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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대전2013926-마13장51절(옛것과 새것)44강 - 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마태복음

대전2013926-마13장51절(옛것과 새것)44강 -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175.116.146.206)

대전2013926-마13장51절(옛것과 새것)44강 - 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13장 51절하겠습니다. 신학자마다 난해한 구절이라고 하는데 난해한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뭐냐 하면,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뭐가 난해한 구절인가 하면 52절 보면,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하는 요 대목이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대목을 해봅시다. 이 대목에서 행동이 나오지요. 집주인이 어떤 행동을 하지요. 뭔가 곳간에서 바깥으로 뭔가 가지고 나오지요. 가지고 나오는데 가지고 나온 게 뭘 가지고 나오지요? 새것과 옛것을 가지고 나오는 행동, 액션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곳간이 이리 있고 곳간 안에는 여기서 어려운 게 뭐냐 하면, 우리는 밖에 나와야 새것인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고 이미 새것과 옛것이 함께 들어있다는 요 대목이 난해한 거예요. 새것에서 ‘새’라고 하는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 딱 등장해야 비로소 새로운 것, new, 새로운 것이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주님한테는 역사 속에 나오지 않더라도 아직 등장하지 않더라도 새것, new라는 말을 예수님이 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인간이 알고 있던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로 가는 시간 론 있잖아요. 시간 론. 이 시간 론에 예수님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너희들의 시간 론을 내가 엎을 거야. 이런 뜻이다 말이죠. 너희들은 지나간 것만 옛것이고 현재 새로 나타난 것만 새것이라 여겼는데 나는 너희들이 옛날이라고 여기는 그 속에 이미 새것이 담겨있는 식으로 나는 일을 할 거야. 따라서 너희들의 이런 시간 론을 갖고 있다면 내 말을 깨달았느냐, 깨닫지 못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서 너희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내 말은 못 알아듣는다.

그런데 너희들이 알아들으라고 내가 액션,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알아듣든 너희가 알아듣지 못하던 상관없이 꾸준하게 내 일에 대해서는 진척이 있다, 라는 일방적인 선언을 하시는 겁니다. 좀 더 깊이 나가봅시다. 그렇다면 옛것과 새것이라고 했는데 왜 이것을 옛것과 새것이라고 했는가 하면,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야기하고 지금까지 제자들이 이야기하고 구약의 모든 것은 현시점에서 인간들은 이것이 옛것이라고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옛것이라는 것은 지나간 일, 지나간 것, 지나간 것이라고 누가 언급하느냐, 바로 인간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홍해사건 봅시다. 홍해가 갈라졌다. 옛것입니까? 새것입니까? 우리에게는 옛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새것으로 만들어 낼게.” 라고 하는 거예요. 이제 이해되시지요. “이상하다. 홍해는 지나갔어. 지나간 거야. 홍해사건 두 번 없어. 끝났어.” “아니야. 내가 새것으로 만들어 내겠다.” “그러면 예수님, 어느 것이 새것이고 어느 것이 옛것입니까?” 물으면 예수님은 “너희들이 옛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몽땅 새것으로 바꿀 수도 있다.” 는 겁니다. 그러면 옛것은 없었습니까? 몽땅 새것이고 몽땅 옛것으로 만들어 내는 식으로 내가 일을 할 것이다, 라는 겁니다.

노아 봅시다. 노아방주. 노아방주 홍수 난 것. 분명히 옛것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것을 새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면 노아 방주는 옛것이 사라지는가? 아니지요. 노아 방주를 옛것으로 남기면서도 이것을 새것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바탕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이사야 41장 4절 보면,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여기까지 봅시다. 이 세상의 모든 창조의 일을 누가 했고 누가 이루었습니까? 하나님이 묻고 있잖아요. 우리는 알 턱이 없지요. 몰라요. 추상적으로 하나님이 하셨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구체적으로 물어요.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태초에도 있었고 나중에도 있을 분, 나중에 있을 분이 처음부터 있었다면 처음부터 있은 그 안에 나중에 있을 분으로서의 처음도 함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인간들이 과거에 있을 때는 미래는 오지 않았다. 이런 의식이 하나님한테는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안 통하지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옛것과 새것을 섞어서 한 곳간에 같이 들어있다고 언급하신 것은 바로 구약에서 말하는 그 여호와, 여호와에게만 해당되는 모든 사항이 이제는 현실로 나 이 예수를 통해서 현실화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보기에 사람이에요. 사람이라면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을 따라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증거 같은 것은 확실하지요. 예수님도 늙는다는 것. 예수님이 나이 서른 살 됐을 때에 아무리 봐도 2살 때의 모습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지요. 지나간 걸로 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보기에는 분명히 예수님도 늙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걸로 보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인간들이 예수님을 볼 때 이런 존재론적 바탕으로 예수님을 믿고자한다면 인간이 존재 속에 예수님도 끌어당기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주님에게 허용이 안 되고 깨달았느냐, 하는 것은 너희들이 알지 못한다는 뜻이고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인간에게 다가설 수밖에 없거든요. 나 여기 있으니까 주님이여 내편 되게 하옵소서. 존재론적 인식이거든요. 나 여기 존재하니까 이 존재 좀 어떻게 처리해 주시고 어떻게 잘되게 해주세요. 나 여기 존재 있는 거 아시지요? 보이시지요? 하나님, 나 어떻게 좀 잘하도록 해주세요. 라고 요구할 때 주님께서는 여기에 합세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주님의 존재가 우선이고 이것을 붕괴시키는 거죠. 어떻게 하느냐 하면, 니가 생각한 그 증거는 오류다. 하나의 예를 들면 블랙박스에 담긴 것은 조작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지요. 경찰에서는 그걸 증거물로 하는데 택시회사에서는 그걸 조작한다 말이지요. 자기 택시회사가 했을 때 빨리 들고 와가지고 블랙박스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이 해가지고 증거 내라하면 가짜내가지고 회사에 손해 끼치지 않도록 작업을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거고 이 블랙박스 자체에 대해서는 우리가 평생 사는 것은 전부다 블랙박스에 저장이 되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항상 내 존재를 생각하기 때문에 내 일생의 경험을 우리는 오류로 저장해요. 머리속에는. 내 위주로 저장한다 말이지요. 내 위주로 저장하기 때문에 천국가게 되면 기가 막히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그걸 미리 알아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동안 내가 무슨 일을 했으며 그 경험한 것이 머릿속에 들어오면서 그냥 들어오는 법이 없고 전부 다 내 잘남, 내 존재의 정당성 그러니까 나는 더 살아야 돼, 라는 욕망과 한 통속이 돼가지고 잘못된 입력으로 저장이 되니까 원래의 블랙박스에 대한 의미와 해석과 전부 다 너무나 일방적으로 잘못된 해석을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그걸 우리는 뭐라 하느냐 하면, 그걸 ‘과거’라고 하는 거예요.

어거스틴 이라는 사람을 대전 시민 대학에서 이야기할 건데 시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의 영혼이 조작한 것이다, 이리 보면 돼요. 시간이라 하는 것은 우리 영혼의 의식에 불과하지 실제로 시간은 없다고 보면 돼요. 시간은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시간이라는 것은 그냥 우리 의식의 내부에 시간의식이 흐를 뿐이지, 실제로 시간 같은 것은 없다. 이리 보는 겁니다. 최초의 현상학적 시간 론을 주장한 사람이다, 이리 보이거든요. 나중에 보면 후설에 현상학적 시간 론 나와요.

여기서 어렵기 때문에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쉽게 합시다. 노아 방주가 옛날에 있었어! 나는 분명히 기억해. 나는 분명히 믿어. 노아방주가 있었다는 것을. 이렇게 해도 이건 노아방주의 의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기억해버리면 노아방주 기억한 내가 이미 나는 내 시간을 긍정하게 되고 그러면 나는 이것이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옛것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그런 속성이 우리에게 발휘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니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노아방주를 옛것으로 생각한 니가 잘못됐다는 거예요. 나는 노아방주를 새것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데 너는 노아방주를 새것으로 못 끄집어내니까 재주가 없으니까 너는 너 자신을 믿는 식으로 나를 믿어서는 믿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나를 믿듯이 예수를 믿는 것은 신앙에 들어가지도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갈 때 까지 가봐야지요. 그럼 인간이 제자들이 갈 때까지 가보는 게 뭐냐 하면, 결국 인간은 죽잖아요. 죽고 난 뒤에는 기억이고 뭐고 스톱이 되지요. 스톱이 된다면 그 다음 조치는 누가 조치합니까? 죽은 인간이 지가 잡아당기고 아야 합니까? 손을 놔버리잖아요. 손 놓고 난 뒤에 살려주고 안 살려주고는 누구의 권한입니까? 그 다음부터는 옛것과 새것을 일방적으로 끄집어내는 주님의 소관이잖아요. 죽은 너희를 너 자신을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미 새롭게 새 피조물로 만들어내겠다는 새것의 의미를 담아버리면 너는 나로 인하여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이게 구원의 방정식입니다. 구원의 원리에요.

구원의 원리의 기초는 뭐냐 하면, 내가 믿고 내가 하는 모든 것은 이것은 나 잘남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핑계거리에 증빙거리밖에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하고 십일조하고 봉사하는 거 전부 다 누구 좋아라고 합니까? 나 왜 이리 잘났지? 나는 미치겠어! 이것은 교회 가는 것뿐만 아니고 결혼하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심지어 결혼 안한 것도 마찬가지에요. 당신 왜 결혼 안합니까? 나 결혼하기 싫어. 왜? 내가 하기 싫으니까. 정답은 성경에서 배워요. 왜 결혼 안했습니까? 결혼 안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봅니다. 분명히 정답이거든요. 정답이긴 정답인데 얼굴이 별로 안 좋아 보이는데. 수녀보고 당신은 왜 결혼 안합니까? 주의 뜻으로 이렇게 수녀 되게 했습니다. 속으로 ‘그래요. 당신이 장 동건 만나면 그 소리 하겠습니까?’ 솔직하게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없어서 하다보니까 못했는데 이제는 남자가 나오면 결혼할 용의가 있습니다. 솔직하게 얘기해요. 솔직하게.

왜냐 하면 육신의 본성은 서로의 S극과 N극이 당기게 돼 있어요. 이걸 누가 말립니까? 당기는데. 서로에게 나는 저 사람이 싫어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 저 사람보다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 경우에는 그만 우리사이 놓자할 경우에만 이쪽으로 당겨집니다. 그래서 부부사이는 같이 재미나게 사시는 것은 아직까지 더 좋은 상대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남편보다 더 좋은 남자 없고 여자가 없다는 조건하에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무슨 조치를 내릴지 장담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에 내가 한평생 부부가 헤어지지 않고 잘 살았습니다. 말하는 그것도 블랙박스를 잘못 해석한 결과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주께서는 옛것이라고 합니다. 항상 옛것은 실수요, 오류요, 문제성이 있습니다. 우리 자체가 옛것이에요. 옛 아담이고. 아담본성이고.

예수님은 본인이 새것이 되어서 내 것을 나누어주면, 사랑은 그냥 받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사랑받을 때 내가 하는 사랑과 받는 사랑과 분류를 시켜보세요. 내가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사랑이 있을 때는 주께서 주신 사랑이 100%맞습니다. 불신자들은, 성령 없는 사람은 그게 없어요. 교회봉사해도 지가 다 알아서 했어요. 지가 믿음 좋아서 지가 했어. 그러니까 신자가 아니잖아요. 믿는 것은 자기밖에 안 믿으니까. 자기 잘남을. 그저 우리는 옛것위에 새것이 덮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얀 도화지라 생각하지 말고 까만 도화지라 생각하고 거기다가 주께서 하얀 페인트칠을 하신다고 생각하면 아주 적절하지요. 나는 죄밖에 없는데 거기다가 하얀 하나님의 의를 뿌리면 우리가 자랑할 것은 자기 죄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이런 죄를 용서해주신 주님의 의밖에 없잖아요.

누가복음 18장13절에 보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이 말씀이 왜 있겠어요? 까만 도화지라. 까만 도화지 돼야 하얀 게 튀어나잖아요. 하얀 게 팍팍 튀어나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얀 걸 까만데다 끌어 잡아 당겨가지고 누리끼리 하게 만들었어요. 까만 것도 아니고 하얀 것도 아니고 누리끼리하니.

우리교회에 누가 질문 좀 해줬으면 하는 질문이 어제 질문을 했어요. 막 사는 게 뭐냐고 질문을 했어요. 제가 얼마나 반갑던지. 답변을 이렇게 했습니다. 막 사는데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막사는 것과 인간 본인이 보기에 막사는 두 가지가 있는데 본인이 보기에 막사는 것에 대해서는 막사는 것도 지 하고 싶은 데로 살기 위해서 핑계대고 막살고 그것도 문제고, 막 안 살기 위해 절제해도 그것도 문제고, 어쨌든 시선자체가 지 잘남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여 제가 막 살아도 되지요? 또 막살아도 구원받지요? 내가 막 안 살고 노력하면 구원받지요? 어쨌든 간에 관심은 자기밖에 없으니까 이래도 문제되는 거예요.

주님의 시선을 보게 되면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우리는 막 사는 게 되기 때문에 그럴 경우에는 주여, 막 살게 되는 것밖에 안 되는 것을 알게 하여주심에 대해서 감사하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이래 살아도 막살고 저리 살아도 막살고 그러니까 막산다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것 때문에 삐져서 간 사람도 많지요. 그것에 대해서 이 근호 목사는 막산다 하는데 자기는 막 살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하는 그것도 이상한 사람이죠. 자아가 끼어들면 문제가 생겨요. 자아가 끼어들면. 블랙박스가 해석이 엉뚱한 게 막 나와요. 택시회사에서 조작한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냥 블랙박스는 시커멓게 되어 나오는 대로 그냥 그리세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일거수일투족이 주님께서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에 내가 일으키고 싶어서 생긴 사건이 아니고 주께서 일으킨 사건이기 때문에 주께서 알아서 처리하십니다.

다시 한 번해봅시다. 13장.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모르고요.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해요.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천국의 서기관들은 제자들입니다. 너희들 말이야, 이제 내 말 깨달았지? 예! 그렇다면 이제부터 너희들은 뭐하느냐 새것과 옛것, 구약과 신약을 곳간에서 끄집어내게 된다는 겁니다. 그 내서 뭐 할 건데? 내서 지킨다는 말입니까? 해석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교회에서 목사가 이렇게 설교하니까 교인들 보기에는 진짜 말씀 그대로 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리고 앞으로 교인들에게 할 일이 생겼어요. 뭐냐 하면, 구약도 보고 신약도 보고. 그러면 자기는 뭐가 되고? 충실한 하나님의 충성된 제자 된 서기관이 되고.

천국의 서기관 같으면 보통 공무원 몇 급입니까? 5급 서기관이죠. 얼마나 높아요. 문자적 해석하니까 갑자기 직급이 높아져요. 몇일 전에 교회에 등록해놓고 갑자기 5급 공무원 고급공무원이 됐어요. 고위직 돼 버렸어요. 성령을 안 받는 목사가 성령을 안 받은 교인보고 하니까 다들 저희들끼리는 전부다 동의할 수밖에 없지요. 이 제자들이 나중에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목자를 치니까 양들이 다 도망갔어요. 4급 서기관들, 5급 서기관들 다 도망갔어요. 도망간 천국백성.

구약, 신약 백날 해봐야 아직 이때는 신약 나오지도 않았어요. 집주인이 액션 합니다. 집주인이 새것과 옛것을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새것과 옛것에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노아방주를 봅시다. 노아방주에서 옛것은 옛날에 노아가 있었는데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서 그래서 그들은 살아났고 나오자마자 재물을 바쳐서 하나님이 흠향하셔서 그제부터는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있어서 농사가 잘 됐습니다. 하는 이야기 이건 옛것에 속하는 것이고 새것을 이야기하면, 노아방주는 누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되고 노아도 예수님이 되고 거기에서 나와서 잡은 제물도 예수님이 되고 모든 것이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만이 새것이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이 말은 베드로전서에 보면 나와요.

베드로전서3장 20~21절 보면,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노아의 날에 방주 예비할 동안에 나오지요. 노아 때 방주할 동안에 8명만 구원 얻었지요.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이고 너희 구원하는 표라 했지요. 그런 이 모든 행동은 누가 하신 거예요? 예수님이 하신 거죠. 블랙박스를 가지고 와서 누가 해석하신 겁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입장에서 그 노아방주를 블랙박스를 해석을 다시 하는 거예요.

노아방주는 블랙박스 맞잖아요. 실제 일어났으니까. 그것을 경험했던 노아도 몰랐고 그 뒤 후손도 몰랐고 아무도 몰랐는데 새것 되는 예수님이 오셔서 그 블랙박스를 다시 끄집어내서 다시 해석해버리니까 처음부터 예수님께서는 관여하신 거예요. 노아구원에 대해서 예수님이 관여해서 결국 노아도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면 노아만 관여하고 오늘날 대전 땅에 사는 우리는 관여 안합니까? 역시 주께서도 우리를 관여하는데 우리는 눈만 뜨면 내 인생은 내가 관여한다고 본 거예요. 개 사료 주는 것도 내가 주지 예수님이 오셔서 가만있어라, 내가 사료 줄게. 해서 주님께서 사료 주는 이런 것만 생각하거든요. 이런 사고방식이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이것이 우리의 옛것, 바로 내가 하는 식의 내 존재론의 주님을 강제로 끄집어 당겨서 나와 비슷하게 해야만 예수님이라고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이 그 자체가 옛것이 되는 겁니다.

옛것은 구약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죄악된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그것이 옛것입니다. 노아방주가 일어났어도 새것으로 끄집어낼 수 없고 노아방주 자체가 옛것이냐, 새것이냐가 아니라 노아방주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옛것만 할 수밖에 없어요. 옛것을 새것으로 바꾸는 변환기를 트랜스라 하지요. 도난스로 바꾸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로 바뀌기 때문에 바뀌어져야 될 입장이 십자가를 미리 알아서 눈치 챌까요? 못 챌까요? 눈치 못 채요.

눈치 채 버리면 예수님 십자가에 안 죽게 돼요. 예수님이 살해돼 버리지 않게 돼요. “비켜라, 내가 구해줄게.” 해가지고 주님이 안 죽어야 돼요. 주님이 안 죽으면 우리는 변화되지 않아요. 죽음이 죽어주셔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어주고 실제로 예수님이 죽는 척이 아니라 실제로 죽어버려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구원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남지 않게 되고 그래야 옛것과 섞이지 않는 순수의 새것으로만 우리가 구원받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 되는 겁니다. 구원의 공식입니다.

53절 넘어가기 전에 한 마디하고 52절 마무리합시다.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 할 때 이것은 앞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마태복음13장 전체의 비유에 대해서 다 언급하는 거예요. 그럼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 씨 뿌리는 비유 누룩 비유 모든 비유는 요 말씀 자체로 완성이 아니고 요 말씀에 입각해서 요게 설계도가 되어서 앞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길을 가고 부활 승천하는 길로 가실 거예요. 요 비유에 있는 미리 말씀하신 그대로 그러니까 비유 해석에 대해서 제자들도 모르지요.

예수님이 알아서 요 비유에 맞춰서 행동하다보니까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게 돼 있어요. 제자들은 이걸 언제 아느냐, 성령오고 난 뒤에는 아하! 그 말씀은 우리가 알아듣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임해야 이미 부활의 영이 임해야 우리가 이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구나! 이 모든 비유는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누가 지킨다? 예수님 홀로 스스로 지킬 일을 자기가 자기한테 예언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걸 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는가, 너희들은 끼어들어도 끼어들 그러한 능력이 없음을 증명해 주는 겁니다.

이렇게 비유해 놓고 그 다음부터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핍박받기 시작합니다. 53절에. “예수께서 이 모든 비유를 마치신 후에 거기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사람들이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라고 했어요. 이 능력이 어디서 났습니까? 하나님이 아니지요. 하나님이라 하는 것은 고향사람들도 알고 있잖아요. 정답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입장의 사람들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고향사람들 봅시다. 고향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요. 여호와를 믿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기가 못하는 특이한 지혜를 말씀하잖아요. 이 사람들은 이게 어디서 나왔다? 이게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니까 능력 있을 것이라고 하지요. 이 자체가 틀린 이야기다 말이죠. 왜? 하나님 자체가 그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정답이 뭡니까? 이런 질문을 할 권리가 없어요. 왜냐 하면 사람은 질문해서 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사랑 좀 주세용. 이렇게 한다고 애교 부린다고 사랑 좀 주세욤. 한다고 사랑 주는 게 아니거든요. 뿌잉~ 뿌잉~ 한다고 사랑 주는 게 아니라니까요. 못된 짓을 해야 사랑을 줘요. 못 된 짓을 해서. 왜? 못된 짓을 해야 받은 사랑은 내가 이쁜 짓해서 받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히 은혜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뭐도 알아야 되는가 하면, 사랑해 주세요. 조차도 죄가 된다는 사실, 나 예수 믿을게요. 하는 것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달라고 해서 주는 게 아니에요. 그냥 다루어지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다루어지는 거예요. 참, 이 지혜를 누가 알겠습니까? 이걸 교회에다가 설교해 보세요. 못 알아들어요. 사람들은. 도통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는 거예요. 누가 알래? 못 믿겠다. 그래, 믿지 마! 믿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왜냐? 나, 믿습니다. 하는 게 더 수상해. 믿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믿지 말고 다루어지면 돼요. 바로 그 말씀에 다루어지면 돼요.

우리가 예수를 상대하면 안돼요. 왜냐 하면, 우리가 상대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이 우리를 이미 상대해서 이 땅에 만들어놨잖아요. 창세전에부터. 계획하사. 만들어진 것에 새삼스럽게 상대하려하는 것은 얼마나 건방진 이야기입니까? 닭갈비를 이렇게 했으면 주는 대로 먹지, 싱겁니 짜니 하면 닭갈비 주인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속으로 주는 대로 그만 잡수세요. 오늘 배불러서 닭갈비 못 먹을까 싶어서.

주님께서 요리한 대로 좀 먹으세요. 주님께서 알아서 하는데 내가 후추치고 소금치고. 제 아내가 맛있게 해서 된장찌개 해주면 맛있게 먹으면 되는데 거기다가 호박잎 따가지고 거기에다가 다 섞어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놨다고요. 그리고는 잡수세요. 그래서 제 아내는 남은 된장찌개를 옛것을 다 버리고 새것으로 드려요. 새것 들이대도 그 다음날 아침에 보면 또 호박잎 따서 집어넣어요. 완전히 곳간에 내놓은 집주인 같아요. 우리의 해석을 일방적으로 뭉개 버리고 자신의 본인의 해석으로 다시 재창조하시는 거 같아요. 예수님 만나는 모든 사람, 고향사람이 다 옛것입니다. 옛것을 밀착해서 만나요.

가끔 오로라 공주도 보시고 옛것 보세요. 세상 사람들이 어떤 관점에서 살아가는가, 보셔야 됩니다. 그들은 어디에 매여 있는가, 어디에 매여 있는가 하면, 윤리와 도덕에 매여 있습니다. 윤리와 도덕이 사람을 망칩니다. 그게 탈출을 못하게 출애굽 못하게 만드는 악마의 시험이에요. 윤리적으로 깨끗한가, 도덕적으로 깨끗한가, 그래서 나는 정당하고 나는 살만하고 나는 나한테 떳떳하다. 니는 나한테 지적받아야 되고. 이런 고부갈등 있잖아요. 시어머니는 시어머니 값한다는 말이 있지요. 나무라고 이렇게 하는 것.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그것이 아쿠아리움에서 보면 상어들, 갈치들 노는 그 어두운 세계에 노는 거예요. 수요설교 보면 나옵니다.

55절에 보면 본색 드러나네요. 어디서 났느냐 해놓고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목수의 아들치고는 너무 많이 배웠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많이 받은 목수의 아들이다? 아니다? 역시 목수의 아들 맞기는 맞는데 좀 똑똑하다 이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목수의 아들이다. 하는 나의 인식은 빈틈이 없고 맞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당신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우리는 옳다고 나는 다짐한다. 그걸 주장하는 거예요. 요런 자기로 회개하는 거, 자기 고집으로 자기 해석이 옳다고 주장하는 그게 바로 옛것이 되는 거예요.

그럼 사도바울의 해석은 어떻게 하는가요? 나라 할지라도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뭐한다? 저주를 받는다. 나라할지라도 천사라 할지라도 심지어 이 말을 하는 나라고 할지라도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면서 뒤에 말이 뭐냐, 이것은 내가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배웠다? 예수님한테 직접 배운 거예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항상 나는 옳고 니는 틀렸다가 아니라 자기마저도 항상 버리지요. 내가 삼층천에 올라갔는데 그가 누군 줄 모르겠다. 자기가 올라가놓고 의도적으로 자기를 지워버립니다.

여러분, 주께서 하신일 보세요. 내가 느꼈다. 야~ 저 사람 좋겠다. 삼층천 올라가고. 저 보지 마시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주께서 그런 나에게 삼층천을 보여줬다고 다 보여주는 게 아니고 그 보여줌으로서 말미암아 내가 약한 것도 은혜라는 것을 알려줬으니까 여러분들은 나처럼 이렇게 안 약해도 은혜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거 이야기하려고 먼저 주께서 나에게 삼층천 보내주시는 그러한 경험을 했습니다. 동일한 경험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경험함으로서 나오는 그 결론은 결론만큼은 같아야 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방금 결론이 뭐였습니까? 하나님은 약한 것도 은혜다. 약한데서 더욱 더 강함이라. 강해서 강한 것이 아니고 약한대서 강하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잘도 아네요. 잘도 알아. 그런데 마태복음 12장 48절 봅시다.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지금 고향사람들은 저 동생들 이야기했지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잖아요. 마태복음 12장 50절 뭐라 합니까?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들이 내 모친이요, 내 형제요, 내 가족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계속해서 옛것과 주님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새것과의 날카로운 대립과 비교를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13장 56절,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뇨 하고” 그 다음 말이 재밌지요. 했으면, 아이고~ 예수님이여, 한 수 배울게요. 이리 나와야 되는데 뭐라 합니까? 예수를 어떻게 한다? 배척한다. 그러니까 앞에 이야기한 저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하는 그 모든 발언은 흠모해서 하는 발언도 아니고 한 수 배우겠다는 겸손한 발언도 아니고 우리 공동체의 속성과는 섞일 수 없는 존재다. 어디서 엉뚱한 거 배워왔느냐, 그런 뜻이에요. 어디서 엉뚱한 거.

배척을 받으니까 주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이렇게 배척을 받아야 말씀이 완성된다는 겁니다. 57절에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말씀도 재미나게 하시지요. 선지자는 자기 고향 외에서는 존경을 받는다. 이렇게 이야기해버리면 고향에서는 못 받고 다른 데서는 존경 받는다고 되잖아요. 그런 것이 아니고 고향사람들은 나를 배척한다, 에 강조를 두는 거예요. 나를 배척하는 것은 너희들밖에 없어. 이런 뜻이다 말이죠. 따라서 주님은 고향을 찾아갔어야 되죠. 왜? 주님만 고향이 있는 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뭐가 있기 때문에? 다 고향이 있거든요.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다고 했잖아요. 추석 명절날 왜 10시간씩 버스타고 내려옵니까? 분노 때문에 오는 거예요. 분노 때문에.

엄마가 싫어하던 나, 내가 이렇게 성공했습니다. 그 자랑 질 하려고. 그런 식으로 분노를 푸는 거예요. 서울에서 천대받던 거 고향 와서 마저 대우받으려고. 옛날 최유진이라는 사람이 부른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자가용 타고 친정 가네. 그 때 우리는 그걸 듣고 꿈 깨! 라고 했습니다. 무슨 자가용을 타고 친정 가나. 그것도 친정 가니까 여자 아닙니까? 무슨 여자가 건방지게 운전면허증 따가지고 어떻게 친정갈 수 있겠나. 했는데 친정 가네.

모든 인간은 고향이 있고 그 뿌리는 고향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아무리 멀리 가도 그 고향의 사람이잖아요. 주님은 바로 선지자는 주님께 속한 새로운 피조물들은 고향조차 뿌리가 뽑혀야 된다는 사실, 무 뽑듯이 확! 내가 뽑아줄게. 하고 주께서는 뽑아내는 거예요. 제자들이 잘 뽑힐까요? 제자들은 안 뽑힙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성령이 뽑아줍니다. 성령이 임하면 그 때부터는 사도바울처럼 성령이 있는 곳에 자기가 가고 자기가 있는 곳에 성령이 함께 있고 로마에 가면 로마에 계시가 떨어지고. 왜? 말씀이 우리한테 칩처럼 담겨 있으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 담겨있는 말씀이 중요해서 우리를 그냥 버리지 않고 끝까지 우리를 가지고 다루시는 겁니다.

때를 따라 좁은 길을 생각나게 하시고 모래위에 지은 집과 반석위에 지은 집을 생각나게 하시고 때를 따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그 이야기 들리게 하시고 다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13장 마지막을 다시 한 번 말씀 드리면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주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주님도 역시 말씀에 따라서만 움직인다는 거예요. 주님 본인조차. 내가 우선이 아니고 말씀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아직까지는 그래요. 주님 십자가 진 뒤에는 바뀝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말씀이 있는데. 아직까지는 성령이 먼저고 예수님은 나중이고. 십자가 지고 난 뒤에는 예수님이 우선이고 성령은 예수님 영으로만 움직입니다.

14장 봅시다.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 하더라” 이 세례요한이 죽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왜 죽었지요? 세례요한이 헤롯의 잘못을 지적했어요. 그 뒤에 나오네요. 3절, “ 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동생 빌립의 아내니까 제수지요. 제수하고 헤롯이 결혼한 일로 요한이 거기서 지적을 하니까 요한을 잡아서 결박했습니다. 이 헤롯의 일이 잘한 겁니까? 잘못한 겁니까? 정치적으로 오히려 잘한 거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왕은 높은 자입니다. 왕보다 더 높은 자라면 이 사람은 왕이 아니에요. 최고 높은 자리기 때문에 이름이 왕이에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다 왕 밑에 있는 사람들이죠. 높이 있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어요. 행동을 할 때, 밑에 있는 사람이 높이 있는 사람의 행동을 지적하게 되면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자기는 왕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는 말 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왜냐 하면, 왕은 요새처럼 하는 관료가 아닙니다. 참, 이런 게 설명하기가 힘든데, 민주주의 제도는 몇 년 안됐어요. 200년 밖에 안됐어요. 관료라는 것은 국민들이 뽑아서 쓰는 월급제를 말하는 거고 민주주의 제도에서는. 그 전에는 그게 아니고 그 전에는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 게 아닙니다. 왕에게서 나와요. 모든 권력이. 국민이 갖고 있는 것은 왕이 받은 권력을 분배받아서 된 거예요. 왕에게 지적질을 한다는 것은 이것은 나는 니 밑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노선에 있다는 뜻으로 한 겁니다. 이 왕은 눈치를 챘지요. 다른 사람들은 내 밑에 있지만, 세례요한은 하나님 밑에 있기 때문에 나한테는 다른 철로에요. 노선이 다르기 때문에 지적질을 할 수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한다. 니가 어떻게 제수하고 하느냐,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왕을 우습게보겠느냐, 이런 식으로 했겠지요. 할 때, 만약에 왕이 살려준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이 땅에 나만이 왕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 돼버려요. 그리고 살려주게 되면, 지금은 제수 때문에 그렇지만 또 다른 것 가지고 또 시비를 걸 수 있거든요. 세금을 많이 걷었고 어떻고...수염은 왜 길렀느냐, 니 왜 이발 안 해. 이런 것도 할 수 있고. 막걸리 마시지 마! 이럴 수도 있을 문제고. 온갖 할 수 있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헤롯의 입장에서는 지금 세례요한이 선지자잖아요. 선지자 밑에 누가 선지자로 인정합니까? 민중들이 대중들이 백성들이 인정하지요. 지금 백성들의 마음이 갈렸어요. 세례요한도 일부 섬기고 세례요한 쪽 섬겨서 하나님 섬기고 세상적인 권력은 왕이 쥐고 있으니까 왕을 섬기고. 이걸 하나로 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세례요한을 제거할 필요가 있어요. 왜냐 하면, 세례요한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뒤에 민중들, 민심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왕이 잡게 되면 민심을 이번 기회로 꽉 잡을 수 있는 정치적인 승부가 있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왕은 의도적으로 헤롯을 처참하게 죽이지요. 여기 6절부터 나옵니다.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 허락하거늘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이걸 보고 사람들은 추종을 해요. 뭐냐 하면, 이 철없는 딸이 세례요한에게 감정이 있을 리는 없고 평소에 이미 작당이 됐다는 거예요. 헤롯과 그 부인이. 왜? 지금 당신이 왜 결혼을 그 따위 식으로 하느냐, 하면 왕 뿐만 아니고 왕과 결혼한 이 제수보고도 같이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니까 이 여자는 더 상처를 입잖아요. 그러니까 딸한테 그 이야기를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야, 야, 이쁜 딸아, 이쁘게 춤을 춰라. 그래서 내 남편이 아이고 내 딸아, 할 때 내가 시키는 대로 요구조건이 있을 때 나라의 반을 주겠다고 나오거든 너는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 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대통령 영부인들이 있잖아요. 이순자도 있고 육영수도 있고 죽 있는데, 이순자는 존경을 못 받아요. 왜냐 하면, 그 당시 중앙정보부 안기부 위에 이순자가 있답니다. 안기부가 최고 권력이지만 그 권력보다 이순자 말발이 더 세다고 소문날 정도로 강력히 했어요. 거기에 비해서 육영수 여사는 그야말로 테레사처럼 수녀처럼 모든 걸 헌신해서 비교되니까 그렇게 했다 말이지요.

이 권력에 대해서 여인들의 사심이 스며들 수가 있어요. 그런 근거가 뭐냐 하면, 1절에 보니까 분봉왕 헤롯이 예수님의 그런 이야기를 듣고 찔리는 게 있으니까 ‘야, 하나님의 노선에 있는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다르다. 죽였다 하지만 다시 귀신 되어 나타날 수 있겠다.’ 인간은 근원적인 공포심 같은 게 아무리 권력이 있어도, 원래 권력이 있으면 있을수록 돈이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더 힘들어져요. 누가 또 와가지고 돈을 사기 치지는 않을까하고 더 힘들어져요.

옛날에 중세 때 동화에 보면 이런 게 있습니다. 왕이 셔츠 수집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왕이 잠을 못 자요. 불면증에 걸려서. 그래서 잠 잘 오는 셔츠를 구하는데 마침 그게 있다는 겁니다. 보니까 어떤 노동자가 그 셔츠를 입었다는 거예요. 찾아갔어요. 그 셔츠 벗어서 나 주면 안 되겠느냐, 밤에 잠을 못 잔다. 분명히 벗어 줄 테니까 나와 같이 삶의 체험을 합시다. 해가지고 그 왕을 가지고 노동을 그렇게 시켰대요. 시키고 난 뒤에 밤에 잠을 자는데 잠이 절로 온다는 거예요. 낮에 새빠지게 일했으니까 잠이 안 올수가 없지요. 전도서 5장 12절에 나와요. 노동자는 잠을 달게 자느니라. 부자는 가진 게 많아서 잠을 설치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되며 헛된 거예요. 사람이 자기의 소유를 생각해 버리면 자기 자신을 소유해 버리면 잠을 못 자요. 왜? 내거니까 내가 지키기 위해서는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너무 걱정이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뭘 주신다 했습니까? 잠을 주신다. 조건이 있어요. 잘 때만큼은 제발 손 좀 떼라. 잘 때만큼은 네 손에서 포기해버려라. 오늘로 드디어 내 인생은 깨어보면 요 잠자는 걸로 긴긴 인생 마감해라. 내일 아침 주께서 일어나라고 깨어주면 새 생명 얻은 줄 알고 안 그러면 그냥 곱게 잠자면 되니까. 그런 맘으로 오늘도 편히 주무시기 바랍니다.

사실은 동화지만 따지고 보면, 예수님도 잠 못 잘 때가 있었어요. 밤새워 기도할 때가 있었거든요. 사도바울도 큰 근심이 있었고 그러니까 잠자고 안 자고를 가지고 주의 뜻이라고 이렇게 하지 말고 그건 하나의 구약 때의 그림자니까 신자에게는 잠 안자도 구원받았고 잠자도 사랑받고 있고 잠이 안와서 밤새도록 TV보면서 게임하면서 잠 안자도 구원 받는데 아무 지장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속에 있는 말씀이 말씀대로 떠오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새삼 하나님의 노선에 있다는 것은 남이 알아주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알아줘서 우리를 다루심으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 눈치 채는 그런 경우를 당하게 하시니 이것도 축복이고 감사할 일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말씀이 중요하지 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말씀을 봐야지 나를 붙잡지 않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대전2013926-마13장51절(옛것과 새것)44강 - 이 근호 목사.hwp (63.0K), Down: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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