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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31015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7-봉건사회의 신학자유게시판[신학]

20131015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7-봉건사회의 신학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1015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7-봉건사회의 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좀 난해하겠지만 여러분들이 목사님들이니까 이 정도는 감당을 해야 됩니다. 뭐냐 하면, 삼위일체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수도사, 수도원 나름대로 신학을 전개한 방법이 뭐냐? 아까 이야기했지요. 신비주의인데 신비주의의 원조가 위디오니소스라는 문서가 있어요.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요. 이것이 어거스틴 이후에, 어거스틴 이후란 말은 게르만족이 로마를 다 차지해서 476년에 서로마는 망하고 동로마는 천년 가까이 더 버티고. 나중에 땅 조금 남았어요. 다 빼앗기고. 동로마의 수도가 비잔틴, 오늘날 이스탄불이고 옛날에는 콘스탄티노플.

신비주의 문서는 플로티노스 철학에서 나왔어요. 플로티노스는 200년경 철학자인데 철학자란 기독교는 몰라도 세상에 대해서 신이 있는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 설명을 원으로 설명해요. 원은 중심이 있고 원주가 있고 반지름이 있지요. 중심에서 반지름으로 그리면 원이 이것이 바로 신이 만든 세상입니다. 특징이 뭐냐 하면 중심을 하나로 봐요. 곧 신입니다. 반지름을 정신이라 하고 앞에 있는 것을 영혼이라 합니다. 영혼이란 개별 인간, 또는 개별 짐승들, 개별 피조물들을 영혼이라 합니다.

세상에는 왜 있나? 개가 뛰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가 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플로티노스는, 왜 개가 있지? 저 개가 왜 나타난 거야? 저쪽 동네에. 왜 저 개가 저쪽 동네에 있어야 되지? 누가 길으니까. 길러야 될 정도로 애초부터 왜 뭐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모든 개체에게 있다는 것이 성립 되려면 있음을 있게 만드는 그분도 있어야 되겠지요. 그분이 신입니다. 안셀무스의 신 존재증명에도 나오거든요.

있다는 것이 현재 있는 자의 속성이라면 그 속성은 개별자에게만 있는 속성이 아니고 그걸 있게 만든 신에게도 있기 때문에 신은 존재한다는 겁니다. 12세기에 안셀무스가 그렇게 존재론적 증명했거든요. 플로티노스의 영향을 받은 거지요. 플로티노스는 세상에 모든 걸 있다고 할 때 그냥 보면 차이만 나지요.

여기 개 있고, 소 있습니다. 우린 기껏 저건 개다. 저건 소다. 사람 같으면 사람 있다. 이게 사람 사는 겁니까? 이건 사는 것도 아니죠. 개는 어디서 나왔을까, 소는 어디서 나왔을까, 인간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걸 따져야 인간다운 것이고 내가 만약에 신에서 나왔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지? 신의 뜻대로 살아야지. 신의 뜻이 뭘까? 이렇게 따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이란 말이죠. 개 있네, 소 있네, 사람 있네. 인간치고 이런 인간 없다는 겁니다. 돈 벌기 바빠서 신경 못 쓰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간에 조용할 때 나는 왜 살지, 죽으면 어디로 가지? 이걸 생각하기 마련인데

반지름이 뭐라 했지요? 정신. 정신을 통해 가게 되면 뭘 만난다? 하나, 신을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정신을 따라서 갈 수 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신으로부터 정신이 나와서 개개의 인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걸 신플라톤주의라 했지요. 그러니까 플라톤주의는 아니지요. 그 차이는 뭐냐? 신플라톤주의는 지상에 있는 것과 하늘에 있는 것은 그냥 모방될 뿐이지 일치성은 없어요. 아시겠습니까? 모사, 모방이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것 몇 각형입니까? 삼각형. 이건 몇 각형이에요? 삼각형. 그러면 이것도 삼각형이고 이것도 삼각형인데 아무리 대봐야 모양이 다르지요. 그러면 진짜 삼각형은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없지요. 그게 플라톤주의입니다. 신플라톤주의는 지상과 천상이 끊어져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으로 연결돼있고 정신이 흘러 들어와요. 이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냥 계신 게 아니고 날마다 뭔가 흘러 들어와서 지금의 봉건사회를 이룰 수 있다. 이게 바로 신플라톤주의입니다.

그러면 봉건사회가 너무 세속적으로 흐른다면 수도원에 모여서 기도와 묵상을 하게 되면 신이 내려주신 정신, 흔히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죠. 신의 형상을 따라가게 되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도달한다는 사상, 그 사상이 바로 위디오니소스의 사상이고 그 뒤에 메로빙거 왕조, 카롤링거 왕조에 와서 그걸 구체화시킨 사람이 베르나르란 사람입니다. 교재에 있기 때문에 제가 흐름만 이야기합니다.

에리게나가 본격적으로 신비주의를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데 교재에 나와 있기 때문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복음에 관심 있는 목사님들은 이런 철학자, 신학자 이야기하게 되면 지루해요. 전혀 구원의 능력도 없는 것을 왜 공부해야 되나 싶지만 이야기 들어보고 여러분이 반박을 해보세요. 과연 반박이 되는지. 그러니까 유명한 신학자가 되는 거예요. 반박하기가 만만치 않아요. 반박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되고.

에리게나 사상을 이야기해볼게요. 위디오니소스, 신플라톤주의를 염두에 두시면 이해됩니다. 이 세상은 신 따로 인간 따로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은 신은 보이지 않으니까 인간은 자연을 본다. 이의 없지요. 지금까지는. 따라서 자연에 둘러싸인 인간이 신을 알기 힘드니까 자연을 확대시켜보자. 신까지 포함해서. 그러면 네 가지 종류로 신과 인간이 한 덩어리 된 합일된, 합일이란 신비주의의 중심개념 아닙니까. 신비주의는 신과 합일을 노리고 있잖아요. 성화 되면 나중에 하나 된다는 것. 지금도 개척 교회하는 목사들은 그것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김홍전 계통, 신과 인간이 합일된다는 것, 그리고 지방교회, 위트니스 계열도 마찬가지지요. 전부 에리게나 말 들으면 에리게나를 할아버지라 합니다.

신과 인간이 합일되어 있다. 그러면 합일을 우리가 알고 있는 신과 자연을 같이 뭉쳐버리자. 뭉치면 네 종류의 자연이 성립됩니다. 그게 교재에 나오지요. 첫 번째가 창조를 하시면서 본인은 창조가 안 되는 것, 이것은 하나님. 자연관을 네 토막 내는 건 아니에요. 네 개를 합쳐야 되는 건 맞지만 네 토막 내는 건 아니에요. 자연이 있으면 네 가지 층의 깊이가 있다고 보시면 되는 거예요.

나중에 베르나르는 에리게나의 사상을 더 심화시킨 사람이에요. 심화시켜서 세상의 모든 것은 질서가 있고 계급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역시 봉건적인 사회에서는 질서가 제일이지요. 현재 기존 교회의 기본은 뭐냐? 복음도 아니고 성경도 아니에요. 질서입니다. 복종하는 거예요. 윗사람에게 아랫사람이 복종하는 것. 그래야 교인들이 안정감을 느끼고 등록하면 구원받고 하는 거죠.

그 다음 두 번째가 창조하면서 창조되는 자연. 창조된다니까 얼른 뭘 생각합니까? 피조세계. 아니거든요. 피조세계는 창조하지는 않아요. 창조되기만 하지.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합니다. 모든 피조세계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 형상. 이 에리게나의 주장이 그 뒤에 아벨라투스라든지, 토마스 아퀴나스라든지, 둔스 스코투스, 윌리암 오캄 쪽에 가게 되면 이런 이야기 되거든요. 어떤 이야기냐 하면, 삼위일체도 관련돼있으니까 중요한 이야기인데, 중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죠.

예를 들어봅시다. 존이란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이, “어이, 존.” 하면 돌아보지요. 존과 찰스란 사람이 있다면, 둘 다 인간이지요. 존도 인간이고, 찰스도 인간이라면 둘 다 동일한 사람이에요, 동일한 사람이 아니에요? 둘 다 동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상식인데 그런데 어떤 사람이 혹시 여기 사람 있습니까? 하면 둘 다 손을 들지요. 그러면 사람한테는 둘 다 동일하지요.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동일할 때 존과 찰스가 다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면에서 동일할 때 사람이라는 것이 실제로 그런가, 아니면 개별자에게만 해당되는가? 이 말은 인간이라는 것이 실제로 인간이 있는지 아니면 정신에게만 있는지, 그게 무척 중요한 문제가 돼요.

만약에 실제로 인간이 존과 찰스를 떠나서 따로 있다면 이것은 뭘 설명하는데 유리하냐 하면, 성부, 성자, 성령만 계신 게 아니고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로 계시는 삼위일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거예요. 성부, 성자, 성령 각각 따로 있지만 본질에서는 동일한 분이니까 삼·위·일·체의 설명이 가능하지요.

그런데 존과 찰스는 존도 인간이고 찰스도 인간이지만 이 사람들 떠나서는 인간이 없다고 해버리면 이것은 나타난 것, 눈에 보이는 것, 이것이 전부고 그 외에는 없는 게 돼요. 그러면 존과 찰스 또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어떤 마을에 소크라테스가 살고 있고 어떤 마을에 플라톤이 살고 있으면 어떤 마을에 살고 있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입니까? 분명히 아니지요. 소크라테스가 아니라고 해버리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다른 인간이 돼요. 그러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합칠 수 있는 매개점이 사라져요. 하품 나올 수밖에 없어요. 무슨 말인지 어려워요.

이 교회에 교인이 두 사람 있습니다. 둘 다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 받은 백성이라 하잖아요. 백성 둘이라면 같아야 되는데 점심 먹으러 갔다면 칼국수 먹으러갈까, 추어탕 먹으러갈까? 다르잖아요. 왜 같은 백성인데 왜 달라야 돼요. 어느 정도까지는 같고, 어느 정도까지는 같아요. 이게 중세 때 문제가 돼요. 어느 정도까지 같아야 돼요? 이 교회는 전부 칼국수 좋아한다. 만약에 칼국수 좋아해서 교회 됐다면 칼국수 안 좋아하는 사람은 이 교회 교인이 아니지요.

이게 나중에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교회의 교황의 법과 관련 돼요. 교황이 밑에 사제한테 교시를 줬는데 이것은 수용하겠는데 저것은 수용 안 할 때 교황이 어느 정도까지 징계를 내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삼위일체를 인정하니까 이단은 아닌데 교황의 지시를 안 따를 때는 이단에 속하느냐, 안 속하느냐? 속한다는 사람 있고, 안 속한다는 사람 있고.

루터가 이야기했을 때 신학자들은 제일 먼저 뭘 검증합니까? 삼위일체를 동원하지요. 그런데 루터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동의하면 어떻게 되지요? 그 다음에 문제는 삼위일체 말고 따로 교황이 제시한 법에 맞는가를 보겠지요. 성 베드로성당 지을 때 면죄부 팔았잖아요. 그러면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 95개조 달 때 거기에 뭐가 포함됐습니까? 면죄부가 죄의 면제가 안 된다고 할 때 그 당시 천주교에서는 이단이잖아요. 그러면 그 당시에 루터가 이단 됐지요. 그럼 지금 루터와 똑같이 주장하면 이단 돼요, 안 돼요? 이단 안 되지요. 요새는 제주도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도 하는데. 밀양송전탑 반대데모도 하고. 옛날 같으면 완전 이단 되지요.

삼위일체가 진리도 아니고 결국 교회가 만든 교회법이 진리가 되고, 교회법이 진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교회가 그 당시에 땅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 시대에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권력이 결국 삼위일체를 대신하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신학은 권력을 옹호해줄 때만 그 교단에서 인정되는 신학이 되는 거예요. 결국 신학자들이 신학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복음을 위해서 한 게 아니고 자기가 속해 있는 교단에 아부하기 위해서 신학을 한 거예요.

세속의 왕이 땅을 많이 가지니까 교황이 빌빌 기었단 말이죠. 그래서 주교를 왕이 임명했어요. 나중에는 물론 교황이 임명했지만 왕의 입회하에 임명해요. 복잡해요. 왕이 임명하던 시절에서 교황이 임명하도록 바꿔주는데 공로가 있는 신학자들은 유명 신학자가 되고 대우받는 신학자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여기 신학자들의 명단에 남아요.

‘희다’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흰 꽃, 흰 과일, 흰 눈, 하얀 개, 하얀 말 있지요. 그런 것 많은데 희다는 어디 있습니까? 희다가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론이라 하고, 희다는 없는 그냥 개체만 있다는 생각을 유명론 또는 명목론이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나 그전에 아벨라투스, 아벨라드란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있기는 있는데 개념에 있다. 언어에 있다고 한 거예요.

언어에 희다가 있다면 진리는 어디 있는 거예요? 개념에 있고 언어에 있지요. 그렇다면 진리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조명이 필요합니까? 안 필요하지요. 언어논리만 잘 짜 맞추면 되겠지요. 그래서 그때부터 신이 누구냐가 관심사가 아니고 신을 인간의 논리로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관심을 두게 된 겁니다.

여기서 뭐가 중요하냐 하면, 국가보다도 개체가 중요해요. 이 개체는 삼위일체에서 두 번째 위, 예수님을 닮아서 인간은 ‘영혼+육신’이니까 영혼을 분석해요. 분석하면 ‘감각+오성’입니다. 감각을 중요시한 사람은 윌리암 오캄이고, 오성을 중요시한 사람은 둔스 스코투스고, 그 오성이 신과 관련됐다고 보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고, 오성은 신과 관련 없이 오성 자체가 신의 의지를 갖고 있다고 본 것은 둔스 스코투스고. 도덕이라는 것은 법이 아니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둔스 스코투스에요. 의도성 또는 의지성이라 합니다. 그 의지성을 토마스 아퀴나스가 약간 이야기하기는 했어요.

설명할 때 ‘하나님이 이렇습니다.’ 하는 것은 신비주의입니다. 그러니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크 수도원이에요. 처음에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기도와 묵상을 했습니다. 그 뒤에 천년 뒤에 나왔던 수도원에서는 기도와 묵상 외에 노동을 했어요. 그 노동에서 자본주의의 시초가 나왔습니다. 자본주의가 거기서 태동해요.

이 사람들이 똑똑하지 않습니까. 이왕 노동할 것 적기에 팔면 이익이 많이 남지요. 농부를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머리가 안 되잖아요. 그래서 무턱대고 팔고 하니까 돈이 안 되는데 수도원 사람들은 공부를 하니까 따져서 이문이 남는 쪽으로 적기에 팔면 더 이익이 남는 거예요. 그러니까 많은 물건이 나올 때 저장했다고 없을 때 비싼 값에 팔면 돈이 더 생기고 돈으로 땅을 사는 겁니다. 똑똑한 사람이 돈 벌어요.

누적된 돈으로 이자 받고 빌려줄 수 있지요. 자본주의가 수도원에서 생겼어요. 수도원이 땅이 있고 자산이 있으니까 전쟁을 벌이는 영주들이 돈을 빌리러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도원 신부들이 발언권이 센 거예요. 그리고 사슬교회 주교들은 예배당을 지을 때 수도원에 돈을 꾸러오는 거예요. 그걸 알고 왕이 영주와 거래하지 않고 수도원 신부들과 직접 거래하니까 신부들의 명단들이 여기 교재에 나오는 명단이에요. 왕이 알아주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했던 것은 추상적인 신을 어떻게 하면 구체적인 신으로 만드느냐? 구체적으로 닮은 존재가 인간이에요. 인간의 모든 행위와 의지와 이성적인 태도가 곧 지상에 펼쳐지는 신의 뜻이 되는 겁니다. 그걸 줄이면 내가 곧 신이 되는 거예요. 삼위일체 공부할 필요 없어요. 내가 하는 것이 신의 의지고, 내가 따지는 것이 신이 따지는 것이고, 나의 행동의 신의 행동이 되는 겁니다.

신학자들이 그렇게 하면서 여기서 주체가 되면서 주체사상이 봉건사회가 무너지면서, 봉건사회는 십자가운동 때문에 무너지거든요. 항상 망할 때는 상대적으로 이익 보는 사람이 있어요. 이탈리아 북쪽 밀라노, 피렌체 장사하는 사람들이 이익을 봤거든요. 그들이 상공업을 일으켜서 새로운 부르주아, 새로운 중간계층이 등장하면서 귀족들, 기사들만 갖고 있던 권력을 재산 많은 상공인들이 우리도 귀족생활하자고 나왔던 말이죠.

그들이 필요한 신학은 왕과 귀족의 절대적인 권력은 신이 주신 질서라고 여겼던 것 말고, 시민들이 하는 행동도 곧 신의 뜻이 되는 그런 신학이 요구되는 거예요. 이젠 왕도 새롭게 부상하는 새로운 재산가에게 아부를 하고 눈치를 보게 되고 전쟁은 벌어야 되고 돈은 필요하고 돈 빌려오면서 그들의 신학, 그들의 종교도 인정해줘야 되고.

그러면서 농민들의 반란은 심화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경작지는 모자라니까 농민들이 불만이 있으니까 영주들도 왕으로부터 계약을 파기하고 여기에 새로운 종교 이제는 신의 뜻이 왕, 영주로 내려오는 계통이 아닌 새로운 계통이 필요할 때 등장한 사람이 루터였고, 칼빈이었습니다. 만인제사장설, 성령이 임하면 누구나 사제가 될 수 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하나님의 성경 외에 다른 전통이 필요치 않다. 전에는 신부들만 먹던 성만찬을 평신도들도 먹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혁주의 바람이 부니까 여기에 대해서 천주교가 전통을 내세우면서 가만있어야 돼요, 변신을 해야 합니까? 역시 시도하는 거예요. 그동안 그들의 전통이라는 것이 그 시대에 맞춰왔다는 전통에 불과하다는 것이 티가 나버립니다. 진리는 신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권력과 땅이 신의 뜻이라고 그들은 주장했고 그걸 따져보니까 내가 하는 것이 곧 신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에서 루터와 칼빈이 이야기한 것에 동의했습니다. 동의한 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마냥 칼빈, 루터에 묻혀 있겠습니까? 결국 자기 본색을 드러내지요. 천주교 반대하기 위해서 개신교 갔다가 이제는 자기 자신이 곧 신이니까 자기가 신인데 누구한테 간섭 받아요? 완전히 인간의 이성의 자유를 주장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여기서 신이 계시기에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니까 평소에 인간의 관심사가 결국 신의 존재가 아니고 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나답게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긍정하기 위해서 신은 보조로서 있는 겁니다.

개신교가 등장하는 동시에 유럽의 세계는 드디어 근대주체사상으로 되면서 여기서 새로운 권력이 나옵니다. 권력이란 왕의 권력이 아니고 시민들의 권리가 신이 주신 주권이란 주장이 중세신학에서 벗어나면서 서서히 마키아벨리, 홉스, 존 로크 그전에 그로티우스. 중세에서 넘어가는 시대를 르네상스라 하지요.

르네상스란 중세를 제거하고 옛날 로마 쪽으로 눈을 돌리는 걸 말합니다. 거기는 인간 자체의 미, 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인간 자체의 미에 대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그런 시대에요. 전에는 신이 주신 인간이기 때문에 신의 속성을 닮기 위해서 모든 풍경화나 조각이 경직돼있었는데 그러니까 마리아가 전부 웃지 않고 있었는데 모나리자처럼 은밀한 미소를 띠기 시작하네요.

관심이 신에게 어떤 기능을 하느냐가 중세의 미술이고 음악이었다면, 르네상스의 미술은 뭐냐 하면, 개인, 개별자에 영혼이 있고 영혼에 신이 주신 행위와 의지가 담겨있으니까 개별자가 웃네. 저건 우네. 신이 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우는 게 중요하고 신이 웃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신이 기뻐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기뻐하는 게 중요하다는 그걸 르네상스의 새로운 시대에 돌입되게 된 겁니다.

물론 그 당시 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신이 인간의 모습이 돼요. 전에는 경직된 신의 모습이었지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다빈치에 의해서 신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을 닮아가면서 네덜란드 화가들은 노골적으로 인간의 삶이 곧 신의 삶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보니까 오늘날 철학이라는 게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죠. 뭔가 조금씩, 조금씩 숨겨진 본색이 1500년이란 세월을 거치면서 드러내는 거예요.

우리 교재에 80여명의 신학자들이라 해놓고 나중에 칼빈, 루터 지나고 난 뒤에는 신학자는 별로 없고 철학자들이 나오지요. 왜냐하면 그게 유럽에 새로운 신학의 유형들입니다. 그러면 신학자들은 이야기 안 합니까? 그때 개신교 있고 난 뒤에 신학자들은 신앙고백 만들고 끝났어요. 마치 중세 때 삼위일체 만들고 암흑기에 들어간 것처럼. 에리게나 나오는 200년 동안 암흑시대에요. 이미 삼위일체로 끝났잖아요.

마찬가지로 개신교에서 신앙고백 만들었지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 있지요. 이제 목사, 신부들은 그것만 반복해서 가르치면 돼요. 이걸 교조주의. 마치 옛날 천주교에서 삼위일체 만들고 난 뒤에 그 다음은 모든 게 끝난 것과 같은 거예요. 교조주의기 때문에 교회에서 신학이 발전이 있을 리 있겠습니까? 개신교 신앙고백 어기면 이단 되는데. 이단 되면 자기 땅이 없어지고 자기 교구가 없어지는데. 교단에서 당신 이단이니까 그만두라고 하면 자기 교구에서 잘리는데. 소개 못해줘요. 이단을 소개해줘요? 말이 안 돼요.

개신교가 새로운 천주교가 된 거예요. 천주교는 후임을 소개해줘서 부목사에서 당회장 되거든요. 여기서 찍히면 갈 데가 없다니까. 개척 아니면 갈 데가 없어요. 그런데 개신교는 개척하려면 프랜차이즈 간판이 있어야 되거든요. 파파존스라든지. 파파존스가 아니고 파마존스라고 하면 신고 들어온다니까. 유사품이니까. 부채표가 아닌 것은 활명수가 아니잖아요. 이 교회 교단이 뭐예요? 파마존스입니다. 이상하다. 그러면 교단 없는 자체가 이단 된다니까요. 그럼 교단 만들어야 되겠지요. 만드니까 교단이 한둘이 아닌 거예요.

신학이 발전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신학은 되풀이하는 것이지 발전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천주교 원리에요. 개신교가 천주교에서 벗어났다고요? 안 벗어났습니다. 전통을 벗어나요? 개신교 전통은 전통 아닙니까? 그것도 전통인데. 유럽의 대부분은 부모 마음대로 강제로 받은 세례, 지 죽고 난 뒤에 손 쓸 수 없어서 당하는 장례 외에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어려서는 몰라서 세례 받았고 죽으면 모르잖아요. 그래서 하는 거고. 전통이 살아있지요. 계시가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은 전통의 치밀한 그물구조에요.

프랜시스 베이컨은 네 가지의 우상을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동굴의 우상, 종족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이걸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모든 선입견은 전통에서 온다. 그 전통에서 벗어날 사람도 없고. 이렇게 우상을 조심하라 해놓고 베이컨은 대안이 하나도 없어요. 자기도 거기서 벗어날 대안을 만들지 않았어요.

루터는 이야기했어요. 십자가. 십자가는 숨어있는 하나님입니다. 숨어있는 하나님은 베르나르에서 나왔어요. 보니까 이미 신비주의 전통에서 나온 거예요. 쿠자누스, 에크하르트. 나중에 우리가 루터를 합니다만 루터를 조사해보면 개신교 맞나 할 정도로, 루터는 결국 천주교가 만든 인물이지 주님이 인물이 맞나 할 정도로. 칼빈은 그냥 루터를 모방할 뿐이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성령 받았으면 됐다고 하는 재세례파에서 나오는 종파 중에 하나가 퀘이커교도인데 이건 벌벌 떤다는 뜻이거든요.

퀘이커교도의 주장은 아주 노골적이에요. 무서워요. 지방교회의 선배 격인데 뭐냐 하면, 성령 받은 당신이 곧 신입니다. 그리스도입니다. 설교와 기도는 기다림이에요. 모여서 기다리는 거예요. 혹시 여기에 성령 받은 사람은 설교해주세요. 제가 설교할게요. 다른 사람은 아멘. 지금 계시 받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래서 예배드리는 거예요. 그것으로 장사가 되겠습니까? 잘 안 되지요. 그래서 지방교회에서 지도자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초창기에 했던 방법이 나중에 천주교를 닮아갈 수밖에 없어요. 천주교 보존의 법칙^^ 천주교를 욕하지만 이미 실험실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걸 다 해본 거예요.

그 다음에 창조하지 않으면서 창조되는 자연, 이것은 피조세계를 말하고, 네 번째 창조하지도 않고 창조 되지도 않는 자연은 신에게 회복되는 단계를 이야기한다. 요새 말하면 구속사에요. 그러니까 에리게나는 9세기경인데 이미 뭔가 구속사 비슷한 것, 하나님 형상, 이런 것 다 이야기한 거예요.

피터 아벨라드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인간의 정신 밖에 신이 계시다고 본 겁니다. 안셀무스도 주장했고 성 빅터르란 사람도 주장했는데 어쨌든 신은 인간 정신 밖에도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벨라드는 신이 있고, 없고 그건 문제 삼을 것 없고 신이 지상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신은 이렇게 한다, 저렇게 한다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신이 존재한다가 중요한 게 아니고 신이 하는 행동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반박 됩니까? 반박이 안 되지요. 대단히 인기 있었어요. 안셀무스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은 그 피가 하나님을 만족하기 위해서 마귀한테 피 값을 주는 보상설이라 하거든요. 그러니까 아벨라드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어떤 존재가 한 것이 어떻게 내 것이 될 수 있느냐? 따라서 용서받는 것은 다른 분이 죄를 씻어서 용서받는 게 아니고 내가 어떻게 의지를 발휘하느냐에 따라서 용서받는 것이다. 삼위일체에 의하면 예수님이 예수님 된 것은 예수님의 의지에 의해서 된 것처럼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죄 안 짓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로 할 때만 그게 죄가 안 짓는 것이 되고 바르게 사는 것이지 누가 와서 내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아벨라드의 주장입니다. 대속설을 인정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이것이 그 당시에 수용되겠어요? 삼위일체에 관한 문제는 아니지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의 문제지. 그런데 이것이 그 당시에 대유행을 하고 만족했고 사람들이 좋아했다는 말은, 사람들이 그동안 믿으라고 해서 믿었지만 사실 속내는 내가 죄 지었는데 누가 용서해준다. 그것은 쉽게 안 믿어지고 내가 나쁜 짓 안 해야지 하고 안 하면 그게 죄 아니라는 그것이 더 와 닿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도 착할 수가 있다는 거예요. 만약에 만족설이 돼버리면 나는 뭘 해도 죄가 되잖아요.

그런데 아벨라드의 말에 따르면 내가 나쁜 짓을 할 때만 죄가 되고 내가 착한 짓하면 착하게 되고 혹시 나쁜 했더라도 착한 일 많이 해놨으면 서로 상쇄해서 나는 여전히 착한 사람으로 남게 되고. 그리고 내가 조금이라도 착한 사람이 되게 되면 누구한테 저주받을 일 없고 내가 진짜 신경 쓰는 “나는 행복해야 돼, 나는 살아남아야 돼, 나는 복 받아야 돼.”라는 나의 의지에 모든 교리가 부합되고 만족스럽겠지요. 그게 바로 더 쉽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한 안셀무스의 만족설도 뭡니까? 죄 값을 마귀한데 준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을 선하게 지었는데 마귀한데 넘어가서 죄를 지었는데 마귀에서 벗어나려니까 마귀가, “죄 값 나한테 내야지.” 한다는 거예요. 죄 값을 치를 사람은 없고 꼼짝없이 마귀에 속해 있는데 여기서 “내가 여기 있잖아.” 하고 대신 죄 값을 갚아주는 분이 등장하는데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서 우리가 치를 수 없는 죄 값을 대신 치름으로 말미암아 데려와서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맞습니까?

근본적으로 뭐가 문제지요? 안셀무스의 보상설이 뭐가 문제입니까?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구원 못해서 환장하신 분이 되는 거죠. 그런데 성경이 그렇든가요? 그럴 것 같으면 아예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 말지. 성경에서 모든 구원은 인간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아담이 아니고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만드는 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을 증거하기 위해서 죄인들이 필요했던 거예요. 죄 짓는 자들이 필요했고 그래서 죄 짓게 만드신 거예요.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게 언약이에요. 우릴 위해서 언약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안셀무스 같은 사람들에 의하면, 신은 우리를 구원 못해서 안달 났어. 그러니까 기껏 신은 마귀한테도 져서 조바심을 낸다는 거예요. 돈 안 주면 안 내주는 식이 되지요. 그러니까 안셀무스도 그렇게 그걸 반대하는 아벨라드도 그렇게 토마스 아퀴나스도 마찬가지고. 전부 일단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한다. 다 떼버리면 내가 나를 사랑한다. 그러니 하나님은 여기에 대해서 동조해야 돼. 내가 보기에는 비 언약적이고 비 복음적이고 마귀적인 의식입니다.

그게 누굴 탓할 것이 아니고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지금도 그런 안개가 꽉 우리 속에서 매일같이 피어납니다. 류현진이 3:0으로 이기면 뭐합니까? 기분은 좋다만 당장 끼니 땔 것도 없으면 상관없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내가 류현진 매니저라면 류현진이 산 것은 내가 산 거죠. 그래서 나를 살릴 수 있다면 어떤 신이든 좋은 신이라는 그러한 약점을 우리가 지니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만 잘 되면 우리가 못 되도 우린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백성인 것을 드러내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간단하게나마 많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의견을 보았습니다만 이 시대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날 위하는 하나님인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날 위해서 십자가 진 것이 아니고 주님을 위해서 우리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20131015b 부산강의.hwp (29.5K), Down: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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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32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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