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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131108a-히5장7절(투쟁적 형상)-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히브리서

안양20131108a-히5장7절(투쟁적 형상)-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175.116.146.206)

안양20131108a-히5장7절(투쟁적 형상)-이 근호 목사

히브리서5장7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라고 되어있는데 여기 앞뒤가 안 맞는 내용이죠.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죽으시고 난 뒤에 능히 다시 되살아나신다는 것을 아셨다는 이야기입니까? 몰랐다는 이야기입니까? 이미 아셨다는 거예요. 아시면 조금만 참으면 되잖아요. 주사 맞을 때 들어갈 때 아프지만 조금만 참으면 주사기 빼니까 안 아프잖아요. 그러면 그 아픈 것도 못 참습니까? 주님이.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여기서는 아픈 정도가 아니고 그것보다 더 많은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구원이 반드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아픈 소리하지 말고 기다리면 될 텐데 어떻게 기도하시는가 하면,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으로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죠. 자기 구원이 될까? 말까? 확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아버지, 어떻게든 살려주세요.”라는 게 성립이 되고 이미 구원될 절차에 불과한 것을 알 경우에는 가만히 있으면 되고. 그러면 통곡과 구원해 달라는 말은 구원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을 염두에 둘 때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살려주세요! 라는 것은 자칫하면 구원 안 될 수도 있지요? 이런 뜻이다 말이지요. 그런데 이미 구원된 것을 이미 알면서도 살려주세요! 라는 말은 하나의 쇼였어요? 하나의 농담이고 장난 친 거예요? 도대체 예수님께서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요? 지금 히브리서5장에서 이 문제를 예수님에 관한 문제로 국한한 것이 아니고 이 문제를 어떤 문제화하는가 하면, 오늘날 우리 성도보고 같은 취지로 말씀하시는 거예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나중에 천국 갈 것을 믿지요?” “예, 믿습니다.” “구원된 거 맞지요?” “네, 구원된 거 맞습니다.” "그러니 그냥 노세요.“ 이렇게 해야 앞뒤가 맞는데, ”여러분, 나중에 탈락됩니다.“ ”그러면 안 되지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열심히 기도하세요.“ ”예, 탈락되면 안 되니까. 기도 안하면 탈락되지요?“ ”기도 안하면 탈락되지요.“ ”그러면 열심히 기도해서 구원에 성사되도록 애쓰겠습니다.“ 이렇게 돼버리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안 받은 사람이에요? 구원 안 받은 사람이죠.

그래서 사람은 둘 중에 하나밖에는 못 돼요. 구원이 안 됐으면 열심히 애쓸 거고, 이미 구원이 됐으면 애 안 쓸 것이다. 둘 중에 하나밖에 하질 못해요. 구원이 될 줄로 알면서도 열심히 할 필요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생각입니다. 시험에 합격했는데 세상에서 지금 수능 쳤는데, 고3책 들고 공부하는 애는 뭐예요? 재수할 걸 미리 하는 겁니까? 재수한다는 것은 이번 학교 안 들어가겠다는 경우에만 재수하려고 수능 쳐 놓고 미리 공부하라 말이지요. 그런데 수능하고 상관없이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면 공부 왜 합니까? 놀러 다니지. 이게 오늘날 우리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그것밖에 할 줄 몰라요. 그냥 앞일이 확정됐으면 놀 생각만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구원은 누구 좋아라고 하는 구원이에요? 자기 이익 챙기는 구원이지, 아버지 생각은 손톱만큼도 안했다는 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그 대학교 총장이다. 아들은 고3이다. 그것도 아버지의 사립학교다. 이럴 경우에 아버지가 “얘야, 니 요새 공부하기 좋으냐?” “하기 싫습니다.” “내가 총장이야. 내가 주인이니까 니 시험치나 관계없이 이름만 써내면 이미 니는 합격했어. 내 아들인데. 내 학교 못 넣어줄까. 니 전자과 좋아하나? 내가 합격시켜 줄게.” 이렇게 했다고 합시다. 그 때부터 그 애는 열심히 공부합니까? 친구하고 오토바이 타고 띵가띵가하고 돌아다니겠지요. 합격됐으니까.

하나님은 뭘 원하는가 하면, 이미 합격했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합격했다는 소리를 듣고 열심히 공부하는 자식을 원합니다. 그게 구원의 진수에요. 그것을 모범적으로 우리보다 먼저 보여주신 겁니다. 합격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애가 공부하느냐 하면, 자기만 생각한다면 공부할 필요 없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합격해준다는 그 소리를 듣고 난 뒤에는 애가 마음이 바뀌었어요. 그 전까지는 뭐든지 내 좋아라고 내 편한 되로 내 이익 되는 대로 살았는데 아버지가 공짜로 구원해주니까 그 때부터는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이라는 게 중요하지 않고 아버지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를 중요시하는 거예요. 이제 오늘 이 본문 이해되십니까?

예수님은 자기 생각하지 않고 누구 생각한다? 아버지 생각을 한 거예요. 아버지께서 자신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예수님을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따라야 될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모범을 보인 겁니다. 나처럼 해라는 거예요. 나도 이미 너희들처럼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원받은 자에요. 그렇지만 지금 말할 수 없는 탄식과 간곡으로 통곡으로 기도했다 말이지요. 이것은 바로 내가 아들이면서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미 나처럼 아들 된 사람도 나처럼 그렇게 해서 지 편한 데로 살지 말고 아버지 뜻이 무엇인가를 헤아릴 줄 알아야 그것이 진정 천국에서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 맞다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면 그 다음 반발이 또 나와요. “그럼 목사님 그렇게 안하면 어떻게 됩니까? 지옥 갑니까?” 이리 나와요. 그렇게 안한다고 지옥가지는 않아요. “그렇다면 내 하기 싫은 건 안 할 랍니다.” “그래, 니 하기 싫은 건 안 할 랍니다.” 하는 그것이 바로 지옥 가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지가 알아서 믿겠다는 사람 말고, 성령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은 성령이 예수님의 영이잖아요. 예수님의 영을 받았으면 그 때부터 자기 생각보다 무슨 생각이 더 중요한가 하면, 주님의 생각이 더 중요한 거예요. 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을 받았기 때문에. 내 속에 내 마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 마음도 같이 섞여 있어요? 주의 마음도 섞여 있는데 주의 마음이 내 마음보다 우세가 돼가지고 내 마음이 얼마나 내 중심적인가를 지적하시는 그 능력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문제가 뭐냐 하면, 왜 통곡을 해야 되고 열심히 기도해야 되느냐 그 문제가 남아 있겠지요. 그 문제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애굽이죠. 우리의 행동이나 습관이나 방식 이 모든 것은 애굽적인 방식입니다. 천국은 애굽입니까? 아닙니까? 천국은 애굽이 아니지요. 천국은 애굽이야말로 저주 받아야 될 도성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곳이 천국입니다. 아, 요 말 어려운데.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기 책이 두 권 있습니다. 이 책이 천국이고 다른 하나가 애굽이라면 “어느 것이 천국이고 어느 것이 애굽이야?” 하면 “요 책은 애굽이고 요 책은 천국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한 책을 감추어 놓고 “이 책 아닌 거 어디 있어?” 하면 찾겠지요. “너는 애굽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살았기 때문에 애굽사람이야. 천국은 애굽사람 아닌 사람이 가는 거야.”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그 때부터 천국에 살 사람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찾겠지요? 그 찾는 걸 담아서 기도하는 거예요.

우리보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 하면, 아! 이게 천국이다. 하고 아는 척을 해요. 그런데 이걸 숨겨버리면 우리는 우리 기껏 아는 것은 애굽 밖에 몰라요. 그런데 천국은 애굽이 아닌 나라에요. 그래서 이것 아닌 걸 하기 위해서 이런 속성과 더러운 몫이 있을 때는 이게 짜증나야 돼요. 이거 싫습니다. 다른 마음 주세요. 라고 하면서 기도와 간구를 할 수밖에 없어요.

자식이 있다. 자식이 이번에 수능을 쳤다. 점수가 잘 나와야 될 텐데. 이미 가 점수 다 나왔지만. 그러면 그 다음 문제가 뭐냐 하면, 요 점수가지고 지가 원하는 대학 들어가는 것이 남았지요. 그런데 그걸 가지고 기도하는 거예요. 요거 애굽적인 마음입니까? 천국적인 마음입니까? 이건 애굽적인 마음입니다. 천국은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자식도 없어요. 자식도 없는데 수능이 왜 있어요? 천국에. 그런데 우리는 버릇이, 살아온 관습이 애굽에서 시험에 합격해야 애굽에서 마치 나다운 내가 살아가는 이유처럼 보람을 느끼는 것처럼 살아온 것이 온 몸에 익숙해져 버린 거예요. 이 점수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의 준비되신 그런 과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기도를 한다 말이지요. 하게 되면, 기도하는데 아들이 와가지고 “엄마, 그건 점수가 안 된데.”할 때, 우리는 갑자기 어제 이야기한 것처럼 주님이 질문하고 내가 대답하는 게 아니고 내가 스스로 뭘 질문해야 될지 뭘 기도해야 될지를 알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애굽적인 뜻이 차단되는 사태를 맞이하게 되죠. 이 학교도 안 된다. 저 학교도 안 된다. 그럼 우리 애는 대학가고 싶은데 어디 갑니까? 그러면 군에 가야 돼요. 군에도 떨어지면 엄마, 그러면 공군 갈게. 공군은 쉬운 줄 아나? 공군은 그냥 되는 줄 알아요? 7:1이 넘는데. 해병대도 7:1이 넘어요. 카츄샤는 말도 못하고. 그러니까 기도 잘한다고 소문난 엄마 입장에서는 어떻게 기도할 줄 모르죠.

기도할 줄 모르는 그것이 바로 간곡의 내용이고 통곡의 내용입니다. 오죽 기도할 게 없으면 울겠어요? 주여, 어찌하옵니까? 기도를 해야 되겠는데 어떻게 기도할 줄을 모를 때 답답함. 뭐라고 한 소리해야 되는데 무슨 소리를 해야 할지를 모를 때의 답답함. 그게 바로 예수님이 말하는 통곡과 간구의 시간입니다. 그걸 성도만 할 수 있어요. 성도 아닌 사람은 그걸 못하는 거예요. 주께서 다 차단시켜 놓으니까. 이게 넓은 길이거든요. 넓은 길로 가고 싶은데 사실은 돌아서서 넓은 길로 가고 싶어요. 우리는 백날 설교 들어도 돌아서면 또 넓은 길. 내가 성공하는 길, 남한테 칭찬받는 길, 자랑질 할 게 많아 늘어나는 길, 날마다 늘어나는 것 있을 때, 이걸 주께서 전부 다 끊어버립니다. 끊어버리는 그러한 경우 그것이 바로 주의 뜻에 합당한 사람으로 다른 말로 하면 천국 살기에 적합한 인간형으로 변모가 돼가는 겁니다.

그 변모되는 예를 제가 어제 가락강의에서 이야기했지요. 제가 250억이 새로 생겼는데 거기에 대해서 주여, 저보고 250억 부자 돼 가지고 어떻게 천국사람으로 살란 말입니까? 정말 이런 벌을 내리셔도 되는 겁니까? 이런 거. 이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외제차를 4대나 굴리라면 어떻게 굴립니까? 저보고 이런 형벌을 왜 주십니까?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지옥 가는 사람은 왠 떡이고? 하는 사람이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역시 기도의 응답되었군요. 이거 지옥 가는 사람들, 또 한 가지 예를 들었지요. 병들게 기도하니까 병이 낫아 버렸어요. 그러니까 주여, 저보고 어떻게 더 혹독하게 고생하라고 병을 낫게 하십니까? 빨리 죽이지 않고 왜 더 살란 말입니까? 왜 이렇게 병 낫기 있어요. 이렇게 나오기에요? 이런 사람들, 그렇지 않고 기적이라고 병 낫은 사람들 이거 지옥 가는 사람들이에요.

항상 애굽은 누구중심? 내 중심이거든요. 천국은 누구 중심? 주님 중심하지 말고 그것은 허당진 소리 하지 말고 내 중심 아닌 것, 아까 배웠잖아요. 끊어버린다고. 내 중심 아닌데 그게 뭔 줄 모르는 것. 그 기도는 누가 가르쳐줘요? 주님께서 가르쳐주는 거예요. 그 때 그 때마다. 그게 바로 통곡과 기도로 하는 거예요. 결국 제가 하는 말의 결론은 뭐냐, 통곡과 간구의 기도는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성령이 와서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은 기도할 때 탄식하면서 하지요. 그 탄식이 내 탄식으로 전이시키면서 우리보고 성령에 입각해서 기도하시는 거예요. 이야기는 복잡했지만 들어보니까 간단하지요. 간단하지만, 완전히 우리의 발상을 뒤집어야 돼요. 사실은 애굽의 우리는 백날 교회생활해도 그 교회도 애굽인데 이 세상에서 애굽에서 못 빠져나와요. 그러니까 성령이 와서 사태를 그런 식으로 몰아넣지 않으면 우리는 성령에 의한 기도를 할 재주가 없습니다.

주님의 통곡하고 탄식했던 그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은, 성령이 와서 해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예를 하나 들게요. 마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모셨을 때에 마르다 언니는 음식준비에 바빴고 동생은 언니 안도와주고 턱밑에 앉아가지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언니가 보기에도 싸가지가 없지요. 싸가지가 없는 거예요. 싸가지가 없을 때 우리 주님입장에서 보게 되면 누가 주님의 원하는 기도를 할 수 있는 기회의 찬스를 누가 맞이했습니까? 동생입니까? 언니입니까? 언니에요. 싸가지 없는 동생을 보면서 마음에 울분이 생기지요. 그 울분이 생기는 그것이 애굽의 생활을 청산하고 천국의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일부러 주님께서 마련하신 겁니다. 동생이 얼마나 밉겠습니까? 저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때 내가 동생은 저래서는 안 됩니다. 하는 것이 어디서 기어 나온 사고방식이냐 하면, 애굽에서 살던 사고방식의 연장이었습니다. 연속적이었던 거예요.

주님이 와서 이걸 방향을 틀어주지 않으면 언니는 지가 잘한 짓했다고 주님 앞에서 옳은 일 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제부터 오늘 본문 강의의 어려운 거 나오는데 무슨 말인가 하면, 메시아가 우리 보기에 가짜 메시아로 오신 분이 진짜 메시아가 되는 거예요. 그걸 설명하겠는데 자, 마르다 입장에서 봅시다. 마르다가 동생에게 직접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을 경유해서 이야기했습니까? 예수님을 경유해서 이야기했지요. “예수님, 내 동생 좀 나무래 주세요.” 라고 경유했지요. 그러면 마르다 본인은 본인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일치된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니까 경유해서 내 이야기를 전달해달라고 했을 거잖아요.

그런데 누가 마르다 편을 들지 않습니까? 같은 편이라고 여겼던 마르다가 예수님이 마르다 편을 안 들지요. 아사라 말아라, 니 동생은 니보다 더 좋은 쪽을 택했다. 이리 나오지요. 그러면 마르다 자기의 진심과 주님을 위하는 마음에서 나왔던 그 마음까지라도 천국에 합당한 마음이에요? 애굽에 합당한 마음이에요? 애굽에 합당한 마음이지요. 우리는 이 세상이 애굽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애굽의 진수, 애굽의 깊은 맛을 아직도 다 맛을 못 봤어요. 본맛을 다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버티고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애굽의 맛을 더 보라고. 애굽 맛 다보면 우리는 죽어야 돼요. 더 살 이유 없거든요.

아직까지 우리가 그렇게 주님이 싫어한다는 애굽에 정체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주님을 위해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나쁜 짓이 될 줄이야 마르다가 과연 생각했겠어요? 못했지요. 설마 이건 나쁜 짓이 아니라고 생각했겠지요. 그 나쁜 짓 아니라고 생각한 그것이 바로 애굽사상의 연속이란 말이죠. 마리아를 통해서 마르다야, 니가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일러주는 겁니다. 그 잘못 생각한 그 잘못 생각에 입각해서 이 메시아 되는 예수님도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잘못 생각한 거예요. 아니 눈에 보고 있다고 해서 다 옳은 생각을 합니까? 남편 보고 있으면 남편마음 다 꾀뚫러 봅니까? 몰라, 한 20년 살았으면 대충 감은 잡힐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성경만 성경이 아니고 살아가는 자체가 성경의 연속이지요. 우리의 애굽에 있던 사고방식을 천국살기에 합당한 마음으로 바꿔주는데 그런 의미에서 애굽은 아직도 필요해요? 안 해요? 애굽 세상은 필요합니다. 직장생활 몇 가지 잘했어요. 노루하고 잘 놀고 이게 왜 다가 아닌지를 알기 위한 주님의 방석입니다. 만원짜리 방석이라니까. 이 방석 만원한답니다. 우리는 깔아놓은 방석위에서 위를 바라봐야지요. 이거하다가 치우지 마시고요, 주께서 거적을 깔아놨을 때는 그냥 거적 위에 지내세요. 그냥 막 사세요. 또 나왔다. 오늘 또 막 사는 거. 막 사시면 왜 그게 막 사는 게 되는지를 성령을 통해서 알아가게 하시는 겁니다.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어려운 거 하겠습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실 때는 반드시 반 메시아로 오게 돼 있어요. 반대의 엔티메시아로 오게 돼 있어요. 그래야 이 사이에서 뭐가 벌어지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울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것이 그게 하나님께 충성이라고 여겼던 사울이란 사람이 그 당시에 예수님 믿는 사람 잡아 죽일 때 그 사람이 갖고 있던 예수의 이미지는 뭐였습니까? 부정적이었지요. 이건 하나님을 반대하는 이단이죠. 이단은 그냥 두면 안 되지요. 이단을 공격하는 그것이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는 기회가 되니까.

그런데 다메섹에서 누구를 만났습니까? 그냥 몰랐던 예수가 아니고 자기가 반대했던 예수거든요. 그러니까 니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했어요. 핍박. 그 소리를 우리가 들어도 마땅하거든요. 자, 여기서 뭐가 어려운가 하면, 메시아께서 막상 오실 때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반 메시아의 모습을 가지고 보는 겁니다. 왜냐 하면, 이 세상사람 전체가 애굽을 형성하니까 애굽은 자체적으로 뭘 만들어내는가, 메시아도 만들어내요. 하나님도 만들고 여호와도 만들고 좋다는 건 다 만들어내요. 그러니까 그들은 유대교라는 것을 만들었잖아요. 이들이 메시아사상을 이미 알고 있다 말이지요. 오기만 와봐라, 우리는 대번에 알아본다. 자신만만했을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십자가 충돌이 일어났다는 말은 바나바냐, 예수냐 할 때 그들은 바나바를 선택했고 예수님은 버렸습니다. 따라서 버림받을 만했기 때문에 버린 거예요. 현재 우리는 애굽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이게 우리가 가짜 예수를 진짜 예수로 착각해서 믿을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한 거예요. 굉장히 농후한 겁니다. 뭐만 없다면? 십자가 사건을 잊는다면. 십자가 사건을 빼버린다면. 십자가 사건을 치워버린다면. 지금 모든 교회처럼. 십자가 알고 이제 잊어버리세요. 이젠 부활의 세계입니다. 이리 나올 때는 우리는 도저히 구원받을 길이 없지요. 왜? 우리가 아는 예수는 삼위일체는 다 가짜니까.

그러면 메시아의 반대하는 모습이 직접 와서 우리로 하여금 분통을 터트리게 만드는 사태가 일어나야 되겠지요. 핍박이라는 것이 성립되어야 되니까. 그러면 한 번 이야기해 봅시다. 예수님 당시에 있던 십자가가 그 다음에 되풀이 될 때는 어떤 형식이다? 나로 인하여 핍박받는 모양새로 우리에게 찾아올 때 진짜 우리의 가슴을 노크한 메시아입니다.

우리로부터 핍박을 받는. 그 핍박받는 이유는 뭐냐 하면, 바로 우리가 생각했던 그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아주 자신만만해요. “당신은 무조건 아니야.” 했는데 그 분이 도마에게 뭘 보여줍니까? 창 자국을 보여주지요. 못 자국 보여 줄 때, 도마가 그 창 자국, 못 자국을 보고 도마가 느낀 점이 뭡니까? 예수님 이 분이 맞다! 라가 아니라 이 창 자국 못 자국이 잠길 때에 결국은 주님이 이렇게 당했다는 것은 그 곁에 누가 없었다는 겁니까? 자기들이 없었지요. 자기는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다 도망쳤지요. 세상권력이 무서워서 다 도망쳤잖아요. 도망쳤는데 도망친 철없는 양을 위해서 이사야53장에 보면, 양은 흩어지되 양은 제 갈 길을 알지 못했지만, 목자가 흩어진 도망친 양을 위해서 대신 죽었던 흔적이 창 자국 못 자국이잖아요.

그렇다면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더 이상 도마는 다른데 가겠어요? 안 가겠어요? 갈 때는 자기가 살 수 있다고 해서 갔는데 도망 가봐야 이미 죽은 존재라는 사실을 창 자국 못 자국으로 알겠지요. 그래서 십자가를 성령을 받아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 이상의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잊을 수 없고 버릴 수 없습니다. 버리기는 커녕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요.

십자가라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도망치는 놈이 나, 나는 도망쳤고 그나마 나는 내 살기 위해서 그냥 변변치 않은 내 목숨 건지기 위해서 나는 삼십육계 줄행랑 쳤는데 그래도 불구하고 탓하지 아니하시고 도망친 나를 위해서 대신 저주받으시고 이제는 천국 가는데 어떤 장애물도 앞에 두지 않게 다 모든 일을 조치하신 분, 그 예수님을 우리는 성령 받은 사람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바로 그 분을 위해서 사는 것, 그것을 가지고 사도바울은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그렇게 정의를 내렸습니다. 쉽게 말하면, “니도 참 특이한 인간이다. 어디 그걸 믿냐?” 이런 식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이제 그걸 믿어지니까 세상에 어떤 부귀영화 같은 거 이제 눈에 안 들어오지? 나도 그런데 너도 그렇지?” 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을 창세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면, 창세기1장에는 안 나오지만 그 뒤에 나와요. 창세기 3장에 나와요. 이게 강의 제목이 됩니다. ‘투쟁하는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들어왔다는 말은 투쟁할 것도 없이 거기에다가 앙꼬를 쏙 집어넣으면 된다. 우리 생각은 그렇거든요.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드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거기다가 쏙~쏙~ 집어넣으면 되잖아요.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었고 아담도 그렇게 알고 있었어요. 하나님의 형상이 임해가지고 우리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이제는 내가 모든 걸 판단해가지고 먹고 싶으면 먹고, 따먹기 싫으면 안 따먹고, 내 맘 대로하고 내 이름도 내가 짓고 코 길다고 코끼리, 앵앵한다고 앵앵이 지 맘대로 이름 지을 수 있는 자격도 있고 만물의 영장이고 만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이라 하거든요. 그것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막상 이 하나님의 형상이 빠져나가면서 그냥 빠져나가는 게 아니고 쏙 들어갔다가 그냥 빠져나간 것이 아니고 빠져나가는 그 경로가 인류의 역사라는 그러한 모양새로 빠져나갈 때 인류의 역사는 무엇의 역사입니까? 투쟁의 역사고 그 투쟁의 역사는 창세기3장에 의하면 뱀의 후손과 여자 자손의 투쟁의 연속이었어요.

하나님의 형상, 오실 메시아는 투쟁하시는 인간과 투장하시는 메시아고 그 결과를 자기 몸에 창 자국, 못 자국 십자가로서 사건을 자기 몸에다가 자기 몸 자체를 십자가 사건 화시키는 모양새로 우리에게 찾아드시는 그 형상만이 주님의 형상입니다. 누가 그 분을 비참하게 만들었습니까? 바로 우리가 인간이란 이름의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그런 식으로 천하게 천시하며 대우했던 거예요. 실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 현실입니다.

우리는 뭐든지 괜찮은 거 같으면 쏙 집어넣고 소유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날 멱살 붙들고 같이 니가 죽는지 내가 죽는지 투쟁하자, 투쟁하는 그런 식으로 우리 속에 들어올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데 창세기3장 이야기는 우리 속에 쏙 집어넣으면 우리는 성경도 안 보고 성령이 와서 쏙 집어넣으면 구원받습니다. 이것만 생각해요. 그런데 실제 하나님은 구약이란 긴긴 투쟁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로서 우리에게 적용시킬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사는 한평생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와 늘 싸우는 싸움의 흔적, 그리고 구약의 있는 모든 그 투쟁의 역사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도 내가 겪어야 될 나의 팔자를 미리 그런 식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미리 보여줬습니다. 남의 이야기 아니라는 이야기죠.

성경 볼 때 구약 볼 때, 남의 이야기로 보지 마세요. 다 우리 이야기입니다. 십계명 준 것은 우리에게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그걸 어기라고 주신 거예요. 그걸 어기라고. 어기라고 주셔놓고 내내 되풀이 되는 것이 너희들이 이 말씀을 지켜야 하느니라, 그럴 능력이 너희한테 있느니라, 말씀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니 코 앞에 있기 때문에 충분히 지킬 수 있느니라, 그렇게 이야기하셔요. 신명기30장14절,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행할 수 있느니라. 이 말은 행할 수 있다는 이 말도 우리는 행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는 받아줘야 돼요. 왜? 행할 수 있느니라, 라고 출발해서 니는 인간도 아니라는 것을 까발리는 거예요.

행할 수 있느니라, 라고 되는 대상은 인간일 경우에 되는 거고, 우리는 자기 스스로 인간이라 여기고 “그렇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이 정도까지 설득한다면 저는 설복당하겠습니다.” “예, 저도 고백합니다. 주께서 이룰 수 있느니라 하면 예,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지키겠습니다.” 그래서 망한 나라가 누굽니까? 이스라엘 망했어요. “못 지킨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지킬 수 있다고 우리는 외치겠습니다.” 그래서 망했어요.

율법이 더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입을 막고 죄를 더하게 함이라, 모든 것을 입을 막고 저주아래 있게 함이라. 로마서 3장19절,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들이 몰랐던 것은 그거였습니다. 자기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는데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육신밖에 없거든요. 육신과 인간과 말씀이 만나면 나는 할 수 있다가 돼요. 그런데 육신이 된 상태에서 말씀을 보게 되면, 못 지킨 게 맞구나! 가 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구원하려면 인간을 뭐로 바꿉니까? 육신으로 바꾸어서 말씀을 갖다 되게 되면 아! 우리는 지킬 수 없다. 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십자가 지고 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라 할 때, 십자가 지고가라 할 때는 가라했으니까 분명히 우리가 할 수 있기 때문에 가라 했으니까 십자가 지고 갈 수 있습니다. 라고 나온다면 그것은 자기가 육신인 것을 인정 못하는 사람이에요.

“십자가 질 수 있습니다.” 라고 할 때 그 뒤에 나오는 베드로의 반응은 이렇습니다. “제가 죽을 때까지 라도 주님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되는 거예요. 왜? 자기는 들은 구석이 있기 때문에. 자기 십자가 지고 날 따르라 했기 때문에. 야, 이거 봐라. 주님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이 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내가 평소에 구원받았다는 티를 내는 건데 그게 뭐냐, 십자가 지고 나를 따르라니까 십자가 지고 주와 함께 죽겠습니다. 하니까 주께서 하는 말이 “아사라 말아라. 니는 죽어도 구원 못 받아.” 왜? 처소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럼 베드로는 어떻게 합니까? 진작에 이야기하시지. 이제 와서 아이 씨~ 이제 와서 들통 날 것 다 들통 내고 이제 와서 이렇게 하면 내가 부끄럽잖아요. 사람이 잘 한다 잘한다 할 때는 격려도 해줄 만도 한데 이것은 잘한다 할 때는 마치 된양하다가 결정적일 때 완전히 사람을 꿇어 박아버리면 나의 자존심은 어디서 찾습니까? 자존심이라 하는데 북한으로 말할 것 같으면, 존엄성. 이 존엄성을 어디서 찾습니까?

그리스도가 반 그리스도, 반 메시아, 엔티로 와요. 반 메시아로 오는 이유는 인간을 육신으로 바꾸기 위함입니다. 육신으로 바꿔줘야 되는 겁니다. 그 내막을 알아봅시다. 다윗언약 때는 인간이 자기가 인간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우기게 하는 것을 방치를 해요. 다윗언약 때는 다윗언약이기 때문에. 다윗언약은 십자가 진 언약은 아니에요. 다윗에게 약속만 준 언약이죠. 그래서 다윗의 상한심령이라 하는 것은 알고 그 다음부터 다윗언약이 뭐냐 하면, 니 몸에서 나온 자식이 왕의 자손이 되고 아들이 되고, 조건이 있어요. 니 몸에서 난 자식이 아들이 되는 조건은 말씀을 온전히 지키면 아들로서의 왕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잘린다고 돼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솔로몬부터 해서 그 뒤에 말씀 온전히 지킨 사람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다윗언약에는 자손을 준다 해놓고 자손 값하는 자손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에 보면 드디어 다윗의 자손 나타났지요. 예수님이십니다. 제가 지금 다윗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를 두는 이유가 뭐냐 하면, 다윗언약시대에서는 내가 죽었다고 아직까지 드러날 시점은 아니에요. 잘못됐다. 참, 우리가 부족하구나! 정신 차려야지. 그게 허용되는 시대가 다윗언약시대에요.

그런데 십자가 딱 지고 난 뒤에 십자가 바라보는 순간에 이것은 우리한테 어떤 가능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는 정도가 아니고 아까 사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처럼 그냥 핍박했다는 것, 우리가 기껏 할 수 있는 것이 한 평생 주님을 핍박할 수밖에 없어요. 핍박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거예요. 도망 안치고 머물러 있는 양을 위해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내 걸음아 살려라 도망치는 양을 향하여 “그래, 도망쳐라, 내가 니 대신 죽을게.” 라는 분이 이사야 53장 6절에 나오는 그 말씀 아닙니까?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그러니까 도만한테는 그 창 자국, 못 자국이 그렇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바보야, 바보. 정말. 나쁜 놈은 나입니다. 이런 주님을 모르고 이용할 생각만 했구나! 아이고, 이 나쁜 놈!” 내가 나쁜 놈인 줄 모르고 지가 좋은 인간인 줄 알고 주님하고 살면 좋은 인간이 더 좋은 인간 될 줄 알고 이랬던 거예요.

주님 만나면, 교도소 수갑 채워 질질 안 끌려가더라도 수갑 안 채워도 이미 교도소에 있는 사람 못지않게 더 나쁘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이에요. 거리에서 몸 팔고 있는 그 창녀 아줌마보다 내가 더 나쁜 여자고, 강도보다 내가 더 나쁜 강도고, 그걸 바로 십자가의 창 자국 보면서 아는 거예요. 이것은 어떤 짓을 해서 나쁜 짓이 아니라 그냥 나빠요. 어떤 나쁜 짓을 한 게 아니고 그냥 나빠요. 그냥. 주님 생각할 때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주님의 순종과 아픔이 뭐였는지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거죠. 간구기도 제목 방금 들었지요. 기도 제목이 뭐라고요? 이 세상에 같이 살았던 그 분, 예수님, 예수님이 느꼈던 그 느낌을 저도 같이 느끼게 하옵소서. 느낌 아니까. 같이 느끼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당한 수모를 같이 당하게 하옵소서. 환난 가운데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뭘 낳는다? 소망을 낳잖아요.

주님 당했던 그 서러움, 저도 당하게 해 달라, 그 기도. 그 기도가 바로 주님 가신 코스에 같은 코스를 가고 있다는 근거입니다. 그래서 혹시 여러분 집에 그럴 리 없겠지만, 여러분 자녀가 사법고시 합격 했다든지 갑자기 유산을 50억을 남겨 줄 때,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주여, 주의 아픔에 참여하게 하옵소서. 돈 세어가면서 주여, 내가 부자를 통해서 주의 아픔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다른 사람은 가난해서 아픔 속에 들어가지만 막상 주어지면 그 사람은 그 쪽 사태고, 내 쪽 사태는 부자 된 사태기 때문에 부자를 통해서라도 간구하오니 십자가를 알게 하옵소서. 부자 되어 십자가를 안다? 그게 더 힘들지요? 부자가 천국가기 더 힘드니까.

하지만, 주께서는 가능하다고 믿고 간구해야 돼요. 이게 바로 이미 구원받았지만 애굽의 삶을 청산해야 돼요. 끊어야 돼요. 그래야 천국 가는 삶이 되니까.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시키는 겁니다. 그 중간에 바로 예수님이, 우리가 아는 메시아가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메시아 안다고 하는 자로부터 핍박받는 반 메시아 이미지로서 우리에게 오신 건데, 그 사이에 뭐가 있었다? 투쟁이 있었고 그 투쟁에서 승리한 분이 주님이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는 지금도 내 애굽적인 가짜를 끊으시고 진짜 메시아가 우리에게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믿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그 투쟁은 지금 우리하고 투쟁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마귀와의 투쟁이거든요. 아까 우리 집사님이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는데 누가 서울대학교에서 와서 건강음료 판다 했지요. 저한테도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지요. 그거 팔지 마시고 그냥 성경공부 참석하세요. 이 분들이 천국을 안 가려고 하는 모양이라. 자기는 시음회라고 하는 거예요. 시음회라 하지 말고 참석하세요. 라고 했어요. 어떻게 예수 이용해가지고 물건 팔아먹겠다는 거, 우리는 그들에게 뭐라고 비난하지만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보세요. 그게 다급한 문제잖아요. 그 사람들이 기도하면 어떻게 기도하겠어요. 물건 많이 팔게 해달라고 기도할 게 아니겠어요. 바로 그런 기도 하지 않게 해달라고 통곡해야 되는 기도가 바로 이거다 이 말이죠.

주님이 왜 아팠습니까? 물건 못 팔아서 아팠습니까? 예수 이름으로 환경운동하고, 예수 이름으로 북한 쌀 보내고 주님이 북한 쌀 보내려고 이 땅에 십자가 졌습니까? 주님 능력 같으면 아예 북한 자체가 미국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쌀 보낼 필요도 없어요. 그 쪽에서 쌀 줄 수 있는 나라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능력은 내가 이 땅에서 보냈던 아픔에 참여하지 아니하면 천국 못 간다는 겁니다. 좁은 길이 거기에 있거든요. 거기에 바로 우리가 그런 것을 느끼고 같이 동참할 수 있도록 그래서 주님께 고마운 거 알라고 우리보고 이런 기도를 하는 겁니다. 언제? 주께서 육체로 계실 때.

지금 우리는 뭡니까? 육신으로 있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과 동일한 기도를 해야 된다. 그래서 그 가운데서 주님은 순종, 주의 아버지 뜻이 내 뜻보다 더 중요한 걸 배운 것처럼 지금도 우리는 그 기도를 통해서 우리도 내 뜻과 아버지 뜻이 무엇인가를 기도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게 돼 있지요.

그러면 요 문제 끝나면서 내가 마지막 한 마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럼 기도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는 문제가 나오겠지요. “그러면 주님의 아픔에 동참하는 기도를 어떤 식으로 하면 됩니까?” 라는 문제있겠지요. 그런 기도는 아까 지나가면서 했는데 분명히 우리가 못 합니다. 성령께서 해주기 때문에. “그러면 성령 아니면 못 하는데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까?” 기다리시면 애굽의 뜻을 차단시키는 사태가 벌어질 거예요.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이 벌어질 거예요.

그럴 때는 기도할 게 뭔지도 모르면서 오는 답답함, 이것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도케 하는 순간입니다. 기도응답에 대해서 제가 언급했습니다. “죽으라.” 이게 응답입니다. 니가 자꾸 기도하는 이유는 니가 살고 싶다는 니 심보를 드러내는 것뿐이 안돼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주님께서 “죽어라, 하는데 뭘 또 이럴 수가 있어.” “제대하는데 뭘 또 기도해? 제대하라는데.” 사람이 지금 곧 죽겠다는데 무슨 다른 거 이렇고 저렇고 할 일이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우리 애가 어떻고. “니는 죽어라, 니는 죽고 애는 나한테 맡기고 니는 죽으면 돼.” 이럴 때 애한테 기도할 게 뭐가 있어요? 그러면 그런 응답을 직접 받게 되면 기도 끝나고 기분 좋지요. 기분 날아가게 좋지요. 자책하면서. 바보같이. 가만 보니까 내가 한 내가 고민했던 모든 것이 밑바닥에는 하루라도 더 살고 싶은 내 욕심인 걸, 내가 사실은 애굽이 더 좋아서, 더 개기고 싶어서 하는, 그러한 본심인 것을 내가 이제야 알았다는 그 기쁨.

9,10절에 봅시다.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사도바울이 히브리서 쓰면서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다고 한 것은 앞에 뭘 언급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의 칭함을 받았다 했지요. 내가 성경 볼 때 반차를 좇는 할 때, 자꾸 반찬, 밑반찬이 생각나요. 멜기세덱의 밑반찬? 하나님의 구원의 밑반찬? 그게 멜기세덱? 반찬이 그 반찬이 아니고 족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족보이야기는 제가 어제 이야기했습니다. 창세기5장에서 아담의 족보이야기 나왔지요. 그 족보가 하나의 전부다 기관차의 객실이라면 객실과 기차의 연결은 뭐라고 했습니까? 죽었더라, 죽었더라, 의 반복이잖아요. 죽었더라, 의 반복이에요. 그러니까 이 멜기세덱의 반열이라는 그 멜기세덱과 연결돼 있는 사람은 그 기차의 마디 마디처럼 그 마디에 살아도 결국은 릴레이 할 때 앞에 있는 선수한테 자기 몸을 맡깁니까? 자, 이 몸 가지고 가라 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그 앞에 있는 선수가 뒤에 있는 선수 몸 들고 가려하면 더 무거워.

몸 대신 뭘 들고 가면 돼요? 바톤을 들고 가면 되는데, 몸을 들고 가려하니까 지 인생 살아야 되고 손자인생까지 다 살려 하니까 죽을 지경이에요. 바톤만, 뭐만 받으면 되느냐 하면, 죽었더라만 받으면 돼요. 우리가 아버지한테 받을 유산은 하나밖에 없어요. ‘아버지 돌아가셨다.’ 이것만 받으면 돼요. 아! 아버지 날 낳아 죽으시고 어머니 날 낳아 죽으시니, 이것만 받으면 돼요. 그 다음에 아버지 따라 나도 죽겠구나! 이것만 받으면 돼요. 이게 시조입니다.

아버지 날 낳아 죽으시고, 어머니 날 낳아 죽으시고, 나는 어디가 죽지....그 죽음을 바톤으로 삼아서 죽음을 전달할 때 고 죽음이 실 내용 없는 죽음이 되면 안 되지요. 그건 허무한 거니까. 그 내용에다가 뭘 집어넣는다? 멜기세덱을 집어넣으면 멜기세덱은 이 땅의 사람인데 사실은 하늘의 사람이라는 것. 그것이 죽었다, 라는 포장지 안에 실내용으로 담기게 되면 우리는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 된다는 복음의 원리에 도달되는 우리는 매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설국열차를 타고 가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게 애굽 사람들은 살아야 되겠다는 그 가운데서 우리가 꼭 쥐고 있는 것은 ‘죽었더라.’를 꼭 쥐고 있어요.

누구한테 복음 이야기하면, 이걸 집어내어 “죽었더라.” 나 이런 사람이오. 나는 의사요가 아니라 나는 죽었더라.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 그 사람만이 멜기세덱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이 땅에서는 죽었지만, 하늘에서는 살았더라.

우리가 내미는 “죽었더라.” 라는 말은 “지금 하늘나라에 내 생명이 있습니다.” 라고 내미는 골로새서 3장 3절의 말씀을 내미는 거와 동일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멜기세덱 이야기를 서서히 끄집어내는데, 그것은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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