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130913b-히3장16절(완성된 안식)- 이 근호 목사
안양130913b-히3장16절(완성된 안식)- 이 근호 목사
이름 : 공은주(IP:218.147.193.179)
안양130913b-히3장16절(완성된 안식)- 이 근호 목사
40년 하겠습니다. 40년의 의미가 뭐냐 하면, 결론부터 이야기할게요. 40년이라 하는 것은 죽음에 갇혀 있는 세상을 숫자로 표현한 거예요. 세상은 닫혀있고 세상은 끝이 있고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시간이 길게 해봐야 결국은 40년 밖에 안 되는 거죠. 광야 40년이 뭐냐 하면, 어떤 의미가 있느냐, 애굽을 대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 사실은 애굽을 대표하는 하나의 사람이라 보면 돼요. 그 사람들 다 죽이는 기간이 광야에서 40년이었습니다. 다 죽이는 기간이. 그리고 그들이 원망했으니까 40년 동안 다 죽이거든요. 그런데 원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곧 이세상이 죽어야 될 이유하고 같은 이유가 되는 겁니다.
40년이라는 것을 풀이하는데 있어서 구약의 광야 이야기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고난 받았지요. 시험받았지요. 40일 동안 시험받는다는 것은 이세상이 전부 다 죽음이라고 했을 때에 왜 죽을 수밖에 없는가를 누가 와야 드러나는가 하면, 예수님이 와야 예수님이 광야에 40일 동안 있어봐야 그 40일 동안에 이 세상은 왜 죽을 수밖에 없는가가 드러납니다.
첫 째는 돌이 떡 되게 하는 거고, 관심사가 먹어야 산다는 것. 그 다음에 기적을 원하는 신의 기적과 그것이 뭐냐 하면, 뛰어내리니까 부딪혀서 안 죽지요. 역시 또 사는 문제. 그 다음에 세상부귀 영화를 누리면 그게 사는 이유와 목적이 된다는 것. 죽어야 될 세상을 마귀는 사람 살만한 적합한 세상으로 전환하는 이것을 가지고 죄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죄.
이 세상을 죽음으로 세상을 바꾼 것은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흙이 되라고 죽으라고 갔거든요. 만약에 이 세상이 사는 세상이라면 생명이라는 것이 양쪽 다 나누어져 버려요. 생명나무도 사는 게 되고 그것 말고 따로 지상에 사는 게 있어버리면 미쳤다고 생명나무 따먹을 필요가 뭐가 있어요. 이 땅에서 사는데. 생명나무가 생명나무 되기 위해서는 이 땅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도드라지게 드러나야 돼요. 그게 드러나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은 살려고, 살려고 해보다 결국은 죽음한테 모이는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이 역사 속에 자식 낳고 죽고 자식 낳고 죽고, 얼마 살았다가 죽었더라, 얼마 살았다가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나온 겁니다. 그렇다면 살았다는 어디와 연결되느냐 하면, 언약과 연결됩니다. 에녹은 안 죽었잖아요. 에녹은 노아와 연결된 사람이에요. 노아 언약과 연결됐기 때문에 산거예요. 그래서 살아있다는 것이 정상이 아니고 기이한 것이고요. 죽는다는 것은 당연한 마땅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현실을 볼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잠시 살게 하시는구나! 죽음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잠시 살게 하시는 쪽으로 보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죽으러 오셨잖아요. 죽으러 오셨는데 마귀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수야, 돌이 떡 되게 하라.” “나, 그냥 죽을란다.” “예수야, 뛰어내리면 안 다쳐.” “나, 그냥 죽을래.” “세상에 나한테 절하면 이거 다 줄게.” “그냥 죽을래. 나는.” 이것이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그리고 사람이 사는 것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이 환경이 중요한 거예요. 이것을 그대로 흉내 낸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나는 이런 고백을 해야지, 라고 해서 나만 사는 것이 아니고 어차피 우리는 주변 환경에 휘말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 그러면 40년 해봅시다. 구약을 설명할 때에 구약의 의미는 정답은 구약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 하면, 계속해서 밀리기 때문에 신약 쪽으로 멈추지 않고 쭉 밀려요. 컨베이어 시스템 있지요. 선반인데 죽 움직이게 되지요. 자동차 회사나 간장회사 보면 병 놓고 간장 넣고 뚜껑 닫고 자동화 생산되지요. 제약회사나 또는 모든 공장에서는 이 시스템이잖아요. 구약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밑이 움직여요. 어디로 움직일까요? 신약으로 움직이죠.
그림으로 그릴 테니 어느 것이 맞는지 보세요. 구약이 신약과 만나서 예수님을 만나서 신약세대에 완성이 되었다. 따라서 이 세상도 예수님을 만나면 완성된 세상이 된다. 할 때 구약이 예수님을 만나면 완성이 된다, 맞지요. 그런데 이 세상이 예수님을 만나면 완성이 된다. 이게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이건 안 맞아요. 왜냐 하면, 요 구약 안에 사실은 이 세상, 저 세상 같이 다 들어있습니다. 다 들어있는데, 밖에 보이는 껍데기는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부딪기고. 여리고성? 실제로 있어요. 다윗 왕? 실제로 있는 사람이에요.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다윗 왕이 실제로 있는 인물이라고 밝혀졌어요. 실제로 있는 겁니다. 고고학이 그렇다고 해서 그런 건 아니지만. 실제로 홍해 있고 지명 있고 다 있어요.
있는 것 안에 뭐가 숨어져 있는가 하면, 장차 올 하늘나라는 그 안에 숨어졌는데 이게 보이질 않네요. 그걸 예수님의 마태복음13장 비유에서는 이를 뭐로 보느냐 하면, 누룩이라고 봅니다. 누룩. 누룩이 어느 지점에 있습니까? 누룩은 어느 지점에 있는 게 아니에요. 온통 골고루 퍼져 있는데 그게 작용하니까 빵이 전체적으로 부풀지요. 그러니까 구약에 있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영 또는 여러 가지 구약 이야기, 생명 이야기할 수 있거든요. 오게 되면 이 구약이 두 개가 가면서 두 개로 분류되게 돼 있어요. 자기 속성에 따라서 분류되는 겁니다.
땅이 있잖아요. 땅은 뭐가 되느냐 지옥이 돼요. 그러니까 땅에 살던 사람들은 뭐냐, 지옥 백성이 되는 겁니다. 너희들이 배나 지옥백성 만든다 하잖아요. 이것이 콘베이어에 구르다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구약 안에 들어있는 하늘나라 이 분은 지옥으로 같이 갈 일은 없고, 주님은 음부에 갔지만 사흘 만에 살아났으니까. 구약에 있는 하늘나라는 이 사람들 어디 갔느냐 할 때, 요 지점에서 천국과 지옥이 나눠지는데 이곳에 음부가 있어요. 음부에 집결했다가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실 때 이들이 같이 여기서 따라 올라 갑니다.
그러니까 요 갈림길, 갈림길을 주목해야 된다 말이지요. 올라가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 밖에 없어요. 구약에서 예수님만. 예수님과 관련된 영이 구약에 눌러 있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부활할 때 같이 따라 올라가게 되면 구약은 예수님한테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광야 40년 있잖아요. 광야 40년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면, 요 갈림길에서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거기서 내가 온 것은 죽으러 오셨다는 그런 취지로서 시험을 받으시거든요.
마귀는 뭐냐, 돌이 떡이 되게 해서 살고 봐야 되지 않겠느냐, 천사가 내려와서 너를 살려줄 거야, 자꾸 사는 쪽으로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40일 동안 시험받으면서 요게 정답이에요. 정답을 다시 구약으로 들어가서 거꾸로 소급해서 이제 여기서 해석을 해낼 수가 있어요. 정답은 이미 아니까. 그럼 정답 안다면 구약 전체는 뭐냐, 하나의 문제지가 되는 거예요. 원래 문제지 뒤에 해답은 따로 나와 있잖아요. 앞에 문제만 있고. 성질 급한 애들은 마무리 정리한다고 해답보고 하지만.
구약에 있어서의 우리가 해답을 낼 수가 없는 이유는 우리는 구약에 있으면서 구약의 모든 걸 가지고 살고자 하기 때문에 해답이 안 나옵니다. 하나님 요거 지키면 삽니까? 십계명 지키면 삽니까? 항상 끝에는 뭐냐 하면, 어떻게 하면 삽니까? 어떻게 하면 천국 가서 삽니까? 항상 삽니까? 로 해버리니까 주님께서는 예수님 빼놓고 다 죽여 버려요. 사실은 예수님도 죽지만. 예수님 빼놓고 다 죽여 버려요. 왜? 의는 없나니 하나도 없고 그들이 범죄를 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은 자기 생각밖에 몰라요. 니 사정에 어떤 관계없이 내 영광이 되지 못한다면 너는 좀 죽어 줘! 저주 받아 줘! 이거에요. 니 저주받는 것이 내 영광이라면 나는 너에게 저주하겠다는 거예요.
40년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노하셨잖아요. 그 노함이 노함의 전부가 아닙니다. 진짜 노함은 십자가에서 자기 아들을 버릴 때 그것은 죄에 대한 노함에 대해서는 나는 어떤 흥정이라든지 양보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거예요. 죄? 없어. 죄?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봐주는 거 없어. 분명히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았지만 대신 죄를 졌다는 그 죄 때문이라도 주께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버려두신 거예요.
광야 40년은 뭐냐 하면, 인간이 원망했다는 것이고 원망할 때는 “우리는 이런 식으로 못삽니다. 하나님. 하나님이라도 못 살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이런 원망 때문에 그들은 다 죽었고 사실은 갈렙과 여호수아만 빼놓고. 사실은 애굽에서 나온 사람 다 죽이고. 새로 나온 사람들은 애굽의 경험 안하고 만나 먹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만나 먹고 반석에서 나오는 물먹고 그런데 반석과 만나는 이게 어디에 상주해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만나가 여기서 한 5키로 쯤 가면 만나 덩어리가 있는 게 아니고 항상 만나는 없어요.
그래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이 살리는 방식은 없는 데서 있게 하기입니다. 그럼 우리가 여기 있다면 우리 속에는 없었던 내가 없는 것이 있게 함으로서 우리가 살게 된다면 우리는 항상 나는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일하심을 보여주기 위한 이유만으로 우리는 여기에 있어야 될 사람, 요런 사람을 새롭게 생산합니다. 40년 동안. 40년은 사람들을 조지는 동시에 새로 살 사람들은 원래 너는 없어도 되는데 내가 일부러 너를 있게 만들었어. 라는 것을 알아야 될 사람들은 여기서 40년이에요.
그래서 이 사람들은 그럼 누가 우리를 만들었습니까? 할 때 그 없는 것이 너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없는 것인데 보고 싶습니다. 없는 걸 봐버리면 있는 게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방식은 있더라도 없는 걸로 치고 있게 하는 기구를 만들었어요. 참 복잡하다. 있는 데도 불구하고 없다고 여겨라. 그걸 뭐냐 하면, 바로 ‘언약궤’입니다. 분명히 있는데 사람들은 구경하면 안돼요. 분명히 있는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제사장 밖에 못 봐요. 그렇다면 없음이 있겠지요. 없는 게 있잖아요. 없는 게 있는데서 솔솔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용서가 나와서 짐 밖에 있던 텐트밖에 있던 사람들, 텐트 안 친 사람들, 전부 다 살려내는 그렇게 해서 살아난 나라가 하늘나라, 그들은 이동할 때 약속의 땅 들어갈 때, 뭘 앞장세웁니까? 언약궤를 앞장세워요.
없었던 분이 우리를 있게 함으로 우리도 역시 이 땅에는 없는 민족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는 없는 민족입니다. 투명인간 같은 민족입니다. 그러나 다른 민족은 “에이, 다 보이는데. 아이 씨~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처럼 본인은 투명한 옷을 입었다 하지만 우리보기에는 벌거벗었어.” 이런 식으로 얼마나 놀리겠어요. “그래, 너희들은 우리를 무시해라. 너희 눈에는 언약궤 안보이지.” 하고 언약궤 들이대고 여리고성 들어가니까 여리고성 사람들은 언약궤 의미를 모르고 다만 저 인간들 왜 저리 뺑뺑이 도나, 어지럽게 만들어서 치려고 하나? 이리 하지요.
언약궤 앞장세울 때, 있다고 하는 나라가 없어진 겁니다. 두 번 다시 여리고성을 사수합니다. 있다고 여긴 것을 없애버리고 없다고 여긴 자만 있음을 만드는 대반전, 대역전, 그것이 바로 광야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40년이라 하는 것은 신약의 예수님의 40일과 견주어 볼 때 이 세상은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죽음에서 어느 인간도 단 한명도 빠져나가지를 못한다는 것, 따라서 기존의 있는 인간을 살리지 않고 없는 분이 살려내는 인간만 내가 안식의 나라에 간다고 한 거예요.
그 없는 분이 누구겠어요? 예수님이죠.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자진해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없는 분으로 그걸 예수님은 언약의 완성,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방금 한 이야기가 어디 나오는가 하면, 4장 10절에 나옵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이리 되어 있지요. 여기에 보면 안식이라고 해놓고 하나님께서 일을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마무리한 일에 참여된 사람이 있었다는 겁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런 분들이겠지요. 구원받은 성도들, 나중에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나오잖아요. 믿음의 조상들 죽 나오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누구 일입니까? 그건 자기 일로 구원 받은 게 아니고 누가 일했다? 하나님이 일하신 거예요. 어떤 차원에서? 안식의 일을 하신 거예요. 결국 안식이 들이닥치면 그걸 믿음이라 하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하고 보지 못한 것의 증거지요. 믿음은 이미 일을 다 이루었습니다. 라고 믿는 게 믿음이라는 거예요. 히브리서에서.
내가 노력한다고 들어가는 게 아니고 이미 이루어졌기에 주의 일의 차원에서 우리는 그 나라의 참여됐을 뿐입니다. “이리 와! 이리 와!” 자꾸 당기는 식으로. “니는 내가 없는데서 만든 백성이야. 이리 와!” “그 쪽이 아니고 얘가 왜 이러나 또.” 매일같이. “주여, 돈 많이 벌었습니다.” 하면 주님께서 “그 쪽 아니고 왜 이러나 광야에서 왜 이래? 너는 돈 있으나 없으나 이쪽이야. 안식의 백성이야.” 라고 이끌 때 그걸 믿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걸 불순종 있을 수가 없어요. 불순종 우리가 할까 말까가 아니라 이미 그런 믿음이 와버리면 우리는 그 안식 다 이루었으매 기쁨으로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려도 안돼요. 니 예수 믿지 마라. 나 예수 안 믿을게. 말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여기, 예수 믿는 사람 취직 안 시켜 줍니다.” “저요, 저요, 저 예수 안 믿어요. 절에 가요.” 손 들으란 말이지요. 그게 무슨 의미 있어요. 그게. 그들이 하는 질문을. “예수의 얼굴을 밟으면 배신자인 줄 알겠다.” “내가 예수의 얼굴을 밟겠다.” 다 이루었는데 새삼스럽게 주님이여, 밟는 걸 용서하옵소서. 그러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그대로 지고 가는 거예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백날해도 여전히 안은 찝찝해. 천안에서 호두과자를 보내줬으면 그냥 먹으면 돼요. 이게 호두가 몇 개 들어있는가, 썩었는가, 아닌가, 철 지난 건 아닌가, 에이~ 철 지난 것도 먹고 죽지 뭐. 그냥 주신 거 먹듯이 하루, 하루를 먹읍시다. 거지처럼. 만나다! 오늘 하루도 만나해가지고 그냥 먹고 그 일 자체가 하나님은 자기의 안식의 일에 연장선으로 보는 거예요. 우리가 설쳐대는 것을. 우리가 까불고 설쳐대는 것을 그것도 안식으로 보는 거예요. 어이! 김 안식. 그것도 안식으로 보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잘 한 게 뭐가 있어요? 없어요. 다윗도 마찬가지고. 다 마찬가지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안식으로 자기 일을 쉬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일을 마치고 안식에 갔다는 말은 처음부터 그 일 한 그 일도 어디서 나온 일이다? 다 이루었다, 에서 나온 일이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자리가 아니고 그 쪽으로 고무줄처럼 튕겨서 가버린 거예요. 태어난 것도 주의 안식의 일이기 때문에 태어난 자는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 받기 전에 죽었다면 그 애도 그냥 안식으로 가버린 겁니다. 그것은 둘 다 다 같이 갓난애인데, 하나는 천국가고 다른 하나는 지옥 갑니까? 주님께서 그건 내 맘 대로다. 왜? 어떤 이는 저주할 권리가 있고 어떤 이는 구원할 권리가 있고. 그 일은 이미 십자가로서 완료됐어요. 다 이룬 거예요.
그 안식을 보여주기 위해서 광야 40년 동안 다 죽어야 되는데 만나를 솔솔 뿌리는 겁니다. 그리고 안식일 날은 뭐가 없습니까? 만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나는 없어요. 떡으로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니가 갈 세상은 떡으로 가는 세상이 아니고 만나도 없어요. 그 다음 날 또 다시 만나 주시고. 그러면서 40년 이란 세월을 보내게 하시는 겁니다. 40년 세월이 구약 전체에요. 뭔가 떠나야 될 질서와 새롭게 낯선 질서가 겹치는 대목이 40년이에요.
그래서 40년 이란 말은 뭐냐 하면, 40년에 예수님이 참여함으로서 예수님이 그걸 40일 우리의 실상을 세상 실상을 보여주는 예수님. 예수님과 겹치는 점에서 이 역사는 언약 적으로 의미 있다 이리 보면 됩니다. 이 세상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은 주님이 이 세상을 다녀갔다는 점, 그 뿐이에요. 내가 여기 산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런 노래 그런 시들이 많이 있거든요.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내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하는 그런 가사가 있어요. 그건 잘못된 겁니다. 데카르트라는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 취지가 어디 있는가 하면 국가가 필요 없다. 그런 뜻입니다. 국가가 나한테 뭐해줬다고? 국가 니가 뭔데? 전에는 신분사회이기 때문에 국가라는 것을 위해서 우리는 자기 적재적소에 자기 할당받은 자리가 있다고 믿던 시대였어요.
국가가 살면 너는 그 자리는 보람 있는 위대한 영웅이라는 겁니다. 조선시대에 어떤 여자가 있는데 열녀에게 만약에 데카르트의 이야기를 접목해 보면 나는 생각한다. 곧, 나는 존재한다. 사실은 그 전에도 이런 이야기는 있었어요. 소크라테스도 이야기했어요. 나는 모든 걸 의심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플라톤도 그런 이야기 했어요. 그러면 그 여자가 그걸 알았다면 그 여자가 열녀 하겠습니까? 열녀 안하지요. 그 당시에는 신분사회기 때문에 열녀 해야 될 이유가 니 하나 고생하고 우리 집안 열녀 났다! 고거 하나 집안 명예를 위해서 니 하나 욕봐라. 이거거든요.
그런데 데카르트는 뭐라 했습니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집안이 뭐가 중요해요. 내가 중요하지요. 그걸 가지고 근대의 주체사상의 시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국가보다도 누가 더 중요하다? 나에게는 내가 중요한 거예요. 그것이 현재 전 세계에 모든 사상을 덮는 사고방식이 되었습니다. 종교? 예수? 기독교? 부처? 다 소용없습니다.
예수? 내가 나 되기 위한 보조 개념이지요. 내가 제일 중요하니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만큼 주님도 나를 중요시 여겨 달라는 그 요청.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슬슬 미워지지요. 데카르트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그 당시에 소위 예수 믿는 교회 있었잖아요. 교회가 예수님 하나님을 거론하는데 실은 교회가 딱 지만 챙기더라 하는 거예요. 자기만 챙기는. 그럼 민족들, 국가들 하는데 전부다 하나님 예수를 자기 민족, 자기 국가만 잘되기 위해서 도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예요. 그렇다면 더욱 더 세밀하게 쪼개서 마지막 남는 게 뭐냐, 결국은 국가와 민족보다도 역시 중요한 것은 사실상은 나는 날 위해 존재한다는 거. 왜 사람들은 이걸 진작 말 못했을까? 내가 외쳐야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생각하므로 나는 존재하고 있다. 신이 존재하는 게 아니고 생각하는 내가 이것이 존재하는 겁니다. 물론 신은 인정했지요. 신을 인정 안하면 잡아 죽이니까요.
자, 제가 데카르트 이야기를 왜 해드렸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것이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진노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드는 작업이 하나님의 안식을 위해서 필요했던 조치라는 것을 설명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본인이 노력해서 들어갈 수 없어요. 안식은 이미 예수님께서 마무리했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 덕분을 늘 쳐다볼 수 있을 때 그게 안식의 사람입니다. 어떻게 예수 믿습니까? 안돼요. 그러지 말고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없는 데서 있게 하는 작업이 나는 지금 못 느끼지만, 느끼던 못 느끼던 믿음으로 우리는 이걸 인정해야 돼요. 매일같이 오늘도 머리카락이 몇 개 빠졌다. 주께서 그렇게 일하신 거예요. 그러면 도대체 주가 개입안한 일이 전혀 없어요. 버스를 잘못 탄다든지 실수한다든지 어떻게 하든 모든 것도 전부 다 예수님이 개입된 일이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우리를 있게 만든 겁니다. 유리 만들 때 후~~ 불 때 그 파이프 뒤에 뿅 하고 동그랗게 피어나는 것처럼 지금도 후~부니까 우리 얼굴이 달덩이처럼 동그라니 피어나는 겁니다.
계속해서 보이지 않는 분이 우리에게 했는데, 그걸 보이지 않는 분이라고 하지 말고 언약궤가 가 있는 곳 곧 천국에서 이 지상을 향하여 계속 바람을 부는데 그게 성령의 바람입니다. 성령의 바람은 법이 아니고 아가서의 뭡니까? 사랑입니다. 법 안 따질게.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법을 어기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가 뭐로 바뀌었습니까? 구체적으로 예수지요.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럼 우리는 주님이여, 말을 확실히 합시다. 어느 쪽입니까? 법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는 이야기에요? 왜 자꾸 왔다 갔다 하십니까? 딱 집어 한 가지만 이야기하세요. 주님을 안 믿으면 저주 받는다는 이야기에요?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는 이야기에요? 법입니까? 주님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물으면 법으로 저주받는 것은 이미 다 저주받은 거고 법에 저주 안 받을 인간은 없어요. 율법을 주신 것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사랑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보조 장치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겁니다.
“괜히 쫄았어! 십계명 안 지키면 십일조 안 하면 저주 받는 줄 알았어. 괜히 쫄았어. 괜히 목사님한테 속아서 쫄았잖아.” 보조인데. 보조. 남자가 흰옷 입고 있어서 의사인 줄 알았지. 간호사던데. 괜히 쫄았어. 선생님해서 선생님인 줄 알았더니 가까이 가보니까 간호사야. 괜히 쫄았어. 선생님은 따로 있는데. 또 이리 이야기하면 간호사 폄하해서 사과해라, 사과해라하니 사과합니다. 교만한 게 아니고 제가 예를 든 겁니다.
그러니까 쫄았다는 말은 율법은 하라, 하지 마라, 하니까 갑자기 자기 솜씨를 발휘하고 싶은 충동이 이는 거예요. 내가 어느 정도 성화될 수 있는가, 법이여 오라! 한바탕 붙어보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미 40일 동안 시험받은 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마귀를 못 이깁니다. 돌이 떡 되게 하고 싶고 인기 있고 싶고 권력 갖고 싶고 못 이깁니다. 그냥 주님처럼 입장에서 살다가 죽읍시다. 살다 죽으면 죽어도 살겠고 그 말씀 있잖아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날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요 대목 이야기해보고 진도 나가 봅시다. 이미 생명나무가 지금 안식의 나라에 있잖아요. 그러면 생명이 여기에 안식의 나라에 특허를 받아놨어요. 생명은 다른데 쓰면 안돼요. 그런데 특허를 받지도 않은 가라가 가짜들이 우째그리 많은지 이렇게 하니까 삽디다. 칼로리를 낮춰서 똥배 빠지니까 더 삽디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니까 스기야처럼 기도하니까 15년 동안 삽디다. 15년 동안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가 묻는 건 방향성을 말하는 거예요. 우쨌든 간에 저쨌든 간에 하여튼 살고보자는 그 방향성이 문제라는 거예요. 이미 죽은 자에게만 그런 살고자하는 집착과 집념이 나오는 겁니다. 못 살았으니까. 생명을 모르니까. 어떻게든 더 살아보겠다는 거예요.
염병 고치겠다고 코에 호스를 꽂고. 허 선교사님은 그냥 죽었어요. 어제. 오늘 장례식에 가보니까 평소에 활동했던 아마존에서 TV촬영한 것, CBS에서 대담한 것하고 또 설교한 것 죽 틀어줬어요. 그래서 나는 죽어도 저런 거 안 틀겠다고 하고. 동영상 한 두 개가 아닌데. 안 돼! 안양강의 틀어주면 안 돼! 현실은 지금 없는 분이지요. 없는 분이라면 사실은 그 있는 시절을 틀어줄 필요는 없어요. 주께서 없게 만들었으면 다시 기억할 필요는 없는 거예요. 다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그 사람의 죄 짓는 것만 기억하면 돼요. 아브라함 죄 저지른 이삭 죄 저지른 그것만 기억하면 돼요. 왜? 처음부터 잘한 게 없기 때문에. 자칫하면 잘한 게 있는 것처럼 오해를 살 수가 있어요. 저 사람 저렇게 잘해서 구원받았구나. 이것은 십자가를 모독해도 아예 십자가를 철거하는 뽑아내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생명은 이미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데, 지상에는 뭘 만드는가 하면, 생명과 죽음을 두 개 다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죽음에서 어떻든 간에 무엇으로 달려간다? 생명으로 달려가기 위해서 노력해 버리면 그러면 이 하늘나라 생명은 뭐가 돼버립니까? 이건 꽝이죠. 꽝!
제가 어제 부시맨 이야기했던가요? 했지요. 콜라병이 떨어졌는데 주인 돌려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부시맨이 돌려준다는 방법이 기껏 한 것이 맨발로 먼 행랑을 차려가지고 자기가 평소에 지평선을 봤던 것 끝에 가서 거기서 뭐 드린다? 제사 드리는 거예요. ‘하나님, 콜라병 도로 드립니다. 이거 주인님이 잃어버렸는데 돌려드릴게요. 이 정도로 우리는 주인님 잘 챙깁니다. 절대로 함부로 안 썼습니다.“ 경비행기 운전사가 얼마나 웃었겠어요. 내가 먹다가 버린 콜라병인데. 그걸 신의 병이라고. 사람은 본질을 몰라요. 내가 어디서 왔으며 내가 누구며 왜 모든 인류가 있었는가, 그러니 우리 자신이 콜라병이에요.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걸 알기 위해서 신을 찾는데, 그걸 두 자로 ’제사‘ 예요. 제사 드리고 예배드리고 신 찾고 이게 뭐냐 하면, 어떻든 간에 죽어가는 나를 어떻게 살려보겠다 하는 시도, 요 생명도 죽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것은 첫 째 부활이 아니에요.
첫 째 부활은 생명나무에서 제공된 것이 첫 째 부활이고 제사는 첫 째 부활이 아니고 그냥 시도해보는 하나의 연출입니다. 조작된 연극이에요. 몸부림치는 거예요. 살아보겠다고. 이거 가지고 사기 치는 데가 교회와 성당이에요. 이래가지고는 살 수가 없어요. 성전이 오게 되면 간단합니다. ‘아하, 위에 있었잖아. 내가 무슨 짓하고 있었지? 위에 있잖아. 위에.’ 위에서 계신 분이 우리에게 거저주면 그게 생명이잖아요. 그럼 거저 줬는지 어떻게 아느냐, 거저 주는 믿음이 생기면 받은 거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거저 주신 겁니다. 내 인생요? 거저주신 겁니다. 이게 인간의 철학박사 한다고 서울대간다고 아는 겁니까? 원서 4군데 5군데 내봐야 몰라요. “엄마” “왜?” “원서 내고 왔는데.” “그래” “내 몸은 사실은 하나님이 주신 거야.” 이리 이야기한다면 그러면 “얘, 그 이야기 어느 학교에서 배웠어.” “학교에서 안 가르쳐줬어.” 학교에서 안 가르쳐줬으면 이건 외부에서 온 겁니다. 성령이 한 거죠.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때부터 안 믿는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고 이 이야기는 히브리서11장에 나옵니다.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고 톱에 켜인 것과 돌에 맞아 죽는 것과 왜 하나님께서 돌에 맞고 톱에 켜이는가 하면 너무 웃으니까. 너무 기분 좋아하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만. 너무 기쁘니까 좀 자제하라고 돌로 쳐버리는 거예요. 돌로 친다고 자제가 됩니까? 맞으면 맞을수록 오히려 더욱 더 기뻐하니까. “나를 때려! 그것 봐, 이 땅에서는 이런 생명, 죽음 이거 아무 의미 없잖아.” “이거 있잖아.” 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주는 겁니다. 이 히브리서가 보통 책이 아니지요. 히브리서4장에 나오지요. 우리를 완전히 벌거벗은 걸로 만들어놨어요. 우리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우리 어머니가 돼지 껍데기를 그리 좋아해요. 그래서 장날에 사는데. 나는 도저히 그 비계를 못 먹겠던데 어머니는 그걸 좋아하셔요. 비싸지도 않아요. 어쩌면 우리가 껍데기라서 그런가. 말도 안 되는 알레고리 다 나옵니다.
그래서 구약 자체가 알레고리라고 했어요. 성경에 보면. 신약의 사도들은 구약 자체를 알레고리로 사용하십니다. 광야, 애굽 막 난발해요. 그것은 실제로 구약 역사는 역사이면서도 신약에 오게 되면 그건 하나의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한 아주 멋들어진 장치였습니다. 주님 오게 되면 무대 장치도 이제는 그냥 장치였을 뿐이었었어. 라고 뜯어내면서 철거하면서 공개를 하지요. 이스라엘 백성, 하나의 너희들은 폼 잡는 하나의 등장인물이었었어. 하고 뜯어내지요. 그것도 모르고 우리가 율법으로 구원받는다 하면 그것은 지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바리새인들은. 마귀새끼들은 그렇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냥 안식일을 보여주기 위한 교육자제들 또는 연장 또는 도구, 그런 재료 이리 보면 되는 겁니다.
4절에 한 번 봅시다.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라고 되어 있어요. 자, 사람들은 물어요. 안 믿는 사람도 물어요. “목사님, 목사님은 성경 아시니까 물어봅시다. 분명히 하나님이 7일 만에 일을 끝냈지요?” “끝냈습니다.” “끝냈는데 왜 또 일하십니까?” 끝냈다며? 끝냈는데 여리고성은 왜 하고 공회는 왜 하고 왜 바쁘십니까? 끝냈다며? 아담 찾아오고. 끝냈다며? 그 질문에 대해서 교회의 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신학자, 철학자들은. 좀 납득하도록 설명하기 위해서 끝내시고 시계 테입을 감아 놓으면 저절로 돌아가지요. 이 세상은 하나님이 한 번 만들어 놓은 데로 저절로 돌아간다. 하는 이야기를 지금도 신학자들은 철학자들은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쳐요.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 없다? 개입이 없고 자연히 저절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 힘 다 빠지면 멸망한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노하심이라든지 심판주라든지 특히 제일 중요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리가 없잖아요. 처음 만들 때에 예수님을 보내시면 되잖아요. 처음 만들 때. 7일 동안에 마지막 6째에 예수님을 보내면 되는 거예요. 십자가에 지시려고. 마지막에. 6일 동안. 마무리하고 7일 날 자, 예수님까지 보냈으니까 나는 마무리 짓는다. 이래야 되는데 예수님의 포도원 비유 보면, 농부들에게 종들을 보내니까 죽였어요. 종을 보냈더니 또 죽였습니다. 이 마지막 때는 아들을 보내면 그들이 나를 공격하지 않겠느냐 할 때 아들마저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종 보내는 역사가 있지요. 또 종을 보내는 역사. 아들 보내는 역사, 합쳐버리면 이스라엘 역사되지요. 그럼 주께서 일하시네요. 종 보내는 일, 아들 보내는 일 하시잖아요. 그러면 안 끝났네. 끝났다며? 요거 설명돼야 되겠지요.
7일을 열대성 저기압으로 봅시다. 먹구름이 있는데 이 형성된 먹구름이 이게 이동하면서 계속 다른 지역에 큰 비를 내립니다. 비를 내릴 때, 땅에 있는 사람들은 구름이 이동했다고 보잖아요. 그런데 구름이 인간의 크기나 구름의 크기나 같은 크기라면 우리를 피해가려하면 구름도 바빠. 아이고 저 쟁거름 좀 봐, 왜 이리 빨라. 빨리 가서 비를 쏟아야지. 하겠는데 구름의 크기가 어떻습니까? 우리가 빨리 달린다고 달이 허겁지겁 따라 옵니까? 우리는 시속 100Km를 가도 달은 그 달이고 시속 1000Km가도 달은 그 달이잖아요. 헛걸음 백날해도 우리는 갇혀있는 거예요. 나중에 죄 짓고 난 뒤에는 죄에 갇혀있는 거예요.
믿음이 오기 전에 율법에 갇혀있다고 갈라디아3장 22절에 그리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그 다음에 23절 보면,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리 되어 있지요.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아래 매인바 됐다라고 할 때 믿음이 오기 전에 했지요. 그러면 믿음이 안 올 때가 있다 이 말 아닙니까? 그냥 예수 믿읍시다. 라고 나올 수 있는데 너무 어려워서.
믿음이 오기 전에 율법아래 매인바 되지요. 지금 우리가 하나님 그냥 건지세요. 골치 아프고 성경도 안 보니까. 성경도 보기 싫어. 그냥 건지세요. 이것이 전혀 믿음이 아니잖아요. 그건 믿음 아니고 뭐죠? 죄지요. 그러니까 아까 그런 질문 이런 질문 모두 문제가 뭐냐 하면, 이 먹구름이 있는데 이 먹구름을 우리가 밑에서 만들어내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7일 동안 창조를 했잖아요.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는 죄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이게 이해돼야 되는데. 7일 만에 만들어졌고 완성했기 때문에 죄도 만들어져야 되는 거예요. 완성했기 때문에 만들어져야 되는 거예요. 죄가 만들어져야 의가 만들어지고. 율법이 만들어져야 믿음도 만들어지고. 믿음이 만들어져야 모든 게 만들어지고.
어린애의 생일이라고 엄마한테 블록을 받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 재봉하는 것도 있고 부엌에서 요리하는 것도 있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처음 올 때는 엄마가 선물 가득하잖아요. 블록이니까. 그것 뜯어보면 작은 가스레인지부터 해가지고 조그마하게 들어있지요. 그럼 어린애가 뜯어서 자기 방에 요거는 부엌에 배치하고 조그만 인형은 조그만 캐비넷에 넣고 안방에 넣고 하겠지요. 왜 그렇게 합니까? 이미 선물을 받았으니까 하는 거예요.
죄는 여기에 놓고 율법은 여기다 놓고 이렇게 되는데 우리는 내가 살고 싶어서 착하고 싶어서 “하나님, 어떻게 하면 착합니까? 말씀 지킬게요. 나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출발점이 나부터 하는 거예요. 우리는 ”완성했는데 왜 죄인입니까? 완성했으면 주님께서 같이 해야지 왜 주님께서 나중에 오십니까?“ ”구원이 완성했다 해놓고 마귀는 설쳐대고 피곤하고 미치겠네. 정말.“ ”언제 나는 구원받아요?“ 매일 질문이 뭐냐 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게 바로 죄인 거예요. 바로 그 죄에서 우리는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 다 이룬 거예요. 그 죄를 죄라고 여기지 않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거룩하니까 우리는 멋있는 줄 알지만 율법이 주어져 버리면 하나님 믿고 율법 지켰다는 자들이 죄인이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처럼.
그래서 믿음이 오기 전에 라는 말은 우리 믿음이 생기기 전에 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란 뜻이에요. 예수님 오실 때를 믿음이 왔다는 거예요. 예수님마저 우리가 꾸며놓은 이 역사 속에 들어와 버렸으니까 처음부터 예수님은 믿음의 주지만 우리 역사 속에 들어와 버리면 율법 뒤에 오시는 분으로 간주가 되는 거예요. 우리의 역사적 개념에 입각해 보면. 그걸 방금 이야기한 것을 우리 생활에 지금 적용시켜 봅시다.
오늘 호두과자를 먹었다. 오늘 먹었어야 돼요. 오늘. 천안에서 왔다. 천안에서 보내야 된다니까요. 이게. 완성한 것이 온 것을 인정하는 걸 이걸 두 자로 ‘믿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방주를 만들어 내고. 방주를 만들도록 되어있어. 이게 노아고. 왜? 비는 오게 돼 있으니까. 이게 노아라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은 자기 쪽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아저씨, 배를 이렇게 크게 만들 필요 없는데. 우산만 있으면 되는데 왜 이리 만들지요?” 그들은 죄 속에 있기 때문에 모르는 거예요.
노아한테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니까 믿음이 미리 당겨서 노아한테 와버리니까 장차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 비슷한 방주를 만들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자기가 만든 건 아니에요. 언약이니까. 시키는 대로. 그리고 야곱에게 어긋맞게 하고. 이거 취미 아니에요. 아들이 있다가 “아버지, 자리를 바꿔드릴게요. 너무 어색하니까 바꿔드릴게요.” “가만히 있어. 요게 내게 맞아.” 어긋맞게. 이미 다 이루었다는 저 쪽 세계를 아직도 미완성이 남았다고 하는 이 쪽 세계를 표현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겁니다.
40년, 40일 이 세상이 죽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40년도 있었고 그래서 다 죽였고 40일도 있어서 그래서 마귀도 드러나게 만들고 우리는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긴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 그래서 40년, 40일 안식은 위에 있고 우리는 안식하지 않은 때에 있는데 우리가 이 땅에 믿는다면 그것마저도 이 땅에 침투된 안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믿는 사람들은 지금 하늘나라에서 푹 쉬고 있습니다. 어디가시더라도 같이 쉽시다. 우리 같은 하늘나라에 여기 안양에서나 어디서나 부르실 때는 한 곳에 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 고백 속에 엄청난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저 하루, 하루 살아가니까 은혜인 줄 알았는데 죽는 것도 은혜라는 사실을 사도바울은 이미 익히 알았습니다. 저희들도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이제는 말씀대로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안양130913b-3장16절(완성된 안식)- 이 근호 목사.hwp (62.0K), Down:14