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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가락-70이레 논문(층)131003-27강b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레위기

가락-70이레 논문(층)131003-27강b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70이레 논문(층)131003-27강b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해봅시다. 첫 번째 시간에는 두 층을 유리 층이라고 보고 아래층, 위층이라고 이야기했고 첫째 시간 끝부분에는 인간이 역사를 이해할 때 자기가 일방적으로 잘라버린다. 아이스크림 칸막이 쳤잖아요. 칸마다 잘리도록. 일방적으로 딱딱 끊을 때 그거 누구 맘대로 끊습니까? 자기 맘대로 끊죠. 자기 맘대로 끊었다는 말은 끊을 때는 그냥 끊는 게 아니고 자기가 찾고 싶은 의미라든지 찾고 싶은 그런 가치가 따로 있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잘라내는 겁니다.

그걸 자기 정당성이라 합니다. 역시 나는 내 해석이 옳아.‘라는 식으로 모든 걸 잘라버리니까 이건 사람마다 자르는 게 다르죠. 그래서 238 페이지 밑에서 6번째 줄에 보면 『흐름의 연속성을 관찰자가 정지시킬 수가 없는데』요 한마디에 그 많은 신학박사들 어떤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 반박 못합니다. 요 한마디 흐름의 연속성을 누가 정지시킬 수 없다? 관찰자가 정지시킬 수 없죠.

KTX 기차가 막 지나갑니다. 밖에 있는 사람이 ‘야! 기차 빠르다.’고 생각하는데, 그 빠르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기차 안에는 지금 전화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 서울 가서 만나자.’ 딴 생각하고 있다고요. 만약에 ‘어, 기차 빠르네.’ 하면 안에 있는 사람도 다 같이 빠르다, 같이 생각해줘야 되는데 빠르다고 보는 것은 옆에 서있는 사람은 그렇게 보고 막상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각자 자기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어떻게 그걸 평균적으로 자기 맘대로 ‘여러분, 다 저처럼 빠르다고 생각하죠?’ 어떻게 그걸 동의를 구합니까? 안 되죠. 자기 맘대로 박스에다 집어넣고 자기 맘대로 이걸 같은 흐름이라고 일방적으로 거기다가 브랜드를 붙여서 일방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이건 반칙에 해당되는 겁니다.

인간은 무엇을 이렇게 곽을 짜고 이렇게 해석하기 위해서 뭔가 기준을 할 때 막상 그 흐름을 주관하시는 분 생각하고 너무나 판이하게 자기가 원하는 위주로 그런 식으로 간격을 짜나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밑에 『이럴 경우에 윤곽만 포착된다.』 윤곽이란 말 알죠? 흔적. 『윤곽 면에 포착되지 않는 유동성은』윤곽만 이렇게 틀을 가지고 짜고 나머지는 전부 다 똑같이, 똑같이 보니까 위에서 볼 때 요 안에 들어있는 것은 똑같이 보잖아요. 그럼 이걸 옆에서 보게 되면 이게 막 활동하고 있다고요. 활동해도 이걸 위에서 보게 되면 그저 점으로 똑같이 보이게 되죠. 사람들이 이런 식 이예요. 옆에서 보면 다 남들이 다 중요한 거예요. 굉장히 중요하잖아요. 전기가 통하기 위해서는 이번 여름같이 전력량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밀양에다 송전탑을 세워야 되는 거예요. 싹 밀어서. 그런데 밀양 주민들 보면 돈 억만금 줘도 고향이 떠나기 싫은 거예요. 그런데 위에서 보면 이처럼 싹 ‘전부 다 나가. 평균해서 다 나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뭐가 빠져나가느냐, 일방적으로 다 이렇게 만약에 밀양 송전탑 현장이라면 싹 밀어서 송전탑 세워버리니까 뭐가 빠져나갔어요? 요 세상 인간의 추억과 기억 경험들이 다 빠져나갔죠. 이걸 가지고 제가 유동성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물처럼 사라져 버렸다. 인간의 진짜 알맹이는 미꾸라지처럼 손에 잘 쥐어지지 않고 쫙 빠져나가서 물을 손에 쥐면 빠져나가잖아요. 진짜 하나님의 뜻은 우리 손에 잡히지 않고 다 흘러버렸다. 나머지 축축한 거 가지고 우리는 주의 말씀 이렇다고 주장하니까 이 주장이 옳은 주장이냐 이 말이죠.

거기에 대해서 신학박사들 여기서 반박해 보라 이 말입니다. 기껏 반발한 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모를 리가 있어요? 답변이 궁색하니까 그들은 체면이 있고 전부 다 독일 박사들이니까.

그 뒤에 봅시다. 『동사로서 포착한 것은 운동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윤곽이다.』따라서 동사로서 해야 될 것을 가지고 명사로 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한계인 거예요. 움직임을 어떻게 포착합니까? 지금 이 순간 윤 집사님 마음을 내가 알 수가 없죠. 살아있다는 것이 그냥 곱게 사는 법이 없어요. 0.1초 1초 사이에 생각 다 달라요. 그냥 튑니다. 기름 있는 프라이팬에 물방울 하면 물방울이 미친 듯이 튀잖아요. 진짜 인생은 미친 것 이예요. 막 미친 듯이 우리 인생은 튀어요. 안 그런 척 자꾸 잠재우니까 그렇지 꿈꾸면 그게 우리가 미쳐서 모든 게 튀어요. 그걸 어떻게 잠재울 수 있고 종잡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그만 두세요.’ 한다고 우리의 감정이 그만둘 사람입니까?

인간의 이성보다 뭐가 앞선다? 감성이 더 강렬해요. 언젠가 이야기했죠. 누가 밉다. 누가 미운 걸 어떻게 그걸 논리적으로 설명합니까? 그냥 미운데. 그리고 반대로 이야기합시다. 누가 좋다. 우리가 이럴 사이 아닌데. 이럴 사이는 좋아지는데 이럴 사이 저럴 사이고, 이럴 사이가 좋은 게 안 좋을 수가 없는 게 아니잖아요.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 것은 이성이고, 이러면 안 되든 되던 간에 좋다. 사랑스럽다. 이건 어떻게 숨길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다윗이 밧세바가 좋다. 아니야, 저는 남편이 있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냥 좋은데. 그걸 쉽게, 하나님이 그런 감정을 주셨다 하면 간단한 문제에요. 그냥 하나님께 맡기세요. 하나님이 주신 감정은 오래 가지도 않아요. 다음날 무슨 감정을 요구할지 몰라요. 그래서 사랑했다가 미워하고 미워했다가 사랑하고, 인간은 프라이팬 위에 있는 물방울처럼 다다다닥 튑니다. 그걸 이렇게 대충 잡아서 나는 ~~다. 명사로 꽁꽁 철사가지고 동여매니까 우리 감정은 질식을 하죠. 질식하니까 폭발하게 되면 나중에 무슨 짓을 할지 모르죠. 우리는 동사도 명사로 만드는 그런 식으로 인생 살아갑니다.

진리는 우리 다섯 손가락 속에 다 빠져나갑니다. 주의 뜻은 우리 손에 잡힙니까? 안 잡힙니까? 잡히지 않아요. 사람이 어떤 의미를 줄 때는 내 것 만들어 놓고 의미를 가해요. 인간의 철학자들이 그렇게 수천 년 동안 연구한 게 기껏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존재라 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 못하고 존재를 뭐냐고 물을 때는 반드시 내 존재가 가서 그걸 내 존재가 저쪽 존재보다 먼저 우선되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물이라 하면 그게 물이 아니에요. 내가 물이라 할 경우에만 나에게 의미로 다가온 그 물이예요. 내가 물이라고 하는 내 존재가 물 존재보다 우선된다고요. 에스라 느헤미야 수련회 할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예수 믿는 게 아니죠. 예수 믿는 나를 믿겠지. 예수님 존재보다 뭐 존재가? 내 존재가 우선 다가가서 ‘이제부터 난 당신을 나의 구주로 믿기로 했습니다.’ 해버리면 그건 예수 믿는 게 아니에요. 예수 믿기로 작정한 나를 계속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래 지속, 흘러가는 것은 우리는 모르고 거기다가 내 발을 디디면 그 지식도 고 발 딛는 고 때 묻은 고 범위만 일방적으로 이건 내꺼야. 라는 일방적으로 내 것 선언하는 그런 식으로 인간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전부 다 자기 밖에 몰라요. 끝까지 자기만 사랑하는 거예요.

성령이 탄식을 합니다. 우리가 시험 치면 무조건 0점인데 자기 스스로 90점, 80점, 100점 맞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채점하시는 주님은 같잖아서 할 말이 없어요. 이레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거기다 십일조 했습니다. 구제 했습니다. 자기가 자기 점수를 채점해요. 주님이 와서 심판 주거든요. 같잖아서 ‘아이쿠, 인간아, 너 0점이야.’ 옆에 있는 자가 ‘주님 저 0점이예요.’ 하니까 ‘너 100점이야.’ 주님의 채점 기준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데, 신학박사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죠.

사람은 주체가 고정돼 있기 때문에 흘러가는 모든 것도 고정화 시키는, 사람이 말을 할 때는 고 순간만큼은 딱 떼 와서 고정화 시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변화가 흘러가잖아요. 흘러가는데 우리가 이걸 따라잡으려면 우리 주체가 해체돼야 돼요. 해체돼서 이 흐름에 참여해서 같이 흘러가면 되는데, 우리는 절대로 해체되지 않고 알맹이가 돼요. 딱딱한 돌처럼 알맹이가 된다고요. 필요한 걸 요기서 요기가지 딱 떼요. 시작과 끝 지점을 떼서 인식론적이라 했죠. 떼서 이걸 명사화 시켜서 요 안의 있는 내 의미를 똑같이 부여해서 딱 잡아당겨서 내 것이 됩니다. 내 것이 되면 요 안의 흐름은 이 선에 있을 때 본래 의미가 있는데 요걸 딱 떼서 나한테 왔기 때문에 내 자체가 죄인이잖아요. 내가 문제성이 있잖아요. 요걸 딱 떼서 나한테 집어넣으면 이 들어온 이것도 여기 있을 때는 문제가 없던 것도 내 안에 이건 내 의미가 돼 버리면 이 안에서 같이 썩어버려요.

예수님이 예수님 세상 일 때는 괜찮은데 예수를 내가 믿으면 그 예수가 나로 인하여 오염돼서 이게 시어버립니다. 밥이고 음식이고 다 곰팡이 핀 엉터리 예수가 돼요. 이 육체가, 이 주체가 자기를 스스로 포기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꿈속의 나는 항상 30대라고. 30대 봤던 풍경들이 나와요. 어릴 때 놀던 동산에서 ‘저 동산 뒤에는 뭐가 있을까?’ 할 그때는 내가 열여섯 살이 돼요. 얼굴 모습도 열여섯 살이 되고. 어릴 때 그 정경이 꿈속에는 꿈이 아니고 현실이죠. 깨보면 꿈이지만. 현실 속에서 내가 뒷동산에서 사랑하는 순이와 연애할 때 그때 소나기 와서 같이… 그러한 일이 있을 때 그때가 꿈에 나타난다면 나는 아직도 열여섯 살 청소년 이예요. 아~주 아름다운 거예요. 그때는 ‘내가 스무 살 되면 뭘 할까?’ 꿈속에도 고민해요. 깨보면 벌써 60이 넘었고 70인데. 20대가 훅 지나가 버렸어요.

우리 어머니가 지금도 매일 아침에 오셔서 ‘얘야 너희 아버지 돌아가셨다고 동생한테 전화 와서 서울에 계신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이게 흐름이 정지됐거든요. 머릿속에 아버지 돌아가셨던 그 시절의 주체가 자기 주체대로 계속 유지하다 보니까 늘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가 봐야 된다는 거예요. ‘돈 줘. 차비 줘.’ 돈 다 뺏었거든요. 돈 주면 가다가 길 잃어버리니까. 제 아내가 지갑 채 뺏어버렸어요. 잘했어요. 나는 생각도 못했는데. 길 잃어버릴 염려가 없어요. 버스 타면 돈 줘야 되니까. 아직까지 택시 타는 개념까지는 없어요. 그러니까 계속 아버지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이게 침해 걸린 환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가 꿈속에도 이미 그런 경향들이 보입니다. 이 문제 어떻게 해결할 거예요? 예수 믿어도 그렇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흐름과 함께 있을 때 예수지, 예수 믿는 순간 내 안의 예수는 엉터리 예수인데 죄 안에 오염된 예수인데 어떻게 해요? 40년 믿어도 헛 믿은 건데 어떻게 할 거예요?

성령에 속한 사람이란 말을 설명해 드릴게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쳤잖아요. 참, 자식 죽을 뻔 했죠. 옆에 그때 수풀에 수양 안 갇혔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진짜 잡을 뻔 했어요. 하나님께서 ‘아서라 멈춰라.’ 해서 하나님의 음성이 왔고 그 다음에 이삭이 개입했다 이 말이죠.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이겁니다. 자기 자신의 믿음을 안 믿게 된 거예요. 왜냐 하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나를 제쳐놓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이 믿게 된 거예요.

아브라함은 그 전까지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다루느냐 생각했는데 이제부터는 내 손으로 이삭을 잡았기 때문에 이삭은 이미 내 안에 죽은 자식이 되고 그 나한테 죽은 자식을 하나님께서는 그 죽음 안에서 이삭을 어떻게 다루는가를 자기는 바라보고 있는 입장인 거예요. 그래서 이삭이 잘 되면 자기가 복을 받고 이삭이 못 되면 자기는 복을 못 받는 입장인 거예요. 자기 자식 이삭이 자기 복의 원천이 되는 겁니다. 이삭은 나중에 야곱이 복의 원천이 되고 자기는 자기 구원으로부터 물러서서 은퇴를 선언해 버린 거예요.

이걸 가지고 아브라함은 ‘믿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나를 절대로 안 믿습니다. 주께서 나는 나 믿지 말라고 어떤 사건을 줬는데 그게 뭐냐, 죽었다 살아난 흔적, 윤곽을 우리한테 넘겨준 거예요.

오늘날 성도가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가 생각 날 때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다른 복음으로 구원받을 믿음을 준 적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자꾸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와 십자가 못 박아 죽인 것 외에 다른 것은 일체 잊어버려라. 네가 언제 은혜 받고 네가 언제 전도하고 아예 잊어버려라. 그런 것은 다 일단 너한테 오면 너는 하나의 오염돼 버리니까, 나는 언제 뭐했다. 그게 나의 주체화 돼 버리니까 주체화 될 수 없는 것은 뭐냐 하면 그건 죽음 밖에 없어요.

십자가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을 죽였잖아요. 내가 죽인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나 말고 예수님께 일어난 사건, 십자가가 네 눈앞에 보이는데 누가 너를 꾀더냐. 말하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하루하루 살면서 평소에 육신대로 우리가 주체가 돼서 나한테 무슨 이익일까, 그것만 생각하다가 성령이 오게 되면 십자가에 이미 예수님 죽어서 이미 구원받았는데 오늘 과제를 이렇게 다 한다. 오늘 소득이 얼마다. 아! 자칫 내가 여기에 빠지면 내가 세상에 대한 집착을 아직도 이것 가지고 울고불고 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구나. 그 짧은 순간이나마 그런 성령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 소득이 얼마냐 여기에 울고불고 하는 내가 그런 입장이 아니지, 십자가로 이미 용서받았으면 용서받은 걸로 기뻐해야 될 텐데. 그 순간 성령이 역사하게 되면 그런 새로운 자기 부인하는, 자기에 대해서 잊어버리는 그런 기쁜 순간이 와요. 오래 가지도 않지만, 기뻐하고 있는데 ’엄마, 성적 100전 맞았어.‘ 하면 ’아이고, 고마워라.‘ 갑자기 은혜 받았다 하다가 ’내가 우산 들고 마중 나갈게.‘ 하면서 ’우리 애가 이번에 100점 맞았대.‘ 가는 사람 아줌마보고 이야기한다고요. 갑자기 주님 십자가보다도 ’아! 내가 예수 믿으니까 또 우리 애 공부 잘하게 해줬구나.‘ 또 갑자기 주체로 연결된다고요.

날마다 성령께서 탄식하면서 기도해 준 덕분에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래서 이 논문의 주제는 절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말자, 그 내용인데 그런데 그게 터무니없고 그렇거든요. 그런데 진짜 성령 받은 박사라면 이 내 말에 어떻게 해야 돼요? 동의하면 되는 거예요. 간단한 거예요. ‘당신 말 다 맞습니다.’ 이러면 되는데.

성령 받았으면 신학 박사 따겠어요? 성령 받았으면 박사를 따겠느냐 말이죠. 네? 아이참, 그 박사 왜 따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뭐 교회서 박사 딸 수도 있겠죠. 교회 하다 보니까.

그 다음에 238 페이지 봅시다. 『동사로서 포착한 것은 운동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윤곽이다. 곧 잠정적 계기이다.』이게 뭐냐 하면 잠정적 계기라 하는 것은 일시적인 나한테 의미로 주어졌을 뿐이다. 송아지가 다리가 몇 개입니까? 4개죠. ‘송아지야, 다리는 4개구나.’ 하면 송아지가 하는 말이 ‘그걸 물으라고 내가 이야기하던가?’ 이렇게 나오면서 ‘왜 쓸데없이 4개인지 3개인지 그걸 당신이 왜 간섭합니까?’ 이렇게 나오죠. 그러니까 이건 일방적인 송아지 다리가 4개라는 게 진리가 아닙니다. 상대방에게 물어봐야 돼요. ‘송아지야, 너도 인정해?’ 이렇게 돼야 되는데 다리가 4개라는 것은 인간들이 3개짜리, 4개짜리, 2개짜리, 일방적으로 자기 좋아라고 분류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인간은 자꾸 자기 인간 위주로 분류해요. 이게 스콜라 철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분류를 해요. 무슨 일체? 삼위일체, 하나님한테 물어보세요. 누가 언제 그렇게 하던가, 지시한 적도 없어요.

『하지만 변화되는 주체는』야, 이거 중요하네요. 이거 참 핵심이에요. 주체가 앞에 뭐가 붙죠. 주체가 변화되는 주체라 했죠. 같이 변화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뭘 따질 때는 자기는 정지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스톱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잘못입니다. 『변화되어지는 주체는 자기가 벌리고 있지 않는 변화 속에서 다른 주체가 벌리는 정체를 밝히는 것을 시도하며』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서 움직이는 것을 주제넘게 건방떨면서 내가 그걸 파악하겠다는 자체가 얼마나 건방진 이야기에요? 이렇게 생각하세요. 주님이 십자가 졌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죄인입니다. 아! 이 어려운 강의가 끝나버렸네. 그만. 주님의 언약 적으로 너는 ‘나는 죄인 중에 괴수’ 한 것처럼 우리는 무슨 변화가 있더라도 그냥 변화가 일어난다가 아니라 그 모든 변화는 우리는 죄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인으로서 우리는 살라고 하는 거예요. 죄인이 되어서 우리가 주님의 증인이 돼요.

다윗이 밧세바와 합궁이 돼야 돼요. 다윗이 요셉처럼 물리치며 ‘당신은 아무리 유혹해도 안 해.’ 이러면 일이 안 돼요. 그러면 주의 일이 안 돼. 다윗이 착하면 안 돼요. 꼴릴 때는 같이 합궁 해버려야 된다니까요. 야 위험한 발언하고 있다. 지금 제가. 다윗은 자기 맘대로 못한다니까요. 그래서 문제가 다윗만 잘못 있는 게 아니고 밧세바가 문제에요. 왜 다이어트 해서 잘 빠졌느냐 이 말입니다. 뚱뚱했으면 돌아보지도 않았을 텐데. 괜히 예뻐서. 예쁜 것도 죄에요. 죄 아닌 게 없어요. 여러분들 주의 하세요.

239 페이지 『고정된 주체가 빠져나가는 주체를 포착해 낼 수 없는 동시에』고정된 주체가 이 주체로부터 죄인으로 하고 우리로부터 빠져나가는 그 주체를 우리가 계속해서 주세요. 하고 붙잡을 수 없다. 빠져나가면 그냥 곱게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고 빠져나가면서 우리보고 심판해 버립니다. 이게 변화의 주체에서 진위, 옳고 그름이 판명된다. 이 논문을 분명히 그 교수들이 봤잖아요. 이 대목을 반박해 보라 이 말이죠. 아무소리 못합니다. 주님은 그냥 빠져나온 게 아니고 빠져나오면서 우리보고 죄인이라고 규정하고 빠져나오거든요. 우리가 주님을 지킬 수도 없어요. 뭐 영접하고 나와 함께 있다. 함께 있다고 주께서 함께 있는 것이지, 함께 있다고 해서 우리가 수갑 채워서 이렇게 해서 함께 있는 게 아닙니다.

『곧 계시에 접근하는 순간이 곧 계시로부터 심판받는 순간이다.』야! 글 괜찮네. 느낌 알죠. 이 글 제가 할게요. 다시 봅시다. 계시에 접근하는 순간이 곧 계시로부터 심판받는 순간이다. 이사야 6장,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또는 사도바울은 ‘주여 누구십니까?’ 진짜 서울 안 가본 놈들이 서울 이야기한다. 진짜 서울 가본 욥이라든지 사도바울은 유구무언 이예요. 간통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용서받을 때 주님 앞에 무슨 이야기하겠습니까? 유구무언이라니까요. 그냥 고맙죠. ‘이왕 고마운 거 우리 애 성적 좀 올려주고.‘ 이런 거 없어요. 그냥 고마워요.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일상 가운데 요게 몇 초는 아니지만 이걸 느낍니다. 그냥 고맙다는 거. 이유도 없어요. 이유도 없이 용서받은 거예요. 그래서 그냥 고마운 거예요. 잘 해보려고 하는 것도 없이 그냥 용서받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냥 고마워요. 고맙다가 다리 내려가다 다리 삐어서 고마운 거 사라지고 그런 일이 생길 지도….

그 다음에 봅시다. 정말 내용이 어렵네요. 『사건과 사건 사이에는 무한히 매개하는 사건들이 있게 마련이다.』자, 흐름이 있잖아요. 중지되지 않습니다. 계속 흘러갑니다. 그러면 우리는 최대한 잡는다고 사건을 이렇게 잡았습니다. 잡았는데 요 사건과 요 골 속에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잡고 보니까 요 안에 또 골이 있을 줄이야. 우리는 이걸 동일하게 동질 시켜 버렸잖아요. 그게 실수인 거예요. 딱 여기서 여기까지 했다.

특히 부인네들이 남편한테 바가지 긁을 때 아주 남편들은 미칩니다. 연약한 여인이라서 이렇게 같이 대들 수도 없고 속으로 끙끙 앓는데 한번 적어볼게요. ‘당신 맨날 그렇더라.’ 할 때 요 ‘맨날’ 여기에 남자들은 그만 스트레스가 팍! 옵니다. ‘당신 맨날 그래.’ 맨날 같으면 이건 10월 3일도 맨 날이고 9월 7일도 맨 날이고 이 맨 날이 과..으로 맨 날 조명시켜 봐도 맨날 안 그렇거든요. 그런데 여자들은 일방적으로 맨날 속에다 다 집어넣어버렸어요. ‘아이쿠, 또 당신 맨날 그렇더라.’ 이걸 해명할 길이 없네. 아! 미치겠고 해명할 길이 없어. 그러면 남자들은 어~! 이야기 그만 하고 안 그러면 핑계 대고 소주잔이나..짜증난다고요. 안 그러면 소파나 차든지 아니면 TV에 야구는 누가 2등 하는지 엘지인지… . '당신 맨날 그래.‘ 아! 그 두 자에 남편 하루 행복이 다 날라 갑니다. 왜 아내는 남자를 평균화 시키느냐 말이죠. 나는 나름대로 노력하는데 왜 평균화 시키느냐 말이죠.

여기 보면 『이 사건들의 평균치를 추정하는 것으로서 진리로 삼을 수는 없다. 등질성…』등질성이라 하는 것은 동등하게 질로 똑같이 모든 사건을 완전히 밀어붙여서 똑같은 상황으로 동질화, 『등질성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주체 인식을 확립하기 위한 농간이요, 전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떤 기호들의 연쇄가 언표가 되기 위한 둘째 규정은』언표가 되기 위한 둘째 규정은 뭐냐 하면 기호가 연결된다고 의미가 생기지 않거든요. 그걸 의미화 되려고 만드는 걸 언표라 합니다. 그냥 글자,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여기에 ‘간하베’ ‘이 중에’ 그 다음에 ‘이 땅에’ 그 다음에 ‘구비 조건’ 의미 안 통하죠. 이렇게 글자만 나열됐잖아요. 그걸 하려면 순서와 조립을 해야 되잖아요. 그렇죠? 글자라는 기호가 이게 의미 있는 언표가 되려면 거기에 주체의 농간이 개입돼야 된다 이 말입니다.

쉬운 예를 들면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오늘 하루를 행복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가 ‘참, 내가 행복할 자격도 없는데 뭐로 바꾸지?’ 할 때 이미 주체의 농간이 들어간 거예요. 주님께서는 ‘놀고 있네. 그거 빼고 그거 집어넣는 게 뭐 의미 있다고.’ 우리는 기도하면서 멋지게 기도하는 자기 주체의 야심과 야욕을 우리는 떨쳐버리지 않습니다. 인간은 꿈틀거렸다 하면 펄펄 썩은 냄새가 나게 돼 있어요. 기도라는 걸 통해서 찬양을 통해서 썩은 냄새가 동반해서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어떤 기호들의 연쇄가 언표가 되기 위한 둘째 규정은 그것이 주체와 어떤 일정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이다.』이말 이예요. 나의 의미가 맞아야 한다 이 말입니다. 『즉 기호들의 계열은 대상 세계만이 아니라 주체들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어야만 언표로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어떤 기호들의 계열은 쉽게 하게 되면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자, 여기 노트가 있으니까 예를 들게요. 여기는 책과 노트가 함께 있습니다. 딱 이야기하는 순간 ‘책과 노트가 함께 있단다. 스스로 움직여서 짠’ 이게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그런데 우리는 책과 노트가 함께 있습니다. 이야기함으로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노트와 책이 떨어져 있음에도 이게 이렇게 연관됐다고 제발 내 말 좀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무한한 사건이라도 사람이 인터넷에 댓글을 어떻게 다느냐에 따라서 그 인간을 조져버리는 거예요. 사람 하나 조지는 게 여사 아니거든요. 이쪽 사건과 이쪽 사건이 연관이 안 되는데 누가 와서 그 사건이 연관이 있다고 인터넷이 떠버리면 그 사람은 나중에 어디 가서 취업도 못 할 정도로 인간 명예 훼손돼 버려요.

어떤 여자 배우가 잠시 안대하고 나오면 ‘저거 남편한테 얻어맞은 모양이다.’ 이런다고요. 다래끼 난 건데, 남편한테 평소에 폭행하는 남편한테 얻어맞아서 여배우 나왔다고 하면 그게 미장원을 통해서 계속해서 퍼져나간다 말이죠. 그 뜻 이예요. 그럼 목사님, 그걸 쉽게 하지, 쉽게 하면 방금 이야기한 책이 이만큼 두껍잖아요. 그걸 간단하게 압축해서 이렇게 집어넣는 겁니다. 설명해도 어렵다 정말.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 했느냐 하면 70이레가 시간이고 70이레가 어떤 사건을 의미할 때 그 사건의 주체가 접근하면서 이런 오류들이 발생한다는 것을 왜 자꾸 눈 감고 아웅 하는 식으로 그걸 왜 모르는 척 하느냐 이 말이죠. 그래서 앞에 나오는 간하베, 이 희락, 행스텐베르그, 영, 카일, 몽고메리, 칼빈, 최 만수, 전부 다 같은 거예요. 70이레는 어느 사건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사건입니다. 이런 게 없다 이 말 이예요.

그러면 당신 뜻을 뭐냐, 70이레는 누가 다룬다? 우리가 관찰해서 파악하는 게 아니고 70이레는 예수님께서 70이레를 이루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걸 파악 못하면 우리는 안 되잖아요. 70이레 파악 못한다고 지옥 갑니까? 70이레는 파악하지 말라고 70이레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 소리 듣고 계속 파악해 나가죠. 70이레 파악하면서 우리는 뭘 느끼느냐 하면 성도는 파악하고자 하는 이것마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십자가를 통해서 알아야 돼요. 십자가는 몽땅 죄거든요. 십자가 알고 하는 짓도 몽땅 소급해서 죄가 되는 거예요. 70이레 있다고 그거 연구하고. 연구하고 논문 쓰고 그것이 십자가를 아는 사람 같으면, 성령 받은 사람 같으면 그것마저도 뭐라고 한다? 몽땅 죄예요.

그러면 박사 학위를 받는 건 아닌데 뭐가 나빠요? 박사 학위를 받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라고 우기는 그것이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저보고 강의하면서 혼자 말로 궁시렁 거리는데 그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는 거예요. 그런 건 녹취 안 해도 되는데, 설교하면서 그런 것도 있거든요. 그냥 못 들은 체 하세요.

그 다음에 봅시다. 『70이레 예언을 알려주시는 하나님은 일단 다니엘의 몸에게 주셨다.』 야, 이거 참 어렵다. 70이레를 주면서 ‘다니엘아‘ ’예‘ ’해석해라.‘ 이게 아니고 70이레를 주신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몸도 주신 거예요. 몸도, 몸도 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생각할 때 몸부터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나면, 생각, 생각, 생각부터 내 생각의 재주를 발휘하려고 설칠 거죠. 자기 몸에 문제 있다는 건 생각 안하고 ’하나님이여, 제 생각이 참 건전하거든요.‘ 요거부터 자랑 질 하려고 먼저 덤비죠.

내 몸은 어떠냐 하면 밥 안 주면 삐지는 몸 이예요. 세포가. 아프면 짜증내는 몸 이예요. 우리가 생각을 건전하게 한다는 것은 사실 건전한 게 아니고 얼추 밥이 들어갔고 날씨도 최고 기온 18도쯤 유지됐다 그런 뜻입니다. 지금 37도 될 것 같으면 우리 생각이 ‘아이 씨, 더워라.’ 하고 이렇게 되죠. 생각, 생각이 좋은 생각 안 납니다.

애들을 소싸움이나 시장에 엄마가 애들을 데리고 가면 엄마한테 이걸 부탁해요. ‘엄마, 사람들 왜 모였는데?’ ‘저 안에서 마술 꾼이 마술하는데 재밌어.’ 하면 ‘엄마, 그럼 보이게 해줘.’ 그러면 엄마가 애를 팔로 바짝 들어서 올려줄 때 재미를 느끼죠. 그런데 엄마가 팔을 놔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떨어지겠죠. 뭐가 떨어집니까? 몸이 떨어지죠.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게 하기 위해서 뭐부터 듭니까? 우리가 생각, 생각하라는 게 아니고 우리 몸을 바짝 들죠. 주님께서 십자가에 우리의 죄악 된 몸을 품어야 먼저 십자가 부활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주님과 함께 저주, 천벌 받을 몸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천벌에서 벗어난 자유를 만끽하게 되는 거예요. ‘아! 내가 착하게 사는 게 우선이 아니고 천벌 받을 몸을 갖고 있구나.’ 하는 게 우선이어야 돼요. 천벌 받을 몸이 사는 걸 보니까 많이 용서 받은 자가 주님을 많이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다니엘에게는 70이레가 우선이 아니고 70이레는 예수님이 다루고요. 다니엘에게 준 것은 뭐냐, 그냥 몸이나 가져라. 아담의 몸이나 가져라. 이제 육신과 70이레 만남을 통해서 다니엘은 70이레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70이레가 어려워요. 자기 주제 파악을 하니까.

그러면 70이레 해석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70이레는 다니엘의 몸을 관통합니다. ‘이 몸 죽어라.’ 70이레가 창으로 변해서 창이 해석하는 몸을 죽입니다. 찔러 버립니다. ‘이게 죽을 놈이 해석하긴 뭘 해석을 해. 네가 해석할 줄 알아?’ 맨날 흐름, 동사를 명사로 바꿔서 해석할 밖에 안 되는 너한테 의미 있게 해석하는 것밖에 안 되는데 뭘 감히 거기다 도전해.‘ 그런데도 자기가 살려고 도전하겠죠. 70이레가 해석하는 우리를 찔러버립니다. 우리 자신을 죄인으로부터 죽여 버리죠.

그렇다면 죽여 버리는 그 근거를 지금 하겠습니다. 이럴 때 뭐로 하느냐 하면 70, 그 다음에 뭡니까? +이레죠. 이레는 시간의 표현이죠. 시간의 표현인데 이 이레라는 이 이레가 7이거든요. 490년이라 하지 않고 70이레, 70, 이레와 연관시켜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쪽에서 제일 먼저 언급한 대목이 어디 나옵니까? 창세기 1장이죠. 그럼 창세기 1장의 주제가 뭐냐 하면 창조죠. 그러면 70이레 해석은 피조물이 해석하는 게 아니고 천지를 창조했던 창조자만이 해석할 수 있는 고런 내용이 70이레다 이 말입니다. 창조자가 직접 기능시키고 펼쳐나가는 고 시간의 내용이 70이레에요.

그런데 이게 창조의 바탕이기 때문에 결국 창조를 70이레로 표현해도 같은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창조 어떻게 한 줄 알아?’ ‘예, 창조란 첫째 날에는 빛있고.’ ‘아니, 아니, 창조는 70이레로 했어.’ ‘오잉?’ 더 압축하면 모든 창조는 십자가로 창조한 겁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그걸 알아서 한 건 아니겠지만, 어거스틴은 플로티누스란 신플라톤주의와 대결하면서 그걸 거부하면서 사실은 그걸 참고하였지만 거기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신플라톤주의는 창조 세계는 신으로부터 유출됐다. 빠져나왔다 이렇게 돼요. 신으로부터 빠져나오면 창조주와 피조물이 같은 몸이 되기 때문에 이건 동등이 됩니다. 그 창작은 내 안의 창작과 동급이 되는데 어거스틴은 그걸 반대해서 없는데서 새로 만들었다 한 거예요. 무에서 창조가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창조라 하는 것은 무에서 창조했다 하죠. 그건 그전에 무슨 의미를 가지고 다시 보게 되면 새로워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시고 형상을 만든 게 아니고 어거스틴 이야기는 하나님의 창조와 형상은 같이 만들었다고 이렇게 했어요.

자, 그러면 70이레 의미가 뭐냐? 십자가라는 것은 처음부터 만들 때부터 십자가 의미가 담긴 채 만들었다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게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7절에 나옵니다. 처음부터 피 뿌림에 의해서, 피 뿌림으로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천지창조를 한 거예요. 이게 에베소서 1장 4절~7절에는 나오지만 창세기에는 이게 안 나옵니다. 창세기에는 그냥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게 나왔고 그것이 형상이 나중에 예수님이 되거든요. 그러면 합쳐 버리면 처음 천지 창조할 때부터 피조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창조의 본래 목적도 천지창조 안에 이미 포함돼 있었던 거예요.

머리 한번 써봅시다. 만약에 처음 목적이 안 들어가 있다면 창조 자체가 의미가 있다면 여러분, 선악과라는 것은 있으면 안 돼요. 다시 말해서 선악과 있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창조가 취소가 돼 버리죠. 흙으로 돌아가 버리니까. 창조는 영원해야 되거든요. 창조를 위한 창조라면 한번 창조한 것은 영원히 가야 돼요. 그런데 선악과를 앞에 둠으로 말미암아 창조가 취소될 수 있는 요소가 이미 에덴동산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그러니까 ‘이 피조물들아’ 피조물 좋아라고 만든 게 아니라는 뜻 이예요.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만들어졌다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살겠습니다.’ 그런 소리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담이 다른 목적이 있다는 걸 압니까? 모릅니까? 모르죠. 그런데 아담으로 하여금 위반함으로써 진리를 파악케 하는 거예요. 위반함으로써.

사람이 죽음으로써 생명을 알고, 죽기 전에는 생명을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죽을 때 우리는 날마다 생명을 아는 사람만이 ‘나는 날마다 죽어도 좋아요.’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예요. 생명을 알기 때문에.

제가 주일 낮에 그런 예를 들었죠. 양말 한 쪽에 구멍이 나서 한쪽 양말만 버릴 수 없어요. 왜, 이쪽은 멀쩡하더라도 짝이 없으니까. 인간 중심으로 생각했던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 이미 인간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생명나무도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생명나무 따먹고 영원히 살아보겠다. 어림도 없어요. 선악과나 생명나무는 우리 위주가 아니고 피조물 위주가 아니고 누구 위주? 예수님이 하실 일 위주로 해야 되기 때문에 양말 한 쪽 구멍 났으면 둘 다 갖다 버려야 돼요. 너희들이 아는 그 생명나무를 아예 쳐다보지 못하게 가는 길을 차단시켰습니다. 하여튼 인간이 입었다 하는 건 다 갖다 버려야 돼요.

그리고 버리기만 하는 게 아니고 새로 주입되죠. 뭐냐 하면 인간이 무화과나무 잎을 입었죠. ‘어디 이런 걸 입어?’ 하고 벗기면 되는데 벗기지 않고 거기다 뭘 합니까? 가죽옷을 입힘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영원히 죄인으로서 이미 본래 인간이 아니라는 증표를 바운스, 바운스, 빤스 입혀서 확대시켜 놔 버렸어요. 빤스를 입혀서 그 자체가 우리는 이미 본래 인간이 물 건너갔습니다, 라는 표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죽옷이 있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가 못 나도 주님이 주님 되게 하는 그 피조물의 본래의 목표에는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알려주는 겁니다.

불교는 보세요. 자기 도 닦는 게 목적이죠. 유교라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자기 점잖은 체 하는 거. 전부 다 자기뿐이잖아요. 자기 주체뿐이잖아요. 그런데 요새 기독교, 교회도 마찬가지고 자기가 예수님, 하나님 복 따내는데, 자기 세상 적 성공 그거죠.

진짜 복은 어떻습니까? 사도바울이나 스데반 집사의 복은 뭡니까? 모든 게 그리스도 안에서 아니오.가 없고 모든 것이 예가 되는 거예요. 윤 집사님 대구로 이사 가는 것도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우리한테는 섭섭하지만 주님 안에서는 다 예가 되는 거예요.

하여튼 ‘아휴, 짜증나. 이건 내 뜻이 아니야. 이건 하나님 싫어.’ 하는 그것이 그 할 때부터 우리는 바운스를 잊어버린 거예요. 우리 자신이 그런 쨉도 못 된다는 것을 우리는 자꾸 잊어버리는 거예요. 그게 왜냐 하면 우리 몸 자체가 우리 말을 안 들어요. 우리 몸 자체가 이미 곁길로 가고 몸이 말을 안 들어요.

그래서 이 70이레를 두고 다니엘은 생각할 때마다 나의 세계가 아니고 인자가 구름타고 온다는 것. 자꾸 누군가를 부르죠. 구름타고 오시는 분이 나중에 우리 같은 인간을 인자라고 부르면서 자기백성으로 만드는데 그 나라만이 뭐냐 하면, 영생과 관련 있어요. 그걸 다니엘에서는 영원한 나라, 영원한 제국이죠. 구름타고 온다는 겁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이걸 놓칠 리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구름타고 오신다 해서 맨날 구름만 쳐다보고 있어요. 아까 집사님 좋은 질문 했어요. 하나님 일 따로 있고 인간의 일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구름타고 오는 걸 쳐다보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 바리새인들이 그 짓하고 제자들이 그렇게 배반하는 그 모든 짓이 곧 하나님이 하신 일 이예요. 우리가 하는 짓거리 있잖아요. 이 모든 것이 곧 하나님의 일 이예요.

다니엘도 마찬가지에요. 다니엘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70이레의 진척 과정입니다. 우리는 자꾸 창조, 그 다음에 멋있는 걸 생각하는데 바로 지금 이게 창조에요. 주님께서 다루시는 창조입니다. 꼬라지는 이래도 이게 창조에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이런 식으로 죽어야 돼요. 죽음으로 제대해야 됩니다. 꼭 이런 식 이예요.

내 뜻대로 안 되면 불평하고 잘 됐다 하면 주께 찬양하고 이게 바로 주의 일 이예요. 기어이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만드는 주의 일. 우리는 즐겁게 이 길 갑시다. 아까 동영상 할 때 봤죠. 동영상 두 번째 강의에서 그저 재미나게, 홀가분하게, 아무것도 구애받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꼴리는 대로, 진자 더할 나위 없이 막 사는 거.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70이레 그 다음에 뭐가 온다 했어요? 다니엘에게 몸을 주죠. 이제 다니엘 몸과 70이레가 만나는 겁니다. 만나게 되면 다니엘은 70년 포로 잡힌 것을 포기하게 되는 됩니다. ‘이 몸은 이젠 죽어도 좋습니다.‘ 왜, 주의 일은 차질 없게 하자가 없이 하기 때문에. 이제 주께서 하실 겁니다. 나는 손을 깨끗하게 홀가분하게 이 일에 대해서 손을 떼겠습니다. 그야말로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가 자기 모든 일을 포기 했을 때 나머지 작업을 주께서 알아서 처리했습니다.

들에 핀 들풀이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이 아궁이에 들어가기 위해서 들풀이 한 조치는 뭡니까? 그냥 그날 염려는 그날로 족하다고 염려하지 말라는 거거든요. 염려 안 하는 것이 들풀이 해야 될 일이었고 하늘의 참새가 해야 될 일이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친히 기르시나니,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말고 그 나라 의를 구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한테 미련 갖지 말고 그 나라 의가 주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몸을 통해서 발휘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가락-70이레 논문(층)131003-27강b -이 근호 목사.hwp (96.0K), Down: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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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