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1015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7-봉건사회의 신학
20131015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7-봉건사회의 신학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1015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7-봉건사회의 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어떤 신학자들이 자기주장을 했는가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어거스틴 이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를 안 해요. 왜냐하면 삼위일체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확정이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다 하나님은 이렇다, 저렇다 하면 그것은 단번에 이단이 돼요. 그러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미 정답이 내려진 입장에서 신학자들은 할 일이 없지 않는가? 할 일이 없는 게 아니고 본격적으로 슬슬 할 일이 생깁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관심이 있는 척하지만 실은 그 당시나 요즘이나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에 관심이 있어요.
그럼 교회가 뭐냐 하면, 사람들의 정신을 장악하는데 관심이 있어요. 사람들의 영혼과 정신을 장악할 이유가 봉건사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봉건사회를 가장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봉건사회는 통치자가 없는 사회에요. 통치자가 없다는 말은, 봉건사회에도 분명히 왕이 있거든요. 이걸 후대에서 왕이라고 하는데 지금 우리가 알기 쉽게 설명하면 왕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이렇게 하면 됩니다. 전쟁하는 전문가로 보면 돼요. 이 사람들이 전쟁하는 이유는 땅을 획득하기 위함이고, 이 땅은 질 좋은 땅을 빼앗기 위해서 전쟁하는 그러한 시대를 봉건사회 또는 봉건사회 이전의 사회였습니다.
476년에 로마가 지중해와 유럽 연안을 다 차지했잖아요. 지중해를 내부 호수로 보면 돼요. 지중해 둘러가면서 로마가 차지했다고 보시면 돼요. 북아프리카,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터키, 그리스, 이태리, 스페인, 프랑스, 영국,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전부 다 로마가 차지하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훈족이라는 이방인이 쳐들어오는데 여러 가지 종족을 합쳐서 게르만족이라 해요. 또 동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 등이 있습니다. 이들이 내려오면서 로마전역을 차지하는데 여기에 전쟁하는 사람들, 일종의 조폭, 깡패들이 일종에 왕으로 오는 겁니다. 로마의 땅을 각각 분할해서 땅 좋다고 다 차지하는 거예요. 이렇게 차지할 때 지난 시간에 어거스틴은 현재의 튀니지, 카르타고에 살고 있었는데 여기에 반달족이 와서 도시를 완전히 점령하고 말지요. 그럴 때 어거스틴은, 로마가 천년왕국이 아니구나. 로마가 기독교나라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독교나라를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피에르 요아킴이란 사람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구약의 시대를 율법시대로 보고, 1260년까지를 그리스도로 보고, 그 이후를 성령의 시대라고 주장했어요. 오리겐의 이론을 약간 참고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은 세대주의도 이런 이야기하는데 이게 뭐가 특별한가 하는데 피에르 요야킴이란 사람은 평신도거든요. 수도사도 신학자도 아니에요. 핍박받는 봉건사회의 농민들에게 이슈가 됐느냐 하면, 봉건사회 제일 위에 왕이 있는데 아까 봉건사회에는 왕이 없다고 했는데 왕이라는 게 어떤 지역을 다스리는 왕은 없고, 자기 영토만 다스리는 한에서 왕이에요.
그러면 왕이 자기 지경 땅이 있을 것이고 주변에 나눠준 땅들이 있어요. 그 땅을 영주가 차지하는 겁니다. 영주 밑에 기사가 있고 기사 밑에 농노가 있는데 영주의 부하가 기사에요. 왕, 영주, 기사는 뭐하는 사람입니까? 맨날 전쟁 훈련하고 연습하는 전쟁하는 자들이거든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왕의 부하가 영주고, 영주의 부하가 기사잖아요. 그런데 기사는 왕의 말을 안 듣습니다. 부하의 부하는 내 부하가 아니에요. 그게 아주 특이한 사회, 이걸 봉건사회라 하거든요. 왕과 영주 사이는 계약관계에 있습니다. 영주는 자기 땅을 세습시켜서 “땅 줄게 네가 알아서 하되 전쟁할 때 도와주고 세금 바쳐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왕이 전쟁하는 자라고 했지요. 전쟁하는 자가 전쟁 안 하면 할 일이 없는 거예요. 요즘 교회 목사는 뭐하는 사람들이에요? 전쟁하는 사람들입니다. 교인들 확보하는 전쟁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목사의 모든 일년 계획은 사람들 빼앗는 그 계획인데 그것 안 하면 목사가 할 일이 없어요.
그런데 디모데전서나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전쟁하는 사람도 되지만 전쟁할 때 뭐부터 해야 돼요? 땅의 전쟁이 아니고 네가 복음에 충실하라고 하지요. 복음을 사수하기 위한 전쟁을 하는 거죠. 그러면 디모데는 뭘 해야 됩니까? 복음이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이며, 여기에 대해서 확신과 배움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목회자가 공부 안 하고 맨날 사람 꼬시는 전쟁만 하게 되면 이것 없으면 할 일이 없다니까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모든 문제는 어디서 생기느냐? 땅입니다. 어떤 면적을 내 것으로 삼을 것인가? 모든 인생사가 땅과 관련돼있어요. 내 땅 없으면 설움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삼국시대 말기에 깡패가 등장하지요. 이름이 궁예. 그 밑에서 백성들에게 인정받는 깡패가 왕건. 세상의 모든 국가에서는 전부 땅과 관련돼있고,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고, 전쟁을 벌이는 사이에서 밑에 사람들을 부릴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땅 전쟁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힘 가진 자의 대해서 힘없는 자는 무조건 종속돼야 되기 때문에 힘 가진 자가 만약에 아리우스파라면 전부 아리우스파고, 힘 가지 자가 아타나시우스라면 전부 아타나시우스가 되고, 힘 가진 자가 기독교라면 전부 기독교가 되는 거예요. 심지어 불가리아에 있는 왕은 전 주민을 바다에 집어넣고 세례를 줬어요. 만약에 거기서 세례 안 받으면 어떻게 돼요? 봉건사회에서는 자기 땅이 없어요. 분배 받은 땅이기 때문에 자기가 이 땅에서 밥 빌어먹고 살려면 반드시 기사나 영주의 지배를 받아야 되고,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그쪽의 종교에 복속돼야 된다 이 말입니다. 아버지가 기독교인데 지가 절에 갈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가 기독교라면 자기 용돈을 위해서라도 그냥 교회에 가줘야 되는 거예요. 예수고 뭐고 모릅니다. 그냥 가주는 거잖아요.
우리가 중세철학을 왜 하느냐? 중세철학, 중세신학은 이렇습니다. 목사님들이 이것 하나만 알면 중세신학이라는 게 철학이라는 게 여기서 나왔구나. 대번에 1분간 이야기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신과 하나가 되는 사회였어요. 신의 자녀들이에요. 고대사회는 신의 지배를 받게 돼요. 그런데 철학이 발달되면서 신을 하늘로 보내는 거예요. 신이 있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겁니다. 이게 스피노자는 추계시대라고 해서 전 세계 모든 문명지역에서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는데 뭐냐 하면, 신을 올려 보내고 인간은 인간 나름대로 생각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것은 중세철학도 마찬가지에요. 신이 무엇이냐 할 때 이미 삼위일체로 정답이 내려졌어요. 325년부터 해서 성령이 아들로부터 오느냐, 아버지와 아들 양쪽 다로부터 오느냐? 아니면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해서 오느냐? 그 문제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눠지잖아요. Fileoque 문제 할 때 끝났어요. 거의 300년 만에 마감됐잖아요.
그러니까 신에 대해서 사람들이 거론을 잘못하면 이단 된다고. 이단 되면 됐지? 이단 되면 땅을 잃어요. 갈 곳이 없다니까. 사람이 땅 없으면 못 살잖아요. 창세기 3장 보세요. 하나님이 아담을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지요. 가인이 벌 받았을 때 겁냈던 것은 죽는 것이 겁나는 게 아니고 남의 땅에 사는 게 겁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남의 땅에 산다는 것은 그쪽에 있는 모든 정신세계에 내가 굴종해야 된다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옛날에 한국에 선교사들이 들어올 때 미국에서 협의해서 강원도, 충청도 쪽은 감리교, 경상도 쪽은 장로교, 나머지는 알아서 하고. 이렇게 나눈 것은 전부 땅 문제와 관련돼있어요.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에 선교 들어갈 때 싱가포르 같으면 싱가포르 서쪽 지역은 장신이 장악하고, 동쪽 지역은 합동 측이 장악하고 넘어오면 안 된다. 자기들끼리 그렇게 협약을 맺은 겁니다.
삼위일체가 문제가 아니고 인간에게 가장 문제가 뭐냐? 내가 생존할 나의 영역, 나만의 영역을 갖추는 것, 이게 인간들 속에 숨겨진 담겨진 속셈이에요. 괜히 삼위일체를 거론한다는 것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설명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무조건 삼위일체 해야만 그 교회에서 이단 아닌 사람으로 남을 수 있으니까 하는 거예요. 요즘 교회도 그렇지만 옛날 교회는 더더군다나 그런 거예요.
그러면 삼위일체가 굳어지기 때문에 그 다음에 관심사가 뭐냐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삶을 사느냐, 어떻게 기독교인으로 사느냐는 관심사가 내려오면서 이것과 무엇이 관련돼 있느냐 하면, 바로 권력과 관련돼있고, 이것 하나 잊어버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모든 권력은 땅 소유에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야만인들, 게르만족이 내려오니까 교회 교황이 해준 게 그들의 땅 받은 것을 신의 축복으로 간주하면서 그 지역, 그 땅을 그들이 합법적으로 소유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들은 반대급부로 뭘 얻느냐 하면, 신의 자녀로 편입이 되는 것을 교육하면서 기독교국가가 된 겁니다. “당신이 로마의 땅 가진 것은 바로 당신이 신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계약이 원만하게 성사될 수밖에 없어요.
북쪽에 덴마크, 스웨덴 그쪽 사람들이 로마를 침공할 때 로마에서 제시한 정책이 뭐냐 하면, “당신이 왜 공격하느냐?” “거주할 데가 없다. 우리는 바이킹족이다.” 그러면 거주할 땅을 줄 테니까 당신은 우리 종교는 신이 삼위일체로 확정됐으니까 그걸 수용한다면, 현재 프랑스 북쪽 노르망디, 노르망디가 노르만족 땅이잖아요. 그때 그들이 자기 땅으로 인정받은 거예요. 로마로부터.
그것만 인정받았습니까? 나중에 프랑크 족속이기 때문에 지금의 프랑스가 된 거예요. 프랑스가 되면서 메로빙거 왕조가 성립하고 1000년경에는 카롤링거 왕조가 있어요. 카롤링거 왕조에서 등장한 것이 신성로마제국, 옛날 로마가 그리워서. 로마가 망하고 기독교가 둘로 쪼개졌어요. 러시아정교회와 로마 중심의 라틴교회로 나눠졌거든요. 어거스틴은 라틴 쪽에 속하면서 이민족을 신의 뜻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책에 나옵니다.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피에르 요아킴은 로마를 천년왕국으로 봤거든요. 로마가 이민족에 당하기 전에 역사는 이미 종결된 거예요. 삼위일체 되고 난 뒤에 그냥 이대로 모든 것은 하나님을 아는 민족이 영원토록 갈 것이라고 했는데 이민족이 쳐들어오고 난 뒤에는 지금 눈에 보이는 로마제국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년왕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아니라고 했을 때 현재 있는 기독교나라가 지상왕국이 아니라고 했을 때 그 의미가 뭐냐 하면, 반란의 여지를 제공하는 겁니다.
어느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는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그 교회가 아니라고 누가 이야기했다는 것은 그 뒤에 남아있는 이야기는 들으나 마나에요. “이것 뒤집어야 돼.” 그런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권력을 가지면서 신의 축복으로 보거든요. 이 권력은 항상 소유형식입니다. “내가 이런 정도의 땅과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신의 뜻입니다.”라고 할 그것에 부합하면서 그들은 신과 관련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신학이란 처음에는 삼위일체 하다가 점차 현재 우리가 가진 권력과 땅은 하나님 앞에 부합되는 축복의 결과물이라고 인정해주는, 현재 봉건사회를 신의 질서라고 인정해주는 그러한 신학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신학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학이라는 것은 진리와는 상관없고 사람들의 자기 처지와 현 질서에 대한 안정과 행복을 보장해주는 신학이면 좋은 신이고, 현재 내 처지를 불안케 하면 이것은 저주받은 악마의 논리가 되는 겁니다. 이미 삼위일체는 결정돼있고, 신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할 게 없어요. 인간의 아이디어는 다 짜냈어요. 그 다음부터 나머지는 삼위일체를 알고 있다는 것은 신에 대해서 합당한 백성이란 뜻이고, 합당한 백성이라면 합당한 백성이 이 땅에서 뭘 하면 됩니까? 묻는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지요. 우리가 한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축복이라고 마땅히 네가 받아 누릴 것이라는 것에 부합되는 논리가 그 다음에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건 전부 다 봉건사회의 안정된 질서를 위해서.
봉건사회를 다시 봅시다. 제일 위에 왕이 있지요. 왕은 교황한테 인정받지요. 왕은 자기가 침략해서 가진 땅은 신의 뜻이라고 새삼스럽게 인정하는 거예요. 나중에 기독교가 아닌 자들도 기독교인이 되고 난 뒤에 우리가 프랑스 차지한 것도 신의 뜻이구나. 우리가 독일을 차지한 것도 신의 뜻이구나. 폴란드를 차지한 것도 신의 뜻이구나. 모든 것을 긍정하면 되는 거예요. 자기의 모든 전쟁행위에 대해서 차후적으로 인정받으면 그만인 거예요. 그 대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어주면 되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윈윈, 양쪽 다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누가 이의를 겁니까? 누가 감히.
만약에 이의를 제기하면 그 사람 이단 만드는 것은 쉬워요. 이단 만드는 삼위일체로 걸면 되는 거예요. 우리 생각에 삼위일체 안 걸리면 되지. 그러나 삼위일체가 확정된 논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이 질문을 하기에 따라서 이단이 돼버려요. 종교 재판할 때 예수님께서 우실 때 흘린 눈물은 인간의 눈물이냐, 신의 눈물이냐고 묻는 거예요. 그것은 인간의 눈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인간이 있다고 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삼위일체는 아무도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삼위일체를 이미 설정해놓으니까 이것은 자기의 정적, 원수를 제거하고 싶으면 삼위일체로 조지면 되니까.
봉건사회는 왕이 있고 영주 있고, 기사 있고, 마지막에 농노가 있지요. 농노는 소작인입니다. 소작인은 남의 땅 갈아주고 세금 바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 사람들은 자기가 땅에 사는 것이 아니고 땅이 자기를 지배하기 때문에 그 땅을 버리고 다른 땅에 가서 취직이 될까요, 안 될까요? 이게 영주의 허락을 받아야 돼. 심지어 시집을 옆의 영주 땅의 총각과 연애해도 결혼 못합니다. 영주의 허락을 받으려면 돈 많이 줘야 돼요. 돈 많이 내든지 안 그러면 자기가 속한 땅의 총각과 결혼하든지. 그래야 땅을 경작하는 노동력을 계속해서 확보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영주는 교회를 세워요. 이 교회를 교회사에서 사슬교회라고 합니다. 사슬교회에 있는 사제 네 명당 주교 한 명이 돼요. 주교는 영주와 같은 급이에요. 그래서 주교는 영주의 일가친척들이 돼요. 주교는 영주와 관련돼있어서 주교도 땅이 있어야 사니까. 왕이 주교를 임명하니까 주교는 왕의 눈치를 보고.
그런데 신성로마제국 앙리 4세 같은 경우에는 그 당시 교황이 반박하고 나섰어요. 주교는 종교에 속하기 때문에 교황인 내가 임명하지 세속적인 왕, 너는 정치하고 치안문제만 하지 교회 문제까지 주교 임명을 네가 하느냐. 켄터루스3세가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제일 깡패 같은 교황인데 그 사람이 그렇게 주장했다고요.
여러분 그걸 미리 봅시다. “주교 임명을 부산시장이 하느냐 말이죠. 우리 노회에서 해야지.”라고 했다는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교회와 국가가 이미 분리됐으니까 그런 반발이 나오잖아요. 교회와 세속나라가 분리됐으니까 그런 주장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분리되려면 땅이 있어야 되는데 그만큼 교황 땅이 있다는 이야기에요. 세상에 있는 모든 힘은 소유에서 나오고 그 소유는 땅에 대한 권리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교황이 어느새 세속권력과 맞섰다는 말은 교황은 영주를 자기편으로 잡아당겼다는 거예요. 왕과 영주 사이에 봉건적인 계약이 성립하기 마련인데 영주가 왕에 대해서 불만이 있을 때 영주는 교황 쪽에 서버려요. 왕은 땅이 없으면 교황한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어요.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이라 해서 알프스 산의 별장에 사흘 동안 맨발로 눈 맞으면서 빌었습니다(당시 교황은 그레고리우스7세). 나중에 호되게 복수하지만.
**“마침내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두어 명의 수행원만 거느리고 내가 머물고 있던 카노사(이탈리아 북부 레조넬에밀리아 지방의 남서쪽에 있는 10세기의 성)에 찾아왔소. 황제는 적대적이거나 오만한 기색이 전혀 없이 성문 앞에서 사흘 동안 사면을 빌었다오. 황제의 의복 대신 초라한 모직 옷을 걸치고 신발도 신지 않은, 그야말로 처량한 고해자의 모습이었소.”(그레고리우스7세, [서한집], 1077년)
여기서 교황 편에 서서 교황의 손을 들어준 신학자들이 보나벤투라, 토마스 아퀴나스, 아벨라르, 베르나르, 알베르투스 등 우리가 하려면 신학자들이 줄줄이 있습니다. 세속정치와 교회는 관리하는 바가 따로 있다. 신의 계시는 믿음으로 알 수 있지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믿음을 믿으라는 말은 곧 무슨 말이냐 하면, 요즘 믿음과 달라요. 믿음이란 신의 계시가 구체화된 것이 교회사에서 세 가지의 성사로 되는 겁니다. 성체성사,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는 성만찬을 말하고 세례는 아시죠. 견진은 일반 사제가 못하고 주교만 하는 것인데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계속해서 성령을 부여받도록 성화생활 잘 하도록 해주는 성사, 초창기에 이 세 가지를 교회에서 담당한 겁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화체설이라는 것도 “이 떡은 예수님의 된다.”가 아니라 “이 떡은 예수님의 몸이다.”라고 한 거예요. 여기에 신학자들을 다 동원해요. 그 다음에 “이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가 된다.”가 아니라 “피다.”라고 한 거예요. 피가 된다는 것은 루터고, 피라고 하는 것은 그 전의 화체설이고. 물론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한 사람은 다 잘려요. 그러니까 천하의 왕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잖아요.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왕이나 영주나 교회가 만든 법에 대해서 권력과 상관없이 무조건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거기다 더해서 연옥설을 만들어요. 연옥설은 패자부활전입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가친척이 죽게 되면 일단 임시적인 훈련소에 집합해요. 바로 지옥, 천당으로 가는 게 아니고. 그게 연옥이에요. 연옥에 가서 누가 사식을 많이 넣어주느냐, 그러니까 누가 빽을 많이 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은 천국으로 빠지고, 만약에 아무도 안 도와주면 그 사람은 영원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거예요.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할 때 맨 입으로 되겠습니까? 사식 넣을 때 돈 먹여야 되잖아요. 그 당시의 돈은 땅이었습니다. 교회에 땅을 헌납하게 되면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선조들이 혜택을 입게 돼요. 그러면 교회에서 뭐 하느냐? 신부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를 해줘요. 기도가 일단 어디로 통하느냐 하면 이미 죽은 성자들에게 갑니다. 성자들은 누구한테 압력을 가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한테 가요. 마리아가 자기 아들이 예수님이니까. 아들에게 빽을 써요. 교회는 땅이라는 부동산을 받고 기도해주게 되면 그 기도는 성자를 통해서 마리아한테 가서 예수님한테 가지요.
그 천주교 방식이 개신교로 넘어오면서 중보기도가 됐어요. 중보기도가 빽쓰는 거예요. 완전히 천주교 식이지요. 중보기도가 왜 나왔느냐 하면 아무리 전도해도 교회 안 나올 때 특히 가족들, 그 답답증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답답증에 대해서 교회가 내놓은 대안이 교회 안 나와도 당신 중보기도를 하게 되면 그 기도가 예수님한테 상달되게 되면 당신이 기도한 자식이나 가족들에게 뭔가 영향력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이것은 천주교의 연옥설을 약간 바꾼 거예요. 중보기도가 되면 중보자가 누가 됩니까? 기도할 동안에는 기도하는 본인이 되지요. 기도 끝나고 마지막에 이름 붙이는 것 있잖아요. 그러면 누구 이름으로 해야 돼요? 이건 자기 이름으로 해야 되지 예수님 이름 붙이면 안 되잖아요. 근본적으로 이방종교, 산당이에요.
사슬종교가 있는 이유는 이 밑에 기사 되고 농사꾼 되는 것은 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항상 교회 가서 세뇌받기 위해서. 그래서 중세교회의 모든 설교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현재 당신 처지에 감사해라. 그게 하나님이 창세전에 주신 운명이다. 그러니까 반발하지 말고 대들지 말고 그냥 봉건사회 질서 그대로 유지해주고. 당신의 처지에 대해 불만을 품고 권력자에 대드는 그 죄는, 모든 천주교 신자를 일년에 한 번씩 반드시 고해성사하게 돼있어요. 그 고해성사를 사슬교회에 와서 사제한테 하는 겁니다.
권력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강요함으로써 이 자체를 천년왕국 이미 확정된 더 이상 다른 건 기대하지 마. 완성된 지상의 낙원이라고 했던 거기에 대해서 새로운 성령의 시대가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아니고 무슨 나라? 성령이 왔다는 말은, 모든 교회 권력에 대한 반란의 여지를 제공하는 겁니다.
그 요아킴의 사상은 뒤에 농민반란으로 이어져서 토마스 뮌처에 대해서 루터가 나타날 때 농민들도 같이 들고 나선 겁니다. 특히 농민들이 제일 불만인 것은 십일조라는 세금. 세금이 십일조뿐이겠습니까? 다른 것도 많아요. 제일 좋은 것들을 바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아주 고단한 인생을 살게 된 것도 신이 내린 지정된 자리라고 해서 군말하지 말고 견디면 나중에는 네가 잘 견뎠구나. 네가 성만찬에 잘 참석했구나. 영원한 천국이 보상되는 사회, 그 사회가 바로 천년왕국으로 통했던 중세사회였고 그 사회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논리적으로 해주는 사람들이 신학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되니까 연옥설로 인하여 땅 가진 사람들이 땅을 왕한테 바치는 게 아니고 사제한테 바치겠지요. 신에 대해서는 삼위일체로 확정됐지요. 그 다음에 문제는 신이 만든 나라가 질서 잡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신학이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눈을 돌릴 수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권력 자체가 그거니까. 이민족들이 와서 땅 갈라먹기 다 했으니까. 당신이 이렇게 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긍정을 해줘야 유럽사회가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정신적인 매개가 형성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그게 봉건사회라 했지요. 왕이나 영주나 기사는 전쟁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노동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그것은 70~80% 차지하는 농민들이 하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개간할 수 있는 농업의 여건이 안 됐어요. 하여튼 계곡에 땅 좋다 싶으면 그걸 탐내고 차지하기 위해서는 강한 군대가 필요했고 기사는 전쟁만 할 뿐이에요. 나중에 15세기에 와서 고상한 귀족부인에게 기사도를 발휘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양아치들이에요. 없는 사람들 뜯어먹듯이 그런 식으로 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교일치, 정치와 교회가 하나가 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야 안정이 되니까. 그런데 국가권력에 대해서 소외되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아무리 권력이 좋지만 속 틀리는 사람이 있다고. 그런 사람들이 나와서 신비주의 쪽으로 가기 시작합니다. 최초로 신비주의가 수도원제도 같은 것. 모든 세상을 끊어버리고 나는 기도만 할란다. 제일 먼저 베네딕트 수도원이 500년경에 생기고, 그 뒤 약 천년 후에 도미니크 수도원과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나와요. 프란치스코 수도원은 거지수도원, 탁발, 얻어먹으며 하는 것. 도미니크 수도원은 대학을 세워서 대학교수들 중심, 가르치는 것. 뭘 가르치느냐?
실질적으로 오늘 강의에 제일 중요한 대목에 도달했습니다. 삼위일체에서 일체에서 위가 셋으로 갈라지잖아요. 본질은 하나고 위격이 셋이다. 이게 말이 안 돼요. 왜냐하면 위격이나, 체나 같은 말이거든요. 같은 말인데 없는 용어를 만들어서 집어넣었어요. 일인데 일이 삼이고, 삼이 일이란 말이 너무 어려우니까 삼 뒤에 위를 놓고 일 뒤에 체 놓아서 삼위일체라고 완성을 시킨 겁니다.
이 위격의 대표자가 예수님인데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어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된다면 삼위일체를 늘여보자. 신을 늘여보면 지상의 개인들, 인간은 과연 무엇이냐를 삼위일체에 근거해서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 겁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로고스+육신’이 결합된 것이다. 로고스는 신성이고 육신은 인성이지요. 결합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에 본인이 자존적인 것, 위라는 거예요. 독자적인 영혼을 갖고 있는 걸 위라고 하거든요. 마찬가지로 성도에게도 이것이 그대로 늘어져서 이을 수 있다는 거예요. 성도는 ‘영혼+육신’이라 하면 되고, 하나님의 영혼이라고 하면 되겠지요. 성령을 받아서.
삼위일체를 확산시키면 하나의 개인도 영혼과 육신이 있는데 육신은 후패해서 섞어질 것이고 영혼은 하나님의 영을 닮아서 날마다 성화되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영혼이니까 형상을 본받아서 하면 된다는 인간이 어떻게 산다는 것은 삼위일체를 통해서 끄집어낼 수가 있겠지요. 어거스틴은 영혼이 신의 뜻을 아는데 필요한 이걸 조명설이라 합니다. 조명설은 이런 거예요. 세상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몰라도 빛 되신 하나님의 알려주심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신앙으로 보는 거예요. 육신으로 안은 것은 이성으로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수도원에서 뭘 해야 돼요? 육신이 하는 노동은 더러운 농노들이 하고 자기는 영혼 가꾸기에 기도와 묵상을 이걸 수도원에서 하면 되겠지요. 그렇게 해서 갈라졌을 때 우리 보기에는 경건해 보이지요. 세상을 떠나서 오직 기도와 말씀에만 전념하니까. 그런데 이러한 제도로 말미암아 일반 농사짓는 사람들, 땅 가진 영주나 맨날 전쟁만 하는 아주 무식한 사람들이 결국은 어디에 기대를 걸겠습니까? 자기와 결탁이 돼있는 타락한 주교, 사슬교회, 영주가 자기 일가친척들 세워서 밑에 농노들 꼼짝 못하게 하고 정신적인 훈련소 같은 그런 교회에 종사하는 질 떨어진 사람들보다 모든 포기한 수도원에 간 사람들을 존경하겠지요.
어제 뉴스에 보니까 독일의 주교가 자기 집 짓는데 250억 들였다고 독일사회에서 시위하고 그랬어요. 혼자 사는 주교가 250억 집을 짓습니까. 처음에 80억으로 지으려다가 예산이 늘어났답니다. 거기에 비해서 지금도 수도원에서 기도와 묵상만 하고 모든 걸 포기하고 진짜 두 벌 옷을 갖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존경스럽겠습니까. 자기들도 알아요. 얼마나 더럽게 살았는지. 그래서 마지막 죽을 때 땅을 어디다 바치겠습니까? 바치니까 수도원이 커지지요. 땅 가진 놈이 최고지. 그것도 아주 품질 좋은 땅, 농사 최고로 잘 되는 땅.
처음에 유럽에서는 휴경지와 경작지 둘이었는데 나중에는 추경지와 춘경지, 휴경지로 나눈 삼포제를 시행해서 생산량이 40% 증가했어요. 그때부터 기존에 영주 밑에서 탈출한 농노들이 폴란드, 헝가리 쪽으로 이민을 가요. 그래서 폴란드, 헝가리 쪽에 새로운 분위기가 오면서 기존에 불만 세력들이 있으면서 14,5세기에 드디어 천주교에 대항하는 새로운 개혁교회 쪽의 운동들이 나옵니다. **헝가리의 얀 후스
전부 땅 문제 때문에 그래요. 여기에 사는 것보다 저기가 나으니까. 가면서 기존에 천주교에 대한 반발, 새로운 종교, 요아킴에 의하면 성령의 시대. 성만찬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우리는 성령 받으면 그것이 바로 교회다. 이것이 나중에 재세례파, 오늘날 침례교가 돼요. 종교개혁을 통해서. 침례교의 국시는 그거에요. 교회는 어떤 국가와 어떤 단체로부터 지시나 지배를 받지 아니한다.
그런데 교회가 국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교회 입장에서는 좋은 겁니까, 서러운 겁니까? 서럽지요. 왜? 전에는 다 먹었는데 이민족 들어와서 쫓겨나니까 영적인 것만 다루니까 이것은 사실은 돈이 안 되지요. 그래서 교회가 칼 쓰는 자를 고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영주, 기사의 도움으로 루터는 종교개혁에 성공하게 되는 겁니다. 그전에 루터 같은 사상이 있었어요.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칼 가진 자가 없기 때문에. 베드로처럼 칼 가져야 돼. 그만큼 민중들은 종교라 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사실은 양질의 옥토의 땅을 얼마큼 내가 차지해서 사느냐? 그걸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간주하고 싶은 겁니다.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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