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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왕의 제사 131025강의이사야

왕의 제사 131025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서경수(IP:218.♡.227.175)

13-10-31 11:15

광주 강의(2013. 10. 25) 47-1

에스겔 뒷부분은 굉장히 복잡해요. 어떤 사건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딱딱한 하나님의 지시가 나옵니다. 45장 1절에 보면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것을 이해하는 기본은, 거룩한 땅을 하나님이 만들어 주겠다는 겁니다.

세상에 거룩한 곳이 있습니까? 교회가 거룩합니까, 내 집이 거룩한 곳입니까, 어디가 거룩한 곳입니까? 이 세상은 전부가 욕망과 욕망의 충돌인데 어디가 거룩한데요? 이 세상에서 거룩한 곳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불가능한 것을 충분히 다 드러내시면서 왕의 땅이 등장해요.

이 그림이 오늘 공부하려는 에스겔 45장의 그림입니다. 하나님이 척량을 했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땅을 주셨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거룩한 땅은 없습니다. 없는데 하나님이 직접 왕이 되셔서 기거하시는 그곳만 거룩한 땅이 돼요.

그러면 하나님이 왜 왕이 되는가? 인간이 왕이 되면 있는 땅도 더러워져요. 인간이 손대면 다 더러워져요.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한 땅을 주는데 조건이 뭐냐 하면, ‘왕을 섬길래, 말래?’ 이것이 조건입니다.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왕과 같이 살면 그 땅은 거룩한 땅, 거룩한 백성이 되고, 혼자 살면 거룩한 땅이 아닙니다.

마치 가난한 신혼부부에게 시어머니가 제안을 합니다. “네가 집 갖고 싶어? 나랑 같이 살면 이 집 줄게.”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떻게 하겠습니까? 집에 탐이 나니까 같이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같이 좀 살아보면 ‘집 없어도 같이는 못 살겠다’는 식으로 나올 수가 있지요.

이처럼 인간은 다른 사람과 같이 사는 것은 힘들어요. 그런 성질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이 땅이 더러운 겁니다. 선악과 따먹고 자기밖에 모르니까 더러운 거예요. 그것을 창세기 6장에서는 ‘하나님의 신이 떠났다’고 하고, 하나님의 신이 떠나니까 홍수라는 심판이 주어지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어요. 이 말을 들으면 ‘영생 얻어야 하니까 성령을 위해 심지 뭐.’ 이렇게 나와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영을 위해서 심는다는 것은 날마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오는 겨울 수련회에서는 창세기를 공부할 생각인데, 창세기를 볼 때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할 것 같아요. ‘복수는 나의 것’ 이것은 영화 제목인데, 인간은 조용히 살지를 않아요. 항상 주변을 향해 복수하면서 살아갑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복수심에 불타지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이 그 제사를 거부했어요. 가인이 곱게 있었습니까? 아니죠. “감히 내 정성을 거부해?” 하면서 복수에 나서지요.

하나님에 대한 보복에 나서지요. 하나님을 죽이고 싶어요. 하나님 죽이는 방법이 뭡니까? 하나님과 연줄이 닿은 사람을 찾아야 하고, 그를 죽임으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제거한 셈이 됩니다. 이 원리에 감춰진 복잡한 선은 언약이 투입되면 전부 노출됩니다. 인간들은 복수의 화신입니다. 이것을 언약이 전부 폭로시킵니다.

이 언약이 구체화되면 언약의 사람으로 전환되는데, 이것이 오늘 강의에서 가정 어려운 부분입니다. 언약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약속이라면 “오늘 몇 시에 만나자.” 이것이 약속인데, 이것은 듣고 잊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을 물체로 만들면 도장(또는 사인)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약속을 사람으로 등장시켜서 구체화 시킵니다.

예를 들면, 아벨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음으로 말미암아 언약이 성립됩니다. 제사를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제사를 받았다는 언약이 담기게 된 사람이 아벨이고, 그 아벨은 하나님 언약으로부터 배재된 자로부터 복수의 대상이 됩니다. 평소에 있던 하나님에 대한 반발 세력이 보복의 대상, 하나님과 연관된 자가 누구인지를 찾고 있었어요.

신에 대한 복수를 누구에게 퍼붓는가 하면, 하나님과 연관된 자에게 퍼붓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전쟁입니다. 세상의 역사는 이 전쟁의 연장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후손’이란 말이 너무 추상적이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잖아요. ‘뱀의 후손’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사의 새끼를 말합니까? 아니에요.

이것을 구체화 시키려면 언약이 투입되어 각각 인격화 되어 구체화 됩니다. 이것 외의 역사는 없습니다. ‘여자의 후손’편이냐, 아니면 ‘뱀의 후손’이냐 둘 중 하나입니다. 창세기 4장 이후에 뱀의 후손은 가인이고, 여자의 후손은 아벨이죠. 여자의 후손은 언약을 품고 있고, 반대편에는 언약을 공격하는 뱀의 후손이지요.

현대 사회에서는 복수를 완화시키기 위해서 스포츠가 있고, 도박이 있지요. 이 전체를 게임이라고 합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게임하다가 끝나요. 게임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지요. 사람은 자신이 승자라는 사실을 느낄 때 살 의욕이 생기고, 패자라고 느낄 때는 따운이 됩니다. 살 의욕이 없지요. 그러나 죽게 되면 그 게임도 끝납니다.

오늘 [전도서 속의 그리스도]책이 도착했어요. 그 책 후기에 이런 말이 있어요. “모든 게임도 끝났다.” 우리는 한 평생 게임을 하다가, 내가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게임기가 되어 귀신들이 와서 나를 주무르며 마음껏 게임하며 놀다가 끄면 우리는 죽습니다. 한 평생 승자냐, 패자냐 이것 따지다가 허망하게 죽고 말지요.

정치에도 야당이 있고 여당이 있잖아요. 이것도 게임입니다. 우리는 대리만족하면서 어느 편에 서기를 원하고. 이것은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도 패가 있어요. 학교라면 교장 편이 있고, 교감 편도 있고. 학급에 학생들도 패가 나눠져 있어요. 반장 선거해서 누가 반장이 되면 그 학생을 지지하지 않았던 학생들이 그 선거에 잘 승복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타고난 본성이에요.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갈등. 이것이 타고난 본성이고 이것이 가정에까지 이어집니다. 아빠 편, 엄마 편 나눠져서 음식을 먹을 때도 나눠집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자체가 평정이란 것이 안 됩니다. 성경적은 용어로 말하면 ‘평안, 화목, 화평, 안식.’ 그런데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잖아요. 마무리 하셨단 말이지요.

마무리 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는 갈등을 일으키고 그 갈등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마무리되어야 하나님이 안식을 해요. 무슨 말인가 하면, 지금 우리는 우리의 행복과 편안만을 추구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안식하고 하나님이 평안해야 됩니다. 우리는 거기에 참여할 뿐이고.

하나님이 안식하려면 하나님이 일부러 두 패로 나눠요. 이 패가 자체적으로 하나가 되면 하나님이 개입할 여지가 없잖아요. 하나님에 의해 갈라진 두 패는 하나님이 손수 개입하셔서 평정하게 되면 영광을 하나님이 독점하는데,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천국입니다. “하나님, 잘 하셨습니다. 뱀은 유황불로 잘 보내셨습니다. 주님이 교통정리 안 하셨으면 영원히 해결할 수 없었을 텐데 주님이 나서시니 교통정리가 확실하네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 양과 염소, 양곡과 가라지를 주님이 개입하셔서 나눕니다. 주님이 개입하게 되면 무엇이 따라 나오는가 하면, 불편한 이 세상에 주님이 유성처럼 개입하면 여기에 같이 품고 있는 개념(단어)들이 있어요. 그 단어 중 하나가 오늘 공부할 ‘왕’과 ‘땅’ 그리고 ‘제사장’입니다.

이 개념은 어디에 붙어 있습니까? 우리가 지키는 개념이 아니고 개입하시는 분에 붙어있는 개념이에요. 이 개념을 먼저 말씀으로 던져놓고 뛰어들거든요. 아이들 놀이를 보면, 사방놀이라고, 돌을 던져놓고 폴짝폴짝 뛰어가서 그 돌을 주어오는 것이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도 먼저 말씀을 던져놓고, 혹은 언약을 던져놓고 찾아가면서 개입해서 모든 것을 평정하십니다. 안식상태에 들어가십니다. 이것을 ‘창조’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창조’와는 다르지요? 우리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을 창조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결과만 있을 뿐이지 누가 개입했는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올바른 창조가 아닙니다. 이것은 이방종교에서 말하는 조물주입니다. 이처럼 성령을 받지 않은 이방사람들이 생각하는 창조는 성경이 말하는 창조와 전혀 다릅니다.

누구를 위하여, 누가 개입해서 창조했는지가 포함 되어야 하나님의 안식과 영광이 파악되는 창조가 됩니다. 그럼 누가 개입했습니까?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예수님이 개입하셨지요. 그게 구약에서는 뭐냐? 언약이 개입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해서 아벨의 제사는 받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당했어요.

창세기 4장만 보아서는 ‘아벨은 착하고 가인은 나쁜 놈이야.’ 이것만 나옵니다. 만약 아벨이 착해서 구원을 받았다면, 선악을 아는 자체가 죄가 된다는 창세기 2장의 원리와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런 점이 좀 어려워요. 착하니까 구원 받았다는 생각은 지옥 갈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것 자체를 동조하는 꼴이 됩니다.

어제 가락교회 강의에서 이런 내용이 나왔어요. “하나님,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떤 여인과 눈이 맞아 바람을 피웠습니다.” 이런 기도를 할 때 주님은 들으시고 “내가 어쩌라고? 네가 바람 안 피웠으면 훌륭한 인간이냐?”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모독하는 악마의 전략입니다. “이번 일만 안 일으켰으면 좋았겠는데, 이런 실수를 했네.” 그러면 그런 실수 안 했다면 좋은 인간입니까?

다윗이 사람을 죽였어요. 그것도 아주 얍삽하게 죽였어요. 어떤 강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라가 불쌍한 종 하갈을 심하게 구박했어요. 그래서 그 구박에 못 견뎌 하갈이 아들 이스마엘과 가출을 했지요. 그런데 가출한 그 둘은 지옥가고 구박한 사라는 천국에 가있어요.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그래요.

이야기가 이상하지요? 이상해도 굉장히 이상하지요. 이 세상을 볼 때 뭔가 뒤집어서 봐야 해요. 성경은 정말 이상해요. 상상이 안 될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사건을 몰고 오시면 지상에 있는 선악과를 먹은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비티] 영화 혹시 보셨나요?

그 영화 마지막 장면에 보면 중국의 우주선이 대기권에 들어와서 타버리는데, 여자 주인공이 탄 캡슐도 같이 타면서 지구상으로 막 떨어집니다. 같이 막 떨어져요. 편대를 이루면서. 이것을 보면서 제가 뭘 느꼈는가 하면, 언약이 개입되면 그 주변에 성경에 나오는 단어들이 같이 편대를 이루어 함께 지구로 떨어지는 거예요. 율법, 땅, 왕 이런 개념들이.

그런데 땅에서는 말씀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해석한다고 바빠요.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이 모여서 ‘이 말씀은 이렇게 지켜야 된다’고 하고, 또 욥의 경우에는 욥의 친구들이 모여 진단을 내리기를 “욥은 분명히 죄가 있기에 벌을 받은 거야.”라고 했어요. 하지만 막상 떨어진 유성 같은 욥이나 성령 받은 선지자 앞에서 이 모든 것들은 그저 복수의 화신들입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런 존재라는 것이 들통 납니다.

이 땅은 이스라엘 땅이 아니고 잠시 빌린 것뿐입니다. 사실은 저주 받을 땅이 이스라엘 땅인데, 에스겔 45장에서는 이 땅에다 축복의 그림을 그립니다. 이 땅 양쪽에 왕의 땅이 있지요. 왕의 땅이 있는 이유가 뭔가 하면, 45장 9절에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의 치리자들아 너희에게 족하니라.”

이 말이 뭔가 하면, 왕의 땅이 있는 것은 왕 직영지가 따로 있음으로 말미암아 왕이 통치한다는 것을 빙자해서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나오는 소산물을 빼앗지 않게 만드는 겁니다. 왕 의 것이 따로 있으면 다른 소산물에 대해서는 욕심 부리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1차적인 목적이고, 더 큰 목적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성읍들이 양쪽으로 무엇의 보호를 받습니까? 왼쪽 끝에도 왕의 땅, 오른쪽 끝에도 왕의 땅입니다. 그런데 이 왕을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면 그 왕 사이에 끼인 땅도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지키시는 땅이 되는 겁니다. 왕의 땅이 양쪽에 갈라져 있고 그 사이에 있다는 것은 철저히 왕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강의 초반에 뭐라고 했지요? “네가 천국 가고 싶니?” 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왕과 함께 살래, 말래?” 이것을 묻지요. 왕과 함께 살려면 천국 가서 살 수 있고, 왕 없이 혼자 살려고 한다면 천국은 끝났다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제가 아주 순한 이야기만 했어요. 이제부터는 독하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 그림은 위에서 본 평면도처럼 되어있는데, 이것을 측면에서 보면 어떨까요? 두 개의 판이 있지요. 첫째 판이 있고, 둘째 판이 있고. 도배를 할 때 어떤 것 위에 도배를 하면 그 밑에 있었던 것은 안 보입니다.

A판을 멸망당할 이스라엘 땅으로 봅시다. 이 땅은 이스라엘이 멸망한 땅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을 숭배한 땅이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우상을 숭배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러니 저주의 땅이에요. 저주의 땅에는 12지파의 규격이 이렇게 안 되어 있어요.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 땅에 있고, 그 위에 베냐민 땅이 있고 ---

이것이 다윗 때에 완성이 됩니다. 다윗은 전쟁을 많이 했기 때문에 피를 많이 흘렸어요. 창조의 하나님은 전쟁 중의 하나님이 아니고 창조 마감 후에 안식이 되어야 하지요. 그 안식의 표시로 솔로몬 아들이 나와요. 우리가 보기에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보이는데, 사실은 다윗 언약의 아들을 이 둘 사이에서 뽑아내요.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 맞습니다. 그런데 다윗 언약의 아들은 솔로몬이 아닙니다. 다윗 언약은 다윗에게 일어나야 될 새로운 판(A판이 아니고 B판)에 의해서 아들이 나와야 됩니다. 그러면 다윗 언약을 위해서 다윗이 어떤 모습이냐? 다윗은 저주 받아야 될 A판을 대신해 줘야 돼요.

그래서 다윗은 간음과 살인을 했어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윗은 이렇게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 받고 천국을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다윗 언약의 효과 때문에 그래요. 언약의 효과가 드러나면 구원 받은 사람은 자력으로 구원 받는 모습이 철저히 망가져야 해요. 언약이 오면 망가지니까 우리가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우리 인생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여 망하게 하옵소서. 천벌 받게 하옵소서.” 하는 순간 마귀는 재미가 없어서 떠나갑니다. 우리가 저주 안 받으려고 발버둥 칠 때 마귀가 달려오고, 내가 벌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길 때 마귀는 떠나납니다. 천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제가 하는 말이 아니고 이미 주기도문에 나왔어요.

주기도문은 처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고”로 시작하지요. 그리고 끝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하지요. 주기도문이 주기도문답게 되려면 우리의 하루 일과가 용서 받아야만 사는 24시간입니다. 주기도문에 의하면 용서 받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왜 그런가?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주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시키면서, 우리에게는 하루치의 양식만 허용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기도를 시킵니다. 우리는 은행에 잔고가 있고 창고에 곡식이 많이 있더라도 주기도문에 의하면 양식이 넉넉히 있음을 아는 채 오늘 밤은 오늘로 끝이 납니다.

죽은 귀신이 나타나서 “애야, 미안하다.”하고 아무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것은 어디에 나오는가 하면 [오로라 공주]에 보면 죽은 귀신이 나타나서 “이 집에 우환이 있다.”는 암시를 주고 사라져요. 이처럼 언약은 유령이에요. 항상 떠서 “네가 사는 이유는 너를 용서한 분이 지금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루하루 일과가 유지된다.”는 것을 알려주지요.

내가 내일도 살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 살 이유도 목적도 없어요. 성령이 찾아오셔서 “너는 주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하시는데, 이것이 안 되면 사는 것이 아니지요. 이런 자는 분노와 복수로 하루하루 살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 되면 주기도문의 내용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려면,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 우리를 살려내고 있는가를 알아야지요. 양식을 주시는데 양식은 하나의 모형이고, 진짜 살려내는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으로 살려내고, 그것을 아는 자가 아버지께 영광이 되고,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개입하신 분은 예수님이고, 그래서 모든 창조는 예수님이 개입하셔서 이 창조는 흘러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화목제물’이라고 하지요. 이 말을 잘못 해석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거리가 벌어졌는데 예수님이 개입해서 하나님과 나 사이가 좋아졌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잖아요. 이건 엉터리입니다. 마귀가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바른 해석은, 우리와 하나님이 화목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죽은데서 살려낸 그 인간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거예요.

나밖에 모르는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죽여야 B판에 합류가 되는 거예요. 합류되고 난 뒤에 B판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된 것처럼 너희도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하나가 된다.’ 이것이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를 죽이시는 분 안에서만 이것이 돼요.

이 오해를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난감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지어 멀어졌으니까 이제 죄 씻고 가까이 간다.’ 아닙니다. 우리는 가까이 못갑니다. 주저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저주 받을 때 그것이 하나님의 화목작업에 우리가 합류됩니다. 저주 받은 채로 들어가야 진짜 예수님 안에서의 화목이 기다리고 있어요.

베드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늘나라 처소에 못 갑니다. 이 느낌 아시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신해야 돼요. 배신한 베드로가 아니고 배신했다가 주님이 살려낸 그 베드로와 아버지가 화목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개입하는 겁니다. 그냥 맡기세요. ‘화목하려면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이런 고민 하지 말고 그냥 하세요.

왜냐하면, 우리가 하루하루 사는 것이 벌 받고 있는 중입니다. 아담도 받았고 아브라함도 받았고 예레미야도 받았고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빠지려고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님 제자들은 우리보다 훨씬 고생을 많이 했어요. 우리도 고생할 수밖에 없어요. 복수심 때문에 고생을 사서 할 수밖에 없어요.

자식도 내 뜻대로 안 되니까 화가 나고, 모든 것을 내 뜻에 맞추려고 하는데 하나도 되는 것이 없지요.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해서 일부러 그런 일을 발생시킵니다.

이 땅 자체가 다윗 때에 이미 땅 분배는 끝났어요. 성소는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45장에 나오는 그림은 이 땅 경계와 달라요. 이 모양은 에스겔 45장에만 나오지 역사상 이런 지도는 없어요. 지금 여기 서쪽 왕의 땅은 요르단이고, 동쪽의 왕의 땅은 팔레스타인 지역입니다. 가자지역이죠.

그러니까 이 저주 받은 땅에다 주님께서 이 그림을 위에다 그려버린 겁니다. 이런 그림을 그리니까 우리가 보기에는 역사상 있는 A판만 기억하고 있는데 전혀 그런 그림이 안 나올 때 이것은 또 하나의 판이 깔린다고 보시면 돼요. 이 판은 묵시 판입니다. 기존의 것은 역사 판이고.

역사가 먼저 있고 난 뒤에 묵시판이 주어지는데, 이 묵시판이 역사화 될 때는 사건의 양식으로 펼쳐집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다윗, 솔로몬의 땅은 저주 받은 땅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그 망한 이스라엘 땅 위에다 이런 땅의 약속을 해 주신 거예요. 그러면 12지파가 어디 있는가? 성소 그림에 보면 12문이 나와요.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12사도가 나와요. 천국의 예루살렘 문이 몇 개입니까? 12개입니다. 그래서 12개의 문을 통해서 구원 받을 자가 들어가는 겁니다.

12지파, 12문 이 모든 것의 기본 모델은 역사상 실제로 있었던 것을 모델로 해서 그 위에 묵시를 맞춰 나가는 겁니다. 이 땅에서는 죄를 만들어 내요. 그러면 위에서 하나님의 용서가 오면 이것이 바로 에스겔이 말한 언약의 완성, 창조의 완성, 하나님이 비로소 안식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저주 받아야 하고, 우리는 천벌 받아야 됩니다. 받으려고 할 필요는 없고 우리는 매일 받고 있어요. 우리의 현실은 고통이며 불행입니다. 과거는 아름답게 보이는데 현실은 전혀 아름답지 않아요. 우리는 현실이 너무나 좋지 않기에 아름다움을 상상하다 보니까 상상 속에서만 아름다움이 있어요. 꿈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깨면 허망해지지만.

에스겔 45장의 작업은 사람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직접 이뤄집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왕을 하나 투입해요. 여기가 왕의 땅입니다. 그러면 망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A판이 망한 것은 왕이 부실해서 망했어요. 그래서 에스겔 45장 9절에 “이스라엘의 치리자들아 --- 너희는 강포와 겁탈을 제하여 버리고 공평과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토색함을 그칠지니라.”고 당부한 것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왕이 하나님 마음에 부합한 왕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합니까? ‘그러면 부합된 왕을 세워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면 되지.’ 라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나온다는 자체가 전혀 다윗 언약을, 하나님의 뜻을 이해 못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창조란 이미 왕이 정해져 있어요.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창조가 이미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기껏 인간 왕이 애쓰는 것과 한 번 비교해 보란 말이지요. 비교해 보면 애쓰는 왕들이 예수님을 죽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그 원칙 그대로 가요.

왕이 주어지면 왕이 무슨 수로 성전을 만들까? 그 만드는 방법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난 2,000년 역사 속에서 신학자들이 오해한 것이 있어요. 창조에는 두 가지 설이 있어요. 먼저 유출설이 있는데, 이것은 신이 있고 신의 능력을 쭉 늘리면 이것이 창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미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기에 존재자가 나를 존재케 했던 그 원인을 찾아가면 결국 신과 합일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 속에 있는 신적인 요소만 찾으면 됩니다. 선, 의, 거룩. 이런 것이죠. 보다 거룩하고, 보다 착하면 결국은 신과 합일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유출설이에요.

어거스틴은 이것을 거부했습니다. ‘유출설은 철학이다. 성경에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된 것이다.’ 있는 것에서 변형시켜 만드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인데, 성경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다르게 하나님이 없는데서 있게 했다고 보는 겁니다.

두 가지 다 잘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창조에 대해서 이 두 가지 밖에는 몰라요.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더라.” 이 말씀을 신학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원래는 빛이 없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빛이 있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다 그렇게 알고 있어요.

그러나 이런 창조 ‘빛은 없었는데 빛이 존재했다.’ 이것은 존재 차원에서 창조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철학이나 이것이나 같은 거예요. 그러면 뭐가 있는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말씀에서 창조했어요. ‘빛이 있으라.’하는 그것이 바로 창조의 핵심입니다. ‘빛이 없었는데 빛이 생겼다.’가 아니라, ‘빛이 있으라’ 하는 말씀이 창조의 핵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빛이 있으라’고 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처음부터 예수님이 개입된 거예요. 그것을 요한복음 1장에서는 ‘말씀 없이는 아무것도 된 것이 없다’고 한 거예요. 그럼 빛은 뭔가? 말씀을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모형으로 떨어진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서는 그분을 ‘빛’이라고 해요.

빛은 예수님에게서 나온, 예수님을 증거하는 모형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면 나는 뭔가? 나를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것, ‘없는 나를 하나님이 만들었다.’ 이것은 창조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나를 만들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10분 쉽시다.

(2013. 10. 31. 08:42 녹취 마침)

서경수(IP:218.♡.161.162)

13-11-19 15:54

광주 강의(2013. 10. 25) 47-2

“빛이 있으라”는 그 말씀 자체가 이미 창조의 개시가 되는 겁니다. 모든 창조에는 말씀이 개입 안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엄마가 날 낳았다.’ 아니지요. 하나님 말씀이 우리 속에 개입되어 있어서 우리가 말씀을 위반하면 죽게 되어 있고, 말씀을 지킬 경우에만 살게 되어 있는데,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든 인간은 죄인이잖아요.

따라서 모든 인간은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담이 범죄해서 죄가 우리에게 들어왔고, 죄가 왕노릇 해서 모든 인간은 죄의 지배를 받지요. 이것을 우리가 악마의 멱살을 쥐고 “왜 그렇게 했어?”하고 따지지 마세요. 이것이 하나님 창조의 일환입니다. 예수님 중심의 창조의 일환이에요.

창조는 원래 그렇게 되어야 하고, 그런 사태가 발생해야 해요.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한 후에는 다시 평정이 되지요. 한 번 흔들고 난 뒤에는 다시 평정이 되잖아요. 우리 나름대로의 정리, 정돈은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언약을 통해서 이분이 왕으로 등장해요. 세상을 A판과 B판으로 되어 있다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 봅시다. 밑에 깔려있는 A판은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지요. 말씀을 위반했기에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위반하면 멸망한다.’는 그 말씀은 살아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만 붙들면 돼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40:8).” 이 말씀은, ‘너를 의지하지 말고, 너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그 말씀(언약)을 붙잡으면 영원하다’는 것이지요. 주의 말씀이 창조의 중심이기 때문에 내가 잘되기 위한 창조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중심이기 때문에 ‘말씀이 지금 나를 어떻게 다루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멸망시킬 때 여기에 왕이 있습니다. 왕이 멸망과 더불어 죽어요. 그러면 백성들은 잘 있는가? 오늘 본문 45장 10절에 보면 “너희는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밧을 쓸지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에바’는 고체를, ‘밧’은 액체의 양을 측정할 때 사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신 후에 그들이 망한 이유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은 지중해와 요단강 사이에 있지만 실제로 역사 속에, 지면위에 이렇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에스겔 45장 말씀은 거짓인가? 왕이 등장하게 되면 이것이 실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돼요.

그러면 여기 인간 왕(다윗의 후손들)은 진짜 왕과 인간 왕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 악역을 맡은 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다윗 언약에 있는 왕은 이쪽 왕과 비교해 볼 때 완전히 말씀대로 순종하는 왕으로 이 땅에 등장하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 떡은 내 몸이고, 이 잔은 내 피다.”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의 일입니까, 십자가 달리기 전의 일입니까? 죽기 전의 이야기죠. 그러면 떡이 몸이 되고, 잔이 피가 되는 것은 그 때 뿐이겠네요. 그 때만 적용되는 것으로 끝나잖아요. 그런데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이 떡을 떼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어요.

여기서 왕과 이 사이가 무슨 사이인가 하면, 왕이 만약 큰 치마를 입었다고 합시다. 보통 치마는 자기 하체를 덮는 정도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왕의 치마는 자기 택한 백성을 다 덮을 수 있어야지요. 그러면 그 치마 속에서 떡은 계속해서 몸이 되고, 잔은 피가 되겠지요. 그만큼 큰 치마를 입을 왕이 있느냔 말입니다.

따라서 왕은 어떠해야 된다? 자신의 살과 자신의 피를 끊임없이 계속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역사에서. 왕의 일이 자기 몸과 피를 주는 것인데,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시대에 관계없이 계속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왕인데, 이 진짜 왕과 기존의 인간 왕을 비교시켜 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가 하는 행위가 계속 타인에게 제공이 가능한 왕과 자기 행위가 자기에게만 제공되는 그런 왕과의 차이를 하나님은 보여주시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효과가 우리한테 전달되는데 있어서 “이 떡은 내 몸이고 이 잔은 내 피다.”고 했는데, 이것의 방향을 바꿔봅시다. 떡이 몸이 되고, 잔이 피가 된다는 말은 유월절에 하신 성찬식인데, 이 효과가 이 때 뿐이고, 이제는 몸이 있고 피가 있잖아요. 그러면 몸이 떡이 되고, 피가 잔으로 달라질 수 있다면 예수님의 몸은 이 떡과 잔을 통해서 계속해서 효과를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요.

개신교는 ‘이 떡이 몸이 된다. 이 포도주가 피가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초기 천주교는 ‘화체설’ 몸으로 변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는 ‘이 떡은 곧 몸이고, 이 잔은 곧 피다.’ 이렇게 나와요. 나중에 루터와 칼빈이 교리를 손질하면서 이 부분을 손대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루터가 잘못 손대서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고, 칼빈은 “떡이 예수님 몸이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한 조건 하에 몸이 되고, 잔은 성령이 임할 때 피가 된다.”고 했고, 이것이 오늘날 개신교나 장로교의 교리가 되었어요. 그런데 쯔빙글리는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위클리프도 비슷하게 주장했고.

이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한 사람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내가 꿈을 꾸었는데 다른 사람이 나와 동일한 꿈을 꿀 수 있습니까? 없지요. 그런데 느부갓네살 왕은 이런 무례한 짓을 했어요. 자기 신하에게 자신이 꾼 꿈을 말하고 해석하라고 했지요.

‘예수님은 선한 분이고 하나님 말씀에 따라 착하게 살았다.’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만 훌륭하면 우리 구원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만 훌륭하면 예수님만 구원 받아요. 우리는 구원이 안 돼요.

45장 13-14절에 “너희의 마땅히 드릴 예물이 이러하니 --- 이스라엘 윤택한 초장의 떼 이백 마리에서는 한 어린 양을 드릴 것이라.” 이런 말씀이 있어요. 자, 왕이 하는 행동이 자기 백성에게 효과가 미칠 수 있는 그 중간 통로로 왕과 제사의 만남이 성사됩니다.

여기서 왕이 제사 드리면 효과가 있는데 내가 제사를 드리면 효과가 없어요. 어떤 인간의 제사도 효과가 없습니다. 그러면 왕이 제사를 드린다고 하지 말고 원래 제사의 원형에 부합되는 왕이 등장할 때 제사의 효과가 생기는 겁니다. 제사의 제물을 누가 바칩니까? 백성들이지요.

백성들은 제물을 바침으로 제사라는 공통의 장에 참여하지요. 그러면 제사장은 누가 됩니까? 왕이 제사장이 되어서 제사에 참여하지요. 그렇게 해서 여기서 나오는 효과는 여기에 참여된 백성과 왕이 다같이 누릴 수 있는 공통의 영역이 마련되는 겁니다.

제가 대구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유월절 규례가 나오는데, 장자를 죽이란 말입니까, 살리란 말입니까? 모든 집 장자가 다 죽어요. 그러면 우리 집 장자를 살리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어린 양을 잡아 문설주에 그 피를 발라야지요. 그러면 내 장자가 살잖아요.

이것은 장차 오실 왕과 제사의 결합에 의하면 그것은 옳은 해석이 아니에요. 애굽 장자들이 죽는 것처럼 이스라엘 장자 역시 죽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낸 죽음의 사자가 오게 되면 양은 죽고 장자는 살았잖아요. 살긴 살지만 더 이상 이 집안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로 바뀌어 버립니다. 장자 개념의 변화가 발생해요.

장자 개념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자체가 예수님 중심의 창조 행위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창조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로써 살았다고 여기는 장자를 하나님이 데려갑니다. 그러니 이러나저러나 장자는 없습니다. 아예 우리 집에는 장자가 없는 거예요.

장자가 없으면 차자는 있습니까? 없어요. 왜냐? 둘째가 맏아들이 되면 또 없어져요.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그 집에는 뻥 구멍이 뚫렸어요. 어제 가락교회에서 구멍을 설명하면서 이런 예를 들었어요. 솜사탕 만들 때 보면 막대기로 저으니까 구름같은 것이 모여서 분홍색 솜사탕이 되지요.

도대체 저게 어디에서 나오는가 보면 구멍에서 나와요. 주인은 발로 페달을 밟아 막 돌리는데 구멍에서 먼지같은 것이 나와요. 그 먼지가 모여서 막대기에 붙어 솜사탕이 됩니다.

아까 밑(역사)의 판을 A판이라고 했습니다. 구원 받는 위판(예수님 중심의 판)에서 역사의 판에다 구멍을 뚫어요. 왜 구멍을 뚫는가? 구멍 난 자리에 인간의 본성이 들어가요. “우리 집에 장자 있다. 우리 집은 하나님 믿는다.” 이런 것에 구멍을 뚫어요. 그러면 “나는 ~ 있다.”가 “나는 아무것도 없다.” 즉 나는 구멍 뚫린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때, 그 구멍에 맞춰서 위에서 채워서 우리를 천국에 데려갑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오라.’ 그런데 이 구멍 뚫을 때 발생되는 것은 ‘내가 아닌 나’가 됩니다. 그 순간 강력한 악마의 몰골을 가집니다. 신이 내 것을 빼앗을 때, 내게 제일 중요한 장자를 빼앗을 때 우리는 갑자기 악마의 앞잡이로 돌변합니다. ‘왜 하필이면 저를---’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Why me?’ 가 아니고 자기 손으로 자식을 죽입니다. 지젝이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잡는 계시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하나님의 지시를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율법의 참뜻은 남에게 알릴 수 없는 것이다. 예초부터 나에게 없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십계명을 해석하고 성경 전체를 해석하고 싶지만 그것은 구멍 뚫려야 할 대상이고 진짜 계명의 해석은 항상 내가 구멍 뚫리면서 비로소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내가 가진 것을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대상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나의 증거물이기 때문에, 내가 나 사랑의 증거물을 자식이나, 부동산, 돈에다 놓고 있는 거예요. 사람은 자기가 우상화 되지 아니하면 살맛이 없어요. 나에게 꿈이 있고 소망이 있고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 있을 때 힘이 나요. 사람은 희망이 없으면 힘이 안 나요.

사람은 사는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그 이유를 겨냥해서 하나님이 구멍을 뚫어줘야 우리가 마귀가 돼요. 그동안 우리가 고이 감춰놓은 나의 정체, 이것을 주께서 빼앗을 때 우리는 극렬히 하나님께 반항하고 분노하면서 “이것 없으면 나는 하나님 안 믿을 거야!” 이런 고백을 하나님이 기다린 거예요.

그런 고백을 들을 때 여기서 살과 피가 비로소 의미를 생성하게 돼요. 지금 내 것이 따로 있는데서 떡과 잔을 먹어도 의미 없어요. 결국 남는 것은 내가 좋은 것뿐이에요. 이건 종교생활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드릴로 구멍을 뚫어, 예전에는 그것이 그렇게 소중한 줄 몰랐는데 막상 구멍이 뚫리고 보니 내 입에서 거침없이 하나님에 대한 도전과 저주가 나옵니다.

우리 어머니는 평소에 욕을 하시는 분이 아니었는데 이제 치매에 걸려 이상한 행동을 해요. 남의 농작물을 막 뽑아서 집에 두었는데 그것을 가져가니까 욕을 하고 난리를 치는데, 그 때는 자식도 없어요. 내가 뜯어놓았는데 그것을 왜 가져가느냔 말이지요.

동네 사람들이 제게 찾아와서 “목사님 모친이 우리 밭에 와서 호박도 따고, 무도 막 뽑아 가시는데, 제발 좀 말씀 잘 드려서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해 주세요.”라고 해요.

우리에게 구멍을 뚫을 때 우리한테 억한심정이 있어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뚫어버렸어요. 그곳에 우리를 같이 참여시키려고 우리에게도 구멍을 뚫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그릴로 구멍을 뚫어버렸어요. 구멍을 냈다는 것은 창조 이전의 상태가 되는 거예요. 창조 이전 상태가 되면 악마가 지옥 가도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여자의 후손으로 뱀의 후손을 작살내는 마지막 무기입니다.

“악마야!” “왜요?” “네게 없던 시절로 돌아가게 해 줄게.” “이미 있는데 없는 시절로 돌아가다니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이 지상에서 죽여 버렸어요. 예수님은 창조의 원형인데 예수님을 죽였다는 말은, 모든 창조는(마귀, 천사, 인간 모두) 죽어버린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죽음의 대상이 된 거예요. 그리고 그 중 사흘 만에 예수님을 건져냄으로 그동안 있었던 모든 창조는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는 거예요.

본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연습게임이었어요. 본 게임은 예수님이 부활함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지요. 애녹이나 엘리야가 첫 열매가 아닙니다. 첫 번은 예수님이 정하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피조물이고 예수님은 창조주이기에 창조주의 첫 번째 부활의 열매는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기존의 창조는 어떻게 됩니까? 쇠퇴해야겠지요. 히브리서 1장 10-11절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이 구절에서 ‘멸망할 것’이란 말이 이해가 안 됐어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그리고 ‘주는 영존할 것’이라고 했는데, 왜 멸망 없이는 영존이 안 되는지 --

주님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영존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그냥 쭉 계시면 그것이 영존 아닙니까? 처음부터 영원토록 계시면 그 자체가 영존이잖아요. 그렇다면 지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멸망할 이유가 없잖아요. 같이 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꼭 멸망해야 영존이 드러나는 이유가 뭐냔 말이지요.

주 개념을 이루기 위해 절차상, 주는 창조의 완성이 되어야 하고 그 창조는 멸망하기 위해서 창조가 되어야 하고 그 멸망이라는 기초가 없으면 안식이라는 완성의 기초가 마련되지 않습니다. 멸망이 재료가 되어야 해요. 음식은 으깨져야 주스가 되듯이 부서져야 돼요. 멀쩡한 것이 있으면 안 돼요. 다 깨져야 하는데, 주께서 우리를 으깨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겉은 날마다 후패해야 돼요. 후패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겉만 신경 쓰게 되고 속(사람)에 대한 관심이 떨어집니다. 우리의 속은 말씀이 살아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바쁘다 보면 말씀을 잊어버려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 자신을 주님이 벌리시는 창조에 집어넣기 위해서 멸망으로 이끕니다.

멸망의 원칙과 법칙에 대해서는 아버지와 아들만 압니다. 그런데 구원될 자에게는 성령을 보내셔서 그 정보를 같이 공유하도록 혜택을 주십니다. 이게 축복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만 아는 그 사이에 감히 우리가 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양을 맡기기 전에 먼저 이야기했어요.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어요.

그 때 베드로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베드로가 수동적으로 바뀌지요.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아십니다.” 만약 누가 오 목사님께 “목사님은 예수 믿습니까?” 라고 한다면 오 목사님의 답변은 이렇게 나와야 해요. “‘나는 예수 믿지 않는다’고 말하라고 예수님이 시켰습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주께서 일러주신 것이 바로 주님이 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사랑도 수동적이어야지 내가 능동적으로 주를 사랑하면 안 돼요. 주께서 사랑했기에 그때부터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던 그 상황이 이해가 돼요.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어야 될 이유가 납득이 됩니다.

예수님을 주로 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지만 그 모든 영광을 포기하시고 죽기까지 낮아지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 다음이 뭡니까? ‘아버지께서 십자가에 죽은 아들을 높이사 그 아들을 주가 되게 하심으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빌립보서 2장에 있는 말씀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북치고 장고치고 다 했어요. 이것을 적용하시는 것은 성령님이 알아서 다 했어요. 우리는 그냥 태어날 때부터 아무 영문도 모르는 채 갇혀 있다가 나왔는데, 그 때 우리는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합니다. 비로소 주님을 만났다는 말이지요. 이제야 나의 원형을, 내가 주님의 창조 작업에 참여된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인 이유는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이라는 단절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제 남은 문제를 해결합시다. 왕이 일으킨 효과가 어떻게 우리에게 전달되는가? 단절입니다. 끝까지 우리를 밀쳐내요. 단절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계속해서 신의 세계를 생각하겠지요. 말씀이 있으니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지요. 나아가고자 하는 그것을 끝까지 주님께서 단절시키는 겁니다.

끝까지 밀이붙입니다. 어디까지? 세리같은 고백이 나올 때까지.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바리새인은 “나는 금식했습니다. 나는 십일조 했습니다. 구제했습니다.”고 했는데 이것은 인간 쪽에서 하나님께 접근하는 것이고,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밀어붙이신 거예요. 단절이지요. 죄인이기 때문에 ‘나는 수동적인 자리에 머물러야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왕이 제사드려서 받은 의로움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수동적으로 주어집니다. 그런데 우리도 만만치 않아요. 나의 것을 빼앗으면 화내고 대항합니다. 우리는 악마의 앞잡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은 계속해서 “나도 착한 일 했습니다. 나도 할 수 있습니다. 나도 교회 오래 다녔고 성경도 압니다.”라는 것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변화가 주어져야 됩니다.

그 변화가 주어질 때 여기에 뭐가 있는가 하면, 우리 쪽에서 공격을 했기 때문에 남긴 흔적이 있어요. 그게 바로 찢겨진 살이고 흘려진 피입니다. 인간의 손에 의해 죽임 당한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을 가지고 우리 얼굴에 대고 밀어붙이니까 우리는 내가 한 짓을 알잖아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십자가가 다가오니까 내가 한 짓들이 그대로 보여지고 우리는 뒷걸음치며 물러설 수밖에 없어요. 나중에는 고개를 들지도 못하지요. 욥기를 보세요. 초반에 욥은 얼마나 당당합니까?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런 사태를 만나게 하십니까? 제가 뭘 잘 못했습니까? 이렇게 하시면 하나님이 실수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친구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다가 막상 하나님이 직접 등장하니까 욥은 궁지에 몰립니다.

그전까지는 “내가 아픕니다. 내가 받는 고난은 너무 억울합니다. 내가 이런 벌을 받을 만큼 죄 지은 기억이 없습니다.”하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재를 뒤집어쓰지요. 이사야의 경우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주님이 이사야를 밀어붙이니까 이런 소리를 했어요. ‘저주가 나에게 합당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새로운 계시가 됩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습니다. 철학자 고르기아스가 이런 말을 했어요. “남에게 전달할 방법이 없으면 그것은 없는 것이다.” 왜냐? 진리는 서로 내통해야 되는데 내가 남에게 설득할 수 없다면 그것은 진리로서의 가치가 떨어지는 거지요.

고르기아스는 파르메니데스에게 배웠어요. 그 사람은 “존재는 없다.”고 했어요. 왜? 있다 할지라도 남에게 이야기할 수 없으면 없는 거예요. 그럼 너는 뭔가? 나는 없음으로 있다는 거지요.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런데 십자가 언약에서는 죽음만 있어요. 피만 있어요. 인간은 일단 살아있기에 궁금한 게 많아요. 아담이 살아있다고 여겼으니까 선악과를 따먹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자기가 존재하는 것이 장차 오실 예수님을 위해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자신이 아는 것은 그냥 ‘내가 여기 있네.’ 그것입니다. 모형이었죠.

모든 인간은 자신이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님 피, 언약 속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구멍 속에 합류할 수가 없어요. 모든 사람이 살았다고 여기기 때문에 산 자가 지식과 정보와 진리를 알려하기에 못 들어갑니다. 그럼 방법은 뭔가? 죽은 자의 영을 받아야 돼요. 성령이죠.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삽니다.

내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고 죽음만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이 땅에서 살아야 돼요. 죽음이 있다는 것, 그 죽음을 우리는 미리 알았어요. 예수님 십자가 죽음이 곧 내가 하나님 앞에서 당할 저주의 모습을 이미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죽음입니다. 그 죽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있는 거예요.

그런데 자신이 살아있기에 계속 살려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이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없는 거예요. 강의 초반에 말씀드렸지요. 말씀이 그냥 말씀이 아닙니다. 아벨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아벨 자체가 계시의 사람이죠. 하나님 사랑이 되지요.

그러니까 악마가 하나님을 죽이는 대신 아벨을 죽이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해도 지옥 갈 사람은 우리의 말을 이해 못해요. 그러니 그들에게는 십자가가 없고,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어요. 이것은 빌립보서 2장에서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입니다.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어찌하든지 십자가에 죽는다.’ 그 말을 다른 사람이 알아듣겠습니까? 못 알아들어요.

편지는 서로 살아있는 사람끼리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잖아요. 실제 이야기인데, 2009년에 그리스에 어떤 사람이 연금이 안 나와서 담당 공무원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어요. 답장이 왔는데 “당신은 이미 죽은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공무원 입장에서는 죽은 사람에게 연금을 보낼 수는 없잖아요. 서류상 그 사람은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거예요.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요. 죽은 사람에게 왜 편지를 보내죠? 편지를 보냈다는 것은 안 죽었다는 것인데, 안 죽었으면 누적된 연금을 보내야지요. 그런데 공무원은 나랏돈이 제 돈이 아니니까 편지만 보내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한 거예요. 이처럼 성경은 죽은 사람에게 보내요.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더 첨가하자면 “왕이 제물과 함께 죽을 때 당신도 그 때 함께 죽었습니다.” 라는 편지를 보낼 때 “나는 안 죽었어요. 20만원짜리 양을 잡아 드렸습니다. 나는 살아서 계속 살기위해 양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러면 양을 드려도 소용없어요.

예수님은 떡을 자기 살이라 했고, 잔을 자기 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떡과 잔을 나눌 때마다 나의 죽음을 생각하라.”고 했어요. 이 떡과 잔에 효과가 있다고 여긴다면 그 사람은 성도 아닙니다. 천주교나 개신교 교리가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것은 전혀 구원과 관계가 없어요. 이들은 이벤트를 벌리고 있을 뿐이에요.

십자가는 성령이 와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시면 구멍을 뚫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그 구멍은 돌아서면 내가 욕망하는 내가 되고 싶은 세상 것으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돌아서면 죄인이란 사실을 망각하고 “내일 이것 해야지. 딸 시집가는데 준비해야지.” 또 계획을 세우지요. 그러면 주님은 “내가 그 딸 죽이면 어떻게 할래?” “나 이제 예수 안 믿어.” 하나님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러니 주님은 뚫고 우리는 다시 채우고, 또 뚫으면 또 메우고.

그 메우는 것이 주님을 죽이는 악마적인 속성을 발휘하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죽어야 마땅한 자임을 증거하는,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는 날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살과 피는 우리가 예수님의 살이고 우리가 예수님의 피가 되는 겁니다.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살과 피가 되게 하시는 거예요. 항상? 아닙니다. 성령이 올 때만. 십자가 사건으로 올 때 만입니다.

그 때 우리는 왕의 땅과 왕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 땅에서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에스겔 45장의 비유가 멸망할 이스라엘 땅을 기초로 해서 거기서 죄를 끄집어내고, 오실 메시아와 결합을 시켜서 이 말씀이 완성되면 우리는 안식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면류관도 반납하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를 다시 한 번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죽였던 그 죽음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는 외면했습니다. 그것은 나의 소망이 따로 있었고, 내가 자랑하고 싶은 것이 따로 있었기에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영광이지 주님의 영광이 아니고 아버지의 영광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13. 11. 19. 08:45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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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