶은 욕망에 충족 못하면 ’나는 골라잡을 거야, 나는 너를 버릴 거야.’라는 것이 그게 인간이고, 잘 들어보세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매 맞고 죽게 만드셨습니다.

인간의 몸이 예수를 죽인 게 아니고 유대인의 몸이 예수님을 죽인 게 아니죠. 유대인의 자아가 죽인 겁니다. 이거 굉장히 중요합니다. 인간의 자아가 죽였으니까, 하나님은 자아를 만든 게 아니에요. 몸을 만들었죠. 몸을 만들었는데 자아가 붙여졌잖아요. 그 자아가 어디서 나왔느냐? 악마에서 나왔습니다. 마귀에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에 죽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만든 거 말고 덧붙여져 있는 검은 세력을 하나님께서는 나오도록 유도해 내시는 겁니다.

그 악마로 하여금 인간이 자아 성을 갖도록 함으로써 그때부터 창세기 3장에는 드디어 인간 대 하나님의 관계가 없고, 악마 대 하나님의 관계로 모든 현실이 그렇게 정립됩니다. 전에 언제 집사님이 구조라 이야기했죠? 그 구조란 말을 전체로 말하면 구조고, 내용으로 표현한다면 이걸 네트워크, 네트워크 알죠? 방송국에서 전파 보낼 때 지방하고 전부 다 TV송신하는 보이지는 않지만 전국에 완전히 송수신 네트워크가 형성되죠. 전체적으로는 구조라 할 수 있고 구조 안에 촘촘히 네트워크 형성되는 그것이 바로 뭐냐 하면 뱀의 후손 악마의 후손들이고, 거기에 대해서 인간은 관여 못하고 거기에 대항하는 구조가 오직 여자의 후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네트워크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영, 성령만 할뿐 이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싸우는데 누가 배제되는가? 인간이 배제돼요. 인간이 배제되는 상태를 주께서 채택을 하면서 인간의 역사가 되죠. 이거 말이 어렵네요. 사실은 인간의 갈등은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인간은 빠지는데 인간이 개입할 수도 없는 일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강제로 집어넣게 되면 그 집어넣은 인간이 말발이 튕겨 나와요. 뭐냐 하면 마귀를 대신해서 하나님께 대드는 반항기가 팍팍 튀어나오죠.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주인은 따로 있고 우리보고 ‘짖어라, 짖어라.’ 하면 강아지가 ‘멍멍’ 하고 짖잖아요. 이쪽에서 막대기로 때리려 하면 ‘낑’ 하고 고개 숙이고 도망가고.

성경 전체를 이런 두 가지 흐름으로 풀게 되면 간단하긴 간단한데요, 사람들은 이걸 안 믿어요. 너무 간단하니까.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인간은 빠져. 그런데 듣는 인간 기분 되게 나쁘죠. 자기가 헌금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애쓴 사람보고 ‘빠져, 빠져.’ 이렇게 나오니까 그럼 자기 전도하고 헌금한다고 구원받는 거 아니거든요. 구원받는 정도가 아니고 ‘구원 받게 해주세요.’라고 요구할 것도 안 돼요. ‘입 다물고 있어.’ 이래요. ‘저 구원해 주세요.’ 하면 ‘너 가만히 있어. 구원은 네 소관이 아니야.’

구원은 인간 소관 아닙니다. 예수님과 마귀하고 관련된 문제지, 인간 소관 아니에요.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선택했잖아요. 12제자 중에 제자의 취지를 드러내는 사람은 유일한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 “내가 너희를 택했다. 하지만 그중에 하나는 마귀니라.” 세상에 예수님이 마귀를 택했답니다. 의도적으로.

왜 마귀를 택했느냐? 마귀를 택함으로 말미암아 이번 싸움이 인간과의 싸움이 아니고 영적 싸움이라는 겁니다. 영적 싸움의 효과, 영적 싸움의 그 결실로 인하여 그게 구원 이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저 구원 해 달라.’고 하면 그 자체가 이미 자격이 안 돼요. ‘누구?’ ‘저요.’ ‘네가 뭔데 너를 구원해?’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 절 만들어 놨으니까 구원해야죠?’ 누가 배후에서 그런 소리 하라고 하죠? 마귀가 그렇게 하라고 했죠. ‘하나님이 만들어 났으면 책임을 져야 되지 않습니까?’ 이게 누구의 발언 이예요? 마귀 발언 이예요. 그런데 인간은 마귀를 모르니까 그냥 자기 끌어 오르는 자기 소원이죠. 이 땅에서 너무 고생스러우니까, 이 땅에서 고생하는 사람 많잖아요. 다들 고생하지만. 너무 고생하니까 죽어서는 좀 편하게 살고 싶으니까.

아까 이야기하신 분도 교회 안 나가도 안 나가는 것보다 나가는 게 마음 편할 수도 있어요. 왜, 이 땅이 어차피 이래도 저래도 개판인데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는 그 요구는 있을 수 있다니까요. 그런데 그게 바로 뭐냐, 초월적 타자가 아니고 그게 바로 초월론적 타자 본성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초월론적이란 뭐냐 하면 자기의 형편을 생각해서 + 알파, 비어놓는 자리에요. 그 비어놓은 자리에 내가 못 다 이룬 한을 마저 채울 수 있는 위대한 힘, 초월론적입니다. 그리고 초월신은 몰라요. 왜냐 초월했다는 말은 넘어섰기 때문에 우리는 넘어섰는지 안 섰는지도 몰라요.

어제 수요 예배 때 제가 예를 들었습니다. 어떤 여자 분이 화장실에 갔는데 자물쇠가 고장 났어요. 5일 동안 갇혔어요. 5일 동안 굶어죽을 뻔했어요. 6일째 살아났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 예를 들면서 무슨 이야기하던가요? 그 아주머니가 처음부터 그 화장실에서 출생하지는 않았잖아요. 화장실 바깥에서 출생해서 어른이 되고 난 뒤에 화장실에 들어갔다 이 말이죠. 그럼 화장실 고장 난 문을 통해서 어떻게 됩니까? 이쪽 현실도 알고 이쪽 현실도 경험했잖아요. 했으니까 화장실 문이 닫혀 있으니까 ‘살려 달라.’는 말이 되는 거예요.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함으로 말미암아 애굽도 알고 그리고 앞으로 애굽 말고 다른 나라도 들은 소식은 있고 그러니까 어려울 때마다 누구한테 합니까? ‘우리를 약속의 땅에 넣어준다고 했잖아요? 넣어주세요. 하나님.’ 하고 빌게 만드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예수님이 죽어야 예수님이 살 수가 있어요. 주가 돼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그냥 안 죽고 귀신이 돼서 아무리 총 쏴도 안 죽고 이렇게 해서 건지면 그건 주가 안 돼요. 구원주가 안 돼요. 구원은 우리가 가질 권리가 없고 구원은 누구만 독점하고 있느냐 하면 예수님만 갖고 있어요. 예수님이 갖고 있는 구원을 우리가 나누어 줄 때 구원받지, 우리가 구원받아야 하는데 ‘오냐, 도와줄게.’ 이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을 주께서,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구원을 구원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애초부터 받을 자격이 없어요. 없는데 우리가 아까 인간은 육신에서 자아가 났기 때문에 타인을 할 때는 초월론적으로 생각하니까 우리는 자꾸 구원자를 원하고 신을 원하고 부처를 원하고 착한 사람을 원하고 그리고 남을 칭찬해 줄 타인들을 원하고 혼자 살면 외롭고 더불어 살면 입 벌어지고 그런 겁니다.

옛날 환갑잔치 할 때 자식 열댓 명 와서 엎어지면 주위 사람이 뭐라 합니까? ‘아이고, 복 받았다.’ 하잖아요. 어느 분이 오심, 지금 241 페이지 초월적인 타자와 초월론 적인 타자의 차이점이 뭐냐, 설명하고 있습니다. 초월론적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육신이 있는데 육신에서 자아를 만들게 되면 이 자아는 인간의 욕망을 다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럼 채울 수 없다 하면 채울 수 없기 때문에 채울 수 없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인간의 시간 론에서 미래가 있는 거예요. 미래가 있다는 말은 다 마저 채우지를 못했다는 겁니다. 내 맘에 드는 육신이 아니다 이 말이죠. 내 맘에 드는 몸이 아닌 거예요.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그 미지의 부분은 이렇게 공백으로 남겨둬야 되겠죠.

자, 인간이 있으면 이렇게 인간의 시간 과거 현재 미래 있잖아요. 현재 인간은 어디까지 살고 있습니까? 과거는 살았고 현재는 지금 살고 있고 미래는 아직 왔어요? 안 왔어요? 안 왔죠. 그러니까 과거 현재까지 요 부분이라면 미래는 요 부분만큼 이만큼 공터로 비어놓는 거예요. 여기에 뭐가 들어가는가? 여기에 타자, 다른 말로 하면 남, 타인이 들어가요. 요 타인이 들어갈 때 아무나 들어올 수 있습니까? 자기가 골라잡아요. 골라잡을 때 골라잡는 기준이 뭐냐 하면 과거에 내가 내 욕망에 미흡했던 것을 마저 보충하기 위해서 새로운 타인을 원해요.

요 타인은 과거에 내가 아까 보충이란 말을 사용했죠? 보충이란 말보다 더 실감나는 말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보상, 인간이 하루하루 사는 이유가 뭐냐 하면 보상받기 위해서 삽니다. 보상이 안 될 때는 뭐냐 보상이 안 될 때는 그 비어 있는 만큼 복수를 해줘야 돼요. 그래서 인간은 뭐냐, 보상받기 위한다와 같은 말이 뭐냐 하면 사람은 눈만 뜨면 오늘도 복수 할 꺼리를 찾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게 정 없으면 강아지라도 발로 차야 돼요.

인간은 이 시간 론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인간의 시간이라 하는 것은 이거는 있다 했습니까? 없다 했습니까? 이거는 원래 몸에는 시간이 없어요. 왜 없느냐? 몸 자체가 이게 변하기 때문에 몸 자체가 어제 몸 다르고 오늘 몸 다르거든요.

참 이런 어려운 말까지 해야 되는가 한번 들어보세요. 이건 약간 더 어렵지만 들어보세요. 내가 강둑에 앉아 있다고 봅시다. 강둑에 앉아 있으면 뭐가 보이느냐, 흐르는 물이 보이죠. 강둑에 보면 꽃이 피어있죠. 강둑에 새가 와서 앉았다가 날았다가 하죠. 그걸 보고 내가 아름답다고 참 정겹다고 아름답게 느끼죠. 그럼 거기서 변하지 않는 것은 뭐가 있습니까? 없죠. 다 같이 변하죠. 나는 여기 있고 강물이 흐른다고 생각하는데 강물이 흐르는 게 아니고 강물이 흐르고 있는 내가 같이 흘러가는 거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통속이 되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서로가 같은 장면을 공유하면서 살다 보니까 정답이 없어요. 정답이 없다고요.

지금 강둑에 앉아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면서 아! 아름답다. 하는데 저 뒤에서 ‘너 숙제 안 하나?’ 고함지르면 갑자기 새로운 소리가 들릴 때 갑자기 ‘참, 숙제 해야지.’ 하고 후다닥 그 꿈을 깨운다고요.

내가 만든 이 순간의 현실은 항상 이게 가상현실 이예요. 가상적인데 그런데 가상 없이는 우리는 하루도 가상을 안 만들고 보내는 시간이 없어요. 늘 가상을 만들어요. 그래서 인간은 초월론적으로 이렇게 나 이상 뭔가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어떤 분을 찾고 지금 이 고생하는 세상을 보상할 세계를 그걸 뭐라 하느냐 하면 천국이고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분을 누구로 보느냐, 신으로 부르는데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초월론적 타인으로서의 신, 종교, 기독교, 삼위일체,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하나님과 전부 누가 만든 망상입니까? 내가 만든 망상에 지나지 않아요. 지옥과 천국도 마찬가지고.

지옥의 망상은 누가 가야 되느냐 하면 나한테 못 되게 군 놈은 다 가야 돼요. 만약에 내 사랑하는 자식이 가면 틀려, 나는 지옥까지 따라갈 거야. 항상 모든 천국 지옥도 내가 소설의 주인공이 돼야 돼요. 그러니 이것은 전부 다 망상입니다.

이제 초월론적인 게 뭔지 알겠죠. 초월론적은 인간이 보상심리에 의해서, 인간의 보상심리가 어디서 나왔다? 인간의 육신은 그대로인데 육신에서 시간이 피어나오니까 자꾸 미흡함을 채우기 위해서 미래의 꿈과 비전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 우리 자아라 하는 것은 없는데 자아는 누가 만든다? 요한복음 8장에서 자아는 누가 만든다 했습니까? 마귀가 만들죠. 너희 아비는 마귀다. 하나님은 원래 인간의 몸을 만들어 놨는데 마귀가 거기다 뭘 입혀놨습니까? ‘네 자아는 훌륭하지. 네 자아는 진짜 잘 살아야지.’ 마귀가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빠지고 우리 자아를 만들기 위해서 앞장 세웠던 그 악마와의 영적 투쟁이 되는 겁니다. 그게 초월론적입니다.

그리고 초월적 타자할 때 들어오셨는데 이제 설명해 드릴게요. 초월적 타자를 예를 들면서 제가 화장실에 갇힌 여자분 이야기했죠. 오늘 듣는 사람은 두 번 반복해서 듣는데 화장실에 5일 동안 갇힌 분이 6일 째 살았잖아요. 그런데 그분은 뭘 알았습니까? 화장실 바깥의 현실을 알았죠. 알았으니까 안에 갇혀 있을 때 갇혀 있다는 걸 아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6일 동안 갇힌 그분이 갇힌 게 아니고 그냥 화장실에서 태어나서 화장실에서 학교 다니고 밥 먹었다면 그 사람은 바깥에다 ‘살려주세요.’란 말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죠. 그 사람은 그 안에서 뭘 하느냐 하면 냄새 나니까 뭘 하느냐 하면 초월적 신을 찾는 게 아니고 초월론 적을 찾는 거예요. ‘아마 내가 화장실에 살다가 내가 죽고 나면 좋은 나라 여기보다 더 좋은 화장실에 갈 걸.’ 그건 아까 뭐라 했습니까? 초월론적이라 했죠. 초월신이 아니죠.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의하면 갇혀 있죠. 그 대목 찾아보세요.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모든 걸 죄 아래 가두었다고 돼 있죠. 가두었다는 말이 뭔 뜻인지 모르는 사람 없을 거예요. 가두었다는 말은 빠져 나올 수 있다? 없다? 없다는 거예요. 인간이 길을 잃어버렸으면 길 찾아 나오면 되는데, 죄 아래 갇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회개해도 죄에요. 죄에서 회개하란 말이 아니고 회개하는 그 자체가 뭐가 된다? 죄가 되고, ‘잘못했습니다. 제가 살인했습니다. 간음했습니다.’라고 반성하는 그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거예요.

반성해도 죄고 반성 안 해도 죄고, 다윗이 ‘내가 죄인이다.’ 해도 죄고 다윗이 자기 죄를 모를 때도 죄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에요. 다윗이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고백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여전히 갇혀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는 본인, 반성하는 본인이 약속은 아니에요.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지, 하나님 앞에 눈물 찔찔 흘리는 내가 약속의 자녀는 아니에요. 약속은 오직 한 분,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래서 주께서 건져주면 구원받고 안 건져주면 그대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에게 약속이 들려 왔다고 한다면 약속이 왔을 때는 우리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고 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죠. 우리로 하여금 초월적 신을 모르면서도 그걸 대체해서 우리는 초월론적인 신을 믿고 살았다는 것을 알려주죠. 알려주면 우리가 벗어나느냐?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벗어나지는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있어요. 그 자리에 있고 주님께서 죄에 갇힌 우리에게 주님의 형상을 새겨버리죠.

자, 예를 들면 요거 약간 천박한 예가 되지만 충분히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어릴 때 달고나 하는 것 해봤어요? 설탕에다 소다를 넣으면 부풀어지면 탁탁 치면 뚝 떨어지잖아요. 그걸 뭉개버리면 납작하게 되잖아요. 그 설탕이 밑에서 불을 때면 뜨거워요? 안 뜨거워요? 뜨겁죠. 그러면 우리가 설탕이라면 ‘살려주세요. 이 컵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국자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하잖아요. 주인이 벗어나게 해줍니까? 안 해줍니까? 벗어나기는커녕 소다를 넣고 거기다 새 모양, 별모양, 해서 자, 별 모양 떨어지게 하는 사람은 하나 더 준다, 하는데, 사실은 안 떨어지게 하는 사람 없어요. 다 떨어져요. 아예 문양을 새겨버리죠.

우리로 하여금 건져주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님의 모습을 새겨 버리면 그것이 곧 구원 이예요. 우리는 육신의 성깔, 전혀 죽을 때까지 못 버립니다. 아까 육신의 성깔 뭐라 했습니까? 다 잊어버렸다. 육신의 성깔이 뭐다? 보상심리가 있고 보상심리를 메우기 위해서 바깥에 튀어나올 때 행동은 복수의 기대를 가지고 하는 거죠.

어릴 때부터 아버지한테 늘 잔소리 듣던 아들이 나중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아버지의 소원대로 사법고시 합격해서는 아버지 무덤에 가서 마른 오징어하고 진로소주 가지고 가서 울면서 ‘아버지여, 드디어 아버지 뜻대로 성공을 했는데 이렇게 돌아가시면 어쩌란 말입니까?’라고 우는 것, 드라마 보면 많이 나오잖아요. 이게 뭡니까? 그동안 아버지한테 복수하려고 공부한 거예요. 그걸 아버지 이름으로, 인간은 아버지 이름으로 못 벗어납니다.

항상 인간의 자아는 순수하지 않아요. 주변에서 삽입된 거예요. 온 잔소리들이 다 모여서 내 자아가 된 겁니다. 따지고 보면 집안마다 고장마다 학벌마다 전부 다 그 노림수가 다 달라요. 전부 다 그 사람의 희망이 달라요. 왜, 세뇌를 그렇게 받았기 때문에.

그러나 놀라운 것은 성경에 보면 모든 육체는 다 풀의 꽃 같고 그 꽃은 다 떼버린다는 거예요. 어느 나라 출신이고 어느 민족 출신이고 나이 관계없이 그 꽃은 다 떼버리고 다 쇠하지만 오직 뭐는 영원히 서리라?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결국은 말씀이 우리보다 우선 이예요. 우리 존재보다 말씀이 우선이라는 것을 이사야 40장에 그렇게 예언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철학자가 이런 유명한 말을 했어요. 상처가 존재보다 우선이다. 라는 말을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십자가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다. 이게 십자가 새 언약, 십자가 지기 위해서 예수님 오셨지, 예수님이 어떻게 하다가 실수해서 십자가 진 게 아니고 애초부터 십자가란 상처를 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활동해야 됐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구원하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사도바울이 알았던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아요. 사도바울이 이거 알고 사도가 된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아요. 십자가가 구원하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와 아들 둘 만의 일이 구원하지,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저쪽에서 일을 안 했는데 내가 백날 믿어도 이거는 초월적이 아니고 초월론적이 되죠. 내가 상상한 예수, 상상한 천국 상상한 지옥에 불과하다 이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 맘대로 시나리오 짜고 자기 맘대로 구원 받았다. 안 받았다. 천국 간다. 지옥 간다. 혼자 울었다. 웃었다. 자기 맘대로. 이건 괜히 시간낭비고 소용없는 짓 이예요.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있었던 일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할당이 되고 배급이 돼야 돼요.

제가 대구 강의했을 때 그런 이야기 했는가, 고린도전서 13장의 예를 들었는데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다 했잖아요.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는 이곳이 천국인데 사람은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는데 사람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거기다 두 가지를 보탠다 했죠. 믿음 소망 사랑만 항상 있지 않고 자기의 자존심도 있고 돈도 가져가야 돼요. 자존심과 돈과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을 생각하고 사람들은 교회 나갑니다.

진짜 복음 앞에 나가면 항상 있지 않아야 될 것을 빼는 작업을 해야 돼요. 뭐냐 하면 아까 집어넣은 게 뭡니까? 돈과 자존심은 이게 들어갈 자리도 아닌데 멋도 모르고 들어갔죠. 그러면 목사님 설교 중에서 두 개를 뭐를 빼야 돼요? 자존심을 빼면 자기 명예, 명성 자기체면 다 빼는 거예요. 자기 자랑 질, 자기 간증, 어디 가서 은혜 받은 거 다 빼야 돼요. 자존심 빼야 되고 그 다음에 뭐 빼야 되고? 돈을 빼야 돼요. 왜? 믿음 소망 사랑이 영원하지, 이 두 개는 같이 섞일 요소가 아니잖아요. 이 두 개를 빼버리자 말이죠. 이거 빼는 걸 자기 부인이라 하거든요. 잠시만요. 이거 빼시고 가실게요. 하고 설교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교회 아무도 안 가죠. 그 교회 아무도 안 옵니다. 교회 형광등 전기도 안 들어오고 교회 문 닫죠. 목사들이 교회가 문 닫아야 비로소 그 목사들이 예수님이 보입니다.

교회가 잘 되면 교회가 보여서 예수님은 안 보이게 됩니다. 그 교회는 아까 이야기한 자기 자존심이고, 그 교회에 복음 아는 사람이 들어오면 핍박해서 죽여 버리죠. 그냥 내쫓아버리죠. 자기가 들통 나니까. 그래서 교회는 결국은 교회 자체가 마귀를 섬기는 삼위일체 마귀를 섬기는 그러한 마귀가 자리에 앉아있는 데살로니가 후서에 나오는 사단이 보좌에 앉아 있는 곳이 교회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지난주일 낮 설교에 그걸 가지고 뭐라 했느냐 하면 교회를 보이스 피싱이라 했죠. ‘고객님, 많이 당황하셨어요?’ 하고 돈을 빼먹는, ‘하늘나라 확장해야 돼.’ 하면서 돈을 빼먹고, ‘주의 나라를 섬겨야죠.‘ 하고 돈을 빼먹고, ’너희 집은 잘 살면서 교회는 엉망이다.‘ 하면서 돈을 빼먹고 보이스 피싱 하는 곳이라고 보면 되죠.

그러면 그 교회 다니지 말까요? 아니죠. 다녀야 되죠. 왜 무엇이 보이스 피싱 하는 데니까. 그 모습이 바로 다니는 내 모습을 내 거울처럼 봐야죠. 그들이 하는 짓이 내가 나도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물 위에 자기 얼굴 보듯이 교회 다니면서 그 모습을 봐야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 없으니까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사는 이 모습들이 서로 모여 있어서 예배드리고 있다는 것을 서로 발견해야죠.

그러면 그런 식으로 하면 구원 못 받잖아요. 맞습니다. 구원 못 받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이 와야 그리스도 영이예요. 성령이 없으면 아무리 칭찬받아도 그 사람은 그리스도 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니에요. 로마서 8장 9절,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 십자가 지신 상황을 날마다 되풀이 해줘요. 그리고 찔리신 주님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면 바로 내가 가해자로서 피해 입은 그분이 피해자가 가해자인 나를 용서하는 식으로 건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모든 공로를 오직 주님께만 돌리게 됩니다. 그걸 가지고 믿음 소망 사랑이라 합니다.

그래서 241 페이지를 다시 정리하면 초월론적인 그 세계가 뭐로 바뀐다? 초월적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초월적인 것은 바깥이 이미 있다고 생각한다면 초월론적이 돼요. 초월적이 안 돼요. 초월론적은 그야말로 바깥은 있는지 없는지 몰라야 돼요. 그래야 초월적이 되니까. 결국은 초월적이 되려면 낯선 분이 와야 돼요. ‘당신 어디서 왔어요?’ 마노아란 분 아시죠? 누구 아버지입니까? 삼손 아버지에요. 삼손 아버지에게 천사가 나타났을 때 그 부모가 하는 말이 뭡니까? ‘실례지만 누구시죠?’

그래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진짜 초월론적 말고 종교 말고 교회 일 말고 초월적, 그야말로 바깥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데 누군가 나타났을 때는 어떻게 확인되느냐 하면 그분으로 인하여 나에게 뭐가 유발되느냐 질문이 유발되는 경우가 바로 하나님이 직접 찾아온 겁니다.

우리교인들 보고 오후 예배 때 기도하라 하면 우리교인들 스트레스 돼요. 그런데 그분들이 다른 교회에서는 기도하라면 한 기도 했던 사람들 이예요. 유창하게 기도했었는데 어느 날 우리교회 와서는 기도발이 다 떨어졌어요. 전부 다 사양을 해요. 더 이상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나는 기도할 수 있는데 그 기도는 내가 나에게 질문을 해서 내가 익히 아는 질문에서 난 해답을 이미 알고 있는 가운데 하는 기도기 때문에 다른 교회에서는 자랑 질 하면서 기도한 거예요.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줄~줄~줄~ 나오고 남북통일부터 온갖 것 확장해 주시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해주시고 빛과 소금이 되게 해주시고 날마다 거룩하게 해서 주께 영광이 되게 하시고 온갖 성경구절을 다 동원해서 한 시간, 두 시간 안 말리면 어디까지 갈지 몰라요.

그런데 우리교인들은 논리적으로는 모르지만 직감적으로 아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해답을 아는 상태에서 내가 질문한 거 말고, 내가 도대체 뭐를 질문해야 될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우리 주님 앞에서! 그런데 진짜 기도할 때가 있어요. 뭐냐 하면 주님께서 나를 당황하게 만들어 버려요. 인생을 살면서.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할 때, 어떻게 이 사태를 대난난감, 어떻게 처치할 수가 없어요. 완전히 길이 막힐 때 ‘어쩌란 말입니까?’하면서 나올 때 그 질문은 주께서 던진 질문입니다. 그 해답은 뭔지 몰라요. 그럴 때 기도를 하게 되는데, 결국 내 말은 뭐냐 기도는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기도하게 하시는 기도가 있어요. 이때는 그 기도는 말릴 수는 없어요. 어떻게 대책이 없어요. 대책 없을 때는 일을 주님이 저질러 놨으니까 나는 그냥 붕 떠 있는 상태에서 그냥 내 몸을 주님이 일 저질러 놓은 대로 그냥 내맡길 수밖에 없어요. 떡이 되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시옵소서. 하고 던질 수밖에 없죠. 그 기도, 그 기도는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도가 아니고 정말 앞이 하얘지면서 하는 기도에요.

응답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럴 때 그 기도 응답을 제가 알고 있거든요. 궁금해요? 궁금하면 알려드릴게요. 자식 잃었습니다. 부모 잃었습니다. 지금 결혼이 완전히 깨졌습니다. 날 잡아놨는데 다 깨졌습니다. 교회에 불이 났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남편이 지금 혈액 암에 걸려서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6개월밖에 못 산답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이럴 때 정답을 제가 알려드릴게요. ‘네가 왜 그걸 걱정하느냐?’ 주께서 물으시면 우리는 뭐라 합니까? ‘걱정 안 될 수 없어서 걱정합니다.‘ 이럴 거예요. 그 밑바닥에 뭐냐 하면 아직도 내가 근사하게 더 살아야 된다는 것이 밑에 깔려있어서 그래요. 분명히 성경에서는 자기를 죽이는 자가 산다 했는데 우리는 성경 말씀에 있는 그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오지를 않았어요. 이왕 사는 거 좀 복음으로 믿음 좋다는 소리 듣고 근사하게 하나님 살아있는 걸 본때를 보이면서 야! 믿음 좋다는 소리 들어가면서 이렇게 살고 싶은데 ‘왜 하나님은 내 일에 왜 횡포를 놓습니까? 왜 내가 건전하고 고귀하고 경건 되게 살고자 하는데 주님께서 나한테 도움이 안 됩니까?’라는 그러한 인간의 내면적인 자기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그게 있었어요.

그래서 주께서 사태를 일으켜서 기도 다시 하라. 죽은 자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기 때문에 너도 죽은 자니까 네 인생 앞으로 네가 가꾸지 마, 네가 관리하지 마. 일부러 내가 일으켰어. 네 속에 마귀 들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너는 죄인이야.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너는 바로 그래서 너는 죄인이야, 나는 그 죄를 용서하러 왔는데 너는 용서만 알고 네 죄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용서가 너에게 먹히지 않았던 거예요. 다시 한 번 용서가 먹히기 위해서는 용서를 위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자기 본성의 죄를 알 수 있는 그런 아주 특별한 기회를 하나님께서는 앞이 캄캄한 사태로서 우리에게 주신 거예요.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가락-70이레 논문(계시 공백)131107-29강a -이 근호 목사.hwp (80.0K), Down: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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