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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131004a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언약의 고정성자유게시판출애굽기

20131004a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언약의 고정성

이름 : 한윤범(IP:14.39.134.60)

20131004a 울산강의-출애굽기 29장 : 언약의 고정성

(강의:이근호 목사)

“너는 다른 수양을 취하고 아론과 그 아들들은 그 수양의 머리 위에 안수할지며”(19절) 아론과 아들들에게 제사장 위임식하는 대목입니다. 아론 아들들에게 안수하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20절에 보면 피를 사람 몸에다 바릅니다.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바르고 피를 사방에 뿌리고 옷에 뿌리고 하는 겁니다. 그것은 제사장의 모습이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거죠. 하나님과 메시아의 관계는 눈에 안 보이잖아요. 눈에 안 보이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역할, 일종의 연출 또는 무대 연극 그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대 연출을 하시는데 그 배경이 온통 피바다. 옷에도 피 묻었고 오른쪽 귀뿌리와 엄지손가락에도 피 묻었고 바닥에도 피를 뿌리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나님과 오실 메시아, 그 동네가 어떤 세상인지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모르는데 제사장 위임식 하면서 풍겨 나오는 피 냄새와 피가 흥건하게 있고 피 위에 제사장에 괴상하고 특이한 복장, 이 복장이 살림살이할 복장은 아니잖아요. 그 복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시나리오, 지금까지 살아온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내용이 제사장 옷에 감아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걸 생각해보면 이 단어를 여러분이 생각해줘야 돼요. 제사장이라 한다면 이 단어를 반드시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고정’ 고정됐어요. 인생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떠돌이, 나그네, 내일은 무슨 변화가 일어날지 모르는 숱한 흥망성쇠의 연쇄 고리, 우리가 인생이라면 그걸 생각하거든요. 여러분 잘 아시는 춘향전은 춘향이라는 여자가 주인공이고 이 도령은 보조고. 기생의 딸로 태어나서 거기에 근무하려고 온 현감 아들과 눈 맞았고 그 총각이 사법고시 친다고 올라가서 합격해서 암행어사가 되어 어릴 때 사랑을 잊지 못해서 다시 내려올 때, 보세요. 흐름이잖아요.

우리는 춘향전이나 심청전을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인생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시간 때 더 나은 쪽으로 달라지잖아요. 사람이 사는 희망이랄까, 보람이랄까, 지금 우리가 자살하지 않는 이유는,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낫지 않을까 하는 희망 때문에 버티고 있지 않습니까. 못 살겠다고 하면서도 뭔가 내일은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 이게 고정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이여, 제 인생 고정 안 됐지요? 지금보다 내일이 낫겠지요?”라는 은근히 기대로 교회 와서 착한 척하고 믿음 있는 척하고 하는데 성경에서 진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고정 안 된 것이 아니라 고정이에요. 더 쉬운 말로 하면 이렇게 되지요. 얼음, 동결. 피를 뿌리는 순간 동결돼버렸어. 이것, 성도입니다.

제사장 위임식 하면서 제사장이 앞으로 얼마나 출세할 것이냐? 제사장이 앞으로 얼마나 영광을 얻을 것인가? 그 자식들이 얼마나 출세할 것인가? 그런 것을 기대한다면 그 사람은 제사장을 다른 사람과 같이 보는 무리한 짓을 하는 거예요. 제사장이 피를 바르면 제사장의 운명은 고정, 얼음 돼버려요.

제사장 운명이 자신의 장래고 현재고 얼음이 돼버려요. 고정이 돼버리면 뭐가 날아가느냐 하면, 시간이 날아가요. 이제는 시간을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인간이 시간을 생각 안 할 수가 없어요. 인간이란 장래, 미래 생각 안 할 수가 없잖아요. 그걸 피 뿌림으로 말미암아 그걸 하지 말라고 한다면, 뭘 생각해야 되는데요? 여러분 ‘고정’이라 단어 기억하시지요. 파생된 단어 하나 더 생각하세요. 그게 뭐냐 하면, ‘자리’입니다. 고정된 자리를 만드는 겁니다.

제사장이 얼마나 똑똑하냐? 제사장이 나중에 어느 여자와 결혼하느냐? 제사장이 개인적으로 소득이 얼마냐? 전혀 의미 없습니다. 제사장을 고정되게 만든 그 자리는 모든 게 달라지고 모든 게 변화되는 세상 속에서도 기어이 확정된 구원의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 자리가 있는 나라가 그냥 제사장 나라가 아니고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고 합니다. 벌써 진도 좀 나갔다고 복잡해지고 기억이 잘 안 되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의 모든 인생이라 변화 됐어요. 서양에도 올림포스란 신화가 있는데 소포클레스란 사람이 지은 비극인데 재미가 있어요. 당신이 자식 낳으면 그 애가 당신을 죽이고 당신 마누라와 결혼할 것이라는 허무맹랑하게 보이는 신탁, 예언이 떨어졌을 때 아들을 죽여 버리지요. 죽이는 방법이 모세처럼 강물에 띄워서 잊어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무꾼의 도움으로 살아나서 자기 아버지가 나무꾼인지 알고 사는데 나중에 고린도 왕자인데 테베의 왕이 될 때 적군의 왕이 아버지인데 죽이고 그 부인과 결혼했는데 자기 엄마였어요. 나중에 그걸 알고 통곡하고 자기 죄 값을 스스로 치른다고 두 눈을 뽑고 살았다는 비극. 주제 뭐냐 하면 인생 자체가 백날 돌아다녀봐야 비극이라는 겁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왜 비극을 좋아하느냐 하면, 비극을 앎으로써 현재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상대적으로 획득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세상이 괴롭다, 고생스럽다. 고생한 사람 실컷 보고 나면 왠지 행복하지 않습니까. 아직도 난 버틸 만하구나. 아직도 괜찮구나. 못한 사람 자꾸 보게 되면 자기 형편이 얼마나 유복한 가정인지 행복을 행복인지 모르고 살고 있다는 걸 새록새록 새로움이 등장하지요.

그게 동양이든 서양이든 간에 인생이란 쉴 새 없이 변화된다는 거예요. 변화되지 않는 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와서 기도하는 이유가, 이 변화되는 나를 잘 변화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거든요. “내년은 올해보다 더 낫게 해주옵소서.” 성경은 우리 뜻을 전혀 반영하지 않아요. 스톱! 고정. 시간을 잊어버려라. 그것은 내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 상관없이 내가 놓여진 자리가 고정된 자리라면 우리는 놀이동산의 회전목마를 그냥 뺑뺑이 도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걸 신학적으로 하면 하나님께 사로잡힌 자, 또는 성령에 의해서 성령 받은 자라고 거룩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아주 투박하게 이야기한다면 개 끈에 묶인 개가 아무리 자유를 찾아서 발버둥쳐도 개 끈을 넓이로 하는 반경 안에서만 뺑뺑이 돌지요. 그래서 우리는 개를 자유롭다고 하지 않고 너의 자리는 묶여있다고 하잖아요. 바로 그 확정된 자리, 그게 피 자리입니다.

오늘 출애굽기 29장 19절부터 하는데 여러분이 이걸 염두에 두셔야 돼요. 하나님께서 율법 줘서 그런지 아는데 사실은 그전에 이런 것을 포괄적으로 준 게 있어요. 노아가 방주 탔잖아요. 방주에서 안 내렸습니까? 방주가 좋다고 거기서 살았습니까? 방주에서 나왔잖아요. 방주에서 살면 노아의 믿음은 얕은 믿음이 되는 겁니다. 사람은 누가 자기를 도와주면 개기는 버릇이 있어요. 스스로 나와야 되는데. 방주에 살았다고 해서 늙어죽을 때까지 평생 방주에 있지는 못하는 겁니다. 나무배가 우리를 구원하는 건 아니잖아요.

오늘 본문에 보면 제사장이 양을 잡고 피를 뿌리고 오른쪽 귀뿌리에 오른손 엄지에 바르잖아요. 양의 피를 오른손에 바른다고 구원받습니까? 그렇게 받을 것 같으면 친척들 명절에 양의 피 담아서 전부 다 오른손에 피 칠하면 구원받았게요? 상징은 귀한 거예요. 그런데 거기서 자꾸 빠져나오세요.

노아 방주에서 빠져나와서 노아의 방주는 추울 때 불쏘시개 할 수도 있어요. 방주는 잊어버리고 거기서 엑기스, 알맹이만 들고 나옵니다. 남들 보기에는 배가 있었기 때문에 살았다고 보지만 그것은 얕은 생각이고, 배에 동승한 어떤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흠 없는 깨끗한 짐승이 동승했기 때문에 깨끗한 것을 살리다보니까 추잡한 것도 덤으로 살린 거예요. 이것, 하나님의 구원방정식입니다. 이 방정식은 시대 바뀌고 사태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근의 공식은 수십 년 지나도 바뀌지 않았어요.

마찬가지로 구원의 방정식은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도 앞으로도 동일해요. 깨끗한 것을 살리기 위해서 더러운 것과 결합이 되어서 함께 사는 이 방식이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살아있는 방식으로 구원하는 방식입니다. 교회 십년 다녀도 교회 방식 모르겠다. 지금 와서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구원하는 방식은 어떻다? 깨끗한 것을 데려가면서 1+1이거든요. 원 플러스 원은 깨끗한 것에 더러운 것을 덧붙여서 구원하는 방식입니다. 이사야 53장에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 방식입니다. 다른 방식 아닙니다. 하나님 존재 믿는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어요. 들어보면 참 기분 좋은데 문제가 뭐냐? 어떻게 깨끗한 것이 더러운 것을 함께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자석에서 S는 N을 배척하게 돼있거든요. 깨끗한 것은 더러운 것을 배척하게 돼있어요. 애들도 더러운 냄새나는 사람을 보면 솔직하게 “엄마, 저 아저씨 더러워.” 하고 당연히 배척하지요. 배척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서로 밀쳐야 될 둘이 어떻게 붙느냐 이 말입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나오면서 어떻게 더러운 것이 같이 붙어있는가를 노아 방식으로 보여준 거예요. 깨끗한 짐승을 불에 다 태웠어요. 태우면 뭔가 있었는데 그게 연기가 되어서 이 땅에서 자리가 사라집니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의 자리가 우선이고 그 위에 몸이 있는 거거든요. 인간에게는 동시에 느껴요. 내가 태어났다. 그럼 이제부터 내 자리다. 그런데 우리는 울산 살다 서울 가면 울산에서 내 몸이 떴으니까 서울 가면 내 몸이 있을 것이다. 사람은 내 몸이 우선이고 자리는 나중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인간이라는 것이 천상천하유아독존,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만들어서 잘못 생각해서 그래요.

지난 수요일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사람은 태어나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고 세대가 인간을 만들어내요. 인간이 세대 가운데 태어난다는 말은 분위기 가운데 태어난다. 내가 나 된다는 것은 태어나자마자 주변에서 오고가는 수많은 대화와 강압적인 분위기와 심지어 청소년들이 많이 하는 욕설과 이런 것들의 세대 속에 우리는 태어나는 거예요. 예수님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했잖아요. 이 세대에서 기적은 요나의 기적밖에 없다고 했잖아요.

요나의 기적은 이 세대에서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펑크 내는 거예요. 이걸 고상하게 말하면 구멍. 한국도 그렇지만 중국도 옛날에 광산지역이라서 논을 갈았는데 아침에 가보니까 싱크홀, 완전히 빠져버렸어요. 그것도 200미터나. 토지 등기 해놓은 것 날아가 버렸어요. 없어요.

주님은 예수님 혼자 죽었다고 부활시킨 것이 아니고 삽으로 그 자리를 푹 떠버려요. 뜨면 예수님이 있던 자리가 죄인이 살던 자리에요. 예수님만 구원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살았던 죄의 자리까지 떠서 같이 부활시키면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게 돼요. 작은 차이인데 중요합니다. 그냥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면 혼자 잘났어. “나, 혼자 구원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좋겠네. 혼자 구원받아서. 우리는?”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죽은 자들 가운데서’라 해서 주님이 살았던 그 자리를 호미로 모종 뜨듯이 뜨게 되면 예수님이 하신 일속에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붙어있는 자체, 주님께서 죄인을 위해서 하신 그 자체가 몽땅 의가 돼버려요. 예수님만 의가 아니라 예수님이 죄인을 사랑하고 대속했던 그것까지 합쳐서 그것까지 범위를 넓혀서 의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의의 범위가 넓어진 거죠. 전에는 예수님만 의인이었는데 이제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람도 의인 되는 것으로 범위를 넓혔습니다. 하나님의 작전이었습니다.

신약에 나오는 십자가의 효력을 구약에서도 노아언약을 통해서 미리 맛보기로 보여줍니다. 그 노아언약이 보다 세밀해지면 오늘 출애굽기 29장 19절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방정식이 어떻게 점점 더 팽창하고 발전하는지 아셨지요. 의인 하나 잘난 사람 그냥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파견시킨 잘난 사람 곁에 붙어서 1+1, 덤으로 하나 데려가는데 죄인과 의인은 결합이 안 돼요. 안 되기 때문에 결합 될 수 있기 위해서는 개인 대 개인이 아니고 자리를 마련해요. 주님의 자리가 우리가 서 있는 자리까지 퍼지면 우리는 내 인생 자체의 변화를 생각하는데 얼음, 고정 되어서 같이 서 있는 게 돼요.

제가 언젠가 설교하면서 이런 예를 들면서 제가 로마에 가서 피자 먹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 같으면, “피자야 뜨겁지. 뜨거우면 니가 알아서 기어 나와.” 하는데 피자는 나올 생각을 안 하는데 나무판으로 피자 밑에 자리를 만들어요. 외부에서 침투해서 집어넣지요. 이것 예수 안입니다. 예수 안에서 자기 자랑하면 안 되거든요. 이게 구약에서 언약 안.

노아는 자기의 방주를 피자 밑에 판으로 보는 겁니다. 노아는 방주 하면서 자신은 구원받을 자격이 안 됨을 확실히 안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술 먹고 벌거벗은 하체 드러내서 자식 하나 완전히 저주받은 자식으로 만들지요. 포도주는 지가 먹고 저주는 자식에게 했잖아요. 처신을 잘 하지. 아랫도리는 챙겨야 될 것 아닙니까. 술 먹고 벗는 주사인 모양인지.

참 신기한 게 언약 안에서는 인간의 장점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고 감추고 싶은 것을 노출시켜요. 하나님 앞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 짓고 난 뒤에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입었다고 했지요. 그렇게 해 입었으면 놔두면 되는데 그걸 벗겨버려요. 그 다음에 가죽옷을 입힘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것이 아담과 하와의 운명을 고정시키는 자리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것은 여러분의 행위를 믿지 마세요. 여러분의 기도나 헌금, 교회 온 것 믿지 마시고 도대체 내가 피자라면 뜨거운 지옥 불에서라도 무사히 건져내시는 피자 밑으로 들어오는 판, 우리는 그걸 믿어야 됩니다. 그걸 믿게 되면 인생 살아가는 모든 변화가 사실은 고정된 그 자리를 고정되게 다시 환원하라고 늘 고정됨을 쳐다보라고 우리 인생을 변화를 주는 거예요. 우리 인생이 고정된 게 아니고.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 덜렁 내려앉는 그런 사태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내가 애를 완벽하게 키운다고 해서 구원받는 건 아니거든요. 그때 일이 곤란하고 난처할 때 이것만 생각하세요. “잠시 만요. 잠시 십자가 생각하고 가실게요.”

피자 판이 어떤 판이기에 나에게 이런 사태를 일으키는지 다시 고정된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그것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거든요. 그런 모습으로 살 때 모양체가 출애굽기 29장 19절에 나오는 제사장 위임식 장면의 반복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온통 피를 뒤집어쓰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활동영역, 그 자리가 피로써 질퍽거리는 그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안이라는 그것 때문에 언약 안이거든요. 언약 안에서 그렇게 된 겁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할 게 노아의 언약이 제물을 바쳐서 거룩한 것이 같이 죽었는데 그 죽음의 자리가 방주라는 새로운 자리를 마련했다. 따라서 방주 밖에 나가도 우리는 여전히 방주 안에 있는 그 자리는 희생된 제물과 나와 관련 있음을 믿게 되면 그 자리는 유효한 거예요. 그런데 아들 셋 중에서 둘은 알아요. 아버지가 포도주 마시고 자기 관리도 못하고 옷 벗고 다 내놓고 할 때 아들 둘은 바로 이러한 피자 판, 이러한 변화, 갑자기 이런 사태가 온다는 것은 고정된 것, 이렇게 추잡스럽게 해도 앞으로 그럴 수 있더라도 그 제물의 피가 우리를 용서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뒷걸음질해서 담요로 덮어줍니다.

정말 사람들이 성경에 흐르는 일관된 언약을 모르고 그냥 성경을 보면 진짜 구원받기가 오히려 더 쉬울 수가 있어요. 아버지 술 먹여서 벗겨놓고 지가 담요 들고 덮었다고 하면 그게 얼마나 유치하고 천박해요. 여러분들이 제가 이렇게 하면 진짜 유치하네요. 하는데 그 유치한 걸 천주교에서 하고 있어요. 또 기독교도 하고 있어요. 이 살을 먹어라. 이 피를 마셔라. 물 뿌리고. 물 뿌려서 될 것 같으면 아예 샴푸로 감겠다. 자꾸 되풀이 되고 반복되는 것 말고 변하지 않는 게 있어요.

변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날마다 변하게 만들어서 내 믿음이 결코 일관된 믿음이 아닌 것을 스스로 깨닫게 합니다. 믿는다는 나를 믿지 마세요. 그것은 아침 따로 저녁 따로 달라요. 인간의 이성은 아무리 뛰어나도 자기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게 돼있습니다. 선비가 어떻고, 지리산 서당에서 훈장 자격 있다고 해도 성질나는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떤 가수가 노래방 프로에 나와서 하는 말이, “항상 웃으세요.” 하면서 웃음으로 심리 치료하는 강사를 하다는 거예요. 그 소리 듣고 다른 출연자들이 약을 올리기 시작하는데 그 사람이 나이 오십이 넘었는데 약을 올리니까 자기가 한 말이 있으니까 웃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그게 더 같잖은 거예요. “괜찮아요. 늘 웃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잠시 만요. 잠시 화내고 갈게요.”

하나님 뜻이 뭐냐? 제발 너를 믿지 말라는 거예요. 우리가 자꾸 변하고 성질내고 웃다가 울었다가 이렇게 하는 것은, 네가 어떻게 행동을 조절하고 절제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그런 너도 구원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제가 신약성경 삭개오를 보면서 항상 생각하는 게 그거에요. 삭개오가 세금쟁이가 되어서 횡령을 많이 했어요. 그러니까 빨리 돈을 벌었지요. 누구든지 삭개오를 욕을 했어요. 돈밖에 모르는 인간, 권력 믿고 돈 뺏는 인간. 그 당시 세금징수는 공무원이 아니고 하청 받은 거거든요. 수단 것 빼내고 할당 된 것 주고 나머지는 네 주머니에 넣으라는 식이었기 때문에 재주껏 하면 부자 되는 거지요.

그런데 그 삭개오가 자기 일생은 세금쟁이로 평생 밥 먹고 사는 것밖에 몰랐는데 누가 눈에 들어왔어요. 자기 동네에 예수님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키가 작기 때문에. 키가 작은 것도 의미 없는데 무엇이 의미가 있었느냐 하면, 눈이 마주 친 거예요. 그 순간 삭개오는 얼음 되었습니다. 인생 고정됐어요. 이제는 내가 토색한 것 네 배나 갚아줘도, 두 배 갚아줘도 그것은 문제 거리도 안 돼. 왜? 고정됐으니까.

주님께서 삭개오에게 자리를 마련해줍니다. 너희 집에 가자. 집에 가서 삭개오뿐만 아니고 온 가족이 구원받습니다. 삭개오가 그 다음에 그 인생이 얼마나 돈을 벌었는지 별장을 몇 채 가졌는지 삭개오도 관심 없고 주님도 관심 없고. 삭개오는 나는 이미 내 자리는 내 것이 아니다. 내가 마련한 자리가 아니었다. 주님이 친히 마련한 자리, 주님과 시선 마주칠 때 그 인생은 끝났어요. 그게 바로 제사장입니다. 현대판 제사장이에요.

이게 현대인들도 잘 안 되거든요. 주님 오셔야 되는데 옛날 사람도 마찬가지잖아요. 옛날 사람들에게 만화처럼 보여줘요. 특정 종족의 어떤 가족을 데려다가 너는 아론의 족보에 있으니까 이리 와. 너는 남자니까 제사장 무조건 해.

아까 쉬는 시간에 누가 시험 이야기했지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였어요. 이 세상에서 누가 시험 쳐야 합격합니까? 운전면허를 내가 쳐서 통과하면 합격이 되겠지요. 그런데 성경은 누가 시험 치느냐 하면, 하나님이 시험 쳐요. 하나님이 보란 듯이 하나님이 시험 쳐요. 주께서 내 주에게. 내 대신 다른 분이 하나님이 시험 치는데 만약에 조리사 시험 친다면, 시험 과제가 잡채를 20분 내에 만드세요. 했다면 시험 치는 분은 예수님이고 우리는 그냥 잡채, 시금치, 당근. 우리는 그냥 주께서 손으로 솜씨를 발휘하는데 묻혀가는 것뿐이에요.

그게 그 당시 제사장이라니까요. 제사장이 착하지도 않아. 우리와 마찬가지에요. 아버지 앞에서 아들이 시험 치면서 피를 뿌리니까 피를 뿌리고 피 튀김 잘 나왔네. 합격! 주님이 시험 치는데 일반교회에서는 지가 시험 친다고 하니까 잠도 오고 합격도 못하고 완전히 엉터리, 세상에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요. 아침에 시험 치면 70점, 은혜 받고 치면 80점, 화내고 치면 20점. 들쑥날쑥한 그런 시험이 어디 있어요. 항상 성경 볼 때 밑바탕에 하나님의 약속을 집어넣어야 됩니다.

아직까지 의인과 죄인이 어떻게 결합되는가를 노아 정도에서만 이야기했지 그 이후까지 이야기 안 했어요. 이제 더 상세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노아가 제물을 잡아서 피를 내서 쏟고 그 다음에 태워서 노아는 방주의 자리가 바깥에 나오면 제사라는 방식으로 구원이 이뤄지는 겁니다. 그 제사를 성경에서는 흠향하시고. 향기란 말이죠. 하나님께서 “어디서 향수를 뿌렸나?”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는 내가 물로서는 이 세상을 멸망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니까 태풍 올라오고 홍수 나더라도 마음 푹 놓으세요. 언양의 반구대는 물에 잠기더라도 울산바닥은 물에 안 잠깁니다. 잠기거든 대구 팔공산 올라오면 돼요.

다시는 물로써 심판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이 말의 의미가 뭐냐 하면, 다시는 방주 타고 구원받았다는 작자는 지옥 보내겠다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다시는 물로써 심판하지 않겠다는 말은, 방주 만들어놓고, “하나님 저 구원받은 것 맞지요? 저도 노아와 한편입니다.” 이러지 말란 말이죠. 언약이 하나 주어질 때마다 옛날 방식의 심판이 아닌 언약 안에는 새로운 방식의 구원이 주어지고 거기에 부합되는 새로운 구원도 같이 세팅되어서 같이 세트로 들어있습니다.

물로써 심판받는다 하면 집집마다 노아방주 만들려고 바쁠 거예요. 지금도 미국에서는 노아방주 만드는 사람 있었어요. 심지어 영화도 돼있어요. 지금 핵이 떨어지면 다 멸망한다는 소리 듣고 미국이나 잘 사는 나라에서는 현대판 노아프로젝트가 있고 그걸 하는 회사도 있어요. 물 몇 병 있어야 삼년 버틴다는 게 있어요. 우리나라도 있을 거예요.

새로운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새로운 심판방식이 주어지는 겁니다. 노아 때는 노아 빼놓고는 악인이 되잖아요. 그런데 새로운 언약이 오게 되면, “아무개야. 너도 문제다.”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끼리는 괜찮다고 하다가 새로운 하나님이 언약이 오게 되면, 언약이란 지령, 새로운 지령이 오게 되면 전의 지령과 달라요. 새로운 소식이 나오는데 그 소식은 전보다도 어디에 가까우냐 하면, 장차오실 예수님에 대한 내막에 대해서 보다 분명하게 더 접근된 더 자세하게 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예수님도 그걸 아시고 포도원 농부 비유를 했거든요. 포도원 주인이 소출할 때가 되어서 세금 거두려고 종들을 보냈는데 종들을 죽이니까 마지막에 아들을 보냈는데 아들마저 죽였다는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 비유가 뭐냐 하면 앞의 종들은 선지자들이고 뒤에 오는 아들은 예수님인데 그 둘 사이에 연관성이 있어요. 따라서 구약을 해석할 때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좀더 가까이 접근하면서 예수님을 보다 분명히 보여주는 겁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 사람은 가까이 갔기 때문에 예수님을 더 잘 믿겠네요. 하지만 예수님 왔을 때 아무도 안 믿었어요. 제자들도 안 믿었어요. 날이 가면 갈수록 안 믿게 돼요.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들 믿는 척 했지요. 나중에 이스라엘 멸망했습니다. 믿지도 않는데 왜 언약을 줬는가? 언약이라 하는 것은 우리도 모르는 죄를 더욱더 많이 개발하기 위해서 준 거예요. 죄를 개발해야 우리가 천국 갈 때 내가 이렇게 해서 구원받았다는 소리를 일체 말을 못 하잖아요.

모든 공로가 주님 공로로만 충만할 때 두 자로 그걸 천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좋아서 천국이 아니고 주님 혼자 좋아서 천국입니다. 그 천국에 합류 되려면 우리도 주님만 좋아져야 돼요. 이게 인력으로 안 되잖아요. 우리만 좋으니까. 그래서 인생 살아가면서 피자 굽는 오븐이 날이 갈수록 뜨겁게 돼있어요. 울산도 이번에 뜨거웠잖아요. 이제 울산도 못 살겠다고 하잖아요. 그때 주님이 그러니까 하늘나라고 가야지. 집에 에어컨 빵빵 나오면 하늘나라 안 보여요.

요새 젊은 사람 생각하면 가련해요. 얼마 전에도 그런 예를 들었는데 조선시대에 젊은 사람 같으면 아빠 엄마가 밭떼기 주면 고맙다고 거기서 일하면서 색시도 보지도 않고 결혼해서 그렇게 한 평생 살잖아요. 그냥 머슴 되어 산다고요. 그런데 어떤 젊은이가 도박 빚이 팔천만원인데 엄마 집이 이것저것 합치니까 10억이에요. 형하고 엄마 다 죽였어요. 그러니까 조선시대 때 젊은애 사고방식이라면 얼마든지 사는데 21세기 젊은이는 10억 아니면 못 살겠다는 거죠. 그러니까 엄마와 형이 죽어야 돈 10억이 자기한테 다 돌아오니까 자기 마누라와 공모해서 죽였잖아요.

그러니까 젊은 애들이 불쌍하지요. 마음 낮추어 살도록 이 세대가 용납을 안 해요. 참 가련하지요. 그만큼 앞으로 성경이 진행하면 할수록 옛날에 노아방주처럼 배만 있어도 살았던 그 시절이 아닙니다. 이제는 이것 달라, 저것 달라, 계속해서 윽박지르고 하나님 원망하는 그런 경우가 계속 이어지는 겁니다.

그 와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애굽의 맛을 봤거든요. 그래서 출애굽 하면서도 자꾸 뒤돌아보는 겁니다. 애굽이 기준이에요. 하나님께서 믿으라 했는데 애굽과 얼마나 더 잘 됐나 보자. 이렇게 되거든요.

첫째 시간 끝내면서 출애굽기 29장 46절 오랜만에 통성으로 해볼까요?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애굽 땅에서 인도하는데 그냥 이리 나오너라가 아니라 제사장이 피를 발라야 돼요. 왜? 애굽이라는 것이 떨어지기 힘들어요. 애굽이라는 속성이 그렇게 쉽게 떨어지지 않습니다.

본문을 다같이 읽어봤잖아요. 거기에 보니까 하나님의 목적이 그들 중에 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시험 치는 거예요. 죄인 속에 우리가 어떻게 의인되는지 우리가 시험 치는 게 아니고 예수야. 네가 죄인 속에 어떻게 거할 수 있느냐? 이것은 예수님이 치러야 될 어려운 숙제를 주님이 의인이면서도 죄인 속에 합류하는 숙제, 그것이 우선이고 그다음에 죄인이 붙어서 구원받는 것은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 의인이 죄인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 고정된 자리를 죄의 자리로 만드는 일을 주님께서 내려와서 이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구약. 신약에는 그래서 조성된 죄인들한테 스스로 죽임을 당하시고 그리고 부활하셔서 죄인 된 자리가 의인으로 만들어지는 자리로 전환시키는 두 번째 시험, 그것 예수님이 하십니다.

10분 쉽시다.

첨부파일 : 20131004a 울산강의.hwp (46.5K), Down: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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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