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강 - 끝(전도서)
2013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강 - 끝(전도서)
이름 : 구득영(IP:203.223.97.152)
2013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1강 - 끝(전도서)
(강의 : 이근호 목사) (정리 : 한윤범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말씀 앞에서 세우게 하셔서, 말씀이 우리를 보느냐, 아니면 우리가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차이를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그래서 저희들이 이 말씀을 지배하지 아니하고, 말씀이 저희들을 영원토록 다스릴 수 있도록, 이 시간 성령께서 줄 곧 역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먼저, 이 전도서를 누구에게 이야기했는가?
전도서가 구약에 놓여있습니다. 구약에 있다는 말은, "전도서마저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때문에 전도서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 그걸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라는 것인데, 금방 이어지질 못합니다. 전도서가 예수님과 이어지려면, "전도서를 누구에게 이야기했는가?" 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되겠지요.
구약성경에서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고 여기에 신약성경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늘에서 예수님이 오십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구약성경을 미리 던져주고 자기한테 회수하는 식으로 이끄시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위에 실이 있다면, 그 실은 고정되어있는데, 그 실을 지면의 구약성경에 매달아놓고는, 그 실을 잡아당기면 신약에서 모든 것이 드러나겠지요.
◈ 장소가 아닌, 사건으로 바뀌면 !!
바로 여기 구약성경 중에 우리가 지금 하고자하는 전도서가 포함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전도서를 미리 던져놓고 회수하면서 어디에서 만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지점이 있어요. 각별한 지점인데, 이것을 'place' 라고 할 수 있어요. 이것은 'space'와는 다릅니다. 특별한 장소, 특정한 역사적인 장소가 골고다 언덕, 즉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그런데 이 이스라엘이란 장소가, 나중에 땅이 사라지게 되면 이 특별한 십자가 장소가 무엇으로 바뀌는고 하니, 이것이 팩트, 즉 사건으로 바뀝니다. 그렇게 장소로 바뀔 때보다도 사건으로 바뀌면 어떤 효과가 있는고 하면, 장소가 고정되어 있으면 우리가 예수님에게 구원을 받으려면 비행기를 타고서 예루살렘에 가야만 돼요. 그 먼데까지 가야 됩니다.
◈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가 없어 !!
그런데 사건화가 되면 장소에서 사건으로 전이되는 힘이 있어요. 그 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힘이기 때문에, 이 사건이 반복되게 되면 우리가 구태여 예루살렘까지 갈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성지순례라는 것이 신약에는 성립되질 않습니다. 성지순례란 어느 장소를 찾아가잖아요. 성지순례라고 해봐야, 그게 게스트하우스나 올레길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말이죠. 그러니 성지순례가 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그만 십자가 사건이 터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물론 우리가 성지순례를 하게 되면, 우리는 어떤 감동을 받게 돼요. 하지만 그런 감동을 받는 대신, 그 받은 감동을 포기를 못하는 약점이 있습니다. 만약에 자기가 5년 전에 성지순례를 갔다왔다고 하면, 하지만 5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그 기억을 쥐고 있으니 포기를 못하는 것이지요.
◈ 차라리, 저를 죽여주옵소서 !!
그런데 진짜 십자가 사건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의 사건으로서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놀랍게도 자기 부인이 가능하게 돼요. 오늘 낮 시간에도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만,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하면, "차라리 저를 죽여주옵소서!" 라고 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지요.
요즘 류현진은 공을 던지고 추신수는 배트로 친다고 다들 바쁜데, 그런데 류현진이 공을 던지면서 "주여, 죽여주옵소서" 라고 한다면, 그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없지요.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자기를 긍정할 수 있는 그런 장소와 시간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으니까, 이것은 그 자체가 사건화가 되질 않습니다.
그렇게 사건화가 되지를 않으면 그만 규격화가 돼요. 누구 좋아라고 말입니까? 즉 '나' 좋으라고 규격화가 되는 겁니다. 이러면 점점 더 자기 부인이 곤란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나를 따라야, 나 있는 곳에 너희가 있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전혀 이것이 점점 더 장애가 되고 방해가 돼버리죠.
◈ 너는 인간이 아닌 육신이야 !!
그래서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유발시키고, 그 십자가 사건을 무엇으로 전환시키는고 하니, 사건을 반복할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 그 반복은 우리 몸, 즉 우리 자아를 상대하지 않고 우리 육신을 상대해서, 여기에 성령께서 오시게 되면, 우리는 자아가 되는 게 아니고, 쉽게 말해서 인간이 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육신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란 것은 우리가 붙인 것이고, 사실은 성경에서는 육신만 있을 뿐이에요. 육신 이외에 다른 건 없습니다. 왜 우리가 인간이 아니고 육신이 되어야 하느냐 하면, 로마서 8장 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서 육신의 죄를 규정하려고 왔다" 라고 돼있거든요.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다룰 때 육신으로 다룬다는 겁니다.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일방적으로 자기 자신을 인간이라고 하면서 품위나 존엄성과 같은 것을 들이대니까, "모든 성경을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이 그만 튕겨나갑니다. 그렇게 우리한테는 이 성경말씀이 적용되지를 않으니까 우리에게는 불행이에요.
깨놓고 말해서, 인간의 품위나 품격이란 것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주어지는 게 아닌데, 그럼 뭔가요? 그냥 돈만 있으면 되는 겁니다. 사람이 돈이 없을 때는 품위도 같이 팍 떨어져요. 젊은 사람들은 앞으로 경험해봐야 되는데, 돈이 없으면 품위도 떨어지고 있으면 품위도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를 육신으로 다룰 때, 인간들의 이런 수작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점을 저와 여러분은 참 다행스럽고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 다시 정리하면 !!
다시 정리하면, 우리는 지금 구약을 보고 있습니다. 구약은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데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우리의 과제가 뭡니까? "전도서와 예수님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라고 하는, 그것을 풀면 되는 것이죠.
그 푸는 방법이, 예수님께서 전도서로 곧 바로 가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마중을 나옵니다. 하늘에 계신 게 아니고, 이 지상에 성자가 되신 하나님께서 '예수' 라는 이름으로 오게 돼요. 그렇게 해서 구약과 신약이 만나는데, 바로 그 만남의 지점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되는 겁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 '다 이루었다' 라는 의미는?
그러니 "다 이루었다" 속에는 구약 전체가 다 포함되어있고, 동시에 전도서 내용도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 라는 해석으로 전도서를 풀어내고 해석하면 그것은 옳은 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풀리는 게 아니고, 이 "다 이루었다" 라는 것과 전도서에의 의미가 어떤 의미냐 할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인간이 아닌 육신으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다 이룬 거예요. 그러니 우리를 육신으로 다뤄줘야,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그 다루심과 일치가 된다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일 때는 자아가 생생히 살아있는데, 인간이 육신이 될 때는 죽기 위해서 육신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육신으로 만들어놨는데, 그런데 우리는 이 육신으로 "나도 인간이다" 라고 나오니까,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사상과 의식과 사고방식이 전혀 하나님의 의식과는 다른 겁니다.
◈ 사는 것이 곧 미친 짓이다 !!
그래서 이 전도서 9장 3절에 보면, "사는 것이 곧 미친 짓이다" 라고 하는 거예요. 누군가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 라고 했는데, 전도서는 그것보다 더 나갑니다. 결혼을 비롯해서 피아노 과외를 하는 것, 밥 먹고 잠자는 것 등등, 그 모든 것이 다 미친 짓이에요.
(전 9:3)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만약에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반항을 하든지 발악을 하게 되면, 주님께서 "어, 인간 행세하네" 라고,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즉 "나는 너를 육신으로 보는데, 입이 있다고 인간으로 행세하는 거야?" 라고 말이죠. 그러니 인간으로 행세하는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육신으로 바꾸는 것이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인데,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곧 그것이란 말이죠.
그러니 성령께서는 우리를 육신으로 보려고 하고, 하지만 우리는 뭡니까? 아직도 자기가 나름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고 참하고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는, 그렇게 자기 스스로 보기에도 괜찮은 하나의 인간으로 보려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말이죠.
바로 이런 충돌과 갈등, 그걸 감사하게도 우리가 전도서를 맞이하면서 "사는 것도 미친 짓이다" 라고, 즉 "니가 공부를 많이 했어? 다 헛소리야. 헛된 거야" 라는 겁니다. 그러면 "헛되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헛되지 않은 것을 소망하는 게 헛된 거야" 라고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 일단, 비법을 소개하면 !!
그래서 제가 이것을 어떻게 정리했는고 하면, 정리하는 방법을 공개하겠습니다. 처음 전도서 1장 2절에 보면,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이렇게 '헛되다' 라는 것이 다섯 번 나오지요.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렇게 모든 것이 헛되다고 나오는데, 이 '헛되다' 라는 것을, 동일한 말로서 허무니까 "허무가 있다" 라고 엿가락처럼 한번 '쭈욱' 늘여보겠습니다. 그냥 헛되다고 해버리면 말이 안 통하니 말이죠. 그런데 굳이 왜 이렇게 늘였느냐 하면, 헛됨이 있다고 늘임으로서, 여기 '있다' 라는 것에 반대가 성립이 된다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고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사건이 예수님 혼자서 레고랜드를 조립해서 "다 이루었구나" 라고, 또는 로봇 태권브이를 조립해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시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게 뭐냐 하면, 예수님을 가해하고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핍박하는 활발한 사탄의 세력들이 작용을 하고 도와줘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고 난 뒤에 다 이루었다고 하는 게 아니고,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죽어가고 있으면서 말이죠.
그런데 사실상 그게 우리 인간들 눈에는 최후에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고, 또한 발악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작 본인은 죽어가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와 같은 경우에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 예수님이 보인다고 했는데, 도대체 우리는 어쩌라는 겁니까? 진작 보지, 왜 죽을 때 보느냐는 말이죠.
◈ 반드시 대립되는 요소가 !!
그래서 십자가 사건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할 때는 반드시 대립되는 요소를 배치해줘야 돼요. 무슨 말이고 하니,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이 예수님이라면, 그 상대방은 반 예수님, 즉 반 복음이 되겠지요. 이런 반 복음의 세력이 예수님에 대해서 최후를 그런 식으로 배웅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졌다는 것으로 되지 않고, 십자가를 지는데 있어서 부정적으로 협조한 반대세력을 노출시키는 데도 역시 다 이루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어느 쪽이냐 하면, 그 당시 인간들이 예수님 쪽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쪽에 인간들이 있다는 겁니다.
열두 제자의 대표자격인 베드로가 그렇게 직접 물 위를 걷고, 자기 장모도 낫고, 오병이어도 맛보고 했지만, 하지만 결국 예수님께서 체포될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을 했지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때, 예수님에 대해서 경호인도 아니면서 근접해서 말고의 귀를 베고, 온갖 멘트를 다 날리면서 "제가 목숨을 다하여 주를 따르겠다" 라고 해도, 여전히 베드로는 어느 위치에 있느냐 하면, 예수를 반대하는 이쪽이 납득이 되고 충분히 이해가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인간답다는 말입니다.
◈ 육신 - '인간은 인간다워야' !!
그러니 인간은 인간다워야 되는데, 베드로의 순수한 인간성, 즉 자기가 손해를 보면 언제든지 배반할 수 있는 너무나 인간다운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놓치지 않고, 로마서 8장에서는 이것을 '육신' 이라고 하면서 건지신다는 말이죠. "아이고, 쓸모 있다. 이것 봐 육신이잖아"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니 단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주님께서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육신으로 보는데, 하나도 버릴 게 없이 다 유용하게 쓰시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말씀을 다 이루었다" 라고 할 때, 예수님과 그 반(反) 예수, 즉 대비가 되는 요소가 있는 것처럼, 그냥 헛되다고 할 것이 아니고 "허무가 있다" 라는 것과 그 다음에 뭐가 있다는 겁니다. 즉 "허무가 있다" 라고 하고 반대편은 "뭐가 있다" 라는 것을 대비시킬 때, 이 대비를 두고 끌고 가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죠. 도저히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아요. 전도서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겁니다.
십자가를 끌고 와서 십자가에 대립되는 세력으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에, 그 사건을 전도서에 미리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대립되는 구조를 이 안에서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허무가 있다는 말은, 여기 '있다'가 '없다'로 바뀌는 겁니다. 즉 "무엇이 없고, 무엇이 없고" 라고 하는 것을 전도서를 통해서 다 찾아내는 거예요.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은 무엇인고 하니, 허무가 보기에, 즉 하나님이 보시기에 뭐가 없다고 하는데, 그런데 여기 '없다'에 해당되는 이런 것들을 우리 인간은 철석같이 없다가 아니고 있다고 간주하면서 인생들이 살아오기 때문에, 그래서 그러한 인간이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요인이 우리 인간 안에 내장이 되어있다는 겁니다.
◈ 첫째는, 신의 지시가 없어 !!
제가 여기서 없음을 몇 가지 뽑아냈는데, 물론 몇 가지라고 정해진 건 아니고 제 나름대로 뽑았는데 말이죠. 첫째는 신의 지시가 없어요. 전도서에는 누가 신의 뜻에 따라서 했다는 말이 하나도 없어요. 즉 신의 지시가 없는 거예요. 신의 뜻에 따라 했다는 말은 구라고, 거짓말이란 겁니다.
전도서 입장에서는 "너희들은 하고 싶은 대로 꼴려서 했지, 절대 하나님이 시켜서 했다고 하는 비겁한 변명은 하지 말라" 라는 겁니다. 인간은 뭐든지 해놓고는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순교도, 전교도 말이죠. 그러니 신의 뜻으로 헌금한다는 되도 않은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게 전도서의 이야기입니다. 즉 "하나님은 너에게 시킨 적이 없다" 라는 거예요.
그런데도 "주님이 시켜서 우리가 했습니다" 라는 것을 우리가 유지한다면, 그것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살해하는 동기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즉 "신의 지시를 따랐습니다" 라는 것이 결국 우리의 구세주를 죽이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거예요. 이제 느낌이 오지요?
그렇다고 하면, 그 당시에 신의 지시를 따라서 성전을 만들고 이스라엘을 운영했던 자들이 곧 누구입니까? 유명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 즉 종교인들이지요. 종교란 인간의 사상의 극점입니다. 그 극점을 장악하게 되면 모든 걸 장악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간질병을 가진 사람을 주께서 고쳐주실 때 뭐라고 합니까?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보면,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쫓아낼 때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잖아요. 그런데도 진짜 오야봉, 진짜 귀신의 대장은 간질병에 걸린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인데,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말이죠.
진짜 잔챙이들은 게거품을 물고 나가지만, 진짜 악마에 의해서 심하게 장악된 사람들은 아주 냉정하게 예수님을 재판으로 잘 처리하고 일을 깔끔하게 정리한 거예요. 즉 "한 사람을 죽여서 나라가 살자" 라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게거품을 물고 나가지를 않았어요. 그냥 그들은 자기들이 할 도리를 했을 뿐이지요. 나중에 사도행전 2장에서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서 십자가를 끄집어내니까, 그제야 비로소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그렇게 나오죠.
결국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무리 게거품을 물고 병이 낫고 해도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구원은 근원적인 것을 경과해야되는 것이지, 즉 그 중심을 제대로 관통해야 되지 그냥 폼만 낸다고 구원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 두 번째는, 만남이 없어 !!
첫 번째는 신의 지시가 없다고 했고, 그리고 두 번째는 만남이 없어요. 만남이 없고 발생만 있는데, 만남이 없다는 말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 대 인간의 상호교류나 서로에 대한 관심사, 즉 '돌봄' 인데, 이것이 전도서에는 일체 없어요. 그래서 현대인한테는 전도서가 매우 멋집니다. 왜냐하면, 자기밖에 모르니까 말이죠.
◈ 세 번째는, 눈물이 없어 !!
그리고 세 번째는 눈물이 없어요. "운다고 별 일이 있나? 어디서 질질 짜고 그래, 그만 뚝!" 이라고, 그렇게 눈물이나 연민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아주 차갑고 냉정하고 냉혹해요. 우는 것 자체도 헛되고, 물론 우는 것을 참는 것도 헛되다는 겁니다.
◈ 네 번째는, 약속이나 보상이 없어 !!
네 번째는 약속이나 보상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미래가 없다. 희망이 없다" 라는 겁니다. 전도서에서는 일체 희망이나 미래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즉 "그냥 살다가 죽어. 좋은 나라는 기대도 하지마. 너는 좋은 나라를 기대할 권리가 없어" 라는 겁니다. 결국 그 동안 살아온 것이 곧 미친 짓이라는 걸 깨닫게 하는 것이죠.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쥐어박았지만, "그 쥐어박는 나나 너나 다 소용없는 짓이다" 라는 겁니다.
◈ 다섯 번째로, 신앙이 없어 !!
다섯 번째가 놀라운 이야기인데, 신앙이 없어요. 즉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하지를 않아요. 즉 "그냥 살아라" 라는 겁니다. "주여, 믿습니다. 사랑합니다" 라고 해도, "괜히 오버하지 말고 그냥 살아. 그 말에 내가 안 속아넘어가" 라는 겁니다. 제 아무리 "주여, 믿습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해도,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해"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전도서는 무엇인고 하니까, 육신의 문제를 영으로 풀려고 하지 말고 육신의 문제는 육신으로 풀라는 겁니다. "뭐? 살아가는 것이 괴로워? 그러면 술 먹고 춤이나 춰. 그것이 너에게 분복이고 축복이야" 라고, 그렇게 이야기해요. 지금 표정들을 보니까 전도서를 한 번 읽어보지 않고 온 모습들인데 말이죠(ㅋㅋ).
아무튼 제발 신앙생활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신앙을 생활한다고 해서 사람의 인격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점수를 더 주는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괜히 자기가 켕기는 게 있어서,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 저주를 적게 받는다든지, 벌을 안 받을 줄로 알고 깝죽대고 하는데, 신앙생활을 하나 안 하나 인간은 똑같으니까 신앙생활은 접어라는 말이에요. 그런 쓸데없는 짓이랑 하지 말란 겁니다.
여기서 덧붙여서 "제발 성화생활을 하지 마라" 라고 하는 게 전도서입니다. 성경이야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에요.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든 안 하든, 신앙생활을 안 하는 것도 역시 미친 짓이라는 겁니다.
◈ 여섯 번째로, 기적이 없어 !!
그 다음에 여섯 번째로, 기적이 없습니다. 전도서를 읽어보면 평범해도 너무나 평범해요. 전도서에는 기적이 없는데, 기적을 은근히 노린다는 것은 마음이 그만큼 음흉하다는 뜻이고, 그것은 그만큼 지혜를 모른다는 뜻이고, 그래서 어리석은 자고 악인으로 규정받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기적을 노린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보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처음에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이 세상에 인간은 없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볼 때는 육신으로 보기 때문에 말이죠. 우리는 자꾸만 인간답게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할 줄 아는데,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육신으로 돼야 될 목적이기 때문에 육신으로 끝나버리는 것이지, 그 중간에 인간이란 것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치장을, 즉 화장을 한 거예요.
◈ 화장을 고치고 !!
제가 하나 예를 들어볼게요. 인간은 육신이 먼저고 자아는 두 번째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자기 자신을 '나' 라고 지칭하는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기억 못하지요. 언제부터 '나'를 '나' 라고 인정했는지 호칭했는지 기억이 안 나지요. 우리는 "내가 언제 '나' 라고 했을까?" 라는 그 기억조차도 기억을 못해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지금 자기의 몸이 '나' 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걸 놓치고 까맣게 망각할 그때가 온다는 거예요. 벌써 온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3급을 받고, 어떤 사람은 2급을 받았는데 말이죠. 인간은 육신이 먼저지 자아는 나중입니다. 육신이 인간을 장악하지, 자기가 인간을 조정하고 관리할 입장이 못 돼요. 어디 말 뒤에 마차를 놓아야지, 마차 위에 말을 두면 그게 갑니까?
그러니 육신이 먼저고, 그 뒤에 인간이 죄를 지어서 자기 품위 유지한다고 갖다 붙인 것이 곧 자아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육신으로 다루는데, 우리는 뒤에다 엉뚱하게 붙인, 사실은 마귀가 붙인 것이지만, '자아' 라는 것을 붙여놓고는, 그 다음부터 육신을 자아의 자존심과 자아의 영광과 명예와 이름을 위해서 주님의 육신을 활용하려고 애쓰다보니까 그만 현실감이 떨어져요.
그렇게 되니 누가 힘든가 하면, 본인이 힘들어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육신에서 "이것은 나 자아의 것이다" 라고 할 것 같으면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고 하겠는데, 그런데 만나는 사람마다 전부 다 마차 위에 말을 놓고 "이 몸은 내 거야" 하니까, "그게 맞나?" 라고 하면서, 그렇게 서로가 다 틀린 것을 모르고 같이 사니까, 서로가 맞다고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 드디어 '지혜'를 끄집어내는 인간들 !!
그런데 거기서 인간들이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이제 본격적으로 중요한 대목에 들어갑니다. 거기서 인간들이 '지혜'를 끄집어내요. 그렇게 인간들끼리 자기 생활에 필요한 지혜를 끄집어 내다보니, 진짜 지혜의 경우에는 "헐~ 뭐야? 이거!" 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들 저희들끼리 "이것이 인간답다. 이것이 인간의 고상함이다. 인간의 철학이다" 라고 자기들끼리 어떻게 해놓고는, 그것을 하나님에게 인정해달라고 결재를 부탁하니, 하나님께서 그걸 인정하시겠습니까? 당연히 거부해버리죠. 그 거부한 모습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을 판단해서 죽이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당하다고 판정을 내리는 것인데, 그런데 뒤에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리라" 라고, 그건 성령의 객관적 사역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 나오는데 말이죠.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자기 주제파악도 안 된 상태에서 아무리 지혜를 이야기하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붙어있는 자아를 자기 힘으로 살려내겠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거든요. 살아있을 때 행복하게 살고 죽어서 천당에 가겠다는 것은 누구의 아이디어입니까? 도대체 누구 생각이에요? 그게 다 자기 본인의 생각이에요.
그러니 그 자체가 전혀 지혜가 아니에요.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에라 인간들아, 어디 그런 미친 짓을 하는가?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 라고, 즉 그런 짓을 하는 것조차도 헛된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전도서를 안 보잖아요.
◈ 싱크대에 물때가 끼어있으면 식초로 닦아주세요. 아멘 !!
인간들끼리 이야기하는 지혜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고 하면, 예를 들어서, 싱크대에 물때가 끼어있으면 식초로 닦아주면 된다고 하는 것, 그런 것이죠.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 모두가 다 솔깃한 거예요. 저만 그런가요?(ㅋㅋ) 그리고 여러분에게 솔깃한 것들을 다음과 같이 제가 적어왔는데, 특히 여자 분들에게 말이죠.
삼겹살 671, 삶은 계란 78, 양념치킨 219, 팥빙수 400~988, 프라이드치킨 268, 삼계탕 1030, 닭볶음탕 201, 순대국 114, 소갈비 찜 124, 자반고등어조림 207, 오징어 대친 것 60, 라면 525, 떡볶이 226, 김밥 484, 비빔냉면 405, 물냉면 445, 순대 235, 쫄면 458, 김치만두 34, 이게 뭔가요? 각 음식의 칼로리를 계산해놓은 겁니다. 김치만두가 제일 적어요.
이런 게 사는 지혜예요. 이런 것을 말하면 여러분은 '아멘' 라고 해야돼요. 우리는 여기에 매여 살아요. 우리에게는 지금 이런 것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살아가는데 이런 것이 중요하지, 무슨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고 하는, 그런 "모든 것이 다 헛되다" 라고 하는 소리를 왜 듣습니까? 우리 인간의 품격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데 말이죠.
"최초 계약 7년 만기 후 5년마다 갱신되는 상품으로, 갱신을 통해서 최대 86세까지 보장이 가능하며, 갱신 계약의 보험료는 갱신일 현재 피보험자의 나이 및 보험료율에 의해서 인상이 될 수 있습니다. ○○○ 무배당 OK 실버보험" 라고 하는, 이게 지혜입니다. 우리는 다들 이렇게 살아갑니다. 성경이 왜 필요합니까? 이런 게 필요하지 말이죠.
그러니 기적은 없다는 겁니다. 뭐가 기적이냐 하면, 자기가 기적을 원하고 기적을 받았다는 그 자체가 헛된 것을 알 때 그것이 곧 기적입니다. 즉 "참 헛된 인간이 헛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꼴을 봐라" 라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발견합니까? 성령이 아니고서야 발견할 재주가 없잖아요. 우리는 'OK 실버보험, ○○○보험'이나 쳐다보고 있으니 말이죠.
◈ 일곱 번째로, 진리가 없어 !!
그 다음 일곱 번째로 전도서에는 진리라는 게 없습니다. 진리가 없다는 말은 무엇인고 하니, 전도서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이 신에게 묻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에게 질문할 권한이 없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아담아, 어디 있느냐?" 라고 묻지요. 성경에 모든 시작은 질문자가 따로 있는데, 우리가 질문을 하면 안 돼요.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신에게 질문한 건 뭐냐 하면, 그걸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왜 우상숭배가 되느냐 하면, 사람이 누구한테 질문할 때는 상대방을 위해서 질문한 것이 아니고, 질문자 본인을 위하여 질문하기 때문에,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우상숭배 앞에 반드시 붙는 게 있어요. 항상 '자기를 위하여' 라고 말이죠. 자기를 위해서 신과 거래와 협상과 타협에 나서는 것, "이 정도를 바치면 복을 주겠습니까?" 라고 노리는 것, 그런 것이 전부 다 우상숭배예요.
이 전도서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여주기 때문에, 진리가 없는 이유가 뭐냐 하면, 즉 "너는 진리를 알 필요도 없고, 진리냐 아니냐는 내가 정하는 것이지 네가 정하는 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리가 무엇인지 정해버리면 우리는 안 진리를 가지고 자기를 살려내는데 요건으로 집어넣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과 빌라도가 만났을 때 빌라도가 건방지게 예수님한데 질문을 했어요. "진리가 뭐냐?" 라고 말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답변을 안 해줬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진리를 앞에 두고 진리가 뭐냐고 묻는 것은, 진리가 입을 열고 진리를 이야기해줘도, 그 사람은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고 진리를 엉뚱한 데서 찾고 있단 말이죠.
다시 말해서, 이미 진리가 자기 앞에 있는데 새삼스럽게 진리가 뭐냐고 물으면 그건 답변을 못하지요. 마치 자기 아버지가 앞에 있는데 자식놈이, "아버지, 아버지가 누구십니까?" 라고 묻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것은 어떻게 답변을 못하는 겁니다.
◈ 여덟 번째로, 도덕이 없어 !!
여덟 번째는 도덕이 없다는 겁니다. 착하게 살기, 바르게 살기 등등, 이런 게 없습니다. 그냥 자기가 사는 자리에서 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그 양태, 그 모습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 모습을 전도서가 너무나 잘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즉 "네가 아무리 착하고 바르게 살더라도, 그 착함이 결국 너한테 유리하도록 작용하는 노림수로 착해봐야, 그 착함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용하는 것밖에 안 된다" 라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큰 교회에 아이들을 보내는 것은 큰 교회를 이용하는 거예요. 오다가 그 이야기 들었는데, "큰 교회에서 누굴 만나겠는가?" 라는 겁니다. 전도서에 만남이 없는데, 만남이 없으니까 그저 이용만 있는 거예요. 어떻게 상대방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용할 것인지, 그것만 있는 거예요. 그러니 친구도 역시, 전도서에는 친구가 없어요. 누구 좋으라고 친구냐는 겁니다. 그 사람이 친구라고 언급할 때는, 친구가 될 때 유리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로소 친구라는 말을 했다는 겁니다.
◈ 아홉 번째로, 이상국가가 없어 !!
아홉 번째가 뭐냐 하면, 이상국가가 없어요. 즉 "하나님의 뜻대로 조찬기도회를 하면서 나라를 이렇게 운영하게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기독교국가 될 것이다. 복음적 국가가 될 것이다" 라고, 또는 "교회를 이렇게 하면 온전하고 이상적인 교회가 될 것이다" 라는, 이러한 꿈은 전도서에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지상에 어떤 희망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국가라든지 사회라든지 가족이든지, 어떻게 보면 하나로 크게 모인 것 같지만, 인간들이 그런 이상국가를 기대하지만 그 이상국가의 주인공이 본인 말고 다른 사람이 되게 되면 그 국가를 탈퇴하게 돼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단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마을도 마찬가지고, 가정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항상 주도권자 중심에 본인이 끼어 든다는 겁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본인의 자리를 그런 식으로 확보한다고 하는데, 만약에 지장이 있다면 탈퇴하게 돼있습니다. 즉 나라가 자기 원대로 되지 않으면 우리는 이민 갈 생각을 항상 갖게 돼있어요. 북한에서 인민들이 만족할 수 없으니까 탈북을 하고, 그렇게 탈북을 했다가 남쪽에서 살기 어려우니까 다시 북으로 가서 평양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말이죠. 그라고 그 사람이 또 내려오는 겁니다.
◈ 열 번째로, 부러워할 사람이 없어 !!
오랜만에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열 번째로 뭐가 없는고 하면, 부러워할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지만 본인한테 물어보세요. 전혀 안 크다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런 부러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저 사람처럼 됐으면 좋겠다" 라고 하지만, 막상 돼보세요. "역시 내가 살아온 이게 나한테 맞다" 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 정리하면, ① ② ③ ④ ⑤ ⑥ ⑦ ⑧ ⑨ !!
다시 정리하면, 전도서에는 먼저 신의 지시가 없어요. 두 번째로 만남이 없습니다. 세 번째로는 눈물이 없어요. 네 번째는 약속이나 희망이 없어요. 물론 보상도 없고 말이죠. 다섯 번째로는 신앙이 없습니다. 여섯 번째는 기적이 없어요. 일곱 번째는 진리가 없습니다. 여덟 번째는 도덕이 없습니다. 아홉 번째는 이상국가가 없습니다. 열 번째는 부러워할 사람, 즉 모델로 삼을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럴 것 같으면 하나님 말씀을 왜 믿는가? 안 믿지" 라고 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뭐냐 하면, "믿지마. 지금 전도서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서를 읽어보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이 있다고 하는, 그런 제발 되도 않는 소리는 하지마. 누가 믿으래?" 라고 하는데, 그래서 신약에 와서 구원받은 사람은 주께서 골라서 천국에 보내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바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처소를 마련해놓고 통보가 가면 그 사람 처소가 하늘나라에 있고, 반면에 통보가 안 오면 맨 날 통보를 기다리다가 지옥에 간다" 라고 하셨는데, 그 통보가 뭐냐 하면, 곧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할 때 예수님께서 오지 말라고 했어요. "가봤자 네 자리 없다. 내가 가서 처소를 마련하게 되면 그때 널 부를게" 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만약 제가 베드로 같으면, "통보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물었지 싶은데, "통보가 없으면 네 자리도 없는 줄 알아라" 라고 되겠지요. 그러니까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자리가 마련돼 있다. 통보를 해준다" 라고 할 때, "만약에 통보가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라는 질문을 인간이 하나님께 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통지서가 왔다고 하면, 그 통지서가 온 사람의 특징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런 특징이 뭐냐 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인데, 그게 곧 "주여, 나는 기껏해야 나밖에 모르는 육신이었습니다. 나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저 육신이었습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죄를 정하사 육신으로 온다" 라는 그 사실을 성령을 통해서 깨달을 때, "아하, 내가 주님을 이용하고 믿고 할 입장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되기 위해서 나를 철저하게 이용했는데, 이렇게 나를 이용당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그렇게 끝나는 거예요.
성경이 이렇게 무섭고 겁나는 문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기에, 즉 "말씀대로 지켜서 영광을 돌리고 구원을 받겠다" 라는 시도는 다 우상숭배에서 나온 우리 인간 본성에서 나온 발상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 전도서에 있는 것들 !!
그 다음에 전도서에 없는 것만 있냐 하면, 그게 아니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참 반갑지요. 첫 번째로, 허무가 있어요. 두 번째로, 죽음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심판이 있습니다. 네 번째로, 끝이 있습니다. 계속 들어봐야 우리 좋은 것 하나도 없습니다.
다섯 번째로, 흔적이 있습니다. 인간이 사는 것은 미친 짓인데, 그게 중요한 것은 육신의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여섯 번째, 차이가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의 차이가 말이죠, 일곱 번째, 육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마지막 여덟 번째인데, 왕이 있습니다.
여기서 전도서 1장 1절만 봅시다.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이라고 되어있는데, 즉 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은 그냥 궁예나 왕건, 이성계와 같은 왕이 아니고 예루살렘의 왕입니다. 각별한 지점, 특별 지점의 왕이란 겁니다. 그 왕은 독점해있는데, 뭘 독점하느냐 하면, 헛되다고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 제대로 헛되다고 이야기해주신 그분의 심정을 반영하고 펼쳐 보이는 겁니다.
그 왕이 지혜를 주시고 그 지혜대로 사건이 벌어지게 되면, 그 지점이 하나님과 인간이 접선이 가능한 연결지점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이 됩니다. 바로 그냥 왕이 아니고 예루살렘의 왕이 외치는 지혜,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전도자, 즉 전도자가 전하는 '전도서'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예루살렘의 왕이 있음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없음은 반드시 그대로 진행이 됩니다. 그러니 그 왕이 허무하다면 허무한 거예요. 우리는 더 이상 군말하지 맙시다. 다만 우리가 믿을 것은, 남이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의 왕이 되신 분이 허무하다면 그것은 허무한 거야" 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사람은 왕이 주신 지혜를 증거하는 용도로서 이미 그 안에 편성되고 편입이 되어있는 입장에 서있다는 말입니다.
10분만 쉬고 하겠습니다.
2013,9,18 다시 정리함 - 녹취 '구'
첨부파일 : 13여름십자가마을수련회-끝(전도서)(13,7,28~30)(총9강)(강의정리)--재정리.zip (464.7K), Down:24
구득영(IP:203.♡.97.152)
13-10-03 22:46
여름이 다 지나고 가을에 은혜를 받네요.
전도서에 이런 비밀이 다 있다니,
솔직히 점점 두려워집니다.
강의하신 이근호 목사님과,
녹취하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