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112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8-아벨라드신학
20131112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8-아벨라드신학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1112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8-아벨라드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신학강의하면서 지난번부터 그렇지만 철학 쪽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거북함이 있을 거예요. 신학은 원하되 철학은 원치 않는다. 그런데 이 점을 알아야 돼요. 모든 서양철학이 하나님에 대한 해석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대해서 진리대로 사는 게 무엇이냐는 추구가 결국 철학과 신학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신학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삼위일체로 마감이 되었어요. 그 다음부터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건들지 말라는 거죠. 삼위일체를 건드리면 무조건 이단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정립했기 때문에 신학은 이제 종지부 짓고 끝나야 될 것 아니냐.
그런데 삼위일체 이후에 피터 아벨라드가 왜 나오느냐? 삼위일체가 하나님 아닙니까. 그러면 지상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고 그러면 피조물이 사는 방법은 삼위일체가 갖고 있던 속성과 품성과 그 형상대로 살아야 되는 책임을 요구받게 되죠.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그러면 지상에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산다? 삼위일체 식으로 살아야 되겠지요. 하나님은 삼위일체다. 삼위일체가 우리의 삶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연결고리가 마련돼야 되지 않습니까? 거기에 관한 이야기가 그 다음부터 계속 되는 거예요.
이걸 바로 위에 계신 하나님의 속성이 이제는 지상으로 내려옵니다. 내려오게 되면 지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중세 때 요한계시록을 별로 안 좋아하는 이유가, 더 이상 삼위일체 되고 난 뒤에는 중세 이후로 기독교 믿는 나라가 이미 천년왕국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볼 필요가 없지요. 현재 눈에 보이는 나라가 천년왕국인데 천년왕국을 뭘 또 기다려요.
요아킴이란 사람이 천년왕국을 기다리자고 해서 히트 쳤어요. 히트 친 동시에 이단 되었지만. 율법의 시대, 그 다음은 예수님의 시대, 그 다음은 성령의 시대가 있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이단 된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 사람들은 지금 이 시대가 삼위일체와 함께 있는 시대인데 뭘 기다려? 기다린다는 말은 교권에 대한 기존의 나라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거든요. “이런 나라는 아니야. 기독교 나라가 아니야. 우리는 따로 기다려야 돼.” 이렇게 되면 기존에 대한 반발이고 반항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아킴이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못 사는 사람들은 좋다 하고 소위 귀족들이나 권력자들은 이단 잡아 죽이는 종교재판소가 설립이 돼요.
종교재판을 할 때 기준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기준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다 이단이 되는데 그럼 교회에 가르치는 것을 토마스 아퀴나스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정립을 해줘요. 그 정립한 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삶을 요구했을 때 우리는 어떤 삼위일체적인 삶을 사느냐? 그것에 반대하게 되면 이단이 되는 겁니다. 이단의 범위가 확대돼지요. 삼위일체 반대하면 이단 되었다가 이제는 기존에 로마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반대하는 이단 되듯이 루터도 이단이고, 칼빈도 이단이고. 기존에 천주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반대하면 이단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 오늘은 피터 아벨라드, 샹뽀의 기욤, 로스켈리우스, 이 사람들의 의견이 서로 대립되는 시대였습니다. 두 사람의 의견에 대해서 잠시 언급을 하겠습니다. 이런 언급을 할 때 공부하는 사람들은 짜증이 나겠지요. 성경구절에 대한 해석은 안 하고 엉뚱한 소리나 한다고.
이 사람들은 실재가 실제뿐이다. 나머지는 실재적인 것을 증거하기 위한 한시적인 것이다. 한시적이고 안개 같은 것이다. 실재적이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로스켈리우스는 모든 것은 실재는 없다. 실재는 없고 사물의 이름은 그냥 바람이다. 어떤 영화에 보면 권투 연습할 때 휙휙하면서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고 하잖아요. “입에서 나오는 소리 맞거든.” 이게 로스켈리우스입니다. 그리고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고 내가 주먹이 워낙 빠르기 때문에 바람소리처럼 들린다. 이게 샹뽀의 기욤, 실재론입니다.
로스켈리우스가 상당히 도발적인데 세상에 있는 것이 실재한다는 것은 헛된 거고 사실은 인간들이 용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게 난로잖아요. 난로라는 덩어리는 필요한데 난로라는 이름, 명칭은 있으나마다 상관없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이걸 명목론 또는 유명론이라 하고 샹뽀의 기욤은 이걸 실재론이라 하는 겁니다. 앞으로 모든 역사는 계속해서 실재론이냐, 명목론이냐는 두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아직 아벨라드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날카롭게 대립했는데 실재론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실재로 계셔야 돼요. 아마 있을 걸. 아마 있을 수도 있을 걸. 천국이다. 천국은 실재해야 되는데 천국은 가 봐야 아는 것. 이렇게 되면 기독교 전통이 다 깨진다는 겁니다. 로스켈리우스는 천국이 있기는 있는데 그 이름을 천국으로 하든, 지옥으로 하든, 아니면 놀이동산으로 하던 의미 없다는 거예요. 그냥 인간이 만든 언어라는 자체는 붙이기 나름이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하는 것은 로스켈리우스의 주장이고, 하나님이라고 만든 이유는 하나님이란 말 자체에 이미 실재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는 것은 샹뽀의 기욤이고 이렇습니다. 이것은 무엇이 옳으냐가 아니라 그 당시에 교회가 이야기하는 것이 대중들에게 얼마나 의미 있게 전달하느냐의 문제인데 로스켈리우스 같이 해버리면 교회 안 가면 되고. 교회 가치도 의미도 없고 봉건사회 질서가 완전히 다 깨지잖아요.
마르크스는 사회를 다섯 단계로 나눴거든요. 원시공산주의,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 공산세계. 봉건사회가 유지 되는 것은 기독교 사상에 의한 것인데 기독교는 하나님이 실제로 있고, 천국도 실제로 있고, 교회도 천년왕국도 실제로 있고. 실제로 있어야 질서가 유지된다고 하는
그러면 안셀무스는 보수지요. 이쪽은 좌파고 이쪽은 우파고. 안셀무스는, 예수님이 십자가 진 것은 바로 우리 죄를 책임지기 위해서 졌다. 아벨라드는 둘 사이를 절충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져서 죄 용서 받는 건 없고 인간 개개인의 가치만 있을 뿐이지 그걸 통합해서 보편적인 의미를 끄집어내게 되면 이것은 하나의 질서유지지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태도는 아니다. 상당히 자유롭지요.
만약에 교회에서 놀러가자 할 때 교회에서 놀러 가면 다 같이 참석해야 된다는 것은 기욤이고, 나는 가기 싫다고 하는 것은 로스켈리우스고. 교회가 놀러가자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 거예요. 왜? 교회 자체가 없기 때문에. 개개인이 놀러가는 것이지 교회라는 보편적인 의미는, 교회라는 것은 그냥 마라톤에 불과하다는 것은 로스켈리우스고, 아벨라드는 교회라는 것은 따로 없고 나는 교인이라 할 때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교회라는 개념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렇다. 기욤은 실재론, 로스켈리우스는 명목론, 아벨라드는 인간은 개념 속에 있다.
예를 들면 철수와 영희는 사람이다. 이것은 샹뽀의 기욤이지요. 철수와 영희가 사람인 이유가 인간적인 요소가 다 들어있습니다. 철수는 사람인데 영희는 개가 되면 말이 안 되잖아요. 사람이 실제로 있다고 본 것은 기욤이고, 사람이란 것은 없고 개개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로스켈리우스고, 아벨라드는 개개인이 맞기는 맞는데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왜? 사람이라고 해야 서로 통합이 되니까.
이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본 것은 이것은 개념은 있다. 각 사람마다 개념은 있되 통합할 필요는 없다. 교회가 놀러가자고 하면, 내가 놀러가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본 거예요. 나는 그 교회 교인이니까. 로스켈리우스는 아예 교회란 말 자체를 쓰지 말자는 말이죠. “우리 놀러 갈래.” 이렇게 이야기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 셋의 차이를 알겠습니까?
그것이 91페이지인데 간단하지요. 제가 설명하니까 간단한데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공부하는 게 무의미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 믿습니까? 저도 믿고 다 믿습니다.” 이렇게 되면, 샹뽀의 기욤이 되는 거고, “목사님, 나는 예수 믿는데 목사 예수와 내 예수는 다릅니다.” 이건 로스켈리우스가 되고. “목사님과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하니까 공통점을 끄집어내 봅시다. 예수 믿기는 믿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십자가? 죄용서? 그건 공통점이구나.” 그건 아벨라드가 되는 겁니다.
아벨라드 주장이 중요한 이유는, 이런 겁니다. 당신과 나의 고향은 전라도. 경상도에서 전라도 사람 만났으니까 우리는 친구. 그러니까 전라도라는 보편성 속에 묶여졌지요. 그런데 이번에 기아 타이거즈 야구 왜 그렇게 못 했나? 난 야구는 모르고 축구 좋아하는데. 그러면 갑자기 전라도 사람이라는 공통점은 있는데 취미로 야구를 안 좋아하면 둘이 말이 안 통하는 거예요. 전라도라고 해서 통했는데 그만 축구, 야구 이야기하다가 삐져서 둘이 갈라선다면 어디까지 보편성을 주장해야 돼요?
이럴 땐 누가 맞습니까? 넌 축구 좋아해. 나는 야구 좋아할게. 역시 개인뿐이야. 이럴 땐 로스켈리우스가 맞는 것 같아요. 인간은 각각 개인뿐이다. 여기서 나중에 주체사상이 나옵니다. 아직 이 시대는 봉건사회기 때문에 너무 주체사상을 하게 되면 민족도 국가도 없고 성경도 내가 알아서 성경 해석한다고 하면 당장에 이단 됩니다. 성만찬할 때 신부가 예수님이 몸이라고 떡을 주는데 “나는 이걸 예수님의 몸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하면 당장 종교재판에서 사형당하니까 살기 위해서는 적당한 선에서 아직 주체 주장을 못하고 약간은 봐주는 쪽으로 해야지요. 그게 아벨라드가 되는 겁니다.
아직 중세에요. 나중에 교회 안 다닌다고 하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마귀도 죽이는 시대에 아벨라드는 절충을 선택합니다. 적당한 선에서. 개인 권리도 보장해주고 역시 우리는 형제라고 죽으면 같이 천국 간다고 인정해주는 쪽이 아벨라드에요. 이렇게 아벨라드가 절충안을 제시하면서 삼위일체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기욤 같으면 교회가 시키는 대로 무조건 해야 되고, 로스켈리우스는 교회고 뭐고 무시하고 자기주장을 펴면 되는데 절충안이니까 이렇게 됩니다.
그냥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고 개인에게 의지가 있어요. 그래서 피터 아벨라드를 의지주의라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지정의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의지 아닙니까. 지금까지는 지식으로 교회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성도가 됐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에게 전달됐다. 오케이.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우리한데 전달됐다. 그것도 동의. 하나님의 의지가 나한테 의지됐다. 그것도 오케이 해버리면 그 다음에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내가 내 의지 대로 하는 행동도 뭐가 돼요? 곧 하나님의 일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갑자기 집단에서 뭐로 가까워요? 내가 임의대로 결정하는 것도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감 잡겠지요. 점점 더 집단에서 서서히 주체가 강화되는 쪽으로 흘러가면서 의지론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시대가 바뀌면서 언제까지 사람들을 족쇄로 채울 수는 없고 서서히 개인의 자유의 영역이 넓혀지는 시대로 접어드는 거예요.
예를 들면 교회 처음 올 때는 “목사님, 주일에 몇 시까지 와야 돼요?” “11시지만 10시 반에는 와서 전도사 인도에 따라 찬양해야 됩니다.” 하면 초짜는 그냥 10시 반에 와요. 6개월도 안 되서 11시 10분에 옵니다. 드디어 감 잡았다고. 이게 뭡니까? 샹뽀의 기욤에서 로스켈리우스로 빠지는 거예요. 교회도 오고 싶을 때 오겠지요. 성경에 보니까 내가 성전이라 하는데. 너무 갔지요. 개인적으로 해버리면 광고시간에 광고 들을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 중간지점, 아벨라드를 채택하겠지요. 내가 의지하는 것도 주께서 인정하는데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참고는 선배들, 믿음 좋은 사람, 성경을 많이 아는 전문가한데 뭔가 알아서 거기에 맞추어서 내 의지대로 거기다 보태야 내가 하나님 뜻에 위반하지 않고 내 의지가 옳은 방향으로 갈 수 있겠다는 감을 잡겠지요.
11시 10분 돼야 오니까 목사가 보다 못해서 제발 10시 반까지 오라는 소리는 안 하는데, 이런 게 있어요. 11시 됐는데 빈자리가 보이면 지금 설교 준비한 걸 머리에 집어넣는데 도움이 안 돼. 일반 사람들은 몰라요. 목사들은 알아요. 이것 때문에 일주일을 바짝 긴장하며 사는데 11시 됐는데도 교인들 안 오면 저번 주도 빠졌는데 오늘도 빠질 모양이지. 온갖 신경 쓰면 설교 준비에 교인들이 전혀 보탬이 안 되는 거예요.
“목사가 예배 인도할 때 긴장된 상태를 교인들이 도와줘야 긴장 되지만 생각한 대로 하게 되면 은혜로 돌아가는데 여러분이 완전히 시장통에 오는 것처럼 지 마음대로 오게 되면 준비된 은혜가 안 나오면 여러분만 손해입니다. 그러니까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할 때 나 개인만 로스켈리우스가 되면 안 되고 적당하게 기욤도 좀 협조해줘야 되는구나. 그래서 그게 아벨라드입니다. 오늘날 똑같이 적용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신비주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베르나르는 아벨라드를 아예 이단으로 고소해서 잘리게 만든 사람인데 이 사람은 어떻게 백성들에게 요령껏 편하게 신앙 생활하라는 것이 사제나 수도사들의 임무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주의 종이 되었으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한테 가도록 해야지 “여러분, 신앙 생활하기 힘들지요. 돈도 벌고 신앙생활하고 양쪽 다 하려니 힘들지요. 제가 편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다른 생각 말고 편한 교회 다니세요.”라는 발상 자체가 하나님이 내려주신 발상이라고 할 수 있느냐?
사람들에게 인기 있을 줄은 모르지만 결국 천국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데 그게 신학의 바른 태도는 되지 못한다. 따라서 교회에 불만이 있고 교회 생활을 어떻게 할지 모를 때는 오히려 사제가 세상 사람과 결탁해서 그들 편에 서지 말고 사람 편에 서면 주의 종이 아니잖아요. 오직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모범을 보여야 된다. 그게 신비주의입니다. 세상은 다 헛되다. 요령껏 믿으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깊은 것을 캐내서 그들로 하여금 요령껏 신앙 생활한다는 자체가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일깨워서 하나님 쪽에 더 가까이 가도록 조치하는 것이 옳은 사제가 아니냐는 것은 베르나르에요.
베르나르의 주장이 그 당시 교회에서 존경받았겠습니까? 거부당했어요. 왜? 신부들은 관심 없어요. 신부들은 하나님 관심 없거든요. 신부들은 어떻게 밥 먹고 사느냐에 관심 있지.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너만 믿음 좋나?” 이 사람들도 역시 아니야.
그러니까 신학이란 하나님 위주도 아니고 사실 백성 위주도 아니에요. 그 당시 권력 쥔 사람들이 교회고 땅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아닙니까. 그 교회 권위를 우파든, 좌파든 건드리면 조져요. 신학이 원래 그런 거예요. 너무 믿음 좋아도 안 되고, 너무 믿음이 개판 되도 안 되고. 그래서 좌로나 우로나 너무 치우치면 안 되고 적당히 권력이 유지되는 쪽으로 그냥 가자는 겁니다.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는 취지를 알겠지요. 신학을 하게 되면 곳에 따라 각종 노림수들이 온갖 것이 다 나와요. 앞으로 재미있어요. 신학하면서 자기 정당화하는 핑계들이 있어요. 그 행동의 정당화는 오늘날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신학할 때 순수한 신학하는 줄 알지요. 다 노림수가 있다니까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림수는 다 나와요.
인간의 의지로 하나님께 찾아가는 그것도 잘못됐다. 인간의 지정의를 담은 진짜 순수한 하나님과 만남, 이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맥락과 같이 예수님의 겸손과 가난함에 낮아짐에 참여함으로써 신적 실재에 들어간다.
그러면 베르나를 평해야 되겠지요. 이 베르나르의 주장이 옳습니까? 우리는 양쪽을 이야기하면 중간에 있는 사람이 옳아 보이지요. 그런데 아벨라드와 베르나르가 대결하는데 어느 쪽이 맞는 것 같습니까? 둘 다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비적인 감정과 관계없어요. 우리가 얼마나 짜릿했느냐, 황홀했느냐? 그게 말씀 해석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우리가 짜릿하면 구원받습니까? 신비체험하면 구원받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은 오직 예수님의 행함으로 구원받잖아요. 예수님께서 자기 피에서 나온 권력으로 우리를 구원하면 구원받잖아요. 그럼 내가 짜릿하다, 황홀하다. 이게 의미 있습니까? 자기의 신비로운 체험을 스스로 부인할 수 있어야 돼요.
베르나르는 신비주의고 아벨라드는 의지주의고, 로스켈리우스는 지식적이고, 기욤은 권력적이고. 온갖 것 다 나왔지요. 아직까지 멀었어. 계속 나와요. 그래서 신학의 변천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어. 그 사람들의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에요. 자기 딴에 체계를 갖추어서 하는데. 이러한 낮아짐, 겸손함. 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그게 결코 천국 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세리와 창기가 구원받은 것을 생각해 보세요. 결코 이런 모습이 아니지요.
그 다음에 보나벤투라. 이 사람은 감정주의적 정서라고 하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철학 중에서 취할 것은 버릴 것은 버리는데 아리스토텔레스철학에서 뭐가 문제냐? 삼위일체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버리자. 그러면 취할 것은 뭐냐? 삼위일체가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집어넣자고 한 사람이 보나벤투라에요. 아리스토텔레스를 주장한 사람이 뒤에 나와요.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약간 앞선 사람이 보나벤투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