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70이레 논문(마귀의 소리)131024-28강a -이 근호 목사
가락-70이레 논문(마귀의 소리)131024-28강a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70이레논문(마귀의 소리)131024-28강a-이 근호 목사
239 페이지 밑에서 5번째 줄에 『예수님의 언어와 행동 뒤에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파악될 수 없는 예수님이 겹쳐 있다.』 그건 이유가 왜 그러느냐 하면, 이 내용에 보게 되면, 인간이 해석을 어떤 예수님이던 누구든 뭔가 해석을 하는데 그 해석할 때 인간의 주체적 입지가 장렬해서 예수님을 파악하는 순간 인간의 주체가 예수님에 의해서 깨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을 하나의 물체로 보게 되면, 내가 물체를 들여다보나 멀리서보나 아무 일 없는데 만약에 예수님이 물체가 아니고 진짜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날 경우에는 저 쪽에서 나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들여다 본 내가 주체가 깨어지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것이 이사야6장에 보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는 거예요. 눈 부셔서 못 본 경우가 있지요. 다메섹에서 내려가다가 사도바울이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이 소경됐습니까? 사도바울이 소경됐습니까? 사도바울이 소경된 거예요. 주의 음성만 들리고, 진짜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내 주체가 깨어지는 겁니다. 깨어지게 돼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에 제자들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를 만지지 말라. 주님 몸 다칠까봐 그러는 것이 아니라 네 몸 다친다. 인간들의 몸이 다치는 거예요. 참 신기하죠. 우리가 홍해사건 바다 갈라진 게 신기하다 하잖아요. 그건 아주 수준 낮은 신기고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잖아요. 그걸 야! 신기하다고 하지만, 진짜 신기한 것은 감추어진 예수님과 만날 때 눈에 나타난 예수님 말고 예수님 몸에 감추어진 진짜 예수님을 만날 때 신기한 정도가 아니고 놀라 자빠지고 우리는 눈을 뜰 수가 없겠지요. 그야말로 빛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어두움인 줄 몰라요.
그런데 예수님의 빛이 제대로 작용을 해버리면 우리는 완전히 빛 앞에서 어두움으로 그대로 노출되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런 사상의 변화가 일어나요. 나는 예수 믿어가지고 내가 어떻게 잘될까? 할 때는 여전히 주체가 살아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하나의 대상으로 보는 거예요. 예수님을 액자 속의 인물처럼. 돌아가신 아버지 초상화처럼. 백날 욕해도 초상화가 살아나지는 않습니까? 그런 경우처럼 마음 놓고 놀리고 원망해도 주님께서는 가만~히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서 우리에게 작용을 해버리면 그 때부터는 우리 주체가 깨어진다고 되어 있잖아요. 그러면 주체는 없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은 날 살리는 게 아니었다.’ 예수님은 나를 살리는 예수님이 아니고 나를 찾아와서 뭘 살리느냐 하면, ‘죽음’을 살리는 거예요. 죽음을 살린다. 보통 우리는 살린다 할 때는 고양이를 살린다. 개를 살린다. 고장 난 차를 살린다. 조금 전 까지 못 움직이는 것을 살린다. 그런 의미 있잖아요. 어떤 살아있는 것, 고장 난 것, 사람을 살리는데 예수님이 살리는 것은 죽음을 살리는 거예요. 어떤 물체가 아니고. 예수님이 생각해 놓은 그 죽음을 살립니다. 어떻게? 살아있다고 한 우리를 이용해서 예수님이 만나서 우리 속에서 죽음을 들추어내는 재료로 우리를 활용하게 되지요. 죽음을!
그러면 인간이 아는 죽음, 지난 낮 설교에 그런 게 있잖아요. 무덤에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의 보는 안목과 무덤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나온 분의 안목이 같을 리가 없다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무덤에 들어갔다가 이미 죽어봤다가 살아나셨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무덤에 안 들어가 본 사람은 꺅, 죽으면 그만이지, 하는데 절대로 그만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죽었다가 무덤에서 나왔기 때문에 풀어놓는 보따리 속에는 살아있는 인간들이 감히 도저히 예상도 못한 생각도 못한 그보다 훨씬 많은 내용들을 줄줄이 우리한테 쏟아놓는데 그 쏟아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죽음이라는 것을 쏟아내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라 하는 것은 내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죽음이라 하잖아요. 그것은 죽음 중에서 극히 작은 깨알 같은 모래알 같은 작은 일부고, 진짜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네가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할 때, 그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직도 주님께서는 인류를 계속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결혼해서 애 낳게 만들어요. 아직도 계속 죽음을 의미하기 위해서. 이걸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는데 먹는 날에는 해놓고 날, 죽으리라, 하는 죽음을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내가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담이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아담 죽고 아담 난 자식 또 죽고 그 자식이 난 자식 또 죽고, 죽고, 죽고, 죽고, 그거 다 모아놔야 그거 다 모아놔도 죽음을 다 설명 못해요.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 예수님이 죽어야 그게 죽음입니다. 인간의 죽음이란 그 예수님의 죽음의 결과물이에요. 인간은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과 관련돼 있습니다. 그래서 설명을 이렇게 할게요. 예수님께서 언어라 하는 것은 죽음이라 했는데 죽음을 가지고 옴으로서 뭐를 또 가지고 오느냐, 생명을 가지고 와요. 이 둘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 이게 복음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한 번 정리하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은 복음의 본질을 천국의 본질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찾아오면 날 살려내기 위해서 날, 갑자기 내가 더 중요해요. “날 살리기 위해서 오셨지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가 죽었으니까 “잠시만요, 예수님 빨리 오셔서 우리 오빠 살려주고 가세요.” 우리 오빠 살려내세요. 주님께 찾고자 하는 것은 죽음이 무엇이며 죽음과 동반해서 진짜 생명이 무엇인가를 복음의 본질, 예수님의 죽으심의 본질, 가치, 취지, 그걸 드러내기 위해서 나사로 가족을 이용하는데, 나사로 가족은 그걸 몰랐어요.
‘우리 오빠 죽어가요. 빨리 와서 낫게 해주세요.’ 안 가지요. 죽고 난 뒤에 찾아가지요. 여기서 마르다 마리아는 오해를 하죠. 죽고 사는 것에 대해서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오해를 드디어 솔직하게 말합니다. ‘미리 오셨으면 안 죽었을 걸.‘ 할 때, 예수님께서 다른 말로 하면 “네 오빠는 지금 자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겠지요. 이미 죽은 자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내듯이 이건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 잔다는 이것도 새로운 복음의 본질 안에 있는 것으로서 우리는 몰랐어요. 왜냐 하면, 자꾸 어디에만 관심 있기 때문에? 주체에 살길만 찾기 때문에 예수님이 뭐라고 얘기하는지 도대체 못 알아듣고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라요. 우리는 내 사는 것에 급급하다 보니까 진짜 예수님의 멘트 있잖아요. 예수님의 본래의 취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를 모릅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가 뭔지 알아요? 아직도 모르는 게 많기 때문에 그래요. 살아가면서 오해하고 있는 게 많기 때문에 살아가면서 처절하게 당해보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의 사랑?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 소망 아니에요. 우리의 믿음? 우리의 믿음 아니에요. 우리의 죽음? 죽은 게 아니에요. 사는 거 아니에요. 모든 것은 우리 속에 체험 화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욥처럼 재를 뒤집어쓰고 제가 입이 있더라도 할 말이 없네요. 조금 전까지 나불, 나불, 나불. 차라리 이렇게 고생할 것 같으면 태어나지 말 것을 왜 태어나게 했습니까? 뭐 친구하고 그렇게 논쟁하면서 입을 나불, 나불하다가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자기가 아는 개념들은 전부 다, 목적자체가 주님의 복음을 드러냈어야 하는데 욥은 어떻게 옛날처럼 건강하고, 옛날처럼 자식 10명 있고, 옛날처럼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 때가 그리운 거예요. 자기가 잘 되는 것, 우리의 관심사가 이것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평생 살아가면서 강제로 교정되어야 되고 수정되고 뜯어고쳐져야 되지요.
살아가면서 우리가 느껴야 되는 것은 지금도 여러분들은 가끔 느끼겠지만, 내가 살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서 살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뭔가 어떤 계기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어떤 계기? 세상에 대해서 큰 실망할 때나 또는 나 자신의 태도에 대해서 내가 큰 실망을 할 때 ‘아이고,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나 같은 인간 더 살면 뭐하노? 사는 게 남한테 민폐다. 이거.’ 라고 느낄 때 비로소 그런데 왜 살았지? ‘아! 나를 위해서 내가 살아가는 게 아니구나!’ 라는 것을 주님께서 그 짧은 순간이지만 집어넣습니다. 그 순간은 내 주체가 아주 즐거움 속에서 깨집니다. 주체 깨지더라도 아주 짜증나면서 깨지면 안 되고 즐겁게~♬ 가볍게~ 깨져야 되지요.
내가 거의 1년 동안 두 손 모아 응원했던 야구팀, 넥센과 LG, 설마 두산한테 다 깨질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중계방송 보면 여성 팬들이 간절히 기도해요. LG하고 두산하고 둘 다 스탠드에서 전부 기도하고 있어요. 안타 쳐야 이길 긴데. 둘 다 다 떨어져. 그럴 때 쓸데없이 이런 것 가지고 기도했던 자기가 얼마나 한심스럽겠습니까?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주님께서 “그게 정답이야.” 그러니까 내가 죽는 게 죽음이 아니고 나 같은 인간이 죽는 게 나아. 라고 하는 그것이 주님이 주신 우리에게 덮여주신 죽음이고 그 죽음과 더불어 생명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예요. 그래, 내가 자기를 부인해야 그게 생명이란 사실, 내가 부인하게 하는 그 능력이 바로 내 능력이 아니고 생명 쪽에서 온 연결고리, 생명 쪽에서 온 그 능력이 임했기 때문에 내가 응원했던 팀 완전히 져버리고.
우리나라에서 LA 다저스 팀 응원해서 못 올라갔잖아요. 실망한 사람이 몇 명이겠습니까?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기도 얼마나 많이 했겠어요? 그걸 누가 그렇게 간절히 기도합니까? 내가 그렇게 하잖아요. 류 현진 응원하는 거 본인들이 하잖아요. 그런 본인들이 살면 뭐합니까? 기껏 주님 주신 생명가지고 류 현진 야구선구 응원하는데 소모하라고 인생 보내는 것. 그건 가정주부도 마찬가지에요. 내 딸, 내 딸 하다가 시집 지 맘대로 가버리는 것. 내가 저런 딸 키우려고 내가 살았느냐, 그게 주님의 능력입니다. ‘아이고, 참 내가 부끄럽다. 기껏 해가지고 내 인생 쟤한테 다 쏟아 부었느냐, 저렇게 떠날 걸.’ 주님께서 “쏟아 붓긴 왜 쏟아 부었어? 그래. 원래 그게 네 모습이야.” 그러니까 그 모습에 합당한 것은 죽음이야. 뭐든지 내 뜻대로 안되고 뭐든지 내 원대로 안 되고 마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존재처럼. 있어도 없는 존재처럼. 하얼빈의 스모그처럼. 있어도 없고 남들 보기에는 아이고, 오셨습니까? 하지만 따지면 다 귀찮은 존재, 나 빼놓고 다 귀찮아. 나 빼놓고 다 스모그야. 잘해줄 때는 고맙지만 고맙기 때문에 더 붙어있기도 싫어. 잘해주는 것만 빼먹고 빨리 꺼져라. 그러니까 그 주체 때문에 주님도 얼마나 우리한테 구박 당했겠어요? 천당만 보내주시고 꺼지세요. 이런 식으로.
그 주체를 들추어내는 것은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진짜 나는 죽어야 돼! 그것만이 축복이에요. 환희! 세상에 그런 기쁨 없어요. 나는 죽어야 돼! 사람이 너무 기쁘면 죽어도 좋아 하잖아요. 너무 너무 기쁠 때. 나 같은 인간은 지금 당장 죽어도 괜찮습니다. 요 기쁨은 진짜 죽음이 찾아왔을 때 이걸 느끼게 마련이에요. 고 순간에 죽어야 되는데. 그것도 그 순간에 또 살아 있으면 골치 아파 또. 그래서 그 뒤에 말이 뭐냐 하면, 『인간으로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인간의 주체성이 버틸 수 없다. 이로서 성도의 주체성은 도저히 못 버팀을 그대로 보여주는 주체이게 한다.』 버틸 수 없다. 그러니까 어떤 인간도 내 앞에서는, 빛 앞에서는 버틸 수 있는 존재는 없다. 그냥 어두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살리기 위함이 아니고 뭘 보여주기 위함이다? 복음의 본질을 위함이라.
그러면 복음의 본질을 설명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걸 설명하는데 어제 수요설교에서 제가 약간 설명을 했어요. 수요설교를 약간 이야기하게 되면 왕이 쓰는 면류관은 어떤 면류관이냐 하면, 뭐가 보이는 자리라고 했지요? 하나님의 원수가 보이는 자리여야 그게 왕이 쓰는 면류관을 받을 수 있어요. 왜냐 하면, 여자의 후손은 언제 나타나느냐 하면, 뱀의 후손을 지목하면서 나타납니다. ‘얘가 뱀의 후손이야.’라고 지목하면서 지목하는 그 손가락이 여자의 후손에 붙어있는 손가락이에요.
이스라엘 왕들은 껍데기에요. 그들은 뭐라고 주장하느냐 하면, 창세기 49장 10절 말씀처럼 유다의 족속에서 홀이 나온다, 별이 나온다. 왕이 나온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걸 철석같이 믿고 우리 유다는 유다지파고 유다지파에 왕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워준 왕이기 때문에 절대로 저 왕에서 왕관이 벗겨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유다왕의 왕관을 벗겨버리지요. 지팡이를 뺏어버리고. 없애버리지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다른 거 아닙니다. 주체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소속돼 있으니까 하나님이 날 위한 하나님인 것처럼 이스라엘을 잘 보존하고 키워주는 하나님이 하나님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전부 다 주체들로 모아놨기 때문에 그 주체의 성질이 어디 갑니까? 그 자기의 본 모습 그대로 이야기하죠. 원래 가족끼리 싸우더라도 식구끼리 싸우더라도 식당에 가서 같이 음식 먹고 있는데 다른 식구가 욕해보세요. 그렇게 싸우던 식구끼리 갑자기 단결돼 버립니다. 갑자기 언니, 동생 한 편이 돼가지고 같이 우르르 달려들죠. 그 가족이라 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주체화 된 거예요. 하나의 주체가 됐다고요.
현대 정신분석학 라캉이론에 있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간의 주체를 설명할 때 이렇게 설명해요. 인간의 주체라 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 이게 주체가 아니고 타인을 통해서 출발하는 거예요. 나의 남이 누구지? 타인이에요. 흔해빠진 타인은 남이 아니에요. 뭐냐 하면, 내가 기대하는, ‘내가 저렇게 되고 싶다.’ 하는 그것, 그 타인, 그걸 타자 또는 큰 타자, 큰 타자를 통해서 큰 타자를 경유하면 요 자리에 나의 욕망이 출발 시작! 해서 큰 타자를 통해서 만들어진 내 주체, 요게 주체에요. 그래서 나와 이 주체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동일하지 않고 항상 여분이 있어요. 그걸 잉여, 여분이 있어요. 항상 붕 떠 있어요. ‘나 오늘 하루는 이렇게 살 거야.’ 할 때 이렇게 살 거야, 그냥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고 분명히 내가 모델로 삼은 사람이 있어요. 분명히 뉴스시간에 나왔던지 검사가 나왔던지 ‘그래, 나는 검사는 아니지만 저 사람처럼 살고 싶어.’ 또 여자분 같은 경우는 영화 보면서 ‘아, 요새 저런 옷이 유행하는구나! 동대문시장가서 하나 살까?’ 이런 식으로 그렇게 할 때, 오늘은 내가 봤던 그 옷이 없으니까 그 유사한 옷을 걸쳐보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할 때 그게 새로운 주체가 되는 거예요.
인간의 주체는 그때, 그때 달라요. 내가 만났던 사람, 내가 그리운 사람, 내가 보고 싶은 사람, 이게 다 달라져요. 예를 들면 내가 길을 가는데 생각지도 못했는데 초등학교 여자동창생을 만났다. 커피카페에 가서 2시간 동안 수다를 떠는데 들어보니 남편자랑, 자식자랑,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이리 나오는데 그래서 둘을 유학 보내고 조기유학 보내고 죽 나오는데 그래서 성질은 나는데 헤어졌는데 부화는 나는데 그러면서도 내가 나의 그 타자로 인하여 남으로 인하여 욕망이 자극받아가지고 “그래도 내 아이는 공부는 좀 못해도 건강하기는 잘 키웠지.” 라고 자족할 때 그게 이미 타인의 욕망을 경유한 주체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 동창생을 우연히 만난 게 문제라. 그걸 안 만났으면 다른 주체를 생각할 건데 만났기 때문에 그걸 염두에 두고 살아요. 그러니 인간은 매일같이 뭐든지 염두에 두고 살아요. 항상 세트장 없는 인생은 없어요. 매일 세트장 새로 설치하고 거기서 자기는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또 하루를 보냅니다. 그게 주체에요. 주님께서 “놀고 있네.”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에 이야기했잖아요. 십자가로 바꿔봐라. 세트장에 십자가를 꽂아봐라. 십자가 들어가고 십자가 그 들어간 앞에서 나의 모습은 주체는 아까 했지요. 내가 주님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요? 내가 깨져버린다. 쨍하고 강한 선이 오게 되면 유리창 깨지듯이. 강한 성령의 역사가 되면, 나는 쨍하고 아주 얇은 유리조각처럼 산산조각 다 나버려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나는 무지 행복하지요. 깨진 상태에서 우연히 동창생을 만나 봐요. ‘우리 애는 공부 너무 잘하고 어떻고.’ 하면, 아이고, 그게 다 네 짐이다. 짐. 그 자체가 네가 지금 짐 지고 가는 거다. 나는 짐이 없는데. 너는 왜 그렇게 짐이 있지? 애가 공부 잘하면 더 잘하고 싶고, 검사하면 검사장되고 싶고, 뭐든지 그 자리에 가면 새 자리에 가고 싶고, 재벌에게 시집가고 싶고, 욕망은 계속해서 새로운 모델을 찾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 만나서 행복이란 뭐냐 하면, 그냥 예수님만 계시고 존재하고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거예요. 성만찬 할 때에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 예수님의 몸이라 하잖아요. 이 떡은 몸이고 이 잔은 예수님의 피라 하잖아요. 이걸 딱 생각한 에크하르트라는 신비주의자는 이렇게 했어요. 우리는 없다. 우리 자체는 없다. 모든 것이 예수님의 몸이다. 했어요. 사람들은 그런 생각 못하고 떡이 몸이 된다, 하잖아요. 또는 이 떡은 예수님의 몸이다. 떡 말고 쟁반은 몸이 아니에요. 요 떡이 몸이고 요 잔은 포도 담는 그릇은 피가 아니고 포도주가 피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에크하르트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몸이라고 했어요.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이 세상에 모든 존재한다는 것은 진짜 존재 앞에서 사실은 존재가 죽어야 된다. 없는 존재인데 감히 유일하게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감히 같은 존재의 말을 쓰다니 불결한 인간들아, 그러니 우리는 아예 없다. 왜? 예수님의 존재에 힘입어서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는 원천에게만 돌려야지 원천이 있는 존재를 잡아당겨서 나도 존재합니다. 라고 우길 수 있는 입장은 못 된다. 하는 것이 에크하르트의 주장입니다. 말 되죠.
참새가 있다 할 때, 참새가 있네. 할 때는 우리가 속아 넘어간 거예요. 왜냐 하면, 참새가 있다, 할 때 그 있다고 누가 합니까? 내가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참새가 나타나니까 “어, 참새가 있네.”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참새 너도 참새지. 너는 참새지만 나는 인간으로 있고 너는 참새로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뭐가 빠진다고 하는 겁니까?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뭐가 빠져요? 예수님에 의해서 기른다는 말이 빠지니까 그러면 그 나라 의를 구한 게 아니다 말이죠.
참새를 볼 때 참새가 있다, 보지 말고 “주님이 거기 계시네.”라고 이야기해줘야 된다. 이 말은 참새를 보자는 게 아니고 주님이 계시기에 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없애면 저는 내일이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나는 없습니다. 라고 해야 이게 온전한 주님과의 합일적인 관계다, 라는 말이에요. 말 되잖아요. 에크하르트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이 쿠자노스, 정반합을 처음 이야기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는 악마가 있어야 된다. 그 전까지는 뭐냐 하면, 이 세상에는 신이 선한데 왜 악마가 있어? 이건 뭔가 풀어야 돼! 할 때 그 사람은 아니야, 아니야, 신이 저기 선한 분 있고 여기 악마가 있는 이 세상 생각하지 말고 신은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하나님이 있다고 본다면 하나님이 선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악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양말 하나가 빵구 나게 되면 둘 다 버린다 했잖아요. 짝을 잃은 양말은 아주 슬픈 양말이에요. 부부가 이미 결혼하면, 하나라는 것은 각 개인에게 적용시키면 안돼요. 나도 하나, 너도 하나, 이렇게 되면 안 됩니다. 창세기2장에 보면, 이제는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됐잖아요. 하나가 한 몸이 됐잖아요. 하나라는 말은 너한테도 사용할 수 없고 나에게도 쓸 수 없는 거예요. 둘이 모일 때만 하나라고 설명이 된다 말이죠. 둘이 모일 때만.
하나님이 선하다, 하는 그 전까지는 하나님은 선하고 악마는 악하다고 보는데 그리 보지 말고 악마와 주님이 함께 있는 자체를 선으로 보자는 겁니다. 그건 어거스틴도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이 세상은 모든 것이 선하다. 악은 뭐냐 어거스틴은 그 선이 좀 미흡하다. 이 정도 이야기했는데, 쿠자노스는 더 나가죠. 반드시 악마가 있어야 그게 세트가 되어야 그게 바로 선하다. 따라서 이 세상은 반드시 모순과 불의가 있으니까 그걸 인정하고 긍정할 줄 알아야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겁니다. 악을 물리칠 생각을 하지 말고 죄를 물리칠 생각을 하지 말고 죄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내가 선이 아니고 선은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리 있지요. 다 들어보면 일리 있어요.
그 다음 들어보면 뭐냐 하면, 그 사상으로 보는 사람이 조르다노 브르노라는 이태리 신비주의자로 그 뒤의 사람인데 그 글은 제가 그레비티라는 영화평 속에 약간 언급해놨어요. 이 세상에는 중심이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은 중심이 없는 이유가 모든 게 무한이에요. 그러니까 무한을 위에서 찾지 말고 내 세포 안에 있는 무한도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을 품고 사는 거죠. 무한을 품고 사는 거예요. 무한은 어디에 해당됩니까? 무한은 인간에게 해당되지 않고 무한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속성이거든요. 왜냐 하면, 인간은 유한을 쓰니까. 종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유한이라 생각하지 말고 무한이 우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우리 유한도 무한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무한을, 신을 이제는 과학을 통해서 합리적인 이성을 통해서 찾아내면 된다는 거죠. 그게 바로 과학을 발달시키는 촉진시키는 이론이에요. 전에는 성당 가서 “오, 무한하신 하나님이여!” 했는데 지금은 집에서 연구하라는 말이죠. 연구. 만류인력을 연구하고 세포는 어떻게 돼있고 병균의 모습을 그리고 시체를 해부하고 이게 무한이에요. 이 행동하는 자체가 이 안에 무한이 있는 진리를 빼내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이 시키신 일이 라는 말이에요. 신의 일이 되고. 들어보면 또 일리 있지요.
그러니 제가 보기에는 80여명의 신학자들에 보면 전부다 인간의 이성의 끝은 무엇이냐, 그걸 보여주는데 그거 보면 그게 진리가 아니에요. 진리는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지, 맨 탕으로 오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언약을 가지고 온 거예요. 이스라엘한테는 언약을 줬지 이스라엘을 준 게 아닙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땅이 있고 민족이 동족이 있으니까 야, 이것은 우리가 살 길이라 하고 그걸 붙잡은 거예요. 언약을 붙잡지 않고 뭘 붙잡은 거예요? 이스라엘을 붙잡은 거예요. 이스라엘은 살아 있으니까. 진짜 붙잡을 것은 이스라엘 속에 이스라엘 살리기 위해서 죽어가는 게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어린 양의 피였어요. 피를 봐야 될 것을 피 때문에 살았다는 결과물을 붙잡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손을 놔야 되는 거예요. 멸망해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제자들과 헤어지는 순간이 어떤 순간이냐 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을 때 예수님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왜? 아까 동영상 강의에서 그랬지만, 이 세상은 힘의 세계거든요.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힘없이는 못 산다 말이지요. 19살 20살 애들이 천방지축 부모도 모르고 지 멋대로 놀다가 갑자기 영장 나오면 애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지요. 도대체 누가 내 자유를 박탈해? 군에 가보세요. 군에 가면 제일 먼저 박탈하는 것이 하루 스케줄입니다. 그 스케줄 국방부가 정해요. 아침에 늦게 자고 싶다. 말도 안돼요. 늦게 잤다. 늦게 자도 안돼요. 무조건 자기 싫어도 자야 되고 자고 싶어도 보초 서라면 서야 돼요.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쁜 게 뭔 줄 아세요? 잠 잘 때 깨우는 거잖아요. 그 잠자는 걸 깨우는 데가 어딥니까? 군대라니까요. 교도소가 더 심하지. 교도소는 안 가봤지만. 잠자는데 깨우지는 안 그럴 것 같아요. 고참이 깨울는지는 모르겠는데. 군에는 잠자는데 깨워야 돼요. 잠자는데. 잠자는데 깨워보세요? 이게 사회에 습관이 있어가지고 ‘이~ 씨~ 누구?’ 하다가 얻어맞고, 고참인 줄 모르고 얻어맞고. 잠자는데 깨워보면 집인지 군대인지 순간적으로 헷갈린다니까요. 왜 깨우는데? 누군데? 이렇게 하다가 또 얻어맞는다니까요. 이것이 군기가 빠져가지고 또. 그걸 애들이 아니까 부모한테 빌어서 빼달라고 하잖아요. 이 세상은 힘센 자가 지배하는 세계에요. 그 때부터 애들은 ‘야, 힘을 모아야겠구나!’ 힘이 있는 사람만 깨끗한 세상이고, 힘없는 인간은 더러운 세상이에요.
그래서 제자들이 원했던 것은 뭐냐 하면, 평소에 그들은 이 현실 속에서는 힘이 왔다 예요. 힘이 왔다인데 가만히 보니 예수님이 자기들이 생각한 이상으로 힘이 세거든요. 물위를 걷게 하죠. 병자도 낫게 하죠. 오병이어하죠. 주께서 오병이어하려면 주님께서는 그 다음부터는 ‘어이, 가룟유다야, 사올 것 없다. 내가 아까 한 거 봤잖아. 내가 기도하면 빵 먹는 거야.’ 찰떡, 찹쌀모찌, 만두 계속해서 기도하면 이 자리에 계속 나와야 되잖아요. 그래서 제자들은 오해한 거예요. 야! 힘이 있다. 그런데 그 힘은 어디와 결합됐는가 하면, 세상에서 인간들이 갖고 싶은 힘에 조금도 단절되지 않고 그게 커지고 커져서 예수님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언제 예수님과 제자들과 사탄이 개입됐느냐 하면, “내가 사람 손에 잡혀서 곧 죽게 될 것이다.” 그 이야기할 때 베드로 입을 통해서 딱 나온 게 뭡니까? ‘주여, 그러시면 안 되십니다.’ 여기서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됩니다. 그런 뜻이에요. 주님이 뭐라 합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그 이야기에요.
그동안 인간의 주체는 악마가 장악하고 있던 권력의 장에서 인간은 그 실존성을 나타내는 앞잡이 노릇을 한 거예요. 베드로가 그동안 누구 노릇했어요? 베드로 속에 누가 들어갔어요? 마귀가 들어갔다는 말은 마귀가 마음대로 베드로를 부릴 수 있는 입장이에요. 왜? 이 세상은 힘센 자가 들락날락 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힘센 자가.
지금 우리가 성령을 안 받아 놓고 성령 받은 체를 하면요, 백날 복음 듣고 성경공부해도 우리 입에서 뭐가 나옵니까? ‘십자가, 다 소용없는 기라, 누가 본 적이 있나? 천국이 있는 걸 누가 가본 적이 있나? 가봐야 아는 기야.’ 이 세상은 힘과 돈, 인기, 권력 아닙니까? 돈이 있어야 빵을 사먹으니까. 돈과 인기와 권력, 이게 다야. 라는 그런 속내가 취중진담이라고 술김에 나와요. 그게 나온다 말이지요. 나오게 돼 있어요. 기도하다가도 ‘누가 있기는 뭐가 있어, 없으면서 그냥 해보는 거지 뭐.’ 이런 식으로요. 찔러나 보는 거지 뭐. 화투 점치듯이, 결혼할 때 궁합보듯이. 궁합을 믿는 게 아니고 한 번 해보는 거죠. 안 좋다고 하면 사전에 안 좋을 것을 대비하면 좋은 거니까. 안 좋은 거 있으면 미리 고치면 되니까.
그게 베드로가 결국 뭡니까? 악마가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대상이 되었다는 말은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아는 말로 이게 이기주의입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거예요. 자기 밖에 모른다는 것은 평소에 몰랐는데 예수님한테 십자가 고난이야기 듣는 순간 자기 밖에 모르는 본색이 드러나면서 그게 바로 뱀의 후손을 지목하는 손가락이 바로 주님의 손가락이 아닙니까? 십자가 이야기 고난 이야기할 때 비로소 그 입에서 마귀가 하는 이야기를 할 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보이는 자리에서 진짜 왕은 등장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왕들은 그게 안돼요. 왜, 이스라엘 자기를 품어 안아야 되니까. 그건 이스라엘의 힘의 단체니까. 힘의 단체를 내가 앎으로서 나도 힘을 소유한 게 되잖아요. 제가 신학교 다니면서 궁금했던 것 중에 내가 안다고 이야기하고 설교도 그렇게 하면서도 이게 체험 화되지 않고 늘 묵직하게 남아있었던 게 있었어요. 신학교 다니면서. 뭐냐 하면, 애굽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너는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라. 하는 대목이 시편에 나와요. 이사야에도 나옵니다. 애굽의 말들과 애굽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너는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라. 그 대목 기억나시지요? 그 대목이 앞뒤가 안 맞아요. 애굽의 말과 애굽의 힘은 실제적이고 실질적입니다. 진짜 군대가 와요. 진짜로. 실제로 군대가 와가지고 그래, 뭘 도와줄까? 온다고요. 그런데 하나님의 의는 실제로 나타납니까? 안 나타나잖아요. 이러면 이해는 돼요. 절에 가서 부처의 힘 말고, 교회 가서 예수의 힘을 믿어라. 이러면 이해가 되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절에 가지 말고 교회가라는 말이 아니고 절에 갈까, 교회 갈까를 따지는 너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이거든요. 이해되십니까?
내가 예수를 믿어서 도움을 얻을까, 아니면 부처를 믿어서 도움을 얻을까, 아니면 실제적으로 청와대에 있는 우리 친척의 도움을 얻을까, 라는 그것을 의지하지 말라는 거예요. 왜냐 하면, 애굽의 힘을 의지하겠다는 것은 (잘 들어보세요.) 평소에 나는 애굽 같은 모델을, 타인을 큰 타인, 애굽 같은 모델, 욕망을 통해서 나는 저렇게 애굽처럼 됐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그 주체를 내가 의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굽이 오니까 나하고 죽이 만나요. 이해가 된다니까요. 그런데 애굽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라는 말은 평소에 우리는 자기 자신의 선택과 결정과 지혜를 의지했다. 자기 의를 의지했다, 라는 것을 추궁하시면서 하나님의 의가 찾아오는 겁니다. ‘통 밥 굴리지 마.’ 그런 뜻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약속대로 너를 다룰 뿐이지 네가 하나님을 다룰 생각하지 마라, 너한테 다루어질 하나님이 아니야. 어떻게 예수 믿어가지고 천국에 높은데 가겠다. 그 모든 인간들의 이구동성 동일한 생각이 십자가 이야기, 고난 받고 버림받아 죽는다는 그 한 마디에 어떻게 그렇게 다 뿔뿔이 흩어졌는지 기적이에요. 정말 신기하기 짝이 없어요.
따지고 보면, 우리가 만약에 그 현장에 있었더라도 십자가 옆에 얼쩡거리다가 괜히 잡혀가지고 같이 주님과 함께 옆에 있는 꼴을 볼 때, 아이고, 끔찍해라. 강도 둘만 옆에 있지 강도도 아닌 게 옆에 있어서 4번째 십자가에 올려갈 것 같으면 혹시 들킬까 싶어서 달아나고 싶지요. 몰래 갔다가 들킨 사람 있습니다. 횃불 쬐다가 아가씨한테 걸려서 ‘베드로 아저씨, 같이 한 편이죠?’ ‘어데? 아니야.’ 몰래 갔다가. 그러니 성경에 나오는 마태복음 16장에 나오는 그 이야기가 얼마나 실제적이고 현실적입니까? 이게 가만 보니 남의 이야기 아니지요? 우리가 매일 겪는 이야기를 마태복음 16장에서 이야기하고 있잖아요. 매일 겪는 이야기를.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인간과 예수님 사이에 뭐가 계제돼 있다? 바로 권력이 힘이 계제돼 있다.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있다면 인간은 홀로 있는 게 아니지요. 만약에 군에서 영장 나와서 군대에 가라라고 하면 정말 멍청한 사람은 만약 내일 군에 간다고 하면 IQ가 15쯤 되는 사람은 군에 안 갑니다. 왜, 군에 면제된 게 아니고 날짜를 기억 못해서 안 갈 거다 말이죠. 이런 사람에게는 아우라처럼 인간의 주체 안에 인간의 몸에서 그의 힘을 못 느끼겠지요. 이런 것은 비정상적인 사람이에요. 머리가 나빠서 그러니까. 그러나 보통사람 같으면 뭡니까? 영장 나오라 할 때 나라에서 군에 나오라하면 일거에 거부할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누가 나를 욕을 해도 그걸 못 잊는 게 인간이거든요. 인간은 거울 보면 분명히 자기 몸둥아리 있거든요. 거울 보면 자기 몸둥아리밖에 없지요. 그런데 몸둥아리밖에 없는 것이 실제가 아니고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둘러 쌓여있다는 것이 더 실제지요. 어떻습니까? 몸둥아리만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욕하면 기분 나쁘다는 게 있어요? 누가 욕하면 기분 나쁘지요. 욕이 ㄱ, ㄴ이 막 날아와서 나를 찌릅니까? ㄱ, ㄴ이 마구 날아와서 피부를 째요? 아니잖아요. 그냥 욕이라 하는 것은 초속 340m의 음파에 불과하거든요. 같은 음파인데 왜 칭찬이라는 것은 왜 그렇게 기분 좋고, 욕이라는 것은 왜 그렇게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도대체 인간은 어디에 놀아나는 거예요? 도대체.
인간은 육신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육신뿐이 아니죠. 그게 뭐냐 하면, 사회적 힘, 이것을 사회학에서 사회적 정신이라 하는 거예요. 사회적 정신이 한 근에 얼마입니까? 몇 Kg이에요? 정신 한 되에 몇 킬로 나갑니까? 양으로 측정이 됩니까? 안 됩니까? 양으로 측정이 안 되면 우리는 없는 존재거든요. 신이 왜 없는 줄 알아요? 양으로 신의 키가 몇 Cm예요? 양으로 측정이 안 되지요. 측정이 안 되는 것은 없는 존재입니다. 분명히 없기 때문에 안 믿는다고 하면서도 본인은 남이 욕하면 기분 나쁘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인간은 어떤 보이지 않는 아우라, 정신에 휘말려서 있는 겁니다.
이 사회적 정신은 놀랍게도 이게 관습이에요. 관습. 전통과 관습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뭐냐, 관행이고 관습이에요. 놀랍게도 우리는 진리라고 여겼는데 관행이에요. 결혼식에 주례가 있어야 된다. 이건 뭡니까? 관행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례 없이 했거든요. 결혼식 때 신부는 웨딩드레스를 입어야 된다. 그런데 웨딩드레스를 안 입고 결혼식을 했거든요. 이 효리라는 사람이 제주도에서 했거든요. 웨딩드레스 안 입고했다 이 말이죠. 다른 평범한 여자 같으면 평생에 소원이 그거 입는 것이 소원인데, 이게 관행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관행과 관습을 벗으면 자유롭습니까? 안 입는 게 또 관습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바로 이 정신분야에서 이미 이유도 모르는 채 15년 동안 갇혀 있는 올드 보이처럼 아무 이유도 모르는 채 자기는 비 진리 속에 갇혀있습니다. 비 진리 속에. 이것이 바로 이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예수님의 내가 곧 죽고 사흘 만에 고난 받는다. 십자가 이야기를 딱 하니까 베드로 입에서 단박 사탄의 말이 나오지요. 그동안 좋은 관계, 그동안 예수님과 좋은 관계, 베드로야, 믿음 좋더라, 어떻고, 저렇고 네가 반석이 되고 하니까 기분 좋았지요. 그렇게 하다가 갑자기 십자가 이야기 딱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여기서 그러시면 안 됩니다.” 딱 나올 때 그게 바로 “사탄아, 네가 나를 넘어지게 한다.” 그러니 제자들이 사탄의 앞잡이에요.
사탄이라 하는 것은 바로 그냥 등장하지 않고 십자가라는 이야기가 나올 경우에만 사탄은 그 현장에 같이 등장하는 겁니다. 사탄의 음모가 십자가를 삭제, 지워버리는 거예요. 고유의 업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마귀한테 놀아나는 것은 뭐라 했습니까?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주체. 여러분이 기억나는데 더 해 봅시다. 이 주체라는 것은 내 몸에서 바로 나가지 않지요. 내 몸의 육신이 있고 육신에서 뭐가 나온다 했습니까? 육신에서 욕망이 나오고 욕망이 그냥 주체가 되지를 않지요. 뭐를 거칩니까? 주변에 욕망이 꽂이는 이상적인 모델을 찾아서 경유해서 내 주체가 되는 겁니다. “아, 나도 저렇게 기타 한 번 잘 치고 싶다.” 음치 같으면 “아, 나 언제 한 번 노래 잘 불러볼까?” 꼭 내가 기대하는 욕망을 따라서 그 사람을 끌어당겨서 그 다음에 노래잘하는 내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그게 내 주체가 되지요. 그러니까 나와 주체사이는 항상 괴리가 있어요. 간격이 있으면서 거기서 뭐가 피어오르는가 하면, 소망, 꿈, 비전, 이게 피어오릅니다. 자기 욕망을 못 채워서 환장한 존재들. boys be ambitious, 자기 욕망을 주체 못하고 환장한 겁니다. 이 욕망은 내 좋아라고 하는 겁니다. 벗어날 수가 없어요.
누가 설교를 잘하잖아요. “아, 내가 그 설교 미리 했어야 되는 건데.” 항상 그러한. 큰 교회 앞에 지나가면 언제 목회해서 큰 교회 예배당에서 해보나? 얼마 전에 제 아내가 어떤 교회 사모님하고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하루를 늦췄어요. 왜 늦췄는가 보니까 안동 그 동네에 시찰 회에서 놀러간다고 등산 간다고 하는 거예요. 시찰이라 하는 용어 있잖아요. 얼마나 반가운지. 얼마 만에 들어보는 용어인지 몰라요. ‘시찰회’ 시찰, 관찰 한다는 거예요. 교인들의 행동거지에 대해서 모든 관찰하는 노회의 단체에요. 죽 교회를 다니면서 노회차원에서 감사, 감찰한다. 이 이름이 시찰 회예요. 기존 교회 다 그래요.
진짜 교회는 네 교회, 내 교회 없어야 돼요. 내 교인, 내 교인이라는 것은 주님한테 욕보이는 겁니다. 세상에 내 교인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교인밖에 없지. 무슨 내 교인이 있어요? 이게 막 통용되고 있다고요. 목사 지도 양이에요. 김양인지 최 양인지는 모르겠지만, 양이에요. 지도 양인 주제에 뭐가 내 목자가 있고 내 양이 있고 왜 있어요? 주님의 양인데.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한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주님의 양을 자기 양처럼 삼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베드로가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전서에서는 그 목자 이야기를 하지요. 큰 목자 양이지, 네 양 아니라고. 그렇게 한 이유가 베드로가 이미 마치 내 양인 줄 알고 착각했다가 혼나지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니까 주께서 아십니다. 세 번씩이나 이것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난 뒤에 그렇다면 너는 내 양을 맡아라. 왜? 너는 그 양을 너의 양이라고 하지 않을 인간이기 때문에.
목사에게 주어진 행운이 있다면 딱 한가지입니다. 자기 받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자기 받으면 됐지, 예수님의 구원 받으면 됐지, 다른 욕심 부리면 안 됩니다. 그러니 네 양 내 양 숫자 세고 있을 것이 안돼요. 그래서 여기에 240 페이지 보면 『앞잡이 노릇하면서 형식의 양상이나 제도를 붙들고 실족한다.』그러니까 이 악마의 앞잡이 노릇하면서 악마는 영적인 것이 안 나타나잖아요. 그럼 나타나는 게 뭡니까? 악마가 있다는 것으로 나타나는 게 뭡니까? 형식의 양상이나 뭘 붙든다? 제도지요. 형식의 양상이나 제도, 이게 커지면 국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국가는 짐승의 모습이 요한계시록의 국가가 되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교회제도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과감하게 외친 사람이 있어요. 존크립위클리프이라는 사람이 영국의 총장이지요. 천주교에 대항했어요. 13세기 때. 교회의 성례식이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느냐, 성경말씀이 구원하지 교회제도가 구원하지 않는다. 작살났지요. 죽었지요. 그 다음에 그 사람 사상이 퍼지고 난 뒤에 후스라는 사람이 등장했고 후스라는 사람이 등장해서 비슷한 사상을 이야기했고 거기에 핍박하니까 도망가서 헝가리 보헤미아 쪽에 가서 후서공화국을 세웠습니다. 나라를 만들었어요. 그러다가 쫒아온 프랑스나 다른 천주교 군사들에게 몰살당했지요. 그런 것이 바탕이 되고 난 뒤에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 거예요. 비텐베르크 대학교 정문에다가 95개조의 반박을 해놨어요. 그게 제도와 양식을 붙들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루터가 루터교회 교단 만들고 칼빈이 개혁교회 만들어 놓으니까 그 다음 어떻게 됐어요? 분명히 제도와 양식을 안 만든다 해놓고 그렇게 했던 고걸 이용해서 또 제도를 또 만들어 놨어요.
그러니까 이게 이 세상 끝까지 마귀가 이겨요. 끝까지 마귀가 우리를 이깁니다. 그러니까 내가 마귀를 이길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 맡겨야지 내가 이길 생각 한다면 그 자체가 마귀의 시험든 겁니다. 『이 거룩한 말씀에 진리성에 구멍을 낸다.』 구멍을 낸다는 말은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에 진리가 오게 되면 진리 안에는 중간에 공백이 드러나요. 중간에 텅텅 비어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진리가 이 땅에 오게 되면, 그 중앙에는 구멍이 뚫렸어요. 십자가 구멍이죠. 그 구멍에 보면, 산 사람은 거기에 들어갈 수 없는 구멍이 있어요. 그게 뭐냐, 십자가 죽음이죠. 죽어야 갈 수 있는 곳이죠. 죽어야 갈 수 있는데, 죽어야 갈 수 있다면, 산 사람은 갈 수 없다면, ‘그럼 우리는 언제 구원받지요?’ 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지요.
진리가 구멍을 뚫어놔요. 뚫어놓으면 이게 십자가 죽음이거든요. 산 자는 여기에 들어가지를 못해요. 그러면 방금 산 자가 들어가지 못하면 아무도 구원 못 받겠네? 여기서 나온 영이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들어서 십자가 안에 같이 있게 만듭니다. 죽은 자로서 살게 함으로서 우리는 나의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죽었다, 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겁니다. “나는 이래도 죽었어.” “내가 그리스도 십자가와 함께 죽었나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누가 나보고 “너 살았네.” 하거든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너 살았잖아.” 하면 “그리스도가 사는 걸 너는 보고 있다.” 고 이렇게 이야기하라.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항상 중앙에 구멍이 있기 때문에, 왜 구멍이 있느냐, 아무도 진리에 접근하지 못하면서도 진리는 진리대로 활동하기 위해서, 접근하지도 못하는데 그러면서도 사람들을 진리를 주기 위해서는 안에 집어넣는 그런 일을 하는 거예요. 요거 좋은 예가 뭐냐 하면, 각설탕 집어넣어서 막 돌리면 뭐가 되지요? 솜사탕 되지요. 솜사탕 되는 걸 보게 되면 중앙에 뭐가 있지요? 텅텅 비어있는데 뭔가 아저씨가 발로 밟으니까 뭉게, 뭉게 피어나는 게 있지요. 귀신같은 거. 유령 같은 게. 그걸 막대기 가지고 휘익 저으니까 한 개에 천 원짜리 되지요. 그것처럼 주님이 휘익 저어서 일으킬 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자리입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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