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48강, 49강) 천벌, 죽음의 비현실성 131003
유튜브(48강, 49강) 천벌, 죽음의 비현실성 131003
이름 : 이근호(IP:119.18.93.55)
48강
49강
유일자(IP:116.♡.234.248)
13-10-07 09:09
48강-YouTube강의(천벌)1301003-이 근호 목사
“천벌 받으세요” 라는 특이한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나라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최제우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천도교라는 토속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그 천도교에 대해서 민초들이, 사람들이 호응을 많이 했습니다. 그게 이유가 있어요. 그 사람이 주장한 교리가 뭐냐 하면, ‘사람이 곧 하늘이다. 라는 교리였습니다.
그걸 줄여서 인(人), 내(乃), 천(天)이라 하는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인간은 신분과 계급에 구애받지 않고 평등하다는 말입니다. 서양 쪽으로 말하면, 천부인권설, 모든 인간의 권리는 사람에게 나온 것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같은 인간이 하늘로부터 준 그 사람의 인권을 유린할 어떤 특권이나 권리도 없다. 라는 사상입니다.
그러한 최제우의 천도교 교리가 왜 민중들에게 호응을 받았냐하면, 그 시대뿐만 아니고 모든 사회가 가진 자 편에 서거든요. 가진 자들이 없는 사람들은 없이 여기고 무시하니까 한이 맺혀 있는 겁니다. 한이 맺혀 있을 때 그 한을 누가 풀어 주겠습니까. 그럴 때 최제우는 말했습니다.
‘비록 가진 자들 세상, 권력자들이 여러분들을 억압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억울함을 다 아시니까, 참고 기다리면 여러분들에게 복이 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학대한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천벌을 내립니다.’ 라고 이야기 했어요. 자 여기서 천벌을 내린다 할 때 천벌을 안 받는 사람은 비록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래 나를 힘들게 하는 너희들을 하늘이 가만두지 않지. 반드시 천벌을 내린다니까 그래 난 그 교리를 믿을 거야. 그 신을 그 공평한 하나님을 난 믿을 거야.’ 해서 그 천도교 교인들이 거기에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비단 천도교에만 관한 문제가 아니고, 우리 한민족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공통적인 심성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심성이 그냥 옛날 19세기말, 20세기 초 그때, 민중들의 심성 같으면 제가 말을 안합니다. 이 심성이 그대로 오늘날 한국 사회 전반에, 그리고 교회도 이것이 퍼져 있습니다. 이걸 제가 아주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여러분 예수 믿으세요. 그러면 천벌 받지 않습니다. 지금 비록 이 땅에서 여러분들이 힘들게 살지만 여러분들의 억울한 것은 하나님이 갚아 줍니다.’ 라는 이러한 일반 대중들의 그 심성을, 사람들은 하나님께 호소함으로써 교회 다니는 보람이나 희망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이러한 얘기가 과연 진짜 복음이고 진리냐 하는 문제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보고 정반대로 이야기 합니다. 천벌을 받으라고 합니다. 구약에 선지자들을 보면, 그들은 천벌 받은 사람이예요. 천벌이 뭐냐 하면, 사람이 주는 벌이 아니고, 하늘이 주는 벌이거든요. 구약에 선지자들은 남들이 받지 못하는 벌을 받았어요. 그건 직접 하늘이 때려주는 벌을 받았어요. 그래서 그들은 천국을 가게 된 겁니다.
이런 선지자들이 받았던 그 천벌은 나중에 이 땅에 오셨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가 때려주는 저주와 천벌을 받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할 때, 바로 하나님이 주신 심판과, 징벌과, 천벌과 저주가 어떤 성질이며, 어디에 근거해서, 무엇 때문에 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벌을 내리셔야 되는지를 십자가를 통해서 알아채는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레미야 20장 14절에 보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제 생일이 저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하나님이여 이렇게 살 것 같으면 차라리 제 생일을 저주 받아서 제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18절에 보면,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욕된 것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가.” 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자기 태어난 것을 저주하고, 그리고 평생 수고와 고생으로 보낸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예레미야 죄지어서 벌 받는다고 이야기 할 거예요. 딱 거기에 맞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맞는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이러한 수모를 당한 것은 예레미야뿐만 아니고, 이사야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장차 올 메시야에 대해서 예언하기를 그는 채찍에 맞는다고 했어요. 우리의 죄 때문에 그 채찍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채찍 맞는 것이 우선이고,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채찍을 때리시는 분은 누구냐. 천벌입니다. 예수님이 선지자에게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이 직접 때리시는 그 혹독한 징벌을 선지자가 몸소 받았다면, 이제는 십자가 이후에 있는 우리 성도들도 당연히 매일같이 천벌을 받으면서 이 땅을 살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천벌의 속성이 뭐냐 하면, 세상적인 성공을 은근히 노리다가 얻어맞는 벌입니다. 약간 설명을 더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천벌을 받았는데, 예수님이 천벌을 받게 된 원인이 되는 그 죄는, 예수님의 택한 구원 받는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그저 세상적인 성공과, 출세와, 영광과, 권력, 자기 자존심, 자기 상황에 푹 빠져 있으니까 그것이 바로 천벌 받을 짖이라는 겁니다.
‘니가 그런 짖을 하니 하늘 벌을 받지.’ 그런 뜻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우리대신 천벌을 받은 거예요. 따라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천벌 받는 이유가 도대체 우리의 어떤 행동과 어떤 마음 자세 때문에 받는지를 연관성을 지어야 돼요. 그 연관성은 뭐냐 하면, 세상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 세상 사람으로 살고 싶은 집착, 남들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은 집착, 남들 다 그렇게 사니까 우리는 죄 아닌 줄 알고 있습니다.
어떤 농부가 특용작물을 개발해 대박을 일으켜서 올해 농사 잘됐다고 방송에 나와서 자랑하는 그것이 바로 천벌 받을 짖입니다. 우리로서는 십자가만 빠지면 그게 왜 도대체 죄가 되는지 살 필수 있는 어떤 근거가 없죠. 그러나 십자가를 집어넣어 버리면 그렇게 대박나서 성공하게 되면, 하늘나라와 등지게 된다는 겁니다.
야~ 이 세상이 나를 높여 줄 수 있는 멋진 세상이구나. 내 소원대로 이룰 수 있는 멋진 세상이구나.‘ 하고 생각할 때, 그 사람이 정말 천국 갈 백성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천벌을 받아야 돼요. 한번 정리해 본다면, 천벌 받는다는 말은, 내가 세상 것으로 성공했다는 그것과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것과, 딱 만나게 해주는 그것이 천벌입니다.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깨닫고 내 육신적으로는 세상적으로 성공을 했다는 그 사실과 지금 분명히 남들은 나를 부러워해요. ‘아, 성공했어. 목회에 성공하고, 자녀가 사법고시 합격하고, 좋은데 결혼하고 전부다 성공이예요. 이 성공이 십자가와 만날 때, 아 내가 성공했단 자체가 또 다시 나로 하여금 세상에 집착케 하는 천벌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천벌 매일같이 우리가 누리고 느끼면서 살 때, 그 사람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유일자(IP:116.♡.234.248)
13-10-07 09:10
49강-YouTube강의(죽음이라는 비현실)1301003-이 근호 목사
제목 “죽음이라는 비현실”입니다. 너는 내 운명이라는 영화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와요. 장례식장에 유족친구들이 가족을 위한다고 장례식장에 다 모여 있었는데, 그때 마침 이탈리아하고, 한국하고 월드컵 8강전이 열린 그 시기였습니다. 2002년 월드컵 경기장에서 이탈리아하고, 경기할 때 장례식장에서 그 중계방송을 본거예요.
유족들은 슬픔에 잠겨있고, 사람들도 자기 몸을 조심하고 있는데, 그때 안정환 선수가 한골 넣자 갑자기 거기가 장례식장인지, 결혼식장인지 구분도 안 되고 온 유족부터해서 거기 온 모든 손님들이 모두 함성을 지르면서 ‘대한민국‘ 하면서 짝짝짝 하고 손바닥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아~ 이 죽음이라는 것이 현실 속에 끼어들기가 이렇게 힘드는 거구나. 죽음이라는 것은 산자한테는 끼어들지 말고, 죽은 자들끼리 멀리해놓고, 절대로 산자한테는 들어오지 말라는 약속 같은 것이 산자들에게 있어요.
현대인들은 공동묘지가 시 외곽에 눈에 안 띄는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문화가 있었던 서양에서는 이 공동묘지가 시 한복판에 있고, 교회 한복판에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기독교에 보면, 한 순간도 죽음을 잊지 말라, 죽음이라는 바탕이 먼저 깔려있고, 그 위에 우리가 놓여 있다고 보는 겁니다.
휴가 가서 계곡에 텐트 칠 때, 그냥 자갈 맨바닥에 텐트를 못 치잖아요. 그 위에 뭔가 폭신폭신한 스티로폴 깔고서 잠을 자듯이 죽음이라는 것을 바탕에 두고, 그 위에 스티로폴 같은 편안한 삶을 깔고 하죠. 하지만 그 깐 것 밑에는 딱딱한 자갈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인생이라 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계속 살려고 노력하다보니 사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밑바닥에는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음의 힘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이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 하냐 하면, 한마디로 죽음은 내 목숨 끊어지는 것을 가지고 죽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언약에 준해서 죽음을 설명합니다. 언약에 준해서 죽음을 설명한다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살다 보니까 죽는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우리는 죽어야 돼. 라는 약속 관계로 연결된 채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연극무대라면, 연극무대에서 평생 동안 우리가 보여줘야 될 역할은 아~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구나, 그 역할을 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게 언약적 관계에서의 죽음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죽어버리면 그 자체가 너무 허무하지 않느냐. 라고 생각 하실 텐데 그 언약적 죽음을 제공하는 언약의 본 주인이 바로 우리들과 똑같이 이 땅에서 죽을려고 오신 분입니다.
인간들이 이 땅에 태어나서 죽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하는데, 우리만 죽는게 아니고 우리를 죽게 하신 하나님 당사자도 이 땅에서는 무조건 돌아가셔야 돼요. 하나님마저도 이 땅에 오면 죽어야 된다면, 우리 같은 경우 당연히 이 땅에서 죽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장차올 메시야를 이 땅에서 죽여주심으로 말미암아 언약적인 죽음, 약속에 의한 죽음이라는 것이 새롭게 발생되면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부활의, 영생의 세계라 하는 것은, 언약적 죽음에 포함된 사람에게만 제공된 혜택입니다.
그러니까 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죽을 때 죽더라도 언약적 죽음에 합세해서 돌아가시면 사는 길이 보인다니까요. 이게 복음입니다. 죽어서 살자는 거예요. 살다 보니까 죽는게 아니고, 어차피 죽는데 이 죽음을 그냥 죽지 말고 예수님 약속 안에서 죽어버리자 이 말입니다.
예수님 약속과 더불어서 같이 죽으면, 주님 약속과 더불어 같이 사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 한 것은, 신약적으로 결론 부분만 이야기 한거고 신약이전에 구약에서는 이 대목을 어떻게 설명했는지 전도서 9장 10절을 통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음부에 반드시 들어가는데, 죽은 자들이 모이는 그 영역에는,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느니라.” 이게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너 자신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너가 생각한 너만의 어떤 계획이나, 꿈이나, 희망 같은 것은, 그 죽음을 통해서는 허락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죽음은 집단 죽음이기 때문에 내 개인의 죽음으로 죽는 세계에서 버틸수가 없는 것, 개인의 죽음으로 쳐주질 않는다는 겁니다. 각각 잔잔한 시냇물이 있지만 시냇물이 모이다 보면, 바다가 되죠. 그 바다가 음부의 세계고, 우리는 각각의 시냇물처럼 개인의 계획도 있고, 꿈도 있고, 개성도 있고, 자기 나름대로의 재주도 있지만, 일단 죽어버리면, 이것이 섞여가지고 일체 개인적인 것은, 마감이 되는 겁니다.
그럼 거기에는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취지만 남아 있지 개성적인 나의 취지 같은 것은, 살아있을 때 까지만 허용되고, 죽어버리면 나의 계획, 나의 꿈같은 그런 것은 일체 용납되지 않는 세계로 우리는 지금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성경에서 왜 하느냐하면,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문제인가? 그렇치 않습니다.
전도서 9장 9절에 보면,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찌어다.” 상당히 우리의 예상과 어긋납니다. 우리는 죽음을 앞두고 찔찔짜고, 짜증내고, 슬퍼하고, 뭐 찡그리고 그래 사는데, 재미있고 즐겁게 살라는 얘기입니다.
왜, 10절에 보면, 어차피 죽게 되어 있는데 너의 모든 개성과, 너의 한 것은, 소실되어 의미없이 다 날라가 버리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강의 결론이 뭐냐, 하나님께서 죽는다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것이고, 그 죽음의 세계의 계획이 없는 그것은, 우리한테 계획이 없다는 말이고 주님의 계획이 따로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따로 내 계획 가지고 되니, 안되니 안절부절, 근심걱정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계획이라 하는 것은 즐겁게 살 계획만 있으면 되지 내가 지금 이렇게 하면, 미래는 이렇게 될 것이다. 라는 그 미래의 계획은 이미 우리의 손에서 떠나 있어요.
우리는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영생 받을 자와, 지옥 갈자가 결정난겁니다. 그거는 주님의 약속에 관한 문제기 때문에 우리가 개입할 수 없고, 이미 우리가 계획이 없어지는 한 이 땅에 있을 때에는, 지금 주신 환경 속에서 어차피 죽기 전까지는 모든 주어진 것에 맘껏 즐기라고 주신 거예요.
따라서 너무 과도히 아낀다든지, 너무 미래를 대비한다든지 그렇게 살지 말고, 모든 계획은 주님 손안에 있으니까, 지금 허락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즐겁게 살고, 장래일은 주님께 맡기고, 오늘 하루하루 감사하면서 즐겁게 사는 것, 이것이 죽음을 앞두고 있는 성도의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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