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강의(2013. 10. 25) 1강
광주 강의(2013. 10. 25) 1강
이름 : 서경수(IP:218.146.227.175)
광주 강의(2013. 10. 25) 47-1
에스겔 뒷부분은 굉장히 복잡해요. 어떤 사건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딱딱한 하나님의 지시가 나옵니다. 45장 1절에 보면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것을 이해하는 기본은, 거룩한 땅을 하나님이 만들어 주겠다는 겁니다.
세상에 거룩한 곳이 있습니까? 교회가 거룩합니까, 내 집이 거룩한 곳입니까, 어디가 거룩한 곳입니까? 이 세상은 전부가 욕망과 욕망의 충돌인데 어디가 거룩한데요? 이 세상에서 거룩한 곳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것을 충분히 다 드러내시면서 왕의 땅이 등장해요.
이 그림이 오늘 공부하려는 에스겔 45장의 그림입니다. 하나님이 척량을 했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땅을 주셨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거룩한 땅은 없습니다. 없는데 하나님이 직접 왕이 되셔서 기거하시는 그곳만 거룩한 땅이 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왜 왕이 되는가? 인간이 왕이 되면 있는 땅도 더러워져요. 인간이 손대면 다 더러워져요.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한 땅을 주는데 조건이 뭐냐 하면, ‘왕을 섬길래, 말래?’ 이것이 조건입니다.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왕과 같이 살면 그 땅은 거룩한 땅, 거룩한 백성이 되고, 혼자 살면 거룩한 땅이 아닙니다.
마치 가난한 신혼부부에게 시어머니가 제안을 합니다. “네가 집 갖고 싶어? 나랑 같이 살면 이 집 줄게.”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집에 탐이 나니까 같이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같이 좀 살아보면 ‘집 없어도 같이는 못 살겠다’는 식으로 나올 수가 있지요.
이처럼 인간은 다른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은 힘들어요. 그런 성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이 땅이 더러운 겁니다. 선악과 따먹고 자기밖에 모르니까 더러운 거예요. 그것을 창세기 6장에서는 ‘하나님의 신이 떠났다’고 하고, 하나님의 신이 떠나니까 홍수라는 심판이 주어지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어요. 이 말을 들으면 ‘영생 얻어야 하니까 성령을 위해 심지 뭐.’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영을 위해서 심는다는 것은 날마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오는 겨울 수련회에서는 창세기를 공부할 생각인데, 창세기를 볼 때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할 것 같아요. ‘복수는 나의 것’ 이것은 영화 제목인데, 인간은 조용히 살지를 않아요. 항상 주변을 향해 복수하면서 살아갑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복수심에 불타지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그 제사를 거부했어요. 가인이 곱게 있었습니까? 아니죠. “감히 내 정성을 거부해?” 하면서 복수에 나서지요.
하나님에 대한 보복에 나서지요. 하나님을 죽이고 싶어요. 하나님 죽이는 방법이 뭡니까? 하나님과 연줄이 닿은 사람을 찾아야 하고, 그를 죽임으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제거한 셈이 됩니다. 이 원리에 감춰진 복잡한 선은 언약이 투입되면 전부 노출됩니다. 인간들은 복수의 화신입니다. 이것을 언약이 전부 폭로시킵니다.
이 언약이 구체화되면 언약의 사람으로 전환되는데, 이것이 오늘 강의에서 가정 어려운 부분입니다. 언약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약속이라면 “오늘 몇 시에 만나자.” 이것이 약속인데, 이것은 듣고 잊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물체로 만들면 도장(또는 사인)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약속을 사람으로 등장시켜서 구체화 시킵니다.
예를 들면, 아벨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음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성립됩니다. 제사를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제사를 받았다는 언약이 담기게 된 사람이 아벨이고, 그 아벨은 하나님 언약으로부터 배재된 자로부터 복수의 대상이 됩니다. 평소에 있던 하나님에 대한 반발 세력이 보복의 대상, 하나님과 연관된 자가 누구인지를 찾고 있었어요.
신에 대한 복수를 누구에게 퍼붓는가 하면, 하나님과 연관된 자에게 퍼붓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전쟁입니다. 세상의 역사는 이 전쟁의 연장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후손’이란 말이 너무 추상적이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잖아요. ‘뱀의 후손’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사의 새끼를 말합니까? 아니에요.
이것을 구체화 시키려면 언약이 투입되어 각각 인격화 되어 구체화 됩니다. 이것 외의 역사는 없습니다. ‘여자의 후손’편이냐, 아니면 ‘뱀의 후손’이냐 둘 중 하나입니다. 창세기 4장 이후에 뱀의 후손은 가인이고, 여자의 후손은 아벨이죠. 여자의 후손은 언약을 품고 있고, 반대편에는 언약을 공격하는 뱀의 후손이지요.
현대 사회에서는 복수를 완화시키기 위해서 스포츠가 있고, 도박이 있지요. 이 전체를 게임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게임하다가 끝나요. 게임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지요. 사람은 자신이 승자라는 사실을 느낄 때 살 의욕이 생기고, 패자라고 느낄 때는 따운이 됩니다. 살 의욕이 없지요. 그러나 죽게 되면 그 게임도 끝납니다.
오늘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책이 도착했어요. 그 책 후기에 이런 말이 있어요. “모든 게임도 끝났다.” 우리는 한 평생 게임을 하다가, 내가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게임기가 되어 귀신들이 와서 나를 주무르며 마음껏 게임하며 놀다가 끄면 우리는 죽습니다. 한 평생 승자냐, 패자냐 이것 따지다가 허망하게 죽고 말지요.
정치에도 야당이 있고 여당이 있잖아요. 이것도 게임입니다. 우리는 대리만족하면서 어느 편에 서기를 원하고. 이것은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도 패가 있어요. 학교라면 교장 편이 있고, 교감 편도 있고. 학급에 학생들도 패가 나눠져 있어요. 반장 선거해서 누가 반장이 되면 그 학생을 지지하지 않았던 학생들이 그 선거에 잘 승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타고난 본성이에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갈등. 이것이 타고난 본성이고 이것이 가정에까지 이어집니다. 아빠 편, 엄마 편 나눠져서 음식을 먹을 때도 나눠집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자체가 평정이란 것이 안 됩니다. 성경적은 용어로 말하면 ‘평안, 화목, 화평, 안식.’ 그런데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잖아요. 마무리 하셨단 말이지요.
마무리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는 갈등을 일으키고 그 갈등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마무리되어야 하나님이 안식을 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지금 우리는 우리의 행복과 편안만을 추구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안식하고 하나님이 평안해야 됩니다. 우리는 거기에 참여할 뿐이고.
하나님이 안식하려면 하나님이 일부러 두 패로 나눠요. 이 패가 자체적으로 하나가 되면 하나님이 개입할 여지가 없잖아요. 하나님에 의해 갈라진 두 패는 하나님이 손수 개입하셔서 평정하게 되면 영광을 하나님이 독점하는데,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국입니다. “하나님, 잘 하셨습니다. 뱀은 유황불로 잘 보내셨습니다. 주님이 교통정리 안 하셨으면 영원히 해결할 수 없었을 텐데 주님이 나서시니 교통정리가 확실하네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양과 염소, 양곡과 가라지를 주님이 개입하셔서 나눕니다. 주님이 개입하게 되면 무엇이 따라 나오는가 하면, 불편한 이 세상에 주님이 유성처럼 개입하면 여기에 같이 품고 있는 개념(단어)들이 있어요. 그 단어 중 하나가 오늘 공부할 ‘왕’과 ‘땅’ 그리고 ‘제사장’입니다.
이 개념은 어디에 붙어 있습니까? 우리가 지키는 개념이 아니고 개입하시는 분에 붙어있는 개념이에요. 이 개념을 먼저 말씀으로 던져놓고 뛰어들거든요. 아이들 놀이를 보면, 사방놀이라고, 돌을 던져놓고 폴짝폴짝 뛰어가서 그 돌을 주어오는 것이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도 먼저 말씀을 던져놓고, 혹은 언약을 던져놓고 찾아가면서 개입해서 모든 것을 평정하십니다. 안식상태에 들어가십니다. 이것을 ‘창조’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창조’와는 다르지요? 우리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을 창조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결과만 있을 뿐이지 누가 개입했는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올바른 창조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방종교에서 말하는 조물주입니다. 이처럼 성령을 받지 않은 이방사람들이 생각하는 창조는 성경이 말하는 창조와 전혀 다릅니다.
누구를 위하여, 누가 개입해서 창조했는지가 포함 되어야 하나님의 안식과 영광이 파악되는 창조가 됩니다. 그럼 누가 개입했습니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예수님이 개입하셨지요. 그게 구약에서는 뭐냐? 언약이 개입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해서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당했어요.
창세기 4장만 보아서는 ‘아벨은 착하고 가인은 나쁜 놈이야.’ 이것만 나옵니다. 만약 아벨이 착해서 구원을 받았다면, 선악을 아는 자체가 죄가 된다는 창세기 2장의 원리와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런 점이 좀 어려워요. 착하니까 구원 받았다는 생각은 지옥 갈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것 자체를 동조하는 꼴이 됩니다.
어제 가락교회 강의에서 이런 내용이 나왔어요. “하나님,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떤 여인과 눈이 맞아 바람을 피웠습니다.” 이런 기도를 할 때 주님은 들으시고 “내가 어쩌라고? 네가 바람 안 피웠으면 훌륭한 인간이냐?”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모독하는 악마의 전략입니다. “이번 일만 안 일으켰으면 좋았겠는데, 이런 실수를 했네.” 그러면 그런 실수 안 했다면 좋은 인간입니까?
다윗이 사람을 죽였어요. 그것도 아주 얍삽하게 죽였어요. 어떤 강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라가 불쌍한 종 하갈을 심하게 구박했어요. 그래서 그 구박에 못 견뎌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과 가출을 했지요. 그런데 가출한 그 둘은 지옥가고 구박한 사라는 천국에 가있어요.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그래요.
이야기가 이상하지요? 이상해도 굉장히 이상하지요. 이 세상을 볼 때 뭔가 뒤집어서 봐야 해요. 성경은 정말 이상해요. 상상이 안 될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사건을 몰고 오시면 지상에 있는 선악과를 먹은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비티] 영화 혹시 보셨나요?
그 영화 마지막 장면에 보면 중국의 우주선이 대기권에 들어와서 타버리는데, 여자 주인공이 탄 캡슐도 같이 타면서 지구상으로 막 떨어집니다. 같이 막 떨어져요. 편대를 이루면서. 이것을 보면서 제가 뭘 느꼈는가 하면, 언약이 개입되면 그 주변에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이 같이 편대를 이루어 함께 지구로 떨어지는 거예요. 율법, 땅, 왕 이런 개념들이.
그런데 땅에서는 말씀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해석한다고 바빠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모여서 ‘이 말씀은 이렇게 지켜야 된다’고 하고, 또 욥의 경우에는 욥의 친구들이 모여 진단을 내리기를 “욥은 분명히 죄가 있기에 벌을 받은 거야.”라고 했어요. 하지만 막상 떨어진 유성 같은 욥이나 성령 받은 선지자 앞에서 이 모든 것들은 그저 복수의 화신들입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런 존재라는 것이 들통 납니다.
이 땅은 이스라엘 땅이 아니고 잠시 빌린 것뿐입니다. 사실은 저주 받을 땅이 이스라엘 땅인데, 에스겔 45장에서는 이 땅에다 축복의 그림을 그립니다. 이 땅 양쪽에 왕의 땅이 있지요. 왕의 땅이 있는 이유가 뭔가 하면, 45장 9절에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의 치리자들아 너희에게 족하니라.”
이 말이 뭔가 하면, 왕의 땅이 있는 것은 왕 직영지가 따로 있음으로 말미암아 왕이 통치한다는 것을 빙자해서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나오는 소산물을 빼앗지 않게 만드는 겁니다. 왕 의 것이 따로 있으면 다른 소산물에 대해서는 욕심 부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1차적인 목적이고,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성읍들이 양쪽으로 무엇의 보호를 받습니까? 왼쪽 끝에도 왕의 땅, 오른쪽 끝에도 왕의 땅입니다. 그런데 이 왕을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면 그 왕 사이에 끼인 땅도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지키시는 땅이 되는 겁니다. 왕의 땅이 양쪽에 갈라져 있고 그 사이에 있다는 것은 철저히 왕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강의 초반에 뭐라고 했지요? “네가 천국 가고 싶니?” 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왕과 함께 살래, 말래?” 이것을 묻지요. 왕과 함께 살려면 천국 가서 살 수 있고, 왕 없이 혼자 살려고 한다면 천국은 끝났다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아주 순한 이야기만 했어요. 이제부터는 독하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그림은 위에서 본 평면도처럼 되어있는데, 이것을 측면에서 보면 어떨까요? 두 개의 판이 있지요. 첫째 판이 있고, 둘째 판이 있고. 도배를 할 때 어떤 것 위에 도배를 하면 그 밑에 있었던 것은 안 보입니다.
A판을 멸망당할 이스라엘 땅으로 봅시다. 이 땅은 이스라엘이 멸망한 땅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을 숭배한 땅이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우상을 숭배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니 저주의 땅이에요. 저주의 땅에는 12지파의 규격이 이렇게 안 되어 있어요.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 땅에 있고, 그 위에 베냐민 땅이 있고 ---
이것이 다윗 때에 완성이 됩니다. 다윗은 전쟁을 많이 했기 때문에 피를 많이 흘렸어요. 창조의 하나님은 전쟁 중의 하나님이 아니고 창조 마감 후에 안식이 되어야 하지요. 그 안식의 표시로 솔로몬 아들이 나와요. 우리가 보기에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보이는데, 사실은 다윗 언약의 아들을 이 둘 사이에서 뽑아내요.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 맞습니다. 그런데 다윗 언약의 아들은 솔로몬이 아닙니다. 다윗 언약은 다윗에게 일어나야 될 새로운 판(A판이 아니고 B판)에 의해서 아들이 나와야 됩니다. 그러면 다윗 언약을 위해서 다윗이 어떤 모습이냐? 다윗은 저주 받아야 될 A판을 대신해 줘야 돼요.
그래서 다윗은 간음과 살인을 했어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윗은 이렇게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고 천국을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다윗 언약의 효과 때문에 그래요. 언약의 효과가 드러나면 구원 받은 사람은 자력으로 구원 받는 모습이 철저히 망가져야 해요. 언약이 오면 망가지니까 우리가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우리 인생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망하게 하옵소서. 천벌 받게 하옵소서.” 하는 순간 마귀는 재미가 없어서 떠나갑니다. 우리가 저주 안 받으려고 발버둥 칠 때 마귀가 달려오고, 내가 벌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길 때 마귀는 떠나납니다. 천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제가 하는 말이 아니고 이미 주기도문에 나왔어요.
주기도문은 처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고”로 시작하지요. 그리고 끝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하지요. 주기도문이 주기도문답게 되려면 우리의 하루 일과가 용서 받아야만 사는 24시간입니다. 주기도문에 의하면 용서 받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왜 그런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시키면서, 우리에게는 하루치의 양식만 허용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기도를 시킵니다. 우리는 은행에 잔고가 있고 창고에 곡식이 많이 있더라도 주기도문에 의하면 양식이 넉넉히 있음을 아는 채 오늘 밤은 오늘로 끝이 납니다.
죽은 귀신이 나타나서 “애야, 미안하다.”하고 아무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것은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오로라 공주]에 보면 죽은 귀신이 나타나서 “이 집에 우환이 있다.”는 암시를 주고 사라져요. 이처럼 언약은 유령이에요. 항상 떠서 “네가 사는 이유는 너를 용서한 분이 지금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루하루 일과가 유지된다.”는 것을 알려주지요.
내가 내일도 살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 살 이유도 목적도 없어요. 성령이 찾아오셔서 “너는 주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하시는데, 이것이 안 되면 사는 것이 아니지요. 이런 자는 분노와 복수로 하루하루 살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되면 주기도문의 내용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려면,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우리를 살려내고 있는가를 알아야지요. 양식을 주시는데 양식은 하나의 모형이고, 진짜 살려내는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살려내고, 그것을 아는 자가 아버지께 영광이 되고,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개입하신 분은 예수님이고, 그래서 모든 창조는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이 창조는 흘러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화목제물’이라고 하지요. 이 말을 잘못 해석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거리가 벌어졌는데 예수님이 개입해서 하나님과 나 사이가 좋아졌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잖아요. 이건 엉터리입니다. 마귀가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바른 해석은, 우리와 하나님이 화목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죽은데서 살려낸 그 인간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거예요.
나밖에 모르는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죽여야 B판에 합류가 되는 거예요. 합류되고 난 뒤에 B판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된 것처럼 너희도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 이것이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를 죽이시는 분 안에서만 이것이 돼요.
이 오해를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난감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어 멀어졌으니까 이제 죄 씻고 가까이 간다.’ 아닙니다. 우리는 가까이 못갑니다. 주저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저주 받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화목작업에 우리가 합류됩니다. 저주 받은 채로 들어가야 진짜 예수님 안에서의 화목이 기다리고 있어요.
베드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늘나라 처소에 못 갑니다. 이 느낌 아시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해야 돼요. 배신한 베드로가 아니고 배신했다가 주님이 살려낸 그 베드로와 아버지가 화목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개입하는 겁니다. 그냥 맡기세요. ‘화목하려면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이런 고민 하지 말고 그냥 하세요.
왜냐하면,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것이 벌 받고 있는 중입니다. 아담도 받았고 아브라함도 받았고 예레미야도 받았고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빠지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 제자들은 우리보다 훨씬 고생을 많이 했어요. 우리도 고생할 수밖에 없어요. 복수심 때문에 고생을 사서 할 수밖에 없어요.
자식도 내 뜻대로 안 되니까 화가 나고, 모든 것을 내 뜻에 맞추려고 하는데 하나도 되는 것이 없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해서 일부러 그런 일을 발생시킵니다.
이 땅 자체가 다윗 때에 이미 땅 분배는 끝났어요. 성소는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45장에 나오는 그림은 이 땅 경계와 달라요. 이 모양은 에스겔 45장에만 나오지 역사상 이런 지도는 없어요. 지금 여기 서쪽 왕의 땅은 요르단이고, 동쪽의 왕의 땅은 팔레스타인 지역입니다. 가자지역이죠.
그러니까 이 저주 받은 땅에다 주님께서 이 그림을 위에다 그려버린 겁니다. 이런 그림을 그리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역사상 있는 A판만 기억하고 있는데 전혀 그런 그림이 안 나올 때 이것은 또 하나의 판이 깔린다고 보시면 돼요. 이 판은 묵시 판입니다. 기존의 것은 역사 판이고.
역사가 먼저 있고 난 뒤에 묵시판이 주어지는데, 이 묵시판이 역사화 될 때는 사건의 양식으로 펼쳐집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다윗, 솔로몬의 땅은 저주 받은 땅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그 망한 이스라엘 땅 위에다 이런 땅의 약속을 해 주신 거예요. 그러면 12지파가 어디 있는가? 성소 그림에 보면 12문이 나와요.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12사도가 나와요. 천국의 예루살렘 문이 몇 개입니까? 12개입니다. 그래서 12개의 문을 통해서 구원 받을 자가 들어가는 겁니다.
12지파, 12문 이 모든 것의 기본 모델은 역사상 실제로 있었던 것을 모델로 해서 그 위에 묵시를 맞춰 나가는 겁니다. 이 땅에서는 죄를 만들어 내요. 그러면 위에서 하나님의 용서가 오면 이것이 바로 에스겔이 말한 언약의 완성, 창조의 완성, 하나님이 비로소 안식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저주 받아야 하고, 우리는 천벌 받아야 됩니다. 받으려고 할 필요는 없고 우리는 매일 받고 있어요. 우리의 현실은 고통이며 불행입니다. 과거는 아름답게 보이는데 현실은 전혀 아름답지 않아요. 우리는 현실이 너무나 좋지 않기에 아름다움을 상상하다 보니까 상상 속에서만 아름다움이 있어요. 꿈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깨면 허망해지지만.
에스겔 45장의 작업은 사람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 이뤄집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왕을 하나 투입해요. 여기가 왕의 땅입니다. 그러면 망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A판이 망한 것은 왕이 부실해서 망했어요. 그래서 에스겔 45장 9절에 “이스라엘의 치리자들아 --- 너희는 강포와 겁탈을 제하여 버리고 공평과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토색함을 그칠지니라.”고 당부한 것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왕이 하나님 마음에 부합한 왕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합니까? ‘그러면 부합된 왕을 세워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면 되지.’ 라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나온다는 자체가 전혀 다윗 언약을, 하나님의 뜻을 이해 못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창조란 이미 왕이 정해져 있어요.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창조가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기껏 인간 왕이 애쓰는 것과 한 번 비교해 보란 말이지요. 비교해 보면 애쓰는 왕들이 예수님을 죽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그 원칙 그대로 가요.
왕이 주어지면 왕이 무슨 수로 성전을 만들까? 그 만드는 방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2,000년 역사 속에서 신학자들이 오해한 것이 있어요. 창조에는 두 가지 설이 있어요. 먼저 유출설이 있는데, 이것은 신이 있고 신의 능력을 쭉 늘리면 이것이 창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기에 존재자가 나를 존재케 했던 그 원인을 찾아가면 결국 신과 합일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 속에 있는 신적인 요소만 찾으면 됩니다. 선, 의, 거룩. 이런 것이죠. 보다 거룩하고, 보다 착하면 결국은 신과 합일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유출설이에요.
어거스틴은 이것을 거부했습니다. ‘유출설은 철학이다. 성경에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된 것이다.’ 있는 것에서 변형시켜 만드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인데, 성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다르게 하나님이 없는데서 있게 했다고 보는 겁니다.
두 가지 다 잘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창조에 대해서 이 두 가지 밖에는 몰라요.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더라.” 이 말씀을 신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원래는 빛이 없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빛이 있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다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러나 이런 창조 ‘빛은 없었는데 빛이 존재했다.’ 이것은 존재 차원에서 창조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철학이나 이것이나 같은 거예요. 그러면 뭐가 있는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말씀에서 창조했어요. ‘빛이 있으라.’하는 그것이 바로 창조의 핵심입니다. ‘빛이 없었는데 빛이 생겼다.’가 아니라, ‘빛이 있으라’ 하는 말씀이 창조의 핵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빛이 있으라’고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처음부터 예수님이 개입된 거예요. 그것을 요한복음 1장에서는 ‘말씀 없이는 아무것도 된 것이 없다’고 한 거예요. 그럼 빛은 뭔가? 말씀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모형으로 떨어진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는 그분을 ‘빛’이라고 해요.
빛은 예수님에게서 나온, 예수님을 증거하는 모형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면 나는 뭔가? 나를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것, ‘없는 나를 하나님이 만들었다.’ 이것은 창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나를 만들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10분 쉽시다.
(2013. 10. 31. 08:42 녹취 마침)
첨부파일 : 47-1.hwp (64.0K), Down: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