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20131031b-마14장12절(오병이어)45강 - 이 근호 목사
대전20131031b-마14장12절(오병이어)45강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179)
대전20131031b-마14장12절(오병이어)45강 - 이 근호 목사
14장13절부터 해봅시다. 아까 이야기했지만 사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스케줄인데, 이 스케줄의 의미와 목적은 어떻습니까? 할 때 의미와 목적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알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의미와 목적이라 하는 것은 처음부터 약간 어려운 거 하지만 좀 참으세요. 사람이 이렇게 있으면 긴 그림자가 있잖아요. 이게 인생입니다. 살아온 자국이 있다 말이지요. 앞으로 살아갈 것도 있고. 우리는 묻습니다. “신이시여,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뭐고, 사는 목적이 뭐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셔요. 침묵을 해줘야, 침묵하니까 우리의 결정과 선택이 발휘되지요. 왜? 신은 거기에 대해서 침묵하니까.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침묵하던지 니 맘대로 하거라” 이리 되거든요. “니 올 초부터 막 살았잖아. 니 막 살아” 이렇게 된다고요. 그러면 막 살라는 소리를 듣고 그럼 선택과 결정을 발휘하게 되잖아요.
이 두 가지 갈림길이 있다 말이지요. 청량리로 갈 건지 명동으로 갈 건지. 두 개가 있다 말이지요. 본인이 선택하고 발휘하잖아요. 청량리로 간다, 했으면 요것이 바로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선택한 쪽이 우리의 잘못된 선택입니다. 어떻게 선택해도 잘못된 선택이에요. 청량리를 선택하면 명동에서 이끄시지요. 만약에 명동을 선택하면 청량리에서 이끄십니다. 고 갈라짐. 균열이지요. 요 갈라짐에서 쏙 들어오는 것이 뭐냐, 마태복음, 누가복음, 사도행전입니다. 갈라짐.
그러니까 이 갈라짐이 들어오면서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내가 바로 죄입니다. 하는 걸 느끼는 거예요. 말씀이 오게 되면 죄인을 느끼는데, 말씀 앞에서 회개하라는 말이 아니고 그래가지고는 그것은 건성이고 교양시간이고요. 그 지식은 말고 실제 인생을 가게 하는 거예요. 가게 되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떤 인생을 가던 간에 이것은 전부 다 누가 결정한 것이다? 내가 결정한 거예요. 내가. 어떤 결정을 했던 내가 결정한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60다된 분이 이혼할까요? 말까요? 할 적에 그것은 내가 조급해 할 필요 없어요. 본인이 결정한 것에 대해서 수긍하면 돼요. “이혼하고 싶어 하니까 이혼하세요.” “잘 될 겁니까?” “그것은 아니야.” 어차피 이혼 안 해도 잘 안된 거고 이혼해도 잘 안 된 거예요. 그럼 잘된 건 뭐냐, 어떤 결정을 해도 나는 죄인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생을 살면서 그걸 다시 한 번 느낄 때, 그게 아주 잘 된 거예요.
자기가 죄인인 것을 느낄 때는 감사가 나오고 은혜를 느끼게 됩니다. “아이고, 죄인인 데도 불구하고 또 주께서는 이렇게 살려내시는구나!” 늘 이렇게 주님의 현존, 주님의 실존은 내가 망가지고 부실한 존재라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알 때, 주님만 의미 있는 존재가 나타날 때, 그 귀하신 분이 아무것도 아닌 나를 이렇게 건져내시려고 나를 다루고 있다는 그 사실에 우리는 눈물을 다 뽑아내도 모자를 정도로 감격스럽지요.
옛날 찬송 405장 가사 혹시 아십니까? 제일 먼저 뭡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바로 나 같은 죄인 살렸잖아요. 지금 기존 교회는 뭐냐 하면, 나 같은 죄인 살렸으니까 두 번 다시 불러선 안 될 입장이 됐어요. 왜? 나 같은 죄인 살렸으니까 의인되었으니까 의인을 여기다 집어넣어버리면 그 다음 두 번째 부를 때는 어떻게 돼요? 나 같은 의~인, 이리 될 게 아닙니까? 의인. 이게 바로 모순되지요. 그래서 아까 하나님의 일에 믿음 좋은 나를 집어넣으면 안 된다 했지요. 뱉어낸다 했지요.
나 같은 죄인 했으면 그 다음 부를 때도 나 같은 죄인. 15만 번 불렀더라도 여전히 나 같은 죄인살리신 주의 은혜, 요 나 같은 죄인을 1969년도에 알았던 나 같은 죄인 그리고 2013년도 11월 달에 나 같은 죄인은 또 어떤 형편으로 나타날지 그 날이 바로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이 10월의 마지막 날이거든요. 내일되면 내일 사건을 통해서 또 나 같은 죄인을 하도록 주께서 준비된 사건들이 있을 거예요. 사건이라 해도 조용한 사건들이 있을 수 있는데 하여튼 내일 되면 내일치의 나 같은 죄인. 그래서 주기도문 끝에 보면 이런 말이 있어요. 아, 참 중요한 말인데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이것은 뭐냐 하면, 매일같이 우리는 이런 상황 속에 주께서 의도적으로 몰아넣는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이 세상을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주님의 인생을 우리가 되풀이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의 코스를 밟아야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에 이르게 되거든요. 주님 가신 그 길을 가기위해서는 주님이 겪었던 것을 겪게 하시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이 세상 자체가 우리에게 모든 것이 전부다 유혹이에요. 유혹 속에서 유혹을 이겼다 하면 안돼요. 어떤 유혹도 우리는 못 이깁니다. 마지막 때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한다 하지요. 모든 인간 다 해당되는 거예요. 이걸 이길 인간 없어요.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이 그야말로 성령을 통해서 울려나오도록 하는 거죠.
우리 목소리로 울려나오는 것은 이것은 괜히 예상되는 실패를 미리 막기 위해서 하는 종교성이 많아서 하는 짓이고 그런 종교성을 벗어나서 진짜로 나 같은 죄인이라고 부를 때가 온다면 그게 행운아입니다. 그게 행운이에요. 세상에 나 같은 죄인이 성경에나 있는 줄 알았더니만 아니 성경이 문자가 아니고 실제로 내 인생을 통해서 성경 말씀 화 되었다는 이 사실이 증명할 때 나는 살았구나! 진짜 내 속에 말씀이 있긴 있구나! 하고 느낄 때 앞으로 인생도 말씀대로 갈 게 뻔하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지요.
바로 우리 앞에 주어진 선택은 옛날에 한 번 겪었다고 해서 두 번 다시 안 되는 것도 같은 형식이지만 또 다른 깊이를 위해서 또 다시 되풀이 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동일한 기적은 일어나지 않지만 같은 상황은 계속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 본문에 나오는 ‘오병이어’ 나는 처음에는 오병이어가 뭔 뜻인 줄 몰랐어요. 병이 떡이란 말입니다.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 이야기를 들을 때 제가 설교한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부다 옛날이야기로 옛날 한 때 있었던 이야기로 설명을 했었어요. 제가 복음을 알고 이렇게 성경을 하는 가운데 오병이어라는 것은 옛날 이야기하듯이 전설이야기 하듯이 하는 게 아니고 지금 이렇게 매일같이 일어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뭐하기 위해서? 나 같은 죄인, 나 = 죄인, 죄인 불렀을 때 나를 부르소서. 죄인 있나? 할 때 저를 불러주소서. 제가 바로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지고 뭘 끄집어낸다? 나 같은 죄인, 이걸 끄집어내게 하시는 거예요. 왜냐 하면, 예수님은 이 오병이어기적 이후에 무슨 사건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십자가사건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에 오병이어 하는 사람들은 뭘 보느냐 하면, 떡 주시는 분, 요새말로 하면 돈 주시는 분, 동양 증권 하는 거기에 투자하면 가만있어도 오병이어일어난다는 그러한 금융회사 정도로 생각하겠지요. 조그마한 종자돈 내면 목돈 떨어지는 분, 야! 우리 임금 삼아야겠다. 라고 생각하지요.
예수님께서 그런 기적을 안 일으켰으면 자기들 속마음에 이렇게 공짜 좋아한다는 마음이 드러났겠어요? 안 드러났겠어요? 전부 다 안 드러나고 꿍하고 종교성이 범사에 많으니까 주님의 고난 받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구원만 해준다면 그걸로 족합니다. 이랬다가 막상 떡을 무상으로 주니까 구원도 좋고 떡도 좋고 나중에는 구원보다 떡이 더 현실감이 있고 하나님이 살아있다는 것은 추상적인 구원이 아니라 실제로 수입이 늘어날 때 실제로 주님은 살아 계시구나! 하는 것을 알 때 그들은 이미 죄인의 올무에 흠뻑 빠진 겁니다. 지금도 이 오병이어 보면서 옛날의 사람들은 좋겠다. 예수님한테 떡도 얻어먹고 새벽기도 40일 연속했는데 떡커녕 있는 돈도 종자돈도 빼앗기고 말이지요. 이런 탄식하잖아요.
그러니 사람들이 성경 보면서 뭘 생각하느냐, 성경 볼 때는 항상 자기가 기대하는 걸 가지고 보기 때문에 “성경 봅니다. 내가 원하는 돈 주세요.” 그런 마음으로 흥정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은 성경을 볼 수밖에 없어요. 보는 것도 노동이라, 노동의 대가가 따라줘야 노동의 재미가 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본문 성경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심도 있게 봐야 될 필요가 있지요.
14,15절에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소서” 라고 했어요. 자, 뒤에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지고 5000명 먹였다는 사실을 요 이야기하는 순간에는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요 이야기하는 제자들은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뒤에 떡이 화수분처럼 계속 나온다는 것을 몰랐지요. 드라마 끝을 모르는 거예요. 드라마 끝을.
마지막 열쇠는 누가 쥐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쥐고 있지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오병이어 기적이 커지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떤 기적입니까?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가지고 기적을 베풀었다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더 큰 기적이라면 보리떡 4개하고 물고기 1마리 가지고라도 5000명 먹일 정도,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은 보리떡 1개하고 물고기1마리로 5000명,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이만큼 되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이미 있는, 존재하는 것부터 더 큰 존재로 나오고 싶지요. 이걸 가지고 ‘가무한’이라고 해요. 칸토르 19세기 수학자 무한이란 개념을 그 전까지는 신의 개념이 무한인데 이 무한의 개념을 수학개념으로 지상의 개념으로 가지고 온 거예요. 수학자 칸토르에 의해서. 이건 시민대학에서 할지 안 할지는 모르겠어요. 이 무한을 다루는 거예요.
인간은 유한하지요. 유한한데 유한한 속에서 인간이 뭘 생각합니까? 무한을 생각하니까 인간은 유한이니까? 무한입니까?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생각할 때 무한한 것을 상상할 때 인간의 생각은 과연 유한이었다는 말입니까? 무한이라는 말입니까? 유한이지요. 유한이기 때문에 무한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인간이 천국을 생각하는 것은 천국일까요? 유한적인 천국일까요? 가짜 천국이지요. 인간은 모든 게 나오는 게 다 가짜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떡을 주시는 분이고 예수님은 메시아라 할 때 그 메시아는 진짜 메시아입니까? 가짜 메시아입니까? 인간들은 가짜 메시아를 생각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행하면서 니 속에 있는 가짜 메시아를 유도해 내신 거예요. 주께서 하신 모든 기적은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속임수를 쓴 겁니다. 우리는 넙죽 받는데 받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악마성이 어떻게 콩고물처럼 거기에 묻혀서 공개돼요. 들통 나지요. 교회를 안 다니고 예수를 안 믿을 때는 점잖은 사람인데 예수 믿고 복음 아는 순간 자기가 막나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노출 시킬 때 그럴 때 우리는 행운아입니다. 나 같은 죄인, 죄인 부를 때 나를 부르소서. 아! 언제 요런 우리의 속마음이 쏙~ 뽑아 나올까요? 저는 차 앞에 본네트 열고 엔진오일 얼마 있는지 뽑아보잖아요. 뽑을 때 그 느낌이 믿음도 이렇게 뽑아봤으면 좋겠어요. 우리 속도 뭔가 있어서 심지를 쏙 뽑아가지고 지금 어느 만큼 있는지 뽑아 봤으면 좋겠어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의견을 먼저 유도해 내신 겁니다. 1안이 뭐냐 하면, 빵집에 가서 빵을 사온다. 이것은 주님만 표적이 있으면 이것은 아니다 라는 거죠. 그러면 제 2안이 있느냐, 인간의 입장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빵집에 가서 빵 사가지고 먹는 거예요. 요 안건은 그 뒤의 안건을 추적해보면 평소에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요 안건이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기껏 인간은 평소에 사는 지 버릇대로 요것밖에 이야기 안 해요. 그러면 요 안건과 주님이 생각하는 안건과 건너갈 수 있는 다리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다리가 없습니다. 인간의 유한 속에 무한은 진짜 무한의 세계에 건너갈 다리가 없어요.
요한복음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는데,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을 때 그 때 제자들은 주위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어디 갔느냐, 빵 사러 갔거든요. 양식 사러갔어요. 제자들이 양식 사러간 이유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평소에 12제자와 예수님의 집단을 운영함에 있어서 받은 헌금가지고 양식을 사서 예수님도 먹고 다른 사람도 같이 먹었기 때문에 전혀 이상할 게 없어요. 줄곧 해왔던 전통이고 역사고 그런 겁니다. 그런데 양식이 왔는데 주님께서 제자들한테 먼저 이야기했어요. "드디어 나는 양식을 얻었다." 이거에요. "양식은 우리가 사왔는데 무슨 또 양식? 누가 가져다가 주던가요? 우리 없을 때 누가 주던가요?" "내 양식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양식이 아니고 내 양식은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그것이 양식이고 그게 추수다." 이거에요.
그러니 예수님의 목적은 양식 주는 게 아니고 우리 자신이 주님의 양식이 되고 주님이 먹는 음식물이 되고 예수님 자신이 농사꾼인데 우리가 수확물로 등장되는 것이 이게 주님의 업무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에서 우리를 끄집어내서 천국의 백성 만드는 것이 주의 업무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일과 우리의 일이 터지는 거예요. 틀어지는 거예요. 안 맞는 이유가. 주님은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려하고 우리는 세상에 딸려가려고 하고. 시골에서 노인네들이 텃밭에서 채소 가꿔가지고 채소를 어디서 씻습니까? 채소 옆에 바로 맑은 물이 흐르잖아요. 거기서 대충 미나리 씻잖아요. 대충 씻어서 먹잖아요. 흐르는 물에 우리를 씻듯이 주께서는 우리의 더러운 것을 주의 흐름 속에 맡겨서 그래야 깨끗해지는 겁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끗하다고 데모한다고 깨끗해지는 게 아니고.
제자의 안건은 빵 사서 먹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걸 거절했지요. 거절한 표정이에요. 17절에 보면,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 다음에 뭡니까? 뿐. 인간들 생각에는 이것은 턱도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안 됩니다. 물고기 두 마리 뿐이라는 말은 이것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안됩니다. 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주께서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19절에 나오지요. 그 뒤에 말을 우리가 모른다고 합시다. 모른다고 치고 모르는 그 빈칸에다가 우리가 시나리오를 짜서 거기다 집어넣는다고 합시다. 어떤 글이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지고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죠?
요셉이 보디발의 감옥에 있을 때 같은 감옥의 창살에 바로 신하 두 명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포도주를 만들어서 왕에게 바치던 신하고, 하나는 빵을 구워서 왕에게 바치던 사람인데 어떻게 돼서 두 사람 다 교도소에 오게 되었어요. 둘 다 꿈을 꿔요. 포도에서 포도 가지 세 개가 나왔는데 사람들이 그 포도가지에서 포도 과일을 보고 기뻐했습니다. 세 개의 가지가 나왔습니다. 요셉이 이걸 해석을 해주지요. 요거 세 개라 하는 것은 사흘입니다. 포도 가지 세 개 나온 것은 삼일을 말합니다. 라고 할 때 요셉이 어느 참고서보고 이렇게 나옵니까? 가지 세 개가 3이라는 것이 어디에 그런 게 나옵니까? 없는 거죠.
그렇다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여기다가 주께서 주시는 것은 뭐냐 하면, 무에서 유발하는 것이 뭐냐, 창조행위지요. 창조행위가 여기에 개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것도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아는 인간은 없어요. 왜냐, 이미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다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이건 뭐냐, 인간입니다. 인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가지고 옛날 천지 창조했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천지 창조했다고 하지요. 그건 사람들이 몰라서 그래요.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1장에 보니까 창조를 할 때 그 옆에 누가 계셨습니까? 말씀이 계시지요. 말씀으로 천지를 만들었어요. 그 내막은 예수님이 오시면서 비로소 십자가 질 때 그 때 비로소 드러나는 겁니다. 사람이 만들어진 입장에서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를 몰라요. 만들어진 입장에서.
여기 빵을 보고 “빵아, 이거 누가 만들었지?” 빵은 가만히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요. 왜? 모르니까. 자기는 만들어졌으니까. 주께서는 만들어진 것에다가 예수님께서 참여하게 되면 비로소 만들어진 것이 창조가 누구인줄 알아요. 이게 뭐냐 십자가의 사건을 앞당겨서 보여주는 겁니다. 만들어진 인간 속에 같이 예수님이 거기에 참여를 하기는 하는데 그들이 알고 있는 방식의 참여가 아니고 인간들이 모르고 있는 태초의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 행위를 가지고 그 속에 집어넣습니다.
어제 수요 설교 때 뭐라 했습니까? 듣고 나면 다 잊어버리지요. 유다가 죄를 지어서 멸망당할 때 주께서 그들에게 너희들, 죄 졌다. 바벨론에 가서 멸망시킨다. 이러면 간단한 문제를 왜 옆에 암몬이라는 이 사람들이 좋다고 까불고 점치고 우리는 안 당했다고 좋아 하는 것을 왜 여기에 두게 하시느냐 하는 겁니다. 두는 이유가 뭐냐, 그냥 유다 나라에 너 죄지었지? 예. 그럼 망해라. 알겠습니다. 이러면 간단한 문제를 예루살렘 멸망한다고 좋다하는 암몬 자손을 왜 옆에 곁에 두고 이들이 멸망으로 이어지느냐 하면, 유다나라가 멸망당할 때 암몬이 멸망당한 거와 동일한 입장에서 멸망당한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나만 괜찮으면 나만 멸망 안 당하면 나는 우수하고 나는 정당하기 때문에 멸망 안하고, 멸망당한 것은 죄가 나와서 멸망당한다고 하는 멸망당하느냐, 멸망 안 당하느냐에 따라서 자기 잘남을 그 사람 못남을 평가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유다나라가 망하는 거예요. 그럼 왜 보이게 하느냐, 암몬은 그냥 멸망으로 끝나버리지만, 유다는 멸망하는 그 존재의 멸망 구멍 속에 구멍이 나는데 그 멸망 가운데서 비로소 구원의 모습이 보여요. 멸망당하지 않으면 구원을 몰라요. 십자가가 아니면 부활의 나라가 있는지 없는지를 몰라요. 그러나 십자가에 내가 죽을 때 비로소 죽게 하시는 그 분이 나를 살려주시는 그 분이구나! 하는 것을 알 때 그 사람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우리가 빵 먹고 살아가는 게 죽어가는 과정이에요. 빵을 먹으면서도 죽음을 느껴줘야 우리는 빵을 주시는 분이 우리보고 부활되라고 주시는 걸 알아요.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하나라도 먹어서 살아야지 하잖아요. 이 오병이어가 뭐냐 하면, “지금 배고픕니다. 먹을 게 없습니다.” 제가 주님 같으면요, 잘 됐다. 이참에 다 같이 나하고 죽자. 그러면 다 같이 어디에 가있다? 천국에 올라간다. 저 같으면 이렇게 해요. 이게 오병이어 같으면 “빵 몇 개있어?” “빵 5개하고 물고기 2마리입니다.” “이거 먹고 다 같이 자살하자. 자, 나부터 죽을게. 죽자, 죽자, 밤이 어두웠다. 온도도 영상5도로 내려갔다. 다 같이 죽자.” 이렇게 해요. 이 이야기를 주님께서는 오병이어 때 하지 않고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이야기해요. 십자가 지고 다 죽어라. 오병이어 잊어라. 그것은 너희보고 같이 죽자는 것은 죽을 때 너희들끼리 죽으면 안 되고 내가 같이 개입해서 죽으면 산다는 거예요. 이게 창조의 비밀입니다.
창조의 비밀은 창조를 없앰으로서 주님이 살아나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만들어졌어요. 히브리서 1장 10~11절, “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이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아! 이걸 알게 되면, 주의 뜻을 다 안 거예요. 아! 주께서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 증거 하라고 나를 이용했구나!
우리는 주님의 하는 일에 들러리에요. 괜히 똑똑 까불어도 들러리에 불과해요. 죽임으로서 사는 거예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면 사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우리가 단순히 “나는 몰랐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이게 아니고 베드로 같은 경우에는요, “주여,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하다가 베드로가 누가 됐어요? 사탄이 되지요. 그러니까 단순히 유한한 인간이 다들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정도가 아니고 사탄이 아예 우리를 그동안 지배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뱀의 후손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이 여자의 후손으로서 역할을 하는 겁니다. 결국 창세기3장15절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저 같으면 오병이어해가지고 그래, 이것밖에 없으니까 나 따라 죽을 사람 손들어 봐라. 아니면 죽을 사람 죽던지 아니면 집에 가다 굶어죽던지 해라, 이렇게 할 건데, 주께서는 죽자 라는 것을 십자가 뒤에 이야기하고 십자가 앞에서는 왜 너희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오병이어라는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겁니다.
그것은 너희를 통해서 너희 속에 구멍을 뚫는 거예요. 너희들은 창조되지만, 창조의 비밀은 모르고 있는 너희들. 그래서 주님께서 합류를 합니다. 우리는 고기 없으면 못살고 떡이 없으면 못 삽니다. 에 주님께서 낮아져서 나도 떡 없이는 못살고 고기 먹고 싶다. 하고 같이 사멸해 주시는 겸손함을 보입니다.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떡도 필요 없고 고기도 필요 없어요. 하나님이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낮추사 죽기까지 복종하는데 그 복종하는 게 뭐냐, 인간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 현장에 주께서 떠나지 않고 같이 합세를 해요.
합세를 해가지고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 고기 없이는 못산답니다. 떡 없이는 못 산답니다. 이 철딱서니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여, 배불리 먹여주시고 그 배부름으로 그들이 죽게 하옵소서.” 그들이 원하는 배부름으로 그 다음에 뭡니까? 죽게 하소서. 이게 요한복음에서 배부름으로 나를 떠나게 하소서. 다른 말로 하면 배부름을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가 없는 곳으로 제자리로 되돌아가게 하옵소서.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떡 얻어먹고 두 번 다시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아니한다. 왜? 예수님은 자신의 배부름으로 사는 그 동네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떡 먹고 다리는 영원히 끊어져 버려요. 떡 먹고.
도대체 설교 들을 때 뭐 들었습니까? 결국 설교 듣는 건 따로 고 구원 받는 건 따로 고.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 합니까? 제자들보고. “너희들 왜 안가지? 야, 야들 희한하네. 왜 안 가는데?” 주님께서는 아시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왜 안가? 하니까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어딜 가겠습니까? 그래 놓고 베드로는 배반합니다. 그게 정답이 아니고 내가 너를 택하였기 때문에 안 떠난다. 선택입니다.
내가 뭘 결정하고 뭘 선택하면 구원 받지? 오직 예수를 선택해야지! 이 선택은 말도 안 되는 효과 없는 선택이고요. 주님이 선택했을 경우에는 떠나고 싶어도 못 떠나는 팔자가 돼요. 세상에 이렇게 좋은 팔자가 어디 있습니까? 지옥 문 앞에 가도 낚시 바늘이 그냥 가제트형사처럼, 가제트형사 보면 팔이 나와요. 팔이 쭉쭉 나와요. 긴팔이 지옥 속에 까지 들어가도 그냥 잡아당기거든요. 잡아당기면서 그 때 할 말을, 미리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때 부를 노래 미리 부릅시다.
죄인 오라 하실 때 나를 부르소서. 이게 당겨가면서 그 노래 부르는 거예요. 간증? 다 소용없는 기라, 신앙 자랑 그거 다 장사속입니다. 종교성이 많아서 그래요. 그거 속아 넘어 간 거예요. 저렇게 헌금하면 부자 되는구나! 교회가 군대귀신 있는 데라 했잖아요. 설교에서. 군대귀신인데. 전부다 교회에 차 끌고 오잖아요. 누가 오는 줄 압니까? 귀신들 다 타고 와요. 교회 문까지 다 들어오고 등록하고 난리입니다. 등록하고 세례 받고 다 들어와요. 기도할 때 기도도 같이 하고요, 헌금할 때 같이 헌금하고 이 땅 사는 자체가 주님의 테스트에요. 테스트. 주께서 시험하는 겁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지 말고 유혹에 들지 말라는 것은 이 땅에는 우리만 사는 게 아니고 마귀도 같이 살고 있거든요. 마귀가 자꾸 배불러야 산다. 떡 먹어야 산다. 고기 먹고 싶지? 고기 먹어야 산다. 계속해서 네가 한우 안 먹은지 오래 됐지? 지금 먹어. 계속 번데기 먹어야 된다. 사람 사는 게 먹어야 살지, 야야, 매일 시금치만 먹으면 못 산다. 이런 식으로.
그러나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니가 내 살과 내 피를 먹지 아니하면 니가 살아도 산 게 아니라는 거예요. 내 살과 내 피를. 그러면 살과 피를 줘야지 왜 오병이어를 줍니까? 그건 오병이어를 인간 쪽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들이. “주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이게 전부입니다. 이것 가지고 어떻게 해주세요.” 인간들이 먼저 자료를 제출한 거예요. 결재서류를 인간들이 먼저 결재서류를 올렸다 말이지요. 그러니 주님이 거기에 동참해 버린 거예요. 동참하면서 그들의 창조에 필요에 구멍을 뚫어 놓고 구멍새에 십자가 바람이 불도록 만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 보면, 이 대목하면서 아버지께서 내게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다. 질문하겠어요.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올 수 없지요. 그런데 왜 전도합니까? 그러면 전도 필요 없네. 자, 질문 자체에 문제가 있어요. 전도가 필요하다는 말은 전도하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다. 가 되잖아요. 그러니까 세상에서는 배부른 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한다고요. 뭐냐 하면, 교회 예배당은 지어놨지요. 예배당을 지어놓고 채우라 했으니까 채우거든요. 채우는 방법이 뭐냐 하면, 영업사원을 보내가지고 한 건수 올리는 거 아닙니까? 전도라는 게 뭐냐 하면, 바깥에 있는 사람을 교회에 등록시키는 걸 전도라 보잖아요. 이것이 바로 오병이어에서 인간 쪽에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 가지고 주님께 들이미는 거예요. 우리 교회 부흥해달라고. 전도 많이 해서 큰 교회 해달라고. 주님께서는 여기에 참여를 해요. 참여를 해놓고 여기에 구멍을 뚫어버리는 겁니다.
이런 예배당이 예배당 챙긴다고 절대로 구원 되는 게 아니고 전도를 해라, 선교하고, 헌금하고, 예배당 지어라. 하지만 구원은 아버지께서 내게 오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가 없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온 사람은 뭘 아느냐, 이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살과 내 피를 먹는 자만 영생 있다는 말을 이런 것들 속에서 우리 인간적인 상황 속에서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아! 이게 아무 소용없는 거구나! 이게. 40년 교회 다닌 게 훈장 탄 게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이게.
소용없는 거지만, 우리는 소용없는 짓밖에 할 줄 몰라요. 딴 짓을 못해요. 그런 이거 다 필요 없는데 교회 안다니고 무화과나무 밑에 앉아있으면 될까요? 누구든지 무화나무 밑에나 보리수나무 밑에 앉아있으면 구원 받습니까? 그것도 소용없어요. 그냥 사시라니까 하루를. 그냥 하루일과 사시면 불러주면 구원 받는 거예요. 불러 줄 때 진짜 성령이 불러 준 것은 이런 일상, 이런 더러운 일상 속에 그저 배부른 거, 내 잘되는 것 밖에 모르는 이 세계 속에 선택되었기에 내게 주의 살과 피를 알게 하시는구나! 이게 아버지께서 오게 하셨기 때문에 이런 더러운 구덩이 속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로 피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예수님의 희생만으로 구원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감사할 때 그게 바로 주님의 오병이어에 양식입니다.
주님도 먹어야 살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먹는 양식은 뭐냐, 그렇게 해서 구원 받은 사람이 주님의 양식입니다. 추수물이에요. 수확물이에요. 십자가를 여기다 집어넣고 창세기1장을 집어넣고 요한복음 1장을 집어넣으면 오병이어가 이렇게 보여 집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주님께서 도망치지 아니하시고 인간의 방식을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줘요. 해주면서 얼마나 그들이 원하는 방식에서 못 빠져나오고 있다는 것을, 그냥 못 빠져나오는 정도가 아니고 못 빠져나온 것 때문에 예수님을 두 번 다시 보기 싫은 존재로 해서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예수님에게서 벗어나서 본래의 자리, 다시 말해서 마귀, 사탄이 지배하는 그 자리로 백날 설교 들어도 그대로 되돌아간다는 사실, 따라서 아무도 자기 자리에서 자진해서 나와서 주님 앞에 나올 위인은 없습니다.
12제자도 마찬가지인데 주님께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이야기하고 아버지께서 내게 오게 한 사람은 반드시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고 약속함으로 말미암아 이제부터 니가 어떻게 나를 섬기느냐가 아니라 주님이 너의 인생에 어떻게 파고 들어와서 기어이 너희에게 낚시 바늘 줘가지고 믿음, 소망, 사랑 줘가지고 건져내는가를 보라, 볼 때 너는 오병이어의 진정한 의미를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19절,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이 축복할 때 뭐도 포함됐겠어요? 떡을 많이 달라고 포함했겠습니까? 아니면 아버지여, 내 십자가 희생에 근거해서 떡을 달라고 했겠습니까? 예수님의 모든 기도는 자기 십자가가 포함이 돼 있어요. 따라서 이 떡은 그냥 사람들한테는 먹는 떡이지만 이 떡은 요한복음6장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뒤에 찢어지는 예수님의 살입니다. 그 살은 누가 찢었습니까? 떡 먹은 인간들이 찢었다고 보면 돼요. 떡 좋아하고 떡 달라고 요청하고 주님 앞에 기도했던 그 인간이 예수님을 죽여 버리지요. 죽여서 살을 찢어버리는 짓을 하게 되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죽였던 자를 주님이 도로 살려내는 방식으로 구원입니다. 할 말이 없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죄인 오라 하실 때 우리를 부르소서. 내가 주님을 죽였습니다. 내가 귀히 여기지 아니하고 내가 주님을 우습게 봤습니다. 왜? 우리는 귀한 게 따로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인생, 십자가 인생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청와대 가는 걸 좋아하고 국회의원 재선되는 걸 좋아하고 그런 걸 좋아해요. 우리집안에 누가 국회의원 당선되면 이것은 대대손손 자랑거리가 되죠. 우리 족보에 국회의원 있다. 우리 할아버지가 국회의원이다. 참, 이걸 보면 교회가 정말 위험한 곳입니다. 아예 지옥의 목구멍 같아. 오기만 하면 지옥으로 빨아 당기려하는 진공청소기 같아. 진공청소기 같은 느낌이 들어요. 확~ 지옥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기서 못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빠져나온다면 그건 성령의 역사입니다. 왜? 빠져 나온다는 것은 거기에 다니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앉아서 지옥이 뭐라는 거, 죽음이 뭐라는 것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느끼는 겁니다. 아멘, 할렐루야! 믿씁니다, 하는 가운데서 야! 저 짓들 하고 있네. 내가 복음 모를 때 하던 짓을 그대로 하고 있네. 할렐루야! 믿씁니까? 믿씁니다. 이런 거. 참~
그걸 저는 요번 글을 쓰면서 이랬지요. ‘추태’라고 했지요. 아주 추태를 부리고 있어요. 하나님은 꼼짝도 안하는데 저희들은 추태를 부리고 있습니다. 서로가 은혜를 받았다고 은혜의 분위기를 띄워요. 욕심에 말려들어간 거예요. 특히 여성들은 마음이 약해가지고 옆에서 할렐루야 같이 해야 되는 거예요. 인간의 심정은 이렇습니다. 누구 하나가 다리를 꼬잖아요. 같이 다리를 꼬아줘야 동질감을 느껴요. 누가 팔짱을
끼잖아요. 이걸 보고 다 같이 이렇게 해줘야 우리는 한 팀이라는 것을 느끼게 만듭니다. 이게 자연적으로 이렇게 돼요. 누가 이렇게 하면 전부 다 이렇게 돼요. 사람들은 서로 그걸 사람뿐만 아니라 세포도 마찬가지고 그걸 공명현상이라 합니다. 악기하나 울리면 다 같이 갑자기 진동되는 것처럼.
인간도 공동체에 공감하게 돼있어요. 북한 보세요. 김일성한테 미치지요. 울고불고. 굶어 죽으면서 울고불고 한다고요. 북한만 욕하지 말고 우리는 안 그런가 보세요. 직장이라든지 학교라든지 가정에서 분위기에 너무 말려들지 않는지 똑같지요. 그런데 거기서 건져주시는 분은 아주 낯설게 건져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고 그러니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오병이어라 생각하시고 밥 먹고 사는데 너무 여기에다가 마음 두지 마세요. 십자가가 중요하지 오늘도 먹고 살았습니다. 하면 먹고 죽어라고 주신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20~21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오천 명이, 그 다음에 뭡니까? ‘나’가 있지요. 앞에서는 떡 5개와 물고기 2 마리뿐이었는데, 오천 명이나 되었지요. 이게 뭐냐, 창조의 행위입니다. 없는데서 있음을 아예 없는 데서 있게 한 정도가 아니고 아예 있음에서 있음을 가지고 크게 함으로서 없음을 표현하는 거예요.
이게 뭔 뜻이냐 하면, 고요하다. 이 표현하고 바늘 소리도 들린다. 이 정도로 고요하다. 어느 것이 더 고요합니까? 바늘 소리가 더 고요하게 느껴지지요. 원래 물리적으로 보면 바늘소리 들어가면 시끄럽잖아요. 표현할 때 바늘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할 때 표현을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는 이 표현방법은 결국 이것은 창조행위다 말이지요. 너희들이 기대한 그 이상의 원래 기대한 이상을 줘버리면 사람들은 무섭습니다. 내가 기대치한 대로 오면 괜찮은데 예를 들어서 애 성적이 아무리 봐도 반에서 5등정도인데 전교1등해서 들고 오면 애가 무서워요. 분명히 밤중에 시험지 미리 빼냈던지 무서운 가정부가 있어가지고 시험지 빼내줘서 할 수도 있는 문제고, 그럴 수 있다 보거든요. 너무 오버되면 무서워요. 그 오버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잉여’하지요. 잉여.
그래서 주님이 하신 일은 항상 낯설기 마련인데 이게 뭐냐, 우리 존재했던 유한한 피조물이 미처 몰랐던 원래 창조 세계에 있었던 그 정보가 우리에게 덮칠 때는 우리는 여분의 것을 믿지 해석을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군요. 내가 감당할 이상의 것으로 찾아오시니 제가 감당이 안 됩니다. 주님은 나의 흥정 대상이 안 됩니다. 거래 대상이 안 됩니다. 그냥 죽여주옵소서. 그런 경우 있지요. 베드로가 고기를 잡으려하는데 배 오른편에 던지라 하니 던지니까 없었어요? 많아도 너무 많지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뭐라 합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내가 바로 죄인입니다.” 하지요. 애가 갑자기 너무 공부 잘해도 무서워요.
자기 딸 못 생겼는데 키 185에다가 재벌 3세에다가 인물은 완전히 꽃보다 남자에 나온 주인공처럼 포맨처럼 너무 잘생겼을 때 이건 무서워요. 대번 장모 궁합봅니다. 뒷조사 들어갑니다. 다른 여자 몇 명 있는지, 얼마나 걸쳤는지, 왜 그런 남자가 하찮은 내 딸을 좋아하는지 이건 분명히 돈 보고 하는지, 돈 있는 사람이 돈 보지는 않지만, 가지고 놀기 위해서 하는지 뒷조사 들어가지요.
오천 명인데, 여기서 오치만리가 등장합니다. 오치만리의 유명한 책에 보면, 12광주리 하는 책이 있지요. 거기에 보면, 12광주리 가지고 생명말씀 찾아서 많이 팔렸어요. 왜 12광주리냐, 12광주리에 차게 넣었느냐, 보통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보통 목사들은 뭐라 해요? 이걸 사람들이 배부르니까 함부로 대하는데 남은 것도 거두어라. 왜? 하나님이 주신 것은 귀한 줄 알아야지 니 배부르다고 그 다음부터는 홀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라. 이 말은 이걸 교회에 적용하면, 교회 물건은 공공물건인데 애들보고 의자 함부로 긁지 말고 낙서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연관을 시키지요. 교회 물건은 하나님의 물건이니까 귀하게 여겨라. 이렇게 돼요. 여기 남은 조각이 12광주리에 12할 때는 반드시 뭘 의미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을 의미해요. 이것은 너희들 개인이 이뻐서가 아니라 12지파 이스라엘을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여파로서 그림자로서 너희에게 주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개인이 착하다고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고 집단이 의로운 집단 속에 포함될 때는 니는 무조건 의인이 되는 겁니다. 개인이 착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집단에 착해야 되는데 이 집단은 어디서 나오는가, 예수님의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 행위에서 이스라엘이 나오게 돼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는 것은 옛날 이스라엘을 다시 만든다는 의미에서 여기에서 12광주리 한 거예요. 결국 12광주리 이스라엘을 쪼개니까 너는 배부르고 난 뒤에 과연 우리가 이스라엘인지 다시 한 번 보라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결국 이스라엘을 집단을 만들어요. 예수님이 교회 머리거든요. 예수님이 아들 되고. 아들을 확장시키면 이스라엘 이름의 아들이 나옵니다.
이 예수님의 연속되는 계속 이어져야 될 그 다음 행동을 위하여 지금 앞당겨서 예고편으로 지금 오병이어를 한 거예요. 그 마지막 끝은 어디냐,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에서 마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은 모든 기도가 어떤 기도인 줄 모르지만 기도의 결국 마지막 응답은 뭐냐, ‘죽어도 되는구나!’ 왜, 이미 살았으니까. “죽어도 되는데 왜 자꾸 나를 이런 거 저런 거 기도하라 했지?” “아, 그것 가지고 더 살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렇구나! 그래, 맡기자.”
나 그만 살자가 아니라 그만 사는 것도 지 욕심이거든요. 왜 그만 살아요. 살려주면 살아야지. 주의 사명 때문에 살고 있지 내 목적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구나! 주여, 주의 사명대로 그대로 실시되게 하옵소서. 제가 드리겠나이다. 그 기도가 되어야 돼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십자가를 겨냥해서 우리를 다루는데 개인적인 이득과 손실을 따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어설프고 철없는 우리를 십자가 피 흘려주셨기에 이제는 어설픔 가운데서 피와 살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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