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강-YouTube강의(죽음이라는 비현실)1301003-이 근호 목사
49강-YouTube강의(죽음이라는 비현실)1301003-이 근호 목사
이름 : 유일자(IP:116.33.234.248)
49강-YouTube강의(죽음이라는 비현실)1301003-이 근호 목사
제목 “죽음이라는 비현실”입니다. 너는 내 운명이라는 영화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와요. 장례식장에 유족친구들이 가족을 위한다고 장례식장에 다 모여 있었는데, 그때 마침 이탈리아하고, 한국하고 월드컵 8강전이 열린 그 시기였습니다. 2002년 월드컵 경기장에서 이탈리아하고, 경기할 때 장례식장에서 그 중계방송을 본거예요.
유족들은 슬픔에 잠겨있고, 사람들도 자기 몸을 조심하고 있는데, 그때 안정환 선수가 한골 넣자 갑자기 거기가 장례식장인지, 결혼식장인지 구분도 안 되고 온 유족부터해서 거기 온 모든 손님들이 모두 함성을 지르면서 ‘대한민국‘ 하면서 짝짝짝 하고 손바닥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아~ 이 죽음이라는 것이 현실 속에 끼어들기가 이렇게 힘드는 거구나. 죽음이라는 것은 산자한테는 끼어들지 말고, 죽은 자들끼리 멀리해놓고, 절대로 산자한테는 들어오지 말라는 약속 같은 것이 산자들에게 있어요.
현대인들은 공동묘지가 시 외곽에 눈에 안 띄는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문화가 있었던 서양에서는 이 공동묘지가 시 한복판에 있고, 교회 한복판에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기독교에 보면, 한 순간도 죽음을 잊지 말라, 죽음이라는 바탕이 먼저 깔려있고, 그 위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보는 겁니다.
휴가 가서 계곡에 텐트 칠 때, 그냥 자갈 맨바닥에 텐트를 못 치잖아요. 그 위에 뭔가 폭신폭신한 스티로폴 깔고서 잠을 자듯이 죽음이라는 것을 바탕에 두고, 그 위에 스티로폴 같은 편안한 삶을 깔고 하죠. 하지만 그 깐 것 밑에는 딱딱한 자갈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인생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계속 살려고 노력하다보니 사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밑바닥에는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음의 힘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이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 하냐 하면, 한마디로 죽음은 내 목숨 끊어지는 것을 가지고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에 준해서 죽음을 설명합니다. 언약에 준해서 죽음을 설명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살다 보니까 죽는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우리는 죽어야 돼. 라는 약속 관계로 연결된 채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연극무대라면, 연극무대에서 평생 동안 우리가 보여줘야 될 역할은 아~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구나, 그 역할을 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언약적 관계에서의 죽음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죽어버리면 그 자체가 너무 허무하지 않느냐. 라고 생각 하실 텐데 그 언약적 죽음을 제공하는 언약의 본 주인이 바로 우리들과 똑같이 이 땅에서 죽을려고 오신 분입니다.
인간들이 이 땅에 태어나서 죽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는데, 우리만 죽는게 아니고 우리를 죽게 하신 하나님 당사자도 이 땅에서는 무조건 돌아가셔야 돼요. 하나님마저도 이 땅에 오면 죽어야 된다면, 우리 같은 경우 당연히 이 땅에서 죽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장차올 메시야를 이 땅에서 죽여주심으로 말미암아 언약적인 죽음, 약속에 의한 죽음이라는 것이 새롭게 발생되면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부활의, 영생의 세계라 하는 것은, 언약적 죽음에 포함된 사람에게만 제공된 혜택입니다.
그러니까 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죽을 때 죽더라도 언약적 죽음에 합세해서 돌아가시면 사는 길이 보인다니까요. 이게 복음입니다. 죽어서 살자는 거예요. 살다 보니까 죽는게 아니고, 어차피 죽는데 이 죽음을 그냥 죽지 말고 예수님 약속 안에서 죽어버리자 이 말입니다.
예수님 약속과 더불어서 같이 죽으면, 주님 약속과 더불어 같이 사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은, 신약적으로 결론 부분만 이야기 한거고 신약이전에 구약에서는 이 대목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전도서 9장 10절을 통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음부에 반드시 들어가는데, 죽은 자들이 모이는 그 영역에는,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느니라.”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너 자신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너가 생각한 너만의 어떤 계획이나, 꿈이나, 희망 같은 것은, 그 죽음을 통해서는 허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죽음은 집단 죽음이기 때문에 내 개인의 죽음으로 죽는 세계에서 버틸수가 없는 것, 개인의 죽음으로 쳐주질 않는다는 겁니다. 각각 잔잔한 시냇물이 있지만 시냇물이 모이다 보면, 바다가 되죠. 그 바다가 음부의 세계고, 우리는 각각의 시냇물처럼 개인의 계획도 있고, 꿈도 있고, 개성도 있고, 자기 나름대로의 재주도 있지만, 일단 죽어버리면, 이것이 섞여가지고 일체 개인적인 것은, 마감이 되는 겁니다.
그럼 거기에는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취지만 남아 있지 개성적인 나의 취지 같은 것은, 살아있을 때 까지만 허용되고, 죽어버리면 나의 계획, 나의 꿈같은 그런 것은 일체 용납되지 않는 세계로 우리는 지금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성경에서 왜 하느냐하면,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문제인가? 그렇치 않습니다.
전도서 9장 9절에 보면,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찌어다.” 상당히 우리의 예상과 어긋납니다.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 찔찔짜고, 짜증내고, 슬퍼하고, 뭐 찡그리고 그래 사는데, 재미있고 즐겁게 살라는 얘기입니다.
왜, 10절에 보면, 어차피 죽게 되어 있는데 너의 모든 개성과, 너의 한 것은, 소실되어 의미없이 다 날라가 버리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강의 결론이 뭐냐, 하나님께서 죽는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것이고, 그 죽음의 세계의 계획이 없는 그것은, 우리한테 계획이 없다는 말이고 주님의 계획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따로 내 계획 가지고 되니, 안되니 안절부절, 근심걱정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계획이라 하는 것은 즐겁게 살 계획만 있으면 되지 내가 지금 이렇게 하면, 미래는 이렇게 될 것이다. 라는 그 미래의 계획은 이미 우리의 손에서 떠나 있어요.
우리는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영생 받을 자와, 지옥 갈자가 결정난겁니다. 그거는 주님의 약속에 관한 문제기 때문에 우리가 개입할 수 없고, 이미 우리가 계획이 없어지는 한 이 땅에 있을 때에는, 지금 주신 환경 속에서 어차피 죽기 전까지는 모든 주어진 것에 맘껏 즐기라고 주신 거예요.
따라서 너무 과도히 아낀다든지, 너무 미래를 대비한다든지 그렇게 살지 말고, 모든 계획은 주님 손안에 있으니까, 지금 허락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즐겁게 살고, 장래일은 주님께 맡기고, 오늘 하루하루 감사하면서 즐겁게 사는 것, 이것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성도의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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