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강-에스겔22장 1-5(피 흘린 죄)131106-이 근호목사
64강-에스겔22장 1-5(피 흘린 죄)131106-이 근호목사
이름 : 오용익(IP:211.223.103.85)
64강-에스겔22장 1-5(피 흘린 죄)131106-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2장 1절에서 5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83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2:1-5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네가 국문하려느냐 이 피 흘린 성읍을 국문하려느냐 그리하려거든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그들로 알게 하라 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 가운데 피를 흘려 벌 받을 때로 이르게 하며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 더럽히는 성아 네가 흘린 피로 인하여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왔고 네 년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노라 너 이름이 더럽고 어지러움이 많은 자여 가까운 자나 먼 자나 다 너를 조롱하리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싶은, 은근히 기대하는 그 말씀과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모든 하나님의 좋은 말씀은 내 뜻을 이루고 내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도움에 되고 보탬이 되는 말씀들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말씀을 주지 않는 이유는 우리 자신부터 내가 누군지를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매일 거울 보면서 안다고 자부하지만 진짜 나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우리자신을 살피고 검사하고 조사한다고 해서 밝혀질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하나님, 제가 어떤 존재고 어떤 인간입니까?”라고 물으면 하나님께서 이렇다 저렇다 하시기 전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분을 보내셔요. 이 본문 같으면 선지자겠지요. 신약 같으면 예수님이겠지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떤 분을 보내셔서 그 하나님의 보낸 자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가 바로 우리의 진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선지자를 보냈는데 그 선지자가 그냥 아무소리도 안하고 우리 앞에 서 있지는 않아요. 뭔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우리에게 퍼뜨릴 때 그 말씀을 우리가 듣는 순간 우리는 그 말씀을 외면해버려요. 그게 우리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궁금했던 것, 대체 내가 누구며 내 운명, 마지막 모습은 어느 쪽인가가 참 궁금했는데 하나님께서 미리 살아생전에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의 그 모습이 바로 우리 모습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제가 만나본 적이 있는 어떤 분인데 오늘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나이가 57세밖에 안되니 저보다 어리지요. 저도 만나본적이 있어요. 사람이 훤하니 얼굴도 좀 크고 참 후하게 생긴 분이고 공직에 있던 분입니다. 저보다 젊은 사람인데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 제가 느낀 것은 ……, 물론 교회 안다닌 사람이지요.
어차피 인생은 저렇게 사라지는데, 죽는다는 것이 숨만 거두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왔던 모든 긴긴 인생이 한 순간에 없어져버리는 순간이거든요. 이 땅에서 무슨 일을 남겼다 해도 그 사람이 죽었다는 말은 그 사람이 달고 다니던 긴 모든 풍문도 다 한꺼번에 날라가 버리고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별로 충격적인 것은 그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이 더 충격적이에요. 그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었다는 거예요. 있어도 없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있을 때 그렇게도 울고불고, 싸우고, 닦달내고, 잘 했니 못 했니, 어쩌고저쩌고 한 그것도 너도 나도 죽는 마당에서는 다 부질없는, 헛되고 소용없는 세월을 보낸 겁니다.
저렇게 죽을 것을! 이 말을 바꿔야 되겠어요. 저렇게 사라질 것을! 흔적도 없이. 있었나? 없는 거야. 없으니까 이야기할 것도 없어요. 이미 없어졌으니까. 그것이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도 해당될 때 우리는 나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 뭡니까?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내가 나에게 의미 있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만드신 것은 우리하고 누가 만나게 하는데 의미가 있어요. 예수님과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과 만날 때 자기가 곧장 사라질 존재인줄도 모른 채 그 하나님의 말씀은 틀렸니, 하나님께서 생각을 잘못 하셨네, 말씀이 너무 심하니 어쩌니, 이러쿵저러쿵 하는 그 모든 헛소리가 바로 하나님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서 잠시잠간 이 땅에 등장했다가 곧장 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남기고자 하는 사람은 우리가 아니고 우리한테 피해본 예수님만 남기는 겁니다. 천국이란 바로 우리한테 밉상 받고 천대받았던 그 분의 세계입니다. 누가 합류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다 그분을 미워했는데, 우리는 다 그분을 싫어했는데. 그분을 좋아하신 분은 우리 하나님밖에 없어요. 하나님만이 좋아하는 그분을 우리는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에 들지를 않았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몰라요. 개인적으로 자신을 멋지게 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 분을 보내니까, 나 자신을 멋지게 봤는데 그 멋지게 본 자신의 모습에 예수님의 모습이나 하나님의 말씀은 낄 자리가 없어요.
왜, 나는 너무 멋지고 잘났기에. 이 잘남을 유지하게 위해서는 내가 싫어버린바 된 그 성경말씀이나 그리스도는 그림자도 얼씬대지 말아야 된다는 평소 우리의 본심으로서 하루하루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못됐어요?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곧장 죽으면 사라질 건데. 사라지면 곧장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평생을 응축해서 손에 쥐면 녹아버린 솜사탕처럼 없어져요. 인생이라는 것이 뭔가 손에 있어야 하는데, 고생도 많이 했고 걱정도 많이 했고 수능도 공부하고 기도도 많이 했는데 쥐어보니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어요. 이게 무슨 이런 조화가 다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말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사람만 있다면 저는 굉장히 고맙겠습니다. 이 말씀을 주시면 이 내용이 무슨 내용이냐고 묻는 사람도 거의 없어요. 아예 하나님 말씀은 나하게 상관이 없다고 단정 짓고 살아가고 있거든요. 곧 죽어가면서도, 사라지면서도. 하하, 호호, 웃지만 그 웃음이 마지막 웃음이 된다는 것을 누가 알겠어요? 자기가 웃는 것이 마지막 웃음이고 결국 웃음만 남기고 그 웃는 사람이 없어져버리는 그 경우를 주께서 늘 만드시거든요.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성경에 나와 있듯이 말씀에 입각해서 죽고 사는 겁니다. 자기가 살고 싶다고 해서 더 사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그만 죽으려고 한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니고 그 주관은 말씀이 쥐고 있지 당사자인 내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나는 내 운명에 대해서 하등 손쓸 수 없는, 배제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신 바짝 차려서 “그렇다면 목사님! 에스겔 22장의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이제 진지하게 이 말씀을 들여다 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듣기 싫다고 외면할 수 없는 입장인 겁니다.
왜냐, 우리는 이 말씀을 듣기 위해서 태어났기에 외면할 권리가 없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 말씀이 무슨 내용입니까?”라고 물어야 되고 그 답변은 이렇습니다. “네가 생각하는 현실은 현실이 아니고 이 말씀이 바로 현실이다.” 현실이라 하는 것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말씀을 가지고 택배 보내듯이 우리에게 줘야 되는 겁니다. 줘야 그게 현실입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뉴스를 보는데 당사자는 심각하겠지만 보는 사람들은 재미있는 뉴스가 있었어요. 어떤 여자 분이 화장실에 갔는데 화장실 문고리가 고장 났어요. 5일 동안 갇혀 있었습니다. 굶어죽기 직전에 구출되었답니다.
그 안에 있을 때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아무리 고함쳐도 문 열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것도 5일 동안이나. 월, 화, 수, 목, 금, 5일 동안입니다. 그것도 화장실에 갇혔어요. 그동안 화장실에 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사람은 5일째 누가 문을 열어줘서 밖으로 나왔는데 그 사람은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다른 현실이 있다는 것을 알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화장실이라는 현실을 맛보고 다시 거기서 나오는데 실패했거든요. 그 사람이 문 열어 주세요, 할 때는 이미 이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이 따로 있다 해서 문 열어 달라고 했는데 5일 만에 구출된 겁니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은 다른 현실이 없다고 생각해요. 다른 현실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진짜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문 열어달라고 두드릴 수 있는 사람만이 구원받아요. 이 세상 말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감 잡은 사람만 “제발 문 열어주세요. 제가 지금 50년, 60년을 갇혀 살고 있으니 빨리 문 열어주세요.”라고 외칠 것 인데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살다 죽으면 그만이라고 여기니까 “살려주세요, 구원해주세요, 구출해주세요, 못살겠으니 건져주세요, 예수그리스도여!”라는 말을 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말씀은 화장실 안의 현실이 아니고 화장실 밖의 현실이 우리보고 “너는 거기서 살래, 죽을래?” 라는 소리로 이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그런 입장에서 오늘 본문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스라엘아! 너희들이 살고 있는 그 예루살렘은 피로 물들어서 저주받은 도성이다. 그러니까 너는 거기서 빠져나와야 돼, 구원되어야 돼, 구출되어야 돼.”라는 소식을 하나님께서는 현실로 이야기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자,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현실이 진짜 현실인데 우리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주니까 “맞아. 살아야 되겠네요. 이 도성이 어떤 도성이라고요?” “저주받은 도성이다.” “저는 살고 싶습니다. 저는 살아야 되겠습니다.”라는 반응을 우리가 보여야 된다는 겁니다. 따지지 말고. 본문 3절, 4에 보면 “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 가운데 피를 흘려 벌 받을 때로 이르게 하며 우상을 만들어 스스로 더럽히는 성아 네가 흘린 피로 인하여 죄가 있고 네가 만든 우상으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혔으니 네 날이 가까왔고 네 년한이 찼도다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노라.”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누구냐 할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줄때만 우리 자신을 알아요. 말씀이 오지 않으면 우리는 굉장히 점잖고 착하고 똑똑하고 훌륭하고 이 땅에 살만한 가치를 충분히 품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오해해서 그렇게 늘상 생각하는 것이지 진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말씀에 의해 저주받아야 될 도성에서 웃어가면서 춤추면서 살아왔던 한평생입니다.
자, 이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았으니 이제는 구원하는 방식을 알아야 되겠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에 입각해서 우리가 저주받은 도성에 살고 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구원하는 문제를 말씀드리기 위해서 3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 가운데 피를 흘려 벌 받을 때로 이르게 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피를 흘렸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이 우상을 섬겨서 피를 많이 흘렸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는 겁니다. 피를 흘렸다니.
피를 흘렸다는 이 대목, 선지자가 이 대목을 이야기할 때 정말 그 당시에 구원받을 사람 같으면 피를 흘린 도성이라서 저주받은 도성이라고 할 때 먼저 생각할 것이 뭐냐 하면, 그 앞서 주신 하나님의 율법, 언약이 있어요. 그 언약을 염두에 두고 지금 에스겔 선지자가 이 예루살렘 성을 피를 흘린 도성이라고 언급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이렇게 정돈되어야 해요. 이게 지금 이방인이 아니고 유대인입니다. 차분하게 다시 해 봅시다. 우리가 지금 이스라엘사람이고 유대인입니다. 우리는 이 이스라엘 역사 이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이스라엘을 그동안 진행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22장에서 에스겔 선지자가 하는 말이 “이 피 흘린 도성이여. 너희들은 피 흘린 값으로 저주받아야 한다.” 어, 피를 흘린 도성이라? 피를 흘린 도성은 멸망되게 되어 있다. 그러면 후다닥 앞에 주신 말씀을 찾아봐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은 하나도 헛되지 않고 그대로 실행시켜 나가고 구현해 나가시거든요.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실 때 그 말씀은 그 근거가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찾아와서 “야, 너는 지옥 가.” 하면 “저는 지옥가기 싫어요.”라고 나오지 말고 그래요? 지옥가라고 했다면 앞서 주신 말씀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고 그 말씀으로 다시 달려가 봐야 돼요.
‘아, 하나님의 기준은 중간에 포기하거나 취소하지 않고 그대로 말씀대로 진행시키는구나.’라고 눈치를 채야 합니다. 저주받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운명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저주받아야 돼.”라는 그 말씀자체가 지금 우리를 구원하려고 하는 작업이 개시된 거예요. 그럴 때는 후다닥 전에 주신 말씀과 현재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일과 연관을 지어보게 되면 ‘아하, 하나님의 일은 모든 것이 말씀대로 착착 진행되어 왔구나.’ 우리는 그동안 주의 말씀을 얼마나 무시했는지 선지자가 와도 죽여 버렸지요.
예레미야 26장 23절에 보면 우리야라는 선지자가 있었는데 그 선지자가 임금한테 바른 소리 했다가 임금이 죽인다고 하니까 애굽으로 도망가요. 애굽으로 도망가니까 애굽으로 도망간 그를 잡아서 죽여 버렸어요. 그때 피 흘린 도성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23장 27절을 제가 읽어볼게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그 예루살렘이 어떤 예루살렘인가?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를 돌로 치는 예루살렘아.” 이 소리를 듣는다고 다 지옥 가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 소리를 들을 때 ‘우리가 싫어하는 바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대로 그냥 밀어붙이는구나. 우리가 선지자를 언제 죽였지? 왜 죽였지? 무엇 때문에 죽였지? 누가 죽였지?’ 이것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면 그 사람은 구원받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우리들 생각으로 돌아와 봅시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실 때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니 그들이 선지자의 말을 못 알아듣도록 하지 말고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능력을 행하셔서 “나 선지자다.” 하게 되면 “환영하겠습니다.” “말씀 전한다.” “듣겠습니다. 아멘, 믿습니다.” 왜 이렇게 하시지 않고 왜 선지자에 대해서 거부반응이 유발되도록 조치를 하셨는가 그 말입니다. 이게 오늘 설교에서 제일 난해하면서도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것은 이피에 관해서 앞서 주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있어요.
레위기 17장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은 고기 없으면 못사니까 짐승을 도살할 때 아무데서나 하지 말고 오직 회막 문 앞에서, 하나님의 장막 문 앞에서 양이나 염소를 잡으라고 한 거예요. 왜? 이 거룩한 땅에서는 하나님이 다루시는 피가 아니면 어떤 피도 흘려서는 안 되는 거룩한 땅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있는 이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만들 때는 피 관리를 하나님이 직접 하십니다. 왜냐, 레위기 17장 12절에 보면 피는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땅이면 생명을 주시는데 그 거룩한 땅에 주신 그 생명은 피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 피는 인간이 다룰 수 있는 피가 아니기에 거룩한 공간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루 농사짓고 직장에 출근하고 사업도 하고 주부들은 가정일 하고, 이런 사람들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을 하나님께서는 하신 거예요. 착하게 살면 구원받는다, 아닙니다. 바르게 살면 구원받는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다루시는 피로 인하여 구원받습니다. 바다에 가서 고기 잡는 어부가 ‘오늘도 고기 잡았으니 이거 팔아서 그 돈으로 살아야지.’ 그게 사는 것이 아니에요.
고기 잡는 어부도 피 없이는, 그것도 자기가 만든 피가 아니고 주님이 만들어주신 그 피 없이는 그 먼 나라에 가서 고기 잡는 그 어부도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런데 어부들, 농부들, 사업하는 사람들은 그런 것 생각 안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자기 나름대로의 현실을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는 현실이 뭐냐 하면, 나는 살아야 돼, 나는 훌륭해, 나는 건전해, 나는 착실해, 나는 반듯해, 나는 착해,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몰라요. 자기 자신이 괜찮은 존재인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스겔 22장, 레위기 17장, 전혀 안 듣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 있는 예수님 말씀도 안 듣습니다. 예루살렘이 선지자를 돌로 쳤다는 그 말씀도 안 듣습니다. 자기 사는 것과 관계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수능 닥쳐서 갓 바위에 올라가서 기도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식을 위해서 정성 바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본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현실이 뭔지도 모르기에 그런 행동을 하는 거예요. 갓 바위나 절에 가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까? 오늘날 교회 가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잖아요.
장사 잘되고 사업 잘되기 위해서 교회 오는 것, 그것은 본인이 누군지를 몰라서 그래요. 우리가 누구냐 하면, 오늘 본문 에스겔에 의해서 피 흘린 자입니다. 이 저주받은 도성에서 저주받아야 될 일들을 매일같이 반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생과 거룩은 하나님만이 직접 다루는 피가 곧 생명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양이나 가축을 도살 할 때는 회막 문 앞에서만 하도록 했습니다. 회막 문이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로서 하나님이 정해준 거예요. 그 앞에서 잡습니다.
그 앞에서 잡을 때만 하나님은 그 땅을 더럽히지 않은 것으로 쳐줍니다. 그러고 난 뒤에 진짜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피는 회막 문 안, 나중에 다윗 때에 가면 성전이 되지요, 성전에서 제사지낼 때 흠 없는 양, 희생의 양의 피가 바로 우리 죄를 용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딱 한 가지가 남았어요. 성전에서 직접 하나님이 다루시는 그 희생의 피, 희생의 피를 성전이 깨지면서 사회적으로 확대시켜 버립니다. 확대시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죄 없는 선지자들이 구원되어야 된다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피 흘림 당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겁니다.
성전 안에서는 순한 양을 제사장이 잡아서 피를 흘리고 기름을 짜냅니다. 그래서 성전 안에서 일어난 그것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죄 용서가 되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 멸망시점, 성전이 깨진 시점에서는 성전에 있던 그 어린양이 어떤 인격체로 구체화되는데 그 중간과정이 뭐냐, 선지자의 고난입니다. 마태복음 23장의 그 대목을 다시 읽어볼게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예루살렘이 어떤 기능을 해야 되는가? 선지자를 죽이지요. 이 선지자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이 선지자는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달고 전했을 뿐이에요.
그들을 죽이는 것은 곧 누구를 죽이는 것과 연관되느냐 하면 바로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 자신을 죽이는 것이 돼요. 파송된 선지자를 예루살렘이 죽인다는 그 말은 ‘곧 너희들이 나를 죽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흠 없는 어린양을 죽여서 그 죽임에 의해서 그 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 그 작업이 이제는 성전이라는 경계를 벗어나서 성전의 확대라는 개념으로서 이제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문턱에 지금 에스겔 선지자가 서 있습니다. 그 작업을 하시면서 세상 모든 것을 어두움, 죄악 됨,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는 이 세상, 그리고 현실이 뭔지도 모르고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화장실에 5일 동안 갇혀 있어도 그 화장실이 자기가 알고 있는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57세의 그 공직자는 복음도 모르고 젊은 나이에 그냥 죽었어요. 그가 평생 동안 배워온 것은 화장실에 갇혀 있는 그 현실이 전부였습니다. 화장실 밖에 또 다른 현실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것이 전부인줄 알았어요. 그 사람에게도 교회가 전도도 했을 것이고 말씀도 들었을 수도 있지만 자기가 잘난 입장에서는 성경이야기나 복음 이야기는 들을 필요조차 없는, 그저 천대해도 괜찮은 소리인줄 알았습니다. 지금도 교회들마다 복음을 전해요. 처음 교회 온 사람에게도 전하고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그랬는데 상처를 받았다느니 삐졌다느니 해서 복음을 전하면 무조건 당신 말 때문에 상처받았다, 이렇다, 저렇다, 당신만 믿는 줄 아느냐,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우리가 잘났는데 잘난 우리보고 저주 받아야 마땅하다는 소리를 왜 하느냐?” 하는 겁니다.
어느 글에 보니까 인터넷에 저에 대해서 평을 해놓았어요. “이 근호 목사는 모든 것을 죄라고 규정하는 사람이다.” 그 말이 맞잖아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육신밖에 없어요. 인간은 없거든요. 그런데 자기는 잘난 인간이라는 거예요. 또 어떤 데는 “너만 잘났나?” 이러고 있고. 평소에 얼마나 자기 잘남을 생의 목표로 삼았으면 “너만 잘나서 복음 아나? 나도 잘나서 복음 안다.” 그 잘남과 잘남의 경쟁구도로만 가고 있으니 참 사도바울도 고생 많았다 싶어요.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 받는다.” 이게 사도바울이 잘나서, 잘난 체해서 그런 겁니까? 진짜라서 그런 거예요.
진짜 하나님이 보낸 사도이기에 그런 소리 하는 거예요. 이제는 확대되었습니다. 성도가 이 땅에 흠 없이 죽어야 할 어린양 같은 신세, 이 신세에 대해서 우리는 감지덕지해야 되고 세상의 어떤 영광도 구하지 맙시다. 영국여왕하고 밥 먹었다고 해서 부러워하지 마시고요, 영웅은 바로 우리가 영웅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에요. 황금마차 타면 우리도 기분 좋을 거예요. 아마 자랑 질 우리도 할 겁니다. 하지만 진짜 하나님 보시기에 영웅은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 것을 알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피안에만 영생이 들어있다는 것을 믿고 전하는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다시 보게 하시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 다시 알게 하옵소서. 외롭기도 하고 정말 알아주는 사람 없고 밉상만 받는 길이지만 바로 그 길이 영생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을 오히려 감지덕지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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