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70이레 논문(마귀의 소리)131024-28강b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레위기

가락-70이레 논문(마귀의 소리)131024-28강b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70이레 논문(마귀의 소리)131024-28강b -이 근호 목사

240 페이지 세 번째 줄에 『거룩한 말씀이 이 진리성에 구멍을 낸다. 보태기(합산)로 일관하는 인간 세계에 뺄셈(공백)이 관여해 있었던 것이다.』뺄셈 해놓고 공백이라 했죠. 항상 비어있게 하는 거예요. 왜 비어있게 하느냐 하면 구멍을 내게 되면 여기는 있음의 세계인 반면에 구멍이 났다. 여기는 무슨 세계입니까? 없음의 세계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있다고 여기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없는 걸로 여기는 거예요. 없는 걸로 여기는 것은 우리 인간이 있고 없다는 것을 결정할 때는 이미 우리가 먼저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나처럼 있는 건 있고, 나처럼 없는 건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도 마찬가지인데 예수님처럼 있는 것은 있고, 예수님처럼 없는 것은 없는 것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 아들이 누굽니까? 예수님밖에 없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 아들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만이 죽었다가 살 자격이 있고 다른 사람은 그냥 죽어야 돼요. 베드로도 아무리 수제자지만 살 권리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살려낼 때 본인의 의, 본인의 양심이나 착함으로 스스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두 번째 아담 아닙니까? 마지막 아담이거든요. 기존의 아담에 속한 것들은 다 애 낳고 다 죽어야 돼요. 없어져야 돼요.

없어지니까 주님 보시기에 없는 존재거든요. 그러니 이 있음에다가 없음을 만들어 놓고 없음의 자리에 예수님이 계심으로 말미암아 ‘너처럼 될래? 나처럼 될래?’ 묻는 겁니다. ‘너처럼 있을래? 나처럼 없음으로 있을래?’ 묻는 거예요.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진리라는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같지도 않으면서 따라붙으려고 하다가 아까 이야기했죠. 십자가 이야기 하니까 대번 무슨 이야기 튀어나왔다? 사단 이야기가 튀어나와 버리죠. ‘주여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나왔죠. 또 예수님께서 죽어 갈 때는 자기 칼 들고 되도 않는 힘쓰죠. 그런 것들이 바로 주님 앞에 합류될 수 없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있음에 합류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없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썩어야 돼요. 없어져야 돼요. 육에 속한 것은 사라지고 그 다음에 영에 속한 것은 새로운 육체를 입어야 되고, 하늘에 속한 형상을 또 새로 입어야 돼요. 고 과정은 반드시 단절이 있어야 되고, 단절 있음으로써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은 걸러 내줘야 됩니다. 사람이라고 오면 안 되거든요. 오지 말아야 될 사람들은 걸러줘야 돼요. 십자가에서 유 톤 해야 돼요. P톤 하든지 U톤 하든지 돌아가 야 돼요. 무조건 그들은 ‘에이 씨, 십자가는 나 안 갈래.’ 전부 다 이쪽으로, 십자가 말고 다른 엉터리 길로 가도록, 새도록 그렇게 조치를 이렇게 하시는 겁니다. ‘자, 이리이리, 이렇게, 이렇게.’ 다 보내요.

돈이 5000원밖에 없는데 식당이 두 군데가 있다. 한쪽은 좋아 보이는데 가려고 하니까 여기는 1인당 식사비가 15만원입니다. 하니까 에이, 5천원밖에 없는데 못가겠다. 일부러 거기로 보내는 거예요. 일부러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 싫어하는 사람들, 십자가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을 전부 다 나가도록 그렇게 조치를 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 딱 알아보는 사람들 누가 있나? 아무도 없죠.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아담에 속한 인간은 아무도 없잖아요. 야곱도 마찬가지에요. 야곱도 자식 12명 낳고 돈 좀 버니까 그게 축복인 줄 알았죠. 그런데 그 받은 축복 그걸 어디다 써먹습니까?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자식 많은 것도 소용없고 그 많은 돈 번 것도 재물 얻은 것도 하나님 앞에서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야곱은 천국 가 있잖아요. 야곱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세 분 다 지금 천국 가 있잖아요. 그럼 어떻게 천국 가게 됐죠? 하나님이 나타날 때 너 때문에 이렇게 희생당한 모습으로 등장하면서 그 희생 앞에서 야곱이 드디어 자기 주체가 깨져 버립니다. 나라는 것은 나한테 쓸모 있으라고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언약의 재료로서 내가 태어났지, 나 좋아라고 하나님 있고 나 좋아라고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순간 야곱은 이름이 바뀌게 되면서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절룩절룩 절면서 결국은 어긋맞게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되는 어긋맞게 알려줌으로써 이게 언약이 나한테 왔다는 신호입니다.

교통순경이 수신호 하죠. 언약 신호는 이겁니다. 어긋맞게. 반대로 바뀌는.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는. 바뀌는 신호에요. 천국은 이와 같다. 바뀌는 거예요. 아침 10시에 온 사람, 그리고 오후 5시에 온 사람, 오후 5시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줬을 때 아침에 온 사람은 계산하는데 바빠요. 1시간에 한 데나리온이니까 난 아침에 왔으니까 일곱 데나리온, 으싸, 그런데 결국 한 데나리온 받았을 때 그럴 때 제일 늦게 온 사람은 감사하고, 뒤에 온 사람은 불평할 때 이런 불평해야만 하는 존재, 제일 뒤에 온 사람은 기뻐해야만 하는 존재, 같은 인생을 살면서도 한쪽은 기뻐하고 자기 인생에서 한쪽은 감사하는 것은 내 인생이란 애초부터 날 위한 인생은 나라는 존재는 애초부터 그건 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그걸 성령이 와서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바꿔주는 겁니다.

축복이란 뭐냐, 바로 거꾸로 바뀌게 된 안목! 이게 축복 이예요. 그래서 덧셈하지 말고 뺄셈해야 돼요. 가진 것 다 빼버려야 돼요. 힘도 빼고 다 빼고 결국 마지막 남은 나마저 빼버릴 때 주님께서 나를 쥐고 있다는 게 나타나죠.

그 다음에 『인간은 무한의 부분 집합의 안목에서 추상적인 무한의 세계마저 현실 속에서의 유한의 양인 것처럼 다룰 수 있다.』이거 엄청나게 어려운 이야긴데 『단 이 과정에서 그것을 다루는 인간의 근원은 텅 빈 공백에 불과하다.』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무한을 바구니에 끌어 모으면 결국 그 바구니는 무한입니까? 유한입니까? 유한되거든요. 인간은 신을 예수님이든 신이든 부처든 선한이든 참 진선미든 뭐든지 자기라는 바구니에다 무리하게 무한을 끌어 담아서 그걸 소유하는 방식으로 그걸 쥐려고 해요.

성령도 가지고 예수도 집어넣고 삼위일체도 집어넣고 신학도 집어넣고 목사직도 집어넣고 뭔가 소유대상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런 무한은 없어요. 그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어리석죠. 무한을 담으려고 하는 우리 인간의 속성은 변함이 없어요. 그걸 주께서 터뜨려버립니다. 이걸 찢어버려요. 찢어버리면 우리가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죠. 그럼 텅 빈 공간이 되는 겁니다.

그 빈 공백의 전체가 무한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와서 내게 배우라. 그거 주님한테 배우라는 거예요. 뭘 배우라는 겁니까? 주님이 이 땅에서 뭘 가졌어요? 가진 게 뭘 가져요?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소모 다해버렸죠. 아버지의 뜻을 위하여 소비하러 온 건전지, 폐건전지예요. 다 소비하려 온 거예요. 아버지 뜻을 위해서. 마지막 남은 ‘이 잔을 내게서 넘어가게 하옵소서.’ 마지막 코스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마지막까지 그 쓴잔을 먹죠. 그리고 제자들에게 “너희들도 결국 이 쓴 잔을 마시게 된다.” 이 잔을 마시지 아니하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요청하지도 않는 숙제를 주님께서 찾아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집어넣어 준 겁니다. 주님의 쓴 잔 마시라고. 뭐 보약입니까? 한약 다렸어요? 그걸 왜 우리가 마셔야 됩니까? 그거 마시고 힘이 막 나는 거예요? ‘우리‘라는 거기다 구멍을 뚫어요. 뻥, 뻥 하고 구멍을, 돌발사태가 일어나도록 계속 구멍이 뚫리는 거예요. 우리는 담을 수 없는 구멍 난 사발이라고 보면 돼요. 뭘 담으면 밑으로 다 새버려요. 참 좋은 거예요. 이게 담기게 되면 우리는 그걸 믿게 돼요. 그걸 소중하게 여기고 그걸 자랑거리로 여기고 그걸 간증거리로 여깁니다.

그런데 구멍 난 사람은 밑 빠진 구멍에 물 붓듯이 쑥 새버리면 남은 것은 구멍 난 걸레조각 같은 다 찢어진 헝겊조각만 남고 나머지 내 것이라는 것은 다 새죠. 그럴 때 그것이 바로 다니엘이고 그게 바로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죽을 때도 구멍 났어요. 돌에 맞아서. 욥도 구멍 났어요. 자식 열 명 다 죽고 재산 다 날리고 딸도 예쁜 모양이라. 예쁜 것도 예쁘다고 자랑 질 했더니만 그것도 다 구멍나 버리고, 잘난 자기도 인물 괜찮았던 모양인데 그러니까 친구들이 부러워했잖아요. 네 차림이 좋았는데 네 모양 왜 그러느냐, 너 못 알아보겠다. 마누라가 도망가지는 않았어요. 도망가지 않은 게 욥기에 보면 나옵니다. 얼마나 도망 안 가고 잔소리를 해댔겠어요?

결혼하는 게 뭐냐 하면 엄마의 잔소리에서 아내의 잔소리로 바뀌는 게 결혼 이예요. 제일 좋은 아내는 잔소리를 하는 아내가 제일 좋은 아내에요. 왜, 잘난 남편을 구멍을 내기 때문에. 남자란 조금만 잘한 게 있으면 자랑 질을 못해서 환장을 했거든요. 초칠 수 있는 사람은 현명한 아내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아내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잔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 잔소리를 이어받아서 하는 거예요.

『인간의 허무한 존재로서의 세상을 허무의 세계로 인식하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예언 자체는 묵시적 사건 후 역사적 증거로 포착 가능한 사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역사적 사건을 늘 새롭게 유발시크는 묵시적 해석 자체로서 증거 되기 때문에 역사적 접근을 단죄한다.』이 말이 뭐냐 하면 인간은 세상을 해석하면서 묵시적 해석을 못해내요. 인간은 해석하면서 역사적 해석밖에 못하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 내부에서 뭐가 흘러나오느냐 하면 시간이 나와요.

우리 조..성도님이 질문했잖아요. 음악이 무엇입니까? 음악은 인간 육신에서 발생되는 리듬인데 이게 시간을 타거든요. 3~4분, 클래식 같은 경우는 20분 정도, 어쨌든 리듬을 타고 나온다고요. 리듬을 타고 나오는데 여기 딱 끊어보면 기승전결 나와요. 시작과 끝, 결말이. 그래서 바바바방~♬ 하고 클래식은 끝나잖아요. 성악에서 소프라노 같으면 올려서 아~♫ 해서 끝나고, 유행가도 마찬가지에요. 대중가요도 멋있게 끝나잖아요. 끝난다는 자체가 시간의 시작과 끝이 있으니까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역사입니다.

인간은 매일같이 뿜어 나오는 게 있어요. 그게 역사가 계속 나오거든요. 역사를 가지고 뭘 해석하느냐, 눈에 보이는 자연세계를 해석을 해요. 어! 전에는 저랬는데 지금은 이렇게 됐네. 아! 세월이 많이 흘렀구나. 아, 저렇게 변화되었구나.

변화라 하는 것은 이겁니다.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으로 갈 때에 어느 인간도 A에서 시간이 흘러서 B가 됐다. 라고 인간들은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그게 아니거든요. A시점의 일을 새롭게 창조했고 B시점의 일을 새롭게 창조한 거예요. 요 지점 순간, 순간 지정하는 거예요. 발걸음을 세신다니까요. 발걸음을 세시고 지금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이 들풀 본인은 몰라요. 그냥 내일 들어가는 들풀도 지금 기르시거든요.

주님께서는 매일같이 관여합니다. 주께서 월요일 날 관여하고 화요일 날 쉬십니까? 뭐 주님이 이발사입니까? 화요일 날 문 닫게. 주일 오후 3시 40분에 일하시고 3시 46분에 일 안 하십니까? 그 창조를 우리는 뭐로 바꿉니까? 역사로 바꿔요. 매일 관여를 못하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할 때 이 창조를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창조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 그냥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 창조합니다. 다시 말해서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창조하기 때문에, 우리의 창조는 뭐냐, 우리 없는데 있다. 또 변화되었다는 결과만 볼 뿐이지, 누가 관여했느냐, 어느 손길이 관여하고 어느 발길이 관여하고 어느 뜻이 개입됐느냐, 그런 건 다 놓쳐버려요.

‘김치가 많이 시어졌네.’ 이거하고 ‘예수님께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김치가 시어졌다.’ 하고 다르잖아요. 그런데 시집 온 며느리가 ‘어머님, 예수님이 관여해서 김치가 많이 시어졌어요.’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걸 어머니가 보고 ‘예수님이 하셨기 때문에 감사히 먹자.’ 이렇게 하지, ‘그래 김치 시도록 놔두고 어쩌란 말이냐. ...멀었는데.’라고 잔소리를 듣는다고요. ‘아니 예수님이 그렇게 했다니까요.’ ‘거기 예수가 왜 들어가?’ ‘모든 창조는 예수님이 들어간다고 가락교회서 배웠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게 되면 1초 후의 일도 내 업무가 아니고 주의 업무란 걸 알아요. 1초 후도. 그리고 내일 업무도 주의 업무에요. 스켈링하는 게 집사님 업무가 아니고 주님의 업무에요. 주님께서 하시는 업무라니까요. 항상 내 업무를 뭐로 바꿔야 됩니까? 주의 업무로 바뀌어야 그것이 바로 주님께 영광이 돼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 영광이 되는 방법은 그 방법밖에 없어요.

어떤 사람이 세상의 이런 일은 축복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 사람들이 반발하면서 ‘왜 이 목사는 세상이 주신 것을 왜 축복으로 보지 않느냐, 하기에 제가 이렇게 했어요. 주기도문 보세요. 주기도문의 주안점은 축복이란 뭐냐 하면 죄와 관련돼 있다. 내 소유와 관련된 게 아니고 ’나 이만큼 아파트 넓다. 나 월급 많다.‘ 이게 축복이 아니고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때 아버지의 영광이 돼요. 모든 하나님의 뜻은 ‘나 죄인입니다. 이 죄 좀 어떻게 해주세요.’ 와 연관 지어서 예수님과 관련될 때 예수님을 통해서 영광 받지, 이만큼 월급 많이 받은 게 예수님의 덕분입니다. 해서 그게 영광이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돈 있는 거 갖다 버릴까요? 미쳤다고 버립니까? 귀한 돈을. 그럼 어떻게 할까요? ‘주여 내가 이런 돈을 가짐으로써 원래 내 기본적인 죄를 생각해야 될 건데 갑자기 돈 욕심이 나네요. 주여 이것도 죄죠?’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시켜야 돼요. 단계가 두 단계라. 복잡해요.

‘주여, 이 돈 있는 걸 갖다 버립니까?’ 하지 말고 ‘이 돈을 받으니까 전에는 내가 돈을 사랑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적어도 내 정도 신앙 같으면, 막상 돈 사랑하지 않는다 했는데 목돈 들어오니까 환장이 되네. 와! 너무 좋아. 너무 좋으니까 그 다음부터 십자가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주여, 이 돈 뺏어 가면 안 됩니다.’라고 좋아할 때 ‘아! 이게 매일같이 주기도문 해야 될 이유가 있구나. 주여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주시고 우리에게 날마다 죄가 나오도록 나에게 돈을 주셨구나.’ 또 이 소리 듣고 죄 나와도 좋으니까 돈 좀 주면 좋겠다.ㅎ

날마다 우리는 주님 좋다. 주님 믿는다. 하지만 막상 내 육신과 합한 것이, 세상 것이 들어와 버리면 우리는 몸 둘 바를 모릅니다. 딸이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지금 여러 가지 걱정이 되고 하지만, 딸이 만약 그 나이에 남자 하나 없이 그냥 늙어간다면 그것도 문제죠. ‘어이쿠, 저 딸 누가 안 데려가나? 내 딸 참한 딸을 남자가 눈이 삐었나, 왜 안 데려가지? 그런다고 해서 나서서 광고할 수도 없고 하늘도 무심하지 할 수도 있죠.

그 다음에 봅시다. 모든 것이 역사적인 것을 가지고 해석하기 때문에 역사 속에 누가 있습니까? 내가 있죠. 내가 판정하고 내가 해석하고 그래서 의롭다고 할 수 있는 걸 끄집어내는 식으로 하니까 이게 해석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묵시는 어떻게 합니까? 이 역사를 피해가 버리죠. 내가 예상한 역사 말고 피해가 버려요. ‘그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래, 그게 무슨 주님하고 네 죄용서와 무슨 관계있느냐.’ 예를 들어서 이런 겁니다. ‘주여, 제가 바람을 피웠습니다. 내가 바람피우지 말아야 될 텐데 내 역사에 이런 오점이 있다니.’ 막 걱정을 하는 거예요. ‘주여 용서 하소서, 내가 회개합니다. 회개하면 구원받으니까 회개합니다.’ 하면 주님께서 뭐라합니까? ‘그거하고 네 구원하고 무슨 관계있는데? 괜히 쫄아서 왜 그러니? 왜 그래? 너는 처음부터 죄인이었어. 복음 듣지도 못했어?’ ‘듣기는 많이 들었는데 막상…’ 막상이고 뭐고 자기 역사를 따로 챙기는 거예요. ‘나는 이렇게 반듯하게 살았고 이렇게 남한테 해코지도 안 하고 이렇게 반듯한 가정에서…’ ‘그게 죄야, 그게.’ 이제 생각나네. 그게 죄라니까요. 구원하고 바람피우는 것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그렇게 복음 안다고 해놓고 막상 내가 차타고 가면서 누구 욕했다. ‘바보야, 바보야, 내가 성령 받은 사람이 욕을 하다니, 주여 용서하옵소서. 제가 욕을 했습니다.’ 하면 주님께서 ‘너 원래 욕하게 돼 있어. 구원하고 그거하고 무슨 관계있다고 그걸 들고 나와?’ ‘아! 그렇구나, 나는 성령 받았기 때문에 욕하면 안 됩니다.’ ‘ 그런 인간을 모델로 삼아서 했구나.’ 너하고는 바이, 바이다.

너는 네 역사를 포기하라 하는데 자꾸만 예수 믿는 것을 내 역사 속에 좋은 장점으로 얼마나 그게 파일 끼우듯이 끼어놓고 좋은 점, 괜찮은 거, 멋있는 거, 복음 전했던 거, 전도한 거, 헌금 많이 한 거. 이런 걸 장점으로 해서 하나의 간증 집으로 아예 소설을 썼어요. 우리는 매일같이 소설을 써요. 우리는 항상 내가 주인공으로 해서 소설을 써요. 성경책에 나오는 내용을 가지고 소설을 쓰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주님께서 묵시는 그 연결된 역사를 중간에 다 잘라버리죠. 그래서 묵시적 사건이 『70이레에 일어나는 모든 역사적 내용들, 즉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 하달, 기름부음 받은 왕의 등장, 기름부음 받은 자 끊어짐, 성읍과 성소 훼파, 언약 굳게 함, 제사와 예물 금지, 종말이 될 때까지의 하늘의 진노가 황폐한 자에게 쏟아짐』이 모든 것을 이야기하니까 그 모든 것을 집어넣어서 자기가 주인공 되어서 그게 소설을 써보는 거예요. 이거는 엉터립니다.

그럼 이거는 뭐냐, 이 말은 뭐냐, 십자가에서 소급해서 봐야 돼요. 십자가에서 소급해서 보게 되면 요 모든 사건은 일시에 다 일어나요. 짧은 순간에 이 안에 포함이 돼 있어요. 예를 들면 ‘예루살렘 성전 중건하라.’ 했죠? 그러면 예루살렘 성전 중건 87년 만에 느헤미야, 에스라 와서 성전을 중건하잖아요. 성전을 중건할 때 새로 짓는 그 자리에서 그 당시 사람은 ‘지금 우리가 성전을 짓는다.’ 하잖아요. 짓는다 했는데 제대로 성전을 짓게 되면 성전 짓는 순간 장차 오실 기름 부은 자의 등장도 그 안에 이미 다 포함된 채 성전을 짓는 거예요. 무슨 이야긴지 이해가 되겠습니까?

이 예를 들어서 이해가 덜 될 것인지 더 될 것인지 나는 장담 못하겠습니다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나이가 60이 된 어떤 사람이 포장마차 가서 어묵(오뎅)을 먹는 순간 그는 옛날 40년 전에 자기 첫사랑과 이 자리에서 어묵 먹던 것이 생각날 때, 남들 보기에 사진을 찰칵, 찍으면 분명히 그 사람 혼자 어묵을 먹지만 그 사람 기억 속에는 뭡니까? 40년 전에 애인과 함께 어묵을 먹던 그 생각이 있는 거예요. 그 생각은 사진에 안 드러나죠. 왜, 그 사람은 제 3자기 때문에.

그러면 성전 짓게 할 때 누가 짓느냐, 에스라 느헤미야가 짓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은 제 3자가 볼 때 에스라 느헤미야가 짓지만 주님이 그 사람 속에서 주님이 성전을 짓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을 다 빼버리고 ‘에스라 느헤미야가 성전 짓는다.’ 이렇게 돼 버려요. 그러면 에스라 느헤미야 지옥 갑니다. 왜, 주님이 함께 있지 않기 때문에. 그냥 성전 지은 사람이 돼 버려요. 누가 성전 짓게 한 것이 아니고 성전 지은 사람이 돼 버려요.

자, 오늘날 우리한테 적용합시다. 성경공부 참석했습니다. 분명히 우리가 참석하고 싶어서 참석했어요. 그런데 5년 뒤에 가서 보니까 ‘그때 가락교회에 주께서 가게 하셨구나.’라고 안다면 우리는 그 알게 된 건 5년 후에 알았지만 지금 주께서 함께 했다는 것은 사실이거든요. 지금 우리 심장 뛰는 게 우리 힘이 아니고 주의 힘이 아닙니까? 우리는 그런 거 싹 잊어버리고 ‘내가 공부하러 왔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10년 뒤, 20년 뒤에 보면 ‘참, 그때 좋았어. 주께서 그렇게 같이 모여서 하게 하셨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맞아요. 소급해서 맞아요. 그때로 다시 안 돌아가 봐도 지금 있는 주님이 그때 하셨다는 것을 내가 믿기 때문에 같이 되는 거예요.

구약의 홍해 사건, 선악과 따먹을 때 우리 안 따먹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성령이 오게 돼서 보니까 그때 선악과 따먹게 하신 그분이 바로 우리 조상이고 우리는 그분의 조상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그때 주님께서 하신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이 지금 나에게 믿어지니까, 지금 나에게 믿어졌다는 말은 주와 함께 우리는 그쪽 세계가 이미 우리 속에 같이 들어오게 된 거예요. 그러면 창세기 2장 말씀은 지나간 말씀이 아니고 지금 생생하게 나에게 살아있는 말씀이 되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리라.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내 운명을 결정하는 이야기에요. 지금 내 운명을 결정하고 지금도 그런 방법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고 있고, 그래서 이렇게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보통 하는 믿음은 단지 기억일 뿐이지만 성령이 와서 주께서 한 믿음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가 다 한꺼번에 다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가봐야 알지.‘가 아니라 요한계시록이 지금 나의 일로 생명나무가 있고 거기에 지금 내 입장이 그곳에 갈 수밖에 없는 입장인 것을 내가 믿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묵시적인 혜택입니다. 이건 인력으로는 되지 않고 성령을 받으면 성경 전체 내용이 바로 지금 내가 성령의 결과에서 나를 만든 것이 성경 전체를 담기 위해서 주께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내가 인정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241 페이지 봅시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을 받는 수동적 언질이』수동적입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피동적이죠. 받기만 했잖아요. 받기만 한 것을 보통 인간들은 자기가 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말씀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할 때 문제가 뭐냐, 우리가 그걸 지키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 하는 것은 수동적으로 받으면 되는데 그러면 돈을 사랑하지 않게 하는 능력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있다? 돈을 사랑하지 않는 말씀의 명령과 동시에 같이 들어온 거예요. 들어와서 우리 안에 잠재돼 있는 겁니다. 잠재돼 있다가 우리가 돈 때문에 낭패를 당할 때 말씀이 생각나는 거예요. ‘아, 바보같이 그래, 돈을 사랑하지 말라 했는데 내가 참 어겼구나. 주여 제가 말씀 어겼습니다.’하고 고백하는 순간 이미 주님께서 우리 속에 함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진리는 위반함으로써 체험되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킴으로써 내 말씀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 말씀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말씀 지킨 사람이 돼 버려요. 아이, 이런 것도 누가 알아먹어야 되는데.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에 했잖아요. ‘간음하지 말라‘는 말은 우리보고 뭐하라? 간음하라는 이야기에요. 간음하고, 살인하지 말라는 말은 ’살인하라.‘는 이야기에요. 왜, 우리는 할 수 있는데 못하게 만들어서 지금 막고 있어서 사실 못하는 거예요. 살인을, 아! 아까워. 죽이는 건데.

우리는 주께서 살인할 수 있는 인간을 못하게 했을 뿐이지, 우리는 살인을 안 하면 안 할 인간이 아닙니다. 성질나면 죽이지 뭐.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무슨 죄다? 살인죄고, 아는 사람을 보고 음란을 품은 것도 간음죄라 했어요. 이게 뭐냐 하면 너는 수동적이라는 거예요. 어떤 쪽에서? 말씀에 의해서 수동적입니다. 우리는 항상. 피동성 이예요. 그래서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해야죠. 면류관도 반납하고 어디 감히 이걸 내가 왜 써요? 대머리라고 좋아요. 훌떡 벗어서 가발까지라도 벗어서 드려야 돼요. 수동성 이예요. 수동성이면 주관하시는 분은? 주관하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어요. 말씀은 주님이 쥐고 우리는 그걸 못 지킨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그 말씀만 살아나고 말씀 살아나면 우리는 그 말씀을 지킨 게 돼요. 말씀이 중요하지 우리는 안 중요하거든요.

“말세에 사람들이 서로서로를 미워하고“ 하면 그 미워하는 게 우리에요. ‘우리가 미워합니다.’ 하면 주께서 기뻐하셔요. 왜, ‘너는 못나도 말씀은 과연 너 선에서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게 살아났으니까, 그러면 됐네.’ 주께서. 우리는 도화지고 주님은 색칠을 칠하고. 그리고 우리는 천국 갤러리에 작품 아무개해서 걸려있고, 2846번 작품으로 해서 걸려있고. 각자 인생의 그림이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이런 변곡점, 어떤 사람은 이런 인생 죽 살다가 왔지만 그림 그리는 사람은 전부 다 똑같아요. 주님이 그리고 우리는 도화지에 불과하고,

요새 내가 그림 그린다고 바빠요. 사실은 그림 그리는 게 아니고 색칠한다고. 주일학교 교재를 샀는데 색칠 하나도 안 칠해놨어요. 그러니까 색칠 하느라 팔도 아파요. 그걸 보고 내가 많이 느껴요. 주님이 그리고 나는 도화지에 불과하다 이 말이죠. 도화지가 ‘이렇게 그려주세요. 저렇게 그려주세요.’ 요구하지를 못해요.

그 다음에 봅시다. 『이 능동성으로 인해 ‘타인의 자리’는 주관정립을 위한 기억으로만 재생된다.』도대체 무슨 이야깁니까? 어렵게 써서. 『하지만 ‘타인의 자리’는 주체에 질식당할 자리가 아니다. 도리어 새로운 사건이 돌출의 장소로서 활용되기 위해 구조 잡힌 것이다.』

요 이야기를 해야 되거든요. 주체 하면 누굴 이야기합니까? 나를 이야기해요 나! 맞죠? 그런데 알랭바디우란 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 사람 참 똑똑하죠. 주체라 하는 것은 내가 주체가 아니고 남들이 요구할 때 비로소 주체가 그때 등장한다. 남들은 지시하고 나는 지시에 따를 때 그게 주체라는 겁니다. 그게 뭐냐, 호명할 때 주체가 되는 거예요. 길에 가는데 경찰관이 ‘어이’라고 할 때 ‘저 말입니까?’ 하고 돌아볼 때 그때 공권력이라는 고 환경에서의 합당한 주체로서 잠시 우리가 등장하는 거예요.

‘고객님, 어서 오세요. 고객님’ 할 때 고객이 등장할 때 나는 고객이라고 붙여주면서 백화점에서의 나의 주체가 새롭게 등장해요. 그런데 백화점에 잘렸다. 두 번 다시 고객님이라 안 해요. ‘어이 아줌마’ 하지. 그렇잖아요. 월급 줄 때 ‘우리 사장님, 우리 대표 이사님’ 이렇게 하잖아요. 잘렸다. ‘에이 씨’ 벌써 주체가 다르잖아요. 그래서 주체라 하는 것은 남이 정하는 것이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나를 어떻게 부르시렵니까?’ 우리는 찾아다니는 그런 입장이라는 거예요.

주체는 상황이 만드는 것이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주체를 이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건’이라고 하는 거예요. 왜냐 하면 나도 어떻게 불릴지, 어떤 상황이 올지 모르기 때문에, ‘꿇어’ 하면 나는 갑자기 군에 가서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꿇어야 되고, 군에 가면서 장병들에게 할 수 있는 제일 첫 번째 조치는 모든 주체를 없애버립니다. 통합주체를 만들어요. 주체를 누가 대신하느냐 하면 ‘너는 명령하는 자가 아니고 명령 받는 자고, 명령하는 주체가 따로 있고 너는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그런 주체 빼내기, 주체 공백, 아까 말했죠. 빈터 만들기. 나의 중심을 오려버리는 그 작업을 논산 훈련소에서 합니다. 논산 훈련소에 가서 편지 쓸 때 눈물 나죠. 전부 다 편지 쓰고 전화해서 ’엄마, 나 좀 빼내줘‘ 돈 좀 써서 빼내라 합니다.

왜 자기가 예상한 모든 것은, 세상과 회사에서는 일단 자기가 중심이잖아요. 그런데 자기 혼이 빠지잖아요. 완전히 바보 만들어요. 중앙 두뇌 부분을 빼내니까 그 빼내는 작업 이예요. 나이 어린애한테 말 높이고 어린놈은 반말하고 MBC에서 하는 진짜사나이 봤죠? 자기 아버지뻘 되는 사람한테 말 놓고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내가 만약에 참석하면 ’이게 어디서 말 놓노?‘ 군에는 그래야 되는 기계기 때문에, 인간마저도 군에서는 기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참 군대를 없애야 되는데 놀랍게도 그 군인도 구원됩니다. 군인은 군인 식으로 구원받아요.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내 상관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네가 천국 차지한다. 천국에 간다는 인간은 다 나와. 남의 자리야. 다 나와. 얘를 집어넣을 거야.‘ 왜, 주님만이 나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나는 주체 없다.‘ 영구 없다가 아니라 주체 없다. 나는 주체가 없고 주체의 그 빈자리는 주님이 확 달아버리죠.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사는 이러한, 아까 솜사탕 만드는 구멍 있죠. 여러분 그거 아십니까? 솜사탕 만들 때 돌리는 거. 이상하게 구멍 있는데 뭐가 나오잖아요.

이처럼 우리 속에서 자꾸 뭔가 나와요. 나와서 내 주체를 묵사발 만들어야 돼요. 내가 내 역사, 내 생각, 내 기대, 내 소망, 항상 이것이 뻥! 뻥! 뻥! 이것이 말씀에 의해서 구멍이 뚫려야 돼요. 그런 식으로 거기서 나온 게 바로 낯선 사건, 새로운 십자가 사건이 나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하는 말이 그 말 이예요.

그래서 241 페이지 중간에 봅시다.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이처럼 끊임없이 ‘역사 층’과 ‘묵시 층’에 관한 아이디어들이 쏟아내고 있다.』인간 유기체는 역사 층과 묵시 층,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이게 안 어려워요. 일단 인간은 역사를 만들어요. 역사를 딱 만들고 보니까 자기 맘에 안 차잖아요. 그래서 여기다 뭘 만드느냐 하면 묵시 층을 만들어요. 그래서 이걸 만들어서 이게 종교가 되고 신앙이 되는데 엉터리 신앙 이예요. ‘나 죽어서 천국 간다.’ 누구 맘대로? 안 돼. 모든 종교가 그래요. 이 땅에는 .., 하지만 죽어서는 극락 간다. 이거는 일단 나를 극락 보내는 거예요.

그러나 천국은 그리스도의 몸이 돼야 가지. 내 몸 가지고는 못 들어가요. 일단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들어 놓고 그 만들어진 그리스도의 몸을 그리스도에 붙은 지체라 여길 때만 주께서는 올려 보내는 거예요. 내 몸 가지고 덜렁덜렁 가서 가방 들고 못 가요. 어디 갑니까? 우리가 주님의 하나의 지체가 돼야 돼요. 주님의 지체가 되려면 우리는 예수 안에 들어가야 되고, 예수 안에는 그냥 못 들어가요. 우리가 죽어서 들어가요. 그냥 죽는다고 자살하면 안 돼요. 우리가 생각하는 죄인으로서는 우리가 죽으면 안 되고, 주님이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할 때만 들어가요. ‘이유도 따지지 말고 이유도 묻지도 말라. 너는 무조건 죄인이야.’ ‘아멘’ 그래서 들어가는 거예요.

바람피워서 죄져서 죄인 된 게 아니고 사람을 죽여서 죄인이 아니고 도둑질해서 죄인이 아니라 처음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것. 자기의 원천과 근원부터가 나는 죄인인 것을 안 사람만 천국에 가서 자기 자랑 안 합니다. 주 안에서 아내를 사랑하라 하죠. 세상에 그런 남편 없습니다. 왜냐 하면 주 안에 있어 버리면 어떤 상태냐 하면 아내한테 늘 찔찔 짜는 ‘여보, 나는 날 때부터 죄인이야.’ ‘어쩌라고요?’ ‘난 죄인이야, 여보, 월급 갖다 바칩니다. 여보. 죄인이야.’ 이런 남편 봤습니까?

부모를 떠나서 한 몸이다. 이건 신비인데 이것은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정이 되면 안 되고요. 가정에서 구원 못 받고 교회가 돼야 구원받습니다. 주 안에서는 아내와 남편도 전부 다 같은 주님의 지체가 돼서 지체는 지체끼리는 이야기를 못해요. 중간에 몸체를 경유해서 이야기가 돼야 돼요.

여기 예수님의 몸이라면 나는 여기(왼쪽) 있고 내 아내는 오른쪽 손가락 끝에 있으면 그냥 못 가고 주 안을 거쳐서 가면 나는 죄인인 채로 아내한테 이야기하고 아내가 좋다고 ‘이 남편 정신 차려라.’ 이러면 안 되고 아내도 대답할 때는 죄인인 채로 이야기해야 돼요. 둘 다 손잡고 ‘여보 우리는 둘 다 죄인이다. 그렇지, 주께 기도하자.’ 이런 식이 되는 거예요. 이건 이상한 일이죠. 연극도 아니고 말이죠. ‘여보, 이거 하나 드려보세요. 아내가 실수해서 죄인인 내가 만들었는데 죄인인 당신이 맛을 보세요.’ 이러면 식사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그래, 죄인인 내가 죄인인 당신이 만든 것을 죄인인 내가 먹을게.’ 이러면 식사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여보, 고뎅이 하나 까줄까요? 죄인인 내가 다슬기를 까서 죄인인 당신한테 드릴게요.’ 이러면 이거 까는데 5분씩 걸려요. 이러고 설거지까지 하려면 3시간 걸리는데 언제 밥을 먹습니까? 그냥 생략하고 ‘고맙데, 고마워.’ 이러면 끝날 문제 아닙니까?

항상 성도는 그냥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를 경유해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통할 때 두 세 사람 모인 곳에 내가 함께 있겠다는 것이 확인이 되는 순간입니다. 집사끼리 이야기할 때도 주 안에서 이야기하고 주 안에 가게 되면 죄인으로서 이야기하고 죄인으로서 받고 죄인으로서 응답하는 거죠. 그래서 성도끼리는 서로 소송하지 마라. 차라리 속는 게 낫다. 왜, 구원받았으면 됐지, 돈 좀 사기 당해도 괜찮다는 거예요.

그걸 노리고 있던 다른 집사가 ‘그렇구나.’ 이러면 그건 성도가 아니잖아요. 성도 아닌데 돈 빌려주면 안 되고 반드시 갚아내야 돼요. 성도가 아니니까. 교회는 가도 성도는 아니거든요. 그래서 예수 안 믿는 남편한테 잘해준다는 게 말이 안 되고, 예수 안 믿는 아내한테 잘해주지 마세요. 그건 반드시 그리스도를 경유해야 되는데 잘해줘 봐야 그리스도를 이해 못합니다. 그건 개한테 진주 던지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개가 남편이고 내가 진주인데 내가 예쁜 짓하면 개가 발로 차면….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한 가정이라 하는 것은 가족과 내 모친이며 내 형제냐, 할 때 바로 그리스도 말씀 안에 있을 때 내 가족과 형제기 때문에, 결혼 안 해도 이미 결혼한 사람이고, 결혼해도 이미 그리스도와 결혼한 신부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언급하는 거죠.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역사 층, 묵시 층 이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다 했습니다. 하지만 이 묵시라 하는 것은 역사를 바탕으로 해서 역사에서 모자란 것을 채우기 위해서 묵시, 천국을 끌어대기 때문에 이건 신자가 아닙니다. 성도도 아니고 성령의 일도 아니에요. 그냥 종교 취미생활 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렇게 합니다. ‘참아라. 죽으면 좋은데 간다.’ 그건 누가 못해. 그건 아무나 위로하겠다.

진짜 묵시는 이게 바뀌어야 되는 거죠. 이미 구원받았기에 역사는 모두가 죄가 된다는 것. 내가 어떻게 행동해도 죄가 된다는 것을 내가 이미 의인이기 때문에. 십자가 안에서 보니까 죄 아닌 게 없다. 왜,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의 행동 하나 후회 하거나 이러지 마세요. 그건 마귀가 좋아할 겁니다. ‘내가, 내가 그럴 수가. 내가 이렇게 착한데 그런 짓 하다니.’ ‘그러면 앞으로 안 그럴 거야?’ 돌아서면 똑같이 그 짓 할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뭐냐 죄를 지으면 7년 간 회개해야 된다는 거예요. 루터가 그것 때문에 논쟁했거든요. 신부가 하는 말이 ‘루터야, 우리가 죄 지으면 7년 간 회개하지.’ 죄 지으면 7년 간 회개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뿐만 아니고 모든 천주교교인들은 1년에 한 번씩 반드시 고해성사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기독교도 뭡니까? 기독교도 꼭 고난주일 날은 금식해야 된다. 다이어트 하는 좋은 기회가 왔어. 모든 어떤 일을 해도 우리는 용서 받아야 되는 그냥 죄뿐입니다. 그래서 주님 덕분에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지, 착한 일 많이 해서 덕을 많이 쌓아서 구원받는 거 절대로 아닙니다. 십자가를 모독하겠다는 것이 악마의 전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리도 구원받았고 창기도 구원받았다는 이야기가 분명히 나옴에도 불구하고 나하고 상관없는 같은 형제 이야기가 아닌 남의 형제 이야기처럼 들렸던 것도 우리가 가끔 느낍니다. 완벽한 인간 소망하지 말고 그건 내 역사고, 완벽한 분이 내 대신 죽었다는 그 사실만 기억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가락-70이레 논문(마귀의 소리)131024-28강b -이 근호 목사.hwp (67.0K), Down:14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26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3,017 강의 [13 대구강의 17] - [피 103] - 예수 안 [피] 최고관리자 13-11-07
13,016 자유게시판 64강-에스겔22장 1-5(피 흘린 죄)131106-이 근호목사 에스겔 최고관리자 13-11-07
13,015 우리교회 피흘린 죄 131106 에스겔 최고관리자 13-11-06
13,014 자유게시판 20131101b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실패의 자리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13-11-06
13,013 자유게시판 20131101a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실패의 자리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13-11-06
13,012 자유게시판 11강-슥5장5-11(에바)131103-이 근호목사 스가랴 최고관리자 13-11-05
13,011 강의 [13 대구강의 16] - [피 102] - 반대로 [피] 최고관리자 13-11-05
13,010 자유게시판 겨울 수련회 안내 [수련회] 최고관리자 13-11-05
13,009 자유게시판 58강-롬 10장 1-4(율법의 마침)131103-이 근호 목사 로마서 최고관리자 13-11-05
13,008 우리교회 [일반] 속임수 에 대한 어떤 이의 질문과 저의 답변 [일반] 최고관리자 13-11-04
13,007 묻고답하기 "속임수"에 대한 어떤 이의 질문과 저의 답변 - 최고관리자 13-11-04
13,006 우리교회 에바 131103 스가랴 최고관리자 13-11-03
13,005 묻고답하기 믿음의 말씀 로마서 최고관리자 13-11-03
13,004 우리교회 요셉의 일생 131103 - 최고관리자 13-11-03
13,003 설교 율법의 마침(로마서 10:1-4) 로마서 최고관리자 13-11-03
13,002 우리교회 율법의 마침 131103 로마서 최고관리자 13-11-03
열람 ➜ 자유게시판 가락-70이레 논문(마귀의 소리)131024-28강b -이 근호 목사 레위기 최고관리자 13-11-03
13,000 강의 실패의 자리 131101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13-11-01
12,999 우리교회 [일반] 결혼의 의미와 교회 미가 최고관리자 13-11-01
12,998 묻고답하기 결혼의 의미와 교회 미가 최고관리자 13-11-01
12,997 강의 사도행전54강, 마태복음 45강( 죽음, 오병이어) 131031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13-10-31
12,996 자유게시판 63강-에스겔21장 28-32(일상과 말씀)131030-이 근호목사 에스겔 최고관리자 13-10-31
12,995 자유게시판 광주 강의(2013. 10. 25) 1강 에스겔 최고관리자 13-10-31
12,994 우리교회 일상과 말씀 131030 에스겔 최고관리자 13-10-30
12,993 자유게시판 가락-70이레 논문(마귀의 소리)131024-28강a -이 근호 목사 레위기 최고관리자 13-10-30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