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3. 10. 25) 2강
광주 강의(2013. 10. 25) 2강
이름 : 서경수(IP:218.159.161.162)
광주 강의(2013. 10. 25) 47-2
“빛이 있으라”는 그 말씀 자체가 이미 창조의 개시가 되는 겁니다. 모든 창조에는 말씀이 개입 안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엄마가 날 낳았다.’ 아니지요. 하나님 말씀이 우리 속에 개입되어 있어서 우리가 말씀을 위반하면 죽게 되어 있고, 말씀을 지킬 경우에만 살게 되어 있는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든 인간은 죄인이잖아요.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담이 범죄해서 죄가 우리에게 들어왔고, 죄가 왕노릇 해서 모든 인간은 죄의 지배를 받지요. 이것을 우리가 악마의 멱살을 쥐고 “왜 그렇게 했어?”하고 따지지 마세요. 이것이 하나님 창조의 일환입니다. 예수님 중심의 창조의 일환이에요.
창조는 원래 그렇게 되어야 하고, 그런 사태가 발생해야 해요.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한 후에는 다시 평정이 되지요. 한 번 흔들고 난 뒤에는 다시 평정이 되잖아요. 우리 나름대로의 정리, 정돈은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언약을 통해서 이분이 왕으로 등장해요. 세상을 A판과 B판으로 되어 있다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 봅시다. 밑에 깔려있는 A판은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지요. 말씀을 위반했기에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위반하면 멸망한다.’는 그 말씀은 살아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만 붙들면 돼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40:8).” 이 말씀은, ‘너를 의지하지 말고, 너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그 말씀(언약)을 붙잡으면 영원하다’는 것이지요. 주의 말씀이 창조의 중심이기 때문에 내가 잘되기 위한 창조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중심이기 때문에 ‘말씀이 지금 나를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멸망시킬 때 여기에 왕이 있습니다. 왕이 멸망과 더불어 죽어요. 그러면 백성들은 잘 있는가? 오늘 본문 45장 10절에 보면 “너희는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밧을 쓸지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에바’는 고체를, ‘밧’은 액체의 양을 측정할 때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신 후에 그들이 망한 이유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은 지중해와 요단강 사이에 있지만 실제로 역사 속에, 지면위에 이렇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에스겔 45장 말씀은 거짓인가? 왕이 등장하게 되면 이것이 실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돼요.
그러면 여기 인간 왕(다윗의 후손들)은 진짜 왕과 인간 왕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악역을 맡은 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다윗 언약에 있는 왕은 이쪽 왕과 비교해 볼 때 완전히 말씀대로 순종하는 왕으로 이 땅에 등장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떡은 내 몸이고, 이 잔은 내 피다.”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의 일입니까, 십자가 달리기 전의 일입니까? 죽기 전의 이야기죠. 그러면 떡이 몸이 되고, 잔이 피가 되는 것은 그 때 뿐이겠네요. 그 때만 적용되는 것으로 끝나잖아요. 그런데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이 떡을 떼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어요.
여기서 왕과 이 사이가 무슨 사이인가 하면, 왕이 만약 큰 치마를 입었다고 합시다. 보통 치마는 자기 하체를 덮는 정도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왕의 치마는 자기 택한 백성을 다 덮을 수 있어야지요. 그러면 그 치마 속에서 떡은 계속해서 몸이 되고, 잔은 피가 되겠지요. 그만큼 큰 치마를 입을 왕이 있느냔 말입니다.
따라서 왕은 어떠해야 된다? 자신의 살과 자신의 피를 끊임없이 계속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역사에서. 왕의 일이 자기 몸과 피를 주는 것인데,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시대에 관계없이 계속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왕인데, 이 진짜 왕과 기존의 인간 왕을 비교시켜 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가 하는 행위가 계속 타인에게 제공이 가능한 왕과 자기 행위가 자기에게만 제공되는 그런 왕과의 차이를 하나님은 보여주시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효과가 우리한테 전달되는데 있어서 “이 떡은 내 몸이고 이 잔은 내 피다.”고 했는데, 이것의 방향을 바꿔봅시다. 떡이 몸이 되고, 잔이 피가 된다는 말은 유월절에 하신 성찬식인데, 이 효과가 이 때 뿐이고, 이제는 몸이 있고 피가 있잖아요. 그러면 몸이 떡이 되고, 피가 잔으로 달라질 수 있다면 예수님의 몸은 이 떡과 잔을 통해서 계속해서 효과를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요.
개신교는 ‘이 떡이 몸이 된다. 이 포도주가 피가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초기 천주교는 ‘화체설’ 몸으로 변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이 떡은 곧 몸이고, 이 잔은 곧 피다.’ 이렇게 나와요. 나중에 루터와 칼빈이 교리를 손질하면서 이 부분을 손대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루터가 잘못 손대서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고, 칼빈은 “떡이 예수님 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한 조건 하에 몸이 되고, 잔은 성령이 임할 때 피가 된다.”고 했고, 이것이 오늘날 개신교나 장로교의 교리가 되었어요. 그런데 쯔빙글리는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위클리프도 비슷하게 주장했고.
이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한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다른 사람이 나와 동일한 꿈을 꿀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은 이런 무례한 짓을 했어요. 자기 신하에게 자신이 꾼 꿈을 말하고 해석하라고 했지요.
‘예수님은 선한 분이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착하게 살았다.’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만 훌륭하면 우리 구원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만 훌륭하면 예수님만 구원 받아요. 우리는 구원이 안 돼요.
45장 13-14절에 “너희의 마땅히 드릴 예물이 이러하니 --- 이스라엘 윤택한 초장의 떼 이백 마리에서는 한 어린 양을 드릴 것이라.” 이런 말씀이 있어요. 자, 왕이 하는 행동이 자기 백성에게 효과가 미칠 수 있는 그 중간 통로로 왕과 제사의 만남이 성사됩니다.
여기서 왕이 제사 드리면 효과가 있는데 내가 제사를 드리면 효과가 없어요. 어떤 인간의 제사도 효과가 없습니다. 그러면 왕이 제사를 드린다고 하지 말고 원래 제사의 원형에 부합되는 왕이 등장할 때 제사의 효과가 생기는 겁니다. 제사의 제물을 누가 바칩니까? 백성들이지요.
백성들은 제물을 바침으로 제사라는 공통의 장에 참여하지요. 그러면 제사장은 누가 됩니까? 왕이 제사장이 되어서 제사에 참여하지요. 그렇게 해서 여기서 나오는 효과는 여기에 참여된 백성과 왕이 다같이 누릴 수 있는 공통의 영역이 마련되는 겁니다.
제가 대구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유월절 규례가 나오는데, 장자를 죽이란 말입니까, 살리란 말입니까? 모든 집 장자가 다 죽어요. 그러면 우리 집 장자를 살리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린 양을 잡아 문설주에 그 피를 발라야지요. 그러면 내 장자가 살잖아요.
이것은 장차 오실 왕과 제사의 결합에 의하면 그것은 옳은 해석이 아니에요. 애굽 장자들이 죽는 것처럼 이스라엘 장자 역시 죽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낸 죽음의 사자가 오게 되면 양은 죽고 장자는 살았잖아요. 살긴 살지만 더 이상 이 집안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로 바뀌어 버립니다. 장자 개념의 변화가 발생해요.
장자 개념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자체가 예수님 중심의 창조 행위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창조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써 살았다고 여기는 장자를 하나님이 데려갑니다. 그러니 이러나저러나 장자는 없습니다. 아예 우리 집에는 장자가 없는 거예요.
장자가 없으면 차자는 있습니까? 없어요. 왜냐? 둘째가 맏아들이 되면 또 없어져요.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그 집에는 뻥 구멍이 뚫렸어요. 어제 가락교회에서 구멍을 설명하면서 이런 예를 들었어요. 솜사탕 만들 때 보면 막대기로 저으니까 구름같은 것이 모여서 분홍색 솜사탕이 되지요.
도대체 저게 어디에서 나오는가 보면 구멍에서 나와요. 주인은 발로 페달을 밟아 막 돌리는데 구멍에서 먼지같은 것이 나와요. 그 먼지가 모여서 막대기에 붙어 솜사탕이 됩니다.
아까 밑(역사)의 판을 A판이라고 했습니다. 구원 받는 위판(예수님 중심의 판)에서 역사의 판에다 구멍을 뚫어요. 왜 구멍을 뚫는가? 구멍 난 자리에 인간의 본성이 들어가요. “우리 집에 장자 있다. 우리 집은 하나님 믿는다.” 이런 것에 구멍을 뚫어요. 그러면 “나는 ~ 있다.”가 “나는 아무것도 없다.” 즉 나는 구멍 뚫린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때, 그 구멍에 맞춰서 위에서 채워서 우리를 천국에 데려갑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오라.’ 그런데 이 구멍 뚫을 때 발생되는 것은 ‘내가 아닌 나’가 됩니다. 그 순간 강력한 악마의 몰골을 가집니다. 신이 내 것을 빼앗을 때, 내게 제일 중요한 장자를 빼앗을 때 우리는 갑자기 악마의 앞잡이로 돌변합니다. ‘왜 하필이면 저를---’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Why me?’ 가 아니고 자기 손으로 자식을 죽입니다. 지젝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잡는 계시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하나님의 지시를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율법의 참뜻은 남에게 알릴 수 없는 것이다. 예초부터 나에게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십계명을 해석하고 성경 전체를 해석하고 싶지만 그것은 구멍 뚫려야 할 대상이고 진짜 계명의 해석은 항상 내가 구멍 뚫리면서 비로소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대상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나의 증거물이기 때문에, 내가 나 사랑의 증거물을 자식이나, 부동산, 돈에다 놓고 있는 거예요. 사람은 자기가 우상화 되지 아니하면 살맛이 없어요. 나에게 꿈이 있고 소망이 있고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 있을 때 힘이 나요. 사람은 희망이 없으면 힘이 안 나요.
사람은 사는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그 이유를 겨냥해서 하나님이 구멍을 뚫어줘야 우리가 마귀가 돼요. 그동안 우리가 고이 감춰놓은 나의 정체, 이것을 주께서 빼앗을 때 우리는 극렬히 하나님께 반항하고 분노하면서 “이것 없으면 나는 하나님 안 믿을 거야!” 이런 고백을 하나님이 기다린 거예요.
그런 고백을 들을 때 여기서 살과 피가 비로소 의미를 생성하게 돼요. 지금 내 것이 따로 있는데서 떡과 잔을 먹어도 의미 없어요. 결국 남는 것은 내가 좋은 것뿐이에요. 이건 종교생활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드릴로 구멍을 뚫어, 예전에는 그것이 그렇게 소중한 줄 몰랐는데 막상 구멍이 뚫리고 보니 내 입에서 거침없이 하나님에 대한 도전과 저주가 나옵니다.
우리 어머니는 평소에 욕을 하시는 분이 아니었는데 이제 치매에 걸려 이상한 행동을 해요. 남의 농작물을 막 뽑아서 집에 두었는데 그것을 가져가니까 욕을 하고 난리를 치는데, 그 때는 자식도 없어요. 내가 뜯어놓았는데 그것을 왜 가져가느냔 말이지요.
동네 사람들이 제게 찾아와서 “목사님 모친이 우리 밭에 와서 호박도 따고, 무도 막 뽑아 가시는데, 제발 좀 말씀 잘 드려서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해 주세요.”라고 해요.
우리에게 구멍을 뚫을 때 우리한테 억한심정이 있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뚫어버렸어요. 그곳에 우리를 같이 참여시키려고 우리에게도 구멍을 뚫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그릴로 구멍을 뚫어버렸어요. 구멍을 냈다는 것은 창조 이전의 상태가 되는 거예요. 창조 이전 상태가 되면 악마가 지옥 가도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여자의 후손으로 뱀의 후손을 작살내는 마지막 무기입니다.
“악마야!” “왜요?” “네게 없던 시절로 돌아가게 해 줄게.” “이미 있는데 없는 시절로 돌아가다니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이 지상에서 죽여 버렸어요. 예수님은 창조의 원형인데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은, 모든 창조는(마귀, 천사, 인간 모두) 죽어버린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죽음의 대상이 된 거예요. 그리고 그 중 사흘 만에 예수님을 건져냄으로 그동안 있었던 모든 창조는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본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연습게임이었어요. 본 게임은 예수님이 부활함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지요. 애녹이나 엘리야가 첫 열매가 아닙니다. 첫 번은 예수님이 정하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피조물이고 예수님은 창조주이기에 창조주의 첫 번째 부활의 열매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기존의 창조는 어떻게 됩니까? 쇠퇴해야겠지요. 히브리서 1장 10-11절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이 구절에서 ‘멸망할 것’이란 말이 이해가 안 됐어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그리고 ‘주는 영존할 것’이라고 했는데, 왜 멸망 없이는 영존이 안 되는지 --
주님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영존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그냥 쭉 계시면 그것이 영존 아닙니까? 처음부터 영원토록 계시면 그 자체가 영존이잖아요. 그렇다면 지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멸망할 이유가 없잖아요. 같이 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꼭 멸망해야 영존이 드러나는 이유가 뭐냔 말이지요.
주 개념을 이루기 위해 절차상, 주는 창조의 완성이 되어야 하고 그 창조는 멸망하기 위해서 창조가 되어야 하고 그 멸망이라는 기초가 없으면 안식이라는 완성의 기초가 마련되지 않습니다. 멸망이 재료가 되어야 해요. 음식은 으깨져야 주스가 되듯이 부서져야 돼요. 멀쩡한 것이 있으면 안 돼요. 다 깨져야 하는데, 주께서 우리를 으깨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겉은 날마다 후패해야 돼요. 후패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겉만 신경 쓰게 되고 속(사람)에 대한 관심이 떨어집니다. 우리의 속은 말씀이 살아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바쁘다 보면 말씀을 잊어버려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 자신을 주님이 벌리시는 창조에 집어넣기 위해서 멸망으로 이끕니다.
멸망의 원칙과 법칙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아들만 압니다. 그런데 구원될 자에게는 성령을 보내셔서 그 정보를 같이 공유하도록 혜택을 주십니다. 이게 축복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만 아는 그 사이에 감히 우리가 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양을 맡기기 전에 먼저 이야기했어요.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어요.
그 때 베드로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수동적으로 바뀌지요.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아십니다.” 만약 누가 오 목사님께 “목사님은 예수 믿습니까?” 라고 한다면 오 목사님의 답변은 이렇게 나와야 해요. “‘나는 예수 믿지 않는다’고 말하라고 예수님이 시켰습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주께서 일러주신 것이 바로 주님이 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사랑도 수동적이어야지 내가 능동적으로 주를 사랑하면 안 돼요. 주께서 사랑했기에 그때부터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던 그 상황이 이해가 돼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야 될 이유가 납득이 됩니다.
예수님을 주로 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지만 그 모든 영광을 포기하시고 죽기까지 낮아지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 다음이 뭡니까? ‘아버지께서 십자가에 죽은 아들을 높이사 그 아들을 주가 되게 하심으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빌립보서 2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북치고 장고치고 다 했어요. 이것을 적용하시는 것은 성령님이 알아서 다 했어요. 우리는 그냥 태어날 때부터 아무 영문도 모르는 채 갇혀 있다가 나왔는데, 그 때 우리는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합니다. 비로소 주님을 만났다는 말이지요. 이제야 나의 원형을, 내가 주님의 창조 작업에 참여된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인 이유는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이라는 단절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제 남은 문제를 해결합시다. 왕이 일으킨 효과가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는가? 단절입니다. 끝까지 우리를 밀쳐내요. 단절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해서 신의 세계를 생각하겠지요. 말씀이 있으니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지요. 나아가고자 하는 그것을 끝까지 주님께서 단절시키는 겁니다.
끝까지 밀이붙입니다. 어디까지? 세리같은 고백이 나올 때까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바리새인은 “나는 금식했습니다. 나는 십일조 했습니다. 구제했습니다.”고 했는데 이것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이고,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밀어붙이신 거예요. 단절이지요. 죄인이기 때문에 ‘나는 수동적인 자리에 머물러야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왕이 제사드려서 받은 의로움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수동적으로 주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도 만만치 않아요. 나의 것을 빼앗으면 화내고 대항합니다. 우리는 악마의 앞잡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은 계속해서 “나도 착한 일 했습니다. 나도 할 수 있습니다. 나도 교회 오래 다녔고 성경도 압니다.”라는 것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변화가 주어져야 됩니다.
그 변화가 주어질 때 여기에 뭐가 있는가 하면, 우리 쪽에서 공격을 했기 때문에 남긴 흔적이 있어요. 그게 바로 찢겨진 살이고 흘려진 피입니다. 인간의 손에 의해 죽임 당한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을 가지고 우리 얼굴에 대고 밀어붙이니까 우리는 내가 한 짓을 알잖아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가 다가오니까 내가 한 짓들이 그대로 보여지고 우리는 뒷걸음치며 물러설 수밖에 없어요. 나중에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지요. 욥기를 보세요. 초반에 욥은 얼마나 당당합니까?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사태를 만나게 하십니까? 제가 뭘 잘 못했습니까? 이렇게 하시면 하나님이 실수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친구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다가 막상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니까 욥은 궁지에 몰립니다.
그전까지는 “내가 아픕니다. 내가 받는 고난은 너무 억울합니다. 내가 이런 벌을 받을 만큼 죄 지은 기억이 없습니다.”하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재를 뒤집어쓰지요. 이사야의 경우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주님이 이사야를 밀어붙이니까 이런 소리를 했어요. ‘저주가 나에게 합당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새로운 계시가 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습니다. 철학자 고르기아스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남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으면 그것은 없는 것이다.” 왜냐? 진리는 서로 내통해야 되는데 내가 남에게 설득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리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거지요.
고르기아스는 파르메니데스에게 배웠어요. 그 사람은 “존재는 없다.”고 했어요. 왜? 있다 할지라도 남에게 이야기할 수 없으면 없는 거예요. 그럼 너는 뭔가? 나는 없음으로 있다는 거지요.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런데 십자가 언약에서는 죽음만 있어요. 피만 있어요. 인간은 일단 살아있기에 궁금한 게 많아요. 아담이 살아있다고 여겼으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 장차 오실 예수님을 위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은 그냥 ‘내가 여기 있네.’ 그것입니다. 모형이었죠.
모든 인간은 자신이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님 피, 언약 속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구멍 속에 합류할 수가 없어요. 모든 사람이 살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산 자가 지식과 정보와 진리를 알려하기에 못 들어갑니다. 그럼 방법은 뭔가? 죽은 자의 영을 받아야 돼요. 성령이죠.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삽니다.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고 죽음만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땅에서 살아야 돼요. 죽음이 있다는 것, 그 죽음을 우리는 미리 알았어요. 예수님 십자가 죽음이 곧 내가 하나님 앞에서 당할 저주의 모습을 이미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 죽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있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이 살아있기에 계속 살려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이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없는 거예요. 강의 초반에 말씀드렸지요. 말씀이 그냥 말씀이 아닙니다. 아벨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아벨 자체가 계시의 사람이죠. 하나님 사랑이 되지요.
그러니까 악마가 하나님을 죽이는 대신 아벨을 죽이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해도 지옥 갈 사람은 우리의 말을 이해 못해요. 그러니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없고,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어요. 이것은 빌립보서 2장에서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입니다.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어찌하든지 십자가에 죽는다.’ 그 말을 다른 사람이 알아듣겠습니까? 못 알아들어요.
편지는 서로 살아있는 사람끼리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잖아요. 실제 이야기인데, 2009년에 그리스에 어떤 사람이 연금이 안 나와서 담당 공무원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어요. 답장이 왔는데 “당신은 이미 죽은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무원 입장에서는 죽은 사람에게 연금을 보낼 수는 없잖아요. 서류상 그 사람은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거예요.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죽은 사람에게 왜 편지를 보내죠?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안 죽었다는 것인데, 안 죽었으면 누적된 연금을 보내야지요. 그런데 공무원은 나랏돈이 제 돈이 아니니까 편지만 보내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한 거예요. 이처럼 성경은 죽은 사람에게 보내요.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더 첨가하자면 “왕이 제물과 함께 죽을 때 당신도 그 때 함께 죽었습니다.” 라는 편지를 보낼 때 “나는 안 죽었어요. 20만원짜리 양을 잡아 드렸습니다. 나는 살아서 계속 살기위해 양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러면 양을 드려도 소용없어요.
예수님은 떡을 자기 살이라 했고, 잔을 자기 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떡과 잔을 나눌 때마다 나의 죽음을 생각하라.”고 했어요. 이 떡과 잔에 효과가 있다고 여긴다면 그 사람은 성도 아닙니다. 천주교나 개신교 교리가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것은 전혀 구원과 관계가 없어요. 이들은 이벤트를 벌리고 있을 뿐이에요.
십자가는 성령이 와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시면 구멍을 뚫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그 구멍은 돌아서면 내가 욕망하는 내가 되고 싶은 세상 것으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돌아서면 죄인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내일 이것 해야지. 딸 시집가는데 준비해야지.” 또 계획을 세우지요. 그러면 주님은 “내가 그 딸 죽이면 어떻게 할래?” “나 이제 예수 안 믿어.” 하나님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러니 주님은 뚫고 우리는 다시 채우고, 또 뚫으면 또 메우고.
그 메우는 것이 주님을 죽이는 악마적인 속성을 발휘하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죽어야 마땅한 자임을 증거하는,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는 날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살과 피는 우리가 예수님의 살이고 우리가 예수님의 피가 되는 겁니다.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살과 피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항상? 아닙니다. 성령이 올 때만. 십자가 사건으로 올 때 만입니다.
그 때 우리는 왕의 땅과 왕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 땅에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에스겔 45장의 비유가 멸망할 이스라엘 땅을 기초로 해서 거기서 죄를 끄집어내고, 오실 메시아와 결합을 시켜서 이 말씀이 완성되면 우리는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면류관도 반납하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죽였던 그 죽음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는 외면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소망이 따로 있었고, 내가 자랑하고 싶은 것이 따로 있었기에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영광이지 주님의 영광이 아니고 아버지의 영광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 11. 19. 08:4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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