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70이레 논문(인자의 나라)130912-26강b -이 근호 목사
가락-70이레 논문(인자의 나라)130912-26강b -이 근호 목사
이름 : 이한례(IP:203.90.42.222)
가락-70이레 논문(인자의 나라)130912-26강b -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초반부터 묻습니다. 우리가 영혼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우리의 몸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그 질문 자체가 하나님은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여기 몸이 있습니다.’를 용납하지 않아요. 왜냐 하면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영혼이 있느냐 묻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영혼을 다루신다. ‘제 몸이 여기 있거든요. 몸무게가 얼마고… 있습니다.’ 하면 ‘나는 너를 몸으로 다루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항상 있다가도 없고 있다가도 없는 거, 이렇게 하시는 게 하나님이거든요. 죽은 자도 살리시고 가난한 자도 부하게 하시고 부한 자도 가난하게 하시는, 모든 게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게 만드시는 분이기 때문에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라는 생각을 갖지 마시고 오늘도 다루신다. 오늘도 비 오는데 오게 하셨다. 이런 식으로 다루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신다. 그걸 저는 지난 수요일 날 그걸 뭐라 했느냐 하면 그걸 ‘연장’이라 했어요. 연장으로 다루시는데 문제는 우리가 영혼이란 말을 할 때는 이렇게 돼 버려요.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내 영혼을 다루시는 것을 내가 알지? 이렇게 돼 버리면 고 끝에 붙어있는 나는 영혼을 따로 만들어버리고 그걸 지난 시간에 계정, 따로 장부를 만들어요. 장부에 자기 일기장을 만들어요. 오늘도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었다. 내일도 다루어지기 때문에… 그렇게 일기장 쓰는 나는 뭐예요? 그건 하나님이 다루시는 게 아니고 고 대목에서는 내가 나를 다루는 대목을 따로 챙기고 싶은 거예요. 이거 참,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이거 안 고쳐집니다. 고쳐지질 않아요.
하나님이 나를 다루시는 것을 그걸 비디오로 막 찍어서 그걸 하나 모아놓는, 일기장 써서 모아놓고 그것을 보고 본인은 흐뭇해하면서 ‘미치겠다. 내가 너무 신자 같아.’ 이렇게 자기에 도취돼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죄라는 거예요. 왜, 죄는 분열이거든요. 갈라집니다. 하나님은 영혼을 다루시는데 다루시지 않도록 따로 챙겨 놓는, 내가 내 맘대로 다룰 수 있는 그런 영혼과 육을 따로 챙겨 놓으니까 이게 같이 살지 못하고 분열된 거예요.
분열된 것까지는 좋다 치더라도 위급할 때 어느 보따리를 갖고 가느냐 하는 겁니다. ‘주께서 다루었다.’ 이걸 갖고 갈 것인가. 아니면 결국 나라는 것, ‘이것만큼은 못 내놓습니다.‘ 하고 마지막 챙긴 것은 내 것이냐 이 말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렇지만 위급할 때. 그래서 심판 주가 심판 받는 모습으로 나타나서 우리를 심판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심판 주가 심판할 수 있는 권한, 심판 주가 심판 당하는 모습을 가지고 그 다음에 그 모습을 가지고 우리를 심판해 버리는 일을 심판 주 대신 예수님이 하시는 거예요. 그럴 때 예수님은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다루신다고 했거든요. ‘마귀야, 돌이 떡 되게 하라. 그런 소리 하지 마. 나는 아버지의 말씀만 나타낼 뿐이다. 절을 해도 아버지께만 절하고 나는 네 말 안 듣는다.’ 지금 주께서 다루시는 게 중요하지, 내가 따로 주님 앞에 하나님 아버지 따로 나 따로가 아니고 아버지 뜻을 이루러 온 것이니까 내 뜻을 따로 챙길 이유가 없다고 보는 거예요. 주께서 그냥 다루시면 다루시는 거니까.
이 이야기는 이번 주일날 할 건데요. 로마서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버려 두사“ 하는 말이 있잖아요. 몰트만이라는 신학자는 이걸 설명하면서 책 한 권을 지었어요. 십자가 달리신 하나님, 내어버려 두사, 무슨 뜻이냐 하면 ‘내어버려 두사‘ 라고 할 때 어떤 목적이 있느냐, 내어버려 두사, 하는 데 ’내가 내 아들 버릴 테니까 누가 가져갈 사람 가져 가세요.‘ 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있느냐, 아니면 대상 없이 그냥 ’내어버려 두사’냐, ‘내가 죽도록 내어 버릴 거야.’ 라고 그냥 하나님이 독백처럼 그렇게 행동하시는가, 아니면 ‘자 간다. 너희들 받아라.’ 이렇게 된 거냐, 하는 문제에요.
그래서 지난주일 낮 설교에서 경주의 최 부자 집 이야기를 했거든요. 경주의 최 부자 집이 부자지만 농부들한테 얼마나 잘했는지 때가 되면 곳간 열어서 곡식을 내어버려 두사, 이럴 때는 곡식 받는 대상자가 있잖아요. 농부라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곡간을 열어서 자기 아들을 내어버려 두사, 할 때는 그 받을 사람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없어요. 그러면 만약에 이 책이 주님이시고 내가 하나님이라면 아무도 원하지도 않고 아무도 내어버려 둔지도 모르면서 그냥 내어버려 두시는 거예요. 두시면 여기서 모락모락 말씀이 성취를 해버려요. 성취를 하면서 여기서 말씀이 성취돼서 생겨 난 사람이 어떤 인간들이 생겨나요. 그 인간들만 거두어서 천국 백성 되고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백성의 뿌리가 어디에요? 예수 그리스도에요. 예수 그리스도라 했지만 방금 내가 이야기한 대로 하면 내어버려 두신 분에서만 이게 싹이 나고 그게 열매가 맺힌다 이 말이죠.
콩나물에 콩 심어놓으면 거기서 뭐가 납니까? 나중에 솎아 낼 수 있는 콩나물이 자라나잖아요. 모판이 콩이잖아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콩으로 오신 거예요. 그런데 콩이라 하지 않으시고 그냥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어버려 두사,에서 콩이 자라난 거예요. 그러면 여기 자라난 천국 백성은 마땅히 하나님께서 내어 버림을 당해도 마땅한데 내어버려 두사, 하시면서 하나님이 거두어 주시니까 우리는 천국 가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새로 태어난 인간은 별종이라. 기존의 아담의 노선이 아니에요. 그거는 육으로 태어난 거고, 우리는 육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영으로 태어났고 영으로 태어난다는 말은 내어버려 두시는 그 하나님의 버림받는 사건에서만 비로소 거기서 콩나물처럼 나타난 새로운 별종, 새로운 종족, 오스구니스는 그걸 제 3의 종족이라 하는데 제 3의 종족이 거기서 태어난 거예요. 그러니까 마귀가 ‘쟤 율법 어겼어요. 거짓말했어요. 간음했어요.’ 백날해도 송사할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송사할 것도 없고 정죄할 것도 없어요.
그럼 그 사람들은 왜 죄 짓느냐? 죄 져야 버려둠을 당한다는 티가 나지. 이 말 위험한 말입니다. 그럼 티내기 위해서 우리 마음대로 죄 져야 되겠네. 이런 주장 나오지만 어쨌든 원릭 그래요. 내어버림을 당하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해도, 돈 벌고 밥 먹고 뭘 해도 우리는 이게 죄라는 걸 알아요. 내어 버림을 마땅히 당해야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 성취 차원에서 마땅히 버림받아야 될 자도 마땅히 구원받음으로써 누가 흡족하고 누가 만족하시냐 하면 버렸다가 취하시는 아버지의 뜻이 성취됐다는 점에서 아버지는 흐뭇해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좋으면 됐지요. 마귀 좋아할 필요는 없잖아요. 하나님 좋으신 대로 살면 돼요. 우리의 바탕은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게 하는 것. 그 과정에서 다루는 것이 하나님의 영혼입니다.
영혼! 내가 너를 영혼으로 다루겠다. 영혼으로 다루면 거기서 죄를 짓고 싶은 모든 본색이 영혼에서 나와요. 육신이라 하는 것은 그냥 눈에 보이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몸의 다른 요소가, 내가 욕심을 낸다. 내가 하나님을 미워한다. 이 모든 것이 영혼에서 나온다고 보시는 거예요. 그 영혼을 주께서는 그렇게 죄의 원천으로 다루시는 겁니다.
네 영혼이 어떻게 된다? 유명한 말씀, 네 영혼이 잘됨 같이, 아시겠죠? 주께서 그렇게 다루시는 겁니다. 그렇게 말 잘하는 그 사람이 ‘그러므로 네 영혼이…’ 법정에서는 아무소리 안 하고 가만히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혼을 다루시면서 또 뭐를 다루시느냐 하면 육신을 다룹니다. 너는 육신이야, 쥐면 흙이야. 너는 백날 고생해봐야 너는 흙으로 돌아가야 돼. 너 DNA고 뭐고 전부 다 흙덩어리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육신으로 다루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여, 정신 좀 차립시다. 육신으로 나올 때는 미리 통보해주고 영혼으로 할 때는 착해라. 찬양하라 할 때는 그렇게 다뤄주시면 안 됩니까? 다루는 것은 누구 맘대로 다루느냐 하면 하나님 맘대로 다루시지 ‘가만있어 보세요. 제가 좀 바쁜데 육신은 다음에 다르시고.’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협상할 입장이 안 됩니다. 영혼으로 다룰 때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이런 죄악 된 의가 나온다는 것이고, 육신으로 다룰 때는 뭐냐 하면 먹고 싶을 때 먹고 즐길 때는 즐기고, 낼 장례식에 갈 예정입니다만 장례식에 가면 늘 생각나는 것이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장례식에 어른이 돌아가셨거든요. 전부 다 울어야 되는데 하필 그때 mbc에서 웃으면 복이 와요. 가 나와서 온 손님들이 ‘하하하’ 잔칫집인지 초상집인지 분간도 안 돼요.
그러니 이게 뭐냐 하면 영혼은 내 속의 영혼은 울고 싶지만 내 육신으로서는 웃음이 나오는 거예요. 웃기니까. 나는 그 모습 보고 더 웃기고. 체통과 체면은 있지만 배고프면 그런 것이 아무 소용없어요. 돈 달라, 밥 달라 할 수밖에 없죠. 아직까지 그런 일이 안 일어났다는 것은 그만큼 아직까지 유지할 만한 돈이 있다 그런 뜻 이예요. 정말 급할 때는, 사기 치는 사람이 왜 사기 칩니까? 복수하기 위해서 사기 치거든요.
인간의 본성은 뭐냐 하면 참을 수 없는 복수심! 이걸 걷잡을 수 없는 복수심, 모든 행동 하나에 다 복수가 들어있어요. 이유도 없어요. 자기가 누구한테 당하지도 않으면서 복수는 있네. 뭐든 당해야 복수인데 사람은 모든 생각과 행동이 전부 다 복수로 돌멩이처럼 뭉쳐 있어요.
왜 복수가 있느냐, 그것은 마귀가 신에게 복수하고 싶은 거예요. 이미 자기는 종말이 끝났어요. ‘하나님 아들이여 나를 멸망하러 왔죠?’ 이미 알아요. 자기는 자기 운명이 이미 확정졌다는 거. 이거는 뭔가 변경할 여지가 없잖아요. 남는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복수밖에 없죠. 복수의 앞잡이로서 에덴동산에 들어와서 아담과 하와를 거짓말로 꼬여서 자극시켜서 선악과를 따먹게 했고 하나님은 거기다 덩달아 그 선악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만 한 고런 과일을 일부러 또 달아놓으셨네. 아마 그날 안 따먹었으면 그 다음날 아마 또 따먹었을 거예요. 어차피 따먹게 돼 있다니까요. 한 달 참으니, 두 달 참으니, 관계없어요. 따먹으면 죽는 건데, 한 달 참았다고 ‘네가 한 달 참았어요? 아이쿠, 이뻐라.’ 이런 거 없어요. 따먹으면 그냥 죽어요. 어쩔 수 없어요. 확정된 거니까. 우리의 복수심도 이미 우리의 본성으로서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산 안 가져왔을 때 비오면 복수하고 싶어요. 모든 게 복수심입니다. 엄마가 자식한테 하는 것도 복수심, 남편이 아내한테, 남편이 아내한테, 부부가 결혼하는 것도 서로의 복수를 주고받기 위해서 결혼하는 거예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토록 죄악 된 영혼으로, 내 속 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원하나 또 다른 법이 있어 나를 사로잡아온다.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다뤄줘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빛이 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야 천국 가서 자기 자랑 안 하죠. 내 자랑 털어내라고 우리로 하여금 복수심 발동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럼 복수는 없다는 말입니까? 복수 없으면 안 돼요. 반드시 복수는 있어요. 복수는 누가 하느냐? 복수는 주님이 해요. 시편에 보면 보복심이 나오죠. “이런 자를 빌어먹게 하옵소서“ 이런 시가 막 나와요. 성령 받은 분이 시를 쓰면서 ”주여 나한테 못 되게 한 놈 10 리도 못 가서 발병 나게 하라“는 식으로 그렇게 못 된 시를 쓸 때에 우리의 선입관이 깨지잖아요.
아까 유튜브 동영상 할 때 제가 베이컨 이야기했죠. 베이컨이 4가지 우상을 언급했죠.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그리고 연극의 우상, 연극에서 본 것이 진짜인 줄 알고 착각하는 거. 대표적인 게 교회 예배죠. 예배를 하고 세례 받고 떡 먹음으로서 이게 연출이거든요. 그걸 함으로서 마치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믿고 싶은 이 우상 성.
시장의 우상은 뭐냐, 누가 뭐라 하더라. 시장에 가니까 누가 뭐라 하더라. 이런 거. 천안 함 사건이라든지, 국정원 사건, 이게 전부 다 실제적으로 여론과 여론이 물고 와서 하는 거잖아요. 여의도 주식 시장에서 떠도는 찌라시, 전부 다 모든 내용이 시장 통에서 사람들이 주고받으면서 네거리 왔다 갔다 하면서 듣는 그걸 사람들이 진짜처럼 믿는 우상.
동굴의 우상은 한 곳에 갇혀 있다고 그 세계가 전부인 줄 아는 우상. 종족의 우상은 그 집안의 분위기로서 그게 진리라고 굳혀지는, 기독교집안은 기독교로, 불교집안은 불교 안 믿으면 조상대대로 벌 받는다고 아는, 공덕을 아십니까? 도를 아십니까? 가 바뀌어서 공덕을 아십니까? ‘제가 아저씨 보니까 아저씨가 받은 복이 있는데 세상에 그걸 다 못 써먹고 있네. 나한테 시간 내서 5분만 이야기 들어보세요. 음료수만 사주시면 됩니다.’ 그래서 가면 지금 아저씨가 받은 복이 있는데 못 다쓰고 있다 이 말이죠. 그걸 쓰시면 복 받습니다.
방법은 뭐냐, 방법은 돈을 내시고 우리 모임에 가서 한복 갈아입고 절하고 한번 제사 드리는데 얼마 내면 됩니다. 한번에 3만원 내면 되는데 한번만 하면 안 되고 나이만큼 살아온 만큼 29살이면 29만원 내야 돼요. 하게 되면 떠도는 영혼들이 다시 돌아가고 어떤 사람은 5억 뜯긴 사람도 있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 모든 원인이 나라는 개념, 자아라는 개념을 따로 만들어 놓고 그걸 누가 다룬다? 내가 스스로 자립적인 존재로서 다루고 싶은 선악과 따먹은 티를 팍팍 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차라리 그걸 공개하세요. 주님 앞에! 십자가 앞에 공개해서 주님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떡이 되던 간에 둥글게 만들든지 네모지게 만들든지 그건 주님한테 일임해 버리세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기가지지 말고 내 자아가 누구 자아? 주님 자아로 넘겨버리면 주께서 우리를 육신으로 다루시고 때로는 영혼으로 다루시고 ‘너 이런 죄 졌잖아. 아이고, 배고프니까 꼴좋다. 원망하더니만’ 하여튼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그 다루신다는 자체가 이스라엘이고 그게 바로 성도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이게 하나님의 형상은 없어요. 없고 하나님의 형상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아담의 형상으로 바뀌는 겁니다. 아담의 형상으로 바뀌었으니까 그러면 인간이 아담의 형상이냐? 아담의 형상 맞아요.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어요. 언약이 들어오면 아담의 형상밖에 없어야 되는데 거기서 하나님의 형상이 그 안에 활동해요. 기생충처럼 회충처럼 거기서 살아 역사해요. 그래서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 지은바 된 자를 함부로 욕하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면 아담의 형상은 어떠냐? 고정적으로 만질 수 있어요. 아담의 형상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안다고 한다면 손에 잡히지 않고 모른다고 할 때 그때 나타나요.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자꾸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알게 되면 그걸 모아서 어디다 이렇게 합류시키느냐 하면 나의 형상, 아담의 형상에다가 집어넣어서 고상한 거룩한 더 착해진 더 성장한 더 성숙된 아담의 형상을 나라고 붙드는 그런 심보가 아주 많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속에 작용하면서도 우리 손에 잡히지 않게 돼 있어요. 그럼 잡히지 않는다는 말은 도망친다는 말인데 계시가 도망친다는 말인데 결국은 아담의 형상으로 하여금 아담의 형상을 유지하는 이 자아로 하여금 욕설을 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일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를 딱 하니까 복음 아는 사람이 옆에 와서 ‘집사님 기도 했어요?’ ‘예’ ‘하나님이 그 기도 안 듣습니다.’ 하니까 그 집사님이 화가 나죠. 자기 자신을 무시하니까. 얼마나 열심히 했다고요. ‘당신은 무슨 근거에서 남을 함부로 평가합니까?’ 하니까 성경에 보세요. 너희는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고 오직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한다. 이렇게 돼 있어요. 이거 얼마 전에 제가 설교했어요.
“탄식으로 기도한다.” 그냥 기도하는 게 아니고 탄식하면서 기도하죠. 탄식은 왜 합니까? 제대로 기도했으면 뭣이 성립이 안 됩니까? ‘아이쿠, 기도 제대로 해’ 이러죠. 탄식 나오죠. 탄식한다는 말은 결국 우리의 모든 기도가 어설프기 짝이 없다 이 말이거든요.
솔로몬 기도는 왜 들어줬나? 아직 솔로몬은 신약이 아니에요. 지금 그 이야기는 신약 시대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질 때 보면 어떤 인간이 빌어도 온전한 기도가 되지 못해요. 아브라함이 기도해서 아브라함이 기도 응답해서 구원받을 거 같으면 아브라함이 메시아게요. 마지막 기도할 것은 오직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뜻을 아시는 분은 아브라함이 아니에요. 아버지 뜻을 완전히 알아서 기도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 뜻을 아시는 분이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그 다음에 ‘아! 내 기도 잘못 됐구나.’ 그러면 주님의 탄식하는 기도가 응답되잖아요. 그런데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주님의 응답한 기도를 내가 요걸 내 것으로 이렇게 합류를 시키려고 시도를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지금 하나님의 형상 이야기인데 그 대목을 한번 찾아보고 싶은데 성경책을 안 가져와서 내가 찾아보라 하면 민망할까 싶어서 차라리 나도 성경을 안 보면서 나가려고 하는데… 성경이 왜 무거운지… 여러분 여기 읽어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자들로 또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미리 정하셨으니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4가지 나오죠. 요 일을 누가 하느냐 하면 요것에 대해서 성령께서 탄식하면서 기도한 그 기도의 경로가 요거에요.
성령의 기도 궁금합니까? 요거에요.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는데” 요거는 누가 해야 됩니까? 성령이 기도함으로 하죠. 그런데 우리가 그 성령의 기도를 우리가 가져와 버리면 우리가 나를 미리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돼야 되는데 형상이 안 되는 엉뚱한 방향으로 자꾸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나 잘났다. 나 잘났다.’ 자꾸 기어들어가니까 성령께서 어떻게 합니까? 탄식에다 탄식을 더하면서 딱 모가지 쥐고 ‘이게 어디 엉뚱한 길로 가? 내가 정해진 길로 가야지.’ 하고 정해진 길로 오게 되면 그게 뭐냐, 하나님의 형상인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삐지고 우리는 자꾸 곁길로 ‘형상입니다.’ 하면서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을 강제로 멱살 쥐고 강제로 당길 때 우리는 얼마나 울겠습니까? ‘싫어, 싫어.’ 하고 앙탈을 부리겠어요? 앙탈 부리든 말든 그게 하나님의 형상 이예요.
그래서 이 말은 결국 우리는 성도는 매일 같이 하나님의 형상에 이끌려서 형상으로서 살아간다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맞는 말인데 성령을 안 받은 사람들은 이걸 오해한다니까요. ‘아! 내가 형상대로 살아가는구나.’ 이렇게 오해한다니까요. 너보고 이야기한 게 아닌데 마치 내가 역시 내 관리 잘했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대구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막 살아라’ 하는 그것이 우리 자아가 인정하지 않는 상태에서 막 사는 게 되는데 자아가 있는 상태에서 막 살아라 하니까 화를 내는 거예요. ‘막 살면 안 되는데, 지옥 가는데.‘ 이러는 거예요. 우리는 막 살도록 다루어지고 있다 이 말이죠. 백날 뭐해도 너는 막 살은 거야. 그렇게 다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야 성령님의 기도가 우리 기도를 극복하고 성령님의 기도가 찬양을 받죠.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성령님은 오직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하고 우리는 유사 형상만을 고집하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4자, 사자성어로 ‘성대모사‘ 우리는 기껏해야 성대모사밖에 못해요. 바운스, 바운스(bounce) 조용필의 상대모사 하듯이 우리는 기껏해야 성대모사밖에 못해요. 우리는 성대모사의 달인입니다. 평생 동안 우리는 성대모사만 할 거예요. 그런 버림받아 내버려둬야 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버림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무럭무럭 주의 형상이 자라나서 결국은 우리가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그 주님의 하는 그 작업이 로마서 8장에 나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보면서 어려운 게 하나도 없죠. 왜, 내가 하는 게 아니니까. 이걸 내가 한다면 모든 게 막히죠. ‘주님, 지금은 어느 단계입니까? 지금 부르신 단계입니까? 그 다음에 뭐 할까요?’라고 하는데 주님이 지금 이걸 하고 계시니까 어려운 게 없죠.
서울 대학 시험 치는데 자기가 안치고 책상 밑에 누가 들어가서 대신 시험 치고 나중에 시험지 내고 나오면 ‘시험 어떻습니까?’ ‘시험 몰라요.’ ‘잘 쳤습니까?’ ‘잘 쳤겠죠. 뭐’ ‘합격하겠습니까?’ ‘물론이죠.’ ‘시험이 어렵지 않았습니까?’ ‘전혀 어려운 거 없었는데요.’ ‘당신 왜 그렇습니까?’ ‘나 공부 못하거든요.’ 나 공부 못한다는 이 말을 왜 못할까? ‘나 공부 못하거든요.’ 따라서 뭐다? 합격한 거예요. 공부 너~무 못해요. 우리는 기도하면 주님을 울려. 기도도 아닌 걸 기도라고 우기니까 얼마나 주님을 울립니까? 이게 바로 진짜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의 형상 속에서 꿈틀거리면서 언약대로 움직여서 하나님의 형상되게 하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그런데 이걸 인간들이 자기의 자아, 영혼을 주장해 버리니까 자기 선에서 이루겠다는 것이 잘못이다 그 이야기고.
그 다음에 죽은 자의 부활 봅시다. 죽은 자의 부활은 다니엘에 나옵니다. 다니엘 12장에 보면 나오죠. 그 대목을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다니엘 12장 2절에 보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땅에 있는 사람들은 티끌이죠. 티끌인데 거기서 사람이 되어서 한쪽은 영원한 영생을 얻고 한쪽은 영벌을 얻습니다. 영생이란 것은요, 우리 인간 차원이 아니고 생명나무와 함께 있는 그분의 일하심이예요. 생명나무를 가지고 생명나무를 사랑으로 드러내면 영생이고 생명나무가 이토록 무섭다는 걸 보여주면 지옥이고. 생명나무를 가지고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 내시는 그 작업을 하시는 거거든요. 이미 선악과가 없기 때문에. 생명나무 하나 가지고 천국과 지옥을 구분하는 거예요.
그런 일을 하시는데 그러면 그런 일을 하려면 그전에 다니엘에 생명나무를 다룰 수 있는 자격자만이 생명나무를 가지고 사용할 수 있거든요. ‘너는 죽어, 너는 안 죽어.’ 그런 권리와 자격자가 뭐냐 하면 바로 인자라고 다니엘에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니엘에게 인자라고 ‘인자야’ 부를 때는 다니엘은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하게 되면 아!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든지, 본토로 돌아가게 하시든지 하겠구나.‘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뭐냐, 하나님 본인의 일을 하시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건 좀 억지소리 예인데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날에 어른 앞에 손자들 온 동네 첫째 아들, 둘째 아들 셋째 아들 손자들 다 데려와서 왔잖아요. 잠자는 애들 설날에 다 깨워서 데리고 오잖아요. 그러면 할아버지가 어제 은행에서 빳빳한 돈 5만 원짜리를 봉투에 담고 계시니까 애들은 생각하기를 ‘제일 큰 놈은 더 줘야 될 텐데.’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는 태연하게 돈을 세서 봉투에 담으시더니 봉투를 다 꺼내놓으시더니 ‘이 봉투는 김 영감 줄 계돈, 이 돈은 최 영감 술 값, 너희들 왜 서 있지? 가, 너희 방에 가.’ 이러면 얼마나 실망하겠습니까?
다니엘에게 ‘인자야’ 할 때는 다니엘은 ‘이제는 구원받고…’ 있는데 ‘너 가.’ 다니엘에게 인자라는 용어만 사용했을 뿐 이예요. 장차 올 메시아와 아버지와의 대화입니다. 거기에 다니엘에 낄 대화가 아니에요. 실제로 다니엘이 꿈을 꾸게 한 것도 하나님이지, 다니엘이 아니고 꿈을 해몽하는 것도 다니엘은 몰랐어요. 몰랐으면 자기도 목 달아날 뻔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 9회 말 끝에 반전돼서 알게 했지. 아니면 자기도 같이 죽을 판이었어요.
사극 보세요. 임금 앞에서 신하들은 완전히 개죽음 안 당하던가요? 세도가들 단죄할 때 보면 임금 하다가 뒤주에서 죽고 하는 걸 보면 저게 사람 사는 사회인지 멧돼지 세계인지 분간이 안 되잖아요. 옛날 다 그랬었어요. 신분사회니까 사람을 취급을 안 했습니다. 내시는 뭐예요? 남자 자존심이 있지, 아이구, 그거 끊고 들어가서 맛있는 거 먹는다고 그게 사는 거예요? 차라리 내시 안 하고 농사짓는 게 낫지 그걸 영광이라고?
그러니까 이거는 하나님은 인간을 인자로 갈 때는 지금 하나님 자기 세력권 세우는 거예요. 주는 게 아니고. 부활이라는 것은 부활이란 걸 설명하기 위해서 잠시 연장으로서 다니엘을 불러다가 다니엘 이름을 ‘인자야’ 한 것은 ‘너보고 이야기한 게 아니고 장차 인자로 오실 분하고 이야기하는 거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죽은 자의 부활이 뭐냐, 어렵다 했죠. 죽은 자의 부활은 앞에 뭐를 하나 붙여야 돼요. 언약대로 죽은 자에게만 언약대로 부활된다. 언약대로 죽은 자가 아닐 때는 긍정적 의미의 부활이란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지옥 갈 사람도 결국엔 부활하긴 하지만. 긍정적 부활이란 없습니다. 언약적인 죽음 이예요. 그러면 언약적인 죽음이 되려면 인간이 되면 안 돼요. 뭐가 돼야 되느냐, 인자가 돼야 돼요.
그러면 십자가란 것은 사실은 강도를 위해서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란 분이 뭐 되기 위해서? 여러분 아시지만 복습한다 생각하시고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뭐가 되느냐 하면 인자가 돼야 돼요. 이미 인자가 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다니엘을 통해서 이야기했어요. 구름타고 와야 돼요. 구름타고 심판하면서 자기 백성과 짐승에 속한 백성.
그럼 인자의 눈에는 뭐가 보이느냐 하면 인간이 보이는 것이 아니고 짐승하고 자기 백성, 이 둘 밖에 없어요. 짐승의 백성이냐, 아니면 자기 백성이냐. 그런데 바벨론도 짐승이죠. 그리고 바벨론 다음에 바다에서 기어 올라오는 짐승 있잖아요. 바사나라 짐승이죠. 그 다음에 무슨 짐승입니까? 헬라라는 짐승이죠. 그 다음에 마지막 짐승은 뭡니까? 로마라는 짐승이죠. 그 다음은 무슨 짐승입니까? 그 다음엔 짐승이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여기 234페이지 밑에 봅시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진흙의 혼합물로 된 신상이다. 그런데 그 신상은 결국 땅에 엎어진다. 역사 위에 엎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서’ 땅 위에 엎어지는 것이다.』‘역사로서’ 땅에 엎어지는 것이다. 역사 위에 땅에 엎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로서’ 땅에 엎어지는 것이다.
도대체 말장난도 아니고 왜 이렇게 비비꼬아서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말이냐? 이게 금 신상 보면 엎어졌잖아요. 엎어졌다는 것은 땅, 지구 마그마 지각 맨틀 위 지구 땅에 떨어진 거예요. 하지만 이 땅을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역사로 보는 겁니다. 모든 역사는 진척돼 봐야 이게 우상을 만들게 했던 그 저주스러운 그 속성의 땅이라 이 말입니다. 우상을 엎어지게 만들어서 ‘네가 태어난 곳, 저주스러운 곳에 합세해라. 한통속이잖아. 엎어져.’ 엎어져버린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엎어졌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 다시 한 번 거꾸로 해서 돌아봅시다. 그러면 신상이 다시 세워졌죠. 세워지고 여기에 어떤 차이가 나죠.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가 세워지죠. 세웠는데 엎어지니까 그 짐승이 그 짐승이 똑같아요. 바다에서 네 가지 짐승 올라온다 했잖아요. 그 마지막 짐승이 로마잖아요. 그 다음 짐승은 없어요. 왜냐 하면 여기 엎어질 때 어디서 태산, 돌멩이가 하나 날라 오기 때문에 이 역사가 진전될 이유가 없습니다. 돌멩이가 날라 와서 발을 치니까 우상은 다 깨져 버리고 다시 흙으로 환원돼 버리고 거기서 새롭게 깨뜨렸다는 사건, 이거 참 어렵다. 정말.
깨뜨렸다. 다시 태산 세워지는 게 아니고 깨뜨림의 세워짐, 나는 이 교회 다니다 저 교회 갔다. 절에 다니다 교회 갔다. 이게 아니고 나는 절이라는 땅 위에 다시 갔다가 교회라는 땅 위에 다시 갔다. 이게 아니고 다 깨어져야 돼요. 교회 다니고 간에 이게 다 깨어져야 돼요. ‘나 안 깨어지면 나 짐승이야. 짐승 앞잡이야. 주여 저를 깨뜨리게 하옵소서.‘
이 깨어졌다는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집합, 이게 성도들의 나라, 그 인자의 나라, 인자의 백성들 이예요.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된 거예요. 버림받지 않은 사람은 이 성전에 참여했다고 보지 말라 말이죠.
여러분들 누구한테 버림 받았어요? 여러분들은 아담의 형상한테 버림받은 거예요. 본인이 본인을 버린 거예요. 번듯하게 현세적으로 눈에 보이는 돈하고 인기, 권력, 명예, 이런 것 가지고 충분히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요번에 시민대학 강의할 때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국가는 4가지 덕이 있는데 로마에서 나온 건데요. 하나는 지혜, 용기, 용기, 하나 더 하면 정의, 요 4가지를 물에 타서 식후 30분 후에 복용하십시오. 그래서 시민대학에서 강의 했거든요. 이것을 집에 가훈이라고 해 놓을 때 집에 애들에게 이런 식으로 ‘얘야, 너는 어디 가서 용기 있어라. 지혜로워라. 절제해야 돼. 너는 정의로워야지, 나쁜 짓하면 안 돼.’ 이러면 자식이 이렇게 질문한다고요. ‘그러면 엄마, 이거 해서 뭐하는데?’ 그러면 엄마가 ‘그래야 돈 벌지.’ ‘돈 벌어서 뭐하는데?’ ‘돈을 벌어야 행복한 거야.’ 그러면 자식이 ‘행복해서 뭐하는데?’ 그러니까 답변 여러분들이 해보세요.
모든 철학과 과학은 어디에 종속돼 있느냐 하면 ‘행복하자’로 끝납니다. 모든 시민단체나 모든 기업 경영의 강의나 모든 것은 ‘이러면 여러분 행복해집니다.’ 모든 철학, 동양철학, 서양철학, 모든 철학과 모든 강사들의 강의 주제는 결국은 행복하자. 그리고 KBS에서 금요일 날 하는 100분 강의인가도 그 모든 주제는 뭡니까? ‘여러분도 저처럼 하게 되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행복해서 뭐하는데? 거기에 대한 답변은 이 세상에 없어요. 그 준비된 답변이 뭐냐, 복음입니다.
행복하고자 하는 우리 자신이 바로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 행복할 자격도 없으면서 누가 너보고 행복을 달라고, 행복해야 된다고 누가 속에서 그렇게 너를 그렇게 갈구고 못살게 굴더냐. 매일같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다? 돈이 필요하고 돈을 얻기 위해서는 때로는 절제하고 용기 있고 지혜로워야 되고 그리고 정의로워야 되고 이러면 뭐해요. 그게 바로 짐승입니다.
경복궁에 멧돼지 들어왔다는데 멧돼지만 멧돼지인 줄 알아요? 그게 짐승 이예요. 그래서 그 강의 중에 또 이런 게 있어요. 프로타고라스란 사람이 이런 말 했거든요. 사람이 만물의 척도다. 그런 말을 했죠. 그걸 듣고 소크라테스가 약이 올라서 사람이 만물의 척도라 하면 전부 다 사람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복음 듣고 전도 하다 보면 그 사람이 뭐라 합니까? ‘아이쿠, 형님, 다 마음먹기 나름이죠.’ 이렇게 하죠.
불교의 마지막 목표는 뭐라 했습니까? 아까 방금 이야기했는데. 행복이죠. ‘형님은 교회 나가야 행복하고 나는 안 나가서 행복합니다.’ 마지막 목표가 행복 이예요. 프로타고라스가 그런 사람 이예요. ‘세상은 마음먹기 마련이고 진리라는 건 없고 인간의 모든 진리는 내가 측정하면 내가 편한 대로 하면 그게 되는 것이다.‘ 라고 하니까 소크라테스가 약이 올라서 뭐라 하느냐 하면 사람이 만물의 척도라 하지 말고 돼지가 만물의 척도라 하지 그럼. 그 말 맞죠? 돼지가 말하기를 뭐라 하느냐 하면 ’이 돼지가 만물의 척도다.’라고 할 자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그 사람 프로타고라스 이론이 있잖아요. 있으니까 만약에 돼지도 돼지 마음먹기 나름이다. 하면 소크라테스는 뭐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곧 뭐다? 돼지다. 너 같은 사고방식이 돼지나 똑같다. 이건 권위도 없고 질서도 없고 달면 삼키고 쓰면 뱉아 버리는 이게 돼지가 아니고 뭐냐, 소크라테스는 반대하기를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진리는 모르지만 차선책, 그 따라가는 그 다음 대책을 세우는 게 인간이다. 세상은 다 자기 잘났다 하니까 소크라테스가 한번 물어보겠다. ‘야, 너 잘났나? ’ 잘났다 하니까 물어보니까 따지니까 답변 못하거든요. ‘에이, 니 꼬라지나 알라.’ 해서 ‘너 자신을 알라‘ 한 거예요.
죽은 자의 부활이라 하는 것은 죽은 자가 어디 있습니까? 역사 속에 죽은 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역사 속에는 죽은 자들만 있지만 언약으로 인하여 죽은 자는 없죠. 그러니까 죽은 자의 부활은 역사에 없는데 역사에 들어왔던 인자, 다니엘도 사실 죽어야 마땅한 자이지만 불러주기를 뭐로 불러줍니까? 인자라고 불러줘요. 그것은 앞에서 세뱃돈 세는 거와 같은 거예요. 다니엘이 인자 되는 게 아니고 장차 다니엘에게 준 계시대로 인자가 실천에 옮긴다고 다니엘을 하나의 연장으로서 다룬 거예요. 이제 이해되시겠죠.
다니엘에게 뭐라 하느냐 하면 죽은 자가 부활한다. 다니엘은 이건 자기도 이 땅에 행복하게 살면 되지, 내가 죽었다가 사는 그건 다니엘 생각에는 없어요. 다니엘 생각에는 없더라도 인자가 오게 되면 무조건 죽은 자에서 살 자가 살아야 그게 인자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만히 따져보니까 우리가 부활되는 것이 우리가 좋아할 일이 아니죠. 누가 좋아할 일입니까? 주님 좋아할 일이고 주님이 허락도 없이 내 허락도 없이 일을 저질렀어요. 그만. 우리는 저질러 진 것에 그만 말려들었어요. 십자가 믿어져 버리고, 십자가 피가 내 죄를 가져갔다는 것도 알아져 버리고 내가 알고 싶은 게 아니고 알아져 버렸네. 그리고 우리가 죄인하면 의인돼 버리고 우리가 한 게 없다 하면 한 게 되고, 이 말씀이 믿어져 버렸으니까 이건 누가 장난질 친 거예요? 인자되시는 분이 우리를 가지고 다니엘처럼 지금 이 시대에 다니엘로서 활용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빠요. 서울 갔다가 안양 갔다가 대구 내려갔다가 이사 갔다가 지금 바쁘십니다. 바쁘신데 그게 내 뜻이 아니고 결국 모든 것이 주의 뜻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드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믿을 것은 우리를 다루시는 분을 믿어야지, 내가 따로 꿍치고 챙기고 이러지 마세요. 그렇게 되면 놋 신상이 되고 금 신상이 되고 그렇게 되면 우리 죽을 때 모든 것이 다 허망해집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자, 죽은 자의 부활은 뭐냐, 언약대로 죽은 자가 부활이 되는 걸 말한다. 언약대로 죽은 자 이름이 뭐라고요? 인자! 인자가 부활할 때 첫 번 기수입니다. 그래서 첫 열매, 그 전에 죽었다 살아난 사람은 부활 아닙니다. 죽은 자의 부활은 첫 열매는 예수님이 기수가 되고 그 따라서 예수님이 남겨진 그 인자의 자국에 죄인으로서 가담되어서 호출 받은 사람, 강도로서 창녀로서 호출 받은 사람은 인자와 죽음에 참여해서 그 안에서 다시 사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어디 못 박히고?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누가 산다? 그리스도가 산다. 인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완전히 요물 같아요. 우리를 죄인 만들었다 의인 만들었다, 우리를 인자로 다루는 거예요. 그게 죽은 자의 부활인데 다니엘 12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끝으로 인자의 나라, 요거 잠간하고 마치겠습니다. 인자의 나라라는 것은 뭐가 있어야 되느냐, 백성이 있어야 돼요. 백성 반대말이 뭐냐, 왕입니다. 백성이 먼저 생길까요? 왕이 먼저 생길까요? 왕이 먼저 있고 백성이 생기는데 세상 나라에서는 백성이 먼저 있고 왕이 좀 시원찮다? 시원찮다는 게 뭐냐 하면 백성을 굶기면 백성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백성은 동물 같아요. 경제가 안 좋다? 나라 뒤집어집니다. 박 근혜 경제 안 좋으면 가만 안 있어요. 북한 김정은, 배고프면 남쪽으로 내려오게 돼 있어요. 뭐든지 백성은 자기 배고픈 것밖에 몰라요. 그러니까 악마가 딱이라. 오병이어 할 때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 줄 때 백성들이 주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죠. 뭣 때문에? 주께서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들이 나를 찾는 까닭은 이유가 없어. 그 이유가 너 속에서 나온 이유다 말이죠.
예수님은 아버지가 보냈는데 아버지가 보낸 취지는 모르고 자기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떡을 먹고 뭐한 까닭이다? 배부른 까닭이다. 자장면 곱빼기 시켜줘 버려라. 요새 같으면 오병이어 하지 말고 자장면 곱빼기로 돌려야 돼요. 탕수육, 팔보채, 중국집 싫어하는 사람은 딴 걸 하든지. 여기 많이 나오잖아요. 그걸 돌려야 되는데. 그걸 돌리면 아마 집사님을 왕으로 삼을까?ㅎ 곳간을 열어서 굶어죽는 사람에게 풀어주면 그게 왕 되는 거예요. 그게 최고의 왕이고 그걸 베풀 때 배후에 왕을 세운 그 신을 사람들은 사랑의 신이라고 숭배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마다 왕이 있고 그 왕마다 신들이 있는 거예요. 우리 백성을 어여삐 여겨서 불쌍히 여겨서 베풀어 주옵소서.
그런데 진짜 왕은 이스라엘 나라 자기 백성 망하게 하신 거예요. ‘네가 짐승의 나라에 속했구나.’ 바리새인 보고 ‘네 애비는 마귀다.’ 이 예수님의 독한 이 말씀을 ‘아멘, 그렇습니다.’ 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바로 이것이 언약 밖에 있다가 이제는 언약 안으로 들어오려고 들어오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 독한 이야기를 했다고 그렇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죽는 게 얼마나 독한 일입니까? 십자가 독한 일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말씀할 때도 독하게 말씀하십니다. “네 애비는 죽어도 죽은 자에게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라 와.“ 너무 독해요. 독해도 너무 독해요.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 너무 독해요. 왜, 주님이 너무 독하게 죽으셨기 때문에. ”이 쓴 잔을 마셔라.‘ 그러니 이건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가 독하게 마음먹습니다. ’주여, 독하게 저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는 나밖에 모릅니다.’ 그걸 고백하는 자가 인자의 나라의 백성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여전하고 우리는 그걸 사랑인줄 모르고 섭섭하게 여겼지만 십자가 다시 바라볼 때마다 웬 은혠지 웬 사랑인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십자가 보면서 다 벗어놓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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