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라드 신학 131112
아벨라드 신학 131112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이근호(IP:119.♡.93.55)
13-11-12 15:45
한 시간만 강의했습니다.
한윤범(IP:14.♡.134.60)
13-11-14 12:54
20131112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8-아벨라드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신학강의하면서 지난번부터 그렇지만 철학 쪽으로 나가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거북함이 있을 거예요. 신학은 원하되 철학은 원치 않는다. 그런데 이 점을 알아야 돼요. 모든 서양철학이 하나님에 대한 해석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대해서 진리대로 사는 게 무엇이냐는 추구가 결국 철학과 신학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신학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삼위일체로 마감이 되었어요. 그 다음부터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건들지 말라는 거죠. 삼위일체를 건드리면 무조건 이단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정립했기 때문에 신학은 이제 종지부 짓고 끝나야 될 것 아니냐.
그런데 삼위일체 이후에 피터 아벨라드가 왜 나오느냐? 삼위일체가 하나님 아닙니까. 그러면 지상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고 그러면 피조물이 사는 방법은 삼위일체가 갖고 있던 속성과 품성과 그 형상대로 살아야 되는 책임을 요구받게 되죠.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그러면 지상에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산다? 삼위일체 식으로 살아야 되겠지요. 하나님은 삼위일체다. 삼위일체가 우리의 삶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연결고리가 마련돼야 되지 않습니까? 거기에 관한 이야기가 그 다음부터 계속 되는 거예요.
이걸 바로 위에 계신 하나님의 속성이 이제는 지상으로 내려옵니다. 내려오게 되면 지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중세 때 요한계시록을 별로 안 좋아하는 이유가, 더 이상 삼위일체 되고 난 뒤에는 중세 이후로 기독교 믿는 나라가 이미 천년왕국으로 확정되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볼 필요가 없지요. 현재 눈에 보이는 나라가 천년왕국인데 천년왕국을 뭘 또 기다려요.
요아킴이란 사람이 천년왕국을 기다리자고 해서 히트 쳤어요. 히트 친 동시에 이단 되었지만. 율법의 시대, 그 다음은 예수님의 시대, 그 다음은 성령의 시대가 있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이단 된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 사람들은 지금 이 시대가 삼위일체와 함께 있는 시대인데 뭘 기다려? 기다린다는 말은 교권에 대한 기존의 나라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거든요. “이런 나라는 아니야. 기독교 나라가 아니야. 우리는 따로 기다려야 돼.” 이렇게 되면 기존에 대한 반발이고 반항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아킴이 그렇게 이야기했을 때 못 사는 사람들은 좋다 하고 소위 귀족들이나 권력자들은 이단 잡아 죽이는 종교재판소가 설립이 돼요.
종교재판을 할 때 기준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기준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다 이단이 되는데 그럼 교회에 가르치는 것을 토마스 아퀴나스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정립을 해줘요. 그 정립한 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에게 삶을 요구했을 때 우리는 어떤 삼위일체적인 삶을 사느냐? 그것에 반대하게 되면 이단이 되는 겁니다. 이단의 범위가 확대돼지요. 삼위일체 반대하면 이단 되었다가 이제는 기존에 로마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반대하는 이단 되듯이 루터도 이단이고, 칼빈도 이단이고. 기존에 천주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반대하면 이단 되는 겁니다.
그러면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 오늘은 피터 아벨라드, 샹뽀의 기욤, 로스켈리우스, 이 사람들의 의견이 서로 대립되는 시대였습니다. 두 사람의 의견에 대해서 잠시 언급을 하겠습니다. 이런 언급을 할 때 공부하는 사람들은 짜증이 나겠지요. 성경구절에 대한 해석은 안 하고 엉뚱한 소리나 한다고.
이 사람들은 실재가 실제뿐이다. 나머지는 실재적인 것을 증거하기 위한 한시적인 것이다. 한시적이고 안개 같은 것이다. 실재적이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로스켈리우스는 모든 것은 실재는 없다. 실재는 없고 사물의 이름은 그냥 바람이다. 어떤 영화에 보면 권투 연습할 때 휙휙하면서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고 하잖아요. “입에서 나오는 소리 맞거든.” 이게 로스켈리우스입니다. 그리고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고 내가 주먹이 워낙 빠르기 때문에 바람소리처럼 들린다. 이게 샹뽀의 기욤, 실재론입니다.
로스켈리우스가 상당히 도발적인데 세상에 있는 것이 실재한다는 것은 헛된 거고 사실은 인간들이 용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게 난로잖아요. 난로라는 덩어리는 필요한데 난로라는 이름, 명칭은 있으나마다 상관없다고 이야기한 겁니다. 이걸 명목론 또는 유명론이라 하고 샹뽀의 기욤은 이걸 실재론이라 하는 겁니다. 앞으로 모든 역사는 계속해서 실재론이냐, 명목론이냐는 두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아직 아벨라드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이 날카롭게 대립했는데 실재론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실재로 계셔야 돼요. 아마 있을 걸. 아마 있을 수도 있을 걸. 천국이다. 천국은 실재해야 되는데 천국은 가 봐야 아는 것. 이렇게 되면 기독교 전통이 다 깨진다는 겁니다. 로스켈리우스는 천국이 있기는 있는데 그 이름을 천국으로 하든, 지옥으로 하든, 아니면 놀이동산으로 하던 의미 없다는 거예요. 그냥 인간이 만든 언어라는 자체는 붙이기 나름이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하는 것은 로스켈리우스의 주장이고, 하나님이라고 만든 이유는 하나님이란 말 자체에 이미 실재로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는 것은 샹뽀의 기욤이고 이렇습니다. 이것은 무엇이 옳으냐가 아니라 그 당시에 교회가 이야기하는 것이 대중들에게 얼마나 의미 있게 전달하느냐의 문제인데 로스켈리우스 같이 해버리면 교회 안 가면 되고. 교회 가치도 의미도 없고 봉건사회 질서가 완전히 다 깨지잖아요.
마르크스는 사회를 다섯 단계로 나눴거든요. 원시공산주의,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 공산세계. 봉건사회가 유지 되는 것은 기독교 사상에 의한 것인데 기독교는 하나님이 실제로 있고, 천국도 실제로 있고, 교회도 천년왕국도 실제로 있고. 실제로 있어야 질서가 유지된다고 하는
그러면 안셀무스는 보수지요. 이쪽은 좌파고 이쪽은 우파고. 안셀무스는, 예수님이 십자가 진 것은 바로 우리 죄를 책임지기 위해서 졌다. 아벨라드는 둘 사이를 절충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져서 죄 용서 받는 건 없고 인간 개개인의 가치만 있을 뿐이지 그걸 통합해서 보편적인 의미를 끄집어내게 되면 이것은 하나의 질서유지지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태도는 아니다. 상당히 자유롭지요.
만약에 교회에서 놀러가자 할 때 교회에서 놀러 가면 다 같이 참석해야 된다는 것은 기욤이고, 나는 가기 싫다고 하는 것은 로스켈리우스고. 교회가 놀러가자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 거예요. 왜? 교회 자체가 없기 때문에. 개개인이 놀러가는 것이지 교회라는 보편적인 의미는, 교회라는 것은 그냥 마라톤에 불과하다는 것은 로스켈리우스고, 아벨라드는 교회라는 것은 따로 없고 나는 교인이라 할 때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교회라는 개념이 담겨있기 때문에 그렇다. 기욤은 실재론, 로스켈리우스는 명목론, 아벨라드는 인간은 개념 속에 있다.
예를 들면 철수와 영희는 사람이다. 이것은 샹뽀의 기욤이지요. 철수와 영희가 사람인 이유가 인간적인 요소가 다 들어있습니다. 철수는 사람인데 영희는 개가 되면 말이 안 되잖아요. 사람이 실제로 있다고 본 것은 기욤이고, 사람이란 것은 없고 개개인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로스켈리우스고, 아벨라드는 개개인이 맞기는 맞는데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왜? 사람이라고 해야 서로 통합이 되니까.
이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본 것은 이것은 개념은 있다. 각 사람마다 개념은 있되 통합할 필요는 없다. 교회가 놀러가자고 하면, 내가 놀러가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본 거예요. 나는 그 교회 교인이니까. 로스켈리우스는 아예 교회란 말 자체를 쓰지 말자는 말이죠. “우리 놀러 갈래.” 이렇게 이야기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 셋의 차이를 알겠습니까?
그것이 91페이지인데 간단하지요. 제가 설명하니까 간단한데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공부하는 게 무의미한 게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 믿습니까? 저도 믿고 다 믿습니다.” 이렇게 되면, 샹뽀의 기욤이 되는 거고, “목사님, 나는 예수 믿는데 목사 예수와 내 예수는 다릅니다.” 이건 로스켈리우스가 되고. “목사님과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하니까 공통점을 끄집어내 봅시다. 예수 믿기는 믿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십자가? 죄용서? 그건 공통점이구나.” 그건 아벨라드가 되는 겁니다.
아벨라드 주장이 중요한 이유는, 이런 겁니다. 당신과 나의 고향은 전라도. 경상도에서 전라도 사람 만났으니까 우리는 친구. 그러니까 전라도라는 보편성 속에 묶여졌지요. 그런데 이번에 기아 타이거즈 야구 왜 그렇게 못 했나? 난 야구는 모르고 축구 좋아하는데. 그러면 갑자기 전라도 사람이라는 공통점은 있는데 취미로 야구를 안 좋아하면 둘이 말이 안 통하는 거예요. 전라도라고 해서 통했는데 그만 축구, 야구 이야기하다가 삐져서 둘이 갈라선다면 어디까지 보편성을 주장해야 돼요?
이럴 땐 누가 맞습니까? 넌 축구 좋아해. 나는 야구 좋아할게. 역시 개인뿐이야. 이럴 땐 로스켈리우스가 맞는 것 같아요. 인간은 각각 개인뿐이다. 여기서 나중에 주체사상이 나옵니다. 아직 이 시대는 봉건사회기 때문에 너무 주체사상을 하게 되면 민족도 국가도 없고 성경도 내가 알아서 성경 해석한다고 하면 당장에 이단 됩니다. 성만찬할 때 신부가 예수님이 몸이라고 떡을 주는데 “나는 이걸 예수님의 몸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하면 당장 종교재판에서 사형당하니까 살기 위해서는 적당한 선에서 아직 주체 주장을 못하고 약간은 봐주는 쪽으로 해야지요. 그게 아벨라드가 되는 겁니다.
아직 중세에요. 나중에 교회 안 다닌다고 하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마귀도 죽이는 시대에 아벨라드는 절충을 선택합니다. 적당한 선에서. 개인 권리도 보장해주고 역시 우리는 형제라고 죽으면 같이 천국 간다고 인정해주는 쪽이 아벨라드에요. 이렇게 아벨라드가 절충안을 제시하면서 삼위일체에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기욤 같으면 교회가 시키는 대로 무조건 해야 되고, 로스켈리우스는 교회고 뭐고 무시하고 자기주장을 펴면 되는데 절충안이니까 이렇게 됩니다.
그냥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고 개인에게 의지가 있어요. 그래서 피터 아벨라드를 의지주의라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지정의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의지 아닙니까. 지금까지는 지식으로 교회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성도가 됐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에게 전달됐다. 오케이.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이 우리한데 전달됐다. 그것도 동의. 하나님의 의지가 나한테 의지됐다. 그것도 오케이 해버리면 그 다음에 어떤 현상이 벌어집니까? 내가 내 의지 대로 하는 행동도 뭐가 돼요? 곧 하나님의 일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갑자기 집단에서 뭐로 가까워요? 내가 임의대로 결정하는 것도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다는 것으로 감 잡겠지요. 점점 더 집단에서 서서히 주체가 강화되는 쪽으로 흘러가면서 의지론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시대가 바뀌면서 언제까지 사람들을 족쇄로 채울 수는 없고 서서히 개인의 자유의 영역이 넓혀지는 시대로 접어드는 거예요.
예를 들면 교회 처음 올 때는 “목사님, 주일에 몇 시까지 와야 돼요?” “11시지만 10시 반에는 와서 전도사 인도에 따라 찬양해야 됩니다.” 하면 초짜는 그냥 10시 반에 와요. 6개월도 안 되서 11시 10분에 옵니다. 드디어 감 잡았다고. 이게 뭡니까? 샹뽀의 기욤에서 로스켈리우스로 빠지는 거예요. 교회도 오고 싶을 때 오겠지요. 성경에 보니까 내가 성전이라 하는데. 너무 갔지요. 개인적으로 해버리면 광고시간에 광고 들을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 중간지점, 아벨라드를 채택하겠지요. 내가 의지하는 것도 주께서 인정하는데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참고는 선배들, 믿음 좋은 사람, 성경을 많이 아는 전문가한데 뭔가 알아서 거기에 맞추어서 내 의지대로 거기다 보태야 내가 하나님 뜻에 위반하지 않고 내 의지가 옳은 방향으로 갈 수 있겠다는 감을 잡겠지요.
11시 10분 돼야 오니까 목사가 보다 못해서 제발 10시 반까지 오라는 소리는 안 하는데, 이런 게 있어요. 11시 됐는데 빈자리가 보이면 지금 설교 준비한 걸 머리에 집어넣는데 도움이 안 돼. 일반 사람들은 몰라요. 목사들은 알아요. 이것 때문에 일주일을 바짝 긴장하며 사는데 11시 됐는데도 교인들 안 오면 저번 주도 빠졌는데 오늘도 빠질 모양이지. 온갖 신경 쓰면 설교 준비에 교인들이 전혀 보탬이 안 되는 거예요.
“목사가 예배 인도할 때 긴장된 상태를 교인들이 도와줘야 긴장 되지만 생각한 대로 하게 되면 은혜로 돌아가는데 여러분이 완전히 시장통에 오는 것처럼 지 마음대로 오게 되면 준비된 은혜가 안 나오면 여러분만 손해입니다. 그러니까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할 때 나 개인만 로스켈리우스가 되면 안 되고 적당하게 기욤도 좀 협조해줘야 되는구나. 그래서 그게 아벨라드입니다. 오늘날 똑같이 적용되는 거예요.
그 다음에 신비주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베르나르는 아벨라드를 아예 이단으로 고소해서 잘리게 만든 사람인데 이 사람은 어떻게 백성들에게 요령껏 편하게 신앙 생활하라는 것이 사제나 수도사들의 임무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주의 종이 되었으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한테 가도록 해야지 “여러분, 신앙 생활하기 힘들지요. 돈도 벌고 신앙생활하고 양쪽 다 하려니 힘들지요. 제가 편하게 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다른 생각 말고 편한 교회 다니세요.”라는 발상 자체가 하나님이 내려주신 발상이라고 할 수 있느냐?
사람들에게 인기 있을 줄은 모르지만 결국 천국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데 그게 신학의 바른 태도는 되지 못한다. 따라서 교회에 불만이 있고 교회 생활을 어떻게 할지 모를 때는 오히려 사제가 세상 사람과 결탁해서 그들 편에 서지 말고 사람 편에 서면 주의 종이 아니잖아요. 오직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모범을 보여야 된다. 그게 신비주의입니다. 세상은 다 헛되다. 요령껏 믿으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깊은 것을 캐내서 그들로 하여금 요령껏 신앙 생활한다는 자체가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일깨워서 하나님 쪽에 더 가까이 가도록 조치하는 것이 옳은 사제가 아니냐는 것은 베르나르에요.
베르나르의 주장이 그 당시 교회에서 존경받았겠습니까? 거부당했어요. 왜? 신부들은 관심 없어요. 신부들은 하나님 관심 없거든요. 신부들은 어떻게 밥 먹고 사느냐에 관심 있지.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너만 믿음 좋나?” 이 사람들도 역시 아니야.
그러니까 신학이란 하나님 위주도 아니고 사실 백성 위주도 아니에요. 그 당시 권력 쥔 사람들이 교회고 땅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아닙니까. 그 교회 권위를 우파든, 좌파든 건드리면 조져요. 신학이 원래 그런 거예요. 너무 믿음 좋아도 안 되고, 너무 믿음이 개판 되도 안 되고. 그래서 좌로나 우로나 너무 치우치면 안 되고 적당히 권력이 유지되는 쪽으로 그냥 가자는 겁니다.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는 취지를 알겠지요. 신학을 하게 되면 곳에 따라 각종 노림수들이 온갖 것이 다 나와요. 앞으로 재미있어요. 신학하면서 자기 정당화하는 핑계들이 있어요. 그 행동의 정당화는 오늘날 그대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신학할 때 순수한 신학하는 줄 알지요. 다 노림수가 있다니까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림수는 다 나와요.
인간의 의지로 하나님께 찾아가는 그것도 잘못됐다. 인간의 지정의를 담은 진짜 순수한 하나님과 만남, 이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맥락과 같이 예수님의 겸손과 가난함에 낮아짐에 참여함으로써 신적 실재에 들어간다.
그러면 베르나를 평해야 되겠지요. 이 베르나르의 주장이 옳습니까? 우리는 양쪽을 이야기하면 중간에 있는 사람이 옳아 보이지요. 그런데 아벨라드와 베르나르가 대결하는데 어느 쪽이 맞는 것 같습니까? 둘 다 아니에요.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비적인 감정과 관계없어요. 우리가 얼마나 짜릿했느냐, 황홀했느냐? 그게 말씀 해석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우리가 짜릿하면 구원받습니까? 신비체험하면 구원받습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은 오직 예수님의 행함으로 구원받잖아요. 예수님께서 자기 피에서 나온 권력으로 우리를 구원하면 구원받잖아요. 그럼 내가 짜릿하다, 황홀하다. 이게 의미 있습니까? 자기의 신비로운 체험을 스스로 부인할 수 있어야 돼요.
베르나르는 신비주의고 아벨라드는 의지주의고, 로스켈리우스는 지식적이고, 기욤은 권력적이고. 온갖 것 다 나왔지요. 아직까지 멀었어. 계속 나와요. 그래서 신학의 변천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어. 그 사람들의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에요. 자기 딴에 체계를 갖추어서 하는데. 이러한 낮아짐, 겸손함. 얼마나 좋은 이야기입니까. 그게 결코 천국 가는 모습이 아닙니다. 세리와 창기가 구원받은 것을 생각해 보세요. 결코 이런 모습이 아니지요.
그 다음에 보나벤투라. 이 사람은 감정주의적 정서라고 하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철학 중에서 취할 것은 버릴 것은 버리는데 아리스토텔레스철학에서 뭐가 문제냐? 삼위일체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버리자. 그러면 취할 것은 뭐냐? 삼위일체가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거기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을 집어넣자고 한 사람이 보나벤투라에요. 아리스토텔레스를 주장한 사람이 뒤에 나와요.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약간 앞선 사람이 보나벤투라지요.
이 사람 주장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란 게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모든 존재에는 목적이 있다는 거예요. 목적과 목표를 구분하라 했지요. 도달된 상태를 목표라 하고 가는 방향성을 목적이라 하는 겁니다. 그 목적이 뭐냐? 부동의 신, 움직이지 않는 신을 향하여 우리는 부단히 움직여야 된다. 굉장히 종교적이지요. 하나님은 부동의 동자,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을 움직이게 만든다. 그렇게 성경에서 신을 이야기해도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마디로 이야기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분에서 움직이는 것이 나온다. 따라서 움직이는 것은 목적이 있다. 언젠가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히브리서 4장에 나오는 마치 안식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고생하지만 천국 가면 편히 쉰다. 쉰다는 것은 안 움직이잖아요.
그래서 보나벤투라는 그것 참 멋있다. 그 좋은 걸 버릴 필요가 없단 말이죠.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독교 들어오기 400년 전의 사람이 이미 다 갖췄으니까. 움직이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 곳으로 가려면 여기서 반드시 서열이 생기고 계급이 생기겠지요. 흔히 질서. 이것 다음에 다음 단계, 이것 다음에 다음 단계. 오늘날 교회에서 성화론 주장하고, 제자 훈련하는 것이 결국 보나벤투라의 사상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주장은 기존 교회에서 대환영을 받겠지요. 이 사람의 주장은, 지금은 시작이지만 나중에는 결국 통합을 하기 때문에 그 마지막 모든 것이 신의 운명, 신의 세계 속에 하나가 될 때까지 인간은 개별적으로 해야 된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창조주의 모형이요, 그림자기 때문에 목적을 향하여 나아갔어요. 간단하지요. 지금 몇 분 사이에 네 명을 넘겼어요. 그 사람들이 평생 동안 한 것을 우리는 20분도 안 되서 다 했어요. 하지만 해야 됩니다. 바로 그들의 아이디어가 지금 우리 아이디어에서 나오기 때문에.
드디어 토마스 아퀴나스, 천주교의 대부. 모든 천주교의 신학은 여기서 기초가 잡혀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라고 하면, 여기 세 번째 줄에 나오지요. [은총론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한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이해하기 쉽겠지요.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범죄했다. 하지만 은혜를 주기 위한 범죄였다. 이 말은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깨어지지 않고 불씨가 남아있듯이 불씨 같은 것이 하나님 형상으로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은총은 항상 교회로부터 와요. 개신교와는 다르지요. 요새 개신교는 그렇지만.
모든 은총이 추상적이 아니고 실제적이에요. 실제로 눈에 보입니다. 그게 성만찬이에요. 예수님의 피와 예수님의 살, 그리고 세례. 그걸 받아야 은혜가 와요. 그 외에 다른 계통으로 은혜가 안 옵니다. 왜냐하면 이건 주께서 죽으시던 밤에 주께서 세운 예식이기 때문에 그 예식에 대해서 비껴가면 은혜가 안 오고 또 참여하더라도 자기 죄를 분별치 않고 참여하면 은혜는커녕 저주를 받을 뿐이기 때문에 자기를 살핀 후에 예수님의 성만찬에 참여하게 되면 거기서 하나님이 약속한 바기 때문에 반드시 은혜가 온다.
따라서 성만찬 하나 유지되기 위해서, 아까 온누리교회에 생방송하는데 직원이 50명이라 했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온다는 중요한 예식을 하는데 얼마나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달려들겠습니까. 왕이라도 귀족이라도 성만찬에 참석 못하면 그것은 어떤 나라에서도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누가 그 사람을 죽여도 “그 사람 왜 죽였어?” “까불잖아요.” “그러면 살인죄인데?” “그런데 그 사람은 사제한테 잘려서 6개월 동안 성만찬에 참석 못한다고 하던데요?” “그래? 네가 죽인 것은 하나님의 징벌적 차원의 조치였다. 성만찬도 참석 못하는 인간은 죽어도 마땅해.” 그런 시대였다니까요.
그러니까 그 당시 토마스 아퀴나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큰소리쳤는지 몰라요. 인간의 운명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교회가 요물이라.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니까. 칼빈도 그랬어요. 취리히가 도시국가에요. 칼빈이 프랑스에서 쫓겨난 사람이에요. 도시국가라는 것은 자기들끼리만 그만이어요. 그것을 이상적인 기독교 국가를 만든 겁니다. 그래서 칼빈의 눈에 어긋나면 무조건 이단이에요. 행동도 도박금지, 뭐 금지, 나 같으면 술, 담배 못하게 하고. 하여튼 음주가무 일체 못하고 그것 한 사람은 성만찬에 참석 못해요. 칼빈교, 개신교에 참석 못하면 천국에서 잘린 거예요.
여러분, 옛날에는 참 답답했다고 하겠지요. 로스켈리우스가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이것은 꼼짝도 못하고 아무리 신부 너도 돈 좋아하고 바람피우고 하다가 “그럼 너 오늘부터 성만찬 참석 못해.” 하면 깨갱하는 거예요.
그럼 오늘날은 왜 이렇게 됐는가? 그것을 규명한 책이 [예수는 괴물이다]라는 책입니다. 왜 기독교는 이렇게 됐는가? 오늘날 교회, 기독교를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게 되었는가? 도대체 어떤 전통과 역사를 거쳐 왔기에 이렇게 됐는가? 그게 자본주의사회 때문에 돈보다 더 귀한 것은 없는 시대에 교회는 과연 무엇이고, 기독교의 하나님은 무엇이고, 십자가, 부활은 무슨 의미냐를 규명한 책이에요. 돈이 최고인데. 돈이 이미 선점했거든요.
그러면 교회는 뭐고, 신학은 뭐고, 천국은 뭐냐? 이미 시대 자체가 옛날에는 교회 없이는 못 사는 시대고, 오늘은 돈 없이는 못 사는 시대고. 배경 자체가 조명시설 자체가 바뀌니까 우리는 이 시대가 전부인 줄 알지만 옛날 시대를 집어보면서 돈밖에 모르는 시대가 우리의 신앙을 원천적으로 가리고 있지 않는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은 이겁니다. 이 사람도 의지주의거든요. 벌써 아벨라드 이후에 의지주의로 넘어왔어요. 하나님은 모른다. 하나님은 인간 쪽에서 다가갈 수 없다. 굉장히 복음적으로 들립니다. 하나님이란 인간 쪽에서 아무리 접근해도 알 수 없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쪽에서 내린 계시, 성경말씀뿐이다. 이런 이야기하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어거스틴과 동일한 전통에 서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성경이 주어졌는데 중요한 것은 성경만이 아니고 우리가 갖고 있는 영혼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주장에 뭔가 느낌이 이상하지요. 성경책만이 계시가 아니고 우리 몸, 우리 영혼도 하나님의 계시가 되겠지요. 그럼 그 뒤에 필연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정답은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영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고, 하나님 뜻을 어길 수도 있고. 이것은 우리가 하기 나름이지요. 우리가 이성과 감정과 의지를 어떻게 잘 조종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께 구원받을 수도 있고 탈락될 수도 있는 문제가 생기지요. 시작은 좋게 했는데 뒤에 오니까 수상해도 많이 수상하지요.
‘믿음+행함’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양쪽 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는 겁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처음에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모르지요. 그런데 어거스틴에 의하면 하나님이 은총을 줄 때는 믿을 수 있지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오케이 인정합니다. 인정하는데 ‘믿음+행함’이지요. 행함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은총 주셔야 행할 수 있다. 그런데 은총을 받은 행함이냐는 인간이 계시 수용자니까 인간이 자기 관리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천주교에서 낙태가 안 되지요. 왜 낙태에 반대합니까?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은총이니까.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은총에서부터 시작돼요. 은혜를 받은 사람답게 낙태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진정 네가 이 세상 모든 것이 은혜라면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고 남들 보기에 부끄럽다고 낙태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총을 스스로 빼내는 것이니까 스스로 은총을 부정하는 행동에 해당된다. 따라서 그런 사람은 우리 천주교에서 필요 없다고 나선 겁니다. 그게 바로 천주교신학이에요.
제주도 시민들은 사람이죠. 사람은 생명이죠. 제주도 시민들이 전쟁에 휘말리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위협받겠지요. 그러면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세우면 안 되지요. 그러니까 신부들, 수녀들이 가서 데모하는 거예요. 송전탑에 고압전류가 흐르지요. 그러면 밀양주민들은 생명이니까 살려야 되겠지요. 그래서 송전탑 세우는 걸 반대하는 거예요. 송전탑 안 세우면 내년 여름 되면 또 전기가 모자라는데. 그것은 생명과 함께 고통을 나눠야지요. 이제 성당에서 왜 자꾸 민주화 운동하는지 아시겠지요. 이게 무슨 신학이라고요?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들어보면 하나님의 은총은 구원받는데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온 우주 섭리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으로 유지되니까. 따라서 그 사실은 아는 성도라면 거기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야 돼요. 어떻게? 인간은 육과 영혼으로 돼있으니까 육은 죽이고 영혼은 하나님의 은총의 힘으로, 꼭 이걸 집어넣어요. 왜냐하면 어거스틴의 전통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 행함으로 합시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모두에게 은총이니까. 하나님 은혜대로. 그러니까 누구 말대로 은혜대로 헌금해야 되고, 은혜대로 전도하고. 이게 토마스 아퀴나스에요.
성당에 연보도 그냥 내지 말고 은혜 받은 대로 연보를 해라. 이것은 고린도후서 8장과 똑같은 이야기잖아요. 너희가 은혜 받은 대로 연보하라. 토마스 아퀴나스가 뭐가 나쁜데? 천주교가 뭐가 나빠요? 성경대로 같은데. 루터가 왜 반대하는데? 성 베드로성당 짓는다고 면죄부 판 거? 성당을 지어야 무지한 생명들이 성당에 가지. 안 그러면 우산 쓰고 예배드릴까. 성당 지을 때 어떻게 했느냐고 너무 따지지 말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는 겁니다. 골프 치려고 성당 지었습니까? 많은 생명들을 살리기 위해서 성당 짓는데 성당 짓기 위해서 돈만 아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성당의 필요성을 이야기해서 헌금하게 했는데 이게 뭐가 나빠요?
형광등이 나가버렸다. 목사가 광고시간에 형광등 나갔는데 어떻게 할까요? 하니까 형광등 없으면 지옥 갑니까? 그렇게 나오면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그게 말이 되느냐 이 말이에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이 뭡니까? 안식 아닙니까. 움직이는 것들은 움직이지 않는 곳으로 가잖아요. 그 가운데서 성당 짓고 성만찬하는데 필요한 신부들 있고 도와주는 사람들 필요하고 복장 갖춰서 무식한 사람들도 알게 하고. 성당에서 유행가 부를까요. 수녀들이 2층에 앉아서 찬송 부르는데 점심도 먹여야 될 것 아닙니까. 그 모든 움직이는 섭리가 하나의 목적,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하겠다는데 그게 왜 나쁘냐 이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천주교는 루터의 말을 많은 대목에서 수용해요. 그런데 루터가 너무 나갔다는 거예요. 그냥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지 말고 얼마든지 개선의 여지가 있는데 너무 심하게 했다는 거지요. 루터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고, 칼빈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고 얼마든지 포용할 수 있다는 거예요. 천주교신학은 너희들보다 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얼마나 포용하는지 중들도 포용하는데.
심지어 교회밖에도 구원 있다고 주장합니다. 왜? 모든 것이 생명이고, 생명은 뭐가 있다? 모든 생명은 은혜에서 나왔고 따라서 성당 안 다닌다고 안 도와주면 안 되고 모든 게 하나님이니까 영광이고. 그래서 은총을 아는 사람은 은총 되게 해야 한다. 어떻게? 우리 속에 있는 육을 죽이고, 영혼은 하나님 주신 요소거든요. 아리스토텔레스철학에 의하면. 하나님 주신 영혼이니까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불씨를 키우면 영혼이 새롭게 형상을 입게 되면 그것이 곧 성경에서 이야기한 진리라는 것이 오늘날 천주교신학입니다.
뭐가 잘못됐을까요? 우리는 신부가 안 되고 왜 성당에 안 나갔습니까? 이렇게 옳아 보이는데. 교회뿐만 아니고 온 우주의 생명을 찾아가는데 얼마나 개성적인 범주를 갖고 있습니까. 루터는 말하기를 십자가가 빠졌다. 이렇게 돼버리면 우주론적이지요. 오늘 여기까지 합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신학을 하면서 우리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되비춰봅니다.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말씀이나 신학을 거론하는 이 모습을 신학 속에서 발견하면서 예수님 십자가 피 아니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인간은 모든 자기 행동에, 자기 조직에, 자기 권력에 정당화하는 거예요. 하나님에 동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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