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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31004b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언약의 고정성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131004b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언약의 고정성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1004b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언약의 고정성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목적이 뭐냐 하면, 여호와로서 그들 속에 거하려고, 하나님께서 죄인 속에 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노아방주에서는 이런 이야기 없었어요. “애들아. 비 온다. 배 만들어서 그 안에 타라. 그러면 너희가 산다.” 그들은 자기들이 산다고 생각했지 하나님이 내 속에 들어온다고 생각 못하잖아요. 우리도 지금 교회 가서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합류한다고 생각하지 하나님이 더러운 곳까지 오실 필요 없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들어오시겠다는 거예요. 너무 누추해서 들어올 수 없는데 들어오시겠다고 하시니까 우리는 첫째로 들어오시는 목적이 뭔지 그 이유를 모르겠고, 두 번째, 들어오시려면 방이라도 닦아놓고 해야 하는데 썩어도 너무 썩어서 우리 속에서 죄가 나오니까 어느 세월에 이 죄를 다 털어내지요? 안 되잖아요.

여기서 우리 죄를 털어낼 때 중요한 것은 털어내는 방식과 무엇을 털어내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주님 소관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쁜 것을 털어내는, 떼어내는 그것은 우리는 죄를 지었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냥 죄 졌다고 보지 않고 창조 된 것이 죄 지었다. 죄 지었다 할 때 우리 생각은, “하나님이여, 이것은 괜찮은데 이건 죄 지었습니다.” 항상 우리가 죄 지었다 할 때는 괜찮은 것, 죄 아닌 것과 구분해놓고, “이것은 죄 지었으니까 용서해주옵소서.”라고 하지요. 어떤 인간도 하나님 지금 내가 등산한다고 숨을 가쁘게 쉬는데 “주여, 숨 쉬는 것 죄 지은 것 맞지요?” 그런 것 없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죄 지었다는 개념이 왜 엉터리냐 하면, 잘한 것은 따로 떼어놓고 나머지를 죄라고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런 판정을 받질 않아요. 우리는 선과 악을 분리시키는데 주님께서는 창조된 것이 죄 지었다. 그러니까 선악과 따먹은 자체가 죄가 되는 거죠. 창조된 것이 죄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죄를 지적하시면서 나중에 피와 결합되는데 예수님 십자가와 관련되기 때문에. 죄부터 규정하는데 그래야 찾아오시는 방법인데 죄를 규정할 때 창조적인 차원에서 죄 지은 거예요. 이 말이 뭔 뜻이냐 하면,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애가 엄마의 예쁜 반지를 갖고 놀다 잃어버렸어요. 엄마가, “선반 위에 반지 누가 치웠어?” 애가, “골목에서 놀다 잃어버렸어. 엄마 걱정하지 마. 그 반지 문방구에서 팔아. 사줄게.” 그게 결혼반지인데. 네가 창조하기 이전에 있었던 창조의 의미가 담긴 반지인데 애는 태어나서 문방구에서 경험상 느꼈던 그 의미를 반지에 담아버린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죄인이라고 느끼는 그것만 죄라고 여기는데 주님께선 원초적으로 창조할 때 이런 취지로 창조했는데 인간은 창조의 취지를 너무 모르기 때문에 창조의 취지와 반대가 되는 식으로 살아왔다고 하나님은 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죄를 털어낼 때는 어떻게 하느냐? 창조의 원리를 집어넣어서 모든 게 죄가 되도록 해야 돼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이게 원래 창조의 취지를 담아서 해야 돼요. 창조의 취지를 담으려면 창조자가 등장해야 되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죄인, 우리가 남 앞에서 죄인이라 하지 말고 십자가 피 앞에서 죄인이라 해야 돼요.

“예수님이 저렇게 피 흘린 걸 보니까 나는 이유도 따지지 말고 무조건 죄인이구나.” 그게 바로 구원이잖아요. 구원은 자기가 잘못한 것으로 가슴 아파하는 게 아니고 그것은 자기가 잘할 수 있는데 하는 가능성 두는 거예요. 그게 아니고 그냥 십자가 하나만으로 내가 잘했든 잘못했던 묻거나 따질 필요 없이 “주여, 나는 그냥 죄인입니다.” 이렇게 돼야 돼요. 신학교수들은 이게 안 돼요. 박사학위 가지고 있잖아요. “그냥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못해요. 하나님이 학자의 영을 주셔서 은혜로 박사학위 땄다고 하거든요.

창조적인 죄를 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제사장들이 제사법을 시행하면서도 본인들도 무슨 뜻인지 몰라요. 그냥 기계입니다. 시키는 대로 할 뿐인데 의미가 뭔지 몰라요. 창조의 의미가 담긴 것이 바로 30절에 나옵니다. “그를 이어 제사장이 되는 아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성소에서 섬길 때에는 칠일 동안 그것을 입을지니라”

7이라는 숫자가 등장해요. 제사는 항상 7이 들어가고 7의 반 토막이 삼년 반이에요. 마지막에 이레가 되거든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다니엘에서는 이레인데 1이레를 반으로 자르면 반 이레가 돼요. 반 이레를 이레에 집어넣으면 한 때, 두 때, 반 때가 된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70이레를 다니엘에게 계시를 줬는데 그게 7과 1을 분리하기 위해서 하는 거거든요. 그 중간은 62나오지요. 7이레 다음에 62일에 다음에 1이레. 이 1이레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순간을 말하거든요.

7이레는 성전이 세워지는 겁니다. 62이레는 세워진 성전은 성전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부셔지는데 그냥 부셔지는 것이 아니고 짐승나라, 성전 세우라고 도움을 준 짐승의 나라에 의해서 오히려 깨어지는 기간이 62이레에요. 그러니까 바사나라에서 성전 세우라고 아하수에로 왕이 막대한 자금을 줘요. 에스라, 느헤미야에 보면 나와요. 그 뒤에 헬라, 마케도니아, 로마에 와서는 다 부셔집니다. 그런데 성전을 지으라고 도와준 나라도 짐승이고 성전을 부수는 것도 짐승이고. 그야말로 들었다 놨다 요물 같아. 성전을 세우라고 도움주고 세워진 걸 부수는 것도 짐승이 부수고. 그 전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주님께서 오셨다가 메시아라고 했다가 그 메시아를 누가 죽입니까? 메시아를 기다린 그들이 메시아를 죽여 버리고. 그러니까 이게 짐승 같지요.

이 1이레를 다니엘에서 둘로 나눕니다. 반 이레, 반 이레로 되거든요. 반 이레니까 3.5가 되겠지요. 3.5를 한 때, 두 때, 반 때라고 한다. 종말은 한 때, 두 때, 반 때로 되어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건을 숫자로 설명해주는 거예요. 굉장히 어렵지요. 어려운 것을 쉽게 하는 사명이 저한테 있으니까 쉽게 갑니다.

창조를 할 때 둘 중에 어느 쪽인지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누가 창조하느냐가 우선입니까? 무엇이 창조 되었느냐가 우선입니까?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누가 선물 주고 갔어.” 할 때 ‘누가 줬는데?’가 먼저 나오던가요? ‘그게 뭔데?’ 이게 먼저입니까?

오늘날 모든 학교에서는 이 세상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느냐? ‘누가’가 아닙니다. 기원전 5세기경에 데모크리토스라는 사람이 원자론을 이야기했거든요. 세상은 무엇으로 만들었느냐? 원자 돼있었다. 숭숭 빠지고 영원히 해체되지 않는 게 있다. 그게 원자다. 1802년에 달톤이란 사람이 원자론을 주장했고, 1899년에 러더포드란 사람이 라돈으로 금박을 쏘아서 다른 것은 다 통과됐는데 알파 입자가 나오는 걸 발견해서 가운데 뭔가 있다. 원자를 그런 식으로 실험해서 측정했어요.

그런다가 현대에 와서 물리학에서는 기본 입자가 12개고 힘을 매개하는 매개입자가 4개, 총 16개인데 그 16개 입자 하나마다 질량만 주고 떠나버린 입자가 있어요. 그게 힉스입자입니다. 질량을 주고 떠났기 때문에 힉스입자만 발견된다면, 우리는 우리 몸을 부활시킬 수 있어요. 중력 자체, 질량을 없앨 수도 있고 더할 수도 있고. 중력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에 추석날 고생스럽게 서울에서 대구까지 몇 시간 걸려서 안 내려와도 우리는 날아올 수 있어요. 힉스입자 그 존재가 유럽의 연구진에 의해서 밝혀졌다는 소식이 언론에서 나왔거든요.

현재 학생들이 말씀이 관심 있는 것이 아니고 언약에 관심 없어요. 무엇이지? 항상 무엇이에요. ‘누구십니까’를 이야기 안 해요. 왜? 무엇이냐는 누구와 관련돼있어요? 이미 태어나서 나도 사람답게 살아보겠다는 욕망이 있는 나와 결부되기 위해서 대자연, 주변의 환경을 자기 좋으라고 이용해먹으려는 그런 심보가 우선되기 때문에 ‘누구십니까’를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출애굽기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무엇이냐가 아니라 어떤 너를 만들었다. 어떤 분이 이 세상을 만들었느냐? 하고 창조적 차원에서 우리에게 어떤 분으로 오신다고요. 어떤 분이 오게 되면 이렇게 만들었구나가 아니라 “주여, 제가 죄인이군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창세기 1장에서 천지창조를 며칠 만에 만들었습니까? 7일 만에 만들었지요. 학생들마다 이것 구라라는 겁니다. 진화론에 의하면 이럴 수가 없다는 거예요. 지구역사는 45억년, 우주역사는 172억년. 직립 보행하는 인간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 해서 아프리카 남쪽에서부터 최초의 이브가 태어난 것도 250만 년 전, 크로마뇽인 나온 것도 벌써 만 오천 년 전, 네안데르탈인이 나온 것도 십오만 년 전. 방사능동위원소로 계산하면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전부 다 그런 식으로 공부하고 있거든요.

그런 관점은 뭐냐? 크로마뇽인 좋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시대에 사는 우리가 납득이 되도록 학문을 재조정하는 겁니다.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게 뭐냐로 재조정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송아지 보고, “송아지야 네가 다리가 네 개구나.” 하면 송아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 네 개 맞아요.” 이렇게 하지 않아요. 내가 너한테 쓸데없이 그런 질문 하라 했는가. 송아지 다리가 네 개라는 것은 송아지 두 개와 분류하기 위한 인간들의 일방적인 욕심입니다. 식물을 볼 때 먹을 수 있는 식물과 먹을 수 없는 식물. 약이 되는 약초와 약이 안 되는 독초. 이 소리를 독초가 들으면 기분 상해요. 가만있다가 나쁜 소리 들었어.

선악과는 창조할 때 있었잖아요. 창조주를 위해서 선악과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는 뭐라고 합니까? 그 선악과 널 위해서 있다는 거예요. 따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겁니다. 얼른 따먹었지. 선악과 먹음직도 하든 보암직도 하든 탐스럽든 선악과는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돼있지 인간과 관련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은 선악과를 자기 위주로 세상을 자기 위주로 재편성해서 자기한테 의미 있는 세상으로 항상 현실을 매일같이 조정해나가기 때문에 그걸 덜렁 먹지요. 그걸 성경에서는 ‘죄’입니다.

오랜만에 동창생 만나서 너 얼굴이 왜 삭았느냐? 그거 죄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창생을 20년 전에 만났단 말이죠. 20년 전의 안목을 유지하고 있잖아요. “내 동창생은 이런 모습이어야 돼.”라고 일방적으로 간직해놓고 막상 길에서 만나고 보니까 삭은 거예요. 어디서 뭘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우연히 남자를 만났는데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여자가 하는 말이, “이제는 용서했노라고. 다 잊어버렸다고.” 남자는 눈물만 흘리고 있고.

항상 자기가 구상한 세계관 속에 풀잎이 되던 남이 되던 전부 자기 입맛에 맞추어 해석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으로 보지만 주님은 니 누고? 누구로 보는 거예요. 뭐야 너? 너, 뭔데? “주여, 괴롭습니다. 응답해주옵소서.” 그러면, “뭐야. 네가 뭔데?” 우리가 성경말씀을 봐도 하나님 이 말씀 지키면 구원받아요? “네가 뭔데? 이 말씀을 네가 왜 지키는데? 주제파악도 못하고. 이미 지키는 건 끝났어. 어떻게 해도 너는 죄로 드러나게 돼있어.”라는 취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이게 창조적 차원에서 우리에게 접근하는 죄입니다.

그러면 뭘 바꾸느냐 하면, ‘이것이 무엇입니까’에서 주님 앞에서 ‘나는 누굽니까’로 바꾸어지기 위해서 계시를 주고 말씀을 주신 겁니다. 왜 나는 자꾸 모든 걸 내 입장, 내 사는 입장에서 생각했는가?

7일 동안 위임식을 함으로 말미암아 창조적인 취지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위임식 받는 제사장한테는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한테는 첫 창조가 되풀이 되고 있어요. 창조가 뭐냐? 이것이라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창조를 옛날에 일어났어요.” 제가 분명히 했습니다. 주님의 자리에는 시간이 없어요. 옛날이란 말이 없어요. 주님이 만든 자리에는 옛날은 없어요. 우리는 내 자리에서 시간이 있지 옛날, 옛날 하지만 주님의 자리는 옛날이 없고 그 창조가 더 깊이를 더해서 옛날 그 시기 창조가 아니고 더 깊이를 더해서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덮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때 그 시절로 그대로 되돌아가요. 다만 우리가 미처 몰랐던 창조의 풍성함 속에 놓이게 되면 우리는 더욱더 죄인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천지창조, 그거요? 우리가 예수님 십자가 앞에 설 때 그게 천지창조에요. 처음 창조 때는 그냥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런 것, 저런 것들을 만들었다고 돼있지요.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를 만드신 목적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 피 흘리고 있는 그분이 목적으로 온 거예요. 그럴 때 우리는 아까 출애굽기 29장 46절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있다는 그것이 주님에 의해서 성취가 되는 겁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기 위해서 애굽에서 불러내었다고 할 때 그들은 반드시 애굽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애굽이라는 것을 혹독하게 느껴야 되는 겁니다. 애굽의 긴 그림자가 결국 우리를 죽을 때까지 우리 일생 다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울산, 대구, 서울, 애굽이 우리 몸에 그 요소가 분출되어 계속 나오는 거예요. 가면 갈수록 더 깊이 느끼지요.

“교회 한 20년 다녔는데 내 인생 꼬라지는 더욱더 세상을 좋아하다니.”라는 고백이 나오면 정상입니다. “내가 30년 다녔는데 전보다 내가 더 세상적이라. 세상만 좋아해.”라는 고백이 나오면 주님한테 질질 끌려가는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반대로 “역시 교회 한 20년 다니니 난 너무 거룩해. 왜 이렇게 거룩하지.” 그렇게 나오면 지옥으로 질질 끌려가고 있어요.

그러면 목사님, 궁금한 게 있습니다. 창조가 제사장에게 임했다면 제사장 위임식을 통해 나타난 특이사항이 있을 것이고 그걸 포착하면 원래 창조했을 때 하나님의 원래 목적과 성향, 속성, 취지, 의미가 나타나지 않겠는가? 그렇지요. 나타나지요. 그런데 그것이 이 본문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걸 알아야 되겠습니다. 제사장 위임식 때 아주 예상된 못한 특수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일반 사람들은 관람할 뿐이지요. 제사장이 아니니까.

24절 봅시다. “그 전부를 아론의 손과 그 아들들의 손에 주고 그것을 흔들어 여호와 앞에 요제를 삼을지며” 흔들어라. 여러분 제물을 가만히 두는 게 정상입니까, 흔드는 게 정상입니까? 그 다음에 26절 봅시다. “너는 위임식 수양의 가슴을 취하여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으라” 여기도 흔들라 하지요. 28절 봅시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아론과 그 자손에게 돌릴 영원한 분깃이요 거제물이니 곧 이스라엘 자손이 화목제의 희생 중에서 취한 거제물로서 여호와께 드리는 거제물이니라”

거제라 하는 것은 앞으로 손을 내밀어서 제물을 두 손 받들어 드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제물을 흔들라고 했지요. 두 번째는 높이 받들어 높이라고 돼있지요. 요제와 거제에 뒤따르는 효과에 대해서 달리 나와 있지요. 요제는 제사장 위임식 할 때 흔들어서 드리고 그 다음에 거제는 백성들의 분깃, 백성들의 몫이 있다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지금 성전이 있는데 성전은 아무나 못 들어가요. 제사장만 들어갑니다. 이 사람들 착하다고 보지 마세요. 그냥 조리사 시험 칠 때 잡채 재료로 들어간 거예요. 그들 죽었어요. 제사장 되고 난 뒤에 망했다. 이렇게 보면 제일 시원합니다. 제사장 피 바르고 난 뒤에 망한 거예요. 바깥의 사람들과 같이 못 살아요. 망한 겁니다. 일종에 조선시대에 궁녀? 물론 왕의 사랑을 받으면 되지만 왕이 지만 사랑하면 괜찮지요. 또 젊은 궁녀 오면 사랑해주는데요. 그러면 장희빈 꼴 나지요.

이쪽에 제사장 자체가 재수 더러운 거예요. 결국 찍힌 거예요. 임금이 가끔 거리에 나가면 상놈들이 부러워요. 임금은 자기 변까지 조사하니까 얼마나 힘들겠어요. 임금 하나 죽으면 안 되기 때문에 지켜보는 눈이 많은데 상놈은 대로에 엎어져도 아무도 안 돌보잖아요.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참 성도로서 상놈처럼 사는 것도 보통 자유가 아닙니다. 막 사는 것도 보통 자유 아니에요. 복음 아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혜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가장 원초적인 창조의 사건과 직접 마주칩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어요. 골로새서 1장 16절. 그러니까 어떤 행동을 해도 행동이 나를 위한 행동이라면 보람이라도 있지 실컷 행동했는데 나를 위한 행동이 아니고 나를 이렇게 행동하게 하신 그분을 위해서 내가 이런 광대 짓을 해야 된다는 것, 뭔가 수고해도 내 것으로 돌아오는 게 하나도 없다는 것, 그것 싫으면 지옥 가시든지. 그게 좋으면 면류관 반납하고 천국 가면 되고.

제사장이 이 안에서는 창조의 원래 목적과 합하는 그렇게 되면 이 제사장은 누구십니까? 여기에 천지창조하신 분이 누구시며, 어떻게 창조했습니까? 무엇이 담겨서 창조했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에베소서 1장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피 흘림을 통해서 세상을 창조했다는 거예요. 세상을 그냥 거룩한 게 아니고 에베소서 1장 봅시다.

제가 말조심해야 돼요. 말 잘못하면 논리가 비약된다고 이단이라고 욕 얻어먹을 가능성이 많아요. 에베소서 1장 7절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행하신 것이 피 흘림이에요. 처음부터 창조에는 이 내막이 있었고 그걸 양탄자처럼 펼치는 과정이 인류의 역사라는 겁니다. 인류의 역사를 도로 말아보세요. 인류역사가 진행했잖아요. 그걸 도로 말아버리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됐다는 것으로 다시 회귀하는 거예요.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우리는 고정됐다 했지요. 제사장은 고정됐잖아요. 고정됐다는 말은 어떤 변화도 멍석 말아버리면 다시 하나가 되듯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가 돼요.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태어난 거예요.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뭐냐? 십자가에서 피 흘린 일을 하셨잖아요. 피가 있어야만 아버지께 영광이 돼요. 피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 없이는 영광이 안 돼요. 내가 구원받는 건 영광이 안 돼요. 날 구원하기 위해서 피 흘리신 그게 영광이 되지. 피 바르고 피 잊어버리고 나만 달랑 가고, 이래서 영광 안 돼요. 피를 앞장 세워서 들어가야 영광이 돼요. 이 피 때문에 살았습니다.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피로 말미암아 흰옷 입고 사는 사람들, 피로 말미암아 불붙은 바다를 통과하는. 모든 것이 피와 연관돼있어요. 피를 생산하는 곳이 성전이고 그래서 그 성전은 보좌가 하늘나라에 있고 그렇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제사장이 피를 바르고 제물을 흔듭니다. 흔듦으로 말미암아 향기가 난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흔들 때 내가 기뻐하겠다. 그 다음에 네가 그걸 갖다 바칠 때 진밖에 있는 다른 백성들에게도 전이되도록 확산되도록 약속한다고 한 거예요.

그러면 흔드는 제물과 거제는 결국 압축시키면 장차오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위한 모든 행동뿐만 아니고 자기가 구원해야 될 아버지께서 택함을 준 그들에게도 예수님 본인이 한 모든 것이 본인을 흘러넘쳐서 그들에게도 구원의 효과를 주는 그 작업을 지금 제사장이 앞당겨서 보여주는 거예요. 왜 흔듭니까? 왜 높이 쳐듭니까? 그것은 두 제물을 후원하기 위해서 한 겁니다.

다시 질문하게 되면 여러분 제물이 가만있는 게 정상입니까, 흔드는 게 정상입니까, 쳐드는 게 정상입니까? 우리는 제물이 가만있다고 생각하니까 뭐가 비정상적으로 보이느냐 하면, 흔드는 것은 어지럽고 쳐드는 것은 냄새만 풍기는 것으로 보이잖아요. 우리 선입관이 잘못 된 거죠. 가만있을 때는 가만있어야 되고 흔들 때는 흔들어야 되고 쳐들 때는 쳐들어야 되고. 그것이 정상인 것을 우리의 선입관이 아니고 오실 예수님의 선입관에서는 그게 맞는 거예요. 모두가 정상적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 만들어놓고 방주에 들어갈 때 문을 세게 닫았습니까, 차분히 닫았습니까? 어느 쪽이 옳습니까? 하나님이 닫으셨으니까 어느 쪽인들 관계없지만 만약에 어떤 사람이 성령 받아서 예수 믿고 난 뒤에 문을 세게 닫아서 유리창이 깨지는 것이 옳습니까, 예수 믿고 살살 닫는 게 옳습니까? 어느 게 구원받을 수 있어요? 상관없잖아요. 그처럼 요제가 뭐냐, 거제가 뭐냐는 우리가 상관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 몫은 주님 몫으로 돌리자는 거예요. 우리가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건 아니고 제사장은 장차 예수님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지 제사 드려서 구원받진 않아요.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언급한 겁니다.

제물을 흔들 때 제물만 흔들었겠어요, 제사장도 같이 흔들었어요? 제물만 흔들었겠지요. 그러니까 요제, 거제로 주님께서 분리했다는 것은 제사장은 자신한테 관심 끊으란 말이죠. 다만 피 묻은 자가 오른손에 제물을 쥐고 흔들었다는 것은 장차오실 메시아가 이 죄인의 의인으로 합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사명과 임무를 띠고 결국 모든 임무와 사명은 피로 마감되면서 완성되면서 우리에게 찾아온다는 것을 미리 앞당겨서 그 당시 문화로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언급한 거예요.

그래서 아무래도 노아 때부터 간단하게 방주에서 제물 잡아서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고 기뻐하시고 다시는 물로써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보다는 더 복잡해졌지요. 복잡해졌다는 말은 그만큼 인간들이 위반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십계명을 모세가 받아보니까 다른 게 아니고 너는 맹물을 마시지 말고 보리차를 먹어라. 이러면 계명 지키기 쉽잖아요. 그런데 십계명이 쭉 나오니까 곤란하잖아요. 물론 그 다음에 보리차를 몇 도로 하느냐? 녹차로 할 때 중국 녹차도 되느냐, 설록차도 되느냐, 보성녹차만 되느냐? 그런 세부 문제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만들어냈어요.

참 그 사람들 보세요. 구원 안 되겠지요. 왜? 안식일을 어떻게 지킬지 세분화 시킨 거예요. 안식일을 못 지킨다고 줬는데 그들은 지킨다고 오해한 거예요. 여기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것은 뭔 뜻입니까? 때려죽어도 못 지킨다는 거예요. 돈깨나 있을 때는 지키는 것 같지요. 돈 한 푼도 없어 보세요. 못 지키지. 자식에게 매를 들지 못하는 것은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기 생명을 차라리 죽여 버려라. 세상에 요새 자식에게 매를 드는 부모가 별로 없단 말이죠.

그래서 성경말씀을 보면서 왜 나는 아니고 왜 예수님께서 내 대신 죽으셔야 되는가를 그 이유를 깊이 있게 심도 있게 우리 죄를 까발리기 위해서 계명들이 세분화돼요. 이제는 안 걸리는 데가 없어요. 다 걸리게 돼있어요.

그래서 제사장들도 자기 나름대로 완벽에 완벽을 기한다고 하지만 반드시 제사장들은 속죄제 그것도 자기 죄를 위한 속죄제가 첨부돼야 됩니다. 자기를 위한 속죄제를 드리고 백성들 속죄제를 드려야지. 행사하는 본인부터 이미 죄인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제사장이 자기를 위한 속죄제를 드리면 제사장이 구원받습니까? 자기를 위한 속죄제를 드렸으니까 죄가 속죄 된 거예요, 죄가 더 생긴 거예요? 죄가 더 생긴 거예요. 속죄제 드린 그게 죄가 되기 때문에 더블로 속죄제를 드려야 돼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나중에는 그냥 가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제가 하나의 예를 들게요. 역대하 35장에 보면 요시아 왕이 나옵니다. 요시아가 어떤 왕이냐 하면 유다나라가 멸망하는 막판에 훌륭한 왕이에요. 어느 정도로 믿음 좋은지 읽어볼게요. 역대하 35장 7절에 보면, 백성들이 유월절 지키는데 구라 같아. 너무 많아요. 어린 염소 3만과 수소 3천을 바쳤어요. 유월절 제물로 드린 겁니다. 엄청나지 않습니까. 이 정도 하면 훌륭한 사람 축에 들지요. 그런데 역대하 35장 22절에 보면, 요시아 왕이 죽어요. 왜 죽느냐? 죽는 이유가 나와요. 하나님 말씀을 안 들어서 죽어요.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해서 요시아는 전사합니다.

자기 딴에 믿음 좋아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죽을 만한 죄인입니다. 제사장들도 마찬가지에요. 제사장들이 그것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폼만 재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 나와서 공부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지금 한껏 폼만 쟀어요. 애 들고 와서 폼 잰 겁니다. 전혀 우리 구원, 복 받는 것과 아무런 상관없고 애 데리고 와서 죄 지었다는 경험만 들뿐이지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보다 가깝지요.

여기 요제와 거제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식의 제물은 아니고 이 요제와 거제는 결국은 하나님께서 백성들까지 구원의 효과를 확대시키겠다는 취지를 반영해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어려운 게 나오는데 32절입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문에서 그 수양의 고기와 광주리에 있는 떡을 먹을지라” 제가 지난번에 이걸 간단하게 설명했어요. 피 발린 자가 떡을 먹어요. 이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가운데서 하나의 인간으로서 평소에 밥 먹고 사는 생활,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생활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대표로 미리 보여주는 그런 위치가 제사장의 위치입니다. 떡 먹어야 사니까. 그런데 하나님 뜻은 뭐냐? 이 떡 내가 먹여줄게.

그런데 그 떡이 어디서 나온 떡이냐 하면 농사지은 떡이 아니고 뭘 통과했느냐? 번제를 통과한 떡이에요. 범죄를 했기 때문에 비로소 먹을 수 있는 떡. 십자가 졌고 십자가에 있는 그 무엇이 제대로 된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떡과 양식이 된다는 사실, 그걸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제사장은 하나님과 죽어야 되는데도 살아있는 채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출애굽기 29장 46절에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이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애굽에서 너희가 살았지? 뭐 먹고 살았느냐? 떡 먹고 살았습니다. 내가 떡 줄게. 고맙습니다. 하지만 애굽에서 먹던 떡과는 달라. 그러면 무슨 떡인데? 이 떡은 누가 죽었다는 생명을 나눠주는 용도의 떡이에요. 쨈 발라서 준 떡이에요. 떡을 먹을 때 그냥 먹지 말고 누가 내 대신 죽었다는 그 죽음을 먹으라 이 말이에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 이런 말씀, 이런 제사 하나를 주님께서는 그 말씀 하나로 합해서 말씀하시니까 떡을 먹고 배부른 사람들이 다 가버렸어요. 우리가 저런 소리 들으면서까지 예수님 따라갈 필요는 없다. 한 번 먹은 것으로 족하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29장 46절에 애굽에서 인도했다니까 애굽이 엿가락이라 보시면 됩니다. 찐득찐득해. 끝까지 따라와요. 늘 붙어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도 애굽적 사고방식으로 생각해요. 하지만 기어이 잡아당기면 나중에 끊어집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의 숙제고 주님의 시험이기 때문에. 안 되는 걸 되게 하라고 아버지로부터 명령을 하달 받았어요. 도저히 구원 안 되는데 네가 알아서 되게 하라.

탕자가 아버지 돈 들고 가출했습니다. 아버지가 한 일은 다른 것 아니에요. 그냥 오늘도 돌아오나 먼발치에서 기다리는 것 했습니다. 기어이 돌아오잖아요. 그 탕자의 비유 이전에 잃어버린 양 비유하면서 목자가 일부러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는 식이죠. 그런데 탕자는 자기가 알아서 기어들어오는 식이죠. 찾아간다는 것은 그냥 찾아가는 게 아니고 목자가 찾아내는 식으로 네가 기어들어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 양이 된다 이 말입니다.

“역시 나는 똑똑해. 가출해도 내가 알아서 기어들어온다니까.” 이러면 목자에 부합한 양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저를 기다리셨지요. 자기를 잡아당겼다는 심정으로 우리는 아버지께 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이제 돌아오게 되면 자기 목적이 없어져요. 내가 돈 벌어서 재벌 되고 아버지 찾아야지. 그런 계획은 탕자 되서 돌아오는 과정에서 쏟아버려야 돼요. 우리에게 남은 것은 46절만 남아 있으면 돼요. 여호와께서 애굽에 살던 우리를 함께 거하시려고 주께서 제사장이고 예수님이고 구약, 신약성경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것이 날마다 새록새록 다가오시기 바랍니다.

지금 주어진 모든 것은 말씀이란 피자 판이 우리 엉덩이 밑에 집어넣어서 우리를 주님 쪽으로 당기기 위해서 함께 살기 위해서 하는 모든 작업이 지금도 이뤄지고 있거든요. 우리는 나한테 이익이 무엇이냐를 생각할 때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서 “누구십니까? 저를 끈질기게 건지는 분이, 제가 뭐 볼 게 있다고 이렇게 저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 살겠다고 떠나지 않으십니까?” 그 느낌이 있기를 바랍니다. 왜? 우린 느낌 아니까. 그런 느낌이 항상 여러분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사장에 일어난 일이 원래 창조 때 있던 취지였습니다. 그렇게 참혹하고 피라는 용어로 나타날 줄이야 십자가라는 피 흘림으로 나타날 줄이야 미처 몰랐고 우리는 잘해주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피로만 말씀하셔서 우리 죄를 지적하시는 하나님, 그 피로 말미암아 용서받았사오니 우리는 십자가를 날마다 되풀이해서 볼 수 있는 그런 안목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삭개오의 시선으로 주님을 마주대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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