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같은 분노 131120
납같은 분노 131120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납같은 분노(에스겔 22:17-22)
이근호
13-11-20 21:02
납 같은 분노
2013년 11월 20일 본문 말씀: 에스겔 22:17-22
(22:17)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2:18)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내게 찌꺼기가 되었나니 곧 풀무 불 가운데에 있는 놋이나 주석이나 쇠나 납이며 은의 찌꺼기로다
(22:19)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너희가 다 찌꺼기가 되었은즉 내가 너희를 예루살렘 가운데로 모으고
(22:20) 사람이 은이나 놋이나 쇠나 납이나 주석이나 모아서 풀무 불 속에 넣고 불을 불어 녹이는 것 같이 내가 노여움과 분으로 너희를 모아 거기에 두고 녹이리라
(22:21) 내가 너희를 모으고 내 분노의 불을 너희에게 불면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녹되
(22:22) 은이 풀무 불 가운데에서 녹는 것 같이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녹으리니 나 여호와가 분노를 너희 위에 쏟은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대하여 ‘찌꺼기’라고 하십니다. 알맹이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을 찾는 일반 사람들에게 이런 식으로 나오시는 신을 골라라면 아무도 이런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선택하는 신은 자신들이 비는 대로 응답하시는 신입니다. 자신을 책망하고 꾸중하는 신이라면 사람들은 그 신을 기피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다른 신과는 특별납니다. 세상의 모든 신은 인간들이 선택하는 신인 반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도리어 하나님이 선택해서 이스라엘이 등장하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운명이란 이스라엘이 관여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을 의도적으로 찌꺼기 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은 곧 찌꺼기입니다. 알맹이를 곱게 드러내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주변에서 달라붙다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의해서만 분리되어야 하는 그런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정작 인정해야 될 하나님이란 자신들의 하나님이라고 우긴 그 여호와가 아니라 도리어 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때, 비로소 참된 신을 만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귀한 메시아와 한데 엉겨 붙었다고 여겼는데 실은 영구히 붙은 것이 아니라 떨어지기 위하여 임시로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 차이를 차이답게 드러내는데 개입하시는 그 하나님의 모습이 그동안 이스라엘이 미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진면목이 됩니다. 빌립보서 3:8-9에 보면,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잃어버림이 없이는 그리스도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잃어버릴 것은 바로 사도가 평생에 통해 귀하다고 여긴 바로 그것입니다. 그가 사도가 되기 이전에 그는 따로 귀한 것이 자기에게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귀하게 여긴 것으로 인하여 진짜로 귀한 것을 천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귀한 것과 귀하지 않는 것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마태복음 7:1-2에서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서 그 언질을 주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는 곧 그 어느 인간도 예수님 앞에서 평가할 입장에 있지 않다는겁니다. 사람이 누구를 평가할 때는 그 평가대상에서 자신은 쏙 빼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그는 그 누구도 비판할 자격자가 되지를 못합니다. 마태복음 6:28-29를 보게 되면,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누렸던 부귀영화는 모든 인간들의 부러움의 최극점에서나 나타날 것들입니다. 솔로몬이 받은 축복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냥 부러워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을 목표로 매진하게 만듭니다. 생의 의욕을 제공하는 계기가 됩니다. 솔로몬의 성공의 기준이 되기에 솔로몬이 누렸던 그 영화의 간격을 가지고 사람의 가치를 측정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영광과 멀리서 사는 자들은 버림받은 존재요, 가까이 근접했으면 가치받을 만한 인물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들에 핀 백합화가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 낫다고 하십니다. 이로서 솔로몬을 이상형으로 삼고 사는 그 계열의 모든 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한꺼번에 지적받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을 사모한다는 것은 결국 그 목표점 획득에 방해되는 모든 것들이 본인의 결정에 의해서 제거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제거대상 중에 이미 예수님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전혀 귀한 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도리어 개인의 출세의 방해물로 분류되면서 제거된 그 메시아가 진정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감히 이 영광과 비교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 나라의 멸망은 바로 이 과정을 전개하는 중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귀한 것과 귀하지 않는 것은 분간하지도 못하고 도리어 반대로 여긴 그 자들을 찌꺼기라고 지적하시면서 멸망시킬 때, 바로 모든 인간들이 이 유다나라와 더불어 같이 망해야 함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새로운 영광으로 복귀할 주님의 나타나심 과정의 일부로 편입됩니다. 은이 은답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찌꺼기 속에 둘러싸여서 보이지 않아야 하고, 그리고 맹렬한 불길로 인해서만 찌꺼기와 은이라는 금속이 뚜렷하게 드러날 수 있다면 찌꺼기는 마땅히 찌꺼기로서의 역할에 감지덕지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7:36-38에 보면 그 예가 하나 나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여인의 자리는 찌꺼기의 자리입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만 드러내신다면 그것으로 감지덕지하는 자리입니다. 성도란 이처럼 자신이 내놓은 그 어떤 행동에 대해서 평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평가만 듣는 자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고서는 “화로서 망하게 되었다”고 외쳤습니다.
즉 자신이 누구를 판단할 입장이 아니라는 겁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거룩에 직면한 순간, 그는 자기 존재를 무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레미야나 에스겔 선지자는 이러한 영광을 다음과 같은 식으로 받아드립니다. “하나님, 이 무지하고 교만한 백성들이 받는 징벌을 저에게 담당시켜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이제 신약에 와서 이 죄많은 여인은 눈물로 예수님을 씻어냅니다. 많은 용서받았기에 많이 사랑하는 중입니다. 자기도 자신에 대해 평할 입장이 못됨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합니다. 십자가 그 피흘리심 앞에서 우리는 모든 자의식을 내려놓습니다. 이것이 참 이스라엘의 역할입니다. 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예수님은 주님으로서 복귀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만 고귀하게 드러내신 식으로 다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11-21 22:53
66강-에스겔22장 17-22(납 같은 분노)13112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2장 17절에서 22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83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2:17-2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내게 찌끼가 되었나니 곧 풀무 가운데 있는 놋이나 상납이나 철이나 납이며 은의 찌끼로다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다 찌끼가 되었은즉 내가 너희를 예루살렘 가운데로 모으고 사람이 은이나 놋이나 철이나 납이나 상납이나 모아서 풀무 속에 넣고 불을 불어 녹이는 것 같이 내가 노와 분으로 너희를 모아 거기 두고 녹일찌라 내가 너희를 모으고 내 분노의 불을 너희에게 분즉 너희가 그 가운데서 녹되 은이 풀무 가운데서 녹는 것 같이 너희가 그 가운데서 녹으리니 나 여호와가 분노를 너희 위에 쏟은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보고 하는 이야기가 “너희들은 용광로 속에 있는 귀한 금속을 뽑아내기 위해서 같이 덩어리로, 귀한 금속도 아니면서 불순불로 붙어있는 처지가 내 백성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얻고자 하는 그 귀한 금속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조치를 하게 되는데 그 조치란, 장인들이 용광로에 불을 붙여서 얻고자 하는 은, 여기서는 은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 은을 얻기 위해서 은이 아닌 것들을 떼어낼 필요가 있겠지요. 그 떼 내는 방법은 맹렬한 불길에 녹이는 것이겠지요. 이것을 그대로 자기백성인 유다백성에게 그대로 적용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백성이 은인가? 은은 아니고 은에 붙어 있는 찌꺼기, 불순물로 너희를 취급해서 진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데서 너희를 떼 내겠다고 선지자를 통해서 자기 백성에게 언급을 합니다. 장인들, 대장장이들이 풀무에 넣어서 은과 불순물을 분리하는 작업은 사람들이 광석을 다루면서 하는 방식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면 주변에 있는 바벨론 나라를 보내기 전에 먼저 바벨론 나라에 의해서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집결시킵니다. 19절에 보면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다 찌끼가 되었은즉 내가 너희를 예루살렘 가운데로 모으고.”라고 되어 있어요.
역사적으로 이것을 어떻게 실시하시는가 하면, 예루살렘은 나중에 점령당하게 하고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제외한 주변의 마을과 도시들을 침략을 하게 되면 거기 있는 사람들이 기껏 피신한다는 것이 예루살렘에 피신을 하게 되니 자연적으로 예루살렘에 모이게 되겠지요. 마치 사냥감 몰 듯 예루살렘이 모아놓고 그 예루살렘에 불을 질러버리면 그들은 다 타 죽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통해서 그렇게 하시겠다는 겁니다. 21,22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모으고 내 분노의 불을 너희에게 분즉 너희가 그 가운데서 녹되 은이 풀무 가운데서 녹는 것 같이 너희가 그 가운데서 녹으리니 나 여호와가 분노를 너희 위에 쏟은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나님께서 진짜 얻고자 하는 그 은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가 동반되지 아니하면 절대로 얻을 수 없다는 원칙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자, 우상과의 차이점이 뭔가를 봅시다. 요새 우상 같으면 정월대보름에 뜨는 달이고 연 초에 빌러 몰려가는 정동진에 떠오르는 태양 같은 것이겠지요. 부적도 그렇고 하여튼 빌 수 있는 요소는 다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우상, 정성을 다해서 알 수 없는 신에게 빌 때 그 신이 음성을 내기를 “이제 너희를 찌꺼기로 사용했다.”고 한다면, 아마 그것을 미리 알려준다면 ……, 어떤 사람이 달을 보고 비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제가 하나님의 뜻을 좀 알거든요. 달보고 비는 당신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저주할 것입니다.” 라고 한다면 달보고 비는 사람이 이럴 거예요. “저주하는 신은 내가 안 믿으면 되고 내가 선택 안하면 되지. 나는 그냥 나한테 복주는 하나님을 순수하게 믿고 꾸준히 빌 뿐이다. 저주하는 하나님을 나는 아예 선택하지 않으면 그만이다.”라는 겁니다.
우상의 특징이 뭐냐, 자기 맘에 맞는 신을 자기가 알아서 선택했다는 그것이 시작이 돼요. 내게 딱 맞는 신을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에요. 그게 기존의 모든 종교와 복음과 가장 차이나는 점입니다. 이것을 누누이 설명하고 수 천 수만 번을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제 말을 못 알아들어요. ‘이 교회 아니면 다른 교회 가지.’ 교회는 선택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 복음 말고 다른 복음, 십자가 없는 복음 들으면 그만이다.’ 십자가 없는 복음은 우리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에요.
만약 ‘나는 십자가 믿는 복음을 선택했다.’이렇게 한다면 그것도 가짜입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선택해서 믿을 대상이 아닙니다. 자꾸 왜 자기가 선택을 하려고 해요? ‘나는 가까운 교회를 선택했다.’ 당신이 뭔데 교회를 선택할 권리가 있어요? 교회는 이 세상에, 온 인류에 한 군데 밖에 없는데 그것을 선택합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했습니까? 이삭이 하나님을, 야곱이 하나님을 선택했습니까? 진짜 하나님을 아는 사람 같으면 “나는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나를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알고 있는 그 예정대로 그냥 밀어붙일 겁니다.”라는 고백만 나올 뿐이에요.
뭘 선택하고 뭘 교회를 골라잡아요? 그러니까 이 에스겔 말씀도 백날 설교해봐야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물론 이해못하라고 이 말씀을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주는 의미는 “찌꺼기가 되어다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존재의미입니다. “제발 쓰레기가 되어다오.” 오늘날 우리를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유는 “제발 예수 그리스도 옆에 붙어 있는 쓰레기가 되어다오. 그래서 너와 예수님께서 어떻게 분리되는가, 그 분리되는 과정 속에서 네가 진짜 하나님을 느끼게 될 것이다.”라는 겁니다.
내가 선택한 예수, 내가 선택한 행동, 종교, 이런 것들이 얼마나 나로 하여금 쓰레기답게 만드는 요소였든지. 내가 선택한 교회, 내가 선택한 종교, 내가 선택했다는 이 자체가 “나는 쓰레기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증거로서 차후에 소급해서 우리에게 그 남은 인생을 통해서 풀어주시는 거예요. “이러니까 쓰레기지. 이러니까 쓰레기야.”라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존재가치라 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의해서 쓰레기 되기 위해서 그들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민족입니다. 유다도 그렇고요. 이 쓰레기는 단순히 집단적으로 “우리는 쓰레기다.” 하는 이것은 구약 때의 이야기고요, 신약에 오게 되면 이 집단적인 쓰레기의식이 우리 내부에 들어옵니다.
우리의 내부에 들어와 버리면 물론 그 중간과정에서 예수님이 오십니다만, 그 내부에 들어와어 버리면 이제는 “내가 곧 쓰레기입니다.”라고 되는 거예요. 누가 쓰레기라고 말할 입장이 못 되는, 내가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피 흘림 앞에서 창 자국과 못 자국 앞에서 “내가 바로 쓰레기입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울을 찾아왔어요. 그것도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울을 찾아와서 만나서 사도되게 만들었습니다. 그 사도된 바울이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왜? 그 전에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나다’ 하는 것은 정말 이것은 나 자신이 나답지 않은 것이고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것이고 내가 누군지를 모르면서 안다고 여겼던 그것, 그 자체가 쓰레기로 취급당할 때, 취급하게 만들 때 비로소 그 사람의 눈에 띈 것은 나보다 예수님이 더 귀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은이라면 나는 그 은의 가치를 가리고 훼손시키면서 그동안 들어붙어 있었던, 그러면서도 내 자랑만 하고 세상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야 만족하는 쓰레기 같은 짓들을 하면서도 그것이 자기가 잘난 줄 알았지요.
왜, 그리스도가 오기 전이니까. 예수님을 만나기전이니까. 사울이라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예수를 선택하니까 자기는 예수를 선택하지 않고 여호와 선택한 것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동시에 여호와를 선택하고 여호와를 잘 믿으려면 예수님을 선택한 자를 잡아 족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그가 진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쓰레기가 쓰레기인줄도 모르고 자신은 뭔가 일이 잘 되어가는 것처럼, 뭔가 정상적인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천국가고 있는 것처럼 여겼던 것이 발각되고 발견되었지요.
그 뒤에 나오는 고백이 뭐냐, “나는 배설물입니다. 나는 죄인의 괴수입니다.”라는 언급을 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 에스겔 22장에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찌끼고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따로 들어있다고 이야기하는 이 말씀이 신약성경에 와서 사도바울에게 하나의 사례로, 그런 경우를 보여주는 예로서 이미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22장의 이야기를 옛날 과거이야기로 여겼던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모든 말씀을 완성함으로 말미암아 이 에스겔 22장의 이야기가 오늘도 유효하다는 사실을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새롭게 해석하면서 우리 자신이 바로 찌꺼기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지요.
이것이 사도바울만의 고백이 되면 안 되겠지요? 오늘날 구원받는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보편적인 고백이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 와중에서 주님께서는 “네가 바로 에스겔 22장의 그 쓰레기다.”라는 것을 언급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7장에서 그 당시 유대인보고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상당히 문장이 복잡한 논리로 엮여 있지요.
간단하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네가 누군가를 언급할 때, 예수님이 이렇다든지 언급을 할 때 나 예수가 너희 앞에 등장하고 네 앞에 어떤 타인이 등장할 때 그 사람을 보고 뭔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우리가 쓰레기임을 드러내는 하나의 계기, 하나의 경우가 된다는 겁니다. 우리 앞에 어떤 타인이 어른거릴 때 우리는 평가하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 평가에서 본인을 빼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평가에서 자기는 빼버리고 남의 행위만 보이는 겁니다. 그러면 이런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6장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굉장히 알기 쉬운 이야기인 것 같은데 굉장히 난해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금으로 둘러싸여 살았던 최고의 축복받은 왕으로 지칭됩니다. 인간으로서는 그처럼 호사하며 살수 없을 만큼 최고 정점을 찍으면서 모든 영광을 누렸던 왕이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에 대해서 “그것도 옷이야? 그것도 귀한 거야?”라고 할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면, 아무리 인간이 똑똑하다 해도 솔로몬이 이미 정점을 찍었잖아요. 그렇다면 그 솔로몬이 했던 그 길에서 솔로몬 뒤에 오는 어떤 인간도 솔로몬의 그 코스에서 이탈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못하다고 지적을 한다면 그것은 솔로몬만 지적받는 것이 아니고 솔로몬을 부러워하고 솔로몬이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이상적인 축복된 사람이라고 그리워하는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이런 지적을 받아야 마땅한 겁니다. “참, 솔로몬 좋겠다.” 이번 주말인가부터 대구 인터블고에서 공항면세품 중에서 명품들을 최저가격 할인에 들어갑니다. 대구MBC에 광고 떴어요. 무슨 똥인가, 하여튼 명품브랜드를 다 파는데 30만원부터 시작한다는 거예요.
그럴 때 서울이나 대구의 중심가 길거리에서 명품 가방 들고 간다든지 또는 아줌마들 동창회에서 명품 들고 나오면 들꽃하나 꺾어가지고 와서 “그런 무슨 똥인지 뭔지 명품보다 나는 이 꽃이 더 예쁘다.”라고 할 여성동지 분들이 이 세상에 안계십니다. 그런 분이 없어요. 집의 비싼 가구에 명품 옷 명품 가방 걸어두고만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은 솔로몬을 지적하지만 우리는 솔로만만을 추구하면서 오늘도 살아가고 있어요. 이미 우리 자신은 그것이 정상인줄 알고 남들 그렇게 사니까 당연히 그렇게 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 때문에 무시당하고 우리한테 천대받는 것이 있어요. 그게 들풀이고 한 송이 백합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입으로 믿는 것 말고 진짜 예수 못 믿는 이유는 우리 노선이 이미 확정되어 있어요. 솔로몬이 이미 우리 삶의 목표요 모델 케이스입니다. 이미 노선이 확정된 노선이기에 그 솔로몬이 되는데 장애되고 방해되는 것을 다 제거하다 보니까……, 솔로몬이 은이고 솔로몬이 보석이니까 내가 솔로몬처럼 부귀영화 누리는데 방해되는 것을 우리는 찌꺼기처럼 여기거든요.
우리가 모든 것을 분류하는 판단자체가 이미 내 중심, 솔로몬 중심으로 정해놓은 이상 우리 손에 의해서 떨어져 나간분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진짜 예수를 못 믿는 겁니다. 나의 판단, 나의 결정, 이것은 이미 우리의 모델케이스가 솔로몬으로 정해져있어요.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거리감, 내가 얼마나 솔로몬을 따라잡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고 또는 잘 되면 자긍심도 느끼는 겁니다.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는데 참 제가 보기에는 좀 이상하게 보였어요.
아줌마 세 명이 나와서 하는데 이런 기자회견을 했어요. “삼성은 책임져라.” 삼성서비스센터에서 12년 근무했는데 나중에 보니 삼성전자제품 고쳐주는 서비스센터는 삼성그룹소속이 아니었으니까 삼성이 책임지라는 거예요. 자기들은 속았다는 겁니다. 내가 결혼할 때 내 남편은 삼성서비스 센터직원, 곧 삼성그룹에 속한 직장으로 알고 자기는 결혼했는데 지금은 이혼하고 싶다는 거예요. 알고 보니 속았다는 겁니다. 삼성서비스센터지 삼성은 아니었다는 거지요. 애 셋 낳았는데 한 달 160만원 벌이로는 못살겠다는 거예요. 비수기에는 160만원 나오고 성수기에는 400만원 받는데 성수기 때 번 돈 비수기에 다 쓰다 보니 돈도 못 버니까 자기는 이혼하고 싶다는 거예요.
삼성이 솔로몬이었습니다. 그게 기자회견할 내용이 되는지? 속았다니? 진짜 삼성직원이었다면 그 아줌마하고 결혼했겠어요? 그걸 생각해 봐야 되거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아! 너는 찌꺼기다.” 이 에스겔 22장 말씀을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 자신이 내 출세와 내 영광과 내 성공에 방해되는 것들을 우리는 찌꺼기라고 단정 짓고 하나하나 떼 내고 있는 그런 와중에 있어요. 다시 마태복음 7장을 말씀 드릴까요?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그 말은 “너는 이미 남을 비판하는 가운데서 네 본색을 노출하게 되어 있고 노출된 너 자신은 주님보시기에 비판할 가치도 없는 존재로서 오히려 너 자신이 비판받아야 될 대상인 것을 완전히 드러내고 있는 중”이라는 말입니다.
해결점이 무엇인가? 비판하지 말까요? 그러면 솔로몬 잊어버리고 주님처럼 이 땅을 방랑하다가 굶어죽으면 그게 주의 가는 길입니까? 여기서 이사야와 에스겔의 차이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선지자하기 전에 하나님을 봤어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너무 놀라서 기겁해서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순간 이것은 뭐가 날라 가버렸느냐 하면, ‘저분이 천사일까? 저분이 하나님일까?’ 자기가 판단한다는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뭘 판단한다는 자체가.
이게 이사야방법입니다. 이사야 방법 먼저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에스겔이나 이사야나 사도바울이나 전부 다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는 것은 공통적입니다. 나타날 때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너무 눈부셔서 누가 해답을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옆에 있는 사람이 있다가 말려도 안 들었을 거예요. “가만있어. 나는 망해야 돼. 나는 망했어. 나는 죄인이야.” 자동적으로 나와요. 너무나 엄청난 광채 앞에서 자기 자신이라 하는 것은 없어져도 그만인 존재에 불과한 거예요.
태양을 보고 눈이 간 사람이 촛불보고 눈부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말이 안 나올 거예요. 김 수희라는 가수가 부른 애모라는 노래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한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설 수 없는 사람아.” 한 마디 말이 모자라서 다가 설 수 없는 사람아, 뭔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말을 해야 하는데 너무 사랑이 벅차니까 그 벅찬 사랑을 표현할 한 마디가 모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말을 뗄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사야입니다.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없어요. 말을 하는 자체가 건방지기 짝이 없어요. 표현한다는 자체가 주제넘은 행동 같아요. 그게 이사야입니다.
그러면 에스겔은 어떤가? 에스겔은 그런 광채로 나타난 하나님이 아니고 에스겔은 오히려 우리들의 이 세속적인 것으로 인하여 멸망되어버린 주변사람들,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 같은 유다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자기만 잘났다 하고 자기만 옳다고 깨춤 추는 인간들이 맹렬한 바벨론 군대에 의한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서 신음소리 내고 통곡소리 내는 것을 보고 에스겔은 “주여, 차라리 내가 받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식으로 아까 이사야가 한 고백을 그대로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이 당하는 저 죄의 벌을 차라리 제가 받겠습니다.” 그게 예레미야애가 아닙니까? 눈물을 흘리면서. “세상에, 하나님이 싹쓸이 하는 것도 모르고 뭐가 그리 잘났다고 까부는가? 세상사는 이것이 뭔데? 하나님이 나타나면 모든 것이 전부 다 싹쓸이 되어야 할 저주받을 것들이! 이 쓰레기 같은 것들이. 도토리 키 재기 하듯이 잘났다, 못났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차라리 그 벌을 제가 받을 것이니 저에게 퍼부어 주옵소서.”라고 하는 것이 예레미야 에스겔 방식입니다.
아까 이사야방식은 개인적으로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할 말을 잊어버리는 거예요. 마태복음을 거쳐서 사도바울에 오게 되면 사도바울도 “주여,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그 대화를 통해서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렇게 심판하시는 이유는 심판이라는 그 작업, 그것을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풀무 불에 금속을 녹이는 작업이라고 보는데 모든 것을 녹이는 그 작업을 통해서만, 바로 그 부정적인 작업을 통해서만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은 복귀가 됩니다.
죽음을 통해서 생산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복귀가 되는 겁니다. 모든 사람에게 천시 받았던 그 예수님이 성령을 받은 사람에게만 복귀가 돼요. 영광스러운 주님으로. 이게 성도입니다. 이게 성도에요. 그것도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고 반복해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주님께서 복귀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행동들을 하게하고 모든 행동을 하게 하면서 그 행동들은 죄로 드러나게 하시고 그 다음에 평가는 주님이 평가하게 만드십니다.
그게 바로 솔로몬의 입은 모든 영광보다 이 들꽃이 더 귀하다는 평가를 이제는 우리보고 하라는 거예요. 네가 바로 들풀이고 네가 바로 백합이라는 겁니다. 그동안 너희들은 솔로몬을 더 좋아했는데 바로 그랬던 우리로 인하여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같이 함몰되어 알게 될 때 십자가에 이미 우리는 죽었고 그 죽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고 행동하게 하시면서 그 행동은 죄로 드러나게 하시고 평가는 용서의 평가를 주셔서 의인되게 하시는 것, 그것이 주님의 방식입니다.
그런 방식이 누가복음 7장 37절에 있습니다.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이것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다 모아놓은 거예요. 찌꺼기가 찌꺼기답게 행동하는 겁니다. 자기를 찌꺼기라고 귀한 소식을 알려주신 예수님 앞에서 찌꺼기로서의 태도를 보이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 자신의 복귀에요. 그걸 보고 주님께서 이렇게 합니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다시 말해서 그 여인을 통해서, 예수님은 그 여인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말씀으로 예언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비웃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속에 내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안계시면 지옥입니다. 간단한 문제에요. 지옥이 무엇인가?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지 않으면 지옥이에요. 무엇이 천국인가? 자기보다 예수님이 나타나면 그것이 천국입니다. 예수님이 나타나면서 우리는 감사하게도 너무나 고맙게도 우리가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사실, 에스겔 22장을 다시 일깨워주는 말씀 자체가 다시 살아나는 혜택을 우리가 누리게 된다면 예수님과 우리 사이는 에스겔 22장으로 다져지고 연결된 그런 사이입니다.
이스라엘 그들이 예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왜 선택했을까요? 장차 예수 그리스도 드러내라고 선택한 겁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우리가 뽑힌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그 값을 해야 됩니다. 사도바울 같은 고백이 나와야 돼요. “그리스도를 위하여 나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 버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를 제거하라는 말이 아니고 자기를 부인하도록 주께서 인생가운데서 그걸 느끼게 하는 거예요.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지 말고 주의 평가에 맡기되 자신의 행동에 대한 평가도 우리가 내려서는 안 됩니다. 내려봤자 모든 행동은 죄 많은 찌꺼기 같은 행동밖에 안 나옵니다.
설교를 하든지 헌금을 하든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평가는 주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네가 바로 의인이다. 용서받은 자가 천국에 간다.” 그 소식을 우리는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의 발 앞에 있던 그 여인의 자리가 지정된 우리의 자리인 것을 고맙게 여겨야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자신이 누군지 몰랐는데 주님이 찾아오고 보니 우리가 주님을 핍박했던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앎이 주님이 주님으로 드러나기 위함이고 말씀이 말씀대로 드러나기 위한 조치인 것을 저희들이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