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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91110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1 - 머리말자유게시판[신학]

20091110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1 - 머리말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20091110a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1 - 머리말
(강의 : 이근호 목사)

이번에 침멀리의 책을 구약신학을 대면하는 것으로 하자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이 내용이 어렵다기보다도 많은 내용이 담겨있어요. 같은 돈을 주고 사더라도, 저의 책은 가격이 3500원이 찍혔는데, 옛날에 사서 말이죠. 아무튼 같은 돈을 지불하고 책을 사더라도, 볼 게 많이 있으면 두고두고 참고로 할 것이 많아요.

이 책이 볼 것이 많으면서도 그것이 함축되어있기 때문에, 그냥 책을 쉽게 소화시키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어렵게 들리는 것이죠. 혹시 자기가 아는 것은 다 빼버리고 모르는 것만 하자고 덤벼들다가는, 이 책의 진도가 잘 안 나가니까 나중에 실증을 낼 수가 있습니다.

이전에 '신약신학'을 하면서, 래드의 책을 한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그 책은 기존에 있는 모든 현대 신학신약을 다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계속해서 하게 되면, 더 이상 기발하고 새로운 것은 안 나오잖아요. 사람이 새로운 것이 안 나오면 두려움이 없어져요. 겁이 없어지고 말이죠. 그런데 새로운 것이 자꾸 나오면, 그만큼 자기가 무식한 것처럼 느껴져서 자신감을 상실하죠. 혹시 자기가 이런 주장을 하는데, 거기에 반대되는 주장이 나오면 어떡하느냐는, 그런 생각이 들지요.

◈ 인식론의 문제 !!

이번에 십자가 마을에 김성환과 박윤진, 그렇게 두 분이 주고받은 글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김성환 그분은 기존의 신학을 하신 분이잖아요. 박윤진은 신학을 안 했잖아요. 그런데 김성환 그분의 입장에서는 겁이 나는 것이, 자기가 알고 있는 신학의 테두리에서 전혀 낯선 소리할 때, 그것을 틀렸다고 해야 할지, 무식해서 오버하고 있다고 해야 될지, 아니면 기존의 것을 다 알고 그 허점을 지적하는 것인지, 그게 일종의 약간의 망설임으로, 즉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박윤진 성도님의 글은 뭘 문제 삼느냐 하면, 인식론을 문제로 삼고 들어가요. 그런데 기존의 신학을 한 사람은 인식론이, 그 뒤에 계속해서 인식론이 작용한다고 생각을 안 하고, 참 "과연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라고, 그걸 인식론이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삼위일체다" 라는 것이 인식론이 아니고, "삼위일체를 우리가 어떤 식으로 알 수 있는가?" 라는, 그게 인식론이죠.

인식론을 일단 알고 나면, 그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인식론을 버리고 기존의 내용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식으로 신학이 전개된다고, 김성환 그분은 그렇게 배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인식론을 그 다음 내용에 계속 적용시켜버린다면 어떻게 되느냐는 겁니다. 인식론을 계속 적용을 시켜버린다면 말이죠.

인식론은 여기까지는 일단 알고, 즉 김성환 목사가 말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성령이 와야 하나님의 십자가 복음을 안다고 하는 것을, 그것을 일단 저는 압니다" 라고 나오거든요. "성령이 임해야, 인간의 육으로는 안 되고, 인간의 육은 모든 걸 왜곡시키기 때문에 성령이 임해야 성경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하는 박윤진 성도님과 저는 생각이 같습니다" 라고 일단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 본 내용에 들어가서, "성경에 있는 내용과 당신이 이야기하는 내용과 마찰이 일어나는데, 도대체 이게 나로선 납득이 안 됩니다" 라는 겁니다. 좋게 말해서 납득이 안 되는 것이지, 쉽게 이야기해서 틀렸다는 말이거든요. 성경내용과 반대라는 겁니다. 물론 그런 말은 안 하죠. 조심스럽기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이야기에 들어갈 경우에, 인식론에서 거론되는 문제가 내용 안에 결부되어 있다면 그 내용에 대해서 기존의 신학내용 전체가 모두 다 뒤집어져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박윤진 성도의 생각입니다. 모든 것을 뒤집어 생각하는, 바로 그런 이야기예요.

◈ 구약전체를 분리하지 않고 통합시키는 능력을 !!

그러한 이야기가 구약신학을 하는 데 있어서, 여러분도 '구약신학' 이라는 책이 있습니까? 그건 구약신학을 시작하는데도 마찬가지예요. 구약신학이란 내용을 머리말부터 시작해서, 그게 여기 11페이지로 되어있는데, 김정준 씨가 번역을 했다고 하니까 아마 저의 것과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책이 다 같을 거예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조금은 오래되었지만 말이죠.

구약성경이 이렇게 있다고 하면, 이 구약성경을 열 명이 본다고 합시다. 그렇게 열 명이 본다고 하면, 자기가 궁금한 것, 호기심을 갖는 것, 그리고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중점적으로 보겠지요. 그렇게 어떤 것을 중점적으로 보게 되면, 자연적으로 다른 주제나 다른 요소는 뒷전으로 밀리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밀린다는 겁니다. 그렇지요?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어떤 사람이 구약성경을 볼 때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나머지는 서열상 뒤로 밀리게 될 때, 여기에 A 라는 사람과 B 라는 사람, 그리고 C 라는 사람이 각자 나름대로 구약성경의 체계를 잡는다고 하겠지만, 하지만 그 체계가 열 명이면 열 명이 모두 다르다는 겁니다. 모두가 다 달라요.

그래서 여기 11페이지 머리말에 보면, 중간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 구약에 관한 확정적인 전체이해를, 각각을 분리하지 않고 절대적인 전체조건으로 한다.

무슨 의미입니까? 전체를 조망하는, 즉 전체이해를 각각 분리하지 않고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을 키우도록 구약학에서 구약성경을 공부하자고 하자는 게 머리말에 나와요. 적어도 구약성경을 공부하면 성경에 전문가가 되는데, 전문가라면 구약성경을 뚝뚝 떨어지게 하지 말고, 하나의 전체이해를 갖는데 도움이 되라고 이 책을 썼다는 겁니다.

◈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구약성경의 목적 !!

그리고 다음에 13페이지를 보면 '목적과 원칙' 이라고 돼있는데, 그런데 제목은 '목적' 이라고 해놓고는 정작 이 목적에 대해서 그 내용에 안 나와있어요. 물론 번역이 잘못되었는지 몰라도, 이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가 나와있지 않다는 말이죠.

그래서 할 수 없이 앞에 있는 머리말에 나오는 뜻에 의해서 살펴보면, 거기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구약신학을 쓴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앞에 전제가 있어요. 무슨 하나님이냐 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구약성경의 목적이 된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이 책이 주장하죠.

그렇다면 인식론으로 봤을 때 이 말이 맞느냐는 겁니다. 대번 틀리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우리가 안다고 할 때, 처음에 성경도 그렇고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는 이스라엘 하나님을 어떻게 아느냐고 할 때, 반드시 포함되는 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하나님을 알고자 하면 알수록 누구에 대해서 몰랐던 것이 밝혀지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그것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통해서 점차 점차 밝혀지는 거예요.

◈ 그러면 그 '나'는 어디서?

그게 드러나면서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이스라엘 하나님을 연구하면 할수록 '나' 자신에 대해서 아는데,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 과연 진리냐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했던 '나'가 정말 제대로 된 '나' 일 수 있다는 확정을 어디서 얻을 것이냐는 문제입니다. 즉 "하나님을 내가 알면, 하나님뿐만 아니고 내 자신을 안다" 라고 주장할 때, 그것을 알았다고 판정을 내릴 그 '나'는 어디서 구하느냐는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이런 문제는 구약신학의 이 책에서 다루지를 않죠. 그것까지 다뤄버리면, 이 사람이 전문가도 아니고 거기에 대해서 제가 보기에 아는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제가 첫째 시간이 그걸 여기에다가 첨가를 해드리겠습니다.

◈ 잠시 계란 이야기를 !!

예를 들어서, 계란이 이렇게 있는데, 이 계란 먹을 때 껍데기는 안 먹잖아요. 계란을 삶고 벗겨버리죠. 계란을 삶아버리면 먹는 부분과 먹지 않는 부분이 구분이 되죠. 먹지 못하는 것은 껍질이죠. 안에는 고체로 돼있어서 먹을 수 있잖아요. 계란 속은 말이죠. 그러니 먹을 때는 계란 속만 먹는데, 껍질을 벗기고 먹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껍질이 없으면 계란입니까? 계란이 아닙니까? 계란일 수 없지요. 껍질은 먹지는 않지만, 껍질이 없으면 안이 보호가 안 되니까 말이죠. 그러면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귀찮은 껍질을, 즉 먹지도 못하는 껍질 벗겨버리자고, 아예 삶기 전부터 없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그러나 껍질은 속에서 밀어붙여서 뭐가 됐든 껍질은 있게 마련이죠.

제가 이러한 예를 드는 것은, 워낙 주체에 관한 문제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주체라 하는 것은 자꾸 속에서 뭔가 밀어 올리는 게 있는데, 하여튼 밀어 올려서 "나는 이렇다" 라고 무엇을 형성하느냐 하면, 껍질을 형성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껍질은 과연 믿을 만 합니까? 이것도 하루 지나면 "내가 또 오해했네" 라고, 그렇게 자기가 자기를 오해하는 거예요. 기분이 좋으면, 자기라는 인간이 좋은 줄로 알고, 또한 기분이 나쁘면 천하에 악마가 돼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나' 라고 하는 것은, 그 껍질이 나가 아니고 알맹이가 곧 나다" 라고 생각해도 여전히 문제가 남아요. 왜냐하면, 알맹이가 '나' 라고 해도 껍질은 계속해서 어디서 밀어 올라옵니까? 속에서 밀어 올린 것이 곧 껍데기가 되거든요. 그래서 껍데기가 엉터리라고 하면서 벗겨버려도 나중에 결국 껍질이 또 다시 생기죠.

◈ 주체는 발꿈치의 각질이다 !!

그걸 제가 이번에 새로운 논문에다 썼어요. 주체가 뭐냐 하면, "주체는 발꿈치의 각질이다" 라고 했습니다. 계속 뜯어내도 또 올라오고, 뜯어내면 또 올라오고, 그렇게 평생을 다 보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말이죠. 왜냐하면, 과거에 19살 때 '나' 이라고 생각했던 그 '나' 라는 것은, 서른만 되도 "아이고, 그때는 왜 그렇게 철이 없었는지 몰라" 라고 하는 겁니다.

13살 때는 동네 형뻘이 되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웠는데, 그런데 지금 만나보세요. 두 번 다시 전화하기가 싫지요. 그런데 13살 때는 같은 동네에 사는 형뻘이 왜 그렇게 영웅시되고 그렇게 부러운지 몰라요. 그래서 "나는 나중에 그 형처럼 될 거야" 라고 하죠. 하지만 지금 나이가 들어서 그때의 형을 보면 "13살 때 나는 시건이 어지간히 없었다. 어디 희망할 것이 없어서 저 인간처럼 된다고 했었나?" 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은 신학교를 졸업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졸업할 때는 큰 교회의 목사가 그렇게 존경스럽고, 그래서 "나도 앞으로 목회를 한 이십 년만 하면 저 목사처럼 훌륭하게 되겠지. 얼마나 존경스럽고 훌륭하노?" 라고 하는데, 나중에 그 사람을 만나보세요. 단번에 뭐라고 나옵니까? "아이고, 이런 이단아!" 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이 나쁜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은 그대로 인생을 살아왔는데 뭐가 늘 수정이 되었습니까? 사물을 보고, 즉 이 세상을 보고 그것을 평가하는 자기 자신이 항상 수정되어 왔지요. 수정이 되었다고 여기는 자기가 내년이 되면 어떻게 수정될지, 그건 뻔할 뻔 자인데, 그렇게 뻔하니 수정할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 2009년도와, 2010년의 세상보기가 달라 !!

2009년도에 세상을 본 것과, 2010년의 세상보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오후에 그런 설교를 했는데, 2010년이 돼봤자, 2010년도에 비로소 알 수 있는 죄는 그때 가서 안다고 말이죠. 지금은 어지간한 죄는 다 처리했다고 생각하지만 2010년이 돼보세요. 2010년도에 나타나야 될 죄가 2010년도에 나타나요. 그러니 인간이 어떻게 완료고, 인간이 어떻게 성화가 됐단 말입니까? 아직 자기 죄도 제대로 모르는데 말이죠, 그걸 주체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건 일종의 각질이에요.

이런 주체로는 구약성경을 모르는 겁니다. 그렇게 구약성경을 보게 되면, 결국은 자기가 하나의 주체로서, 아무리 흐름이라도 껍질처럼 한 순간에 고정돼있어요. 주체가 고정되면 놀랍게도 자기가 알고자 하는 이스라엘 하나님도 그 순간 스톱, 즉 고정이 돼버리는 겁니다. 양쪽을 다 자기가 보고자 하는데, 그렇게 보는 자기도 고정되고, 즉 자가가 살펴야 될 그것도 고정이 되는 것이죠.

◈ 과학은 '유용성' !!

세포를 볼 때 문제점이 뭐냐 하면, 세포를 죽여놓고 본다는 거예요. 옛날에는 말이죠. 지금은 기술이 발달해서 살아있는 세포를 보기 때문에, 죽었을 때 세포와 살았을 때 세포가 성분이 다르다는 것을 밝혀졌지만, 옛날에는 죽여놓고 봤다는 겁니다.

그것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라고 합니다. 물리학에서 말이죠. 어떤 존재를 보려고 하면, 거기에 힘이 없어지고, 그 힘을 파악하지 못하고 힘을 알려고 하면, 즉 운동을 보려고 하면 그 존재가 어디에 있는지 존재를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게 인간의 딜레마예요. 그러면 과학을 안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겠지만, 과학은 진리를 얻는 게 아니고 유용성입니다. 즉 "얼마나 이용해 먹을까?" 라는 것이죠.

◈ 당장 힘이 없기에 교회에 나오는 인간들 !!

그러한 점은 교인들이 교회에 올 때도 마찬가지예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안다구요? 아니에요. 이스라엘 하나님을 아예 무엇으로 보느냐 하면, 한 마디로 파워, 즉 힘이에요. 사람이 신을 대한다는 말은 뭐냐하면, 말이 신이지 그 내용을 보면 힘이에요. 신은 힘이고, 그 힘을 찾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되고 싶은 힘은 지금 자기한테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힘이 없다는 거예요.

내일 모레가 되면 수능을 치는데, 지금 뭐가 필요합니까? 고3 학부모로서는 힘이 필요해요. 일 년에 무려 250만 명이 다녀간다는 그 갓바위, 요새는 비좁습니다. 그 피해를 우리교회도 입죠. 거기로 가는 차들 때문에, 우리가 그만 밀려서 매일 늦는 거예요.

◈ '신'은, 다른 한 글자로 '힘' !!

아무튼 사람은 힘을 원해요. '신' 이라는 한 글자가 무슨 말인지가 어렵습니까? '힘'으로 바꾸면 돼요. 그래서 힘을 원하는 사람이 구약성경을 보면서, 즉 구약성경을 필사를 하고 백 독을 하면서 거기에서 뭘 얻고자 합니까? 힘을 얻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힘을 얻고자 하는 방법이 뭐냐 하면, "성경을 보고 큐티를 하게 되면, 그걸 공로로 해서 내게 필요한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겠지" 라고 대상을 그만 일방적으로 규정짓죠.

그런데 일방적으로 규정하는 그 틀은 어디서 가져왔습니까? '나' 라는 것이 속에서 올라와서 껍데기를 형성한, 그 일시적인 주체가 그렇게 해요. 그런데 어느 정도 힘이 차있다 싶으면 교회를 안 나오죠. 힘을 즐겨야 되니까 말이죠. 즐기려면 일요일에 등산가야 되고 놀려가고 골프도 쳐야 되니까, 그때는 이쪽 힘이 사회적 힘으로 바꾸어지고 교회는 그만 빠이빠이가 되겠죠.

그렇게 되면 구약성경의 이스라엘 하나님은 알고자 원치 않겠죠? 알고 싶지도 않지요. 자기가 원하는 것은 힘인데, 그 힘을 굳이 욕심을 낼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사회생활을 잘 하다가 그만 부도나버렸다고 하면 어디에 옵니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라고 하면서 다시 교회에 오겠지요.

◈ '왜 힘을 원하느냐?' 라는 것에서 구약성경이 시작 !!

바로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여기서 구약성경이 시작돼요. 즉 "왜 힘을 원하느냐? 왜 신을 곧 힘을, 왜 인간은 그걸 원하느냐?" 라는 문제입니다. 힘 앞에 뭐가 달리는고 하니, 앞에 뭔가가 붙어야 돼요. 그냥 힘이 아니고 그 힘에는 무슨 목적이 갖고 있는데 두 자로, '사는' 힘이죠.

그래서 박윤진 씨는 김성환 목사와 토론하면서 히브리서 2장 15절인가를 거론했죠. 뭐라고 했습니까? 거기에 보면, 죽기를 무서워하여 평생을 마귀한테 종노릇을 했죠. 죽기가 무서워 마귀한테 종노릇을 한 사람이 유대교고, 또 기독교 신자라고 하면, 결국은 그들이 믿는 이스라엘 하나님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뭘 신봉했어요?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그들은 마귀를 신봉했어요. 하지만 마귀를 신봉한다는 사람은 없잖아요. 모두가 다 자비하신 하나님, 은혜로운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서도 왜 그게 마귀가 되는고 하니, 본인이 힘을 원하는데 그 힘은 뭡니까? 사는 힘을 원하고, 사는 힘이 있다는 것은 뭐가 무섭다는 겁니까? 죽기를 무서워한다는 거예요. 결국 죽기를 무서워해서 예수를 찾든, 성령을 찾든, 삼위일체를 찾든, 그게 전부다 귀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박윤진 씨는 그걸 어떻게 전복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는가 해서, 그것을 성경을 통해서, 즉 "우리가 하는 것은 마귀다" 라고, 그걸 전복하고 뒤집어서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없는가를 시도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어디에 머물러있어야 되느냐 하면, 신학 안에 머물러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 신학과 성경의 차이는?

그럼 여기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신학과 성경의 차이는 뭐냐 하면, 신학은 인간을 둘로 나누지를 않아요. 모든 인간을 아우르고, 인간을 포섭하고, 인간을 설득시키려고 하고 납득시키려고 하는데, 즉 일단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거예요. 인간으로 보고 시작하는 것이 곧 신학이라는 겁니다.

만약에 다음주에 칼 바르트를 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왜 성경을 하지 않고 칼 바르트 신학을 하려고 하느냐고 하면, 신학을 하는 그 이유가, 일단 신학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거예요.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사람을 그냥 사람으로 받아들이자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뭐냐 하면, 성경자체가 인식론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성경은 인간을 사람으로 안 보고 저주받은 인간으로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어느 인간도 태어날 때부터 죽는 게 무섭지 않은 인간은 아무도 없으니까 말이죠.

성경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니고 괴물로 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을 괴물로 보면 분명히 삐치고 교회에 나오지 않을 사람이 많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성경을 이야기해버리면 사람들이 포섭되지 않아요. 그래서 신학은 울타리를 쳐주잖아요.

다시 말해서, "일단 여러분들은 인간입니다. 인간들 중에서 이것을 깨달은 인간과 덜 깨달은 인간, 즉 인간은 인간인데 약간 수준이 높은 인간과 덜 높은 인간이 있는데, 여러분은 이걸 배우시면 수준이 높아집니다" 라고, 그렇게 추방시키지 않고 아우르고 포섭할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들어준다는 말이죠. 신학이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궁금하십니까? 그러면 삼위일체를 배우세요. 삼위일체를 공부하면 참된 하나님이 거기에 있습니다" 라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몰라도 그 삼위일체를 배우면 졸지에 참된 하나님을 습득한 것이 되지요. 신학자체가 죄가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그 어떤 신학이든 간에, 심지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라고 해도 말이죠.

◈ 껍데기, 껍데기, 껍데기 !!

왜 그러냐 하면, 계란 이야기를 다시 할게요. 계란이 껍질을 형성하지요. 먹을 때는 껍질을 벗기고 먹는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 껍질이 어디서 왔습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고 속에서 밀려왔잖아요. 속에서 밀어낸 것이 껍질을 구성한다면, 계속해서 껍질이 그게 교회사적으로 뭘 형성하겠어요? 껍데기예요. 캘빈 신학, 루터 신학, 칼 바르트 신학, 이근호 신학 등등, 그런 껍데기를 형성한다는 겁니다.

결국 껍데기가 있다는 말은, 좋게 말해서 안에 것을 보호하지만 사실은 안에 것을 감추는 기능밖에 안 하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라는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올라오는 이 껍데기가 가만히 있는 껍데기가 아니고, 여기에 있는 육을 치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껍데기는 만날 벗겨져야 되고, 침을 당해야 되고, 공격을 받아야 되고, 자기를 부인하고, 그렇게 매일같이 부정을 당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지금도 숨어있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거예요.

◈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래서 이렇게 하면 어려운 것이 간단히 정리돼요. 지금도 주님은 부활하셔서 계시는데, 여기서 누군가가 묻습니다. "목사님, 어디에 계십니까? 계신다고 했는데, 주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어느 교회에 계십니까? 어느 집에 있습니까? 어느 동네 삽니까? 복잡하게 하지 말고 딱 깨놓고 이야기해보세요.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물으면, 그러면 정답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지금도 약속 안에 계시는 겁니다. 이게 새 언약을 보는 시각인데, 지금도 주님은 약속 안에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쪽에서 "에이, 눈에 보이는 것을 말해야지" 라고 나온다면, 만약에 눈에 있는 것을 봐버리면, 그것은 껍질이 된다는 말이죠.

◈ 문둥병자 열 명이 단체로 !!

문둥병자 열 명이 단체로 예수님한테 외서 나음을 입었죠. 분명히 문둥병이 나았어요. 옆에 있는 사람이나 일가친척이 다 봐도 분명히 병이 나았다니까요. 그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봤어요. 그런데 아홉 명이 예수님께 왔습니까? 안 왔습니까? 안 왔잖아요. 즉 "병이 낫고 싶은데 나아서 안 왔다" 라는 것, 이게 정상이잖아요.

주체가 뭡니까? 병을 낫게 하고 싶은데, 예수란 분이 병을 낫게 했잖아요. 그러면 자기가 원하는 것, 기대한 것을 다 얻었잖아요. 그러면 안 오는 게 정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즉 사마리아 사람은 왔다는 말이죠. 그 사람도 똑같이 남들처럼 눈이 두 개가 있는데, 똑같은 예수를 보면서도 왜 그 사람은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했습니까?

그는 아홉 명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잖아요. 아홉 명은 만날 하는 게 "하나님을 보여줘.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가?" 라고 할 거예요. 그러나 돌아온 한 사람은 자기의 병 고침을 통해서 뭘 보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원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원하는, 즉 병 고침이 약속이 아님을 알았다는 거예요. 실로암에서 눈을 뜨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게 아니라는 말이죠.

◈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있기에 !!

그렇다면 하나님을 규정할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라고 규정하면 안 되죠. 분명히 우리 안에 있는데, 그 우리 안에 있다는 게 뭐냐 하면, 약속 안에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약속 안에 있으면서 외부적으로 뭔가 일을 하시죠. 무슨 일을 하십니까? "너희들은 비약속이다. 너희들은 죄인이다" 라고 말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그 약속이 곧 새 언약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것이 바로 예수의 피와 살이 아닙니까? 누구로 인하여 죽음이 들어있다는 것인데, 그렇게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있어요.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이 들어있다고 하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을 죽게 한 가해자도 약속 안에 포함되어있다는 말이죠.

◈ 내 피를 묻혀라 !!

그렇다고 하면, 교회 안에서 설교할 때 교인들은 계란 껍데기를 가지고 왔잖아요. 목사는 새 언약의 십자가를, 즉 약속을 설교하죠. 그러나 교인들은 실적을 원합니다. 교회에 나왔기 때문에 이번 주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그러한 실적을 원하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묻히기를 원합니다. 그런 피를 묻히려면, 우리는 "하나님은 이렇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기대하는 자체가 피 앞에서 죄로 드러나야만 되겠죠.

목사가 설교하면서 은근히 교회가 부흥되길 원할 때, 그 설교는 결국 그 교회에서 예수님은 없다는 것을 설교한 셈이 돼버리죠. 왜냐하면, 반드시 예수님이 살아계시면 약속만 드러나는데, 약속이 아닌 어떤 탐심을 가지고 설교해버리면, 아예 그 교회는 백날 집회해도 예수님이 안 계셔요. 그러면 진짜 성도가 그 교회에 예수님과 교제하러 왔다가 예수님이 없는 교회라고 느끼지 시작합니다. "이 교회는 인간들만 있구나. 인간의 주체들, 계란들만 있구나" 라고 말이죠.

이제 정리를 하면,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을 아울러서 인간을 정죄하는 게 아니고, 인간을 애정으로 사랑으로 품어주려고 하는 겁니다. 반면에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진짜 하나님은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긍휼을 입을 자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것이 이 책에 보면 나온다는 말이죠.

(출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 하지만 침멀리는 정죄가 은혜인 줄을 몰라 !!

정작 침멀리 본인은 복음을 모르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복음적이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은 은혜를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입을 자에게 긍휼을 준다" 라는 핵심적인 부분을 끄집어내는 겁니다. 침멀리는 바로 이 부분이 그 뒤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계명의 이름을 결정한다고 본다는 말이죠.

그런데 침멀리는 무엇을 모르는고 하니, 그 은혜가 그냥 주면 그게 은혜인 줄 알고 있어요. 정죄하는 게 은혜인 줄 모르고 말이죠. 우리는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이야기해주는 그게 곧 긍휼이고 자비인데, 그것을 모르고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원하는 은혜, 즉 "나, 죄를 지었어요. 용서해주세요" 라고 하면, 하나님은 "그래, 용서해줄게" 라고 하는, 이런 것을 긍휼이라고 보는 거예요.

우리 자신 안에서 비록 썩은 것이 올라오더라도, 그 주체를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하게 여기지 말아달라고 하는데 말이죠. 인간의 기본적인 것, 그런 껍질을 깨는 게 아니고, 그 껍질을 하나님이 보호해주셔서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나름 그 의미를 가진다는 말이죠.

◈ 사는 힘과 창조의 힘 !!

아까 제가 힘 앞에 무엇이 있다고 말했습니까? '사는' 힘이라고 했는데, 왜 사는 힘이냐 하면, "죽는 것이 두려워서 사는 힘이다" 라는 겁니다. 살려면 무엇이 있어야 됩니까? 우리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의롭고 거룩하고 착해야 더욱더 살 수 있는 존재라고, 그래야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데, 그것은 바로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그 선악과 관습에 의해서 그렇게 이해를 하는 거예요.

죽는다는 말은 저주를 받아서 죽는다는 것인데, 그래서 실로암의 소경을 두고서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저 사람은 무슨 죄를 지어서 볼 수 있는 힘도 없나요?" 라고 하니,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보지 못하기 때문에 힘이 나온다. 그러니 보는 것을 가지고 힘이라고 하면, 그것은 힘이 아니고 너를 망치게 한다. 그게 소경이다" 라고 했어요.

(눅 13: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눅 13: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다시 말해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어야 그게 진정한 힘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한 힘이 될 때, 그 사람은 자기를 보지 않고, 즉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만 보이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 라는, 즉 "하나님이 어떻게 약속을 지상에 새로운 창조로서 일하시는가?" 라는 것만 보이는 겁니다.

◈ 무에서 유의 창조인가? 아니면 유에서 유의 변화인가?

이 서론 대목에서 약간만 더하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방금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창조의 힘' 이라고 했죠. 정말 어려운 이야기인데, '힘' 인데 그 앞에 뭐가 붙느냐 하면, '창조'가 붙어요. 창조의 힘이라고 하면, 한번 물어봅시다. 어렵기 때문에 질문형식으로 해보겠습니다. 무에서 유의 창조입니까? 아니면 두 번째, 즉 변화를 주는 힘이에요? 둘 중에 어느 겁니까?

사실은 저의 질문 자체가 잘못됐어요. 왜냐하면 '무(無)' 라는 개념이 뭐냐 하면, 현재 우리는 있다는 것을 없다는 것으로 바꾸어놓고, 변화를 주되 '유'로 변화되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없는 것과 있는 것을 구분하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있어도 없어요. 왜 없어야 되느냐 하면, 계속 없어져야 창조의 힘을 거기서 뽑아낼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즉 창조의 힘이, 주시는 것과 뽑아내는 것이란 말이죠.

◈ 주체가 찢어지면서 !!

그걸 이번에 논문을 고치면서 집어넣었어요. 공백인데, 즉 주체가 찢어지면서 여기서 틈이 발생하고, 그 틈에서 묵시의 힘이 올라와서 새로운 주체를 또 만들어요. 물론 이 주체는 나중에 다시 깨집니다. 화산이 있으면 화산폭발이 한 번 있는 게 아니에요. 계속 일어나면 계속 마그마가 쌓이고, 쌓인 것이 또 산을 이루고 산이 찢어지면서, 또 마그마가 올라와서 산에 쌓이고 말이죠. 칼데라인가 그렇지요? 여기 호수가 생기고, 화산이 발생하면 퇴적층이 계속 쌓이잖아요.

그처럼 우리의 '주체' 라고 하는 것은 마치 퇴적층으로 되어있죠. 그렇게 쌓이고 쌓여있다는 겁니다. 세 살 때, 일곱 살 때, 아홉 살 때, 열두 살 때의 사고방식, 그렇게 하다가 나중에 어른이 되면 도로 일곱 살 때로 내려가고 말이죠. 이런 층을 계속해서 찢어내는 힘, 이것이 바로 공백에서 올라오는 힘이란 겁니다.

그렇게 주체가 찢어지면서 그 안의 공백에서, 지금 이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힘이 올라오는데, 그 힘을 제가 아까 예수님의 약속의 힘이라고 보았는데 말이죠.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죽으신 힘이 나온다고 할 수 있어요.

이게 만약 맞다면 기존의 신약과 구약성경 해석자체에 큰 오류가 생겨버려요. 어떤 오류가 생기느냐 하면, 이것이 가룟 유다의 이야기입니다. 축복과 저주가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면, 보통은 "우리는 죄인이다. 그러니 저주받아야 돼" 라는 겁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라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언약백성이기 때문에 복을 받아야 돼" 라는 겁니다.

이렇게 "너는 복을 받아야 되고, 또 너는 저주받아야 되고" 라는 겁니다. 즉 "에서는 저주받아야 되고, 야곱은 복 받아야 되고" 라는 것이, 이게 우리 상식이잖아요. 그게 로마서 9장에 나오잖아요. 에서는 미움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가 아는 상식인데 말이죠.

(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 예수님은 저주맨 !!

그런데 앞의 이야기를 거쳐버리면, 에서와 야곱이 어디에 포함돼버리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본인에게서 저주가 나오고 또 복이 나오고, 그렇게 두 개가 다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상식은 예수님은 복을 받은 분이죠. 저주와 상관이 없다고 보는데, 그런데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아는 것은 뭐냐 하면, 저주가 예수님을 통해서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저주맨입니다. 저주를 받아야 될 분이 아니고 아예 저주를 내뱉을 수 있는 능력을, 자격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버릴 자를 버리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는데, 그런데 버릴 자가 아니라 아예 버릴 자를 만들어내는 게 누구의 소관이냐 하면, 그것을 예수님이 만들어내는 게 돼요. 저주받을 자까지도 말이죠. 그야말로 골로새서 1장 16절인데, 즉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라는 겁니다. 이게 요새 CF에도 나오는데, "때문에, 때문에" 라고 말이죠. 즉 "예수님 때문에!" 라는 겁니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 예수님 때문에 !!

그러니 예수님이 지금 약속 안에서 살아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딴 게 아니고 "예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용하시는가?" 라는, 즉 "예수님은 오늘도 어떤 속성을 주시렵니까?" 라고, 예수님을 쳐다보는 식으로 교제를 하게 돼있어요. 즉 "예수님 때문에!" 라는 겁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예수님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런 분이 예수님이라면,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 아니고 거기서 뭐가 나온다는 겁니까? 축복과 저주의 속성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를 마치 반죽에서 수제비를 길게 쭉 잡아당기면, 작은 수제비를 떼게 되잖아요. 그처럼 길게 늘여서 툭 떼면 하나 떨어지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오늘도 어떻게 사용하느냐?" 라고, 그러니 이미 그리스도의 몸의 사지라는 겁니다.

몸체에서 삐쳐 나온 것을 '사지' 라고 하지요? 이게 붙은 게 아니고, 몸체를 길게 늘인 게 사지라는 겁니다. 즉 '지체' 라고 하는 것은 이미 한 몸이 늘어진 것이지, 외부에서 갖다 붙여서 한 몸을 만든 건 아니라는 말이죠. 그런 것을 하려면, 우리가 약속에 의해서 나온, 즉 구약의 이스라엘은 무엇인지, 그런 것을 해야하는 겁니다.

◈ 침멀리가 오해한 것은?

침멀리의 책을 보면, 그가 오해한 게 정말 많아요. 그가 복음을 모른다는 증거가 해석하는데 있어서 나오는데, 래드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그것을 제가 하나하나 지적하겠는데,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어떤 점에서 구약성경을 왜곡 해석하는지를 말이죠. 그러면서도 침멀리가 뽑아내는 성경구절은, 정말 중요한 것은 안 빠트리고 모두 뽑아냅니다. 공부를 많이 했기에, 중요한 대목과 그렇지 않은 대목을 제대로 탁탁 끄집어낼 수 있는 눈이 있거든요. 그래서 이 책은 좋은 책이에요.

◈ '도전과 응전', 과연 그러한가?

그럼 이스라엘은 무엇입니까? 이 책의 서론부분 14페이지 보면, 그 내용이 '이스라엘의 도전과 응전'에 관한 것인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어요. 구약에 관한 책들 보게 되면 안 빠지고 등장하는 게 '도전과 응전' 이라는 것인데, 즉 "이스라엘은 희망을 갖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환란 가운데서도 도전과 응전으로서 묵시문학을 만들어내고" 라고, 그렇게 나오지요. 하지만 도전과 응전을 하는 인간들 멸망해야 되는데, 그것을 침멀리는 모르는 거예요.

'구약역사' 라는 것은, 그냥 역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들 백성들과 함께 계셔서 어떠한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환란을 이겨내는 그들의 역사적 흔적이었고, 그게 바로 계시였다고 보는 겁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런 의식 자체가 저주받은 의식이에요.

◈ 이방민족들도 나름 약속을 가지고 있었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여기 책에서 딴 소리를 하는 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과 다른 이방민족의 차이점이, 그게 '역사성을 갖느냐? 안 갖느냐?' 라는 차이라고 했던 이론은 잘못되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앗수르와 같은 경우에도, 그들이 신을 섬길 때 역사성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 이전까지 이론은 뭐냐 하면, 이방민족은 역사가 없는 자연신이라고 했는데, 그냥 자연과 현재 교류하는 신이라고 그동안 주장을 해왔어요. 구약신학에서 말이죠. 그런데 더 연구해보니까, 이방신이라고 무시했던 그들도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다는 것인데, 그게 의미하는 것은, 다른 말로 도전과 응전인데, 이런 도전과 응전이 있다는 말은, 그들 나름대로의 약속을 갖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약속이 뭐예요? 지금 이뤄지면 약속이 아닙니다. "해줄게. 기다려 봐. 시도해봐. 얻을 수 있어!" 라고 하는, 미래에 대한 소망의 내용이 약속이잖아요. 지금 이뤄지는 것은 약속이 아닌데, 계속해서 역사를 끌고 가는 추진력을 제공할 수 있어야, 그게 약속이 된다는 겁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결국 침멀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빼고 구약을 보니, 그저 하는 말이 무엇인고 하니, "그들은 용썼다. 애썼다. 참 고생을 많이 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재 우리가 기독교 신자로서, 이것 자체로도 하나의 계시적인 의미가 있으니, 여러분은 존재할 가치가 있어요" 라고 아우를 수 있는 신학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경이 아닌 신학을 말이죠. 분리가 아니고 그저 아우르는 거예요. 즉 "하나님은 우리편입니다" 라고, 계속해서 포섭하고 얼싸안아주는 의도가 많이 비치죠.

◈ 성경이 배타시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하나만 더 하고 본론에 들어갑시다. 20페이지입니다. 여기서 "목사님, 성경과 신학의 차이에서, 신학은 사람을 감싸주려는 반면에 성경은 배타시한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 배타시하는 기준이 뭡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제가 아까 계란을 언급했지만, 어떤 점에서는 "배타시하고 나가라!" 라는 기준은 우리가 결코 관여를 하지 못해요.

사람들이 10년을 믿어도 그 다음에 또 잘려서 나옵니다. 성경에도 그러한 내용이 나오는데, 나중에는 그만 화가 나서 성경자체를 안 봐요. 마치 가룟 유다처럼 말이죠. 그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제 아무리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해도 소용이 없었다는 겁니다.

약속자체는 계속해서 무엇이 나오는데, 성경자체가 약속이니까 말이죠. 성경에서 끊임없이 나오는데, 하지만 신학은 어느 정도 해버리면 더 할 게 없어요. 새로운 것이 안 나와요. 그런데 성경은 성령과 함께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사람들을 분류할 수 있는 기준들이 나오죠.

◈ 나의 생각에 괄호를 !!

심지어 옛날에 자기가 알았다고 했는데, 그런데 기준이 새롭게 다가오는 겁니다. 20년 전에는 "이것은 제가 다 아는 겁니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그게 아니라, 세상에 그것이 얼마나 은혜로운지 모른다는 말이죠. 너무 너무 은혜롭다는 겁니다.

여기서 '은혜롭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내 생각에 괄호를 친다. 즉 중지시킨다" 라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잊어버린다' 라는 겁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면 되지?" 라는 것을 빗금을 쳐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앞에 무엇이 있어요? '나' 라는 것이 말이죠. 여기에 '빗금' 이라는 것을, 즉 "내가 뭘 하면 되지?" 라는 것을 빗금으로 쳤다는 말은, "내가 뭘 행할 것인지 생각하지 않아도, 저는 감사하고 고마워요" 라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죽는다고 하면, 보통 사람은 누가 죽어요? 자기가 죽잖아요(?). 그래서 "아이고, 내가 죽다니, 내 딸이 신종플루에 걸리다니" 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은혜가 임하면 어떻게 됩니까? 이걸 제거해버리면 감사하는 겁니다. 그냥 감사해하는데, 그렇게 그냥 감사할 때는 별을 보고 감사하고, 또 달을 보고 감사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감사할 거리를 찾으면 감사가 안 됩니다. 감사거리를 찾으면 감사가 2초 뒤에는 두려움으로 변해요. 자기가 감사할 것을 언제까지 감사해할지, 무슨 사태가 벌어져 감사 거리가 깨지면, 그래서 다시 한번 감사를 놓쳐버리면, 그러면 "나는 무슨 재미로 사나?" 라고, 다시 두려움이 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더 나아가서, 감사하는 자기 자신을 그만 빗금을 쳐버려야 돼요. 그래서 그냥 고마워하는데, 그것을 은혜의 힘이라고 하는 겁니다.

◈ 제 1절, 계시로서의 신명(神名) !!

이제 20페이지를 봅시다. 제1절, '계시로서의 신명(神名)' 이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제목 자체가 잘못됐지요. 계시가 아닌 '성경에서의 신명'이 되어야하는데, 그런데 계시를 쓰는 것을 봐서는 역시 그도 칼 바르트의 영향을 입었다고 볼 수 있어요. '계시' 라는 표현이 전부를 다 아울러주는 거예요.

그런데 계시가 아닌 성경을 주장해버리면, 성경번역이 되지 않아서 성경을 모르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지옥에 가죠. 그러면 그만 신학자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한 것이 되잖아요. 그런데 성경이 아닌 계시로 해버리면, 번역된 성경을 구경하지도 못한 아프리카 원주민들도 역시 자연계시를 받는다는 것이죠.

◈ 칼 바르트 - 예수 그리스도, 설교, 성경 !!

칼 바르트는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를 나누어서, 자연계시는 없다고 하면서 특별계시를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 자체가 본인이 모순돼버려요. 자연계시를 없앨 것 같으면 계시도 없애버려야 돼요. 그냥 성경이라고 하면 되지요. 그런데 그는 특별계시를 셋으로 나눕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다음은 전하는 계시, 즉 설교, 그리고 그 다음은 기록된 계시, 즉 성경, 그렇게 셋으로 나눠버렸습니다.

이렇게 나눈다는 것은, 계시를 인간의 계시가 아니고 계시의 주체를 신에게 두기 위해서 인데,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이것도 모순되죠. 인간을 생각할 때, 그 앞에 신을 두어서 인간은 모자라고 유한하고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 이것은 누구의 아이디어예요? 인간에서 나온 아이디어입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런 아이디어도 다 제거해버리고, 기존에 나와 있는 자연계시도 제거해버리면, "그러면 우리는 할 게 아무 것도 없네" 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도 잘라내고, 저것도 잘라내고, 서로 반대되는 중에 어느 하나는 맞아야 되는데, 반대되는 양쪽을 다 차버리면, 잘라내는 그것은 또 어디서 나왔느냐는 것이 문제가 될 게 아닙니까? 그렇지요?

◈ 신에게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여기 책에의 '신명(神名)'에 보면 나와요. 즉 '이름' 이라고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누군가가 있다는 거예요. 반드시 누군가가 꿈틀거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뭔가 움직이고 있을 때, 그때야 우리는 이름을 붙일 수가 있다는 겁니다.

방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름을 붙인다고 했지요. 그런데 만약에 신에다 이름을 붙여버리면, 누가 신입니까? 자기가 곧 신이죠. 즉 "어이, 수풀 속에 있는 하나님이 있는 것을 안다. 하나님, 빨리 나와. 내가 이름을 붙여줄게. 책상 뒤에서 빨리 나와. 내가 이름을 붙여줄게"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건 뭡니까? "내가 보기에 너는 있음이다" 라는 겁니다. 자기가 보기에 있음이 되니, 누구의 있음이 먼저예요? "나 있음이 먼저고, 그 다음에 너는 나한테 들켜야 비로소 너는 이름이 되고, 내가 이름을 불러줄 때 너는 나한테 와서 하나의 의미가 된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신명' 이란 말을, 즉 '하나님 이름' 이란 말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인식론과 결부되어서 이게 굉장히 복잡합니다.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필히 누군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것은 다음 시간에 하겠습니다.

2009-11-17 녹취 : 한윤범

2013,10,6 재정리함 - 녹취 '구'
20091110b 부산강의 : 침멀리[구약신학]01 - 머리말
(강의 : 이근호 목사)

◈ 신명(神名), 즉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

시작합니다. 신명을 거론할 때, 즉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 라는 개념에 대해서 한국교회나 신학계를 지난 시간에 언급했는데, "도대체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라고 하신다면, 그들은 이런 약점이 있어요. 이름으로 구원한다고 하니까,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면, 그게 이름을 부르는 것과 대체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것이 참 어려운데 말이죠.

예를 들어서, 어떤 남자에게 어떤 여자가 "이 아무개 씨!" 라고 이름을 부르잖아요. 그렇게 부를 때, 이 여자는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고 그 사람을 불렀다는 겁니다. 즉 그 사람의 존재를 불렀죠.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은 그것이 아니에요. 이름을 불러야 된다는 겁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말은, 이스라엘이 없으면 이름이 안 돼요. 즉 이름을 불러야 될 백성이 없으면 이름이 없다는 말이죠.

이건 뭐냐 하면, 존재가 있고 그걸 '관계' 라고 해요. '피' 라는 책에 나와있는데, 어떤 집에 자기 형이 결혼했는데 가보니까 형수가 있더란 말이죠. 그러면 시동생 입장에서는 형수란 관계가 처음 생기죠. 형이 결혼했는데 형수가 생긴 거예요. 물론 형수가 생기기 위해서 형이 결혼한 건 아닌데, 가다보니까 형수가 생긴 겁니다.

그래서 이름을 이야기할 때 제일 좋은 게 뭐냐 하면, 사람은 이름을 부를 때 하나의 개별체, 그것을 개체라고 하는데, 개별자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게 아니고 이름은 하나의 관계의 수건으로 덮어버리는 겁니다. 먹구름처럼 덮어버리죠.

예를 들어서, 이렇게 귤이 4개 있는데 수건으로 덮어버리면 수건 안에 뭐가 있습니까? 귤이 4개 들어있는 게 아니고 그냥 귤이 들어있어요. 갑자기 4개가 뭐로 변했습니까? 이것을 육적 본질이라 하는데, 귤이라는 하나의 성질로 변했어요. 그러면 수건은 뭘 드러내기 위해서 있는 겁니까? 하나하나를 집합으로 만들기 위해서, 즉 귤이라는 한 덩어리를 만들기 위해서 이름이 와버린 거예요.

보통 인간 이름은 한 사람을, 즉 "이장우 목사님!" 이라고 하나만 부르면 되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이름이 등장한 것이 언제냐 하면, 집단을 이룰 때 이름이 등장해요. 그러면 이 이름은 사적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못 불러요. 그러면 집단을 부를 수 있어요? 그것도 안 돼요. 그럼 뭡니까? 이름은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관계, 즉 하나님이 제시한 수건과 같은 관계가 임해야 비로소 이름을 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을까? 저것을 믿을까? 어느 것을 믿을까?" 라는 법은 없어요. "나는 부처를 믿지 않고, 예수를 믿을래" 라는 이름은 없습니다. 이름을 부르려면 자기 자신이 이름에 이미 종속된 이후에야 그 이름을 부를 수가 있어요.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종속되고 예속된 그 이후에나 제대로 파악해서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겁니다.

◈ 자기를 부정하고, 주의 이름을 따로 !!

다시 말해서,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주의 성령이 임했군요.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름을 주셨군요" 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길에 가는 사람을 부르면 자기가 부르는 겁니다. 전부다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부르잖아요.

그런데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주체는 '나' 자신이 아니고, 자기를 부정하고 주의 이름을 따로 주시는데,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너와 나와의 관계는, 네가 만든 관계가 아니고, 내가 이름과 더불어 너에게 덮쳐버린 새로운 관계 속에 놓여있음을 알려주기 위한 총괄적 의미가 이름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아요.

그러니 '주' 라고 하는 것은, 없던 백성도 만들어가면서 주를 믿게 하는 거예요. 그것이 아니고 그냥 우리가 주를 믿는다면, 그 주는 곧 이방신, 즉 우상입니다. 하지만 주께서 만들어주신 사람에 의해서 주어진 주의 이름은 새로운 관계가 있는데, 그건 뭐냐 하면, "나는 주님께 예속된 백성입니다" 라는 의미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출애굽기 13장 1절과 2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출 13: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출 13:2)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 이는 내 것이니라 !!

"이는 내 것이니라" 라고 되어있는데,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 이것을 아는 사람이 참 드물어요.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덮치심이 없이, 그냥 자기가 예수를 믿어버리면 예수가 자기 것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다 써먹었다 싶으면 갖다버리면 되고 말이죠. 누군가가 장기간 교회에 안 나오면 그런 겁니다. 끊고 말고 하는 게, 그것이 자기에게 선택권이 있어요. 그걸 '자유의지' 라고 해요. 그냥 쉽게 말해서 자유인데, 신을 믿더라도 자기가 믿는다는 겁니다.

자유의지 안에 선택권이 들어있고, 이미 선택하면서 선택을 하지 않고 싶은 것과 선택하고 싶은 것을 구분 지어서 선택하게 되어있고, 그러니 선택하는 그 순간, 선택을 안 하는 것은 그 이유가 나름대로 이미 구조화가 돼있죠. 자기 안에 정신적으로 짜여있죠. 예를 들어서, 서랍이 있으면, 손수건을 넣는 서랍이 있고, 양말을 넣는 서랍이 있듯이, 이미 인간 내부에 주체가 구조화가 돼있다는 겁니다.

◈ 인간의 언어는, 명령이고 강요 !!

라캉은 그것을 '언어' 라고 합니다. 인간은 말을 내뱉을 때는, 자기 내부에 있는 정신적인 구조를 남에게 강요하고, 명령하게 된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 언어는 명령인데, 왜냐하면 "너는 무조건 내 구조에 무릎을 꿇어야 돼. 너는 무조건 내 주체의 구조에 편성돼야 돼" 라는 겁니다.

그러니 "주여!" 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건 예수님이건, 내가 생각하고 내가 기대하고 내가 예상한 내 인생의 틀에 무릎을 꿇어!" 라는 뜻이죠. "주여!" 라고 세 번씩이나 부른다는 것은 강제성을 이미 띠고 있는데, 더욱 더 말이죠. "무조건 복을 줘!" 라는 겁니다.

그런 복을 달라고 할 땐 무엇을 계산했다는 겁니까? 이미 "이런 것은 저주입니다" 라고 계산을 했죠. 그래서 복을 달라고 할 때는 저주는 주지 말라는 뜻이죠. 그러니 그 이전에 이미 뭐가 복이고 뭐가 저주인지 이미 구분돼있죠. 무엇이 저주입니까? 자기를 불편하게 하면 저주이고, 자기를 편하게 하면 축복이 되죠. 예를 들어서, 자기 아이가 수능점수를 많이 받으면 축복이고, 옆집 아이가 많이 받으면 저주가 되죠.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죠.

◈ 출애굽의 유월절 사건 !!

그런데 출애굽기 13장 2절에 보면, 이미 "너는 내 것이라"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내 것이다" 라고 하는데는 근거가 있는데, 무슨 근거입니까? 그 근거를 사건이라고 하죠. 무슨 사건이죠? 그게 출애굽 사건인데, 첫 번째 유월절 사건을 일으키게 되면, 그것을 한번 정리해봅시다.

유월절 사건을 누가 일으켰는고 하니, 주의 이름으로 일으키면 거기에서 주의 백성이 나오는데, 주의 백성은 단독적으로 존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단독으로는 못하고, 주의 백성은 누구의 소속인고 하니, 주의 것이 되죠. 왜냐하면, 장남들이 다 주의 것이면 밑에는 다 주의 것이니 말이죠.

그렇다고 하면, 앞으로 이 유월절 사건으로 해서서 주의 백성이 생기면, 이 하나가 뭐가 되느냐 하면, 다음에 이스라엘을 밀어주는, 하나의 보다 더 범위가 넓어지고 심화된, 더 깊이 있는 사건이 됩니다. 이 사건에 기준해서 그 다음에 주께서 또 일을 나서시면, 이 사건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추방이 되죠. 그래서 주님은 뭘 하느냐 하면, 약속으로 자기 백성이라도 계속해서 발길로 차고, 그리고 기생 라합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됩니까? 이 사건에 의해서 이방인이 이스라엘에 편입되죠.

◈ 차고 들어오고, 또 차고 들어오고 !!

그러니 이스라엘 중에서 발길로 찰 사람은 차고, 들어오는 사람은 들어오고, 그렇게 계속해서 차고 들어오는 작업이 일어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주의 일은 사건인데 이 사건은 그 사건에 해당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새롭게 정립이 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나가면 결국 무슨 정립입니까? 주의 이름이 점차로 구체화가 되겠죠. 그러니 구약은 주님의 이름이 주로 구체화되는 여정을 말해줍니다. "주께서, 주에게, 주로 말미암아" 라는 겁니다. 남는 것은 주님밖에 남지 않고, 즉 그리스도 몸밖에 남지 않는 것이죠. 이게 신약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구약 때부터 주의 이름으로 해왔다는 거예요.

이러한 주님의 사건을 '인간' 이란 이름은 누구의 입장에서 자꾸 오해를 합니까? 인간 입장, 즉 자기 입장에서 오해를 하죠. "아이고, 주님께서 우리 큰아들을 살렸구나" 라고 찬양했던 그들이 광야에서 데모하잖아요. 왜 그래요? 자꾸 오해하는 거예요.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 라고 하면서 말이죠.

◈ 주의 이름이 새로운 사건으로 계속 간섭하지 않으면 !!

그러니 결국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너는 내 것이다" 라고 규정한 일방적인 사건의 경우에, 그 사건에 우리의 신체가 우리 힘으로 부합될까요? 안 될까요? 우리 힘으로 부합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체는 아무리 용을 써도 결국 주의 이름을 빙자해서 자기 이름을 굳히기에, 즉 "내가 얼마나 하나님이냐!" 라는 것으로 방향을 틀어버려요.

그것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이고, 이삭도 마찬가지이고, 그 어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끊임없이 주의 이름이 새로운 사건으로 간섭하고 또 간섭하지 아니하면, 그 어떤 인간도 주님의 양으로서, 결코 목자가 인도하지 않으면 주의 나라에 갈 수가 없다는 겁니다.

◈ 내가 왜 깨져야 돼요?

아까 한 것을 다시 해봅시다. 계란이 껍질이 있는데, 껍질은 어디서 만들어내요? 속에서 만들어내지요. 그럼 껍질이 이뤄지지요. 그 껍질은 누가 공격합니까? 주님이 공격하면 껍질은 계속 깨져야만 되죠. 왜 자꾸만 깨집니까? "나는 복음을 아는데, 나는 십자가를 알고 언약도 아는데, 이만하면 구원을 받았는데" 라고 하는데, 그런데 왜 깨져야 돼요?

그 앞에 이게 주체가 되고, 그 주체는 고정화가 돼요. 고정화가 되면 이름이 붙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예수를 믿는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말이죠. 그래서 아까 말했잖아요. "감사할 때는 감사하는 나도 쳐버려라" 라고 말이죠. 자기 딸이 신종플루에 걸렸다고 하면, 그것도 역시 쳐버리라는 겁니다.

◈ 흘러가는 액체의 속성으로 !!

그것이 바로 은혜가 올 때, 주의 이름이 올 때, 즉 "주님만 있으면, 주의 은혜만 있으면, 저는 주님의 긍휼과 자비만 있다면 됩니다" 라고, 그렇게 우리는 자비와 긍휼의 속성이 보여주는 하나의 액체가 되는 겁니다. 껍데기는 딱딱한 고체인데, 액체는 기울이면 저쪽으로 흘러 내려가는 거죠. 어제도 액체였고 오늘도 액체인데 말이죠.

그런데 시건방을 떠는 우리는 그 액체를 매일같이 딱딱한 고체로 만들어서, "주여, 이만하면 됐습니다. 오늘밤에 천당에 갔으면 좋겠는데" 라고 하면, "앞으로 너는 할 것 많아" 라고, 그렇게 되어서 내일이 되면 또 흘러가야 돼요. 그렇게 또 해야 돼요. "이만하면 나는 구원이 됐는데, 왜 자꾸 나를 고생시킵니까?" 라고 하면, "너는 스데반 집사처럼 돼야 돼"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되기 싫은데요" 라고 하면, 주님은 "안 돼. 해야 돼" 라고, 그게 흘러가는 속성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주의 이름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는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의 이름과 병행해서 나타나는데, 그러면 우리 이름은 매일매일 깨져야만 되고, 깨지게 하는 그 능력을 따라가 보면, 거기에는 주의 이름이 조금 전보다 더 구체화가 된다는 말이죠. 지난 사건보다 조금 더 구체화되는 겁니다.

◈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지금까지는 쉬웠는데(?), 조금 더 어렵게 해보겠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 나라는 뭡니까? 이 주제에 대해서 신약과 구약학자들 얼마나 많이 달려들었습니까? 구약에서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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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