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사회의 신학 131015
봉건사회의 신학 131015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한윤범(IP:14.♡.134.60)
13-10-19 12:33
20131015a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7-봉건사회의 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어떤 신학자들이 자기주장을 했는가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어거스틴 이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를 안 해요. 왜냐하면 삼위일체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확정이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다 하나님은 이렇다, 저렇다 하면 그것은 단번에 이단이 돼요. 그러면 하나님에 대해서는 이미 정답이 내려진 입장에서 신학자들은 할 일이 없지 않는가? 할 일이 없는 게 아니고 본격적으로 슬슬 할 일이 생깁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사람들이 하나님께 관심이 있는 척하지만 실은 그 당시나 요즘이나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에 관심이 있어요.
그럼 교회가 뭐냐 하면, 사람들의 정신을 장악하는데 관심이 있어요. 사람들의 영혼과 정신을 장악할 이유가 봉건사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봉건사회를 가장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봉건사회는 통치자가 없는 사회에요. 통치자가 없다는 말은, 봉건사회에도 분명히 왕이 있거든요. 이걸 후대에서 왕이라고 하는데 지금 우리가 알기 쉽게 설명하면 왕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이렇게 하면 됩니다. 전쟁하는 전문가로 보면 돼요. 이 사람들이 전쟁하는 이유는 땅을 획득하기 위함이고, 이 땅은 질 좋은 땅을 빼앗기 위해서 전쟁하는 그러한 시대를 봉건사회 또는 봉건사회 이전의 사회였습니다.
476년에 로마가 지중해와 유럽 연안을 다 차지했잖아요. 지중해를 내부 호수로 보면 돼요. 지중해 둘러가면서 로마가 차지했다고 보시면 돼요. 북아프리카,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타인, 터키, 그리스, 이태리, 스페인, 프랑스, 영국,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 폴란드,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전부 다 로마가 차지하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훈족이라는 이방인이 쳐들어오는데 여러 가지 종족을 합쳐서 게르만족이라 해요. 또 동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 등이 있습니다. 이들이 내려오면서 로마전역을 차지하는데 여기에 전쟁하는 사람들, 일종의 조폭, 깡패들이 일종에 왕으로 오는 겁니다. 로마의 땅을 각각 분할해서 땅 좋다고 다 차지하는 거예요. 이렇게 차지할 때 지난 시간에 어거스틴은 현재의 튀니지, 카르타고에 살고 있었는데 여기에 반달족이 와서 도시를 완전히 점령하고 말지요. 그럴 때 어거스틴은, 로마가 천년왕국이 아니구나. 로마가 기독교나라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독교나라를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피에르 요아킴이란 사람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구약의 시대를 율법시대로 보고, 1260년까지를 그리스도로 보고, 그 이후를 성령의 시대라고 주장했어요. 오리겐의 이론을 약간 참고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은 세대주의도 이런 이야기하는데 이게 뭐가 특별한가 하는데 피에르 요야킴이란 사람은 평신도거든요. 수도사도 신학자도 아니에요. 핍박받는 봉건사회의 농민들에게 이슈가 됐느냐 하면, 봉건사회 제일 위에 왕이 있는데 아까 봉건사회에는 왕이 없다고 했는데 왕이라는 게 어떤 지역을 다스리는 왕은 없고, 자기 영토만 다스리는 한에서 왕이에요.
그러면 왕이 자기 지경 땅이 있을 것이고 주변에 나눠준 땅들이 있어요. 그 땅을 영주가 차지하는 겁니다. 영주 밑에 기사가 있고 기사 밑에 농노가 있는데 영주의 부하가 기사에요. 왕, 영주, 기사는 뭐하는 사람입니까? 맨날 전쟁 훈련하고 연습하는 전쟁하는 자들이거든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왕의 부하가 영주고, 영주의 부하가 기사잖아요. 그런데 기사는 왕의 말을 안 듣습니다. 부하의 부하는 내 부하가 아니에요. 그게 아주 특이한 사회, 이걸 봉건사회라 하거든요. 왕과 영주 사이는 계약관계에 있습니다. 영주는 자기 땅을 세습시켜서 “땅 줄게 네가 알아서 하되 전쟁할 때 도와주고 세금 바쳐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왕이 전쟁하는 자라고 했지요. 전쟁하는 자가 전쟁 안 하면 할 일이 없는 거예요. 요즘 교회 목사는 뭐하는 사람들이에요? 전쟁하는 사람들입니다. 교인들 확보하는 전쟁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목사의 모든 일년 계획은 사람들 빼앗는 그 계획인데 그것 안 하면 목사가 할 일이 없어요.
그런데 디모데전서나 보게 되면,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전쟁하는 사람도 되지만 전쟁할 때 뭐부터 해야 돼요? 땅의 전쟁이 아니고 네가 복음에 충실하라고 하지요. 복음을 사수하기 위한 전쟁을 하는 거죠. 그러면 디모데는 뭘 해야 됩니까? 복음이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이며, 여기에 대해서 확신과 배움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목회자가 공부 안 하고 맨날 사람 꼬시는 전쟁만 하게 되면 이것 없으면 할 일이 없다니까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모든 문제는 어디서 생기느냐? 땅입니다. 어떤 면적을 내 것으로 삼을 것인가? 모든 인생사가 땅과 관련돼있어요. 내 땅 없으면 설움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삼국시대 말기에 깡패가 등장하지요. 이름이 궁예. 그 밑에서 백성들에게 인정받는 깡패가 왕건. 세상의 모든 국가에서는 전부 땅과 관련돼있고,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고, 전쟁을 벌이는 사이에서 밑에 사람들을 부릴 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땅 전쟁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힘 가진 자의 대해서 힘없는 자는 무조건 종속돼야 되기 때문에 힘 가진 자가 만약에 아리우스파라면 전부 아리우스파고, 힘 가지 자가 아타나시우스라면 전부 아타나시우스가 되고, 힘 가진 자가 기독교라면 전부 기독교가 되는 거예요. 심지어 불가리아에 있는 왕은 전 주민을 바다에 집어넣고 세례를 줬어요. 만약에 거기서 세례 안 받으면 어떻게 돼요? 봉건사회에서는 자기 땅이 없어요. 분배 받은 땅이기 때문에 자기가 이 땅에서 밥 빌어먹고 살려면 반드시 기사나 영주의 지배를 받아야 되고, 지배를 받는다는 것은 정신적으로 그쪽의 종교에 복속돼야 된다 이 말입니다. 아버지가 기독교인데 지가 절에 갈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가 기독교라면 자기 용돈을 위해서라도 그냥 교회에 가줘야 되는 거예요. 예수고 뭐고 모릅니다. 그냥 가주는 거잖아요.
우리가 중세철학을 왜 하느냐? 중세철학, 중세신학은 이렇습니다. 목사님들이 이것 하나만 알면 중세신학이라는 게 철학이라는 게 여기서 나왔구나. 대번에 1분간 이야기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신과 하나가 되는 사회였어요. 신의 자녀들이에요. 고대사회는 신의 지배를 받게 돼요. 그런데 철학이 발달되면서 신을 하늘로 보내는 거예요. 신이 있고 내가 여기 있다는 겁니다. 이게 스피노자는 추계시대라고 해서 전 세계 모든 문명지역에서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는데 뭐냐 하면, 신을 올려 보내고 인간은 인간 나름대로 생각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것은 중세철학도 마찬가지에요. 신이 무엇이냐 할 때 이미 삼위일체로 정답이 내려졌어요. 325년부터 해서 성령이 아들로부터 오느냐, 아버지와 아들 양쪽 다로부터 오느냐? 아니면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해서 오느냐? 그 문제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눠지잖아요. Fileoque 문제 할 때 끝났어요. 거의 300년 만에 마감됐잖아요.
그러니까 신에 대해서 사람들이 거론을 잘못하면 이단 된다고. 이단 되면 됐지? 이단 되면 땅을 잃어요. 갈 곳이 없다니까. 사람이 땅 없으면 못 살잖아요. 창세기 3장 보세요. 하나님이 아담을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지요. 가인이 벌 받았을 때 겁냈던 것은 죽는 것이 겁나는 게 아니고 남의 땅에 사는 게 겁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남의 땅에 산다는 것은 그쪽에 있는 모든 정신세계에 내가 굴종해야 된다는 걸 의미하는 겁니다.
옛날에 한국에 선교사들이 들어올 때 미국에서 협의해서 강원도, 충청도 쪽은 감리교, 경상도 쪽은 장로교, 나머지는 알아서 하고. 이렇게 나눈 것은 전부 땅 문제와 관련돼있어요.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에 선교 들어갈 때 싱가포르 같으면 싱가포르 서쪽 지역은 장신이 장악하고, 동쪽 지역은 합동 측이 장악하고 넘어오면 안 된다. 자기들끼리 그렇게 협약을 맺은 겁니다.
삼위일체가 문제가 아니고 인간에게 가장 문제가 뭐냐? 내가 생존할 나의 영역, 나만의 영역을 갖추는 것, 이게 인간들 속에 숨겨진 담겨진 속셈이에요. 괜히 삼위일체를 거론한다는 것은 삼위일체에 대해서 설명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무조건 삼위일체 해야만 그 교회에서 이단 아닌 사람으로 남을 수 있으니까 하는 거예요. 요즘 교회도 그렇지만 옛날 교회는 더더군다나 그런 거예요.
그러면 삼위일체가 굳어지기 때문에 그 다음에 관심사가 뭐냐 하면,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삶을 사느냐, 어떻게 기독교인으로 사느냐는 관심사가 내려오면서 이것과 무엇이 관련돼 있느냐 하면, 바로 권력과 관련돼있고, 이것 하나 잊어버리면 절대로 안 됩니다. 모든 권력은 땅 소유에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야만인들, 게르만족이 내려오니까 교회 교황이 해준 게 그들의 땅 받은 것을 신의 축복으로 간주하면서 그 지역, 그 땅을 그들이 합법적으로 소유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들은 반대급부로 뭘 얻느냐 하면, 신의 자녀로 편입이 되는 것을 교육하면서 기독교국가가 된 겁니다. “당신이 로마의 땅 가진 것은 바로 당신이 신의 자녀라는 증거입니다.” 계약이 원만하게 성사될 수밖에 없어요.
북쪽에 덴마크, 스웨덴 그쪽 사람들이 로마를 침공할 때 로마에서 제시한 정책이 뭐냐 하면, “당신이 왜 공격하느냐?” “거주할 데가 없다. 우리는 바이킹족이다.” 그러면 거주할 땅을 줄 테니까 당신은 우리 종교는 신이 삼위일체로 확정됐으니까 그걸 수용한다면, 현재 프랑스 북쪽 노르망디, 노르망디가 노르만족 땅이잖아요. 그때 그들이 자기 땅으로 인정받은 거예요. 로마로부터.
그것만 인정받았습니까? 나중에 프랑크 족속이기 때문에 지금의 프랑스가 된 거예요. 프랑스가 되면서 메로빙거 왕조가 성립하고 1000년경에는 카롤링거 왕조가 있어요. 카롤링거 왕조에서 등장한 것이 신성로마제국, 옛날 로마가 그리워서. 로마가 망하고 기독교가 둘로 쪼개졌어요. 러시아정교회와 로마 중심의 라틴교회로 나눠졌거든요. 어거스틴은 라틴 쪽에 속하면서 이민족을 신의 뜻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어거스틴의 책에 나옵니다. 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피에르 요아킴은 로마를 천년왕국으로 봤거든요. 로마가 이민족에 당하기 전에 역사는 이미 종결된 거예요. 삼위일체 되고 난 뒤에 그냥 이대로 모든 것은 하나님을 아는 민족이 영원토록 갈 것이라고 했는데 이민족이 쳐들어오고 난 뒤에는 지금 눈에 보이는 로마제국이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년왕국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게 아니라고 했을 때 현재 있는 기독교나라가 지상왕국이 아니라고 했을 때 그 의미가 뭐냐 하면, 반란의 여지를 제공하는 겁니다.
어느 교회가 있는데 이 교회는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그 교회가 아니라고 누가 이야기했다는 것은 그 뒤에 남아있는 이야기는 들으나 마나에요. “이것 뒤집어야 돼.” 그런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권력을 가지면서 신의 축복으로 보거든요. 이 권력은 항상 소유형식입니다. “내가 이런 정도의 땅과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신의 뜻입니다.”라고 할 그것에 부합하면서 그들은 신과 관련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신학이란 처음에는 삼위일체 하다가 점차 현재 우리가 가진 권력과 땅은 하나님 앞에 부합되는 축복의 결과물이라고 인정해주는, 현재 봉건사회를 신의 질서라고 인정해주는 그러한 신학이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신학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학이라는 것은 진리와는 상관없고 사람들의 자기 처지와 현 질서에 대한 안정과 행복을 보장해주는 신학이면 좋은 신이고, 현재 내 처지를 불안케 하면 이것은 저주받은 악마의 논리가 되는 겁니다. 이미 삼위일체는 결정돼있고, 신에 대해서는 더 이야기할 게 없어요. 인간의 아이디어는 다 짜냈어요. 그 다음부터 나머지는 삼위일체를 알고 있다는 것은 신에 대해서 합당한 백성이란 뜻이고, 합당한 백성이라면 합당한 백성이 이 땅에서 뭘 하면 됩니까? 묻는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지요. 우리가 한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축복이라고 마땅히 네가 받아 누릴 것이라는 것에 부합되는 논리가 그 다음에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그건 전부 다 봉건사회의 안정된 질서를 위해서.
봉건사회를 다시 봅시다. 제일 위에 왕이 있지요. 왕은 교황한테 인정받지요. 왕은 자기가 침략해서 가진 땅은 신의 뜻이라고 새삼스럽게 인정하는 거예요. 나중에 기독교가 아닌 자들도 기독교인이 되고 난 뒤에 우리가 프랑스 차지한 것도 신의 뜻이구나. 우리가 독일을 차지한 것도 신의 뜻이구나. 폴란드를 차지한 것도 신의 뜻이구나. 모든 것을 긍정하면 되는 거예요. 자기의 모든 전쟁행위에 대해서 차후적으로 인정받으면 그만인 거예요. 그 대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어주면 되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윈윈, 양쪽 다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누가 이의를 겁니까? 누가 감히.
만약에 이의를 제기하면 그 사람 이단 만드는 것은 쉬워요. 이단 만드는 삼위일체로 걸면 되는 거예요. 우리 생각에 삼위일체 안 걸리면 되지. 그러나 삼위일체가 확정된 논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이 질문을 하기에 따라서 이단이 돼버려요. 종교 재판할 때 예수님께서 우실 때 흘린 눈물은 인간의 눈물이냐, 신의 눈물이냐고 묻는 거예요. 그것은 인간의 눈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인간이 있다고 하면 끝나는 문제에요. 삼위일체는 아무도 설명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삼위일체를 이미 설정해놓으니까 이것은 자기의 정적, 원수를 제거하고 싶으면 삼위일체로 조지면 되니까.
봉건사회는 왕이 있고 영주 있고, 기사 있고, 마지막에 농노가 있지요. 농노는 소작인입니다. 소작인은 남의 땅 갈아주고 세금 바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이 사람들은 자기가 땅에 사는 것이 아니고 땅이 자기를 지배하기 때문에 그 땅을 버리고 다른 땅에 가서 취직이 될까요, 안 될까요? 이게 영주의 허락을 받아야 돼. 심지어 시집을 옆의 영주 땅의 총각과 연애해도 결혼 못합니다. 영주의 허락을 받으려면 돈 많이 줘야 돼요. 돈 많이 내든지 안 그러면 자기가 속한 땅의 총각과 결혼하든지. 그래야 땅을 경작하는 노동력을 계속해서 확보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영주는 교회를 세워요. 이 교회를 교회사에서 사슬교회라고 합니다. 사슬교회에 있는 사제 네 명당 주교 한 명이 돼요. 주교는 영주와 같은 급이에요. 그래서 주교는 영주의 일가친척들이 돼요. 주교는 영주와 관련돼있어서 주교도 땅이 있어야 사니까. 왕이 주교를 임명하니까 주교는 왕의 눈치를 보고.
그런데 신성로마제국 앙리 4세 같은 경우에는 그 당시 교황이 반박하고 나섰어요. 주교는 종교에 속하기 때문에 교황인 내가 임명하지 세속적인 왕, 너는 정치하고 치안문제만 하지 교회 문제까지 주교 임명을 네가 하느냐. 켄터루스3세가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제일 깡패 같은 교황인데 그 사람이 그렇게 주장했다고요.
여러분 그걸 미리 봅시다. “주교 임명을 부산시장이 하느냐 말이죠. 우리 노회에서 해야지.”라고 했다는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교회와 국가가 이미 분리됐으니까 그런 반발이 나오잖아요. 교회와 세속나라가 분리됐으니까 그런 주장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분리되려면 땅이 있어야 되는데 그만큼 교황 땅이 있다는 이야기에요. 세상에 있는 모든 힘은 소유에서 나오고 그 소유는 땅에 대한 권리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교황이 어느새 세속권력과 맞섰다는 말은 교황은 영주를 자기편으로 잡아당겼다는 거예요. 왕과 영주 사이에 봉건적인 계약이 성립하기 마련인데 영주가 왕에 대해서 불만이 있을 때 영주는 교황 쪽에 서버려요. 왕은 땅이 없으면 교황한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어요.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의 굴욕이라 해서 알프스 산의 별장에 사흘 동안 맨발로 눈 맞으면서 빌었습니다(당시 교황은 그레고리우스7세). 나중에 호되게 복수하지만.
**“마침내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두어 명의 수행원만 거느리고 내가 머물고 있던 카노사(이탈리아 북부 레조넬에밀리아 지방의 남서쪽에 있는 10세기의 성)에 찾아왔소. 황제는 적대적이거나 오만한 기색이 전혀 없이 성문 앞에서 사흘 동안 사면을 빌었다오. 황제의 의복 대신 초라한 모직 옷을 걸치고 신발도 신지 않은, 그야말로 처량한 고해자의 모습이었소.”(그레고리우스7세, [서한집], 1077년)
여기서 교황 편에 서서 교황의 손을 들어준 신학자들이 보나벤투라, 토마스 아퀴나스, 아벨라르, 베르나르, 알베르투스 등 우리가 하려면 신학자들이 줄줄이 있습니다. 세속정치와 교회는 관리하는 바가 따로 있다. 신의 계시는 믿음으로 알 수 있지 이성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믿음을 믿으라는 말은 곧 무슨 말이냐 하면, 요즘 믿음과 달라요. 믿음이란 신의 계시가 구체화된 것이 교회사에서 세 가지의 성사로 되는 겁니다. 성체성사,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체성사는 성만찬을 말하고 세례는 아시죠. 견진은 일반 사제가 못하고 주교만 하는 것인데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계속해서 성령을 부여받도록 성화생활 잘 하도록 해주는 성사, 초창기에 이 세 가지를 교회에서 담당한 겁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화체설이라는 것도 “이 떡은 예수님의 된다.”가 아니라 “이 떡은 예수님의 몸이다.”라고 한 거예요. 여기에 신학자들을 다 동원해요. 그 다음에 “이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가 된다.”가 아니라 “피다.”라고 한 거예요. 피가 된다는 것은 루터고, 피라고 하는 것은 그 전의 화체설이고. 물론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한 사람은 다 잘려요. 그러니까 천하의 왕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잖아요.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왕이나 영주나 교회가 만든 법에 대해서 권력과 상관없이 무조건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거기다 더해서 연옥설을 만들어요. 연옥설은 패자부활전입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가친척이 죽게 되면 일단 임시적인 훈련소에 집합해요. 바로 지옥, 천당으로 가는 게 아니고. 그게 연옥이에요. 연옥에 가서 누가 사식을 많이 넣어주느냐, 그러니까 누가 빽을 많이 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은 천국으로 빠지고, 만약에 아무도 안 도와주면 그 사람은 영원한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살아있는 사람이 죽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거예요.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할 때 맨 입으로 되겠습니까? 사식 넣을 때 돈 먹여야 되잖아요. 그 당시의 돈은 땅이었습니다. 교회에 땅을 헌납하게 되면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선조들이 혜택을 입게 돼요. 그러면 교회에서 뭐 하느냐? 신부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를 해줘요. 기도가 일단 어디로 통하느냐 하면 이미 죽은 성자들에게 갑니다. 성자들은 누구한테 압력을 가하느냐 하면, 그리스도의 어머니 마리아한테 가요. 마리아가 자기 아들이 예수님이니까. 아들에게 빽을 써요. 교회는 땅이라는 부동산을 받고 기도해주게 되면 그 기도는 성자를 통해서 마리아한테 가서 예수님한테 가지요.
그 천주교 방식이 개신교로 넘어오면서 중보기도가 됐어요. 중보기도가 빽쓰는 거예요. 완전히 천주교 식이지요. 중보기도가 왜 나왔느냐 하면 아무리 전도해도 교회 안 나올 때 특히 가족들, 그 답답증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 답답증에 대해서 교회가 내놓은 대안이 교회 안 나와도 당신 중보기도를 하게 되면 그 기도가 예수님한테 상달되게 되면 당신이 기도한 자식이나 가족들에게 뭔가 영향력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는 거예요. 이것은 천주교의 연옥설을 약간 바꾼 거예요. 중보기도가 되면 중보자가 누가 됩니까? 기도할 동안에는 기도하는 본인이 되지요. 기도 끝나고 마지막에 이름 붙이는 것 있잖아요. 그러면 누구 이름으로 해야 돼요? 이건 자기 이름으로 해야 되지 예수님 이름 붙이면 안 되잖아요. 근본적으로 이방종교, 산당이에요.
사슬종교가 있는 이유는 이 밑에 기사 되고 농사꾼 되는 것은 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항상 교회 가서 세뇌받기 위해서. 그래서 중세교회의 모든 설교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현재 당신 처지에 감사해라. 그게 하나님이 창세전에 주신 운명이다. 그러니까 반발하지 말고 대들지 말고 그냥 봉건사회 질서 그대로 유지해주고. 당신의 처지에 대해 불만을 품고 권력자에 대드는 그 죄는, 모든 천주교 신자를 일년에 한 번씩 반드시 고해성사하게 돼있어요. 그 고해성사를 사슬교회에 와서 사제한테 하는 겁니다.
권력에 대한 철저한 복종을 강요함으로써 이 자체를 천년왕국 이미 확정된 더 이상 다른 건 기대하지 마. 완성된 지상의 낙원이라고 했던 거기에 대해서 새로운 성령의 시대가 있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아니고 무슨 나라? 성령이 왔다는 말은, 모든 교회 권력에 대한 반란의 여지를 제공하는 겁니다.
그 요아킴의 사상은 뒤에 농민반란으로 이어져서 토마스 뮌처에 대해서 루터가 나타날 때 농민들도 같이 들고 나선 겁니다. 특히 농민들이 제일 불만인 것은 십일조라는 세금. 세금이 십일조뿐이겠습니까? 다른 것도 많아요. 제일 좋은 것들을 바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아주 고단한 인생을 살게 된 것도 신이 내린 지정된 자리라고 해서 군말하지 말고 견디면 나중에는 네가 잘 견뎠구나. 네가 성만찬에 잘 참석했구나. 영원한 천국이 보상되는 사회, 그 사회가 바로 천년왕국으로 통했던 중세사회였고 그 사회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논리적으로 해주는 사람들이 신학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되니까 연옥설로 인하여 땅 가진 사람들이 땅을 왕한테 바치는 게 아니고 사제한테 바치겠지요. 신에 대해서는 삼위일체로 확정됐지요. 그 다음에 문제는 신이 만든 나라가 질서 잡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신학이 그쪽으로 자연스럽게 눈을 돌릴 수밖에 없지요. 왜냐하면 권력 자체가 그거니까. 이민족들이 와서 땅 갈라먹기 다 했으니까. 당신이 이렇게 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긍정을 해줘야 유럽사회가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정신적인 매개가 형성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그게 봉건사회라 했지요. 왕이나 영주나 기사는 전쟁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노동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그것은 70~80% 차지하는 농민들이 하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개간할 수 있는 농업의 여건이 안 됐어요. 하여튼 계곡에 땅 좋다 싶으면 그걸 탐내고 차지하기 위해서는 강한 군대가 필요했고 기사는 전쟁만 할 뿐이에요. 나중에 15세기에 와서 고상한 귀족부인에게 기사도를 발휘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양아치들이에요. 없는 사람들 뜯어먹듯이 그런 식으로 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정교일치, 정치와 교회가 하나가 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야 안정이 되니까. 그런데 국가권력에 대해서 소외되는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아무리 권력이 좋지만 속 틀리는 사람이 있다고. 그런 사람들이 나와서 신비주의 쪽으로 가기 시작합니다. 최초로 신비주의가 수도원제도 같은 것. 모든 세상을 끊어버리고 나는 기도만 할란다. 제일 먼저 베네딕트 수도원이 500년경에 생기고, 그 뒤 약 천년 후에 도미니크 수도원과 프란치스코 수도원이 나와요. 프란치스코 수도원은 거지수도원, 탁발, 얻어먹으며 하는 것. 도미니크 수도원은 대학을 세워서 대학교수들 중심, 가르치는 것. 뭘 가르치느냐?
실질적으로 오늘 강의에 제일 중요한 대목에 도달했습니다. 삼위일체에서 일체에서 위가 셋으로 갈라지잖아요. 본질은 하나고 위격이 셋이다. 이게 말이 안 돼요. 왜냐하면 위격이나, 체나 같은 말이거든요. 같은 말인데 없는 용어를 만들어서 집어넣었어요. 일인데 일이 삼이고, 삼이 일이란 말이 너무 어려우니까 삼 뒤에 위를 놓고 일 뒤에 체 놓아서 삼위일체라고 완성을 시킨 겁니다.
이 위격의 대표자가 예수님인데 특징이 있어요. 뭐냐 하면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어요.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된다면 삼위일체를 늘여보자. 신을 늘여보면 지상의 개인들, 인간은 과연 무엇이냐를 삼위일체에 근거해서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 겁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은 ‘로고스+육신’이 결합된 것이다. 로고스는 신성이고 육신은 인성이지요. 결합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에 본인이 자존적인 것, 위라는 거예요. 독자적인 영혼을 갖고 있는 걸 위라고 하거든요. 마찬가지로 성도에게도 이것이 그대로 늘어져서 이을 수 있다는 거예요. 성도는 ‘영혼+육신’이라 하면 되고, 하나님의 영혼이라고 하면 되겠지요. 성령을 받아서.
삼위일체를 확산시키면 하나의 개인도 영혼과 육신이 있는데 육신은 후패해서 섞어질 것이고 영혼은 하나님의 영을 닮아서 날마다 성화되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영혼이니까 형상을 본받아서 하면 된다는 인간이 어떻게 산다는 것은 삼위일체를 통해서 끄집어낼 수가 있겠지요. 어거스틴은 영혼이 신의 뜻을 아는데 필요한 이걸 조명설이라 합니다. 조명설은 이런 거예요. 세상 지식으로는 하나님을 몰라도 빛 되신 하나님의 알려주심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신앙으로 보는 거예요. 육신으로 안은 것은 이성으로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수도원에서 뭘 해야 돼요? 육신이 하는 노동은 더러운 농노들이 하고 자기는 영혼 가꾸기에 기도와 묵상을 이걸 수도원에서 하면 되겠지요. 그렇게 해서 갈라졌을 때 우리 보기에는 경건해 보이지요. 세상을 떠나서 오직 기도와 말씀에만 전념하니까. 그런데 이러한 제도로 말미암아 일반 농사짓는 사람들, 땅 가진 영주나 맨날 전쟁만 하는 아주 무식한 사람들이 결국은 어디에 기대를 걸겠습니까? 자기와 결탁이 돼있는 타락한 주교, 사슬교회, 영주가 자기 일가친척들 세워서 밑에 농노들 꼼짝 못하게 하고 정신적인 훈련소 같은 그런 교회에 종사하는 질 떨어진 사람들보다 모든 포기한 수도원에 간 사람들을 존경하겠지요.
어제 뉴스에 보니까 독일의 주교가 자기 집 짓는데 250억 들였다고 독일사회에서 시위하고 그랬어요. 혼자 사는 주교가 250억 집을 짓습니까. 처음에 80억으로 지으려다가 예산이 늘어났답니다. 거기에 비해서 지금도 수도원에서 기도와 묵상만 하고 모든 걸 포기하고 진짜 두 벌 옷을 갖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존경스럽겠습니까. 자기들도 알아요. 얼마나 더럽게 살았는지. 그래서 마지막 죽을 때 땅을 어디다 바치겠습니까? 바치니까 수도원이 커지지요. 땅 가진 놈이 최고지. 그것도 아주 품질 좋은 땅, 농사 최고로 잘 되는 땅.
처음에 유럽에서는 휴경지와 경작지 둘이었는데 나중에는 추경지와 춘경지, 휴경지로 나눈 삼포제를 시행해서 생산량이 40% 증가했어요. 그때부터 기존에 영주 밑에서 탈출한 농노들이 폴란드, 헝가리 쪽으로 이민을 가요. 그래서 폴란드, 헝가리 쪽에 새로운 분위기가 오면서 기존에 불만 세력들이 있으면서 14,5세기에 드디어 천주교에 대항하는 새로운 개혁교회 쪽의 운동들이 나옵니다. **헝가리의 얀 후스
전부 땅 문제 때문에 그래요. 여기에 사는 것보다 저기가 나으니까. 가면서 기존에 천주교에 대한 반발, 새로운 종교, 요아킴에 의하면 성령의 시대. 성만찬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우리는 성령 받으면 그것이 바로 교회다. 이것이 나중에 재세례파, 오늘날 침례교가 돼요. 종교개혁을 통해서. 침례교의 국시는 그거에요. 교회는 어떤 국가와 어떤 단체로부터 지시나 지배를 받지 아니한다.
그런데 교회가 국가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은 교회 입장에서는 좋은 겁니까, 서러운 겁니까? 서럽지요. 왜? 전에는 다 먹었는데 이민족 들어와서 쫓겨나니까 영적인 것만 다루니까 이것은 사실은 돈이 안 되지요. 그래서 교회가 칼 쓰는 자를 고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영주, 기사의 도움으로 루터는 종교개혁에 성공하게 되는 겁니다. 그전에 루터 같은 사상이 있었어요. 하지만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칼 가진 자가 없기 때문에. 베드로처럼 칼 가져야 돼. 그만큼 민중들은 종교라 하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사실은 양질의 옥토의 땅을 얼마큼 내가 차지해서 사느냐? 그걸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간주하고 싶은 겁니다.
10분 쉽시다.
한윤범(IP:14.♡.134.60)
13-10-19 12:33
20131015b 부산강의 : [80여명의 신학자들]07-봉건사회의 신학
(강의:이근호 목사)
좀 난해하겠지만 여러분들이 목사님들이니까 이 정도는 감당을 해야 됩니다. 뭐냐 하면, 삼위일체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수도사, 수도원 나름대로 신학을 전개한 방법이 뭐냐? 아까 이야기했지요. 신비주의인데 신비주의의 원조가 위디오니소스라는 문서가 있어요.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요. 이것이 어거스틴 이후에, 어거스틴 이후란 말은 게르만족이 로마를 다 차지해서 476년에 서로마는 망하고 동로마는 천년 가까이 더 버티고. 나중에 땅 조금 남았어요. 다 빼앗기고. 동로마의 수도가 비잔틴, 오늘날 이스탄불이고 옛날에는 콘스탄티노플.
신비주의 문서는 플로티노스 철학에서 나왔어요. 플로티노스는 200년경 철학자인데 철학자란 기독교는 몰라도 세상에 대해서 신이 있는 세상을 설명할 수 있다. 설명을 원으로 설명해요. 원은 중심이 있고 원주가 있고 반지름이 있지요. 중심에서 반지름으로 그리면 원이 이것이 바로 신이 만든 세상입니다. 특징이 뭐냐 하면 중심을 하나로 봐요. 곧 신입니다. 반지름을 정신이라 하고 앞에 있는 것을 영혼이라 합니다. 영혼이란 개별 인간, 또는 개별 짐승들, 개별 피조물들을 영혼이라 합니다.
세상에는 왜 있나? 개가 뛰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가 간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플로티노스는, 왜 개가 있지? 저 개가 왜 나타난 거야? 저쪽 동네에. 왜 저 개가 저쪽 동네에 있어야 되지? 누가 길으니까. 길러야 될 정도로 애초부터 왜 뭐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모든 개체에게 있다는 것이 성립 되려면 있음을 있게 만드는 그분도 있어야 되겠지요. 그분이 신입니다. 안셀무스의 신 존재증명에도 나오거든요.
있다는 것이 현재 있는 자의 속성이라면 그 속성은 개별자에게만 있는 속성이 아니고 그걸 있게 만든 신에게도 있기 때문에 신은 존재한다는 겁니다. 12세기에 안셀무스가 그렇게 존재론적 증명했거든요. 플로티노스의 영향을 받은 거지요. 플로티노스는 세상에 모든 걸 있다고 할 때 그냥 보면 차이만 나지요.
여기 개 있고, 소 있습니다. 우린 기껏 저건 개다. 저건 소다. 사람 같으면 사람 있다. 이게 사람 사는 겁니까? 이건 사는 것도 아니죠. 개는 어디서 나왔을까, 소는 어디서 나왔을까, 인간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걸 따져야 인간다운 것이고 내가 만약에 신에서 나왔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지? 신의 뜻대로 살아야지. 신의 뜻이 뭘까? 이렇게 따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이란 말이죠. 개 있네, 소 있네, 사람 있네. 인간치고 이런 인간 없다는 겁니다. 돈 벌기 바빠서 신경 못 쓰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간에 조용할 때 나는 왜 살지, 죽으면 어디로 가지? 이걸 생각하기 마련인데
반지름이 뭐라 했지요? 정신. 정신을 통해 가게 되면 뭘 만난다? 하나, 신을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정신을 따라서 갈 수 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신으로부터 정신이 나와서 개개의 인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걸 신플라톤주의라 했지요. 그러니까 플라톤주의는 아니지요. 그 차이는 뭐냐? 신플라톤주의는 지상에 있는 것과 하늘에 있는 것은 그냥 모방될 뿐이지 일치성은 없어요. 아시겠습니까? 모사, 모방이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것 몇 각형입니까? 삼각형. 이건 몇 각형이에요? 삼각형. 그러면 이것도 삼각형이고 이것도 삼각형인데 아무리 대봐야 모양이 다르지요. 그러면 진짜 삼각형은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없지요. 그게 플라톤주의입니다. 신플라톤주의는 지상과 천상이 끊어져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으로 연결돼있고 정신이 흘러 들어와요. 이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다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냥 계신 게 아니고 날마다 뭔가 흘러 들어와서 지금의 봉건사회를 이룰 수 있다. 이게 바로 신플라톤주의입니다.
그러면 봉건사회가 너무 세속적으로 흐른다면 수도원에 모여서 기도와 묵상을 하게 되면 신이 내려주신 정신, 흔히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죠. 신의 형상을 따라가게 되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도달한다는 사상, 그 사상이 바로 위디오니소스의 사상이고 그 뒤에 메로빙거 왕조, 카롤링거 왕조에 와서 그걸 구체화시킨 사람이 베르나르란 사람입니다. 교재에 있기 때문에 제가 흐름만 이야기합니다.
에리게나가 본격적으로 신비주의를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데 교재에 나와 있기 때문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복음에 관심 있는 목사님들은 이런 철학자, 신학자 이야기하게 되면 지루해요. 전혀 구원의 능력도 없는 것을 왜 공부해야 되나 싶지만 이야기 들어보고 여러분이 반박을 해보세요. 과연 반박이 되는지. 그러니까 유명한 신학자가 되는 거예요. 반박하기가 만만치 않아요. 반박하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되고.
에리게나 사상을 이야기해볼게요. 위디오니소스, 신플라톤주의를 염두에 두시면 이해됩니다. 이 세상은 신 따로 인간 따로 하면 안 된다. 그런데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은 신은 보이지 않으니까 인간은 자연을 본다. 이의 없지요. 지금까지는. 따라서 자연에 둘러싸인 인간이 신을 알기 힘드니까 자연을 확대시켜보자. 신까지 포함해서. 그러면 네 가지 종류로 신과 인간이 한 덩어리 된 합일된, 합일이란 신비주의의 중심개념 아닙니까. 신비주의는 신과 합일을 노리고 있잖아요. 성화 되면 나중에 하나 된다는 것. 지금도 개척 교회하는 목사들은 그것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김홍전 계통, 신과 인간이 합일된다는 것, 그리고 지방교회, 위트니스 계열도 마찬가지지요. 전부 에리게나 말 들으면 에리게나를 할아버지라 합니다.
신과 인간이 합일되어 있다. 그러면 합일을 우리가 알고 있는 신과 자연을 같이 뭉쳐버리자. 뭉치면 네 종류의 자연이 성립됩니다. 그게 교재에 나오지요. 첫 번째가 창조를 하시면서 본인은 창조가 안 되는 것, 이것은 하나님. 자연관을 네 토막 내는 건 아니에요. 네 개를 합쳐야 되는 건 맞지만 네 토막 내는 건 아니에요. 자연이 있으면 네 가지 층의 깊이가 있다고 보시면 되는 거예요.
나중에 베르나르는 에리게나의 사상을 더 심화시킨 사람이에요. 심화시켜서 세상의 모든 것은 질서가 있고 계급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역시 봉건적인 사회에서는 질서가 제일이지요. 현재 기존 교회의 기본은 뭐냐? 복음도 아니고 성경도 아니에요. 질서입니다. 복종하는 거예요. 윗사람에게 아랫사람이 복종하는 것. 그래야 교인들이 안정감을 느끼고 등록하면 구원받고 하는 거죠.
그 다음 두 번째가 창조하면서 창조되는 자연. 창조된다니까 얼른 뭘 생각합니까? 피조세계. 아니거든요. 피조세계는 창조하지는 않아요. 창조되기만 하지.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의미합니다. 모든 피조세계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 형상. 이 에리게나의 주장이 그 뒤에 아벨라투스라든지, 토마스 아퀴나스라든지, 둔스 스코투스, 윌리암 오캄 쪽에 가게 되면 이런 이야기 되거든요. 어떤 이야기냐 하면, 삼위일체도 관련돼있으니까 중요한 이야기인데, 중요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죠.
예를 들어봅시다. 존이란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이, “어이, 존.” 하면 돌아보지요. 존과 찰스란 사람이 있다면, 둘 다 인간이지요. 존도 인간이고, 찰스도 인간이라면 둘 다 동일한 사람이에요, 동일한 사람이 아니에요? 둘 다 동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상식인데 그런데 어떤 사람이 혹시 여기 사람 있습니까? 하면 둘 다 손을 들지요. 그러면 사람한테는 둘 다 동일하지요. 동일하지 않으면서도 동일할 때 존과 찰스가 다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면에서 동일할 때 사람이라는 것이 실제로 그런가, 아니면 개별자에게만 해당되는가? 이 말은 인간이라는 것이 실제로 인간이 있는지 아니면 정신에게만 있는지, 그게 무척 중요한 문제가 돼요.
만약에 실제로 인간이 존과 찰스를 떠나서 따로 있다면 이것은 뭘 설명하는데 유리하냐 하면, 성부, 성자, 성령만 계신 게 아니고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로 계시는 삼위일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거예요. 성부, 성자, 성령 각각 따로 있지만 본질에서는 동일한 분이니까 삼·위·일·체의 설명이 가능하지요.
그런데 존과 찰스는 존도 인간이고 찰스도 인간이지만 이 사람들 떠나서는 인간이 없다고 해버리면 이것은 나타난 것, 눈에 보이는 것, 이것이 전부고 그 외에는 없는 게 돼요. 그러면 존과 찰스 또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어떤 마을에 소크라테스가 살고 있고 어떤 마을에 플라톤이 살고 있으면 어떤 마을에 살고 있는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입니까? 분명히 아니지요. 소크라테스가 아니라고 해버리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와 다른 인간이 돼요. 그러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합칠 수 있는 매개점이 사라져요. 하품 나올 수밖에 없어요. 무슨 말인지 어려워요.
이 교회에 교인이 두 사람 있습니다. 둘 다 말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 받은 백성이라 하잖아요. 백성 둘이라면 같아야 되는데 점심 먹으러 갔다면 칼국수 먹으러갈까, 추어탕 먹으러갈까? 다르잖아요. 왜 같은 백성인데 왜 달라야 돼요. 어느 정도까지는 같고, 어느 정도까지는 같아요. 이게 중세 때 문제가 돼요. 어느 정도까지 같아야 돼요? 이 교회는 전부 칼국수 좋아한다. 만약에 칼국수 좋아해서 교회 됐다면 칼국수 안 좋아하는 사람은 이 교회 교인이 아니지요.
이게 나중에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하면, 교회의 교황의 법과 관련 돼요. 교황이 밑에 사제한테 교시를 줬는데 이것은 수용하겠는데 저것은 수용 안 할 때 교황이 어느 정도까지 징계를 내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삼위일체를 인정하니까 이단은 아닌데 교황의 지시를 안 따를 때는 이단에 속하느냐, 안 속하느냐? 속한다는 사람 있고, 안 속한다는 사람 있고.
루터가 이야기했을 때 신학자들은 제일 먼저 뭘 검증합니까? 삼위일체를 동원하지요. 그런데 루터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동의하면 어떻게 되지요? 그 다음에 문제는 삼위일체 말고 따로 교황이 제시한 법에 맞는가를 보겠지요. 성 베드로성당 지을 때 면죄부 팔았잖아요. 그러면 비텐베르크 성당 앞에 95개조 달 때 거기에 뭐가 포함됐습니까? 면죄부가 죄의 면제가 안 된다고 할 때 그 당시 천주교에서는 이단이잖아요. 그러면 그 당시에 루터가 이단 됐지요. 그럼 지금 루터와 똑같이 주장하면 이단 돼요, 안 돼요? 이단 안 되지요. 요새는 제주도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도 하는데. 밀양송전탑 반대데모도 하고. 옛날 같으면 완전 이단 되지요.
삼위일체가 진리도 아니고 결국 교회가 만든 교회법이 진리가 되고, 교회법이 진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교회가 그 당시에 땅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 시대에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권력이 결국 삼위일체를 대신하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신학은 권력을 옹호해줄 때만 그 교단에서 인정되는 신학이 되는 거예요. 결국 신학자들이 신학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복음을 위해서 한 게 아니고 자기가 속해 있는 교단에 아부하기 위해서 신학을 한 거예요.
세속의 왕이 땅을 많이 가지니까 교황이 빌빌 기었단 말이죠. 그래서 주교를 왕이 임명했어요. 나중에는 물론 교황이 임명했지만 왕의 입회하에 임명해요. 복잡해요. 왕이 임명하던 시절에서 교황이 임명하도록 바꿔주는데 공로가 있는 신학자들은 유명 신학자가 되고 대우받는 신학자가 되는 겁니다. 그럴 때 여기 신학자들의 명단에 남아요.
‘희다’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흰 꽃, 흰 과일, 흰 눈, 하얀 개, 하얀 말 있지요. 그런 것 많은데 희다는 어디 있습니까? 희다가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제론이라 하고, 희다는 없는 그냥 개체만 있다는 생각을 유명론 또는 명목론이라 하는 거예요.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나 그전에 아벨라투스, 아벨라드란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있기는 있는데 개념에 있다. 언어에 있다고 한 거예요.
언어에 희다가 있다면 진리는 어디 있는 거예요? 개념에 있고 언어에 있지요. 그렇다면 진리를 구축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조명이 필요합니까? 안 필요하지요. 언어논리만 잘 짜 맞추면 되겠지요. 그래서 그때부터 신이 누구냐가 관심사가 아니고 신을 인간의 논리로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관심을 두게 된 겁니다.
여기서 뭐가 중요하냐 하면, 국가보다도 개체가 중요해요. 이 개체는 삼위일체에서 두 번째 위, 예수님을 닮아서 인간은 ‘영혼+육신’이니까 영혼을 분석해요. 분석하면 ‘감각+오성’입니다. 감각을 중요시한 사람은 윌리암 오캄이고, 오성을 중요시한 사람은 둔스 스코투스고, 그 오성이 신과 관련됐다고 보는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고, 오성은 신과 관련 없이 오성 자체가 신의 의지를 갖고 있다고 본 것은 둔스 스코투스고. 도덕이라는 것은 법이 아니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둔스 스코투스에요. 의도성 또는 의지성이라 합니다. 그 의지성을 토마스 아퀴나스가 약간 이야기하기는 했어요.
설명할 때 ‘하나님이 이렇습니다.’ 하는 것은 신비주의입니다. 그러니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도미니크 수도원이에요. 처음에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기도와 묵상을 했습니다. 그 뒤에 천년 뒤에 나왔던 수도원에서는 기도와 묵상 외에 노동을 했어요. 그 노동에서 자본주의의 시초가 나왔습니다. 자본주의가 거기서 태동해요.
이 사람들이 똑똑하지 않습니까. 이왕 노동할 것 적기에 팔면 이익이 많이 남지요. 농부를 공부를 안 했기 때문에 머리가 안 되잖아요. 그래서 무턱대고 팔고 하니까 돈이 안 되는데 수도원 사람들은 공부를 하니까 따져서 이문이 남는 쪽으로 적기에 팔면 더 이익이 남는 거예요. 그러니까 많은 물건이 나올 때 저장했다고 없을 때 비싼 값에 팔면 돈이 더 생기고 돈으로 땅을 사는 겁니다. 똑똑한 사람이 돈 벌어요.
누적된 돈으로 이자 받고 빌려줄 수 있지요. 자본주의가 수도원에서 생겼어요. 수도원이 땅이 있고 자산이 있으니까 전쟁을 벌이는 영주들이 돈을 빌리러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도원 신부들이 발언권이 센 거예요. 그리고 사슬교회 주교들은 예배당을 지을 때 수도원에 돈을 꾸러오는 거예요. 그걸 알고 왕이 영주와 거래하지 않고 수도원 신부들과 직접 거래하니까 신부들의 명단들이 여기 교재에 나오는 명단이에요. 왕이 알아주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했던 것은 추상적인 신을 어떻게 하면 구체적인 신으로 만드느냐? 구체적으로 닮은 존재가 인간이에요. 인간의 모든 행위와 의지와 이성적인 태도가 곧 지상에 펼쳐지는 신의 뜻이 되는 겁니다. 그걸 줄이면 내가 곧 신이 되는 거예요. 삼위일체 공부할 필요 없어요. 내가 하는 것이 신의 의지고, 내가 따지는 것이 신이 따지는 것이고, 나의 행동의 신의 행동이 되는 겁니다.
신학자들이 그렇게 하면서 여기서 주체가 되면서 주체사상이 봉건사회가 무너지면서, 봉건사회는 십자가운동 때문에 무너지거든요. 항상 망할 때는 상대적으로 이익 보는 사람이 있어요. 이탈리아 북쪽 밀라노, 피렌체 장사하는 사람들이 이익을 봤거든요. 그들이 상공업을 일으켜서 새로운 부르주아, 새로운 중간계층이 등장하면서 귀족들, 기사들만 갖고 있던 권력을 재산 많은 상공인들이 우리도 귀족생활하자고 나왔던 말이죠.
그들이 필요한 신학은 왕과 귀족의 절대적인 권력은 신이 주신 질서라고 여겼던 것 말고, 시민들이 하는 행동도 곧 신의 뜻이 되는 그런 신학이 요구되는 거예요. 이젠 왕도 새롭게 부상하는 새로운 재산가에게 아부를 하고 눈치를 보게 되고 전쟁은 벌어야 되고 돈은 필요하고 돈 빌려오면서 그들의 신학, 그들의 종교도 인정해줘야 되고.
그러면서 농민들의 반란은 심화되고 인구가 늘어나면서 경작지는 모자라니까 농민들이 불만이 있으니까 영주들도 왕으로부터 계약을 파기하고 여기에 새로운 종교 이제는 신의 뜻이 왕, 영주로 내려오는 계통이 아닌 새로운 계통이 필요할 때 등장한 사람이 루터였고, 칼빈이었습니다. 만인제사장설, 성령이 임하면 누구나 사제가 될 수 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 하나님의 성경 외에 다른 전통이 필요치 않다. 전에는 신부들만 먹던 성만찬을 평신도들도 먹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개혁주의 바람이 부니까 여기에 대해서 천주교가 전통을 내세우면서 가만있어야 돼요, 변신을 해야 합니까? 역시 시도하는 거예요. 그동안 그들의 전통이라는 것이 그 시대에 맞춰왔다는 전통에 불과하다는 것이 티가 나버립니다. 진리는 신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권력과 땅이 신의 뜻이라고 그들은 주장했고 그걸 따져보니까 내가 하는 것이 곧 신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에서 루터와 칼빈이 이야기한 것에 동의했습니다. 동의한 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 사람들이 마냥 칼빈, 루터에 묻혀 있겠습니까? 결국 자기 본색을 드러내지요. 천주교 반대하기 위해서 개신교 갔다가 이제는 자기 자신이 곧 신이니까 자기가 신인데 누구한테 간섭 받아요? 완전히 인간의 이성의 자유를 주장할 수밖에 없지요. 그러면 여기서 신이 계시기에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니까 평소에 인간의 관심사가 결국 신의 존재가 아니고 신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나답게 여기 존재한다는 것을 긍정하기 위해서 신은 보조로서 있는 겁니다.
개신교가 등장하는 동시에 유럽의 세계는 드디어 근대주체사상으로 되면서 여기서 새로운 권력이 나옵니다. 권력이란 왕의 권력이 아니고 시민들의 권리가 신이 주신 주권이란 주장이 중세신학에서 벗어나면서 서서히 마키아벨리, 홉스, 존 로크 그전에 그로티우스. 중세에서 넘어가는 시대를 르네상스라 하지요.
르네상스란 중세를 제거하고 옛날 로마 쪽으로 눈을 돌리는 걸 말합니다. 거기는 인간 자체의 미, 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인간 자체의 미에 대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그런 시대에요. 전에는 신이 주신 인간이기 때문에 신의 속성을 닮기 위해서 모든 풍경화나 조각이 경직돼있었는데 그러니까 마리아가 전부 웃지 않고 있었는데 모나리자처럼 은밀한 미소를 띠기 시작하네요.
관심이 신에게 어떤 기능을 하느냐가 중세의 미술이고 음악이었다면, 르네상스의 미술은 뭐냐 하면, 개인, 개별자에 영혼이 있고 영혼에 신이 주신 행위와 의지가 담겨있으니까 개별자가 웃네. 저건 우네. 신이 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우는 게 중요하고 신이 웃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신이 기뻐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기뻐하는 게 중요하다는 그걸 르네상스의 새로운 시대에 돌입되게 된 겁니다.
물론 그 당시 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신이 인간의 모습이 돼요. 전에는 경직된 신의 모습이었지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레오나르도다빈치에 의해서 신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을 닮아가면서 네덜란드 화가들은 노골적으로 인간의 삶이 곧 신의 삶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보니까 오늘날 철학이라는 게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죠. 뭔가 조금씩, 조금씩 숨겨진 본색이 1500년이란 세월을 거치면서 드러내는 거예요.
우리 교재에 80여명의 신학자들이라 해놓고 나중에 칼빈, 루터 지나고 난 뒤에는 신학자는 별로 없고 철학자들이 나오지요. 왜냐하면 그게 유럽에 새로운 신학의 유형들입니다. 그러면 신학자들은 이야기 안 합니까? 그때 개신교 있고 난 뒤에 신학자들은 신앙고백 만들고 끝났어요. 마치 중세 때 삼위일체 만들고 암흑기에 들어간 것처럼. 에리게나 나오는 200년 동안 암흑시대에요. 이미 삼위일체로 끝났잖아요.
마찬가지로 개신교에서 신앙고백 만들었지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 있지요. 이제 목사, 신부들은 그것만 반복해서 가르치면 돼요. 이걸 교조주의. 마치 옛날 천주교에서 삼위일체 만들고 난 뒤에 그 다음은 모든 게 끝난 것과 같은 거예요. 교조주의기 때문에 교회에서 신학이 발전이 있을 리 있겠습니까? 개신교 신앙고백 어기면 이단 되는데. 이단 되면 자기 땅이 없어지고 자기 교구가 없어지는데. 교단에서 당신 이단이니까 그만두라고 하면 자기 교구에서 잘리는데. 소개 못해줘요. 이단을 소개해줘요? 말이 안 돼요.
개신교가 새로운 천주교가 된 거예요. 천주교는 후임을 소개해줘서 부목사에서 당회장 되거든요. 여기서 찍히면 갈 데가 없다니까. 개척 아니면 갈 데가 없어요. 그런데 개신교는 개척하려면 프랜차이즈 간판이 있어야 되거든요. 파파존스라든지. 파파존스가 아니고 파마존스라고 하면 신고 들어온다니까. 유사품이니까. 부채표가 아닌 것은 활명수가 아니잖아요. 이 교회 교단이 뭐예요? 파마존스입니다. 이상하다. 그러면 교단 없는 자체가 이단 된다니까요. 그럼 교단 만들어야 되겠지요. 만드니까 교단이 한둘이 아닌 거예요.
신학이 발전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신학은 되풀이하는 것이지 발전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은 천주교 원리에요. 개신교가 천주교에서 벗어났다고요? 안 벗어났습니다. 전통을 벗어나요? 개신교 전통은 전통 아닙니까? 그것도 전통인데. 유럽의 대부분은 부모 마음대로 강제로 받은 세례, 지 죽고 난 뒤에 손 쓸 수 없어서 당하는 장례 외에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어려서는 몰라서 세례 받았고 죽으면 모르잖아요. 그래서 하는 거고. 전통이 살아있지요. 계시가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은 전통의 치밀한 그물구조에요.
프랜시스 베이컨은 네 가지의 우상을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동굴의 우상, 종족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이걸 한 마디로 말하면 인간의 모든 선입견은 전통에서 온다. 그 전통에서 벗어날 사람도 없고. 이렇게 우상을 조심하라 해놓고 베이컨은 대안이 하나도 없어요. 자기도 거기서 벗어날 대안을 만들지 않았어요.
루터는 이야기했어요. 십자가. 십자가는 숨어있는 하나님입니다. 숨어있는 하나님은 베르나르에서 나왔어요. 보니까 이미 신비주의 전통에서 나온 거예요. 쿠자누스, 에크하르트. 나중에 우리가 루터를 합니다만 루터를 조사해보면 개신교 맞나 할 정도로, 루터는 결국 천주교가 만든 인물이지 주님이 인물이 맞나 할 정도로. 칼빈은 그냥 루터를 모방할 뿐이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성령 받았으면 됐다고 하는 재세례파에서 나오는 종파 중에 하나가 퀘이커교도인데 이건 벌벌 떤다는 뜻이거든요.
퀘이커교도의 주장은 아주 노골적이에요. 무서워요. 지방교회의 선배 격인데 뭐냐 하면, 성령 받은 당신이 곧 신입니다. 그리스도입니다. 설교와 기도는 기다림이에요. 모여서 기다리는 거예요. 혹시 여기에 성령 받은 사람은 설교해주세요. 제가 설교할게요. 다른 사람은 아멘. 지금 계시 받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래서 예배드리는 거예요. 그것으로 장사가 되겠습니까? 잘 안 되지요. 그래서 지방교회에서 지도자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초창기에 했던 방법이 나중에 천주교를 닮아갈 수밖에 없어요. 천주교 보존의 법칙^^ 천주교를 욕하지만 이미 실험실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걸 다 해본 거예요.
그 다음에 창조하지 않으면서 창조되는 자연, 이것은 피조세계를 말하고, 네 번째 창조하지도 않고 창조 되지도 않는 자연은 신에게 회복되는 단계를 이야기한다. 요새 말하면 구속사에요. 그러니까 에리게나는 9세기경인데 이미 뭔가 구속사 비슷한 것, 하나님 형상, 이런 것 다 이야기한 거예요.
피터 아벨라드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인간의 정신 밖에 신이 계시다고 본 겁니다. 안셀무스도 주장했고 성 빅터르란 사람도 주장했는데 어쨌든 신은 인간 정신 밖에도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벨라드는 신이 있고, 없고 그건 문제 삼을 것 없고 신이 지상에서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신은 이렇게 한다, 저렇게 한다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신이 존재한다가 중요한 게 아니고 신이 하는 행동이 무엇이냐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여러분 반박 됩니까? 반박이 안 되지요. 대단히 인기 있었어요. 안셀무스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은 그 피가 하나님을 만족하기 위해서 마귀한테 피 값을 주는 보상설이라 하거든요. 그러니까 아벨라드가,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어떤 존재가 한 것이 어떻게 내 것이 될 수 있느냐? 따라서 용서받는 것은 다른 분이 죄를 씻어서 용서받는 게 아니고 내가 어떻게 의지를 발휘하느냐에 따라서 용서받는 것이다. 삼위일체에 의하면 예수님이 예수님 된 것은 예수님의 의지에 의해서 된 것처럼 우리가 예수 믿는 것도 죄 안 짓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로 할 때만 그게 죄가 안 짓는 것이 되고 바르게 사는 것이지 누가 와서 내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아벨라드의 주장입니다. 대속설을 인정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이것이 그 당시에 수용되겠어요? 삼위일체에 관한 문제는 아니지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의 문제지. 그런데 이것이 그 당시에 대유행을 하고 만족했고 사람들이 좋아했다는 말은, 사람들이 그동안 믿으라고 해서 믿었지만 사실 속내는 내가 죄 지었는데 누가 용서해준다. 그것은 쉽게 안 믿어지고 내가 나쁜 짓 안 해야지 하고 안 하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