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자리 131101
실패의 자리 131101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한윤범(IP:14.♡.134.60)
13-11-06 11:12
20131101a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실패의 자리
(강의:이근호 목사)
“네가 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니”(출29:38)
우리가 알기에는 이게 제사입니다. 매일 드린다 해서 상번제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제사하라는 것은, 앞에 제사장 위임식을 한 거예요. 제사장 노릇하라고, 제사장 감투 쓰라고 한 게 아니고 상번제나 번제나 드릴 때 유일하게 제사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을 특별히 뽑아서 위임식을 해놓고 그 다음에 “저희들 제사장들입니다.” “그렇다면 상번제 드려라.” 제사장이 그냥 놀고 거들먹거리라고 한 것이 아니고 상번제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부류가 제사장들이라고 한 겁니다.
벌써 한 달 지났기 때문에 지난달에 한 것은 잊어버리지요. 저한테 늘 들리는 소리는 설교 듣고 돌아서면 다 잊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럼 돌아서지 말지 뭐하려고 돌아섰습니까.
지난번에 45절 먼저 언급했어요.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하나님께서 제사장 세우고 상번제 드리는 것은 그런 기능이 반복될 때 거기에 함께 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 취미도 참 희한하지요. 그냥 인간 속에 들어오면 되는데 자리를 마련해야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자리가 마련될 때 너와 내가 함께 있지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그 자리에 합류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궁금한 게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자리가 뭐냐? 그게 바로 제사입니다. 제사는 흠 없는 어떤 분이 죽은 걸 말하죠. 그래서 이걸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란 분이 어떤 인물이라서 그 안에서 만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의 인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인물이 출애굽에 있는 제사와 제사장 이런 기능을 완수를 할 때 완수해서 만들어진 장소, 자리가 있어요. 만들어진 자리를 보고 하나님께서 흐뭇하셔서 “누가 내 말대로 이렇게 완성 했지?” “제가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사람들과 내가 만나겠다. 화해해서 만나겠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못하는 게 없는 걸로 알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고 자신이 약속한 것만, 하나님이 앞서 발설하시고 내가 이렇게 약속하겠다고 먼저 던져진 약속 안에서만 하나님께서는 만나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29장 45절, 46절, 이스라엘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내가 그들의 하나님으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이 모든 것은 사람이 그리워서 하나님이 외로워서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고 거할 수 있는 자리가 하나님의 약속된 자리기 때문에 인간을 거기다 집어넣어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겁니다. 그걸 위하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냈다고 29장 마지막에 그렇게 돼있지요. 그렇다면 방금 제가 나열한 하나님이 약속된 자리에서만 인간들과 만난다는 것을 성사시키는 가운데서 뭐가 바깥으로 자꾸 삐져나오느냐 하면, 이게 바로 30장에 가면 이런 말이 나와요.
끊어지리라. 보통 전도 많이 하는 교회에서는 금기시 되는 용어 아닙니까. 무조건 오라는 거지 다 끊어진다면 남는 사람 없으면 예배당 운영은 누가 하라고.
출애굽기 30장 33절에 보면, “이것을 타인에게 붓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싫으면 말고” 그야말로 하나님은 똥배짱이라 했잖아요. “천국 가기 싫어? 오지 마. 안 와도 돼. 끊어지리라. 좀 나가 줬으면 좋겠다. 난 너 안 볼 거야.”라는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가 있습니다.
30장 38절, “무릇 맡으려고 이 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작살을 내고 끝을 낼 거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찾아오신 이유가 모아서 같이 살려는 게 아니고 끊어내어서 같이 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에요. 생선가스 먹을 때 포크와 나이프를 왜 줍니까? 끊어낼 것은 먹지 말고 끊어내라는 거지요. 가시 같은 것은 끊어내고 도톰한 부분, 살 부분만 먹으라고. 특히 가자미 같은 것은 잘 끊어내야지 다 끊어내면 먹을 것 없잖아요. 내가 먹고 싶은 것만 먹겠다는 그런 생각이지요. 그러니 하나님은 일종의 요리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입맛에 맞는 사람이 되려면 언약 안에 들어와야 됩니다.
또 있어요. 31장 14절에 보면, “너희는 인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끊어낼 자는 포크와 나이프 들고 끊어내겠다는 그 작업이 하나님께서 일하심입니다. 새순교회에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무서운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다는 아니라는 문제거든요. 우리교회에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이것은 포크와 가위 들고 설쳐대시겠다는 것. 끊어낼 자는 끊어내겠다는 말이거든요.
출애굽기 30장, 31장에서 계속 끊어내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국에 사람 모자라서 환장하신 분이 아니고 합당하지 않는 사람은 끊어내겠다고 나올 때에 우리가 다급한 거예요. 잘리면 안 되는데. 하나님은 매일같이 구조조정하시는 분이에요. 회사 출근하면 정문에 큰 벽보에 오늘 끊어낼 사람. 25팀에서 누구누구 끊어내고. 다음 날 되면 또 끊어내고. 매일같이 구조조정하시는 것 같아요.
몇 명 남았다고 그것마저 끊어내면 없잖아요. 저쪽에서는 몇 명 남았는지 신경 안 쓰고 끊어낼 자를 늘 끊어내는 작업을 하십니다. 모으는 작업이 아니고 끊어내는 작업. 누굴 상대로 합니까? 애굽에서 올라온 자들을 상대로 하는 거예요. 올라올 때 전부 다 어깨동무하면서 우리 모두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 보니까 끊어지리라. 걸핏하면 끊어지리라. 그럼 바짝 긴장해야 됩니까? 긴장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사람이 정신 차린다고 될 문제도 아니고. 주께서 끊어내겠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여기 30장 21절에도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건 뭐 죽는 이야기 또 나오네. 끊어지리라. 생명을 잃어버리리라. 내가 죽여 버린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마음에 안 들면 죽여 버린다.
지금까지 제가 이야기한 걸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과 만나겠다는 겁니까, 이미 만나고 있는 겁니까? 이미 만나고 있는 중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실존을 제대로 아는 사람,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걸 분명히 느끼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끊어낼 자를 끊어내는 작업을 쉬지 않는 것도 알지요.
그러면 안 끊어지려고 해서 안 끊어지는 게 아니니까 안 끊어지려고 하지 마시고 관심사를 무슨 기준으로 잘라내느냐는 거기에 마음을 두면 안 잘립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잘라내실 때 무슨 기준으로 잘라내느냐는 겁니다. 그 기준은 우리의 이성과, 우리의 경험과, 우리의 상식과,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과 전혀 관계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가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그럴 때는 결론을 먼저 제가 던져주지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라내실 때에 우리가 어떻게 하면 버틸 수 있고 안 잘리는지 생각하지 마시고 오늘 본문 29장 38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견과 상관없이 매일같이 잘라내고 있습니다. 그걸 상번제라.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양이 죽습니다. 이미 죽음이 현실을 만드는 핵으로 벌써 있어요.
계란에 노른자가 들어있지요. 그런데 바깥에서는 안 보이잖아요. 그런데 깨보면 있잖아요. 계란을 처음 보는 사람 같은 경우에. 빙그레에서 바나나 우유를 노랗게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다른 회사에서는 거기에 반대해서 바나나는 껍질만 노랗지 안에는 하얗다고 해서 하얀 바나나 우유를 만들어냈어요. 별로 안 팔렸습니다.
상번제를 드릴 때 모든 사람의 관심사는 제사장이 상번제 잘 드리면 우리는 산다.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것? 노란 바나나 우유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뭘 하면 되지? 출발이 잘못됐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뭘 하면 됩니까? 하면 그 기도는 아예 응답조차 되지 않아요. 이게 오늘 강의 결론부분에 나올 거예요. “내가 뭘 하면, 어떻게 지키면 안 잘립니까?” 거기에 대해서 주님은, “너는 질문 다시 해.” 그 질문 자체가 하나님 계획에 포함이 안 된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잖아요. 이런 질문을 해서는 안 돼요. 선악과 따먹은 난 뒤에 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용납이 안 되는 질문입니다.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럼 질문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선악과가 뭐 길래 우리가 죽어야 됩니까? 그렇게 나와야지요. 우리가 죽는 걸 기정사실화해야지요. 죽을 때 죽더라도 어떤 기준에 의해서 잘라내느냐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구원받는 사람이에요. 구원받는 사람은, 내가 어떻게 살까 하는 그 목표와 목적을 빼내야 돼요.
그러면 제사장이 상번제를 드리면 우리는 산다고 생각한 질문이 어느 지점에서 잘못된 질문이냐 하면, 내가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느냐는 것이 어디에 문제 있느냐 하면, 자기를 존재로 규정, 또는 규명하겠다는 시도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습니까? 존재는 여기 놓여있는 게 존재거든요. 내가 여기 놓여있는 데 이걸 어여삐 여겨 주옵소서.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과정으로 바꿔요. 과정은 우리말로 흐름입니다. 흘러가는 거예요. 경주에 포석정 있지요. 그걸 왕이 왜 만들었겠어요. 술을 그냥 먹으면 되는데 유별 나. 대신에게 술 줄 때 이걸 운치 있게 하겠다고 술잔을 띄우면 그 앞에 도착한다고요.
흐름에 술잔을 띄우면 술잔은 존재가 될 수 없어요. 왜? 자기 존재를 과정 속에 띄웠으니까 흐름에 주도권이 있지 존재는 그냥 맥없이 실려 가는 식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존재를 위함이 아니고 흐름을 위함입니다. 그 흐름이 막다른 도착 지점이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포석정 물 위에 술잔을 띄우듯이 하나님께서 언약이란 물을 흘리면 그 위에 동동 떠가는 것은 장차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받음이 여기서는 상번제라는 형식으로 물 위에 떠서 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술잔은 누가 마셔야 돼요? 누가 그 쓴 잔을 마셔야 돼요? 마지막에 손을 내밀어서 언약이란 술잔을 예수 그리스도만이 마실 수 있는데 성급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 하면 구원받는데 아침저녁마다 제사 드리자.”라고 해버리면 이것은 뭘 깨뜨리느냐 하면, 바로 과정, 우리는 흐름을 타야 되는데 흐름을 타지 못하고 내 존재를 위해서 강제로 흐름에서 하차하는 셈이 돼요. 차를 타야 되는데 창문 열고 버스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오늘 낮에 그런 글을 썼습니다만 종이배를 만들어서 강물에 띄우면 종이배가 떠요. 그런데 그걸 집어서 밖에 놓으면 물에 젖은 종이배는 꼴사나워. 오늘날 교회 다니는 인간들이 꼴사나워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난 십자가로 구원받았다, 나는 언약 알고 구원받았다, 나는 복음 알고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막상 흐름에서 끄집어내면 전부 다 거기 같아. 아무 의미도 없고 행색이 볼 게 없어요. 왜? 존재는 멈추었으니까. 남은 것은 옛날에 은혜 받은 것 우려먹는 것밖에 없어. 육이오 때 폭탄 맞은 것 우려서 부흥회 하는 것 있잖아요. 그때 신앙생활한 걸 지금도 우려먹고 있어요. 어떤 흐름이 없어. 진짜 언약 위에 흐름이 있다면 우리는 매일 죄인이에요. 매일 죄인이고 매일 구원받는 기쁨이 와야 되는데 흐름이 없는 거예요.
인간들은 언약이란 흐름을 타지 않으면 자기가 존재에서 역사와 흐름을 만들지요. 그냥 만드는 게 아니고 존재1에서 자기가 되고 싶은 존재2를 그리워하는 겁니다. 이걸 목표라 하고 이뤄나가는 걸 목적이라 하는 겁니다. 목표를 걸어두고 목적하면서 사람은 거기서 생의 활력을 얻어요. 항상 목표와 목적을 찾아내야 자기 자신이 존재1에서 존재2가 되는 싶은 거예요.
어제 목요일에 대전에서 오는데 시끄러운 거예요. 대구 도착하는 사람인데 둘이서 스마트 폰으로 박한이 홈런 쳤다고 중계방송을 해. 왜 그걸 하느냐 하면 삼성이 이겨줘야 존재2가 되거든요. 이게 자기 생에 활력이 있어요. 고3 되면 이제 수능 6일 남았습니다. 이 목표를 위해서 존재1은 경건에 경건을 더 해요. 중요한 일을 앞두고 갑자기 기도 안 하던 인간이 기도하고 성경 3장 보다 2장 더 보고, 헌금 천 원 하다 이천 원으로 인상하고. 바빠. 수능이 코앞에 있으니까. 수능 잘 친 아들을 둔 엄마가 되고 싶은 거예요. 이 존재1은 수능 잘 쳤는지 어떤지 헷갈리는 엄마인데 이때가 되면 수능 잘 친 엄마가 되는 거예요. 세상이 지 마음대로 해요.
자기가 언약을 만들어요. 포석정을 자기가 만들어서 자기가 술잔 돌리고 되나 안 되나 경마 도박하듯이 로또 사듯이 그게 되면 내 인생 풀리는 것이고 못 되면 점쟁이 찾아가고. 그렇게 안 살아가는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 교회 다니나 안 다니나 전부 그렇게 살아가요. 그저 심심하면 목표와 목적을 만들어요. 심심하니까. 남편 퇴직하고 부부가 앉아서 뭘 하는데? 멍하니. 말이 없으니까 둘이 나란히 한 방향을 보지요. 티비 보는 거예요. 야구 보자하고 드라마 보자하고 또 싸우고. 전부 나란 존재를 알아 달라는 완전히 이 판이라. 하여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라는 존재만 행복하면 아주 멋진 세계에요. 세상 잘 돌아가는 거예요.
각자 개개인이 갖고 있는 존재의 역사가 어우러져 있는 세상, 그게 바로 애굽입니다. 애굽에서 나와도 그 마음은 그냥 애굽 덩어리로 나왔던 자기 백성을 주께서는 존재를 흐름으로 바꾸기 위해서 흐름으로만 해석이 가능한 언약, 오늘 본문에 제사를 집어넣습니다. 제사는 존재가 아니고 제사는 과정이고 흐름이었습니다. 제사를 드리라는 말은 제사 위에 네 몸을 실으란 말이에요. 제사 드리면 구원받는 게 아니고 제사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는가? 그 방향에다 네 몸을 실어보란 말이죠.
이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7장에 나오지요. 좁은 길로 가거라. 그 끝에는 뭐가 있습니까? 영생을 보고 싶습니다. 보면 믿겠습니다. 그런 소리하지 말고. 지옥이 있으면 지옥을 피하겠습니다. 그런 자기 결정, 선택하지 말고. 멸망이냐, 영생이냐 하는 것은 영생 본다고 알아먹는 게 아니고 거기서 흐르는 과정이 있어요. 좁은 길로 가면 그건 영생이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그 쪽으로 가게 되면 아무리 다 같이 영생으로 간다고 구호를 외쳐도 그건 멸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좁은 길이 다른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기에 우리는 갈 수 없어요. 주님 쪽에서 그 길이 나와야 돼요. 김창완 씨가 부른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란 노래가 있지요. 길은 없어요. 길은 주님 쪽에서 깔려 나옵니다. 성령이지요. 성령이 오게 되면 날마다 우리는 책망을 받지요. 좁은 길로 가면서 넓은 길을 늘 기웃거리면서 넓은 길 합류 못해서 환장한 우리를 좁은 길로 좁은 길로 이끌어서 무엇이 넓은 길이고 무엇이 좁은 길인 것을 그 순간순간 우리로 하여금 그걸 분간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주의 마음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이것이 좁은 길에서만 공급받아요. 넓은 길에는 그런 배급도 안 옵니다.
지금까지는 어렵다 했지만 일단 어렵지 않습니다. 진짜 어려운 것은 이제부터인데, 존재1에서 존재2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걸 목적, 목표라 했는데 이러한 심리를 희망이라 합니다. 사람은 희망 없으면 못 살거든요. 희망이란 목표가 있는데 목표는 어디서 베껴왔느냐 하면, 남이 갖고 있는 멋있어 보이는 그것이 이제는 내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그래서 나는 무슨 존재가 될까? 하는 것은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내 눈에 띠는 것 중에서 내 욕망에 와 닿는 것을 채택해서 저걸 목표로 삼겠어. 이렇게 하거든요.
여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분이 아버지입니다. 애들은 아버지가 잔소리 안 해도 항상 아버지가 어떻게 하는가를 보면서 자라나게 돼있어요. 어른을 보면서 흉내를 내요. 그러니까 나중에 기껏 자기가 펼친 모든 소망, 목표라 하는 것은 블라인드, 아버지가 요구하는 것 외에는 못 보는 소경이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들은 소경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소경이에요. 부모 죄 때문에 자기 죄고 그게 아니고 하여튼 태어나면서 전부 소경입니다. 소경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그 안에 스며들 때 비로소 장막이 찢어지면서 자신이 소경인 것을 깨닫게 되지요.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인 청년이 예수님과 만나죠. 그 청년이 자기가 소경인 것을 안 것은 그전에는 자신이 눈이 안 보이는 정도밖에 몰랐어요. 제 말이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남들이 동의하고 나도 동의한 인간들이 생각한 차원의 소경은 자기가 소경인 것 맞아요. 그런데 진정 내가 소경인 것은 예수님께서 내 눈을 뜨게 할 때 나는 소경이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내가 소경이라고 유일하게 예수님 앞에서 고백할 순간이 온 거예요. 소경 오라 할 때 손들고 제가 가겠습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눈 뜬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단 말이에요.
주님께서 소경을 만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장차 죄인 오라 할 때 제가 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이 뭔가 터치한 사람. 그전까지는 남들이 갖고 있는 것이 탐이 났는데 이제는 남들이 없어도 괜찮다고 했던 예수님, 이사야 53장 말씀대로 사람들이 귀히 여기지 않는 그 예수님, 그래서 버려진 돌멩이가 어느 날 나에게 유일한 구원자가 될 때 그 사람은 눈 떴어요. 눈 뜨면서 그동안 살아온 것이 정말 눈 감긴지도 모르고 살아온 거예요. 소경인 것도 모르면서 살아온 소경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소경을 만나서 눈 뜨게 한 것은 앞으로 천국 갈 사람은 꼭 그 같은 방식이 아니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올 수 없다는 그 경로, 과정을 밟아야 되는 거예요. 존재가 아니고 흐름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 29장 보고 있습니다만 여기에 대해서 손떼세요. 왜 손을 떼야 하느냐 하면, 이 모든 말씀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이 아침저녁으로 상번제 드리는 것이 말씀의 완성이 아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다 지켜야 돼요. 우리는 지켰다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오산이었고 오판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다 지켜서 하나도 지키지 못하는 우리에게 이미 지켰다고 간주해서 우리를 구원해내시는 겁니다. 그게 제2의 출애굽이라 할 수 있어요. 출애굽 된 그 사람들에게만 특별히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그들이 우리를 대표해서 얼마나 무식하고 얼마나 자기밖에 모르는 죄인인가를 하나님과 정면으로 만나는 경험을 통해서 그들의 균열된 모습을 보이는 겁니다.
존재와 흐름, 과정의 만남에서 이게 곱게 만나질 않아요. 이거는 존재 층이 되고 흐름 층이 돼요. 여기 지구가 있고 제일 밑에 내핵, 외핵, 중간에 맨틀, 맨틀에서 솟아오르는 에너지가 상하로 흐르는 대류 현상으로 인하여 이 밑에 거의 얕게 붙어있는 게 지각입니다. 이것이 안에서 마그마로 활발하게 활동하다 보니까 중간에 끊어져요. 지각도 둘로 나눠집니다. 대륙 층이 있고 해양 층이 있어요. 해양 층이 밀도가 높아서 파고 들어가요. 손톱이 파고 살갗을 파고 들어가면 아프지요. 살갗은 대륙 층이고 손톱은 해양 층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두 가지 층이 만나게 되면 아파요.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존재 층입니다. 존재 층이기 때문에 나는 너처럼 살고 싶어.
제가 지난 오후설교 때 한 달에 한두 번은 공부 마치고 서울역까지 BMW 타고 온다고 했거든요. 울산은 BMW가 아니고 똑같은 차를 타고 와요. 고바위는 잘 못 올라가는 차가 있어요. 울산의 차가 1억6천짜리로 바뀔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나는 언제 BMW 타고 울산 오느냐 할 때 그건 존재란 말이죠. 존재는 존재를 포기하지 않아요. 부수질 않습니다. 고이고이 존재는 견딜 때까지 견디는 거예요. 견딘 존재가 흐름을 타는 게 아니고 존재를 지키려고 하니까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힘들어 죽어요. 사람들의 분노하고 복수하는 것은 내 존재를 건드렸기 때문에 복수하고 분노하는 겁니다. 분노하고 짜증내는 것은 내가 그토록 지키려고 하는 이것마저 왜 건드리냐 말이죠.
결혼이란 것이 존재와 존재로 만나면 제발 이것까지는 하되 이것 건드리면 이혼한다는 게 있어요. 존재와 존재로 만나면 결혼이 비극으로 끝나지요. 그렇게 되면 안 돼요. 결혼은 존재가 아니고 흐름입니다. 흐름에서는 존재를 놔버려야 돼. 결혼하기 전에는 내가 사랑하기 위해서 상대방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혼하면 그런 걸 다 놔버려야 돼요. 내 존재는 사랑받을 존재라는 것을 포기해야 그동안 진짜 결혼이 주는 사랑을 내가 짓밟고 누르고 있었다는 것이 나타날 거예요. 내가 사랑 받을 필요 없다고 내 자리에서 누르면 그 자리에서 사랑이 꽃 필 것입니다.
지금 상당히 낭만적인 이야기하고 있어요. 10월 마지막 밤에나 어울리는 낭만적인 이야기고 전혀 현실과는 아무 상관없는 꿈속의 사랑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것은 그렇게 결혼하란 말이 아니고 이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서 할 수밖에 없어요. 존재와 존재가 있는 이상은 서로 서로 견제하고 싸우고 투쟁하기 때문에 자기가 잘 되면 잘 됨 만큼 힘들고, 못 되면 잘 되려고 힘들고. 이래도 힘들고 저래도 힘들고. 하루하루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이 존재 층에 뭔가 박아요. 마치 대형 컨테이너 화물선 두 척이 박는 것처럼 뭔가 뿌리 채 충돌되는 게 있어요. 그게 과정이 내 존재의 뿌리에 충돌해버립니다. 그게 바로 제사에요. 다른 말로 해양 층, 흐름의 층에서는 존재 층은 ‘살아야 돼.’ 할 때 뭘? 내가. 남이 사는 것 소용없어. 나는 내가 기어이 살아남고야 말 거야. 흐름 층에서의 주제는 놀랍게도 ‘죽어야 돼.’
제사 과정의 포인트는 뭐지요? 사는 게 아니고 누가 죽었다는 거예요. 상번제는 아침, 저녁마다 누가 죽었다. 상번제니까 아침에 죽고, 또 저녁에 죽었으니까 낮 동안에 죽음과 죽음 사이, 온종일 죽음과 죽음 사이. 죽음에서 시작해서 죽음으로 흘러가는 죽음의 흐름에 소위 살고자 하는 너를 종이배처럼 위에 얹으면 살고자 하는 의지가 너를 살리는 게 아니고 “진작 너는 죽었어야 돼.”라는 그 죽음의 힘이 매일같이 살려주는 식으로 우리는 살려주는 겁니다.
여러분 주기도문에 담긴 비밀을 아셔야 돼요. 주기도문 초반에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 있잖아요. 중간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주지요.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려고 기도하라고 하는구나. 주기도 끝부분에 우리 죄를 용서하고 시험에 들지 말게 하라고 하지요. 이건 우리가 매일같이 산다는 의미는 매일같이 용서받는다는 의미로 이해하라 이 말이지요. 양식을 먹는다고 사는 게 아니고 매일 양식 먹듯이 우리는 매일같이 용서받아서 용서가 없는 세계의 유혹에서 늘 떠나는 삶을 보장받는 이것이 마치 매일같이 양식을 먹어야 산다는 일방적인 생존의 모습을 그대로 더 깊이 있게 내려가면 용서가 일용할 양식으로 사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에 합당한 기도가 되는 겁니다.
“주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내일 되도 “주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모레에도 “주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남들은 무슨 시험을 매일 치느냐고 하지만 우리는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옵시고.” 한 번 안 빠졌다고 그냥 넘어가는 게 아니고 매일 양식을 먹어야 되듯이 마찬가지로 진짜 우리가 사는 것은 매일같이 용서받아야 그것이 죄에서 벗어나야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아들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주기도문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우린 매일같이 무엇이 유혹인가를 깨닫는 그런 사태와 상황이 우리에게 옵니다. 카누에서 노를 저어보세요. 뒤로 저어야 앞으로 가지요. 죄를 알아야 생명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무엇이 죄인 것을 밀려오는 죄를 알 때 그 사람은 생명의 나라에 가깝다고 보면 되는 거예요. 그 죄란 말씀이 담당하고 그 담당은 존재가 아니고 말씀이 존재는 오직 예수님만 해당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흐름에 합류하기 위해서 연약한 종이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날마다 우리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면서 가고 있는 거예요. 일엽편주처럼.
우리는 결국 말씀에서 하나에 흐름으로 개입될 때 흐름의 원리가 뭐냐 하면, 매일같이 우리를 죽여주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우리가 죽게 되면 우리의 목표와 기대와 목적도 같이 죽음 속으로 소용없는 것으로 날아가게 됩니다. “6일 남았는데 주여, 절대로 삼수하면 안 됩니다. 그저 이번에 붙도록 해주소서.” 이렇게 하게 되면 온갖 마귀가 다 와서 기도 30분 연장해야 된다. 십일조 마자 해야 된다. 마귀가 모든 방법을 이야기해줘요. 목표와 목적이 이미 있기 때문에 그건 존재거든요. 원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수련해야 되고 경건해야 되고 정신 차려야 되고. 이번에 소홀하게 되면 애까지 징벌 받아서 탈락 될 수 있으니까 정신 바짝 차려서 이번 기회에 너도 성화되고 애도 성화되고 해보라는 식으로 마귀가 옵니다. 목사들이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목사 자체가 마귀의 종이니까 납득이 되는 소리를 많이 해줘요.
그럴 때 진짜 성령께서 6일 후에 수능 치는데 네가 그때까지 살아있을 자격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누구 것이 되는데? 너는 왜 자꾸 하루하루 보장되는 것처럼 네 존재는 그럴 권리가 없는데 롤러코스트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늘 주께서 받쳐주니까 오늘도 살았지 안 받아주면 죽음의 바다에 그냥 빠져 죽는 거거든요. 늘 살려주는 것은 우리가 예뻐서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살려주신 거예요.
들풀이 예뻐서 참새가 예뻐서 기르시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들풀과 참새가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 졌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도를 매일같이 살려주시는데 어떻게? 죄인 되었는데 의인으로 살려내시는 거예요. 누구든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인 것을 알면 그 사람만이 의인으로 간주되는 이 공식, 이 방정식, 이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원의 방정식은 하나밖에 없어요. 십자가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 사람이 의인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 자리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교회, 교단, 자기의 신앙연조, 자기 착한 일 한 것 등을 집어넣는단 말이죠. 그럴 때 진짜 성령 받은 십자가 아는 사람은 성령이 가만두지 않고 그걸 뱉어내요. 십자가 있는데 내가 왜 다른 걸 목표로 삼았지? 죽어 마땅한데. 죽어 마땅하고 수능 치는 내 자식도 죽어 마땅하다면 지금 사는 것이 주님의 손길이라면 내 자식도 주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뭐. 물론 알아서 하신 게 두 번이나 떨어졌지만 또 알아서 하겠지. 내가 죽게 되면 내 목표와 기대도 같이 죽어버리면 그동안 마귀도 순간적으로 사라졌어요.
바로 그 자리에 진짜 인간, 진짜 유일하게 참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고 우리는 그 존재에 다가서는 흐름입니다. 부둣가에 늘 치는 물결에 지나지 않는 물결 속의 물방울이 바로 우리 모습이고 부딪치고 보니까 주님의 발밑에 부딪치고 있었던 거예요. 주께서 우리를 끌어않은 겁니다. 일상의 삶, 우리는 짓는 모든 죄가 십자가를 향하여 용서받는 그런 것이 눈에 들어온다면 유일한 존재는 예수님밖에 없고 그 존재에 덕을 보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존재라고 이름을 듣는 우리에게 그 주님의 용서의 혜택, 피의 효과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럴 때 이 제사가 장차오실 메시아를 내다보면서 상번제를 드릴 때 제사 드려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제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만남을 통해서 그들은 구원받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60)
13-11-06 11:13
20131101b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실패의 자리
(강의:이근호 목사)
지난 시간에는 제사라는 것이 흐름이었고 그 흐름의 종착점은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피를 흘리지요. 피는 제사할 때 제물이 피를 흘리잖아요. 제물은 누굴 닮았는가?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잡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잡는다고 보면 돼요. 예수님이 내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했잖아요. 내가 바로 너희들이 매일같이 잡았던 양이, 양 잡으라고 했던 말씀 속의 양이 바로 나였다. 세례요한이 이야기했지만 예수님 자신이 유월절 양으로 오신 거예요.
그걸 왜 사람들은 몰랐을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가 흐름으로 분해된 게 아니고 자기 존재가 자기를 살리는 방향으로 자꾸 말씀을 하다보니까 이 땅에서 고생하지만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가야지. 이렇게 자꾸 자기 사는 쪽으로 하나님을 이용하려다보니까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존재고 나는 존재도 아닌 흐름에 불과한 걸, 그냥 안개인데 우리가 자기 자신을 영원한 불멸의 존재로 보거든요.
불멸이란 그게 저주에요. 안 죽는 게 저주에요. 좀비 보세요. 이게 얼마나 저주입니까. 죽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것도 아니고. 참 저주도 보통 저주가 아니에요. 콱 죽으면 차라리 축복이에요. 사람은 죽어도 안 죽습니다. 기어이 마지막 때에 다 불러내요. 농땡이 부려도 나중에 종례시간에는 다 기어 나오는 것처럼. 어디 숨어도 다 나와요. 호출 다 합니다. 사람은 한 번 태어났으면 더 이상 죽는 건 없어요. 그러기에 인간 자체가 저주스럽지요.
목적, 목표를 만들게 되면 문제는 그것이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린 거예요. 불꽃을 터트린 게 문제에요. 터트리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아요? 깊은 허무와 허탈의 늪에 빠져있습니다. 삼성과 두산의 한국시리즈 끝났는데 뭘 할 건데? 야구 없으면 내년 삼월을 기다립니다. 그저 야구에 죽고 야구에 사는 한국의 20~30대. 드라마 끝나고 난 뒤에 그 다음 후속 드라마를 또 기다리지요. 별 할 일 없는 아줌마 내지는 집에서 주로 생활하시는 목회자들.
그러니까 자기 나름대로의 목표와 목적을 갖게 되면 그 자체가 시험 거리에요. 시험이 들지 말게 하옵소서가 아니라 지가 시험을 매일같이 만들어. 자기가 만든 것에 지가 울고불고 하고. 그것 끝나면 또 하나 지어내고. 그래서 성경말씀 백날 큐티하고 아무리 묵상해도 자기 존재를 굳히는 한 소용없는 겁니다. 보통 교회 목사들은 연초가 되면 자꾸 계획을 만들어내요. 그래야 숙제하듯이 사람들이 억지로라도 교회에 나오지 목표 없으면 교회도 안 나온다는 겁니다. 사람을 더욱더 지옥 백성 만들어요.
두 번째 시간에 할 것은 첫째 시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렵습니다. 출애굽기 29장에 나오는 제사 자체가 아브라함 때는 어떤 식으로 나타났느냐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여기에 창세기가 있잖아요. 그 다음에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나오잖아요. 우리는 방향을 창세기로부터 왔기 때문에 창세기는 이미 사라졌고 앞으로 예수님 거쳐서 미래에 천국 간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점에서 어렵냐 하면, 출애굽기 29장 38절에서 상번제, 제사지요. 제사를 드리라고 했단 말이죠. 그럼 우리는 존재니까 제사 드리면 구원받습니까? 할 때 이건 아니거든요. 제사 드려서 지옥 간 사람이 바리새인, 사두개인들 아닙니까. 성전, 예배당 잘 지어놔도 소용없어요. 그러면 제사 드려라. 뭘 하라고 명령이 왔단 말이죠. 명령이 오면 우리는 하고 싶어요. ‘하라’하면 하고, ‘하지 말라’하면 안 하고 하여튼 우리는 그걸 지켜내고 싶은 충동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제가 첫째 시간에 두 층이 있다고 했지요. 존재 층과 흐름 층이 있는데 두 층이 부딪치면 이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요. 갈라지면서 그토록 궁금했던 그토록 보고 싶었던 진리가 그 틈바구니에서 비로소 고개를 내밀게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인이 의인 되면 안 돼요. 죄인이 의인되게 되면 존재가 지가 알아서 갈아탄 셈이 돼요. 이걸 환승이라 합니다. 돈 더 안 내고 내릴 때 찍으면 환승되는 거예요. 이렇게 갈아탈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우리는 제사 드리라 하면 이 땅에서 죄인으로 살던 내가 이제는 율법으로 갈아타면 율법에 의해서 천국 간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갈아타봐야 맨 그 인간이 똑같은 그 인간이에요. 갈아타는데 실패해야 됩니다. 이 실패하기가 중요해요. 어떤 중국 무술 영화를 보면 싸움을 하는데 신전이 무너지면서 삐져나온 돌출 목재들이 있잖아요. 무너지면서 적과 싸우는 거예요. 갈아타면서 한바탕 붙고 하는 거예요. 이런 게 터미네이터에 보면 마지막 로봇 인간과 싸우며 갈아타는 게 있죠. 우리는 갈아타면 성사가 안 되고 갈아타는데 실패해서 여기에 빠져야 돼요. 이게 구원이에요.
쉬운 예로 교회 다니고 십일조, 주일성수하면 구원되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보니까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소리를 들었거든요. 이 사람이 갈아타기를 시도하는 거예요. 그래 이제 십일조 안 해도 되고 교회 안 나와도 되고 복음만 믿으면 된다고 해서 갈아타기를 했는데 갈아타기에 성공해버렸어. 지옥 갑니다. 갈아타기에 성공하면 안 돼요. 그 가운데 빠져야 돼요.
디즈니 만화에 그런 것 있잖아요. 고양이가 잡아먹으려고 쫓아오니까 쥐가 도망가는데 절벽 너머까지 갔어요. 가서 밑을 보는 순간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제삼자가 봤을 때 이미 절벽 밖으로 벗어났을 때 떨어졌잖아요. 하지만 본인이 떨어짐을 아는 순간은 밑을 바라볼 때 비로소 떨어짐을 아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주여, 믿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전에는 십자가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다가 자기가 진짜 구원받을 때는 “십자가가 나를 구원했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전에는 내가 십자가를 믿어주게 되면 십자가 믿는 내 믿음으로 구원받는 줄 알았는데 막상 내 상황을 제대로 보니까 십자가가 나를 믿게 했다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나온 능력이. 그 말은 더 나가면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안 믿어야 될 나도 주께서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거예요. 전에는 내가 선택해서 믿었는데 나의 선택이 아무 짝에도 소용없어요. 믿음은 내 뜻으로 믿는 게 아니고 믿음 자체가 선물이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나온 말씀입니다. 전에는 내가 말씀을 지켰는데 지금은 내가 지키나 안 지키나 그 자체가 말씀이란 사실, 나는 말씀의 영향권, 자장 속에 있는 거예요.
7세기경에 마호메트가 죽고 난 뒤에 철로 만든 관에 있었는데 관을 옮기다가 관이 공중에 뜨는 거예요. 신의 계시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통과 지점이 자석이 있었던 겁니다. 옛날 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영향력을 줬다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력 역학이 물리학으로 적용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어떤 물건이 움직일 때는 힘을 가해야 움직인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맞는 것 같지요. 가만있으면 가만있잖아요.
외부에서 힘을 가할 때 움직인다는 게 통하던 물리학이 자장이 등장하면서 가만있어도 관이 떴을 때 이게 뭐야? 뭐 이런 상황이 다 있나? 뭔가 우리가 놓친 게 있지 않는가? 근대과학의 시작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보다 세심한 기구와 보다 정확한 것을 동원해서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무려 62배 되는 망원경을 만들어서 목성이 예측보다 궤도를 이탈 됐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그때부터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안 겁니다.
그것이 과학인데 이 과학이 문제가 됐어요. 신학과 철학이 갈라진 틈으로 과학이 파고 들어오니까 신학도 차버리고 철학도 차버리고 이제 남은 것은 모든 것은 모조리 과학이에요. 인문과학, 사회과학, 심지어 영어도 과학이에요. 사회과학은 정치, 경제, 이런 것. 언어에 관한 건 인문과학, 심지어 스포츠도 스포츠과학.
전에는 교회 와서 목사 시키는 대로 믿는다고 고백하면 믿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진짜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내가 믿습니다.”라는 말을 하나, 안 하나 상관없이 이미 나는 구원의 자석의 영향권 속에 놓여있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습니까, JESUS를 믿어야 구원받는 겁니까? 상관없지요. 원어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신학자들은 원어를 파서 뭔가 건지려고 하는데 아무 소용없어요.
언어를 다룰 때는 반드시 자신의 선 이해, 선입관을 개제된 상태에서 다루게 돼있어요. 인문과학이라든지 모든 과정이 그래요. 아주 백지상태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의 사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정당한 논리의 단어와 언어를 동원시켜서 그러니까 내 말이 맞는다고 주장하게 돼있다고.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바리새인들이 원어를 연구 안 했겠어요? 그게 다 소용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두 번째 시간에 풀어야 될 게 있어요. 존재에서 어떻게 흐름으로 바뀌느냐? 그걸 풀어야 돼요. 그걸 안 풀고 남겨두면 오늘 제사라는 게 남의 이야기고 아무 의미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쥐가 고양이를 피하면 산다고 할 때 고양이 피해서 살았다는 그 현장은 바로 자기를 죽이는 현장이에요. 밑에 아무것도 없는 새로운 세계가 오히려 고양이보다 더 우선권이 있다는 사실을 쥐는 공중에 뜨면서 비로소 발견하지요.
그럼 존재를 흐름에 바뀌는 방법은 어떻게 합니까? 우리의 기만과 바탕과 뿌리를 아예 치워버려야 되겠지요. 내가 단단하다고 여기는 그 뿌리를 뽑아내고 다른 발판으로 교체해서 내밀겠지요.
그래서 출애굽기 29장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미래에 예수님과 연관시키기 이전에 뒤로 돌아가야 돼요. 창세기로 돌아가야 됩니다. 원래 제사법이 없었던 시절에 하나님은 뭘 제물로 받았는가를 조사해보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 때 하나님이 받은 제사는 뭡니까? “아브라함아 네가 믿음이 있구나.”를 확정시킬 때 동원했던 제물은 사람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를 죽여서 그래서 우리가 죽었다는 자리를 마련되면 그 자리에서 창조의 능력으로 다시 우리를 살려내시고자 하는 겁니다.
두 번째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창조가 하나님이 없는데서 우리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하잖아요. 오해였습니다. 잘못된 생각이에요. 하나님이 없는데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빛이 없었는데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생겼더라. 빛은 없었는데 말씀으로 빛이 생겼다. 그걸 창조로 생각하잖아요. 그게 잘못이었어요. 그럼 뭐가 정답이냐? “빛이 있으라.” 하는 그것이 나타난 게 창조에요.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 나타나요. 빛이라는 것은 피조물 중에 하나일 뿐이지 정작 우리가 발견해야 할 것은 빛이 있으리라는 말씀이 바로 창조를 행하는 중심이 되는 부위란 말이죠. 이걸 요한복음 1장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느라가 아니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어 그 어떤 것도 그분 없이 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창조 당하면서도 창조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전혀 모르는 채 창조돼버린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창조된 것만 주지해서 그저 존재로서 나는 창조됐으니까 버텨야 된다. 무조건 나는 살아야 돼. 나는 살아야 돼 하다보니까 누구 죽었어요? 예수님이 죽었잖아요. 만들어져놓고 왜 만들어졌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어요.
잠언서 8장에 이런 말씀이 나오거든요. 처음부터 지혜가 있어서 천지를 창조했다. 그 뒤에 말씀이, 누구든지 지혜를 모르는 자는 생명이 없다고 돼있어요. 생명을 만들어놓고 분명히 살아있는 것에 말하기를 이 지혜를 모르면 너는 죽은 거야. 결국은 죽은 것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누가 만들었는지 알면 생명이고, 모르면 죽음이고. 만들어졌다고 생명이 아니에요. 숨 쉰다고 생명이 아니고 정작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면 그게 죽음이에요. 살아도 죽은 거예요. 하나님 믿는 게 복음이 아니고 누가 나를 만들었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게 복음이에요.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날 만드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게 복음이 아니고 구체화시켜 나갑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다고 안 것은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칠 때 아들이 죽는 자리에서에요. 아들이 죽을 때 비로소 이 죽음에 같이 뛰지 아니하면 나는 복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 잡아놓고 아들 죽음에 합세하지 아니하면 그 아버지는 영생을 얻을 수가 없어요. 믿는 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은 이 땅에서 송곳으로 우리 인간의 죽을 자리를 만들어놨다는 이 점, 그게 십자가거든요. 죽을 자리를 만들어놨다는 이것이 제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감사하고 신기합니다. 유일한 통로에요. 유일하게 천국으로 빠질 수 있는 구멍입니다.
하나님께서 죽으신 자리가 바로 우리 속에 들어와서 같이 죽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죽은 자리기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자리는 그 죽음의 자리밖에 없어요. 십자가 자리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양을 받는 게 아니고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는 게 첫 번째 중요한 것이고,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는 게 아니고 사람을 원하는 거예요. 사람이 죽기를 원했지 양, 염소 이런 게 죽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양이 구원받을 일 있습니까. 양은 그냥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한 것뿐이지 진짜 노리는 것은 나의 죽음을 노리지 우리가 바치는 돈이나 십일조 노리고 하는 것 아닙니다.
네가 죽어. 죽을 때 그냥 죽으면 안 되고 그건 자살밖에 안 되고 어디다 죽이느냐 하면, 하나님이 죽었던 그 자리에 같이 포개서 죽을 때 비로소 사는 겁니다. 로마서 6장,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이고. 그 원리에요. 그 원리가 신약에 나오는 원리인 줄 알았는데 이미 창세기 22장에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바칠 때 벌써 그러한 사건을 발생시켰습니다.
첫 번째 중요한 것은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과 두 번째 중요한 것은 그 죽음의 자리에서 누가 죽었어요. 이삭이 죽었지요. 이삭이 죽은 것을 아버지의 죽음과 야곱의 죽음과 구원받은 사람의 죽음으로 하기 위해서 죽음의 자리가 사건화시켰다는 겁니다. 반복시킨다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난해한 거예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할 때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달렸을 때 옆에 강도 둘이 있었고. 그것은 15년 전에 이미 지나간 일이다. 이건 누구나 알고 있는 거예요. 몇 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단다. 그래? 구경이나 가 보지. 그래서는 구원이 안 되거든요. 그때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2013년 11월 1일 오늘 일어나는데 일어난 장소가 이런 공간이 아니고 예배당이 아니고 바로 우리의 자아의 자리, 우리의 주체의 자리, 우리의 몸의 자리라는 사실이에요.
정말 고민거리다. 얼마나 어려운데. 지금 아들이 죽었어요. 이삭이 죽습니다. 아브라함이 뭘 믿었어요?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은 바로 사람 죽이는 것이다. 죽일 아들은 내 자식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삭은 아브라함이 낳은 자식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식이거든요. 약속의 자식이니까 이삭의 주인은 자기가 아니고 이삭을 약속이란 이름으로 보내신 어떤 분이란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이 존재가 돼버리면 내 존재에서 저쪽 존재로 갈아탈 수가 없어요.
부부가 같이 잠을 자도 꿈이 각자 달라요. 세상에 같은 꿈을 꾼 경우 봤습니까? 아마 그때는 분명히 그 집에 화재 났을 거예요. 둘 다 뜨겁더라 하면서. 사람이 아무리 같이 붙어 자도 이쪽 존재에서 저쪽 존재로 갈아탈 수 없어요. 그래서 제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사랑이란 말은 거짓이라고. 내가 사랑이란 말을 할 때는 내 사랑이 늘어져서 그쪽에 간을 본다 하지요. 맛을 본다 하지요. 내 사랑을 이해하냐고 하거든요. 저쪽에서 그 사랑 이해하지. 거짓말입니다. 저쪽에서도 알고 있는 사랑으로 간을 봅니다. 정치적인 협상이 돼요. 부부란 정치적 협상이에요. 모든 게 타협하는 거지 동의가 아닙니다. 장가 갈 때까지만 같이 있자. 자식 보고 산다. 딸 시집보낼 때까지 같이 있자. 전부 다 타협책이라니까. 어떻게 남이 내 마음을 알고 내 마음을 남들이 알아줍니까?
고린도전서 2장 4절에 보면, 내가 전한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설득이 아니고 성령의 나타남이라 하지요. 우리는 그 대목을 보고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서 우리 쪽에서 갈아탈 수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에게 주시게 되면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된 것처럼 우리도 아버지와 하나 되고 같이 있다. 요한복음 14장이지요. 성령이 처소가 되어서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처럼 그 날에 너희들도 아버지와 함께 있고 나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했단 말이죠.
우리는 잘도 정답을 내립니다. 목사님, 성령께서 오시면 됩니다. 말은 맞는데 성령을 우리가 아냐 이 말입니다. 왜? 우리는 내가 아는 것밖에 몰라요. 사람이 안다는 것은,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무한대로 압니다. 유한한 내가 무한대라는 것은 그 무한은 유한에 갇혀 있는 무한이라. 그걸 수학에서 가능무한이라 합니다. 칸토르란 수학자가 19세기에 발견했거든요. 내 속의 우주를 논하는 것은 그게 말이 됩니까. 우주가 더 큰데. 우주를 논한다는 것은 작은 내 안에 더 큰 게 들어있다는 말이죠.
남자들이 만날 이야기하잖아요. 여자는 모퉁이는 작은데 생각하는 게 그렇게 예민하고 복잡한지 모르겠다. 정말 여자의 마음은 복잡해요. 달랬다 싶으면 삐지고, 삐졌다 싶으면 생긋이 웃고 나오고. 어느 장단에 춤을 출지 몰라요. 그러면 여자도 그러지요. 남자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고. 그 말도 맞아요.
지금 중요한 것은 존재에서 존재로 갈아탈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갈아타지 못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죽음이 어떤 힘을 발휘해야 되겠지요. 이삭이 아버지를 구원해야 됩니다. 비록 아버지는 칼 들고 이삭을 잡았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살려야 돼요. 그러면 아들 안에 누가 있어야 살려내느냐? 창세기 22장에 보면, 이삭에게 네가 축복을 받으리라.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자손이 많을 것이다. 이삭 속에 예수님이 계셔요.
여기서 문제가 뭐냐? 이삭과 예수님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 그 문제 아닙니까. 연결시키는 문제에 개입되는 것이 그 다음에 연속적으로 계속 주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져요. 말씀이. 그러면 이삭으로 예수님이 바로 연결되지 않고 언약과 동반해서 주어지는 인물이 이삭의 아들 에서가 아니고 야곱이지요. 이삭언약을 야곱이 이루고 야곱에게 주어진 언약을 누가 이뤄요? 요셉이 이루고. 요셉의 언약은 그 다음에 이스라엘이 이루고. 계속 이어 나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언약과 언약의 연결고리는 마치 포석정의 출렁이는 물결처럼 그 위에 올라타는 거예요. 아브라함도 올라타고, 이삭도 올라타고, 겹쳐서 계속 올라타는 거예요. 요셉 되면 야곱, 이삭, 아브라함, 노아까지 다 올라타는 거예요. 요셉의 어깨는 무거워요. 점점 더 올라타는 거예요. 나중에는 변화산에서 보면 엘리야, 모세도 올라타고. 결국 그 모든 올라탄 짐을 혼자 지신 분은 누굽니까? 예수님이지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단 올라탄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에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예수님이 하실 일을 좀더 구체화된 면면을 보입니다. 그게 뭐냐? 모세 율법이 주어져서 체계화되고 뭔가 규격이 갖춰지면서 한 걸음씩 예수 그리스도께 가까이 가는 겁니다.
여기까지 이해되겠지요. 그런데 조금 더 나가야 됩니다. 언약이 왔다고 존재로 갈아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목사가 왜 그렇게 따지느냐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성경을 깊이 있게 보게 되면 그냥 대충 넘어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촘촘히 알면 알수록 점점 더 감사와 기쁨이 샘솟기 때문에. 대충 아는 것보다 깊이 아는 게 더 기뻐요. 너무나 정확하게 너무나 치밀하게 우리가 예상도 못한 연결고리가 꽉 짜여 있을 때 우리는 말씀 외에 다른 인생의 모든 경험이나 간증이나 떨어내야 될 먼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냥 말씀만 남기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요.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받을 때 좋다 했지요. 그리고 사랑했습니다. 이스마엘 같이 지가 낳은 자식은 눈에 차지 않아요. 그리고 이삭이야말로 그렇게 예쁘고 약속을 맺은 겁니다. 창세기 15장을 봅시다. 오늘 해답을 내려야 속이 시원하니까. 창세기 15장 9절을 누가 읽어볼까요? 중요한 대목이거든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지금 이삭을 낳기 전입니다. 이때 자식이 하나 있기는 있었어요. 15장 2절에 보면, 다메섹 엘리에셀이라고 아마 양자 같아. 이 아이가 상속자냐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애는 아니고 네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다고 했거든요. 그걸 아브라함이 믿으니까 6절에 의가 됐지요. 아브라함이 의인 된 것이 믿음을 근거로 해서 의롭습니까? 아니면 의가 된 근거가 따로 있습니까? 따로 있지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가 아니에요. 아브라함은 하나의 토지에 불과해요.
옛날 사람들은 여자를 밭이라 하고 남자를 씨라 해서 여자는 밭떼기만 제공했을 뿐이고 낳은 모든 자식은 아버지가 단단해서 낳은 자식이라 생각하거든요. 말은 그렇게 해놓고 아들 못 낳으면 밭이 안 좋아서 그렇다고 구박하는데. 아브라함은 밭이에요. 거기서 의가 나온다면 의의 근거는 뭔가 약속이 뿌려져서 나온 열매가 의가 되는 거예요. 9절에 보니까 아브라함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 바치라 했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그냥 백지고 거기다 색칠을 하는 모든 작업은 일방적으로 외부에서 퍼붓는 거죠. 그게 제사란 말이죠. 지금 출애굽기에 나오는 제사의 원형을 보자는 거예요. 아브라함 언약에 제사의 원형이 나와 있습니다. 제사의 원형이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으로 돼있단 말이죠.
그렇다면 제사를 이렇게 하라고 했을 때 효과, 효력이 뭐냐? 네 자손이 나올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 자손은 그냥 아들 낳고 싶다고 해서 낳은 자식이 아니고 사전작업이 있었지요. 원래 원료가 들어가야 제품이 나올 것 아닙니까. 그 원료가 뭐냐 하면,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 집비둘기, 이게 들어왔거든요.
이렇게 보면 돼요. 약국에서 소화제 몇 개하고 위장약 해서 그냥 줍니까? 이걸 식후 30분 적어서 낱개로 뜯을 수 있도록 해서 주지요. 낱개 하나가 이삭이고, 야곱이고, 요셉이라 이 말입니다.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알약이 들어있어요. 이것은 열차가 있는데 기관차에 달린 객차에 해당되는 것은 이삭이고, 야곱이고, 요셉이고. 그 안에 탄 분은 뭔가 전달, 전달하면서 결국 하나로 연결하는 작대기를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뤄졌다와 관련돼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품은 거예요. 알약 형식이든, 어떤 형식이든 자기는 포장지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포장지에 하나님의 알약을 집어넣고 알약이 어떻게 예수님을 생성할 것이냐 하는 그 몫은 이 포장지에 해당하는 야곱과 이삭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거기서 나오게 돼있어요. 존재 층과 흐름 층을 충돌시켜서 해요. 갈아탈 수 있는 게 아니고.
이제부터 이삭 믿어야지. 그래서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깨어져야 돼요. 깨어질 때 존재 층도 같이 깨어져야 되는 거예요. 나는 나를 위해서 예수 믿어야지. 이게 깨어지는 현장에서 예수님은 그 사람을 구원합니다. 깨지 않고 구원시켜주지 않아요. 이제 예수 믿어서 구원받아야지. 이게 깨어질 때 주님을 위하여 내 구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을 드러내려고 나로 하여금 구원 안 받으면 안 되게끔 조치를 하신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게 거짓말이 아니고 아브라함도 그렇게 살았고, 모세도 그렇게 살았고. 노아가 언제 자기 아이디어로 방주 만들었겠습니까. 그게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선진들은 이렇게 살았다고 해서 나온 것을 보면, 믿음의 선진들이 한 행세들이 자기들 머리에서 나온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뒤집어썼어요. 화산재 뒤집어쓴 것처럼. 팔자가 지 팔자가 아니고 주께서 그리스도와 관련된 팔자를 안에 집어넣은 겁니다. 사는 게 우리가 사는 게 아니고.
특히 아벨 같은 경우에 보세요. 사람이 죽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제사 한 번 잘 드려서 죽었잖아요. 이 말은 새순교회 등록해서 가는 길에 죽은 것과 똑같은 거예요. 새순교회 등록해서 이제는 잘 믿겠습니다. 새순교회 목사와 교인들도 교인 하나 생겼다고 오년 만에 처음이라고 좋다고 했는데 가자마자 졸음 운전하는 차가 박아서 그것도 온 식구 다 죽었다. 우리가 안 됐다고 하지 마세요. 나도 일찍 가야 되는 건데. 무슨 고생하려고 아직까지 차사고 일어나지 않고 있는지. 이렇게 돼야 돼요.
제사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신 일과 만남을 통해서 해석이 된다는 그 말을 제가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뭘 바쳤다가 아니라 아브라함 속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있는 거예요. 베드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