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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31101b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실패의 자리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131101b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실패의 자리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1101b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실패의 자리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는 제사라는 것이 흐름이었고 그 흐름의 종착점은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피를 흘리지요. 피는 제사할 때 제물이 피를 흘리잖아요. 제물은 누굴 닮았는가?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잡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잡는다고 보면 돼요. 예수님이 내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했잖아요. 내가 바로 너희들이 매일같이 잡았던 양이, 양 잡으라고 했던 말씀 속의 양이 바로 나였다. 세례요한이 이야기했지만 예수님 자신이 유월절 양으로 오신 거예요.

그걸 왜 사람들은 몰랐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가 흐름으로 분해된 게 아니고 자기 존재가 자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자꾸 말씀을 하다보니까 이 땅에서 고생하지만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가야지. 이렇게 자꾸 자기 사는 쪽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다보니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존재고 나는 존재도 아닌 흐름에 불과한 걸, 그냥 안개인데 우리가 자기 자신을 영원한 불멸의 존재로 보거든요.

불멸이란 그게 저주에요. 안 죽는 게 저주에요. 좀비 보세요. 이게 얼마나 저주입니까. 죽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것도 아니고. 참 저주도 보통 저주가 아니에요. 콱 죽으면 차라리 축복이에요. 사람은 죽어도 안 죽습니다. 기어이 마지막 때에 다 불러내요. 농땡이 부려도 나중에 종례시간에는 다 기어 나오는 것처럼. 어디 숨어도 다 나와요. 호출 다 합니다. 사람은 한 번 태어났으면 더 이상 죽는 건 없어요. 그러기에 인간 자체가 저주스럽지요.

목적, 목표를 만들게 되면 문제는 그것이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린 거예요. 불꽃을 터트린 게 문제에요. 터트리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아요? 깊은 허무와 허탈의 늪에 빠져있습니다. 삼성과 두산의 한국시리즈 끝났는데 뭘 할 건데? 야구 없으면 내년 삼월을 기다립니다. 그저 야구에 죽고 야구에 사는 한국의 20~30대. 드라마 끝나고 난 뒤에 그 다음 후속 드라마를 또 기다리지요. 별 할 일 없는 아줌마 내지는 집에서 주로 생활하시는 목회자들.

그러니까 자기 나름대로의 목표와 목적을 갖게 되면 그 자체가 시험 거리에요. 시험이 들지 말게 하옵소서가 아니라 지가 시험을 매일같이 만들어. 자기가 만든 것에 지가 울고불고 하고. 그것 끝나면 또 하나 지어내고. 그래서 성경말씀 백날 큐티하고 아무리 묵상해도 자기 존재를 굳히는 한 소용없는 겁니다. 보통 교회 목사들은 연초가 되면 자꾸 계획을 만들어내요. 그래야 숙제하듯이 사람들이 억지로라도 교회에 나오지 목표 없으면 교회도 안 나온다는 겁니다. 사람을 더욱더 지옥 백성 만들어요.

두 번째 시간에 할 것은 첫째 시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렵습니다. 출애굽기 29장에 나오는 제사 자체가 아브라함 때는 어떤 식으로 나타났느냐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여기에 창세기가 있잖아요. 그 다음에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나오잖아요. 우리는 방향을 창세기로부터 왔기 때문에 창세기는 이미 사라졌고 앞으로 예수님 거쳐서 미래에 천국 간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점에서 어렵냐 하면, 출애굽기 29장 38절에서 상번제, 제사지요. 제사를 드리라고 했단 말이죠. 그럼 우리는 존재니까 제사 드리면 구원받습니까? 할 때 이건 아니거든요. 제사 드려서 지옥 간 사람이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아닙니까. 성전, 예배당 잘 지어놔도 소용없어요. 그러면 제사 드려라. 뭘 하라고 명령이 왔단 말이죠. 명령이 오면 우리는 하고 싶어요. ‘하라’하면 하고, ‘하지 말라’하면 안 하고 하여튼 우리는 그걸 지켜내고 싶은 충동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제가 첫째 시간에 두 층이 있다고 했지요. 존재 층과 흐름 층이 있는데 두 층이 부딪치면 이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요. 갈라지면서 그토록 궁금했던 그토록 보고 싶었던 진리가 그 틈바구니에서 비로소 고개를 내밀게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인이 의인 되면 안 돼요. 죄인이 의인되게 되면 존재가 지가 알아서 갈아탄 셈이 돼요. 이걸 환승이라 합니다. 돈 더 안 내고 내릴 때 찍으면 환승되는 거예요. 이렇게 갈아탈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우리는 제사 드리라 하면 이 땅에서 죄인으로 살던 내가 이제는 율법으로 갈아타면 율법에 의해서 천국 간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갈아타봐야 맨 그 인간이 똑같은 그 인간이에요. 갈아타는데 실패해야 됩니다. 이 실패하기가 중요해요. 어떤 중국 무술 영화를 보면 싸움을 하는데 신전이 무너지면서 삐져나온 돌출 목재들이 있잖아요. 무너지면서 적과 싸우는 거예요. 갈아타면서 한바탕 붙고 하는 거예요. 이런 게 터미네이터에 보면 마지막 로봇 인간과 싸우며 갈아타는 게 있죠. 우리는 갈아타면 성사가 안 되고 갈아타는데 실패해서 여기에 빠져야 돼요. 이게 구원이에요.

쉬운 예로 교회 다니고 십일조, 주일성수하면 구원되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보니까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소리를 들었거든요. 이 사람이 갈아타기를 시도하는 거예요. 그래 이제 십일조 안 해도 되고 교회 안 나와도 되고 복음만 믿으면 된다고 해서 갈아타기를 했는데 갈아타기에 성공해버렸어. 지옥 갑니다. 갈아타기에 성공하면 안 돼요. 그 가운데 빠져야 돼요.

디즈니 만화에 그런 것 있잖아요. 고양이가 잡아먹으려고 쫓아오니까 쥐가 도망가는데 절벽 너머까지 갔어요. 가서 밑을 보는 순간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제삼자가 봤을 때 이미 절벽 밖으로 벗어났을 때 떨어졌잖아요. 하지만 본인이 떨어짐을 아는 순간은 밑을 바라볼 때 비로소 떨어짐을 아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주여, 믿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전에는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다가 자기가 진짜 구원받을 때는 “십자가가 나를 구원했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전에는 내가 십자가를 믿어주게 되면 십자가 믿는 내 믿음으로 구원받는 줄 알았는데 막상 내 상황을 제대로 보니까 십자가가 나를 믿게 했다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이. 그 말은 더 나가면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안 믿어야 될 나도 주께서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거예요. 전에는 내가 선택해서 믿었는데 나의 선택이 아무 짝에도 소용없어요. 믿음은 내 뜻으로 믿는 게 아니고 믿음 자체가 선물이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전에는 내가 말씀을 지켰는데 지금은 내가 지키나 안 지키나 그 자체가 말씀이란 사실, 나는 말씀의 영향권, 자장 속에 있는 거예요.

7세기경에 마호메트가 죽고 난 뒤에 철로 만든 관에 있었는데 관을 옮기다가 관이 공중에 뜨는 거예요. 신의 계시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통과 지점이 자석이 있었던 겁니다. 옛날 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영향력을 줬다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력 역학이 물리학으로 적용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어떤 물건이 움직일 때는 힘을 가해야 움직인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맞는 것 같지요. 가만있으면 가만있잖아요.

외부에서 힘을 가할 때 움직인다는 게 통하던 물리학이 자장이 등장하면서 가만있어도 관이 떴을 때 이게 뭐야? 뭐 이런 상황이 다 있나? 뭔가 우리가 놓친 게 있지 않는가? 근대과학의 시작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보다 세심한 기구와 보다 정확한 것을 동원해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무려 62배 되는 망원경을 만들어서 목성이 예측보다 궤도를 이탈 됐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그때부터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안 겁니다.

그것이 과학인데 이 과학이 문제가 됐어요. 신학과 철학이 갈라진 틈으로 과학이 파고 들어오니까 신학도 차버리고 철학도 차버리고 이제 남은 것은 모든 것은 모조리 과학이에요. 인문과학, 사회과학, 심지어 영어도 과학이에요. 사회과학은 정치, 경제, 이런 것. 언어에 관한 건 인문과학, 심지어 스포츠도 스포츠과학.

전에는 교회 와서 목사 시키는 대로 믿는다고 고백하면 믿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진짜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내가 믿습니다.”라는 말을 하나, 안 하나 상관없이 이미 나는 구원의 자석의 영향권 속에 놓여있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JESUS를 믿어야 구원받는 겁니까? 상관없지요. 원어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신학자들은 원어를 파서 뭔가 건지려고 하는데 아무 소용없어요.

언어를 다룰 때는 반드시 자신의 선 이해, 선입관을 개제된 상태에서 다루게 돼있어요. 인문과학이라든지 모든 과정이 그래요. 아주 백지상태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의 사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정당한 논리의 단어와 언어를 동원시켜서 그러니까 내 말이 맞는다고 주장하게 돼있다고.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바리새인들이 원어를 연구 안 했겠어요? 그게 다 소용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두 번째 시간에 풀어야 될 게 있어요. 존재에서 어떻게 흐름으로 바뀌느냐? 그걸 풀어야 돼요. 그걸 안 풀고 남겨두면 오늘 제사라는 게 남의 이야기고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쥐가 고양이를 피하면 산다고 할 때 고양이 피해서 살았다는 그 현장은 바로 자기를 죽이는 현장이에요. 밑에 아무것도 없는 새로운 세계가 오히려 고양이보다 더 우선권이 있다는 사실을 쥐는 공중에 뜨면서 비로소 발견하지요.

그럼 존재를 흐름에 바뀌는 방법은 어떻게 합니까? 우리의 기만과 바탕과 뿌리를 아예 치워버려야 되겠지요. 내가 단단하다고 여기는 그 뿌리를 뽑아내고 다른 발판으로 교체해서 내밀겠지요.

그래서 출애굽기 29장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미래에 예수님과 연관시키기 이전에 뒤로 돌아가야 돼요. 창세기로 돌아가야 됩니다. 원래 제사법이 없었던 시절에 하나님은 뭘 제물로 받았는가를 조사해보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 때 하나님이 받은 제사는 뭡니까? “아브라함아 네가 믿음이 있구나.”를 확정시킬 때 동원했던 제물은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를 죽여서 그래서 우리가 죽었다는 자리를 마련되면 그 자리에서 창조의 능력으로 다시 우리를 살려내시고자 하는 겁니다.

두 번째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창조가 하나님이 없는데서 우리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잖아요. 오해였습니다. 잘못된 생각이에요. 하나님이 없는데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빛이 없었는데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생겼더라. 빛은 없었는데 말씀으로 빛이 생겼다. 그걸 창조로 생각하잖아요. 그게 잘못이었어요. 그럼 뭐가 정답이냐? “빛이 있으라.” 하는 그것이 나타난 게 창조에요.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나타나요. 빛이라는 것은 피조물 중에 하나일 뿐이지 정작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빛이 있으리라는 말씀이 바로 창조를 행하는 중심이 되는 부위란 말이죠. 이걸 요한복음 1장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느라가 아니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 그 어떤 것도 그분 없이 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창조 당하면서도 창조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전혀 모르는 채 창조돼버린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창조된 것만 주지해서 그저 존재로서 나는 창조됐으니까 버텨야 된다. 무조건 나는 살아야 돼. 나는 살아야 돼 하다보니까 누구 죽었어요?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만들어져놓고 왜 만들어졌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어요.

잠언서 8장에 이런 말씀이 나오거든요. 처음부터 지혜가 있어서 천지를 창조했다. 그 뒤에 말씀이, 누구든지 지혜를 모르는 자는 생명이 없다고 돼있어요. 생명을 만들어놓고 분명히 살아있는 것에 말하기를 이 지혜를 모르면 너는 죽은 거야. 결국은 죽은 것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누가 만들었는지 알면 생명이고, 모르면 죽음이고. 만들어졌다고 생명이 아니에요. 숨 쉰다고 생명이 아니고 정작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면 그게 죽음이에요. 살아도 죽은 거예요. 하나님 믿는 게 복음이 아니고 누가 나를 만들었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게 복음이에요.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날 만드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게 복음이 아니고 구체화시켜 나갑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다고 안 것은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칠 때 아들이 죽는 자리에서에요. 아들이 죽을 때 비로소 이 죽음에 같이 뛰지 아니하면 나는 복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 잡아놓고 아들 죽음에 합세하지 아니하면 그 아버지는 영생을 얻을 수가 없어요. 믿는 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은 이 땅에서 송곳으로 우리 인간의 죽을 자리를 만들어놨다는 이 점, 그게 십자가거든요. 죽을 자리를 만들어놨다는 이것이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감사하고 신기합니다. 유일한 통로에요. 유일하게 천국으로 빠질 수 있는 구멍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으신 자리가 바로 우리 속에 들어와서 같이 죽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은 자리기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자리는 그 죽음의 자리밖에 없어요. 십자가 자리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양을 받는 게 아니고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는 게 첫 번째 중요한 것이고,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는 게 아니고 사람을 원하는 거예요. 사람이 죽기를 원했지 양, 염소 이런 게 죽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양이 구원받을 일 있습니까. 양은 그냥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한 것뿐이지 진짜 노리는 것은 나의 죽음을 노리지 우리가 바치는 돈이나 십일조 노리고 하는 것 아닙니다.

네가 죽어. 죽을 때 그냥 죽으면 안 되고 그건 자살밖에 안 되고 어디다 죽이느냐 하면, 하나님이 죽었던 그 자리에 같이 포개서 죽을 때 비로소 사는 겁니다. 로마서 6장,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이고. 그 원리에요. 그 원리가 신약에 나오는 원리인 줄 알았는데 이미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바칠 때 벌써 그러한 사건을 발생시켰습니다.

첫 번째 중요한 것은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과 두 번째 중요한 것은 그 죽음의 자리에서 누가 죽었어요. 이삭이 죽었지요. 이삭이 죽은 것을 아버지의 죽음과 야곱의 죽음과 구원받은 사람의 죽음으로 하기 위해서 죽음의 자리가 사건화시켰다는 겁니다. 반복시킨다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난해한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할 때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달렸을 때 옆에 강도 둘이 있었고. 그것은 15년 전에 이미 지나간 일이다. 이건 누구나 알고 있는 거예요. 몇 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단다. 그래? 구경이나 가 보지. 그래서는 구원이 안 되거든요. 그때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2013년 11월 1일 오늘 일어나는데 일어난 장소가 이런 공간이 아니고 예배당이 아니고 바로 우리의 자아의 자리, 우리의 주체의 자리, 우리의 몸의 자리라는 사실이에요.

정말 고민거리다. 얼마나 어려운데. 지금 아들이 죽었어요. 이삭이 죽습니다. 아브라함이 뭘 믿었어요?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사람 죽이는 것이다. 죽일 아들은 내 자식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삭은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이거든요. 약속의 자식이니까 이삭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고 이삭을 약속이란 이름으로 보내신 어떤 분이란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이 존재가 돼버리면 내 존재에서 저쪽 존재로 갈아탈 수가 없어요.

부부가 같이 잠을 자도 꿈이 각자 달라요. 세상에 같은 꿈을 꾼 경우 봤습니까? 아마 그때는 분명히 그 집에 화재 났을 거예요. 둘 다 뜨겁더라 하면서. 사람이 아무리 같이 붙어 자도 이쪽 존재에서 저쪽 존재로 갈아탈 수 없어요. 그래서 제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사랑이란 말은 거짓이라고. 내가 사랑이란 말을 할 때는 내 사랑이 늘어져서 그쪽에 간을 본다 하지요. 맛을 본다 하지요. 내 사랑을 이해하냐고 하거든요. 저쪽에서 그 사랑 이해하지. 거짓말입니다. 저쪽에서도 알고 있는 사랑으로 간을 봅니다. 정치적인 협상이 돼요. 부부란 정치적 협상이에요. 모든 게 타협하는 거지 동의가 아닙니다. 장가 갈 때까지만 같이 있자. 자식 보고 산다. 딸 시집보낼 때까지 같이 있자. 전부 다 타협책이라니까. 어떻게 남이 내 마음을 알고 내 마음을 남들이 알아줍니까?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보면, 내가 전한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설득이 아니고 성령의 나타남이라 하지요. 우리는 그 대목을 보고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서 우리 쪽에서 갈아탈 수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주시게 되면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된 것처럼 우리도 아버지와 하나 되고 같이 있다. 요한복음 14장이지요. 성령이 처소가 되어서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처럼 그 날에 너희들도 아버지와 함께 있고 나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했단 말이죠.

우리는 잘도 정답을 내립니다. 목사님, 성령께서 오시면 됩니다. 말은 맞는데 성령을 우리가 아냐 이 말입니다. 왜? 우리는 내가 아는 것밖에 몰라요. 사람이 안다는 것은,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무한대로 압니다. 유한한 내가 무한대라는 것은 그 무한은 유한에 갇혀 있는 무한이라. 그걸 수학에서 가능무한이라 합니다. 칸토르란 수학자가 19세기에 발견했거든요. 내 속의 우주를 논하는 것은 그게 말이 됩니까. 우주가 더 큰데. 우주를 논한다는 것은 작은 내 안에 더 큰 게 들어있다는 말이죠.

남자들이 만날 이야기하잖아요. 여자는 모퉁이는 작은데 생각하는 게 그렇게 예민하고 복잡한지 모르겠다. 정말 여자의 마음은 복잡해요. 달랬다 싶으면 삐지고, 삐졌다 싶으면 생긋이 웃고 나오고. 어느 장단에 춤을 출지 몰라요. 그러면 여자도 그러지요. 남자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고. 그 말도 맞아요.

지금 중요한 것은 존재에서 존재로 갈아탈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갈아타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죽음이 어떤 힘을 발휘해야 되겠지요. 이삭이 아버지를 구원해야 됩니다. 비록 아버지는 칼 들고 이삭을 잡았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살려야 돼요. 그러면 아들 안에 누가 있어야 살려내느냐? 창세기 22장에 보면, 이삭에게 네가 축복을 받으리라.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손이 많을 것이다. 이삭 속에 예수님이 계셔요.

여기서 문제가 뭐냐? 이삭과 예수님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그 문제 아닙니까. 연결시키는 문제에 개입되는 것이 그 다음에 연속적으로 계속 주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져요. 말씀이. 그러면 이삭으로 예수님이 바로 연결되지 않고 언약과 동반해서 주어지는 인물이 이삭의 아들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지요. 이삭언약을 야곱이 이루고 야곱에게 주어진 언약을 누가 이뤄요? 요셉이 이루고. 요셉의 언약은 그 다음에 이스라엘이 이루고. 계속 이어 나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언약과 언약의 연결고리는 마치 포석정의 출렁이는 물결처럼 그 위에 올라타는 거예요. 아브라함도 올라타고, 이삭도 올라타고, 겹쳐서 계속 올라타는 거예요. 요셉 되면 야곱, 이삭, 아브라함, 노아까지 다 올라타는 거예요. 요셉의 어깨는 무거워요. 점점 더 올라타는 거예요. 나중에는 변화산에서 보면 엘리야, 모세도 올라타고. 결국 그 모든 올라탄 짐을 혼자 지신 분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단 올라탄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예수님이 하실 일을 좀더 구체화된 면면을 보입니다. 그게 뭐냐? 모세 율법이 주어져서 체계화되고 뭔가 규격이 갖춰지면서 한 걸음씩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겁니다.

여기까지 이해되겠지요. 그런데 조금 더 나가야 됩니다. 언약이 왔다고 존재로 갈아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목사가 왜 그렇게 따지느냐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깊이 있게 보게 되면 그냥 대충 넘어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촘촘히 알면 알수록 점점 더 감사와 기쁨이 샘솟기 때문에. 대충 아는 것보다 깊이 아는 게 더 기뻐요. 너무나 정확하게 너무나 치밀하게 우리가 예상도 못한 연결고리가 꽉 짜여 있을 때 우리는 말씀 외에 다른 인생의 모든 경험이나 간증이나 떨어내야 될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냥 말씀만 남기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요.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을 때 좋다 했지요. 그리고 사랑했습니다. 이스마엘 같이 지가 낳은 자식은 눈에 차지 않아요. 그리고 이삭이야말로 그렇게 예쁘고 약속을 맺은 겁니다. 창세기 15장을 봅시다. 오늘 해답을 내려야 속이 시원하니까. 창세기 15장 9절을 누가 읽어볼까요? 중요한 대목이거든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지금 이삭을 낳기 전입니다. 이때 자식이 하나 있기는 있었어요. 15장 2절에 보면, 다메섹 엘리에셀이라고 아마 양자 같아. 이 아이가 상속자냐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애는 아니고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다고 했거든요. 그걸 아브라함이 믿으니까 6절에 의가 됐지요. 아브라함이 의인 된 것이 믿음을 근거로 해서 의롭습니까? 아니면 의가 된 근거가 따로 있습니까? 따로 있지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가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하나의 토지에 불과해요.

옛날 사람들은 여자를 밭이라 하고 남자를 씨라 해서 여자는 밭떼기만 제공했을 뿐이고 낳은 모든 자식은 아버지가 단단해서 낳은 자식이라 생각하거든요. 말은 그렇게 해놓고 아들 못 낳으면 밭이 안 좋아서 그렇다고 구박하는데. 아브라함은 밭이에요. 거기서 의가 나온다면 의의 근거는 뭔가 약속이 뿌려져서 나온 열매가 의가 되는 거예요. 9절에 보니까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 바치라 했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그냥 백지고 거기다 색칠을 하는 모든 작업은 일방적으로 외부에서 퍼붓는 거죠. 그게 제사란 말이죠. 지금 출애굽기에 나오는 제사의 원형을 보자는 거예요. 아브라함 언약에 제사의 원형이 나와 있습니다. 제사의 원형이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으로 돼있단 말이죠.

그렇다면 제사를 이렇게 하라고 했을 때 효과, 효력이 뭐냐? 네 자손이 나올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 자손은 그냥 아들 낳고 싶다고 해서 낳은 자식이 아니고 사전작업이 있었지요. 원래 원료가 들어가야 제품이 나올 것 아닙니까. 그 원료가 뭐냐 하면,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 집비둘기, 이게 들어왔거든요.

이렇게 보면 돼요. 약국에서 소화제 몇 개하고 위장약 해서 그냥 줍니까? 이걸 식후 30분 적어서 낱개로 뜯을 수 있도록 해서 주지요. 낱개 하나가 이삭이고, 야곱이고, 요셉이라 이 말입니다.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알약이 들어있어요. 이것은 열차가 있는데 기관차에 달린 객차에 해당되는 것은 이삭이고, 야곱이고, 요셉이고. 그 안에 탄 분은 뭔가 전달, 전달하면서 결국 하나로 연결하는 작대기를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뤄졌다와 관련돼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품은 거예요. 알약 형식이든, 어떤 형식이든 자기는 포장지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포장지에 하나님의 알약을 집어넣고 알약이 어떻게 예수님을 생성할 것이냐 하는 그 몫은 이 포장지에 해당하는 야곱과 이삭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거기서 나오게 돼있어요. 존재 층과 흐름 층을 충돌시켜서 해요. 갈아탈 수 있는 게 아니고.

이제부터 이삭 믿어야지. 그래서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깨어져야 돼요. 깨어질 때 존재 층도 같이 깨어져야 되는 거예요. 나는 나를 위해서 예수 믿어야지. 이게 깨어지는 현장에서 예수님은 그 사람을 구원합니다. 깨지 않고 구원시켜주지 않아요. 이제 예수 믿어서 구원받아야지. 이게 깨어질 때 주님을 위하여 내 구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을 드러내려고 나로 하여금 구원 안 받으면 안 되게끔 조치를 하신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게 거짓말이 아니고 아브라함도 그렇게 살았고, 모세도 그렇게 살았고. 노아가 언제 자기 아이디어로 방주 만들었겠습니까. 그게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은 이렇게 살았다고 해서 나온 것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이 한 행세들이 자기들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뒤집어썼어요. 화산재 뒤집어쓴 것처럼. 팔자가 지 팔자가 아니고 주께서 그리스도와 관련된 팔자를 안에 집어넣은 겁니다. 사는 게 우리가 사는 게 아니고.

특히 아벨 같은 경우에 보세요. 사람이 죽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제사 한 번 잘 드려서 죽었잖아요. 이 말은 새순교회 등록해서 가는 길에 죽은 것과 똑같은 거예요. 새순교회 등록해서 이제는 잘 믿겠습니다. 새순교회 목사와 교인들도 교인 하나 생겼다고 오년 만에 처음이라고 좋다고 했는데 가자마자 졸음 운전하는 차가 박아서 그것도 온 식구 다 죽었다. 우리가 안 됐다고 하지 마세요. 나도 일찍 가야 되는 건데. 무슨 고생하려고 아직까지 차사고 일어나지 않고 있는지. 이렇게 돼야 돼요.

제사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과 만남을 통해서 해석이 된다는 그 말을 제가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뭘 바쳤다가 아니라 아브라함 속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는 거예요. 베드로전서 1장 10절 말씀입니다. 이미 예수의 영이 모든 선지자 속에 하나의 약국에서 포장 되어서 나온 약처럼 나와요. 괜히 남의 인생 부러워하지 마세요. 다 달라요.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다 그리스도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는 거예요. 누가 독점적으로 보여주진 않지만 다 십자가라는 것은 공통적으로 보여주고. 하나님께서 존재 층을 부셔야 열차 속에 같이 흘러가고 있는 겁니다.

매일같이 우리는 내 존재가 깨어지는 방향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거든 구원받을 줄 아세요. 내 존재가 깨어진다는 것은 내 목표와 뜻이 하여튼 기도한 대로 어찌 그렇게 안 되는지. 삼성 이기라 하면 두산 이겨버리고. 두산 이기고 끝내라 하면 삼성이 이기고. 그래서 7차전까지 왔잖아. BMW 생각하면 있는 차도 고장나버리고.

삼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하면, 바로 이 존재 층과 흐름 층이 등장하면 등장하는 게 약속입니다. 약속은 두 가지가 있어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는 숨어있는 본래의 뜻이 나타납니다. 결국 여기서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라는 것은 여성성이에요. 암소가 등장하는 것은 바로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모든 나타난 피조세계의 밑바닥에 이미 자리 잡고 있다는 겁니다. 그 두 세력의 다툼에서 삐지고 나온 게 야곱의 인생이고 요셉의 인생이에요.

요셉의 적이 누구지요? 요셉을 팔아먹은 형제들이지요.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팔아먹고 요셉은 팔리고.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제들 관계로 장차 예수님이 십자가 진 정황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어요. 가까운 형제가 나를 팔아먹었느니라. 예수님을 누가 팔아먹었습니까? 은 30냥에 가룟 유다가 팔아먹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선택했어요. 내가 너희를 택하였나니 그 중에 하나는 마귀니라.

주께서 택하신 것은 창세기에 있는 모든 것,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흐름들은 사실은 숨어있는 것을 외부로 드러내기 위함인데 드러내려면 균열이 돼야 돼요. 균열이 안 되면, “하나님, 저는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맨날 어떻게 하느냐 하고. 너는 어떻게 하든 구원 못 받아. 네가 깨어질 때 뱀과 여자의 후손이 다투는 모습이 그대로 너를 통해서 우리는 습자지에요. 습자지를 뚫고 들어가 버려야 돼요.

옛날 동네에서 자식들 다 보내고 할머니 혼자서 밥 먹고 있는데 갑자기 25톤 트럭이 박아보세요. 지붕 날아가면 지붕 날아간 채 할머니는 밥 먹고 있지요. 그 속 알맹이가 다 튀어나오지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지붕을 날려버려요. 지붕 갖추고 밥 먹고 이게 나의 존재야. 하는데 존재의 뚜껑을 날려버려요. 존재의 뚜껑, 존재의 밑바닥을 날려버리면 우리 사는 게 지붕도 없고 밑바닥도 없고 아까 고양이에 쫓기는 쥐처럼 뭔가 공중에 떠서 사는 거예요. 안개 같아.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요. 그러면 우리는 허겁지겁 후다닥 옆집에서 옛날 살던 방식대로 숨지요. 숨지만 이번에는 다른 트럭으로 박아버리면 또 다 날아가고.

그게 히브리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우리는 벌거벗은 채 우리가 가릴 수 있는 것을 다 걷어진 채 나타난다. 우리 십자가마을에서 전하는 복음은 그거에요. 말씀 앞에 목사고 집사고 장로고 다 때려치우고 죄인으로 드러나자는 거예요. 그런데 나간 사람의 특징은 뭡니까? 뭔가 걸치고 가리고 싶은 거예요. 나는 목사다. 그래도 헌금은 해야 안 되나. 그래도 교회 봉사는 해야지. 자꾸 뭔가 날려 보낸 걸 다시 끄집어내서 이래 걸치고, 저래 걸치고. 교인 몇 명이고? 헌금 얼마나 나오는데? 맨날 이런 것으로 걸치는 거예요. 니만 아나? 너만 복음 아나? 하면서 걸치기는 맨날 뭘 걸치는지.

모든 걸 노출 시킬 때 우리는 아무것도 의지할 것도 없고 아무것도 믿을 것도 없을 때 그 상황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구원받는 자리입니다. 더 이상 너는 너를 의지하지 말라. 내가 너를 건졌나니. 그 상태가 믿음입니다. 그럼 우리는 뭐냐? 예수님이 제물된 것처럼 우리가 오늘날 영적 예배의 산 제물이 됩니다. 너는 세상의 것을 본받지 말라. 너는 영적 예배에 산 제물로 바쳐진 우리가 제물이에요. 아무것도 의지할 것도 없고 그냥 주님이 살려준 대로 사는 그 모습이 오늘날 바로 하나님께 언약대로 바쳐진 제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말씀 안에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우리는 말씀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지켜서 내 것 만들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 없이 하루하루 사는 것이 곧 말씀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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